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분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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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검은 하늘의 아래, 학생들의 함성이나 괴물의 울부짖음. 그리고 마법과 마법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아이온의 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여서, 하늘을 달리는 빛이 나타났다 사라진 순간.
마치 빗줄기와 같은 화살들이 땅을 향해 수도 없이 내리꽂힌다.
"젠장...! 뭐야 이 괴물들은! 전원 제자리에! 저것들이 더는 전진하지 못하도록 해라!"
트레이스를 필두로 한 사냥꾼들은 검은 구 안에서 기어 나오는 촉수 달린 괴물들을 상대로 있는 화력을 모두 쏟아붓고 있었다.
뷔토스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 중 일부가 멋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막대한 피해를 주던 와중.
이들이 쫓아온 것은 혼돈의 화신의 붉은 보석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날벌레와도 같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늘을 날며.
이동할 때마다 검은 흔적을 남기고 그곳에서 기괴한 형태를 가진 문어의 다리와도 같은 촉수를 소환하여 자신의 추적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찬송가와도 같은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이 촉수들을 만들어내는 검은 공간 너머에서 울리고 있었다.
[NR! ST! NR! GSN!]
이 촉수들에 혹시라도 실수해서 닿은 순간, 생명체는 그 자리에서 몸이 뒤틀리고 이상하게 변형된다는 것을 중간의 식물이나 마주친 동물들에 의해 배운 이들은.
절대로 그들에게 직접 닿지 않을 거리에서 최대한의 주의를 쏟아 탄막을 만들어 그 촉수들이 자신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태의 진정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저 붉은 보석을 쏘아 떨어트려야만 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사격 실력이 뛰어난 트레이스가 벽을 이용한 도탄이나, 공중에서 산탄으로 화하는 화살을 사용해 보았지만 붉은 보석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보석조차 환영에 의한 신기루와도 같이, 비처럼 쏟아지는 원거리 공격을 유유자적하게 피하며 또 다른 촉수를 꺼내 든다.
마치 비웃는 것과도 같은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트레이스!"
자신의 사격술을 마치 장난을 즐기듯이 피해버리는 그 모습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트레이스.
그런 와중 자신을 부르는 같은 과 학생의 목소리에 조금 짜증을 내듯이 대답했다.
"왜 그러냐 스팽킹!"
"나는 슈베르트야! 아니, 그것보다. 주변을 봐…!"
그의 말에 따라 트레이스가 주변을 둘러본다.
학생들의 주변을 빙 둘러서 만들어진 검은 흔적들.
마치 도넛과 같이 고리를 이루며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촉수들이 꿈틀대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 아무래도 사냥감은 우리가 된 것 같군…."
트레이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가지고 있는 화살을 센다.
사격술의 가장 큰 약점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가지고 있는 탄환이나 화살이 다 되면 그 전투력이 한없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화살의 수는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하하…. 어떻게 하지 트레이스...?"
슈베르트가 마른 웃음을 띠며 트레이스에게 물어보자 그는 수석으로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남은 화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돌파구를 만들어서 그곳으로 빠져나간다."
"그게 가능하면 고생하지 않겠는데…. 근접전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동 사격 같은 어정쩡한 공격을 했다간 속도도 위력도 모두 떨어지고 말 거야."
그의 판단은 정확하다고 트레이스는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남아있는 화살을 모두 내게 넘겨라. 돌파구는 내가 열도록 하지, 그 사이에 너희들이 빠져나가는 거다."
"뭣…! 그러면, 네가 희생양이 되겠다는 소리냐!?"
슈베르트의 말에 트레이스는 고개를 구겼다.
"희생양? 다르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망설이지 않는 사나이야말로, 진정한 사냥꾼이라고."
"...하아...?"
"나는 희생`양`이 되는 게 아니다. 나는 진정한 사냥꾼이 되는 거다."
트레이스가 그렇게 말하며 건네받은 화살 중 하나를 시위에 건다.
그에게는 사샤와도 같은 각인의 힘이나 마력의 화살을 만들어내는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저격수로서의 가장 중요한 재능.
`어디를 꿰뚫어야 적이 붕괴할까.`를 순식간에 파악하는 능력.
그것은 신체의 부위여도 좋았다.
군대의 집단을 하나의 `몸`으로 본다면 `급소`가 되는 인물을 죽이는 것도 저격수의 일이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붉은 보석을 노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맞지 않는 적`을 노려본다고 소용없었다.
그러므로, 그 바로 밑을 향해 한계까지 당긴 화살을 쏘아냈다.
