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황녀(9월 3일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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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악마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여성들.
그들 전부가 원래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오렐리아도 쉽게 믿어주지 않았지만 몇 명의 신원을 조사해본 결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녀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수가 30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저택으로 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여자로서 지낸 기간이 오래된 인물일수록, 남자였던 시절의 자신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있었으며, 어째서 자신들이 지내는 가게를 망쳤느냐고 착란을 일으키려는 이도 있었다.
오렐리아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탁핸 것은 왕도 내에 있는, 성자의 가호 교단 소속이 아닌 수도원에 그들을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
성자의 가호 교단과 깊은 관계가 있는 트로메이아 가문과는 다르게 오렐리아 본인은 '성령'이라는 신에 가까운 존재를 신봉하는 종교집단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서, 때때로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이었다.
유스테스도 그들과 함께 수도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눈을 뜬 것은, 병자를 위한 침대에서였지만.
그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이오나는 대략적인 사정을 그에게 설명하고, 수도원을 나섰다.
이번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모아 남성들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유스테스는 아직도 몸에 남아있는 흑마력의 잔재, 그리고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결과 축적된 데미지에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 정도였지만, 옆에 있던 미스틸테인을 손에 잡고, 눈을 감았다.
"... ..."
검의 울림은 공허했다. 흑마력에 당했던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미스틸테인도 마찬가지였다.
루베라나 클레온, 아루루 처럼 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그 의지를 느낄 수 있었던 이전에 비하여, 지금은 완전히 텅 비어버린 듯했다.
그것이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신의 약함이 불러일으킨 결과라는 것을 유스테스는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오나와의 싸움. 그리고 만약 레오나였다면 어떻게 했었을까. 같은 지나가 버린 시점의 후회.
그리고
"...클레온."
유스테스는 가슴의 술렁거림을 느끼고 곤란해하고 있었다. 길어진 머리카락, 변해버린 몸은 이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자신이 바뀌어 버렸다는 것을 유스테스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클레온에 대한 생각할수록, 더욱 진행이 빨라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로 변해버린 몸에, 정신과 영혼이 끌려가기 시작한다. 본래 자신이 동경하던 레오나에 대한 감정보다도, 여성으로서 이성인 클레온에게 더 커다란 끌림을 느끼는 것은 분명 좋지 않은 변화의 징조였다.
그는 두려웠다. 자신이 변하는 것이. 그리고, 더욱더 정신이 변화하게 되면. 지금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유스테스로 이루었던 작은 성장마저도, 무의미하게 부정되는 것이 아닐까.
"레오나. 나는 어떻게 하면..."
조용히. 어두운 방에서 유스테스는 홀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성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렇게 정했을 거다. 유스테스 우드녹커."
비록, 몸도 마음도 변하고 있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휘두를 검과, 검을 휘두를 육체가 남아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이오나와 검을 부딪치며, 그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고개를 들고, 검을 잡고. 베어야 할 대상은 명백했다.
001
맹목의 반인반마, 플라로우스는 그들을 이끌고 유적의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분명, 그 뒤에도 몇 개인 가 더 함정이 있었겠지만, 플라로우스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더는 함정은 발동하지 않고, 그들을 얌전히 유적의 안쪽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통이 넓은 로브 밑으로 삐져나온 굵은 꼬리가 눈에 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뻗어나 와 있어서, 마치 뱀의 꼬리가 움직이듯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멜리아. 세인트 프린세스로서 악마와 싸우는 것이 사명인 성전사인 그녀는, 플라로우스를 보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심호흡을 해야 했다.
신성마력과 반발하는 흑마력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녀는 아멜리아가 느끼기에도 강력한 악마였다.
그런 악마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부분을 믿어보려고 하는 신뢰 속에서 갈등하는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클레온이 봉인해 준 어깨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이었다.
마치, 상처 안에 숨겨진 씨앗이 그녀에게 반응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강하게 느낀 것일까, 플라로우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멜리아를 보는 듯하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안대를 써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움직이는 데에 문제가 없는 듯 했다. 거기에, 명백하게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내 플라로우스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벽으로 막혀있는 통로의 끝이었다.
왕도 지하에 있는 유적은 대부분, 이런 식의 벽에 막혀 있어서 더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어떻게 된 것인지 절대로 뚫을 수 없어서 방치된 유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거기에 더하여 이곳에는 플라로우스가 생활을 하는 듯 커다란 천막과 침대, 그리고 책상 등을 비롯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주전자를 걸어놓은 모닥불이 타닥, 타닥. 하고 푸른색의 불이 정체불명의 연료를 태우면서 화염을 자아낸다.
