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4부 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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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성직자, 에스카 틀로지. 그대를 성자의 가호 교단의 교리에 따라 최고 성위의 성녀로서 인정하노라. 이는 곧, 나를 이어 교단의 미래를 이끌어갈 존재이니라."
주변이 온통 새하얀 색으로 가득 찬 거대한 신전의 중심. 하늘에는 세 개의 원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각각 용사와, 성검과, 성녀를 상징하는 문양을 띄우고 있었다.
땅에는 수백이 넘는 성직자들이 새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얼굴에는 하늘에 떠 있는 문양과 같은 세 개의 원이 그려진 가면을 쓴 채 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들의 가운데에서 오직 고개를 드는 것이 허락된 것은 성자의 가호 교단 교황 에멜레우스 3세와 그에게 성스러운 베일을 하사받는 여성.
그 나이가 벌써 30을 넘었음에도, 그녀의 외모는 10대 중반에서 노화가 멈춘 상태로 전혀 변하지 않아 여전히 아름답고, 젊게 보였다.
은색에 가까운 하늘색의 머리.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내려오지만, 신성력에 의해 끌리지 않고 지상에서 약간 떠 있는 상태이다.
뜨고 있는 눈은 적갈색. 머리카락 색에 비하면 수수한 색이지만, 전신을 뒤덮는 신성력이 만들어낸 위엄 속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그들과 같은 인간다움을 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에스카 틀로지. 본래는 시골의 작은 성당의 수녀였던 그녀는, 어느 날 성검의 신탁을 받아 성검 `칼라드볼그`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후에 제국으로부터 왕국을 구하게 될 용사 `레시아`와 함께.
살아있는 기적. 희망의 천사. 왕국의 성녀.
다양한 칭호와 이명으로 불리는 그녀였지만, 처음부터 그녀가 신성 마법에 능숙하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분명 신앙심만큼은 다른 성직자들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늘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는 듯한 성격이었으며.
마냥 사람이 좋아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속을 뻔한 것을 자주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한 것이다.
그 부분만큼은 레시아와 닮아있어서, 여행의 도중에는 자주 소피아와 탈체크의 속을 썩인 것이었다.
그런 그녀였지만, 제국의 멸망으로부터 약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외모만큼은 변함없는 그대로이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고위의 성직자들과 비교해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신성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늘 자비로운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교단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며.
불행한 일로 절망한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성녀`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녀의 동료였던 용사 레시아는 모종의 이유로 행방불명 되었지만.
그로부터 1년. 그녀는 교단에서 교황의 다음가는 위치인 `최고 성녀`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증거인, 고대의 유물 중 하나인 성스러운 베일을 머리에 쓴 채 기도를 올리는 교단원들을 향해 미소를 짓는 그녀를.
탈체크와 소피아는 조금 먼 곳. 이 성스러운 교단의 전당의 입구에서 조금 걱정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이 소피아. 저 녀석…."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야…. 바뀌었어. 원래부터 그런 느낌은 있었지만. 설마, 저 정도라니."
탈체크의 지적에,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혀를 찬다.
"... 어떻게 할 거지?"
"어떻게 할 거냐고? 어떻게도 못 해. 그녀는 이제, 이 대륙의 가장 강력한 세력의 이인자야. 아무리 같은 용사의 동료였던 우리라고 하더라도, 나는 일개 마법사. 당신은 정보기관의 기사.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녀를 지켜보는 것밖에 없겠지."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탈체크에게 추가로 이야기한다.
"아아. 거기에 탈체크에겐 최근 가족이 생겼고 말이야."
"...쳇."
소피아는 불만인 듯한 탈체크의 어깨를 두드린 뒤 잠시 고민하는 듯 턱에 손을 괸다.
"그녀의 목적은 우리와 같아. 결국, `레시아`를 찾아내는 것이지. 그를 위해서라면 분명, 어떤 일이라도 할 거야."
"...어떤 일이라도. 인가. 결국, 동족이군."
탈체크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검을 강하게 쥐었다.
붉은 명도는 주인의 분노, 혹은 결심에 반응하여 낮게 진동했다.
"... 이건 분명 저주네. 우리가 우리에게 건."
"크흐흐... 그럴지도 모르겠군."
소피아는 탈체크와 함께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에스카를 바라보았다.
후에 `성모`라고 불리게 되는 최초의 여성 교황.
