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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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빛은 새벽녘을 밝히는 태양과도 같이 찬란하게 하늘을 비추며 나타났다.
눈을 떴을 때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있다고 한다면, 그 빛이 만들어지는 형태를 비유할 때, 띄어진 눈에서 새어 나오는 안광이라고 해야 할까.
허공의 틈을 잡아 찢으며,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찬란한 황금의 빛이었다.
그 빛은 진짜 태양의 빛과도 같은 따뜻함을 가지고 있으며, 상처 입은 자의 상처에 닿는다면 그곳을 치유해내는 자비의 빛이었다.
부정함을 태우고, 악을 정화하며, 정의를 체현하는 권능을 가진 신성함의 현현이다.
빛은 소리보다도 빠르게 아카데미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며 그 사이에 있던 모든 부정한 것들을 지워낸다.
땅에 흩어진 진흙의 흔적들, 망령 깃든 언데드의 군세, 폭주하는 유물들에 씐 고대인의 악의.
그리고 이미 많은 고통을 받고 친구였던 용사에 의해 사라져 버린 한 청년이 그 자리에 남기고 간 작은 원념마저도 집어삼키며.
그를 이용했던 고대인들과 같이 이 땅에 남아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황금의 성검, 칼리번의 빛.
그 본래의 주인이었던 알베인의 손에서는 단 한 번도 그 본래의 힘을 나타낸 적이 없던 그녀가 가진 진정한 힘은.
그야말로 구세의 빛이라고 하더라도 손색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감싸 안아버리는 거대한 신성마력의 제어능력이었다.
그리고 신성마력이라는 것은, 그 별의 속성을 지닌 가장 순수한 마력.
열려있던 차원의 틈을 닫아버림과 동시에, 그곳에서 빠져나왔던 모든 침식을 제거해내고 사람들을 치료한다.
조금씩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고 있던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그러한 주박에서 벗어나며.
싸움이 끝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클레온!"
가장 먼저 클레온에게 뛰어온 것은, 가까이에 있던 쿠온이었다.
언데드들과의 싸움에서 이오나와 함께 큰 활약을 한 그녀는, 그들과 싸울 때 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려와 클레온의 몸을 안았다.
이오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행이야…. 돌아와서…! 혹시라도 안 돌아오면 어쩌나 했어…!"
커다란 눈물방울을 흘리면서 자신을 붙잡는 그녀를 보며, 클레온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준다.
다음 순간, 허리춤에 걸려 있던 갈라테아가 검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바뀌면서 잠시 쿠온을 노려보다가도.
자신이 같은 입장이었어도,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으로 생각한 건지 강하게 매몰찬 태도를 보이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클레온의 곁으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성학과의 학생들과 동료들.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상처를 입은 트레이스나, 그를 부축하고 데려오더니 클레온을 보자마자 뛰어오는 사샤.
그 상황을 바라보며 너는 가지 않아도 되냐는 듯이 물어보는 라일라에게 고개를 저으며 양보하는 베아트릭스.
그리고 소중한 친구였던 이를 스스로의 손으로 묻은 뒤, 그가 가지고 있던 `소울 캡처`를 손에 든 채 걸어오는 아루루.
리오메스는 클레온에게 `약속을 지켜라!` 같은 소리를 하며 뛰어가려고 하는 파이루와 루즈리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굉장하네. 마치 용사의 귀환 같은걸."
아루루가 다가오면서 그렇게 이야기하자 클레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돌아본다.
그녀의 말이 악의적인 비아냥 같은 것이 아닌, 순수하게 느낀 감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랑은 가장 안 어울리는 수식어인데."
클레온이 그렇게 대답하자, 아루루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한다.
"아니. 악의에 굴복하지 않고, 사람들의 희망을 등에 업고 싸워 평화를 되찾은 클레온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훌륭한 `용사`야."
아루루의 솔직한 말에 클레온은 살짝 볼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렇게까지 정면에서 타인의 감사를 받은 것은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다.
엘레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 그 뒤 모험가의 생활 도중에도 클레온을 향한 인간들의 기본적인 시선은 선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불신감` `의심` 혐오`
흑마의 일족이기에, 그리고 마검사이기에 받았던 모든 매도와 멸시를 견딜 수 있던 것은.