통로 자체가 거대한 실내 공간이니, 그 안에 따로 방을 만들 필요는 없었겠지만.
모험가 시절에 클레온이 하던 노숙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의 생활 환경이었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플라로우스의 물건들을 바라보더니 순간 몸을 움찔한 뒤 중얼거렸다.
"...제국 양식의 가구들이군요."
그곳에 놓인 물건들은, 왕국에서 흔히 사용되는 물건들이 아닌, 이문화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들뿐이었다.
곡선과 유선형의 디자인을 아름답게 여기는 왕국민들과 다르게, 제국에서는 각이 잡혀있고, 목재보다도 석재, 그리고 금속을 이용한 물건들을 더 높게 치는 경향이 있었다.
아멜리아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자 플라로우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맞아. 잘 알고 있는데, 꼬마야?"
"... 이전 책에서 읽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제국인 인가요?"
아멜리아의 말에 플라로우스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입고 있던 로브의 앞섬을 풀며, 몸에 걸치고 있던 그 커다란 천을 천천히 벗는다.
그녀가 안에 걸치고 있는 것은, 몸에 딱 달라붙는 형태의 의복으로 재질은 일반적이 천이 아닌, 모종의 마력을 머금은 옷감인 것으로 보였다.
여성스러운 몸의 라인이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었지만, 반대로 노출도는 적었다.
루베라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옷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전부 검은색으로 통일된 루베라의 옷과는 다르게 푸른색을 기조로 디자인된 그녀의 옷은 전투를 위한 복장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말이야. 지금은 어느 나라의 인간도 아니지. 이런 지하에서 살고 있으니까."
플라로우스는 그렇게 답하며, 주전자를 잡아 컵에다가 따뜻한 물을 붓는다.
투명하지 않은 적갈색의 액체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그레이가 눈을 반짝이지만 다른 이들은 약간의 거부감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이슈탈과 함께 제국의 황궁에서 지냈어. 우리들의 어머니가 마검 황제의 아내. ...아니, 첩이었거든."
그 말에, 거기 있는 전원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제국의... 황녀?"
클레온이 그렇게 말하자 플라로우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가계도만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내 아버지는 황제가 아니야."
그렇다면, 황제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낳았다는 것일까.
그들이 그런 의문을 가진 것 처럼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후'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이어서 이야기한다.
"순서대로 설명해줄게."
002
제국의 마지막 황제. 마검 황제는 그 본명조차 역사에서 말소되었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조사하는 것도 용서받지 못하며 아무도 그의 이름을 감히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그야말로, 이름을 불러선 안 되는 인간이다.
그가 처음 두각을 드러낸 것은, 흑마의 일족 평민 출신이었던 그가 제국의 사관 학교에서 다른 모든 제국 귀족들의 자제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을 때였다.
부모도 없이, 국경지대에서 태어난 고아 소년이 일반병으로 제국군에 입대해, 상사의 눈에 띄어 사관이 되기 위해 그의 지원을 받아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고귀한 혈통일수록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제국의 귀족들을 모두 누르고 사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것이 황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제국의 사관으로서 군대를 지휘하게 된 그는 제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문제들을 거침없이 해결해 나갔다.
노예로 쓰이던 오우거들의 반란도, 트롤 숲에서 아이들이 행방불명 되던 사건도, 누구도 답파하지 못했던 검은 별의 던전도.
갈수록 위상이 높아지는 그를 평민이라고, 고아라고 무시하는 인물은 없었다.
지병 때문에 아이를 만들지 못해, 후계자로 고민하고 있던 황제가 그런 그의 실력을 높이 사서, 자신의 양아들로 들이려고 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귀족들조차, 그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검을 부딪친 뒤에는 그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황태자가 된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왕이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것이, 왕국에도, 제국에도 있어서 큰 재앙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황제가 된 청년은 제국의 깃발 아래 인류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대의를 내세우고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제국은 이미 과거의 대국이었던 시절의 영광을 잃고 서서히 쓰러져가는 내리막길 위에 있었다.
영토는 왕국에 비해서도 적었고, 군사력도 단순히 수에서 밀리는 것이었다.
황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비대칭 전력'을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드래곤을 붙잡아 지배하고, 왕국에서 핍박받던 소수 민족을 끌어들여 아군으로 만들었다.
