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추방되었던 마검사가 사실 파티의 기둥(물리)이었기 때문에 용사의 히로인들이 뒤늦게 매달려옵니다-139화 (139/506)

〈 139화 〉 신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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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해가 올라온 왕도의 거리는 슬슬 장사를 준비하는 이들로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어젯밤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왕과 교단의 가호가 있는 덕분이겠지. 밤자리를 조금 설쳤을지도 모르고, 어젯밤에 꾼 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왕도의 시민들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 시작되려는 그곳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은, 메이드복을 입은 꼬마 시종. 10살 내외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녀는 검은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채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고.

그녀의 뒤를, 흰색의 원피스를 걸친 여성이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에 쓴 페도라, 그리고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라 앞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도 용케 입간판 등을 피해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아아..."

그러면서 절망과 수치심 가득한 소리를 내뱉는 루베라는, 겉모습은 귀족 아가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그녀 역시 앞을 걸어가는 소녀. 그녀의 마검인 바리사다와 함께 트로메이아 가문의 시종. 그것도, 안주인인 오렐리아 트로메이아의 직속 시종이라는 신분으로. 원래라면 벌써 업무가 시작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하룻밤의 외박 덕분에 충분히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자신의 일터로 향하는 것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힘내고 싶었던 건 알겠지만. 왜 그렇게 죽을상인 거야?"

리사는 뒤쪽을 따라오는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며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루베라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루베라는 영혼에서 연결된 사이. 루베라가 기쁨을 느끼면, 그녀 역시 기쁨을 느끼고. 루베라가 슬퍼하면, 그녀 역시 슬퍼한다.

그런 점에서, 어젯밤의 그녀가 느낀 모든 것이 바리사다에게 흘러들어와, 조금 곤란할 정도로 기분 좋은 것을 경험했던 바리사다는 아침 일찍이 되어 언제나 처럼 주인인 그녀를 마중 나가기 위해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언니들(같은 배틀 메이드들)에게 인사를 한 뒤 공작가를 나선 것이었다.

스스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방에는 벽에 머리를 박은 채 소리를 내는 루베라와, 그녀의 자해를 막으려는 듯 팔과 몸을 붙잡고 있는 클레온.

아무래도, 밤중의 일을 모두 떠올리고 그것에 대한 수치심으로 제정신을 잃은 듯하였다.

클레온을 도움을 받아 그녀를 진정시킨 바리사다. 그녀에게는 루베라가 수치심을 느끼는 이유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나 본심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일까.

"루베라도 솔직해지면 편할 텐데 말이야. 그러면 분명 클레온이 더 루베라를 좋아해 줄걸?"

"시끄럽습니다…. 그런 거 불가능하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루베라는 벌려진 손가락 틈으로 바리사다를 죽이겠다는 듯이 노려본다.

바리사다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 돋는 시선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얼굴을 가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정말. 불가능하게 아니라, 안 하려고 하는 거라구. 루베라는.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자. 오늘도 저택에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자, 잠깐. 손을 당기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들이 보지 않습니까."

"어이! 메이드 아가씨! 오늘도 지각인 건가? 여동생이 고생이 많구먼!"

"하하하!"

"큭, 크윽..."

이런 광경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면, 거리의 점주들은 그녀들의 특이한 모습을 기억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루베라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리사다에게 끌려 공작가의 저택로 향한다.

옷을 갈아입고 라비타가 있는 곳으로 향하면, 먼저 일을 하고 있던 노라가 루베라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라비타! 루베라가 돌아왔어! 이제 말하면 돼?"

"응. 노라. 말해 줘."

라비타가 웃는 얼굴로 노라에게 그렇게 지시하면, 루베라는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무언가 말하려다가, 노라의 목소리에 의해 가려진다.

"에­ 그러니까. 일을 내팽개칠 정도로 질펀하게 안기고 온 걸 환영해요. 어젯밤은 몇 번이나 가버리셨나요?"

"큭. 시답잖은 소리를."

"어머, 허벅지에 흐르는 하얀색 액체는 무엇인가요?"

