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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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마력을 취한 아라크네가 스스로 빛을 내면서 흘러나온 강한 빛에 의해, 공간 전체는 완전히 흰색으로 뒤덮여졌다.
색은 존재하지만, 소리도, 냄새도 존재하지 않는 흰색의 공간.
클레온은 당황하면서도 마음을 진정 시키며 이상한 현상을 보이는 아라크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몸이... 무거워...?`
클레온은 자기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중력이 강해졌다거나, 클레온의 체력이 다 되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클레온의 몸은 시선을 아라크네에게 고정한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호흡만이 허락된 상태에서 입을 열어 말을 꺼내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로 아라크네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흰색 풍경에 어딘가 기시감을 느끼는 찰나.
그것은 아라크네의 위에서 천천히, 마치 공중에서 떨어트린 종이와도 같이 하늘하늘하며 느릿하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땅바닥에 닿을 때도, 발의 끝으로 땅을 밟으면 마치 물 위에 떨어진 것처럼 땅의 표면에 파문이 퍼져나간다.
아라크네와 마찬가지로, 눈코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는 그것은 마치 흰색의 그림자가 걸어 다니는 듯했다.
그저, 몸의 굴곡과 흩날리는 머리카락으로 그것이 `여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인간형의 무언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몸과 마찬가지로 발광하는 빛의 날개가 접히더니,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져갔다.
그녀 빛의 소녀는 여전히 빛을 내는 아라크네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오른손으로 추정되는 부위를 가져갔다.
[코드 취득. 대상의 신격을 확인 중... 데이터베이스에서 해당 존재와 유사한 신격을 확인. `우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가, 소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겠지.
클레온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오는 소녀의 의지에 적지 않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치 머리의 뚜껑을 열고 거기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부정. 조회 결과, `우투`의 신격은 핵의 파괴로 인해 말소되었습니다. 해당을 `자격`을 획득한 새로운 존재로 확인... 읏...]
감정을 담지 않은, 알 수 없는 단어를 그저 차갑게 중얼거리던 소녀는, 아라크네로부터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오른손을 그대로 둔 채 왼손으로 살며시 주먹을 쥔 뒤 자기 가슴으로 가져간다.
꼬옥. 무언가, 강한 의지를 담은 듯한 그녀의 주먹은 어딘가 조금 기쁘면서도, 애처로워 보였다.
클레온의 시선은 소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이 세계에도….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수 있어….]
마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듯한 목소리로 쥐고 있던 주먹에는, 소녀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빛이 뭉쳐서 만들어진 구슬이 들려 있었다.
칼리번의 황금빛과도 매우 닮아있었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고농도의 신성 마력이 그 작은 크기로 압축된 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아마, 마력을 탐하는 마법사들이나 신의 뒤를 좇는 성직자라면 그것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도 못하겠지만.
소녀는 살며시 아라크네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마치, 신부가 새롭게 태어난 아이를 축복하듯이.
그리고, 아라크네의 가슴에 자신이 만들어낸 신성 마력의 구슬을 흡수시키듯이 집어넣는 것이었다.
[새로운... 신격의 탄생을 확인했습니다. 해당 대상을 스스로 정의시킵니다. 정의 완료. 해당 개체를 `우투`의 후속 개체인 `아난시` 확인.]
그리고,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돌아온 그녀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제야, 클레온은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빛을 몸에 감고, 새롭게 신이 태어나는 전생의 순간에 강림한 빛의 날개를 가진 소녀.
신성 마력의 화신, 아니. 소녀야말로, 이 별의 에너지인 신성 마력 그 자체.
"네...메아..."
클레온이 그 존재를 `네메아`라고 인식한 순간, 굳어있던 그의 몸에서 천천히 입만이 움직이며 소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읏...!?]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하늘로 올라가려던 소녀는 순간적으로 빛으로 변하더니, 깃털과 같이 흩어진 입자의 상태로 이동하여 클레온의 눈앞으로 날아들어 왔다.
[당신…. 어떻게 나를 보고…. 듣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손가락을 뻗어 클레온의 얼굴을 붙잡은 그녀. 여전히 얼굴의 형태는 희미하게밖에 보이지 않지만 더는 목소리가 머리를 쑤시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신의 영혼... 아아…. 그런 건가요….]
클레온은 소녀의 목소리에 대답하기 위해 전신에 힘을 주었다.
네 목소리를 알고 있다, 그것에 닿은 적이 있다고.
스스로도 불명확한 기억에 의지한 채, 소녀의 이름을 불러 그녀를 멈춰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세계는 클레온에게 필요 이상의 간섭을 용서하지 않았다.
