소설리스트

추방되었던 마검사가 사실 파티의 기둥(물리)이었기 때문에 용사의 히로인들이 뒤늦게 매달려옵니다-74화 (74/506)

〈 74화 〉 무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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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태양빛이 커다란 창문을 통해 가감없이 들어오는 긴 복도.

붉은 휘장이 벽에 걸려 있으며, 같은 색의 카펫의 위를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붉은 머리에 작은 키. 푸른 눈을 가진 소녀가 길을 나아가면.

복도를 가리고 서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기겁하면서 옆으로 비켜선다.

소녀의 이름은 라일라 플레임워치.

아카데미에 입학한 시골의 평민 출신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귀족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마력량과, 천재라고 불리는 지능을 통해.

빠르게 학과 내에서도 이름을 알리고, 차석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다만 알려진 이름이라는 것이 평범한 `유명세`나 `명성`은 아니다.

오히려 `악명`에 가깝겠지.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쳐내는 듯한 까칠한 태도.

그 시선에 담겨 있는 주변을 향한 멸시의 시선.

물론, 대다수 학생은 그녀보다 아직 실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그런 태도가 주변에 용납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곳은 배움의 장. 아카데미.

모여 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아직 자아가 완전히 성립되지 않은 소년·소녀들.

다감한 시기의 그들에게 있어 여러모로 돌출된 라일라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였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던 남학생들조차.

불타는 눈길과 함께 화염 마법의 일면을 보이면.

알아서 줄행랑을 치고 도망친다.

마법과의 재적해 있는 학생들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연구자이거나, 연구자가 아니거나.

라일라는 물론 전자였다.

마법이라는 것은 본래 과거로 향하는 학문.

손에서 불을 만들어내고, 적을 태우는 것은 그 연구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견 된 몸을 지키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 본분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의 마법학과라 하더라도.

한 줌이 되지 않는 소수의 인원 뿐.

하지만 본래 마법사라는 족속은, 대대로 가문을 이어지면서 그 연구의 성과를 쌓아 가는 것들이고.

그 역사가 길면 길수록, 귀족으로서의 지위가 확립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마법학과의 연구자들은 대부분이 귀족 출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연구자 특유의 괴팍함과 생명경시, 그리고 귀족으로서의 엘리트주의가.

자신들과 분명 같은 부류인 라일라마저도, 자신들의 밑으로 보고 거절한다.

붉은 머리의 천재.

불의 감시자의 후계자 라일라 플레임워치가 학과 내에서 고립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상황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로서는 사정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관계, 처세술에 할애할 시간이 있다면 한 권의 책을 더 읽고, 하나의 논문을 더 조사한다.

학교의 12원로 중 한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의 조부를 무시한 노인네들의 코를 꺾기 위해서.

이번 생으로도 모자를 정도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12원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다.

그들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마법사로서의 위업.

`완전히 새로운 마법적 이론`의 발견이 필요했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자연계에 존재하는 상식 일부를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많은 마법사가 그 위업에 도전하지만, 수명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렇기에 최근에는 식사도 수면도, 마법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다.

`가불`이라고 하여, 몸의 부담을 미래로 보내는 마법은 조부가 살아있을 시절에는 강하게 금지 당했지만.

그가 죽은 지금, 옆에서 그녀를 말릴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고, 라일라 본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라일라~!"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평범한­…. 아니 조금 통통한 소녀가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나잇대에 어울리는 볼살이었고, 오히려 귀여운 인상을 주는 소녀이다.

"... ..."

하지만 라일라는 그런 그녀를 확인하더니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돌리며,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려 한다.

하지만 소녀는 뒤에서부터 라일라를 따라잡아 옆에 서고 가파르게 숨을 쉰다.

"하아... 하아...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실을 나가는 게 어디 있어?"

"수업이 끝났으니까 상관없잖아."

몸도 약한 주제에 복도를 뛰어 자신에게 다가온 소녀에게,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라일라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소녀의 이름은 베아.