물론 한 발의 화살로 그 부분을 뚫어버리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한 발이 부족하다면 10발. 10발로 부족하다면 100발.
남아있는 화살, 탄환, 모든 것을 이용해서 검은 공간째로 꿰뚫어 버리며 촉수의 대군의 한 부분을 지워낸다.
"지금이다! 가라!"
잠시 통로가 열린 것을 본 트레이스가 외치자 슈베르트는 분한 얼굴을 하며 다른 학생들을 모두 이끌고 뛰어간다.
가지고 있는 무기를 두고,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며 재빨리 그 구멍을 뚫고 나가야 했다.
트레이스는 그사이에도 틈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떨어지는 탄막을 펼친다.
화살의 벽에 가로막혀 촉수들이 도주하는 이들을 붙잡지 못한다.
그 사이에 트레이스의 등 쪽으로는 다가오는 이형의 괴물들이 채 1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지막 학생까지 틈을 지나간 것과, 트레이스가 가진 화살이 다 되는 것은 동시였다.
티잉 하는 소리를 내며 무리를 한 활의 현이 끊어지고, 중간 부분에 금이 간다.
제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볼멘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오늘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을 같이해 온 활의 마지막에 자신의 마지막이 겹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트레이스는 눈을 감으려 했다.
[나비의 단검 티타니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기 직전까지는.
트레이스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앞쪽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하늘에서 공중제비를 돌듯이 단검을 휘두르는 사샤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단검을 휘두른 듯 했다.
하지만, 그녀가 노린 것은 허공 따위가 아니었다.
그 허공 속에서 주변의 빛을 반사하여 자기 모습을 감추고 있던 붉은 보석이었다.
즉, 트레이스나 다른 학생들이 보고 공격하고 있던 정말로 `환영`이었던 것이다.
빠르게 비행하던 사이에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가짜를 만들어 그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촉수와 찬송가와, 그리고 비웃음 소리가 동시에 멈춘 것은 그 붉은 보석이 땅으로 떨어지며 금이 간 것과 동시였다.
촉수는 실체를 잃으며 서서히 그 자리에서 사라져간다.
그들을 무한히 꺼내고 있던 검은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반짝이던 각인의 힘의 출력을 줄이고, 사샤는 땅에 착지해서 한숨을 내쉰다.
이곳으로 향하라고 했던 라일라의 지시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트레이스가 당했을 것이다.
"괜찮으신가요? 어디 잘못된 곳은 없으신가요?"
같은 과의 학생으로서 사샤가 그에게 물어본다.
"...아니, 괜찮지 않군."
하지만 트레이스는 대답했다.
"서, 설마 다친 건가요!? 쿠온씨를 불러올 테니까..."
"아니. 너를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 착각이 잘못되어 있었다. 너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강한 사냥꾼이었어."
"아, 아니에요! 저 같은 건 아직 많이 미숙하고…."
"그리고, 그런 너에게 어울리는 건 분명, 너만큼 강한 남자겠지…. 후. 이 트레이스. 맹수를 사냥하려다 실력의 차를 보고 말았다…."
트레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부러진 활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샤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갔다.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사샤는 그를 보고 중얼거렸다.
"어... 다른 분들이 가신 곳은 반대 방향인데…."
001
그 시각, 라일라와 베아트릭스는 폭주하려는 사자(死者)의 마도서를 억제하고 봉인하기 위해 온 집중을 쏟아붓고 있었다.
조금 전 사샤를 보낸 뒤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마법과의 학생들에게 불려가 보면.
엄청난 사기를 내뿜으며 무차별적으로 주변의 `죽은 것`들 (동식물을 이용해 만들어낸 물건들)을 되살리려고 하는 그 마도서의 주변에.
수십 겹의 결계를 펼치며 멋대로 마력을 퍼뜨리려는 것을 억제하고 있었다.
"다음은 아지프의 수호 방진이야! 내가 3번부터 5번 술식을 처리할 테니까"
"내가 6번과 8번이라는 거지? 알았어. 그 부분은 내 특기니까 걱정하지 마."
분명 이렇게 합을 맞추는 것은 처음일 텐데 마치 라일라의 마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하는 베아트릭스를 보며 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타인과 말을 하지 않더라도, 생각하는 것을 일치시킨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에, 다른 이들보다도 빠르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술식 전개 속도를 무리 없이 따라오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실력은 마법과의 손꼽히는 수재들, 그야말로 자신과 비등한 수준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 굉장한데. 이 정도 실력이면 집행과가 아니라 마법과에서 수석 자리를 노려볼 만도 해."
