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추방되었던 마검사가 사실 파티의 기둥(물리)이었기 때문에 용사의 히로인들이 뒤늦게 매달려옵니다-189화 (189/506)

〈 189화 〉 황제 (2)

* * *

000

"카,인..."

어두운 방 속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마지막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나날이 쇠락의 길을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의 마지막 보루로서 여겨지는 국고의 문을 열어젖혀 민생에 도움을 주도록 지시할 정도로.

누구보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시선을 가졌으며, 제국의 국부로서 부끄러움 없는 모습을 보여왔던, 한 남자가 내기에는.

너무나도 민망하고, 힘없고, 허무한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의문, 그리고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양아들의 검에 몸이 관통당하고 나서야, 그의 본성과 원래 목적을 알아챘다는 점.

무엇이 국부인가, 무엇이 제국의 황제인가.

자신의 시야는 어둠에 가려져 있었고, 자신이 미래를 맡길 청년을 양아들로 받아들인 것은 대륙에 전란을 불러일으킬 짐승에게 먹이를 준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황제는 진심으로, 카인을 제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황가인 레기오스 가문이 황족의 혈통의 순수함을 유지한다는 멍청한 이념 아래, 쓸데없는 근친상간을 반복한 덕분에 얻게 된 질병.

황제인 자신이 직접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황궁에도, 제국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 한다는 사상에 따라.

국민에게서 받는 지지도 높고, 능력도 문제가 없으며, 제국을 다시 부강하게 만들어 줄 인물로서 공작가의 추천을 받는 `카인`이라는 평민을 양자로 받아들였다.

병들고, 나약하고, 앞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과는 다르게, 그에게라면 제국의 꿈을 맡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서두르지 않더라도, 자신이 죽는다면 카인은 새로운 황제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고, 제국의 황제를 `물려받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찬탈하는 것을 택했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황제는 그렇기에 양아들의 마검이 자기 몸을 꿰뚫었을 때, 차가운 검의 감촉과 쇄도하는 흑마력의 폭풍 속에서.

차갑게 불타오르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나서야, 양아들의 정체를 보았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제국 황제의 자리 따위가 아니라.

확실하게 멸해야 하는 적을 위해서, 제국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소모해버릴 수 있는 위치이자, 힘인 것을.

`하지만, 그렇다면 카인. 내 양아들이여. 너는 파멸할 것이다. 패배할 것이다.`

제국의 황제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그러한 걱정이었다.

저주가 아닌, 제국의 모든 것이 재로 사라져 버릴 것에 대한 걱정.

나라를 다시 곧게 세워야 할 청년이, 복수의 불꽃에 휩싸인 채 스스로 타들어 가는 `장작`이 되었음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내, 그러한 걱정 속에서 황제의 사고는 완전히 정지하고, 그의 몸은 차갑게 식으며 영혼은 몸에서 떠나간다.

그것을 느낀 카인은 짧지만, 자신에게 처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던 황제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뒤.

그의 육체를, 옥좌 앞의 계단 위로 쓰러트렸다.

피 웅덩이가 계단에 깔린 융단 위에 번져 나가는 것을 내려다본 카인이 시선을 돌리면, 그곳에는 언제나 처럼 예의 바른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티스`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 폐하­ 아니, 전 황제에게만 충성을 맹세한다는 근위대는 전부 잡아들였습니다. 처형을 명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저 죽이는 것은 인력 손실이다. 폴투크가 새로운 실험의 재료들을 원하고 있었다. 최대한 강인한 신체 능력을 가진 인간을 원한다고 하더군. 그를 위한 선물이라는 것으로 하지."

카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유일하게 자리를 비키지 않고 황제의 곁을 지키던 그의 최측근이었던 여기사의 머리카락을 질질 끌고 옥좌의 방으로 들어온 거구의 남자가 코웃음을 친다.

"하. 그 미치광이 녀석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인력 손실이 아닌가? 대장. 녀석이 인간을 실험의 재료로 써서 멀쩡한 무언가를 만들어낸 기억이 없는데."

"베이를린. 황제 폐하께서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하셨던 것 같은데."

오티스와 마찬가지로, 카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4명의 흑거성 중 하나인 `정복의 베이를린`.