베아트릭스라는 귀족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평민 소녀였다.

그녀의 조부가 이전 귀족이었지만, 무언가의 원인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이 이름은 조부의 마지막 부탁으로써 지어진 이름이다.

라고,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관심도 없는데 떠들던 것을.

라일라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 번 들은 것을 기억해 버리는 것은.

그녀로서도 그다지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라일라, 점심은 늘 혼자서 먹고 있지? 오늘은 내가 도시락을 싸왔으니까 같이 공터에 가서 먹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는 피크닉 바구니를 보여준다.

라일라는 그럼 그 바구니를 잠시 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점심 따위를 할 시간은 없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새 책을 읽어야 하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보인다.

그것은 어림잡아도 그녀 또래의 소녀가 읽어도 될 만한 수준의 책은 아니었다.

학과를 졸업한 졸업생들조차도 읽기에 힘든 것이 아닐까.

베아는 그 책과 라일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라믄 안뎌!"

얼마나 감정을 실었는지, 사투리가 섞여 나온다.

주변의 시선이 잠시 집중되면서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올라오면.

라일라는 자신이 대상이 아닌데도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히고 발걸음을 빠르게 하는 것이었다.

"너…. 일부러야?"

"뭐, 뭐가? 나, 또 사투리가 나왔어?"

어떻게든 라일라를 쫓아가기 위해 더불어 발걸음이 빨라진 베아.

본인은 자각이 없는 듯했다.

라일라가 껄끄러워 그녀를 껄끄러워하는 이유도, 그 둔감한 성격에 있었다.

웬만한 이들은 조금 까칠하게 굴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베아트릭스라는 여자는 학과에서 자신과 유일하게 같은 나이.

그리고 사람의 불쾌함에 무신경한 두꺼운 얼굴로 자신에게 거침없이 다가온다.

자신을 멋대로 친구라 부르는 이 소녀에게 휘말리게 되면.

소중한 시간을 대체 얼마나 낭비하게 될까.

라일라는 오직 그것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열 받는 건­

"봐봐! 이 샌드위치! 어제 마법으로 만들어 본 거야! 화염 마법으로 물을 끓이고, 감자를 익히고…."

자랑스럽게 피크닉 바구니를 열어 보이면, 감자 샐러드가 듬뿍 들어간 식빵의 샌드위치가 보인다.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향긋한 마요네즈의 냄새에 침을 꿀꺽 삼키지만, 고개를 젓는다.

이 소녀, 베아트릭스가.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높은 마력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

마력시로 확인하지 않아도 안다.

베아가 자신에게 가까이 올 때마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방출하고 있는 마력의 양은.

절대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라일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자신만이 그녀의 마력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가진 마력의 총량이 자신보다 크다는 사실이었다.

이 만사태평한 먹보 소녀가.

자는 시간도, 식사 시간도 아껴 가면서 겨우겨우 기어 올라가고 있는 자신과.

라일라는 자연스럽게 어금니를 깨물면서 주먹을 꽈악 쥔다.

"잘 들어 감자녀."

"가, 감자녀!?"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너랑 친하게 지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어.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타고난 재능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너 따위... 마법사의 축에도 못 껴."

그 당시 라일라에게 있어, 이것은 가감 없는 본심이었다.

베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자신에게 폭언을 쏟아 부은 라일라를 바라본다.

라일라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리며 복도를 나아갔다.

뒤를 돌아보면 베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 ..."

라일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걸어갈 뿐이었다.

멈춰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으니까.

001

결국, 그 날은 강의와 도서관을 왕복하며 모든 시간을 사용했다.

아카데미의 규정상, 15살 미만의 학생은 일정 시간이 되기 전에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아직 수석이 아니었던 라일라는 공용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조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도 충실한 날이었다.

어제 밤을 새면서 완성해 낸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문을 찾아냈고.

쉬지 않고 팽팽 돌아가는 머리에서 새로운 마법을 몇 개나 떠올리고 있었다.