조금 전, 소녀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의 강림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인간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서히,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당신도 분명히 `자격`을 가지고 있는 거군요…. 클레온.]
소녀는 쓸쓸한 목소리로 클레온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소녀의 손가락이 클레온의 이마로 올라갔다.
살며시, 상냥한 손길로 이마를 쓰다듬는 소녀의 손길에 클레온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조차 상관할 수 없을 정도로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안녕히, 클레온. 당신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별의 의지가 남긴 말을 마지막으로, 흐려져 가던 의식은 완전히 망각의 늪으로 스며들었다.
`레시...아...`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그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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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온... 클레온...!"
눈을 감은 채, 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간절한 목소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클레온은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몸이 매우 무겁게 느껴졌다.
분명, 오늘은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을 텐데.
눈을 뜨면,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녹색의 머리를 흐트러트린 채, 보라색의 눈을 가진 여성이 클레온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라, 테아..."
"바보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갑자기 쓰러지고…!"
갈라테아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클레온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물리적인 고통보다도 갈라테아가 그런 표정을 보이며 자신에게 매달려있는 상황에 미안함과 함께 가슴이 아파져 왔다.
"미안... 나는"
클레온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몸을 일으키다가도, 사샤와 정을 나눈 후의 기억이 끊겨 있는 것을 떠올렸다.
"...모르겠어. 정말로 피로가 쌓여서 쓰러진 건가...?"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는 착한 일은 적당히 하라니까…!"
갈라테아는 그렇게 말하며, 진심으로 걱정되는 듯 클레온의 품에 안겨 들어왔다.
그 무게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넘어질 뻔하지만, 어떻게든 팔로 상체를 지탱한 클레온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진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마, 저의 전생에 휩쓸린 것이 영향이겠지요."
그때,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전신을 흰색의 실로 만들어진 로브를 뒤집어쓴 채, 갈색의 머리를 늘어트린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잘 보면, 로브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웨딩 란제리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져서, 자세히 볼수록 노출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은 복장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아라크네인가?"
클레온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여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순간적으로 아라크네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특징이었던 거미의 하반신이 사라지고, 완벽한 인간 형태가 되어 있는 그녀를 아라크네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지금은, `아난시`라고 불러주세요. 서방님…."
"아난시... 그게 네 이름인 건가."
클레온의 대답에, 아난시는 상냥한 미소를 띠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휴우~ 전생에는 어떻게든 성공한 듯하구나."
그때, 원래의 갑옷을 입은 사샤가 걸어왔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몸을 사용하는 루벤의 쪽이었지만.
"루벤님..."
아난시는 그런 루벤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은다.
"우투님의 기억 속에서 당신은 오만방자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인간의 목숨은 물론이며 자신 외의 신의 존재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신이었습니다. 그런 당신이 어째서 서방님을 따르는 여자아이의 몸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
"쿠후후... 꽤나 능변가가 되지 않았는가? 그 말투는 우투의 예의라는 것을 좀 배워야 할 것 같구나."
아난시와 루벤은 단번에 몸에서 마력을 풀어 헤치며 갑작스럽게 전투의 준비를 시작한다.
"두 사람 다. 멈춰."
보다 못한 클레온이 목소리를 내어 제지하면, 스파크를 튀기면서 충돌하던 둘의 마력은 순식간에 풀어져 나가며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네. 서방님."
클레온의 의지에 순순히 따르며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띠는 그녀와
"...흥."
그런 그녀의 아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루벤.
"어찌 되었든, 무사히 전생해서 다행이야. 성물도 받아들이는 데에 성공한 것 같고…. 이거라면, 이 숲이 아니더라도 성물을 지킬 수 있겠지."
"네. 모든 것은 서방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우투님의 신격을 욕보인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서방님의 덕분에, 저는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아직은 신앙이 부족하여 그렇게 강한 신은 아니지만, 이 힘을 서방님을 위해"
클레온의 손을 잡는 아난시를 바라보며, 루벤은 불만이라는 듯 목소리를 흘렸다.
"저기~ 너를 전생시키자고 이야기 했던 건 이 몸이니라 이 거미 녀석아. 그렇게나 으르렁대더니, 몸을 한번 섞어서 완전히 암컷이 되었지 않은가. 은혜도 모르는 것."
"아아. 있었군요. 네, 물론 감사하고 있습니다. 루벤님. 정확히는 그 루벤님이 깃들어 있는 사샤라는 소녀에게지만 말이죠.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군요. 언제 그녀와 교대하실 겁니까? "
루벤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 클레온은 한숨을 내쉬면서 아난시와 루벤 사이에 섰다.
서로 보이지 않는 편이, 지금은 불필요한 말싸움을 막을 수 있겠지.
