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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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 마법에 휘말려, 검은빛에 한번 휩싸였던 클레온은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칼리번을 잡고 주변을 살핀다. 주변은 온통, 무언가 끈적거리는 액체로 가득한 공간.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위장 속에 들어온 듯, 붉은색의 고기로 된 벽들에 감싸여 불쾌한 감각에 천장을 올려다보면. 그곳에는 거꾸로 매달린 채 클레온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 카말라의 모습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거꾸로 떨어지지 않고, 마치 중력을 무시하는 듯 어깨선을 타며 자연스럽게 상반신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도 마찬가지여서. 그런 자연법칙을 무시한 현상을 바라보는 클레온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린다.
"흑마력의 소영역..."
"정다압~☆ 이곳은 나의 소영역!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겠지?"
갈라테아가 클레온을 끌어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녀의 흑마력에 의해 결정된다. 자연법칙은 물론, 생사에 관한 것. 상처를 입거나, 신체를 결손하거나 하는 것마저, 흑마력만 충분하다면 모두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나 강력한 소영역이지만, 사용을 위해서는 상당한 마력 제어가 필요하다. 흑마력은 본래 세계에서 거절당하는 부정한 마력. 따라서, 흑마력으로 일정 공간을 둘러싸면 바깥과 안을 차단하는 결계. 즉 소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소영역은 그 존재만으로도 세계의 의지에 반하기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역은 순식간에 부서져 버리고 만다. 만약 소영역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철거당하게 되면, 소영역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막대한 흑마력은 회수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하기 때문에 흑마력을 사용하는 인간들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며, 저급한 악마들마저도 한 번 영역을 전개하는 데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이다.
그것을, 이렇게나 여유롭게. 웃으면서 전개하는 그녀를 바라보면 클레온은 한숨을 내쉰다.
"준비를 꽤 많이 했군."
"당연하지☆ 나는 미식가니까. 원하는 음식 재료가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법이야. 이 안은 나의 위장. 나의 꼬리와 같은 역할을 해서. 당신의 몸을 서서히 융해시키고, 그걸 마력으로 전환해서 나의 힘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말하자면 나는 점점 강해지고. 당신은 점점 약해지는 공간이랄까? 어때 클레온님. 등골이 서늘하지?"
혀를 낼름 내밀며, 입술을 핥아내는 그녀는, 클레온의 마력을 느끼고 그 맛에 취한듯이 얼굴을 상기시킨다.
어느샌가, 클레온은 이 살아있는 공간. 그녀의 위장이라고 말했던 이 공간의 찐득거리는 액체가 위액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만, 위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름진 고기기 바닥에서 기분 나쁜 촉수가 올라와 자기 발목을 휘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칫..."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자신의 마력을 서서히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도.
"으음~♡ 이것이 흑마의 마검사가 가진 농도 짙은 흑마력...! 버릇이 될 것 같아... 릴림 언니에게 주지 않고 내가 혼자 다 먹어버리고 싶어 버릴 정도로☆"
그녀는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면서 기분이 좋다는 듯이 손 위에 흡수한 마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순수한 흑마력의 덩어리를 마법으로 전환한다. 창, 화살과 같은 날카로운 무기의 형태로 변한 그것은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 흔들면 그대로 빠른 속도로 날아가 클레온이 있는 곳에 내리꽂힌다.
쾅!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흑마력이 분해되면서 올라오는 검은 안개가 그들 사이의 시야를 저지한다.
"캬하하하! 아무리 흑마의 일족이라고 하더라도, 덩어리진 흑마력을 막아낼 수단은 없겠지!? 괜찮아~ 나도 클레온님이 목을 치지 않은 것을 참작해서. 바로 죽이지는 않고, 팔다리를 자른 다음에 살아있는 딜도로 써 줄 테니까"
다음 순간, 부웅! 하는 소리가 들리면, 황금의 참격파가 날아와 그녀의 왼쪽 어깨를 잘라냈다.
"어?"
얼빠진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입을 벌리고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자기 어깨를 바라보았다.
"무슨"
그리고, 참격파가 날아온 곳에는, 일어 올랐던 검은 마력의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며, 그 사이로 보이는 빛나는 검의 도신을 바라본다. 그것을 쥐고 있는 것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검을 양손으로 잡은 채, 다음 일격을 날릴 준비를 하는 클레온이었다.
"어째, 서... 그렇게 움직일 수"
"아아. 미안하군. 노린 건 성가신 꼬리였는데. 다음엔 명중시켜주지."
