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운명
* * *
000
클레온이 따로 안내받은 천막의 안에도, 로브를 뒤집어쓴 여학생이 의자의 앞에 앉은 채 클레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막의 입구가 스르르 닫히면, 안으로 들어오는 불빛은 오로지 천막 안에 배치된 랜턴에서 나오는 주황빛뿐.
어스름한 분위기 속에, 클레온은 가면을 쓴 여학생과 순간 시선이 마주친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클레온이 자신의 앞에 앉기를 바란다는 듯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애 운을 봐주는 천막 치고는 어두운 편인걸."
"자주 그런 이야기를 들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연애점은 점술 학과의 주특기니까요!"
여학생은 클레온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농담에 대답하며 자신 있는 목소리를 발한다.
그때가 되서야 조금, 천막 안에 깔려있던 무거운 공기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왜 파트너를 나누는 거지?"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도 못 하게 되거든요. 점술은 뭐든지 진솔하게 임하는 게 제일이지만, 특히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연애운은 그런 면이 더 강한 편이죠."
여학생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우선은`이라고 덧붙이고 옆에 놓여있던 수정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일단 가장 간단한 것부터 해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클레온의 얼굴만 한 크기의 수정구를 턱턱 두드리는 여학생.
"... 생각보다 본격적인 게 나왔는데. 나는 점 같은 건 따로 봐 본 적이 없어서…."
"다 알려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손을 올리고 파트너 여성분을 떠올리면 돼요."
그렇게 말하고는 클레온의 손을 잡아끌더니 수정구의 위에 얹혀 놓는다.
클레온은 살짝 미심쩍은 얼굴을 하지만, 이내 여학생이 시키는 대로 아루루에 대한 것을 떠올린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미소, 그녀의 검.
"오오~ 잘 되고 있어요!"
그녀의 몸, 그녀의 약점, 그녀의 소중한 곳….
"응? 으응? 자, 잠깐만요? 클레온씨?"
그녀와 몸을 섞었던 날의 추억….
"거, 거기까지! 이 이상은 자극이 너무 세요!"
이윽고 다급하게 외치는 여학생의 목소리에 클레온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수정구를 내려본다.
처음에는 금빛으로 빛나던 수정구가, 완전히 핑크빛에 물들어 안에는 뿌연 연기가 가득 찬 상태였다.
"으음...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뭐하지만. 클레온 씨의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들어있는 것 같네요…. 역시 성학과의 강사..."
[여자와의 추억의 절반이 그런 느낌인 클레온에게 있어선 당연한 연상인데 말이야.]
"... ..."
클레온은 살짝 질린 듯 입가를 움찔거리는 여학생과 클레온을 비꼬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모를 갈라테아의 말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어. 서로에게 몸을 허락할 정도로 사이가 좋으시다는 건 잘 알겠네요. 사실상 연애운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가 아닐까요?"
"아루루가 보자고 해서 온 거니까…. 그래도, 무언가 볼 수 있다면 보고 싶은데."
클레온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여학생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 하고 무언가 떠올린 듯이 대답한다.
"그럼, 특정 파트너가 아니라, 클레온 씨의 인생 전체에서의 연애운을 보는 건 어떨까요?"
[헤에. 클레온이 어떤 여자에게 찔리게 될지 알 수 있는 건가?]
[불길한 이야기는….]
클레온이 갈라테아의 이야기에 돋아나는 등골의 오싹함을 애써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여학생 자신이 수정구를 잡고 무언가 주문을 외운다.
수정구에 반사되어있는 클레온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져 가며, 안에 나타나는 것은 무수한 별빛과 그 가운데에 존재하는 하나의 검게 빛나는 태양이었다.
"이건…. 꽤 드문 모양이네요."
"이걸로 무언가 알 수 있는 건가?"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클레온에게 대답한다.
"네. 클레온 씨, 가까운 미래에 여자분께 찔리겠네요."
순간, 천막 안이 얼어붙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농담이지?"
"아뇨, 진담인데요."
[헤에…. 누가 찌르는 걸까. 정말 궁금한걸….]
지옥의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갈라테아를 애써 무시하며, 클레온은 잠시 수정구를 바라본다.
문외한인 클레온이 봐서는, 대체 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여학생은 그런 클레온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그래도,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클레온 씨의 수명은 꽤 길게 남아있으신 것 같으니까요. 죽진 않으실 거예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지만…."
