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추방되었던 마검사가 사실 파티의 기둥(물리)이었기 때문에 용사의 히로인들이 뒤늦게 매달려옵니다-140화 (140/506)

〈 140화 〉 성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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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계곡에서 구출된 소년은 레시아, 루티오스와 함께 모험가의 변방 도시 엘레시아로 옮겨져 그곳에서 낡지만 작은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감옥과도 같이 여겨지던 고향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던 소년이었지만, 그의 머리속에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불타오르는 마을의 광경과 사람들의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 쳐서 제대로 잠이 들지도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리는 몸에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도 힘든 채.

서서히, 서서히. 메말라가는 정신의 샘을 느끼며,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어둠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자신은 구원받았다. 황금의 별빛을 휘감고 나타난 용사 레시아에 의해.

하지만, 자신밖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직 10살이었던 소년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현실로서 다가왔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부 한 채 그저 잠들지 못해서 깨어 있는 상태가 이어지면 그런 클레온을 걱정해서 레시아와 루티오스. 그리고 그녀들의 동료들이 돌아가면서 클레온을 찾아왔다.

"이 녀석은 안 되겠군."

남성의 거친 목소리는 그런 소년의 이불을 들칠 생각도 하지 않고 혀를 차고 돌아갔다.

"너는 이제 무사하니까 그런 곳에 숨어 있을 필요 따윈 없어."

이지적인 여성의 목소리는 사실을 이야기하여 클레온을 안심시키려 했다.

"으응…. 하늘을 날면 기분이 좀 좋아지지 않을까?"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는 소년의 불안을 나름의 방법으로 지워보려 했다가 저지당했다.

"괴로운 마음. 나도 이해해. 내가 살던 곳도, 제국군에 의해 불탄 뒤, 나만 살아남았었으니까."

다정한 목소리는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같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 모든 상냥함이 소년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자신이 그런 상냥함을 받을 자격은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던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보지 않는 탑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던 것뿐.

비록 가족도, 친구도 없는 생활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일족, 같은 마을 모두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분명, 자신도 그런 운명이었다. 그런 운명에서 벗어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 근거 없는 죄책감만이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다가온 것은 자비로운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레시아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흑마의 일족의 마을에서…. 유일하게 구해낼 수 있던 소년이라고요."

그녀는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듯이 이야기했다.

"분명, 괴롭겠지요. 슬프겠지요. 그리고, 불안하겠지요. 어째서 자신은 살아남았는가. 어째서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고 있겠지요."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쓴 소년을, 그 위에서부터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소년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았다.

다정하고, 모든 불안함을 씻어내는 손길.

싸우는 것으로, 지식을 퍼뜨리는 것으로, 성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희망을 전파하던 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위하기 위해 말과 손길과 눈물을 흘리던 그녀.

작은 기적의 천사. 에스카는 전쟁이 끝난 후, 일행과 잠시 헤어져 대륙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무고한 사람들을 도우러 다니면서 한층 더 성직자로서, 인간으로서 성장해 있었다.

그 성장은 톡톡히 제 능력을 발휘하여, 정신적으로 내몰려있던 소년의 마음을 조금이지만 가볍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남은 덕분에 흑마의 일족은 끝나지 않았고. 당신의 존재가 그곳으로 향했던 레시아와 루티오스에게 커다란 희망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살아남아 줘서."

조금씩이지만, 떨리던 소년의 몸이 멈추었다. 그것을 손의 감촉으로 느낀 에스카는 조심스럽게 소년이 뒤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낸다.

그곳에는, 헝클어진 흑발과, 눈 밑에 그늘이 진 흑안을 가진, 창백한 피부의 곱상한 소년이 얼굴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정말로, 제가 살아남은 것에 의미가 있는 걸까요…?"

소년은 눈앞에 있는 수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수녀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소년의 손을 잡았다.

"물론이에요.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레시아가 한 일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욱 희망찬 곳으로 바꿀 겁니다. 물론, 당신의 세계도 말이죠."

다음에는 클레온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괜찮다면. 레시아의 힘이 되어주세요. 당신이라면 분명. 가능할 거예요."

그것이, 후에 성모라고 불리던 성녀 에스카와 클레온의 첫 만남이었다.

001

"그 뒤에는, 클레온은 저희 일행과 같이 지내기 시작했어요. 탈체크씨에게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레시아를 돕기 위해서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죠."

"...그때는 신세를 많이 졌어. 에스카씨."

클레온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에스카는 후후 웃으면서 얼굴에 손을 올렸다.

20대가 되어버린 클레온의 외견은 아무리 보더라도 에스카보다도 연상으로 보이지만, 에스카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10대의 외견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한 어른의 분위기였다.

쿠온은 에스카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면서 이런저런 리액션을 취하다가 그런 그녀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에스카님 한테만은 존칭을 붙이는 거구나."