그런 자신이라도 `용사` 레시아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과거와 그녀에게서 받았던 인간에 대한 작은 믿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베인에 의해 그런 믿음마저도 한 번 흔들렸지만, 클레온에게는 `알베인`에 의해 분노하여 `레시아`로부터 받은 마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 보다.
설령 갈라테아와 함께 어둠에 몸을 담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으로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도시 엘레시아와 루티를 지키고.
성검의 힘에 취해 주변의 인물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알베인을 쓰러트려 복수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루루는 마치 어린 시절의 클레온이 보았던 레시아와 같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용사였다.
자신 같은, 흉내쟁이가 아닌 클레온 본인이 아는 한 가장 용사에 가까운 인물인 아루루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낯간지러운 감정과 함께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
어쩌면, 이것도 성검 칼리번과 감응하면서 생겨난 감정인 것은 아닐까.
[그건 달라요~ 클레온은 나약한 멘탈의 알베인과는 다르게 성검이 가진 `빛`에 먹히지 않으니까요.]
허리춤에서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에 클레온은 잠시 자신의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알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분명 그녀였지만,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은 듯했다.
"그건... 성검인거야?"
문뜩, 약하게 빛을 내는 칼리번을 바라본 아루루의 질문에 클레온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클레온은 정말로 용사가 된 거구나."
그러고 보니, 성검을 사용하는 인물을 `용사`라고 한다면 칼리번과 감응한 클레온 역시 용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잠깐! 클레온은 마검사야. 용사 같은 게 아니라. 설령 성검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갈라테아는 아루루의 말을 부정하면서 클레온의 팔을 끌어당긴다.
"굳이 성검을 사용하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면 `마성검사`라고 하라구."
그렇게 말하면서 멋대로 새로운 클래스의 명칭을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아루루도 클레온도 쓴웃음을 짓는다.
[마성검사는 어감이 좀 안 좋으니까 성마검사 어떨까요~?]
은근슬쩍 성검을 앞에 두려고 하는 칼리번을 향해 손바닥을 내려치는 갈라테아.
"... 어쨌든, 이걸로 정말로 모두 끝난건가?"
"아니, 아직 모두의 기억을 되돌리지 않았으니까."
클레온이 그렇게 말하며 베아트릭스를 바라보자, 베아트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온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레일이 가지고 있던 데미우르고스의 인자는 지금 아루루씨의 안으로 옮겨가 있어요. 그리고 성학과의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인자를 회수해야 하니까..."
그 말을 들은 클레온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데미우르고스의 인자`를 건네는 방법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아루루 처럼 원래 인자를 가지고 있던 이를 쓰러트리고 빼앗는 법.
두 번째는 몸을 섞는 것으로 영혼의 장벽을 약하게 한 뒤 인자를 옮기는 법.
"잠깐. 그 말은 즉, 인자를 가진 모두랑"
클레온의 말에 베아트릭스도 얼굴을 빨갛게 한다.
"성학과라면 제가 다시 한 번 모두와 하면 되겠지만, 다른 분들은 클레온 강사님에게 맡기는 게 좋겠죠?"
"에에!? 저희도 강사님이 좋아요!"
리오메스의 말에 반발하는 쌍둥이. 그리고 어째선지 조금 기대하는 눈치인 데미스.
아니 잠깐 데미스는 어째서...
"나도 클레온과 몸을 섞는 것 자체엔 불만이 없지만…."
아루루 역시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히지만, 이내 장난이었다는 듯이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넨다.
그것은 레일이 가지고 있던 가죽 장갑 형태를 가진 상대방의 영혼을 빼앗는 고대 유물 `소울 캡처`이다.
"이걸 사용하면 그 데미우르고스의 인자라는 것을 꺼낼 수 있는 거지?"
아루루의 말대로 그것을 사용하면 가능하긴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그 유물에 당하여 영혼에 상처를 입은 상태이다.
"...그런가, 그럼. 역시 클레온에게 안기는 게 가장 빠르려나…?."
클레온의 설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옷을 벗으려 하는 아루루.
"뭐, 뭐하는 거야!?"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한 클레온의 만류에 아루루는 대답한다.
"아니, 조금이라도 빨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역시 이곳은 좀 그런가? 바닥도 딱딱하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많다는 뜻으로 말한 거야! 왜 그래? 그 정도까지 상식이 없는 건 아니었잖아!?"