"애초에, 이렇게나 많은 여성과 인연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수도 있는 거죠. 자업자득이에요."
[이 아이, 말 잘하는걸.]
바깥에서 보면 완전히 여성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클레온을 질타하는 여학생과, 그에 동조하는 갈라테아.
클레온은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기."
여학생은 그렇게 말하며, 가장 멀리서 반짝이는 황금빛의 별을 가리킨다.
"클레온씨가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이 별이 클레온 씨의 운명을 가로지른 채 이동하고 있어요."
어째서일까, 황금의 혜성이라는 재앙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클레온의 짐작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가…. 그건, 다행이군."
"네. 뭐어. 그 별이 클레온 씨의 인력에 붙잡힐지는 너무 별이 멀리 있어서 알 수 없지만요."
여학생은 어깨를 으쓱하고, 클레온은 조용히 수정구를 바라본다.
언젠가 그 황금의 별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직한 채.
"... 그래서 결국 누구한테 찔리게 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 건가?"
"그것까지는…. 주변의 누구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주세요."
여학생은 조심하라는 듯이 이야기하면서 `부적`을 건네준다.
클레온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미묘한 얼굴로 부적을 받아드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후보에서 제외지?]
클레온은 혹시라도 갈라테아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갈라테아가 제일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001
두 사람이 거대 천막을 벗어나자, 공간을 열어젖히고 붉은 머리의 여성이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아카데미의 구석으로 이동한다.
조심스럽게 땅바닥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고 생각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까 전, 클레온을 유혹하다가 아루루에게 겁을 먹고 도망친 여학생이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왜 여기에…. 설마, 회수해 준 거야? 나 대신에?"
붉은 머리의 반인반마 하프 서큐버스인 이슈탈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정기의 덩어리를 검지와 엄지로 집은 채 입으로 넘기려 하는 소녀 서큐버스, `릴림`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놔두다가 꼬리를 잡히면…. 귀찮아... 이슈탈, 일 처리가…. 너무 대충…."
"그건 그것대로 정기를 모아다 줄 테니까 괜찮을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슈탈이 그렇게 대답하자 릴림은 불편하다는 듯한 얼굴로 쓰러진 여학생을 바라본다.
이슈탈에 의해 강제로 욕망과 마력, 그리고 저급 악마를 주입 당했던 소녀는 그 모든 것을 다시 회수당하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은 몸매도 평범하고, 머리카락도 검은색에, 타지 않은 피부를 가진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소녀였다.
"...또 다른 유혹마는…."
"제대로 촉매를 건네뒀어. 용사라고 하더라도 사용하면 한동안은 욕망에 지배되어 날뛸 거야. 이번에는 제대로 되겠지?"
이슈탈은 이제부터 일어날 일들이 기대된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원시의 마법을 사용한다.
아까전과 같이 클레온을 지켜볼 생각인 듯 하였다.
하지만, 그런 이슈탈과 달리 릴림은 조용히 이야기한다.
"유혹마 정도로... 그분의 영혼을 빼앗는 건…. 무모한 이야기….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어…."
"밑져야 본전이지. 거기에, 상대방의 역량이라는 것도 알아두고 싶고. 유혹마가 정기를 가지고 돌아와 준다면 덤이니까."
릴림의 지적에, 이슈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이야기한다.
어떤 적이라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이 그녀의 자세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자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릴림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 ... 이슈탈은, 그분을…. 너무 얕보고 있어…."
"알고 있어. 하지만, 근본적으로 비슷한 존재니까 알아. 클레온... 그 마검사의 영혼은 본래 이쪽에 가깝다는 걸. 릴림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슈탈이 입꼬리를 비틀며 이야기하면, 릴림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한다.
"... 물론. ...하지만, 그분의 영혼에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황금의 빛이…. 방해…."
평소에 어떤 표정도 없이 늘 졸린 듯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눈에, 일말의 증오가 보였다.
"그래. 그 빛을 지워내면. 그 남자는 분명 절대로 더 멋져질 거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궁이 울리는걸…."
입맛을 다시며, 기대 가득한 눈을 빛내는 이슈탈의 모습은 남성을 먹이로 생각하는 음마 그 자체였다.
다만
"... ..."
릴림은 그런 이슈탈을 보며, 여전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클레온에게 가진 감정 또한, 특별한 것이었기에.