"아니, 아니아니! 이상하니까☆ ... 이상하다고! 어째서 흑마력과 촉수에 묶여있는데도 그렇게 신성 마력을 내뿜을 수 있는 거야!? 여기는, 여기는 내 공간! 내 뱃속이라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실에 당황한 카말라가 미친 듯이 소리친다.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가 마력으로 흩어지며 어깨 부분에서 다시 모여 새로운 팔을 만들어내지만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그녀의 목과 몸이 분리되어 목이 지상으로 거꾸로 떨어졌다.
몸과 분리된 그녀의 몸은, 중력을 무시한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지만, 그녀의 목은 그러지 못한 듯했다.
"하아... 하아...!?"
클레온은 자신을 묶는 촉수의 힘이 서서히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푼다. 준비운동도 되지 못한 듯한 그의 태도에, 서큐버스 카말라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붉은 금성의 이슈탈 아니, 그 릴림과 비슷할 정도로 자신에게 공포를 주고 있다는 사실에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며 스스로의 몸을 재생하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머리와 떨어져 서서히 마력으로 분해되던 그녀의 몸은 그보다도 빠르게, 허공에서 또 반으로 절단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그녀가 상정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마력으로 바뀌며 그녀에게 흡수되지 못하고. 신성 마력에 의해 정화되어 사라져 간다.
"아, 아, 안 돼..."
클레온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황금의 성검 칼리번을 그녀의 머리에 겨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어버리겠다는 듯. 서슬 퍼런 아니, 올라오는 태양과도 같이 반짝이며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강력한 신성 마력을 내뿜는 그것.
"인정하지. 너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적들보다도"
`아. 황금색의 초승달.`
"말이 많아."
001
마치 투기장과 같은 공간. 탈출할 구멍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관객석은 공석. 환호성을 높일 손님도 없는 쓸쓸한 무대 속에서 귀를 시끄럽게 하는 철들의 부딪히는 소리 만에 이곳에 울려 퍼졌다. 검의 왈츠를 추고 있는 것은 흰색의 여기사와 갈색의 버니걸.
이곳의 용도는 어림잡아 짐작이 간다. 아마, 아까까지 있던 가게의 지하. VIP 손님들을 위해 준비된 `불량품`의 처리장.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체액이 스며든 바닥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더한 능욕의 극치를 달리는 최악의 구경거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이겠지.
흰색의 여기사 이오나는 자신이 애용하는 장검에 신성 마력을 흘려 넣어, 흑마력에 휩싸인 미스틸테인을 쳐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앞에서 그것을 무자비하게 휘둘러오는 것은 유스테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 실력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겠지.
카말라가 흘려 넣은 흑마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하여, 검법이라는 것을 구사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를 짓뭉갠 뒤에. 그저 눈앞에 있는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은 마치 광전사와 같았다.
하지만, 광전사가 분노와 증오로 움직인다고 한다면 유스테스는 그와 정 반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채, 그저 마구잡이로 흉악한 검을 휘두르면,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된다. 의지 없는 힘이 이렇게까지 위험이 될 줄이라고는 누가 생각했을까. 오히려, 제정신일 때의 그보다도 훨씬 미스틸테인을 잘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오나는 잠시 그에게 실례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렇게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이야 자아도 생각도 없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오지만. 마력의 침식이 진행되면 여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오직 서큐버스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충실한 여종으로서의 자아가 생겨날 것이다. `유스티나`라고 했던가. 명명 센스는 인정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그런 꼴이 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오나에게 있어서도, 유스테스는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스테스를 남성으로 의식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유스테스는 탈체크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가르친 제자이다. 비록, 제대로 된 검을 사사한 것도 아니고, 긴 시간을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탈체크가 남긴 의지의 불꽃은 클레온과 이오나에게 이어졌고, 분명하게 유스테스에게도 이어졌다. 그 의지가 있었기에 유스테스는 성검을 휘둘러 절계수를 막아내는 데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 생각했을 정도로 노력했다. 그런 의지를 짓밟는 음마의 행위에 대해, 이오나는 조용한 분노를 검 끝의 날카로움으로 갈무리하며 심호흡했다.
"이, 오...나..."
그때, 유스테스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마치 오랫동안 기름칠하지 않은 문에서 나는 소리와도 같이. 삐그덕, 삐그덕. 하고 망가진 태엽 인형의 태엽이 서서히 돌아가듯. 종이 한 장의 얇기밖에 남지 않은 얕은 자아로. 유스테스가 자기 몸을 움직여 이야기한다.