클레온의 질문에 아루루는 `흠...`하고 자신의 턱에 손을 올린 채 곰곰이 생각한다.
"아, 아마. 그가 가지고 있던 2할이나 되는 인자를 통째로 흡수해서 조금 자제심이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데요…."
베아트릭스의 말에 클레온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하하. 곤란해 보이네, 클레온."
"정말이야. 데미우르고스와 관련된 건 이제 질색"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어딘가 낯익은,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목소리에 클레온이 몸을 돌리면.
그곳에는 장신의 여성이 서 있었다.
키가 꽤 커진 클레온보다도 머리가 하나 더 큰 신장이었다.
땅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멈출 정도로 긴 보라색 머리.
쭉쭉 늘어나는 재질의 바지와, 얇은 천의 겉옷.
챙이 넓은 남색의 마녀 모자를 쓰고, 십자의 각인을 띄운 호박색의 눈.
"선생님!?"
"소, 소피아...!"
마치 세상 두려운 것을 보았다는 듯한 클레온의 반응과 그의 입에서 나온 여성의 정체 때문에 주변 일대가 술렁인다.
"소피아...? 소피아라면, 그 전쟁에서 용사와 함께 제국을 물리친…."
"대현자 소피아…? 저 사람이?"
그런 소란을 당사자는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신경쓰지 않는 것인지 모를 태도로 무시하며 클레온에게 다가간다.
"응! 오랜만에 누나랑 만나서 기쁜 것이구나?"
뒷걸음질 치려 하는 클레온의 어깨를 붙잡은 채 미소를 띠는 소피아를 보며 클레온은 `큭...`하고 침음을 흘렸다.
"누가 누나냐...! 멋대로 친한 척 굴지 말라고…!"
적개심에 가까운 거부 반응에 베아트릭스도, 아루루도 그런 클레온의 태도에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나서 기뻐서 그러는데. 탈체크 아저씨도 죽었고, 이제 이 세상에 남은 4영웅은 나랑 그 아이뿐이잖아? 젊은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너 정도라고 클레온~"
"... ... 정말로 그런 이유뿐이냐?"
클레온이 미심쩍다는 듯이 이야기 하자 소피아는 `응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한다.
"... 뭐. 그것도 있지만, 내 물건을 되찾으러 온 것도 있지. `소울 캡처`."
소피아의 말에 클레온은 아루루로부터 건네받은 장갑을 내려본다.
"역시 이거, 당신 거였나. 어디에 흘렸길래 그 녀석이 가지고 있던 거야?"
"아니, 그... 내기 도박에서 실수해서 왕창 빚을 져서... 그 때 담보로 넘겼던 거거든?"
그 말에 다시 한 번 술렁이는 주변의 사람들.
"대 현자 소피아가 내기 도박…? 그것도 빚을 질 정도로…?"
클레온은 머리가 아파져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소피아에게 질문한다.
"이걸 써서 영혼을 다치지 않아도 데미우르고스의 인자를 꺼내는 방법은?"
"아아, 있어. 뭐야 그런 게 알고 싶은 거면 물어보지 그랬어?"
소피아는 순수하게 웃어 보이며 회수한 장갑과 쌍이 되는 또 한 쪽의 소울 캡처를 꺼내 들더니 클레온에게 건넨다.
"이 둘을 동시에 써야 제어에 안전성이 더해져. 이걸로라면 영혼을 건드리지 않고도 데미우르고스의 인자를 이동시킬 수 있을 거야."
소피아의 설명에 클레온은 미심쩍은 얼굴이 되지만, 그래도 명색인 현자인 그녀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양쪽을 모두 장착한 클레온이 아루루를 보자, 아루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양손이 마주 잡히면, 소울 캡처를 통해 몸을 섞었을 때와 비슷하게 마력의 통로 아니, 영혼의 통로가 연결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클레온의 눈에는 그녀의 영혼에 섞인 불순물과 같은 `인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만을 살살 건드려, 달라붙어 있는 녀석들을 떼어내 클레온의 쪽으로 가져온다.
짧은 술식 전개를 통해 그녀의 몸에서 인자를 회수하는 것에 성공한 클레온은 무언가 신기하다는 듯이 소울 캡처를 바라보았다.