002
"그…. 어땠어? 클레온은..."
거대 천막을 벗어난 아루루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역시 신경 쓰이는 클레온 쪽의 결과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서로가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꽤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은 아루루는 얼굴을 조금 붉게 물들인 채 클레온에게 물어본다.
"...나쁘지 않은 편이었어."
설마, 누군가에게 찔리게 될 거다.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클레온은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내용을 얼버무린다.
"그, 래? 그건, 다행이네."
아루루는 그런 클레온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아루루는?"
"나도 괜찮았어. 이것저것 조언도 받았고."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작은 케이스를 만지작거린다.
그 안에는, 점술사가 선물이라고 하며 건네준 팔찌가 들어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강하게 유혹하고 싶다면, 이 팔찌를 착용하라는 조언과 함께 건네받은 물건이었다.
검술 학과의 수석이자, 용사인 그녀이지만 역시 마법은 전문분야의 밖이기 때문에 조금 의심은 가더라도 시험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 아루루이지만.
아직 태양은 하늘의 정 중앙을 조금 지나 서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시간.
남녀만의 시간을 보내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였다.
그렇게 점을 보기 전보다도 약간 어색해진 듯, 낯간지러운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에 흘렀다.
어쩌면, 점술학과에 들린 것은 실패였을지도 모른다고, 아루루는 조금 후회하는 것이었다.
그때, 멀리에서 환호성의 소리가 올라오는 것을 들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쪽 방향을 바라본다.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은 아카데미 3대 학과 중 하나인 `마법 학과`의 건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는 지금 마법 결투대회가 한참 진행 중이라는 것을 문뜩 떠올린 클레온은.
아침에 라일라가 낮에 나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그 녀석…. 대회에 나가려고 했던 건가?"
클레온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루루는 잠시 클레온을 바라보았다가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감았다.
"... ... 방금, 라일라에 관한 걸 생각했지?"
조금 불만이라는 듯이 입을 삐죽 내민 그녀는 클레온의 어깨에 자기 얼굴을 기댔다.
약간이지만, 그녀의 무게가 자기 몸에 기대어지는 느낌과 함께 그녀의 마음이 클레온에게도 전해져 오는 듯했다.
`지금 당신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저예요.`
그 나이대의 소녀다운 귀여운 독점욕이자, 클레온을 향한 호소였다.
"... 미안."
"으응. 괜찮아. 클레온에게 다른 여성들이 똑같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나 매력적인 사람들이 많은걸, 하고 아루루는 덧붙인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만나게 된 시기도 늦고. 이 관계마저도, 당신이 다시 모험을 떠나게 되어 떨어지게 된다면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는걸."
아루루의 목소리는 조금이지만 슬픔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 슬픔을 떨쳐내 보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얼굴에 미소를 띤다.
"그러니까. 설령 떨어지게 되더라 하더라도. 소중한 추억이 변색하지 않도록. 제대로 각인시켜 줘. 클레온과 지낸 시간을."
아루루의 손이 뻗어와 클레온의 얼굴에 닿았다. 클레온은 그런 아루루를 바라보며,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는 자신의 가치를 아루루에게 묻는다.
"나는 네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인물인 건가?"
아루루는 클레온의 질문에 눈을 감으면서 이야기한다. 그 목소리는 천천히, 하지만 확신에 가득 찬 채였다.
"당연하지. 당신은 나의 은인이면서, 나의 호적수. 그리고,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한 남자. 그런 당신이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면, 나의 가치는 어떻게 된다고 생각해?"
클레온의 손이, 자기 얼굴에 닿은 아루루의 손에 겹쳐졌다.
많은 인간이 서로의 존재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한다.
그것은 때때로 이기적으로.
그것은 때때로 이타적으로.
클레온은 아루루의 목소리에서, 그 손의 따뜻함에서.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작가의 영애이자, 유리검의 용사이자, 검술 학과의 수석이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채, 기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소녀.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눌 수 있는 파트너. 강한 모습도, 약한 모습도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인연.
레일은 그녀의 약한 모습만을 보려 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녀의 강한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그 양쪽의 시선을 가진 클레온에게 아루루는 더할 나위 없이 이끌리는 것이다.
클레온 역시, 처음에는 그녀에게서 `레시아`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의 마음의 이끌림의 시작은 분명히 그곳이었다.