"그래서, 아난시. 어째서 네가 그런 의식을 성물에 행하고 있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네…. 물론입니다. 저를 속인 그 가증스러운 인간. 아니, 이제는 그 정체를 알 것 같군요. 서방님으로부터 받은 마력과 지식에서 말하길, 그녀야말로 `악마`의 피가 흐르는 인간. `반인반마`라고요."
아난시의 눈이 날카로워지면, 클레온도 예상했던 바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왕도 근처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대충 그녀를 찍으면 흑막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 붉은 머리의 반인반마는 저에게 의식을 행하면 우투님이 다시 강림하실 것이라 이야기하셨습니다. ...신핵이 파괴된 존재가 부활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슈탈인가 뭔가 하는 계집의 목표는, 우투 아니 거미 성물의 힘을 가진 마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던 건가?"
루벤의 말에 클레온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성공했으면 숲을 마구 오염시키면서 큰 피해를 줬겠지만, 녀석의 목표는 데미우르고스를 불러내는 것이야.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던 게 아닐까."
클레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이미 아라크네가 아난시로 변화할 때 주변에 신성 마력이 퍼져나가며 일부는 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조금 바깥으로 나가면 지하는 여전히 흑마력에 오염되어 있었을 것이다.
숲 전체를 도는 영맥을 통해 흑마력이 서서히 퍼져나가겠지.
다행인 것은 아난시의 힘으로 그것을 정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영맥."
클레온은 생각을 정리하다가 떠오른 키워드에 멈칫한다.
미덕의 숲은, 거대한 영맥의 줄기가 흐르는 곳이다. 이 영맥은 대륙의 더욱 서쪽에서부터 시작되어 왕도까지 이어져 있다.
즉, 이곳은 강으로 치자면 중류에 해당하는 장소이며, 하류인 왕도로 마력이 흘러가는 거쳐 가는 장소.
이런 곳의 영맥을 흑마력으로 오염시킨다면
"...그게 목적이었던 건가."
"무언가, 눈치챈 건가?"
클레온의 눈이 빛나는 것을 확인한 루벤이 그렇게 묻자, 클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돌아가도록 하자. 오늘도 늦으면 쿠온이 울어버릴지도 몰라. 그리고 아난시는"
클레온은 아난시를 바라본다. 사태가 바뀐 것을 확인한 이슈탈이 다시 이곳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은 위험하게 여겨졌다.
아난시 역시 클레온의 시선을 받더니 잠시 자기 몸을 이리저리 확인하다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는 것이었다.
"후후. 이 모습이면, 인간들이 사는 곳에 들어가더라도 문제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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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데리고 왔다는 거네. 또."
클레온이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초저녁의 일. 처음 보는 여성을 데리고 돌아온 클레온을 향해 라일라는 `또`라는 표정과 쿠온은 `한사람분을 더 준비해야 하나`같은 이야기를 하며 손님을 받아들인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라일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쿠온은 새로운 신이라는 것에 흥미가 동했는지 슬쩍슬쩍, 실례가 되지 않도록 아난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또 라니... 내가 평소에 이상한 걸 주워온다는 듯이 이야기 하지 마."
"저번에는 충분히 이상한 걸 데리고 왔잖아. 살아있으면서 말까지 하는 악마의 머리."
라일라의 정확한 지적에 클레온은 윽, 하고 말문이 막히지만 아난시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마법사님. 저는 이상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서방님을 위하여 힘을 쓸 준비가 된 `양처여신`. 네. 클레온님의 생활 전반을 시작하여 세탁, 설거지, 호위에 밤 시중까지. 모두 저에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엣!?"
"가사마저 빼앗길까 봐 쿠온이 충격받고 있잖아! 괜찮아 쿠온. 이 거미는 내가 내쫓아줄게…!"
라일라의 격려 아닌 격려에 쿠온은 `으, 응...!`하고 기운을 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클레온은 그런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그런 것보다, 조금 중요한 이야기니까 들어줬으면 해. 이슈탈이 지금 이 도시에 어떻게 흑마력을 퍼뜨리고 있는지 안 것 같아."
"음... 그러니까, 영맥을 통해서죠?"
사샤가 클레온의 말에 대답하면, 클레온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맞아. 하지만, 거대한 영맥에 개인이 가진 흑마력을 아무리 주입해봤자, 바다에 잉크를 떨어트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거기에, 영맥을 따라 흘러나가는 흑마력이 이 도시에 계속해서 모여있는 것은 역시 이상해."