"...고마워 라일라. 하지만 마법과의 수석은 너잖아? 역시 네게 가장 잘 어울려."
그 말에 라일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야기한다.
"그럼, 내 조수 같은 건 어때?"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거절할게. 따로 연구하고 싶은 것도 있고, 어느 쪽이냐고 하면, 라일라와 친구가 되고 싶으려나. 예전처럼."
"...예전처럼?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너도 내가 잊어버린 과거의 지인이라는 거야?`
라일라의 질문에 베아트릭스는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움직여 라일라가 이야기하기도 전에 다음 결계 술식으로 넘어간다.
"자, 잠깐. 멋대로... 큭..."
"에이본의 2번과 0번을 부탁해. 그리고, 그 질문의 대답은 선배가 찾아줄 거야."
그 말에 라일라는 이차원의 틈으로 자신에게 모두를 맡기고 사라진 클레온의 얼굴을 떠올린다.
잠시 입을 다물던 라일라는 화륵! 하고 마력 깃든 머리카락을 불태우며 눈을 빛낸다.
"그거 기대되네...! 얼마나 대단한 인연이었길래 그렇게 말하는지, 두고 보자고!"
"물론이야! 그때가 돼서 울지 말라구...!"
두 사람이 서로를 자극하고 마력을 끌어올려, 그사이에 껴 있는 사자의 마도서를 수백 겹의 결계가 감싼다.
그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두 천재의 경쟁(?)에, 주변의 다른 마법사들은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채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002
같은 시각, 쿠온과 이오나는 성학과의 학생들을 도와 남아있는 훔바바의 진흙에서 나타난 언데드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신성마력의 위력이 반감하는 흑마력 영역을 펼쳤다고는 하지만, 언데드는 언데드.
이오나의 성검으로서 가지고 있는 힘과 쿠온의 대량의 신성마력이 합쳐지면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두 세 마리씩 언데드들이 사라져간다.
"하아... 하아..."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성검 이오나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 쿠온이었다는 점.
오늘 처음 만난 성학과에게 자신을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기본 후열에 서서 파티를 보조하는 쿠온에게 있어
검을 휘두르고 적을 상대하는 중노동은 상당히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대충 휘둘러도 신성한 파동이 뿜어져 나와 눈앞의 언데드들을 정화한다지만 말이다.
[나쁘지 않네요! 클레온의 검술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거 보니 소질이 있나 봐요 쿠온.]
"무, 무리 없이 라니…. 이미 무리에요…."
헥헥대면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쿠온. 이오나가 가지고 있는 성검으로서의 능력 [경험 이식]을 사용해 클레온의 검술을 쿠온의 몸을 통해 재현시키면, 아무리 검을 휘두른 적이 없는 쿠온이라도 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뒤!]
이오나의 외침에 쿠온이 황급히 몸을 돌리며 검을 가로로 휘두르자.
아까와도 같이 강한 신성 마력의 파동이 퍼져나가며 일직선으로 서 있던 언데드 몇 채를 순식간에 증발 시켜 버린다.
다른 성학과의 이들도 그것을 보고 감탄의 목소리를 올린다.
"실례합니다 그쪽의 성직자분! 정말로 실례되는 건 알겠지만 정말로 성직자이신가요? 그 가슴으로 성직자라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효~! 뭐야! 왜 이렇게 부드러워!?"
"이 가슴인가요? 이 가슴 때문에 강사님은 저희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시는 거군요!? 움직일 때마다 출렁출렁출렁출렁. 열받지만 패배에요! 어떻게 그렇게 커졌는지 대답 부탁드립니다!"
약 두 사람을 빼고는.
검을 휘두르던 쿠온의 곁에 딱 달라붙으며 양쪽에서 쿠온의 가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쌍둥이.
"에, 에에..."
그 기세에 당황한 쿠온이 주춤거리면 쌍둥이의 가슴을 동시에 주물러 신음을 내게 해서 떨어트리는 여성이 있었다.
푸른 머리를 길게 기른, 청초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눈앞의 싸움에 집중하렴. 그리고 강사님의 소중한 동료께 실례를 저지르지 말라고 했잖니."
"당신은..."
구원의 손길을 보낸 여성을 바라보는 쿠온.
그러면 그녀는 `후후`하고 작게 웃어 보이고는 대답한다.