"탈체크는 알다시피 근육 고릴라고... 루티오스는 아무리 나이 차이가 나도 어른이라는 느낌은 안 들었고…. 소피아는 오히려 내가 일상생활을 도와줘야 했으니까. 일상에서 믿을만한 어른은 에스카씨 뿐이었어."

"그럼, 레시아씨는…?"

"레시아는..."

"레시아도... 루티오스와 마찬가지려나. 용사로서의 모습은 물론 훌륭했지만, 평소에는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아이들과도 곧잘 놀아주는 사람이었거든."

쓴웃음을 지으며 레시아에 대한 것을 떠올리는 클레온. 에스카 역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것일까 클레온처럼 쓴웃음을 띄우지만, 이어져서 농담하듯이 내뱉는다.

"말하자면. 루티오스와 레시아가 누나. 내가 엄마. 소피아가 동생. 이라는 느낌이지?"

"네 사람 다 나이는 나보다 많지만…. 잠깐, 탈체크는?"

"옆집 아저씨려나…."

지옥의 스승이 `흥`하고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에스카와 클레온, 쿠온의 웃음소리가 조용히 그 자리에서 울렸다.

하지만 동시에, 쿠온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나 화목한 시절을 보내던 클레온이 어째서 다시 혼자가 되었을까.

그것을 이 자리에서 그들에게 물어봐도 되는 것일까.

"그 표정을 보면, 그 뒤의 일이 궁금하신 것 같군요? 쿠온양."

에스카는 쿠온의 얼굴을 조금 바라보더니, 그렇게 질문했다. 그 질문을 받은 쿠온은 움찔하고 몸을 떨 정도로 놀랐지만, 이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앗... 그... 네. 그렇게 표정으로 드러났나요?"

"네. 뭐, 당연한 의문이네요. 만약 그들 중 누구라도 클레온에게 붙어있었다면. 클레온이 조금 더 밝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 테니까..."

에스카는 잠시 옛일을 떠올리듯 심호흡을 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레시아가 사라진 것으로, 저희 일행은 구심점을 잃었습니다. 저희 모두에게 레시아는 소중한 사람이었고. 저희를 이어주는 것은 그녀와의 인연이었으니까요."

002

"...우리들 각자의 방법으로 레시아를 찾아보기로 했어. 그래서, 엘레시아를 떠나야 할 것 같아."

소피아는 그녀들의 앞에 앉아있는 클레온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클레온은 탈체크, 소피아, 그리고 에스카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루티는 밀고자에 의한 고발로 왕국의 고위층에 그 정체를 들키게 되어 한 번 구속되었다.

본래라면 인간계에서 추방당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왕국의 영토의 일부인 엘레시아를 수호하는 계약을 맺어 레시아의 뒤를 이어 길드 마스터의 자리에 취임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다만 조건으로는 마검황제와 같은 흑마의 일족인 클레온과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왕국의 인간들에게는 아직도 제국의 부활이라는 악몽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 그래서?"

클레온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소피아를 조금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시아가 사라진 직후, 클레온은 자신의 무력함을 곱씹고 있었다.

"... 그러니까. 우리 중 하나가 너를 데리고 가려고."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클레온과 눈높이를 맞춘다.

"너도 우리들의 가족이야. 여기에 두고 갈 순 없어."

"흐음. 뭐, 네 녀석을 두고 가는 건 불안하니까 말이다. 못난 제자라고 해도 말이야."

탈체크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클레온은 조용히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 두말할 것 없겠지만 나랑 같이 가면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게 될 거야. 특히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고대 유적을 중심으로 말이야. 여행 자체는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 그야, 나도 모르는 지식이 가득한 곳을 탐험하게 될 테니까. 내가 가르쳐 주면 마법 실력도 늘 거고."

소피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탐험할 유적들의 장소가 새겨진 지도를 보여준다.

"뭐. 노숙이 싫다면 나랑 같이 가는 것도 방법이다. 검술도 계속 봐줄 수 있고, 무엇보다 정보기관이니까 말이야. 그 녀석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여차하면 너도 어른이 되면 그곳에 취직해서 번듯한 왕국 기사 작위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탈체크는 전에 없이 진지하게 클레온의 앞날을 생각하며 제안을 해 왔다.

"나는... 순례 때문에 교단으로 돌아가게 됐어. 클레온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의 교황님은 훌륭한 분이셔서, 흑마의 일족이라던가 마검사라던가. 그런 종족이나 신분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셔. ...나는 클레온만 좋다면, 클레온과 함께 있고 싶어.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만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까."

에스카는 슬픈 얼굴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이야기했다.

클레온이 만약, 이때 누군가를 따라간다고 하면 그의 앞날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현자의 제자가 되어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도 가능했다.

