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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되었던 마검사가 사실 파티의 기둥(물리)이었기 때문에 용사의 히로인들이 뒤늦게 매달려옵니다-109화 (109/506)

〈 109화 〉 너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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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의 물감을 적당히 검은 스케치북에 흩뿌린 뒤, 그 위를 가느다란 붓으로 난도질한 혼돈의 하늘.

천지가 뒤집히고, 흑백이 반전되어, 빛과 어둠이 역전된 세계.

어두운 곳에 있을수록 자신의 모습이 확실히 보이고, 몸은 끝없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인다.

자신이 호흡할 때조차,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행위가 올바른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하는 의심암귀의 공간.

본래라면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조차 용서되지 않는 불필요한 세계의 폐기물이 모이는 쓰레기통.

그것이야말로 이 공간의 정체라는 것을, 마검사는 자신의 몸으로 가감 없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몸 전체에 달라붙어 피부를 갉아먹는 벌레들의 무리, 혹은 거대한 괴물의 위장 속에서 흘러내리는 소화액과 같은 이질적인 마력이 쉴 틈 없이 클레온의 몸을 감싼다.

라일라로부터 받은 화염의 가호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불쾌하면서도 위험천만한 공간 속에 스스로의 마력을 계속해서 빼앗기며 그들에게 침식되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온은 체감한다, 이차원의 틈이 인간에게 있어서 위험한 이유는 이 마력의 존재가 원인이 아닌

이 공간 전체에서 느껴지는 클레온­ 생명체에 대한 거부.

넌 이곳에 존재해선 안 된다, 아니. 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거절, 거부, 부정, 사양, 부인.

마치 공간 자체가 의지를 가진듯이 끊임없이 클레온의 육체에, 영혼에, 정신에 파멸을 속삭인다.

이 거부가 자신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곳에 들어온 많은 존재가 결국 자아를 잃을 정도로 변화하고 붕괴하여 절계수나 훔바바와 같은 괴물들로 변화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자신도 이곳에 오래 머무른다면 그들과 같은 존재로 변하고 말 것이다.

이곳은 빠져나올 수 없는 독의 늪. 그 독은 맹독으로 언젠가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를 대신하게 된다.

그런 절망적인 비전이 머리를 가득 채우게 될 무렵 클레온은 자신의 오른 검지를 강하게 깨문다.

환부에 달리는 고통이 흐리멍덩해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되돌리며 머리를 가득 채우던 절망적인 환상을 걷어낸다.

자신은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이 공간에 잡아먹혀 괴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시간의 감각마저 이상해지는 공간 내에서는 며칠이라는 시간을 보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것마저도 이 공간의 악의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분명 두 종류일 것이다.

하나는 정말로 강인한 정신력과 흔들리지 않는 영혼과 신념을 지닌 채 불굴의 의지로 서는 자.

또 하나는, 이미 공간에 굴복하였으나, 스스로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변질한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여 땅을 기는 존재들.

클레온으로서는 자신이 전자인지 후자인지, 그런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현명한 판단은, 이 공간에 먼저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고, 설령 들어왔다 하더라도 전력을 다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클레온은 자신의 뒤를 돌아본다, 방금까지 그곳에는 자신이 통과한 입구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검은빛에 휩싸여 있었지만.

자신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이곳에서 비키거나 후퇴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공간의 틈을 헤치고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시각을 통해서가 아닌, 말 그대로 감과 같은 것이었지만, 이런 공간 속에서는 오히려 오감보다도 직감에 의한 판단이 더욱 도움된다.

조용히 검을 잡은 채 눈을 감고 가까워지는 기척에 집중한다.

분명 레일은 이야기했다, 세계를 삼키는 뱀이라고.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시야를 검은색이 뒤덮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눈꺼풀 뒤쪽에서 보이는 순수한 어둠, 시각 세포의 자극 때문에 일어나는 간헐적인 반짝임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반짝임 사이로 보이는 붉은 색의 두 눈.

독을 머금은 송곳니를 가진 세계 포식자의 편린이 클레온에게도 느껴졌다.

"죄송하지만 그곳을 비켜주시겠습니까. 그 너머의 세계에 볼일이 있어서."

갑작스럽게 앞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클레온이 흠칫 놀라 눈을 뜨면, 자신의 앞에는 거대한 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정중한 태도에, 흰색의 정장을 껴입은 훤칠한 중년 남성이었다.

멋들어진 수염을 기르고 딱 벌어진 체격에, 머리에는 정장과 세트일 것으로 예상하는 중절모가 씌워져 있었다.

잿빛의 머리카락을 꽁지로 묶은 채,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남성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지만.

금빛 눈의 동공은 세로로 찢어져 있었고 뺨에 보이는 파충류의 비늘과도 같은 문양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네가 세계를 삼키는 뱀인가."

클레온은 대상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하곤 당황함을 최대한 감추며 그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낀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가며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한다.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저는 `요르문간드`라고 불리는 것을 더욱 선호하지만 말이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마 이 남자는 클레온이 속한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미안하지만, 이 너머로는 갈 수 없다."

클레온이 요르문간드를 가로막고 서자 그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클레온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오랜만의 활기 넘치는 세계의 좌표를 받아서 호화로운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로군요."

곧바로 실력 행사로 나올 것이라 생각하여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던 클레온이었지만 요르문간드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 너머의 세계를 당신도 노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물론, 늦게 찾아온 제가 양보해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저와 `합석`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남자의 말에 클레온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클레온을 `동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클레온도 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클레온의 세계를 `포식`할 생각으로 찾아온 이차원의 틈의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과는 달라. 나는 이 세계를 지키려고 온 거다."

"...호오. 당신은 틈의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 익숙한 기척이…."