하지만 아루루는 레시아가 아니다. 그 당연한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그 운명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선택과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가진 인물.
자신의 아버지인 퍼시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 그의 생각을 바꾼 것도.
변절한 친구의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던 것도.
그런 강한 의지를 가진 아루루에게, 클레온은 순수한 호의를 품을 수 있었다.
"대답은? 클레온."
조금 장난스럽게 웃는 아루루를 바라보며 클레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 네 말대로. 지금은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
"응. 그걸로 괜찮아. 그럼, 마법 학과로 가볼까?"
아루루는 얼굴에 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다시 한번 클레온의 손을 붙잡았다.
아카데미의 풍경, 클레온의 모습, 자신의 미소.
망막에 각인되어 머릿속의 기억에 그치지 않고, 이 모든 찰나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추억이 세피아 색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003
"승자! 베아트릭스!"
우렁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리자, 단상의 베아트릭스가 마검 아리아드네를 허리춤으로 되돌리고 치마의 끝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관중들에게 인사한다.
그녀의 몸 주변에 떠돌던 푸른 불꽃은 이미 모습을 감춘 채로, 눈앞에 쓰러진 또 다른 마법 학과의 학생이 스태프들에 의해 실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휴우..."
어떻게든 이번에도 이길 수 있었다. 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는 베아트릭스는 다음 시합이 시작되기 전까지 부여된 약간의 준비시간을 활용해 조금이라도 쉬기 위해 단상을 내려오다가
"...응!?"
하고 시선을 휙 하고 돌려, 관중석의 한쪽. 그녀가 동경해 마지않는 클레온.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아루루의 모습을 본다.
[선배! 보러 와주셨군요!]
텔레파시를 보내며 클레온에게 손을 붕붕 흔드는 베아트릭스.
그때마다 전투 예복 드레스의 꽉 조이는 가슴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관중석의 남성들은 크흠, 하고 자세를 바로 하여 무릎을 붙이거나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돌린다.
[미안. 방금 와서 경기의 끝부분밖에 못 봤어.]
그런 베아트릭스에게 답장의 텔레파시를 보내는 클레온.
대답을 들은 베아트릭스는 살짝 김이 빠지는 듯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그에게 대기실로 와주기를 부탁한다.
[다른 학생분들에는 제가 말씀드려 놓을게요! 꼭 와주셔야 해요!]
"...라는데. 어떻게 하지?"
"괜찮아. 나도 그녀와는 이야기해보고 싶었으니까."
일단은 아루루에게 양해를 구한 클레온은 그녀가 흔쾌히 허락하자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 그녀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의 문에는 18연승 중! 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베아트릭스. 들어갈게."
"아! 네! 들어와 주세요, 선배!"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이 활짝 열리자, 베아트릭스가 환한 미소로 클레온과 아루루를 맞이한다.
그녀의 복장은 이전에 입고 있던 집행과의 제복과는 다른, 마법 학과의 제복의 위에 전투용의 예장을 덧입은 느낌으로.
귀족의 드레스와 같이 화려한 녹색과 검은색의 드레스에, 베이지색의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연승 중인 것 같은걸?"
"네! 오늘 아침부터 시작했어요. 집행과가 없어지면서, 저도 마법 학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실력을 보여주라고 라일라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이런저런 오해가 풀렸다고 하더라도, 베아트릭스에 관해서는 아직 미지의 존재이자 갑자기 나타난 인물로서 배척당할 것을 걱정한 것이겠지.
조금 강행 수단이긴 하지만, 라일라가 할법한 제안이었다.
"...그런가. 장본인은?"
정작, 그것을 제안한 라일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문이었던 클레온이 그렇게 물어보자 베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답한다.
"아침에 잠깐 얼굴을 보여주고 어딘가 가버렸어요. 볼일이 있다는 것 같아서…."
"...흐음. 그래..."
조금 어려운 얼굴이 된 클레온. 그러고 보니 루티와 함께 나갔던 것 같은데. 두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지 클레온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저기 아루루 씨랑 선배는 데이트 중이신 건가요?"
"음... 뭐. 그렇지."
클레온이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이야기하자 베아트릭스가 눈을 반짝이면서 클레온에게 이야기한다.
"선배! 나중에 저도 부탁드려요! 아카데미가 아니라도 좋으니까요!"