에스카 틀로지와 소피아, 탈체크.
과거 제국과의 싸움에 몸을 던진 용사의 동료 3명이, 한자리에 모인 마지막 순간이었다.
001
"그녀가 이번의 실험체인가."
흰색의 가운을 몸에 걸친 남성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방벽 결계의 안에 갇혀 있는 작은 키의 소녀를 내려다본다.
붉은 머리에 갈색의 피부를 가진 그녀는, 왕국의 서쪽에 있는 강한 육체를 지닌 소수 부족의 일원이었다.
불타오르는 전쟁과 화산 속의 대장간의 신 `불칸`이라는 자연계의 신을 숭배하는 야만적인 부족이었지만.
극도로 배타적이면서,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은 늘 주변의 나라나 마을과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불칸의 부족은 어째선지 여성밖에 태어나지 않으며 남성을 바깥에서 납치해 와 아이를 만드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남편을, 형제를 빼앗긴 피해자들로부터도 엄청난 원망을 받는 종족이었다.
다만, 그녀들 역시 투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바깥의 종족들을 모두 겁쟁이로 여겼으며.
이러한 그녀들의 성격을 눈여겨본 것이, 제국의 마지막 황제.
후에 대륙 전체를 전화에 휩싸이게 만드는 전쟁을 일으키며 `마왕`이라는 칭호를 함께 가지게 되는 세기의 악인. 마검 황제였다.
불칸의 부족은 마검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당시의 부족장과 마검 황제가 친선을 목적으로 한 혼약을 하고 그의 수많은 부인 중 하나가 되는 것으로 제국의 휘하로 들어갔다.
정말로 타오르는 불꽃처럼, 전쟁에서 강력한 마술과 창을 결합한 전투를 벌이며 제국 군대의 선봉에 서던 그녀들은, 그녀들이 생애에 바라던 대로 수많은 전투에 몸을 집어 던졌다.
덕분에 그녀들 역시, 흑마의 일족과 마찬가지로 악마의 후예라는 소문이 생길 정도로, 그녀들에 대한 증오는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제국이 파멸을 맞이하는 날. 그녀들 역시 파멸을 맞이했다.
불칸의 부족의 구성원들은 한 명을 남기고 모두 처형당했다.
일부는 살아남아 도망친 흑마의 일족과는 다르게, 불칸의 부족은 절대로 도망치지 않았고.
또, 제국의 휘하로 들어가기 이전에도 수많은 악명을 떨쳐왔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소녀는 비밀리에 어딘가의 연구소로 옮겨져 왔으며, 매일 같이 몸을 찢는 듯한 고통이 엄습하는 실험을 받고 있었다.
때로는 맨손으로 마물과 싸우게 되며.
때로는 강력한 중력의 마법이 펼쳐져 몸의 뼈가 비명을 내지르는 와중에서도, 목적지까지 움직여야 하는 실험.
때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피를 추출 당하여 그 피가 다른 시약과 반응하는 것을 지켜보는 실험.
차라리 죽였으면. 같은 생각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불칸의 축복은 남아있는 단 한 명의 신도인 그녀에게 전부 모여있어서.
그녀가 죽는 것은 곧 불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칸은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힘을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어떤가? 저 이교도 소녀는."
"거의 모든 실험에서 괄목할만한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와 비슷한 수치를 내는 것은 그녀를 포함해서 세 명 정도로….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소체로"
연구원으로 보이는 자는, 초로의 남성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남성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연구원을 질책한다.
"너무 많은 것을 입으로 말하지 마시게. 이 세계에는 어디에나 정령이라는 존재들이 있어. 쥐도, 새도 없는 곳이라도 그들의 존재를 항상 주의하게."
"죄, 죄송합니다. 후에 서면으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구원의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남성은 잠시 붉은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붉은 머리의 소녀는 그 남성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에 `경멸` 외의 것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봐 아저씨. 방금 그 할배는 누구야?"
"큭, 버릇없기는! 방금 그분은…. 네가 알 필요 없다! 어서 실험의 준비나 시작해!"
"쳇…. 알려줘도 괜찮잖아. 그래서? 오늘의 실험은 뭔데?"
소녀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연구원은 레버를 조작하여 그녀가 들어온 방의 다른 쪽의 문을 연다.
그러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소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였다.