루베라는 몸을 흠칫하며 자기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가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핫.`하고 정신을 차리며 라비타를 향해 돌아본다.

"라. 비. 타...!!!"

"하하하하! 봐봐 루베라가 귀신 같은 얼굴이 됐어!"

"거기 서! 이 요괴 할멈!!"

"정말. 일은 언제 하려는 걸까."

바리사다는 빗자루를 든 채 추격극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001

같은 시각, 아직 익숙하지 않은 숙소의 문을 열고 클레온은 자신이 돌아왔음을 작은 인사말과 함께 알린다. 끼익, 하고 뒤편에서 기름칠이 덜 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아아. 겨우 집으로 돌아왔구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어젯밤의 격렬한 행위는 아무리 클레온이라고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조금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원래라면 바로 수색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공작부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을 테니 낮 중에 잠을 자 두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가면.

문에서 들렸던 소리와는 또 다른 비틀리는 나무 바닥의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금광경이나 라일라의 저택에서 지낼 때는 듣지 못한 소리였지만 낡은 건물, 적당한 숙소에서 지낼 때는 늘 듣던 소리였던 것을 겨우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신이 내는 발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가 점점 자신의 쪽으로 가까워진다. 가볍고, 살짝 간격이 짧은 발걸음. 라일라라면 조금 더 느긋하겠지. 한 박자, 그녀보다 템포가 빠른 그 발소리에는 반가움과 기대가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클레온 본인이 예상한 대로, 거실 쪽의 코너에서 몸을 꺾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웃는 얼굴을 한 아침의 사샤였다.

"클레온 씨! 돌아오셨군요!"

"좋은 아침. 사샤.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

"네! 아카데미에서 아침 조깅시간에 일어나던게 습관이 되어서... 오늘은 어제 못다 한 짐을 좀 정리하느라 나가지는 못했지만요."

클레온은 그렇게 말하는 사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치 진흙탕의 위를 걷는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 한다.

새로운 숙소는 클레온의 방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도중에 주방을 지나쳐야 하므로, 아침의 준비가 한창인 쿠온과는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미안 클레온. 현관까지 못 나가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면서 간신히 클레온과 눈을 마주친 쿠온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클레온 역시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냐. 나는 괜찮으니까. 아, 그리고 조금 잘게. 내 몫은 준비하지 말아 줘."

"뭐어?! 이미 만들었는데... "

"아­ 미안... 괜찮아. 쿠온이 만든 밥은 식은 뒤에도 맛있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클레온의 말에 눈에 띄게 실망한 듯한 쿠온이 그렇게 말하자, 클레온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미안`하고 말한 뒤에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콩콩. 하고 뒤에서 자신을 두드리는 듯한 감촉에 뒤를 돌자. 거기에는 웃는 얼굴의 라일라가 보였다.

"피곤하신 것 같네요. 손님."

"하아. ...하아?"

영문 모를 말을 하던 라일라는 손에 들고 있던 푸른 약이 들어있는 주삿바늘이 달린 포션병을 그대로 클레온의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따끔, 한 감촉과 함께 클레온의 안쪽으로 약이 파고들어 간다.

"뭐,야. 너, 뭘..."

"자. 자. 진정하고 심호흡."

갑작스러운 상황에 클레온이 당황하지만, 그것마저도 예상했다는 듯이 라일라가 앞으로 몸을 구부린 클레온의 머리를 쓰다듬자.

약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면서, 클레온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피로를 조금씩 지워간다.

"...아니, 정말로 뭐야? 이거."

"내 특제 피로 회복제야. 아침에 돌아온다고 연락을 듣기 전부터 준비해 뒀지."

인제야 클레온은 라일라에게 텔레파시를 보냈을 때 그녀가 코웃음을 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녹초가 돼서 돌아올 것을 예상하던 것이겠지. 솔직하지 못한 것은 라일라도 루베라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하니까. 그녀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레온은 두근두근하는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불안한 눈빛으로 라일라를 바라본다.