요르문간드의 찢어진 눈이 클레온의 몸 전체를 꿰뚫듯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마치, 그 안의 영혼을 심사하고, 파악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흐음? 흐음... 이럴수가. 당신, `클레온`이었습니까! 생김새도 분위기도…. 가지고 있는 그 `무기`도 달라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러면서 마치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재회했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띤다.

요르문간드의 말에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잠시 스턴 상태에 빠지는 클레온.

"흐음. 그러고 보니 이 주변은 특히 시간의 뒤틀림이 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는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온의 어깨를 친절함과 친근함을 담아 두드린다.

그 덕분에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 클레온은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묻는다.

"어째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그야 당신은 차원의 틈의 `세계 포식자` 중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다운 세계를 몇이나 집어삼킨 존재로서 말이죠. 지금의 당신이 모른다는 것은, 당신은 그의 과거의 시점. 혹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존재일까요."

클레온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미래의 쿠온을 보았던 꿈속의 내용.

자신이 레시아를 찾아 이차원의 틈으로 뛰어든 후, 돌아오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있을 가능성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다른 시간대의 자신을 본 존재의 이야기를 들으면 갑작스럽게 그 현실감이 커지는 것이었다.

요르문간드는 그런 클레온의 말없이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야기한다.

"흠. 저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충격적이었습니까? 아무래도 당신에게는 조금 자극적인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젠간 당신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싶군…."

클레온의 말에 요르문간드는 큭큭하고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이마를 검지로 두 세 번 두드린다.

"좋습니다. 그 세계는 당신을 위해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동지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해 두죠."

"뭐라고…?"

클레온은 요르문간드의 말에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지만 뱀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야기한다.

"당신의 시간이 찾아올 때까지 그 세계를 남겨두는 편이 저희의 위대한 친구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 같으니 말이죠."

"... ..."

이 의문의 존재가 가진 자신에 관한 호의에 클레온은 전혀 따라갈 수 없었지만, 하는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포식 행위를 멈춰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포식자들과 함께.

물론 이런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서는 거짓이나 꾸밈을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가진 거대한 존재라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다면…. 나의 세계는 이제 안전한 건가?"

"적어도 저희에게서는 그렇다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와도 같은 미식가들에게만 그런 것입니다. 차원의 틈은 무한하고 이 틈에 있는 존재들도 무한하지요."

요르문간드는 기분 나쁜 웃음을 띠며 허공을 향해 수도를 휘두른다.

가볍게 휘둘러진 팔 너머로, 아카데미의 상공에 보았던 차원의 틈이 발생한다.

"자, 이쪽을 보십시오."

클레온이 그의 말에 따라 틈의 너머를 내려다보면.

그 광경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수의 대군이 그 안에서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클레온에게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는 것들 전부가,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전력을 다해 상대하고 있던 `훔바바`.

그것과 비슷하거나, 그와 동일한 존재들이었다.

"저들은 이 쓰레기장과도 같은 아름다운 세계에서도 한 층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들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차원의 틈에 스스로 들어온 검은 갑주에 이차원의 마력이 들러붙어 변이했습니다. 한 번 발생한 사상이 다른 차원에도 영향을 끼쳐, 다른 시간선, 다른 차원의 비슷한 세계에서도 같은 일을 일으키는 것이죠."

즉, 저것들은 자신이 꿈에서 본 쿠온과 비슷한.

평행세계의 훔바바들이라는 것이다.

"저들은 왜 서로 싸우고 있는 거지?"

"당신의 세계의 좌표를 파악하고 다가오던 것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저들도 그러하죠. 자아가 희박한 마수들은 같은 먹잇감을 노린 존재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마주치면 서로를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핵을 파괴당한 마수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다른 마수들에게 내부에 있던 핵을 잡아먹힌다. 그야말로 마수의 고독(??).

요동치는 독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마수의 탄생이 꿈틀대고 있었다.

"...저 싸움이 끝나면­."

클레온은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타인의 입에서 확인하려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면 요르문간드는 아무렇지도 않듯이 대답한다.

"서로를 모두 잡아먹은 최악의 마수가 당신의 세계로 넘어가겠죠."

그 마수는, 훔바바의 수 십 배는 강력한 존재일 것이다.

그런 녀석이 차원의 틈을 빠져나와 무차별적으로 악의를 흩뿌린다고 생각하면 세계 전체가 불타버리고 말 것이다.

클레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을 꽉 쥔다.

"그렇지요. 당신은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그 `클레온`이라면 말이죠."

요르문간드는 그런 클레온을 보더니 만족한 듯한 미소를 띤다.

능글맞은 그 모습에 클레온은 아랫입술을 꽉 물면서도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상적인 판단이라고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갈라테아도 없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과 싸운다는 것은 너무나도 승산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클레온에게도 마냥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서로가 같은 먹잇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맹수들이었다.

그런 맹수들 사이에서 클레온이란 사냥꾼은 한없이 작고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핵을 감싸는 부분이 파괴되면, 내부의 핵을 잡아먹히기 전에 이쪽에서 제거하면 적어도 녀석들이 강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클레온 곧바로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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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의 저택, 열리지 않는 갈라테아의 방.

모두가 훔바바를 막기 위해 저택을 비운 사이, 작은 고동 소리가 방 안에서 끊이질 않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일주일 사이, 안에 있던 갈라테아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는 그녀밖에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그녀가 열렬히 자신의 파트너인 클레온을 찾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수태되었던 존재가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클레온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힘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갈라테아` 본인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 존재를 완성해 클레온에게 가지 않으면.

갈라테아가 가지고 있는 흑마력을 머금은 신성한 검 `칼리번`의 핵.

쿠온이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예언 속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검은 한 번 부러지고, 이윽고 새롭게 벼려져 세계를 구하는 황금의 빛을 가지리라.`.

그리고 예언의 때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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