"클레온 강사님께 많은 신세를 진 불초 `리오메스`라고 하옵니다. 성학과의 수석으로…. 통칭 `아카데미 탑클래스 빗치`라고 불리고 있답니다."
"다, 당신이 그...!?"
너무나도 예상과도 다른 그녀의 행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쿠온, 그러자 리오메스는 재밌다는 듯이 쿠온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보는 것이었다.
"어머, 저에 대한 기대가 있으셨나 보네요... 어떻게 생겼을 거라 생각하신 거죠?"
"에, 에에... 금발에, 짙은 화장에, 살짝 태운 피부에... 노출도 높은 옷을 입고 계실 거라..."
"누님의 6년 전 모습이 딱 그랬죠. 성학과에 들어와 류드 부인을 만나기 전..."
"후후. 그렇네 그때의 나는 `처녀 빗치`였지만 말이야."
어느샌가 다가와 이야기에 끼어든 데미스가 이야기하자, 리오메스는 그립다는 듯이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잠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언데드들을 모두 처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는데요…!]
"마, 맞아 그랬지! 죄송해요. 여러분 이야기는 나중에!"
이오나의 재촉에 끌려가듯 쿠온이 언데드의 무리의 방향으로 달려가자, 리오메스도 기지개를 핀다.
언제나 상큼한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심호흡과 함께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녀의 몸에 흐르고 있던 생명력과 마력이 한곳으로 뭉치며 음양의 조화를 이룬 마력이 손끝에 피어오른다.
갈 곳을 잃고 원혼이 되어버린 망자들을 향해 자세를 잡고 서면, 마치 춤을 추기 직전의 절도 있는 아름다움이 그녀의 몸에서 느껴졌다.
조용히 입을 열며, 자신의 이 싸움에 자신의 이름을 건다.
"색수(??*목숨을 거둠)류 암살권 계승자. 리오메스."
"같은 유파. 계승자. 데미스."
진각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는 남매의 발걸음에, 지면을 타고 마력이 흐른다.
""그 원혼까지 모두 품어, 박살을 내주마.""
003
바로 몇 분 전까지, 훔바바와 클레온 일행의 전투가 벌어지던 시가지에서는.
이제는 인간으로서의 몰골이 거의 남지 않은 레일과.
용사 아루루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훔바바와 검은 교전의 영혼을 흡수한 레일은 그 심장을 진흙으로 대체하여 움직이며 잘린 곳을 곧바로 진흙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아루루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다.
진흙을 이용하여 괴수와도 같이 변한 상체에 붙어있는 날카로운 검으 휘둘러 보아도, 이미 검사의 긍지를 모두 잃어버린 레일이 아루루에게 유효타를 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째서냐…. 미궁의 안에서는 그렇게나 쉽게 이길 수 있었는데…. 그 때보다 강해진 내가 어째서…."
레일은 자기 얼굴을 움켜쥐며 자신이 그녀에게 밀리고 있다는 상황을 부정하듯이 울부짖는다.
하지만 아루루는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고, 눈 앞의 짐승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눈에서 느껴지는 의지는 오직 하나.
이 세계의 적을, 철저하게 멸한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인정하지. 확실히 너는 그때의 너보다…. 질긴 건 맞는 것 같지만. 너에게는 더는 그때의 냉철함도, 지략적인 면모도 느껴지지 않아. 미궁에서 나를 이겼던 건, 네가 나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를 했기 때문이었지. 그 모든 것을 네 실력으로 친다면. 지금의 너는 그때의 너보다도 약해져 있어."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는 거냐! 나에 관한 것도 그렇고, 너에 관한 것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나다!"
한때의 친구의 말을 부정하듯 레일이 팔을 휘두르자 진흙이 점점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네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이런 일은 벌이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내 손으로 오랜 친구를 베야만 하는 슬픈 상황을 만드는 일은…."
"틀려…. 클레온만 없었더라면 네게 주어진 행복이 끝나지 않았을 텐데...!"
아루루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미 스스로 붕괴해가는 레일을 바라보다 검을 내린 채 물어본다.
"그 행복이란 건, 설마, `용사가 아닌 아루루`를 이야기 하는 거야?"
"그래...! 모두가 멋대로 너에게 기대를 품고, 너를 이상의 용사로 추켜세워 너에게서 평범한 삶을 앗아간 거짓된 세계와는 다른…. 진실한 세계다. 너도 그 안에서 행복했었겠지! 그때의 기억은 남아있을 테니까!"