검성의 제자가 되어 왕국을 지키는 기사가 되는 것도 가능했다.

성녀의 제자가 되어 악마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성전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클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소년도 그들과 헤어지는 것은 커다란 아픔이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의지한 채 살아갈 수만은 없었다.

그들의 보호가 사라지고 나면, 분명 여전히 제국에 대한 차별 관이 남아있는 이 도시에서 자신의 처지가 나빠질 것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다시 혼자가 되는 고독을 견디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들을 따라가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게 될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나는, 레시아가 지키려고 했던 이 도시에서 지내면서 레시아를 쫓을 거야. 언젠가, 이 단서를 찾으면 이 도시를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루티오스도 있고."

"...클레온, 그건 분명 훌륭한 마음가짐이지만, 루티오스는 길드 마스터를 그만둘 때까지는 클레온과 같이 지낼 수 없어. 거기에, 너는 아직 어린아이니까 어른의 보호가­"

소피아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탈체크는 그런 소피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조용히 탈체크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가­

"...흥. 꼬맹이가. 남자가 각오를 굳힌 눈을 하고 있군."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린다.

"이 바보 녀석은 포기해라. 누가 오더라도 움직이지 않을 거다."

"탈체크... 그렇지만."

"너희는 사나이의 각오를 그렇게 쉽게 무시하지 마라. 녀석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곳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거다. 혼자서 말이지."

그 말을 끝으로, 탈체크는 방을 나섰다. 그 등에서 느껴지는 것은, 클레온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조금의 섭섭함이 느껴졌다.

에스카는 슬픈 얼굴로 클레온의 손을 붙잡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이야기한 뒤 방을 나섰다.

"싫어~!! 클레온이랑 같이 갈래! 클레온이 없으면 나는 세탁도 못 한단 말이야~!!"

오직 소피아만이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떼를 썼지만, 클레온이 한숨을 내쉬며 역으로 그런 소피아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에스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

이 뒤는 클레온의 입으로 이야기되는 것이었다.

며칠 뒤, 그들은 자신들이 이야기한 대로 각자의 방식대로 레시아를 찾기 위해 흩어졌다.

보호자가 없어진 클레온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 흑마의 일족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혼자 엘레시아에 남아 생계를 위해, 그리고 조금이라도 레시아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모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뼈를 깎는듯한 수행을 통해 탈체크에게서 배운 검술을 자신의 형태로 완성하고.

16살이라는 나이에 솔로 모험가로서 모험을 시작했다.

그 뒤에는 쿠온도 알고 있는 이야기.

1년의 뒤, 한 소년과 소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에스카들과 헤어진 이후, 루티와는 가끔 길드 내에서 마주쳐도, 그녀의 입장상, 이전과도 같이 친근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

긴 시간 혼자였던 클레온은 그들과의 여행에서 다시 한번 사람과의 인연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레시아의 용사파티 같은, 가족 같은 동료들이 생기리라 생각했다.

`클레온. 넌 아웃이야.`

그날 까지는.

003

"알베인..."

쿠온은 잠시 주먹을 꼭 쥐며 클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아직 클레온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상태였다. 평소에 클레온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기에 가끔 머릿속에서 지워질 뻔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이야기의 펜촉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 부터 였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들었어. 성검의 용사가 폭주하여, 클레온을 위협했다는 사실은. 내 쪽까지 이야기가 올라왔을 때는 모두 끝난 뒤였지만."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야. 거기에, 이미 끝난 이야기니까."

클레온은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뒤 쿠온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표정을 바꾸어 진지한 얼굴이 되어 에스카에게 이야기했다.

"에스카씨. 나는 아직 레시아를 찾고 있어."

"나도 마찬가지야…. 교단의 힘을 동원하더라도 그녀의 흔적은 여전히 잡기가 힘들지만. 분명, 레시아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에스카의 말에 클레온은 고개를 끄덕인다.

"...예하. 슬슬, 시간이옵니다."

그때, 에스카의 뒤 쪽에서 요지부동의 자세로 서 있던 갑주의 여성이 다가와 에스카에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말이네. 어째서 즐거운 시간은 이리 빨리 가는 걸까."

에스카는 정말로 곤란하다는 얼굴이 되어 후후, 쓴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클레온. 가끔은 차를 마시러 와 줘."

"교황과 차를 마시러 왔다고 해도,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은걸."

클레온의 대답에 에스카는 입을 가리며 웃음소리를 낸 뒤, 몸을 돌리려는 때.

"저, 저기! 에스카님!"

쿠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에스카를 불러세웠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막 완성된 성유구인 묵주가 들려있었다.

"어머, 혹시 그것을 저에게?"

"네, 네... 분명, 에스카님께는 미미한 부적일지도 모르지만…. 받아주셨으면 해요."