"나, 를... 베어.."
유스테스의 말에는 절망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심한 꼴도 있겠지만. 미스틸테인. 소중한 이들의 목숨이 몇 개나 겹쳐져 자기 손에 들려있는 이 검을 들고, 무고한 이를 상처입히려 하는 상황에 대한 절망. 의지를 빼앗기고, 본모습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기더라도 억지로 버텼던 그에게 있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절망의 나락. 그의 긍지. 성검의 이름을 더럽히는 이 작태를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멈추고 싶다. 그러니까, 끝내고 싶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가장 좋은 길은, 이 이상 꼴사나운 인생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싸움이라는 틀 안에서 쓰러지는 것이다.
유스테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오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오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자기 몸을 붙들고 있는 유스테스를 바라보며 검을 한번 내린다.
그리고, 한 차례 심호흡하며 미소를 짓는다.
"아버지는 제국의 검투장에서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과 싸우며 그들의 목숨을 앗았습니다. 어찌 보면 악인.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광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요."
주변을 둘러본 그들이 있는 곳은 그런 제국의 검투장을 모방한 듯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선 두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느 한쪽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듯이.
"저는 아버지 몰래 그 장소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습니다. 많은 검투노예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웠고, 검을 휘둘렀습니다. 어제까지 같은 탁자에서 술을 들이켜던 동료라고 하더라도. 운명의 신이 비웃음을 보내면 오늘은 술 대신, 동료의 피를 삼켜야 할 정도로."
탈체크가 그들과 싸우면서 어떤 감정이었을지 이오나는 짐작하지 못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진즉에 정상이 아니었고. 이오나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보이려 들지 않았다.
다음 순간, 유스테스가 더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크게 미스틸테인을 휘둘러왔다. 흑마력의 침식이 강해질수록, 그의 몸은 본래의 한계를 뛰어넘어. 리바운드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며 폭주하고 있었다.
"당신도 탈체크의 제자라면. 상대에게 자신을 베어달라거나, 죽여달라거나.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 그건, 절대로 상대방의 짐을 덜어주거나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전력으로 검을 들어. 나를 바라보고 휘둘러!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이오나는 고쳐 들고 검의 끝으로 유스테스를 가리킨다. 그녀의 붉은 눈에는, 아버지 비록, 양아버지이지만. 탈체크로부터 물려받은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저 역시 그렇게 할 겁니다. 관객도 없는 이 투기장에서라면. 누군가 한 명이 죽지 않더라도 야유도, 벌도 없을 테니까요. 서로의 몸에 한계가 올 때까지 검을 휘두르다 보면. 멈출 때가 있겠지요."
그리고. 라고 이오나는 덧붙인다.
"클레온이라면. 분명, 이 무대를 없애버릴 거예요. 그 또한, 저나, 당신과 같은 탈체크의 제자이니까."
"클, 레온..."
유스테스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 사저와 함께 조금 긴 대련을 하도록 하죠. 아버지로부터 `베이면 안 되는 곳`은 배웠겠죠?"
이오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스테스를 향해 번개처럼 달려드는 것이었다.
002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은, 창술사인 레밀리아였다. 수십, 수백이 넘는 횟수 합을 부딪치면서 그녀가 들고 있던 창은 성검에 의해 점점 깎여 나갔다. 어느샌가, 창대에 매달아 두었던 그녀의 붉은 속옷은 너덜너덜해져 넝마가 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땀을 흘린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숨이 차올랐을 뿐. 그도 그렇겠지. 이미, 주변에는 온통 푸른색의 수정으로 뒤덮여 있을 정도로 수많은 아론다이트가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아루루는 호흡이 조금 올라와 있을 뿐. 레밀리아와 마찬가지로 컨디션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피 한 방울은 물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상태에서 강적이었던 레밀리아를 무릎 꿇게 만들고, 아론다이트를 집어 들어 그녀의 머리를 가리킨다.
"후우... 훌륭합니다. 아무리 몸이 젊어졌다고 하지만, 이 몸에도 한계라는 게 존재하는군요."
레밀리아는 조용히, 창을 땅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자신이 패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이상, 싸움을 계속해 봤자, 자신의 창은 이 두꺼운 수정의 벽을 뚫을 수 없다. 아니, 설령 뚫는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부터 튀어나온 검들이 자기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이다. 완전히 상대하는 방법을 틀렸다. 이 성검. 아론다이트의 앞에서 지구전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단기 결전으로. 마창의 마력을 모두 소모해서 그녀의 심장 혹은 머리를 꿰뚫었어야 했는데.