손을 부여잡고 붕붕 휘두르면서 이야기하는 베아트릭스를 보며, 클레온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베아양은 클레온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 있으면 질투 같은 건 느끼지 않는 거야?"
그런 베아트릭스를 보며 아루루가 이야기하자, 베아트릭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답한다.
"네? 물론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만, 질투는 하지 않아요. 저는 원래 라일라와 선배의 관계를 응원하는 느낌이니까요. 저는 어디까지나 선배의 후배 포지션에 있으면 괜찮아요."
"어째서?"
아루루는 그녀의 생각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이야기하자 베아트릭스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왜냐하면, 선배의 아내. 선배의 연인, 선배의 첩. 이런 자리는 많은 분이 노리고 계실 테지만. 선배의 후배라는 자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저만의 자리니까요!"
"... ..."
어찌 보면, 독점욕보다도 더한 무언가.
클레온도 아루루도 악의 없이 그저 순수한 생각으로 그 자리에 집착을 하는 베아를 바라보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선배는 또 다른 스승을 두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다음 순간.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은 채.
조용히 들려오는 베아의 목소리에 클레온은 불가항력의 의지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루루는 그런 클레온을 살짝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아아…. 하지만. 확실히, 한 가지 아쉬운 건 있네요."
하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베아트릭스는 입을 열었다.
"뭐가?"
"아카데미 축제의 3일째 저녁 9시에는,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무도회가 열리는데. 그곳에 연인끼리 참여하면 반드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거든요. 어라, 모르고 계셨나요? 분명 마지막에는 그곳으로 가실 거라 생각했는데…."
잠시, 클레온과 아루루가 입을 다문다.
"아루루? 설마 셋째 날에 만나자고 한 게…."
"아아…. 응. 클레온이 생각하는 게 맞아."
클레온은 그런 아루루의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힌 채 대답하는 태도에 맥박이 조금 빨라진다.
직전까지 숨기고 있거나, 그런 소문에 대해서는 클레온에게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아직 붙잡고 있던 손을 타고, 그녀의 두근거림도 전해져왔다.
다시 한번 낯간지러운 침묵이 흐르는 공간. 베아트릭스는 눈을 두 세 번 깜빡이더니 클레온에게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니까 리오메스 씨가 응원하러 오신댔어요. 인사하고 가실래요?"
"아, 아니! 괜찮아. 먼저 갈게."
리오메스의 이름이 나오자 기겁을 하는 클레온을 바라보며, 베아트릭스는 재밌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 스커트의 끝자락을 들어 올리며 관중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인사를 보낸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경애하는 선배. 저는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004
"...그녀는, 여러모로 굉장한걸."
마법 학과의 건물을 뒤로 한 채 이야기하는 아루루는 베아트릭스에 대해 그렇게 평가했다.
그녀에게 있던 모든 수난은, 단순히 생각하면 이 학교 전체의 악의를 한 몸에 받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사건이었다.
비록 클레온, 라일라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빨리 털어내고 밝은 모습을 되찾은 것은.
본래의 그녀가 밝은 소녀였기 때문이었겠지.
"그래. 역시 라일라의 유일한 친구였을 만해."
클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루루에게 동의한다.
성격이 교정되기 전의 라일라를 유일하게 얌전하게 만들었던 그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검은 교전보다도 대단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 ..."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아까 전, 무도회의 이야기가 아직 두 사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겠지.
여전히 이어지는 두근거림이 사라지지 않은 채, 정처 없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걷게 된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모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길을 따라,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샌가, 자유 시장의 안에 들어와 있는 자신들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이전 두 사람이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커다란 성 앞에서 멈추게 되었다.
"... ..."
"아..."
클레온과 아루루의 눈이 마주친다.
멀리서 아이온의 종탑의 종소리가 14번 울렸다.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
단순 계산으로 이 데이트의 원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까지는 7시간이나 남아있는 상태였다.
다만, 그때 까지 계속해서 이런 낯간지러운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두 사람 모두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발산. 시간 보내기.
아루루와 클레온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성의 안으로 들어가 방을 잡는다.
그리고는, 사라지지 않은 열기를 가진 채.
어느샌가 속옷만 걸친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며 침대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렸지만. 일단은 쉬고 가려고 온 거니까."
아루루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이야기한다.
클레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루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 쉬지 못할지도 몰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앞에서부터 밀어 넘어트리는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