에스카는 고개를 저으면서 쿠온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지 않답니다. 쿠온양은 성직자임과 동시에, 성녀. 그리고, 클레온의 동료니까요. 분명 이 성유구가 저를 지켜줄 거예요. 감사합니다. 쿠온양."

"...저는, 클레온에게 심한 짓을. 저질렀어요. 원래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심한…. 일입니다."

쿠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고해하듯이 자신의 마음을 에스카에게 드러냈다. 에스카는 조용히, 상냥한 얼굴로 쿠온을 바라본다.

"하지만. 클레온은 그런 저를... 용서하고, 곁에 있는 걸 허락해줬어요. ...반드시 클레온의 옆에서 그를 지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해 주세요!"

"네. 믿고 있을게요. 쿠온양."

에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쿠온이 건네는 묵주를 손에 받았다.

"어머. 특이한 매듭이네요."

"아, 그... 그건. 저희 고향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나비의 날개 같은 모양을 한 매듭으로 묶인 묵주가 에스카의 팔목을 통과시키자, 은은한 신성 마력의 빛이 나타나 작은 가호가 퍼져나와 그녀의 몸을 감쌌다.

"상냥한 마력이네요."

그렇게 말을 남긴 에스카는, 그대로 몸을 돌려 느긋한 발걸음으로 예배당의 출입구로 향했다.

그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갑주의 여성은 고개를 돌려 클레온과 눈을 마주쳤다.

얼굴을 뒤덮은 판금의 투구 사이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어딘가 클레온을 노려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에스카의 뒤를 따라 예배당을 나선다.

"...오늘, 같이 오길 잘했네. 클레온."

"그래. 설마, 에스카씨를 만날 줄이야."

클레온은 여전히 남아있는 에스카의 손길의 온기를 조용히 간직한 손을 쥐며. 그녀와 함께 레시아를 맞이할 날을 머릿속에 그렸다.

분명, 그런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클레온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004

교황의 집무실. 아스테라 대신전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거대한 방. 결계를 통해 바깥과 안을 통과하는 모든 소리는 일방통행으로 바깥에서 안쪽으로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에스카는 그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은 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라스톨."

"네. 예하."

에스카가 자신의 호위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에스카에게 가까이 간다.

그러자­

부웅! 하는 소리가 들리며, 신성력을 머금은 주먹이 베라스톨의 단단한 판금 갑옷의 복부에 꽂혀 들어갔다.

콰즈즉! 하고, 있을 수 없는 소리가 나며 판금 갑옷이 찌그러지면서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배에 작렬했다.

"커흑...!"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바닥을 구르는 그녀.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투구가 벗겨지면,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흩어져 내려오며, 감추어져 있던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에스카는 자신이 한 짓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며 입가에서 침을 흘릴 정도로 몸부림치는 베라스톨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다.

"마지막에 클레온을 째려봤지…. 어째서? 흑마의 일족에 대한 차별이야? 아니면…. 질투?"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예하...♡"

아니. 그녀가 느끼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었다. 어딘가, 성적인 흥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호흡에 곤란이 왔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을 받고, 얼굴을 붉힌 채 에스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곤란하단 말이야. 암퇘지가 주제를 모르고... 클레온에게... 감히...!"

에스카가 베라스톨의 멱살을 잡으며 들어 올리려는 찰나, 손목에 걸쳐 흔들리는 묵주가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에스카의 눈빛은 아까까지 클레온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던 것과는 동일 인물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것이었다.

"...쯧..."

혀를 차며, 에스카는 그것을 강제로 잡아 뜯었다.

묵주의 구슬이 땅으로 떨어지더니, 손에 잡힌 부분을 적당히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클레온에게 딱 달라붙어서... 자기 주제도 모르는 벌레들이 너무나도 많아…. 그 애는 레시아와 나의 아이... 누구에게도 넘겨줄 생각은 없는데…."

중얼거리면서, 베라스톨의 등을 짓밟는 에스카.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였고, 눈동자는 검고, 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레시아... 어디에 있는 거야? 빨리 돌아와 줘... 나는 레시아가 좋아할 만한 세계를 만들려고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는데…. 후후후…!"

"아♡ 예, 하... 죄송합니다앗♡"

에스카는 그렇게 베라스톨을 지르밟다가 문득, 발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쿠온이라는 벌레에 대해 걸 전부 조사하렴. 출신부터 이력, 필요하다면 가족관계까지."

"네, 네엣... 알겠, 습니다...♡ 본부대로... 그, 러니까. 좀 더...아♡ 흐그으으으윽♡"

교황의 집무실은, 안쪽에서 바깥으로 절대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감히. 누가 그 문을 두들기겠는가.

누구도 집무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하는 인물은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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