"물론, 기억하고 있어. 확실히, 그런 세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행복을 느끼는 `아루루`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루루는 거기까지 말한 뒤, 다시 검을 들어 그 끝으로 레일을 가리킨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나는 `지금의 나`를 싫어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긍지로 여기고 있다. `멋대로 기대`한다고? 용사란 것은 원래 사람들의 기대를 등에 업은 채로 서서 악을 베는 칼날이며, 수호의 방패로 존재하는 이들이야. 거기에 어떤 불만도 없어."
"... ..."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나다. 그리고, 타인으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네가 아니야."
"닥쳐!! 나는 너를 그 녀석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 사단을 벌였단 말이다!!"
레일이 울부짖자, 진흙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날카로운 가시 아루루를 노리고 날아든다.
하지만 아루루는 이미 주변에 산재한, 광휘를 머금은 푸른 유릿 조각들을 재생시켜, 가시보다도 훨씬 수가 많은 성검으로 그것을 맞부딪히고 역으로 레일을 감쌌다.
"어째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어. 어째서 모든 것을 혼자서 하려 했던 거야. 우리들은…. 셋이서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언제까지라도."
아루루는 기억을 되찾고 나서, 처음으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잠시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눈물마저 지워진 언제나의 얼굴로 돌아와, 검을 치켜든다.
허공에 떠 있던 수많은 유리검들이 아루루가 들고 있는 본체를 향해 모여든다.
폭풍과도 같이 그 본체의 주변을 고속으로 떠돌며, 모든 것을 갈아버리는 파괴의 회오리가 되어.
아루루가 검을 움직이는 궤도에 따라붙듯이, 분쇄는 일어난다.
땅을 갉아내고, 공기를 찢으며, 아루루는 검을 앞으로 내민 채 빠른 속도로 레일을 향해 뛰어들었다.
"...작별이다. 레일. 널 위한 지옥이 있다면, 나도 나중에 그곳으로 갈게."
"아루루...!!!!"
비명을 내지를 시간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 사용한 레일은 유리검의 폭풍에 의해, 진흙으로 이루어진 전신을 갈기갈기 찢겨나가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독기에 닿은 유리검의 분신들은 모두 녹아내려 레일과 마찬가지로 증발해 버렸지만.
오직 부러지지 않는 검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004
한쪽 무릎을 꿇고 기침을 하면 피가 튀어나왔다.
기분 탓일까, 그 피에 살짝 검정이 섞여 있는 것은.
주변에 쓰러져 부서진 수많은 엔키두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이름 모를 희생자들. 핵들.
마수들의 싸움 속에서 쓰러진 마수들의 핵만을 노리며 어떻게든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지만.
이 수많은 녀석을 모두 커버한다는 것은 갈라테아가 없는 클레온으로서도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어떻게 하더라도 강해지는 마수는 존재하고.
이제, 몇 남지 않은 마수들은 대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가늠도 되지 못했다.
차원의 마력 침식도 서서히 클레온의 몸과 체력을 갉아 먹고 있었다.
라일라의 가호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주변을 감싼 마력의 농도가 더욱 짙어진 것이다.
이제 한계인가.
이대로라면 자신은 이 안에서 이들의 또 다른 양분이 되고 말 것이다.
클레온은 입술과 주먹에 힘을 집어넣으며, 비틀거리는 무릎을 일으켜 똑바로 눈앞의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산과 같이 커져 버린 마수들은 지친 클레온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요르문간드는 열린 틈 너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어느샌가 와인을 꺼내 그것마저 즐기고 있었다.
"... ..."
힘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이 녀석들을 막아내지 않으면, 모두가 있는 자신의 세계가 산산조각 날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막지 않으면 안 됐다.
차라리, 차원의 침식을 받아들일까.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변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차원의 틈의 마력은 이 공간에 있는 한 무한정으로 발생하는 힘이었다.
그것을 이용하여 이 마수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자아를 잃기 전에 자기 자신을 마무리하면 된다.
침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의지를 그곳으로 향하게 하면
[레...온...]
"... ..."
다음 순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클레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 목소리야말로, 지금 클레온이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갈라테아…?"
[클레온... 지금, 그곳으로….]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클레온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홀로 남더라도.
그녀만큼은 자신의 곁으로 반드시 올 것이다.
"갈라테아...!"
클레온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검은색과 황금색의 나선이 아카데미의 상공을 수놓는다.
그리고
클레온의 눈앞에 공간을 열어젖히며, 아름다운 흑색의 검과
찬란한 금색의 검이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