"너희들의 육체의 강도를 테스트할 거다. 지금부터, 서로를 죽일 생각으로 싸워라."
"하아...? 이런 약해 보이는 녀석이랑 싸워봤자 재미없다고. 저번처럼 미노타우로스라도 데려와."
"...나. 약하지 않아. 네가. 더 약해 보여."
"...뭐라고 이 녀석…!? 좋아. 바로 때려눕혀 주지. 너, 이름이 뭐야?"
"릴림."
"나는 이슈탈이다! 덤벼!"
002
"잠깐...! 기다려 주세요! 어째서...! 저를 사랑한다고 해주셨잖아요!"
에메랄드빛의 머리를 흐트러진 여성은, 자신을 떠나가는 금발의 남성을 붙잡는다.
남성은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을 붙잡은 여성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정말로 미안하지만…. 귀족에게는 귀족이 해야 할 일이 있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미안하다."
어떻게든 슬픔을 죽이려는 듯, 담담하게 목소리를 내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짓말이야…!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그런 귀족의 의무 따위는 버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건 불가능해. 그것마저 버려버린다면, 나에게는…."
남자는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다시 여성에게 등을 돌렸다.
"형님은 이전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명실상부 이 나라의 가장 중역이 되었다. 그것을 옆에서 보좌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야."
"제가 그 옆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단 건가요?"
"평민에겐 무리다. 귀족의 삶을 견딘다는 것은. 너는…. 네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보내라. 나의 아내가 된다는 것에는 그만큼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야."
"... ..."
여성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남자를 붙잡고 있던 손을 땅에 떨어트린다. 그것을 포기로 받아들인 것일까. 남성은 뒤를 더는 돌아보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며.
"작별이다."
그렇게, 인사를 한마디 남긴 채 그녀와 함께 짧지만 달콤한 시간을 보냈던 사랑의 터에서 떠나간다.
여성은 싸늘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배를 부여잡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 안에는, 당신의 아이마저 있는데…."
그리고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면서 미친 듯이 웃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며 정신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그런 그녀는, 일주일 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왕도를 떠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을 신목의 마을을 향해.
003
"...클레온.... 클레온."
자신을 흔드는 손길과, 조용한 목소리에 클레온은 조금씩 눈을 떴다.
아직 달리는 마차의 안, 담소를 나누던 여성들도 하나둘 길어지는 여행에 지쳐 잠이 들었던 상황에서.
그를 깨운 것은, 인간의 모습을 취한 갈라테아였다.
"... 어떤 꿈을 꾼 거야? 영혼이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져."
갈라테아의 질문에 클레온은 조금 전 꾸었던 꿈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려고 노력하지만, 마치 안개 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그 이미지가 확실하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냥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듯이 갈라테아의 손을 잡는다.
갈라테아는 그런 클레온의 손을 마주 잡더니, 그대로 클레온에게 몸을 기댄다.
비록 그녀의 몸은 차가웠지만, 그녀라는 존재와 가까이 있을수록 클레온은 안심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용의 계곡의 마을에서 지낼 때 네가 무서워서 잠이 들지 못하면 내가 너에게 자장가를 불러줬었어."
"...그런가. 그건…. 몰랐군."
"후후. 그렇겠지. 나도 그게 자장가로서 기능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클레온은 다시 한번, 조금씩 몰려오는 졸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갈라테아와 이어진 상태로 잠이 들면, 그를 먹어 치우려는 모든 악몽에 가까운 환상은 갈라테아가 막아낼 테니까.
"갈라테아..."
클레온이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목소리로, 연인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자 가족이자 영혼의 반쪽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갈라테아는 오직 그와 단둘이 된 것 같은 상황에서만 보이는, 상냥한 목소리로 클레온에게 대답한다.
"...고마워..."
"...별말씀을. 자, 아직 왕도까지는 조금 남았어.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을 거야."
갈라테아가 그렇게 이야기하며 클레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클레온은 그대로 다시 한번 조용히 잠이 든다.
그녀는 마치 소년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청년을 바라보다가, 창문의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고, 바깥의 풍경은 흘러만 간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녹색의 초원, 푸른 하늘.
그 위로
불타는 대지, 유황의 연기. 그리고 붉은 하늘의 환영이 겹쳐져 보인다.
갈라테아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주먹을 쥔다.
"이번에는.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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