"부작용은...?"

"다음 날의 기력을 미리 당겨오는 거라, 약효가 떨어지면 미친 듯이 졸린다는 것 정도?"

마치, 라일라가 이전에 사용하다가 금지를 당했던 `가불`이라는 마법과 비슷한 효과였다.

라일라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을 한 클레온을 끌어당기더니, 쿠온에게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한다.

"오늘 쿠온은 교단의 부탁으로 신전에 출석해야 해. 마음 같아선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나도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나보고 따라가라는 거군. 해야 할 일이란 건?"

"어제, 트로메이아 저택에서 본 세토스라는 그 남자. 보고 무언가 느낀 거 없어?"

라일라의 그 말에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클레온. 확실히, 어딘가 기시감을 느끼는 얼굴이었고, 쿠온에게 보인 반응도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거기에, 그가 쿠온의 작은어머니와 아는 사이라는 것.

"어쩌면 그 남자. 알베인의 친아버지일지도 몰라."

"... ..."

그 말을 들은 클레온의 가슴이 어째선지 무겁게 울렸다. 알베인은 귀족의 사생아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귀족과의 이별을 계기로 정신이 망가져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쿠온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쿠온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 남자 앞에서 알베인의 이름을 꺼내는 건 그리 상책이 아니겠지."

"네 말이 맞군. 그래서. 하려는 건 뭔데?"

"우리들의 추측이 확실한지에 대한 뒷조사야. 왕도에는 믿을만한 정보통이 있거든. 너는 오늘 쿠온에 붙어서 그 남자가 찾아오지 않나 살펴.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조심해야 할 건 그 남자뿐만이 아니야. 지금 쿠온은 교단 내에서도 조금 복잡한 위치니까. 네가 지켜줘야 해."

라일라가 클레온의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 대고 강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클레온에 대한 신뢰였고, 동시에 알베인에 관한 것은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의지였다.

클레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로가 완전히 가신 몸을 일으킨다.

"쿠온. 역시 나도 아침 먹을게."

002

"이곳이... 아스테라 대신전..."

쿠온의 목소리가 클레온의 옆쪽에서 울린다.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 클레온 역시 자신의 앞에 있는 그것에 조금 압도될 것만 같았다.

거대한 건물이었다. 클레온이 보았던 여러 가지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것은 역시 아카데미의 중앙에서 보았던 모나크의 관이었지만. 눈 앞의 그것은 가짜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던 그것과는 다르게, 훨씬 웅장하고, 거대하며, 더욱 백색으로 찬란하게 태양빛을 반사하며 왕도의 중심지인 왕성에 가까운 곳에 경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대한 건축물은 고대의 도면을 복원해서 건축되었으며, 지탱하는 기둥의 개수는 72개. 기도문이 빼곡하게 새겨진 대리석의 거대신전은 영맥에 연결된 마력을 끌어올리며 이 왕도 전체에 신의 가호라고 불리는 일종의 축복과도 같은 효과를 흩뿌린다.

이곳이야말로 현재 대륙 곳곳에 퍼져 있으며, 악마들로부터,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사명을 지닌 것은 공천한 성자의 가호 교단의 총본산.

과거 제국과의 전쟁에서 대파되었던 것을 복원하며, 더욱 견고하고 강력하게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야 그렇겠지. 제국의 마수에서 이 대륙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용사와 성검, 그리고 성녀였으니까. 성자의 가호 교단의 구세주 전설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전쟁이 된 것이다.

"굉장하네..."

"그래..."

혹시 모를 일을 위해 허리춤에는 평범한 검으로 위장한 갈라테아가 걸쳐져 있었지만. 갈라테아는 신전의 가까이 가면 느껴지는 신성 마력이 기분 나쁜 듯 웅웅 하고 진동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저 안으로 들어가는거야? 싫다 싫어...]

푸념을 내뱉는 갈라테아를 속으로 위로하며 클레온은 쿠온을 바라본다.

"오늘은 뭘 하는 거야?"