"아루루.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 아픈 곳도 없고, 오히려 조금 가뿐해진 느낌이야."
그녀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클레온에게 남은 일은 성학과의 학생들 모두에게서 조금 전 처럼 인자를 떼어내는 일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클레온의 앞에 줄을 서는 성학과의 학생들 때문에 악수회와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한 사람씩 클레온의 앞으로 와서 그와 악수를 하는 것으로 인자를 회수 받는 학생들.
그 와중에
"저는 여길 만져주세요! 접촉하는 부위는 어디여도 괜찮은 거죠!?"
"적당히 해!"
같은 작은 소동을 벌이는 학생도 있었지만, 무사히 그들로부터도 인자를 회수한다.
"일이 끝나면 이야기 하자고 클레온? 누나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아주 많아."
그런 클레온의 어깨를 두드린 뒤, 아카데미의 거리를 걸어가는 소피아를 잠시 눈으로 좇다가.
다시 눈앞의 학생들로부터 남은 인자를 회수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사람까지. 흩어져 있던 인자의 회수를 끝마치면 베아트릭스를 바라본다.
"그럼... 이걸로 정신 개찬을 해제할 수 있게 된 건가?"
"네. 정신을 집중해 보세요, 영혼의 안쪽에서 인자의 힘이 선배의 의지에 반응할 거에요."
그녀의 조언대로 눈을 감고 안쪽의 영혼을 향해 촉각을 뻗어 나가면, 확실히 고동치는 새로운 마력 각인이 인자로부터 뻗어 나와 심장에 들러 붙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외부에서 몸 안으로 침입한 마도구와 같이, 그곳에 마력을 통하면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악마가 가진 힘은, 말 그대로 인간의 영혼을 굴복시키는 힘.
다섯 데미우르고스는 인간이 가진 다섯 개의 강인한 요소를 나눠서 지배한다.
그중에서도 정신을 지배하는 힘으로 기억마저 바꾸어 버리는 악마의 힘.
그런 힘의 일부가 자신에게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면 그 힘에 대한 기대보다도 자신이 실수로라도 이 힘의 유혹에 패배해 멋대로 휘두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베아트릭스가 그런 클레온의 손을 붙잡으며 이야기한다.
"선배라면 괜찮을 거에요.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유혹이 있었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견뎌낸 선배라면…."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배의 곁에는 선배와 함께하는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이윽고 클레온은 그녀의 말에 안심을 얻어 천천히 마력을 돌리기 시작한다.
데미우르고스의 힘은 악마의 힘.
하지만 악마의 힘이라 하더라도 사용하는 이에 따라서 그 결과는 바뀐다.
자신의 마검이 그러하듯이.
"데미우르고스 인자, 기동."
클레온에게서 서서히 퍼져나가는 빛이 아카데미 전체를 감싼다.
모든 것을 엉망으로 바꾸었던 빛과 같은 종류의 빛이었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을 원래도 되돌리는 빛이었다.
001
다음 날 아침. 클레온은 전신에 붕대를 감은 채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언젠가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기억이 있다.
그래. 알베인을 쓰러트린 후, 갈라테아가 멋대로 칼리번의 핵을 삼켜버린 뒤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데미우르고스의 인자의 힘을 쓴 부작용일까, 그 자리에서 골격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기절했다고 한다.
그의 옆에는 훌쩍이는 얼굴의 라일라와 곤란하다는 얼굴의 베아트릭스가 있었다.
모든 것을 되돌리는 빛이 아카데미를 휩쓸고 가면서, 정신 개찬의 영향을 받고 있던 이들은 전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그 전에 기억을 되찾은 쿠온이나 사샤, 아루루와 성학과의 학생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러했다.
물론 이오나와 갈라테아, 베아트릭스처럼 처음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이들도 제외였다.
갑자기 피를 내뿜으며 쓰러진 클레온을 데리고 라일라의 저택으로 돌아온 일행은, 마찬가지로 기절한 라일라를 방에 옮긴 뒤 클레온을 치료했다.