클레온의 말에 라일라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클레온의 말대로. 왕도의 영맥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 악마들을 불러내고 여러모로 수고를 들인다고 하더라도 이 영맥 전체를 오염시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 라일라. 이 왕도는 네 개의 영맥이 흐르는 교차점에 만들어진 도시이지?"
클레온이 라일라에게 질문하면 라일라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맞아. 영맥에 흐르는 마력에도 속성이라는 게 있는데. 자연계에 존재하는 원소 마력인 `화` `수` `지` `풍`의 마력이 흐르는 영맥이 모두 교차하는 장소를 마력학에서는 `집합 영맥`[엘리멘탈 크로스]라고 불러. 속성의 상성, 상반을 통해 마력은 더욱 강해지고 그 마력이 불러오는 각종 이로운 효과로 더욱 빠르게 도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명당을 이야기해. 역사상으로도 많은 국가의 수도가 집합 영맥의 위에 건설되었고. 아카데미나 옛 제국의 수도도 그런 장소였어."
라일라의 설명에 쿠온은 처음 알았다는 듯이 `그렇구나~`하고 대답한다.
"오늘 우리가 다녀온 미덕의 숲은 `지`속성의 영맥이 흐르는 장소였어. 그곳에 오염된 성물을 배치하도록 아난시를 속이고, 지맥을 오염시켜 왕도로 흑마력을 흘려보낸 거야."
"...가능성은 충분하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집합 영맥에서는 마력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으니까…. 네 영맥에 각각 흑마력을 섞어서 이 왕도로 흘러오게 한다면, 적은 마력으로도 도시 전체에 음몽을 보여주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어. 거기에, 자연 원소에 섞여서 숨어있으니까 성직자들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이고."
라일라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 듯, 한쪽 손으로 식탁을 두들기며, 다른 한쪽 손은 턱을 괸 채 그렇게 대답한다.
"그럼…. 남은 세 곳도 정화할 필요가 있다는 거네?"
쿠온이 그렇게 물어보면, 클레온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응. 그리고, 그곳에는 반드시 이슈탈의 흔적이 남아있을 테니 그녀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데도 필요한 일일 거야."
"... 그렇구나. 그러면, 정화는 나에게 맡겨줘. 클레온."
"... 쿠온?"
쿠온이 양손의 주먹을 쥐며 자신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클레온은 고개를 갸웃한다.
물론 곤란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성직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그녀이지만 묘하게 의욕적이었다.
"정화라면 내 특기니까! 앞으로 세 곳, 클레온이랑 함께 다니면서 깨끗한 영맥이 될 수 있도록 해줄게!"
"...그건 믿음직스러운걸. 사실, 성자의 가호 교단에 전해야 할까 고민이었거든."
교단에 이야기하면, 분명 무언가 조처를 하긴 할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이 도시에 악마가 숨어들어와 있으며, 그것들과 싸우는 세인트 프린세스의 존재가 교단에도 노출된다.
그렇게 되면, 교단 측에서도 자신들의 관리를 받지 않는 성전사인 세인트 프린세스 즉, 아멜리아의 정체를 파악해 내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아멜리아의 입장상, 그녀 자신의 정체를 들키는 것만큼은 피해야만 했다.
클레온이 쿠온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쿠온도 베시시 웃으면서 의욕을 다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깥에서는 성직자님과 그리고 안에서는 저와 `성스러운`일을 하게 되는 것이로군요? 서방님?"
틈을 보이지 않고 아난시가 끼어 들어오지만 클레온은 그런 아난시를 돌아본다.
[정말로 얘를 여기에 데리고 있을 거야?]
클레온의 머릿속에 라일라의 걱정스러운 듯한 텔레파시가 울렸다.
[아니…. 걱정 마, 생각이 있어.]
"아난시. 사실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클레온이 아난시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 무엇인가요 서방님!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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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어. 이곳의 후원자이신 `오렐리아`님의 소개로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새로운 수녀, `아난시`양입니다."
자비로운 인상의 늙은 수녀가 자신들과는 사뭇 다른, 흰색의 수도복을 몸에 걸친 아름다운 여성을 소개한다.
머리는 갈색에 보라색의 브릿지가 들어가 있지만, 분위기는 여느 수녀들과 비교하더라도 경건하고,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여성이었다.
많은 여성화된 피해자들이 그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새로 오신 수녀님은 귀여우시네요~` `마치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만 같사옵니다~`같이 원래는 무법자와 종이 한 장 차이인 모험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아가씨 말투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단 한 사람, 유스테스만큼은 그녀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클레온의 여자인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면, 아난시가 눈을 부릅뜨고 유스테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지금, 서방님의 이름이 들렸던 것 같은데…. 당신인가요?"
"...히엑."
딸꾹질이 날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유스테스는 비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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