"화염 마법의 특징은 역시 압도적인 화력. 하지만 마법의 행사에 낭비되는 마력이 너무 많은 게 흠이야. 그렇다면 필요한 마력을 끌어올리고, 일부만을 방출해서 적을 공격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격마법을..."

생각하는 것을 입에 담으며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한다.

학과 내에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이상한 녀석`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지지만.

라일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돌아가서 생각해낸 것들을 모두 정리하자.

그리고 내일은 오늘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연구를 하자.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것들이 떠오르면. 그것을….

문득. 발이 멈춘다.

충실한 하루이다.

보람찬 나날이다.

오늘은 몇 번이고, 그렇게 자신에게 되새겼다.

"... ..."

꼬르르르륵...

하고, 배에서 소리가 울린다.

`가불`은 `공복`을 제거하는 것도, `피로`를 없애는 것도 아니다.

배가 고파도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졸리더라도 잠을 자지 않아도 되게 한다.

그뿐이다.

마력을 생명력으로 전환해서, 기름칠하지 않은 몸을 실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감각.

배고픔도 느끼고 있고, 졸림도 느끼고 있다.

아마 점점 더 심해지겠지.

하지만 그녀는 무서웠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 가불을 해제하면.

대체 자신은 얼마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샌드위치 같은 걸 눈앞에 보여주고…."

라일라는 낮에 자신이 험한 말을 해서 내친 소녀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이라도 미안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부정하더라도, 결국 인정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있던 일이다.

라일라가 베아에게 심한 말을 하여, 그녀를 떨어트려 놓은 것은.

하지만 하루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신을 따라다닌다.

흥미라던가, 호기심이 아닌.

순수한 호의.

라일라는 `큭`하고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 전 책에서 읽었던 것을 떠올린다.

`노출 효과. 여러 번 만나는 것으로 호의가 발생하는 현상`

이런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라일라는 속으로 그렇게 감정을 씹어 넘긴다.

꿀꺽­ 하고 목을 통과하면.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던 타인에 대한 걱정도 사라져 간다.

"...1분이나 멈춰 있었어. 서둘러서 돌아가지 않으면…."

라일라가 그렇게 말하며 발을 내디딘 다음 순간.

촤르륵! 하는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녀의 주변에, 마법이 부여된 사슬로 이루어진 결계가 펼쳐진다.

"뭐, 뭐야…?"

라일라가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면.

붉은색의 제복을 입은 처음 보는 인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것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위험해 보이는 무장을 손에 쥔 채.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라일라 플레임워치. 듣던 대로 훌륭한 마력량입니다. 이것이라면, `그릇`으로 부족함이 없겠군요."

지도자 격으로 보이는 남성이 입을 열자, 라일라는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들의 목적이 자신의 신변이라는 것을 라일라는 순식간에 이해했다.

"당신들, 누구야…?"

"곧 알게 될 겁니다. 얌전히 따라와 주신다면 그 과정에서 아픔을 동반하지는 않겠지요."

순순히 따라오라는 말에 라일라는 조금 전까지의 고민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차가운 표정이 된다.

마력이 전신을 휘감으며, 붉은색의 머리가 불타오르듯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너."

다음 순간, 폭발하듯 나타난 수십 개의 화염구.

동시에 주변을 산산조각 내듯 무차별적으로 난사되며 사슬의 결계를 녹여버린다.

다른 집행과들은 마법을 방어해 낸 이들도 상당한 피해를 보거나, 쓰러져 있지만.

사슬로 자신의 몸을 보호한 남자만은 입꼬리를 올린다.

"과연, 이것이 시초의 가문의 후예의 힘입니까."

"잘 알고 있네, 그러면 이것도­…. 크윽…."

다음 순간, 라일라가 새롭게 만든 마법을 사용하려고 한 그때.

몸을 뒤덮고 있던 마력의 전능감이 증발한다.

마치 실이 끊어진 듯한 감각.

서둘러 자신의 몸을 확인하면.