"정기적으로 하는 교단 성직자들에 의한 봉사활동이라는 것 같아. 성유구(???)를 만들거나. 다친 분들을 치료하거나."

성유구라는 것은 교단에서 제작하는 마도구의 일종으로, 아무래도 마도구라는 이름을 교단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미지가 좋지 않으니,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뿐인 차이밖에 없었다. 담기는 마력도 일반적인 원소 마력이 아닌 신성 마력이라는 것의 차이이다.

교단이 제작하는 성유구는 묵주를 시작해서, 부적의 역할을 하는 것들이 대부분으로 성직자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제작하면 마도구와 같이 복잡한 술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착용자를 보호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물건들이 만들어진다고 하니.

신성 마법의 기본은 사람을 위한 마음이라고 쿠온이 이전 이야기 한 것을 다시 떠올리면,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까탈스러운 계산을 통해서야 겨우 위력을 발휘하는 마법과는 다르게, 기본적으로는 높은 소양이 필요하다지만 그런 마음가짐과 기도로 위력을 발휘하는 신성 마법의 쪽이 더 엉망진창인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 예민한 것일까. 물론 일반적으로는 신성 마법이 그냥 마법보다 난이도가 높다고 말해지는 것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었다.

사람의 몸을 치유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정된 것을 정화하는 신성 마법은, 확실히 라일라나 베아트릭스, 클레온 등이 사용하는 파괴를 위한 마법과는 정반대이지만.

클레온은 본능적으로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가진 신성마법에 대해서는 그와 동급의 파괴마법과 같이 꺼림칙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었다.

"어쨌든. 안쪽으로 들어갈까. 저번에 뵙던 신부님께서 안내해 주신댔어."

쿠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신전의 입구를 통과하면, 그녀가 이야기 한 대로 이전 아카데미로 찾아왔던 신부가 쿠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대로 와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쿠온 양. 지금 신전에는 많은 성직자분들이 파견 임무로 자리를 비우신 터라. 정기적으로 열리는 봉사활동에 참여하실 수 있는 분들이 적어져서 곤란해하던 참이었습니다. 이전에 말씀하셨던 동료분들과의 일은 잘 진행되고 계시는가요?"

"네. 아직 이곳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서 그렇게 큰 진전은 없었지만. 출발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 좋은 인자한 미소를 짓는 신부의 친절한 말에 쿠온도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면, 신부는 이번에는 클레온 쪽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한다.

"클레온 씨. 동료분의 시간을 빼앗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어가셨으면 하는군요."

그것이 예의상의 말인지, 아니면 그의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쿠온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 오는 신부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도 없다고 생각한 클레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클레온이 마검사라는 것도, 흑마의 일족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멜레우스와 에스카의 교화정책의 덕분일까,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자신들을 박해하는 교단원은 없었다. 뒤에서 공작을 펼치거나, 수군거리는 인간들은 있었지만.

신부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앞서서 걸어가며 클레온과 쿠온을 교인들이 모여있는 커다란 예배소로 인도한다. 의자는 모두 한쪽으로 치워두고, 상처를 입은 병사나, 허리를 삐끗한 노인들. 그리고, 아름다운 수녀들을 목적으로 꾀병을 부리는 듯한 모험가들을 시작하여 상당한 인원이 그 자리에 모여 저마다 붙어있는 성직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비슷한 활동이 엘레시아에도 있었지만, 이만큼 사람이 모이는 걸 보는 건 처음이네요."

"...그야 이 정도로 교단 활동이 활발하면, 의원이나 병원 같은 게 장사를 접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약간 방향성이 다른 놀라움을 보내는 두 사람을 보며, 신부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 뒤, 우선은 성유구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 쿠온. 그리고 클레온은 그녀의 옆에 앉은 채 그녀에게 이상한 인물이 접근하지 않는지 팔짱을 끼고 주변을 살핀다.

옆에서 들려오는 콧소리에 시선을 돌리면, 손재주도 좋게 실에 구멍이 뚫린 구슬을 통과시키는 쿠온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만드는 부적은 분명, 다른 사람을 지켜주는 힘을 강하게 가지고 완성되겠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쿠온은 클레온에게 실과 구슬을 건네준다.