소피아가 말하길, 몸의 품고 있는 마력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그것들이 서로 반발을 일으킨 영향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몸이 익숙해지겠지만 그때 까지는 조금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것을 클레온은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깨어난 라일라는 일어나자마자 몸단장도 하지 않은 채 클레온의 간병을 하고 있던 베아트릭스에게 뛰어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엉엉 울어버린 것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딱 달라붙은 채 코를 훌쩍이고 있다.
"라일라. 친구에 대한 걸 떠올린 거랑, 죽은 줄 알았는데 사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라는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소피아씨가 클레온은 절대 안정이라고 이야기했잖아?"
클레온을 위한 죽을 준비한 쿠온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라일라에게 이야기한다.
"으읍.븝..."
입의 주변까지 붕대가 감겨 있어서 제대로 말을 못하는 클레온이 무어라 말하려다 이내 포기하자, 옆에 있던 사샤가 조용히 클레온의 붕대를 내려준다.
"...아니, 괜찮아. 이 녀석이 이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맞아요. 저랑 선배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나 봐요..."
"베아가 살아있는 걸 보면서도 잊어버린 채로 지내고…. 클레온에게도 엄청 부끄러운 말을 잔뜩 하면서 분명 미움 받았을 거야..."
라일라는 멘탈이 바스락바스락 부서졌는지 거의 유아퇴행 수준의 태도로 두 사람에게 붙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속이 좁지 않으니까…. 그리고. 기억을 잃었을 때의 너는 옛날 생각이 좀 나는 태도였다고 할까.`
"최악이야…! 어째서 나한테는 별의 의지나 신 같은 게 없던 거야...!"
"에이, 하지만 내가 있으니까 괜찮잖아. 마스터? 파파한테 가장 먼저 갔던 것도 나고~"
이니스가 라일라를 위로하지만, 라일라는 그런 이니스를 한 번 째려보더니 이내 다시 얼굴을 파묻는 것이었다.
"으음~ 제자가 이렇게까지 많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니 누나는 조금 복잡한걸."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소피아.
클레온은 고개를 돌릴 수 없으니 눈만 돌려서 그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결국, 모습을 드러낼 거면 처음부터 도와주지 그랬어?"
"그건 안 돼. 옛날에 원로회들과 계약을 맺어서 아카데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직접 손을 대는 건 불가능했거든. 그래서 이오나를 통해서 이것저것 전달한 건데. 사태가 정리됐으니 슬슬 나타나도 되려나 해서 나온 거야."
"아아. 그래…."
클레온은 그녀의 말에 한숨 섞인 대답을 한다.
"저, 저기... 소피아씨는 클레온씨의 누나인 건가요?"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신경 쓰였는지, 사샤가 살짝 손을 들며 질문한다.
"아냐"
"맞아"
그리고 상반된 대답을 하는 두 사람.
"흑마의 일족인 나에게 저런 누나가 있을 리 없잖아. 그저 내가 어린 시절에 같이 좀 지냈다고 누나라고 하는 거뿐이야."
"같이 좀 지냈다니! 레시아가 바빠서 나에게 널 맡겨놓고 같이 목욕도 하고 잠도 자고! 내가 얼마나 널 애지중지 했는데!"
"안 씻으려고 한 당신을 내가 욕탕에 끌고 갔고, 며칠째 밤을 새우려고 하는 걸 잠재운 것도 나겠지…."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대충 관계가 눈에 그려졌는지 소피아와 클레온을 제외한 전원이 속으로 `휴우….`하고 한숨을 내쉰다. 약간의 부러움과 함께.
"하항….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걸까~? 클레온. 잊은 건 아니겠지!~"
"뭐를…. 아니, 잠깐. 설마"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는 소피아를 보며 불안한 예감이 든 클레온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축 처지고 만다.
"클레온, 네 동정딱지를 떼어준 게 바로 나란 사실을 말이야...!"
"... ..."
"도, 동정!? 클레온의 첫 경험!?"
그 말에 쿠온이 들고 있던 식기를 떨어트릴 뻔하지만 가까스로 붙잡아 대형 사고를 면한다.
클레온은 축 처진 채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 어릴 적에 얘가 `소, 소피아. 나…. 여기가….` 라고 하면서~"
"아니 정말 부럽네요! 그때의 클레온은 대체 몇 살이었던 건가요!?"
이오나가 소피아의 말에 과잉반응한다.
"갈라테아."