그 커다랗던 마력의 저장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라일라의 머릿속에 흘러가는 것은 `가불`의 부작용.

마력은 이미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던 것이다.

그것을 조금 전의 마력의 사용으로….

"...아…. 윽…."

마력고갈에 의한 현기증.

몰려오는 배고픔과 수면욕.

이 자리에서 쓰러지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을 당할지….

"당신의 체력과 마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저희의 예상대로 움직여주셨군요."

남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라일라에게 다가온다.

`안, 돼…. 할아…. 버지….`

정신을 잃기 전, 상냥했던 자신의 조부의 얼굴을 떠올린다.

"응? 너는, 뭐 뭐야!? 크아악!"

다음 순간, 남자의 비명을 들은 라일라는 그대로.

긴 잠에 빠져들었다.

002

라일라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향기로운 스프의 냄새와 따뜻한 이불의 감촉 속이었다.

옷은 어느 샌가 갈아입혀 져 있었고.

머리는 풀려있었지만, 어딘가 이상한 짓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역시 처음 보는 장소였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목 아래가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은 조금 몽롱하지만, 상황판단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도서관에서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의 도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제복의 녀석들에게 습격을 받아….

"큭…."

일생일대의 실수.

이곳은 그 녀석들의 아지트인가?

어떻게든 몸을 회복하지 않으면….

정신을 집중하고 주변의 인기척을 파악한다.

이 침실 같은 공간 안에는 우선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문밖에도…. 사람은 없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이 있을 뿐.

한 명 정도라면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다시 조종해서….

그때, 그 인물이 자신이 있는 방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라일라는 조용히 회복한 마력 일부를 끌어 모은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와! 일어났구나!"

손에는 벙어리장갑을 낀 채 따뜻한 스프가 들어있는 그릇을 들고.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이 보였다.

"너, 너... 너...!?"

라일라는 그저 `너`라는 말을 반복하며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끌어올린 마력이 허공에 흩어지며 다시 한 번 몸속의 마력 통이 비어버린다.

"겨우 일어났네. 라일라가 가벼워서 다행이야! 나 혼자서도 옮겨올 수 있었거든!"

베아는 순진하게 웃어 보이면서 그녀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 나를 잡아와서 뭘 하려는 거야? 너도 그 녀석들이랑 한패야?"

"한패? 그 녀석들? 아아. 나쁜 짓 하려고 했던 오빠들이라면 내가 혼내줬어!"

라일라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베아는 `후후~`하고 웃어 보인다.

"혼…. 내줘?"

"응! 라일라가 예전에 중얼거리던 마법이 있었잖아. 나도 나름대로 공부해 봤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모은다.

그러자, 그곳에서 붉고 작은 화염구가 생겨나더니 그곳에서 화염의 가시가 튀어나와 허공을 흐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불꽃 문어!"

"플레어 스파이크야!"

터무니없이 촌스러운 마법의 이름을 말하자,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핫` 하고 정신을 차리며 그녀의 마법을 확인한다.

이론, 마법적 구성, 마력의 사용법.

크기나 스케일은 물론 자신이 상정한 것보다 작지만 어디까지나 힘을 억눌러 발동했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녀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이 마법에 대한 것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사용하는 곳까지 이르렀다고…?

"너, 대체…."

"그것보다! 자는 동안 계에속 꼬르륵꼬르륵 댔으니까 라일라. 배가 어엄청나게 고픈 거지?"

"아, 니…. 나는…."

라일라는 그런 베아의 말에 말꼬리를 흘린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배와 등가죽이 붙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 눈앞에서 자신에게 끓여낸 우유의 고소한 향이 풍기는 스프의 냄새는.

거의 고문과도 같았다.

"자, 아앙­"

베아가 숟가락에 스프를 떠 그녀에게 입을 벌리라는 듯하자.

라일라는 얼굴을 붉히며 기겁을 하는 것이었다.

"바, 바보야!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니, 몸을 못 움직이는 라일라를 위해서 밥을 먹여주는 거지."