"클레온도 한번 해볼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뜬 클레온. 하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 나는 됐어. 성직자도 아니고, 내가 만들면 저주 같은 게 붙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 신성 마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깃들면 분명히 멋진 성유구가 완성될 거야."

클레온에게 쿠온을 부탁할때의 라일라와 마찬가지로, 클레온을 믿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쿠온.

그 강한 의지에 어쩔 수 없이 실을 받아든 클레온은, 조심스럽게 구멍에 실을 통과시킨다.

"와! 잘하네 클레온! 나는 처음에 했을 때는 하나 끼우는데도 몇십 초씩 걸렸는데!"

"... 그래? 어쩌면 나는 마음이 담기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정말. 그런 소리나 하고. 후후. 괜찮아. 열심히 해 줘."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괜히 퉁명한 대답을 하는 클레온을 격려하는 쿠온.

클레온은 그런 쿠온이 조금 눈부시게 느껴졌기에 시선을 다시 만들고 있던 묵주로 향한다.

그때.

자신을 섬뜩하게 노려보는 듯한 시선의 존재를 느낀 클레온이 황급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상냥한 웃음을 띤 채 자신들을 바라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은색과 하늘색이 섞인 듯한 긴 머리, 머리에 씌워진 성스러운 베일과 교황의 증거인 관.

몸 전체를 뒤덮은 하늘거리는 성직자의 복장. 그리고, 미소 속에 보이는 눈동자.

마력시 같은 것을 쓰지 않더라도, 찬란한 빛을 머금은 신성 마력이 통하지 않아도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존재감을 가진 인물 따위 이 장소에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고 생각하면­

"에, 에스카님...? 에스카님이시다!"

"서, 성모 에스카님! 어째서 에스카님이 이곳에!"

순식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회장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성모이자 교황인 에스카를 보기 위해 가까이 오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라스톨."

"네. 에스카님."

에스카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부르자, 머리까지, 전신을 플레이트의 갑주로 뒤덮은 여성이 방패를 들고 사람들이 자신의 앞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는다.

그러면, 누구도 그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거나,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설교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만남을 위해서. 온 것이지요."

에스카는 조용히 교인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 또박또박. 한 글자씩 잘 들리도록 이야기한다.

그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마치, 그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교인들에게 전달하는 듯했다. 미안하다는 감정이.

"오늘의 저는, 교황이나 성모가 아닌. 일개의 교인으로서 이곳에 있습니다. 부디, 저에 대한 것은 신경 쓰지 말아 주시고. 오늘의 행사를 이어나가 주세요."

에스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교인들은, 하나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베라스톨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신성 마력이 깃들었던 방패를 등으로 되돌리며. 말없이 에스카의 뒤쪽으로 가서 선다. 마치, 기사의 갑옷을 따로 장식해 놓은 것 같은 부동의 자세였다.

"교인 분들이 배려심이 많은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렇지? 클레온. 그리고­ 쿠온 양."

"아, 네... 네! 그, 그렇네요…."

쿠온은 잔뜩 긴장한 눈치로 에스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더듬거리면서도 대답했다.

그리고 클레온은 살짝 불편한 눈치가 되어 대답한다.

"...오랜만이야. 에스카씨."

"에, 에스카씨...? 탈체크씨도 소피아씨도 그냥 부르던 클레온이…."

쿠온은 놀란 얼굴로 클레온의 얌전한 태도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응. 오랜만이네, 클레온. 만나고 싶었어."

에스카는 그런 클레온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이, 소매가 크게 남는 성직자의 예복에서 손을 뻗어와 클레온의 머리 위에 얹었다.

비록, 그 성장은 10대에서 멈춰있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오랜만에 보는 자식을 만나는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그야말로, 교단의 성모에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쿠온은 그녀를 바라보며 작은 동경과 존경심을 품은 채 눈을 반짝이는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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