흑마의 마검사들로만 구성된 부대인 '마검대'를 만들어 집요하게 용사의 싹을 지닌 이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열세였던 군사력은 서서히 뒤집히기 시작했다.
고대의 기술을 적극 반영하여 만든 뛰어난 장비로 무장한 군사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던 왕국군에 비해서 훨씬 강력했다.
차근차근, 영토를 넓혀가는 제국군들은 용사 '레시아'가 나타날 때 까지 파죽지세로 나아가 왕도를 점령하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때, 제국군들과 싸웠던 왕국의 병사 중 일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제국군이 '악마'들을 부려 자신들과 싸우던 것을.
황제는 소수 민족을 제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지위를 약속하겠다는 차원에서 부족의 고위 여성들을 자신의 아내들로 맞이했다.
본처였던 흑마의 일족의 여성을 제외하고도, 불칸의 후예들의 부족장.
그리고 강력한 악마 소환술을 계승하고 보존하는 '메기도의 일족'의 족장의 딸. 즉. 플라로우스의 어머니이다.
왕국의 용사들이 가진 성검의 힘을 가장 경계한 황제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그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일족의 피를 이어받은 반인반마의 병사들을 만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를 위한 실험적인 모체로써 선택한 것이 자신의 첩으로 받아들인 여성들이었다.
고위의 악마를 소환하여, 자신의 첩들을 범하게 했다.
이슈탈도, 플라로우스도 그렇게 태어났다.
황제에 완벽하게 심취해있던 그녀의 어머니들은 황제의 미친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여 그녀들을 낳았다.
만약 황제와 동침하여 태어났다면, 황녀로서 대접받았을 그녀들은 반인반마로 태어났다. 실험은... 실패에 가까웠다.
본래의 복적은 반인반마로 태어난 아이들의 마력을 조정하여, 순식간에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반인반마였지만 육체는 인간에 가까웠고, 마력의 조정은 불가능.
즉시 전력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황제는 빠르게 그녀들에 관한 관심을 접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결국. 그 후에 황금의 용사 레시아에 의해 황제가 쓰러지기 전까지.
그녀들은 그저 황실에서 아무런 기대도,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자라났다.
그들은 주어진 방에서 나가는 것조차 용서받지 못했으며, 제국이 멸망할 때 까지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보냈다.
그리고 제국이 멸망되어도 그녀들의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불칸의 후예들과 메기도의 일족은, 왕국의 증오의 대상으로서 모두가 처형되었다.
흑마의 일족은 성자의 가호 교단의 비호를 받아 왕국령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전부터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일족.
특히, 악마들을 부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메기도의 일족은 시체가 남는 것 조차 용서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슈탈과 플라로우스는 살아남았다.
왕국군들 보다도 먼저 황궁에 도착한 소속 불명의 병사들이 아직 어렸던 그들을 빼돌린 것이다.
그들이 옮겨진 것은 누가 운영하는지도 모르는 한 연구소였다.
같은 황궁에서 살았지만 결코 마주칠 일 없었던 플라로우스와 이슈탈, 그리고 릴림은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003
"... ..."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플라로우스는 주전자 안의 물이 전부 사라진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외의 인간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검 황제가 빌어먹을 자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행위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슈탈의 악행을 생각하면, 그녀를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마검황제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클레온도 루베라도, 자신들에게 그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속이 거북해졌다.
"...유폐된 생활..."
그리고, 아멜리아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뒤 조용히 중얼 거렸다.
주먹을 쥐고 가슴에 손을 올리면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어떤 감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연구소라는 것은?"
"우리를 이용해서 악마를 연구하려고 했던 곳이야. 뭐. 그런 연구소가 다 그렇듯이 실험에서 사고가 일어나서 우리들이 극적으로 도망쳐 나온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지만 말이야."
클레온의 질문에 플라로우스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남겨져 있는 의문.
"릴림도 너희와 같은 건가?"
"...그녀는. 달라. 그녀는 특별하지. 응.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어. 정말로 미안하지만, 나에게도 '맹약'이란 게 있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보인다, 그녀의 손에는 맹약에 의한 저주의 침식이 보였다.
이 이상 그녀에 대해 질문하여 그녀가 대답하게 되면, 그녀 역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게 생각한 클레온은 우선, 질문을 단념하는 것이었다.