"자, 자. 환자는 이제 진짜로 쉬어야 하니까 모두 잠깐 밖에 나가!"
클레온이 작게 중얼거리자, 모습을 드러낸 갈라테아가 짜증을 부리며 소피아를 제외한 모두를 방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내 겨우 조용해진 방 안에, 소피아는 클레온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한다.
"정말로 인기가 많아졌네! 클레온. 레시아가 보면 자랑스러워 할 거야."
"무슨 얘길 하려고 온 거야."
클레온의 말에 소피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탈체크 아저씨가 죽은 것도. 네가 모험가로서 활동하는 것도 모두 `레시아`의 흔적을 쫓다가 잖아."
"그러는 너도, 차원의 틈을 방랑하고 있었다면서. 베아트릭스에게 들었어."
"예전에는. 지금은 아냐. 아무리 나라도 조금 힘들거든."
클레온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이차원의 마력의 잔향을 느낀다.
탈체크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그 침식에 꽤 당했었다.
"계속할 거야?"
"물론이야. 작지만 단서도 잡았어. 메모리아 큐브야, 탈체크가 남겨둔 거지."
"그건 내가 그에게 준거야. 내용물을 확인하는 건 자유라고 하면서…. 나도 안의 내용물은 살짝 밖에 못 봤어. 레시아의 모습이 보인다는 걸 알아채는 정도."
소피아의 말에 클레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너는 포기한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이 이상 레시아의 뒤를 쫓아도 그녀가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현자로서도, 그보다 집중해야 할 문제가 쌓여있고."
"수호자는 바쁘군그래. 나야 평범한 모험가니까 그런 의무에 쫓기지 않으니 다행인가."
클레온의 말에 소피아는 피식 웃어 보인다.
"평범한... 말이지. 마검과 성검을 동시에 가지고, 이렇게나 많은 인연을 쌓아 올린 네가 과연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 클레온. 인과가 수속되고 있어. 너에게는 선택의 때가 찾아올 거야."
"... 예언인가?"
"현자는 예언하지 않아. 예측할 뿐이지. 석건을 이용해서 메모리아 큐브의 내용을 확인한다. 그게 분기점이야."
"... ..."
소피아의 말에 클레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잡념 속에서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설령 너희가 모두 그녀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너희에겐 너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지."
"... ..."
"하지만 나의 모든 건 그녀에게서 받은 거야.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찾아야 해."
그렇게 이야기하자, 소피아는 잠시 슬픈 얼굴이 되어 클레온에게 다가왔다.
붕대로 둘러싸인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며 클레온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착한 아이. 레시아는 분명 너를 자랑스러워 할 거야. 그리고 동시에 한없이 걱정하겠지. 화를 낼지도 몰라."
"... ..."
"하지만 너는 이제 어른이야. 그렇게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면 너를 아이라고 부르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겠네 클레온."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전이 마법이었다.
"조금 미래에서 널 기다릴게. 클레온. 다시 한 번 그때가 되면 너의 의지를 들려줘."
"미래라도 과거라도. 설령 다른 세계라도 나의 의지는 바뀌지 않아 소피아."
이윽고 모습이 사라진 그녀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며 클레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002
해가 져서 어둠이 깔린 저택의 방.
온종일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시간을 보내는 클레온은 결국 잠에서 깨서 눈을 깜빡인 채 다시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
아아. 이 패턴은. 하고 클레온이 조용히 눈을 뜨자.
그곳에는 라일라와 베아트릭스가 함께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보다시피. 나는 못 움직이는 환자인데."
"리, 리오메스한테 물어보고 왔어. 엉킨 마력을 푸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야. 그건 그 녀석의 전문 분야니까."
"그녀가 해줄 대답은 하나일 거라 생각하는데."
클레온의 대답에 베아트릭스도 고개를 끄덕인다.
"괘, 괜찮아요! 선배! 저희 둘이 어떻게든 해드릴게요! 리오메스씨 한테서 방중술의 기본이라는 책을 빌려서 전부 읽고 왔어요!"
"베아라면, 한 번 읽은 책은 내용을 전부 기억하니까. 문제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가지고 온 마법 약이 든 병을 들이킨다.
푸하…. 하고 숨을 내쉬는 두 사람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클레온♡"
"...선배♡"
물기를 띈 목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오며 밤의 시작을 알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