같은 후회를 머릿속에 흘려보았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늙은이의 나쁜 버릇이군요. 라고, 스스로 완결하듯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루루는 달랐다. 그녀의 검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고. 차올랐던 차가운 분노 역시 그 냉기를 잃지 않았다.
여전히, 레밀리아의 머리를 가리킨 채 아루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붉은 가시의 레이몬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스스로 확인하듯 아루루가 이름을 입에 담으면. 레밀리아는 `하하...`하고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이었던 회색의 머리카락도 흰색으로 변해버렸고. 노련했지만 즐거움을 잊지 않았던 노장의 눈은 초롱초롱한 미소녀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몸의 근육은 지방으로 바뀌어 쓸데없이 돌출된 부위에 달라붙었고, 애창을 버리고 새로 쥔 창은 완전히 흑마력에 물든, 사람을 죽이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역시, 기억이 있었어…. 그렇다면 어째서 왕도를 위협하는 악마의 편을."
아루루는 조용히 그에게 묻는다. 붉은 가시의 명성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간접적으로도 연관된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과거 의용대의 선봉장으로서 제국의 마수에서 왕국을 지켰던 전설의 모험가가. 이제는 왕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마들의 수족이 되어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악마들에게 창끝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수많은 모험을 한 늙은이의 마지막 모험이지요. 평생을 인간의 편에서 싸웠으니. 때로는 악마의 편에서 싸우는 것도 풍류이지 않겠습니까?"
어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어 보이는 레이몬드 아니, 레밀리아를 바라보며 아루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용사로서, 수많은 사람을 접해왔다. 비록, 레일이라는 가장 오래된 친구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녀 본인은 타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언젠가 본적이 있는 배신당한 이의 표정이었다.
"어째서... 누가, 당신을 배신한 거지?"
"... ... 하하. 당했군요. 설마, 그 정도로 많은 경험을 쌓은 용사였을 줄이야. 아루루 트로메이아. 당신을 너무 얕봤던 듯합니다."
레밀리아는 아루루의 말에 놀란 얼굴을 했다가, 금세 평소의 여유를 되찾으며 웃어 보인다. 그것이 어느 정도 허세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아루루는 알 수 있었다. 동요가 보였다. 손끝. 조금의 떨림이 있었다.
"트로메이아 가문... 왕국을 수호하는 정의의 방패. 하지만 당신들은 내가 싸우려 하는 적과는 싸우지 못합니다."
"무엇을…."
"당신은 당신이 지키려 하는 모든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이야. 나는 용사로서 모두의 기대와 희망을 등에 업고. 소중한 이들, 지켜야 할 사람들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야말로. 나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명예를 담아 이야기하는 아루루를 바라보며 레밀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비록, 창과 검을 마주하긴 했지만, 그녀의 자긍심. 그녀의 영혼은 이미 타락한 자신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패배도 깨끗하게 인정한다. 그것이 비록 모든 것을 버렸을지언정. 잃지 않은 단 하나. 무인으로서의 레이몬드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걱정된다. 이 소녀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의 그림자를 보았을 때. 자신처럼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믿음이 있기에 배신이 성립하고. 명예가 있기에 모독이 존재하고. 진실이 있기에 거짓이 생겨난다.
"이 늙은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동료를 가지세요, 아가씨. 비록. 당신이 지키려 한 것의 어둠을 직면하더라도. 그들이 있다면 저같이는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늙은이의 조언을 내뱉는다. 적에 대한 조언은 계약위반일 수 있지만, 이곳은 어느 정도 단절된 공간인 것 같으니 문제는 없겠지.
아루루가 그의 말을 들으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고 한 그때.
쿠웅! 하고 거대한 마력압이 발생하여 공간 전체를 진동시킨다.
그러면, 아루루의 몸에 다시 한번 전이의 마법진에 의한 전이가 발동하며 그녀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연회장에 홀로 남은 레밀리아는 그것을 바라보더니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창을 잡아들었다.
"이것은 신이 나의 편을 들어준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편을 든 것일까."
자신이 이대로 진실을 계속 전하여 그녀를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정신의 견고함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레밀리아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바꾸지 않는다.
"팔라나티아. 나는 네가 있는 천국에는 갈 수 없겠는걸."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용주를 찾으러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붉은 금성의 이슈탈. 그녀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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