"뭐. 연구소에서 탈출한 뒤에는 이 뒷골목으로 흘러들어와 살아남기 위해 '아스타로테'라는 가족을 꾸렸어. 원래는, 이런 뒷골목에서 힘없이 지내던 여성들을 모은 집단이야. ...이슈탈은 그런 여성들에게 보금자리를 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우리들도 그걸 도왔지. ...그 목적이 변질되어서 데미우르고스를 강림시킨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 어째서 데미우르고스를 강림 시키려는 거지?"
라일에게는 아루루를 자신의 이상적인 세계에 가두기 위해서. 검은 교전에게는 대적자인 황금의 혜성을 불러내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슈탈에게는?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
플라로우스의 대답에, 아멜리아가 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클레온도 루베라도 그 말을 듣고 눈을 두세 번 깜빡이더니
"...옥좌. 라는 것은 왕국의 옥좌인가?"
"지금 이 대륙에 왕이 존재하는 것은, 왕국 뿐이니까요."
클레온과 루베라의 말에, 플라로우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그 이슈탈이라는 반인반마는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는 검까?"
그레이가 그렇게 말하면, 아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답답한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조금 호흡이 가팔라진듯 했다.
반란이라는 키워드 역시 그녀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도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니.
"막아야만 해요. 이슈탈을."
아멜리아의 어두운 목소리가 울리자, 클레온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것은 안심하라는 뜻도 있었지만, 조금 진정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멜리아의 몸 상태는 클레온 자신이 상처를 봉인해 줬다고 하지만, 아직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조급해지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품을수록 씨앗은 다시 발아하기 시작할 것이다.
"플라로우스.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아아. 물론이야.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유료. 역시, 대가를 받아야겠어."
플라로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대가'의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냈다.
루베라는 얼굴을 찌푸리지만 이내 가방을 열어 왕국 금화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꺼내려했다.
하지만, 플라로우스는 그런 루베라를 보면서 고개를 젓는다.
"이런 곳에서 혼자 살고있는데, 그런 금화가 필요하겠어? 내가 필요한 건 다른... 그렇네. '가능성'이라고 해야 할까."
"...가능성?"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루베라가 되풀이하여 이야기 하면, 플라로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자, 잠깐!?"
아멜리아는 당황해 하면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그레이는 '우효~!'같은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을 바라본다.
루베라는, 옷가지를 벗으면서 드러난 그녀의 건실하면서도 풍만한 육체를 보며 '큿...'같은 말을 하더니 손을 들어 클레온의 눈을 가린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가능성이야. 우리들 메기도의 일족은 악마 소환사. 즉, 받아내는 것은 '영혼'의 가능성이란 말이지."
"정보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라는 것입니까...!"
화가 난 듯한 루베라의 말에 플라로우스는 볼을 긁적이며 클레온에게 가까이 간다.
"아아~ 틀리진 않지만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려나..."
그러고는, 팔을 조금씩 움직여 클레온의 허리에 손을 두른다.
"후에 생명이 될 가능성을 가진 것들. 이라고 이야기 하면 편하려나"
"그, 그건... 즉. 정액이라는 뜻인가요...?"
플라로우스의 말에 아멜리아가 대신 답하면, 루베라는 경직되었다가도 크게 한숨을 내쉰다.
"그런... 형편 좋은 대가가 있을리가. 그냥 당신이 이 남자와 한 번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욕구불만이라는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정말이야."
루베라와 플라로우스의 눈이 조금 길게 이어졌다.
"...좋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어요."
"뭔데?"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클레온 혼자는 미덥지 못하니까."
그 말을 마치자마자, 루베라가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탈의 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꽤 많은 함정을 지나쳐 왔기에 딱 달라붙는 옷 아래 땀을 잔뜩 흘린 그녀의 몸에서 땀냄새가 섞여 올라온다.
"루, 루베라!?"
다시 한 번 당황해 하는 아멜리아. 플라로우스는 그런 루베라를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상관 없지만... 너야말로, 이 남자랑 자고 싶은 거 아니야?"
"...부정하지 않겠지만. 미덥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딱딱한 바닥에서 할 건가요?"
"아니. 물론 천막의 침대를 쓰지. 사실, 물리적인 공간이 그리 의미를 가지진 못하지만."
클레온의 눈을 여전히 손으로 가린 채. 루베라는 그의 몸을 잡아 일으킨다. 플라로우스는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내 의견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두 여자의 이야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클레온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