"기, 기다려. 마력만 회복하면 내가 알아서…."

라일라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하지만, 결국 조금도 기운이 돌아오지 않아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마력은 생명력이 있어야 회복되는 거야. 라일라의 지금 몸 상태는 양쪽 모두 텅 빈 상태니까 당연히 회복이 더디지."

베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른 입을 열라는 듯 숟가락을 들이댄다.

"윽... 큭... 치욕적이야…. 이 라일라 플레임워치가 설마,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이야…."

결국, 라일라는 입을 열고 입안으로 들어오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스프를 저항 없이 목으로 넘긴다.

조금이지만,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응! 잘 먹네~"

"어, 어린애가 아니니까."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다음을 기다린다.

...결국, 그녀가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아가 그릇을 치우면, 라일라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 구해준 것도 그렇고. 이렇게 신세를 진 것도 꼭 갚을 테니까."

"응? 그란해도 디여~"

콧소리가 섞인 말로 대답하지만, 사투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아, 안 그래도 된다고…."

베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사투리를 고쳐 다시 말한다.

"...그, 그건 그렇고. 엄청나게 졸렸었나 보네? 3일을 내리 잤어."

"3일이나…. ­3일!?"

라일라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소중한 자신의 시간 중 3일이나 낭비되었다.

기껏, 새로운 연구의 착안점을 찾아냈는데.

서둘러 돌아가서 연구를 계속하지 않으면….

"... ...!"

다음 순간, 라일라는 깨닫는다.

자신이 기절하기 전 알아두었던 것, 생각해 두었던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제대로 기억하기 전,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뇌의 퍼포먼스는.

직전의 일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그대로 중요한 사실을 날려버린 것이다.

절망과 함께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 가습이 답답해졌다.

찢어질 것만 같이 머리가 아팠다.

물론, 한 번은 자신이 깨달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위해 자신이 사용한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당부를 어겨 가면서까지 얻어낸 지식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너무나도 미웠다.

하지만 다음 순간, 베아가 말한다.

"아, 그리고. 라일라가 자면서 중얼거렸던 건 적어서 책상 위에 놨으니까."

"채, 책상? 중얼거려? 자, 잠깐! 베아! 그 종이 좀 줘 봐!"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흥분한 라일라가 몸을 움직이려 하자.

베아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종이를 그녀에게 넘겨준다.

라일라가 받아든 그 종이뭉치를 읽자.

잊어버리고 있던, 공부와 연구가 조금씩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장장 30페이지에 빼곡히 적혀 있는 삐뚤빼뚤한 공용어의 글씨.

모두 베아의 것이었다.

"어, 어째서…."

"응? 그야, 라일라가 자면서까지 연구하고 싶었던 거니까. 분명 일어나면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

베아는 브이자를 그려 보이면서 밝게 웃어 보인다.

침묵이 흘렀다.

방 안을 감도는 정적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고개를 떨어뜨린 라일라가 원인이었다.

베아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걱정이 되어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그때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뚝, 뚝.

무언가, 물방울이 흘러나와 종이 위로 떨어졌다.

베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우왕좌왕 한다.

"에, 에잇!"

그러고서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라일라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바, 바보야…. 이러면 종이가 꾸겨지잖아…."

라일라가 울면서 목소리를 이어가면.

베아도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말을 이어간다.

"내, 내가 울면, 우리 어무이가 늘 꼬옥 안아주셔서…. 미, 미안…."

그렇게 하며 베아가 라일라로부터 떨어지려고 하자.

라일라도 베아의 등에 손을 돌리며 그녀를 붙잡고 점차, 쏟아져 나오는 눈물의 양이 많아졌다.

텅 비었던 소녀의 안쪽을 채우는 것은.

따뜻하고 맛있는 스프의 맛과.

푹신한 이불의 감촉과.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손길.

그리고 조부의 죽음과 함께.

모든 빛이 사라져 무색으로 변한 그녀의 삶에.

변함없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한 줄기의 빛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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