자신의 몸만 한 도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그는, 거인과 인간의 혼혈로 타고난 신체 능력과 난폭함 덕분에 일반인들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거대한 파괴의 화신이었다.

"걱정하지 마. 목숨은 붙어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갑옷이 찌그러진 여기사의 몸을 툭 하고, 카인의 앞에 던져놓았다.

"오티스,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치유마법을 걸어 생명을 연장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오티스에게서 몸을 돌린 카인은 그대로, 쓰러진 남자의 시체를 발로 밀어서 치워버린 뒤 옥좌에 걸터앉았다.

눈앞에서 차갑게 주검이 된 남자가 얼마나 왜소했던 것일까, 전신에 검은 갑주를 걸친 카인에게는 너무나도 좁게만 느껴졌다.

"새로운 옥좌를 준비할 필요가 있겠군요."

오티스도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나약했던 선대를 비웃었다.

다음 순간, 카인의 머릿속에 각인을 통한 텔레파시가 흘러 들어왔다.

[다른 곳에 모아두었던 각 지방 사령관들은 모두 우리들의 휘하로 들어왔어…. 언니는 없었지만.]

[그래. 알겠다. 너도 이쪽으로 와라.]

휴티나로부터 이야기를 전달해 들은 카인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까까지 황궁에 휘몰아치던 피바람이 옮겨온, 귀를 찢는 비명은 더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무력한 이들의 비명소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 아벨이 죽을 때 들려왔던 아이들의 목소리.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애원하듯, 절망 속에서 내지르는 약한 이들의 발버둥.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아파진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만들어낸 모든 비명이 겹쳐 들리는 듯했다.

그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5년이다."

조용히, 카인이 입을 열자 오티스는 다시 한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베이를린도, 어느샌가 옥좌의 방에 들어온 휴티나도.

카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우러러 올려다보았다.

"5년 내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왕국을 공격한다. 목표로 하는 것은 왕도 `엘케르도`. 그리고, 그곳에 숨어있을 왕국의 왕자... `루시우스 칼데아리스`와 그 일가."

[그리고. 아담.]

판도라가 속삭이듯이 이야기하면, 카인은 검은 눈길로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짓밟아라. 오직 죽음만이, 거짓된 세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구원이라고 그들에게 알려라."

오티스는 그런 카인의 지시에 환희를 느끼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과 같이 흥분하여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신의 말이 곧 제국의 법칙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황제이시여. 이제 제국의 모든 이들은 당신을 죽음의 화신으로서, 위대한 의지를 수행하시는 분으로서. 누구도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티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된 몸짓과 어투를 구사한다.

휴티나와 베이를린은 또 시작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이 보잘 것 없는 당신의 수족이, 폐하께 새로운 칭호를 바치나이다. 이 이름을 들은 자는 모두가 당신의 힘을 느낄 것이니…. 역사에 새겨질 새로운 이름은 `마검 황제`!"

"... ..."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마검을 직접 휘두르시며, 전 대륙을 제국령으로 만들어 호령할, 전설적인 인물에 어울리는 칭호입니다!"

[너무 단순하지 않아?]

카인은 판도라의 말을 무시한 채, 오티스에게 이야기했다.

"칭호도, 부르는 법도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그들이 나에 대한 공포를 잊지 않게 해라."

제국의 새로운 황제는 인간의 마음을 버린 `수라`였다.

그렇다면 그가 지배하여 섭리를 펼치는 제국 역시 `수라도`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001

제국 황성에 마련되어 있든 황태자의 방.

카인은 세 사람을 물러가게 한 뒤, 혼자서 몸을 이끌고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살풍경한 광경,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의 가구.

제국의 황태자가 지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풍경이었지만 애초에 사치라는 것에 쾌감을 느끼지 않는 카인에게는 몸을 눕힐 수 있는 침대와 옷가지가 들어갈 옷장만 있더라도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런 침대의 위에는 언제나 처럼, 영원한 순수함을 지닌 소녀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반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인 님."

"...릴림."

사관 학도 시절에도 차이가 나기 시작한 몸의 차이는, 이제는 완전히 어른과 소녀와 같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주를 벗겨드리겠습니다."

릴림이 조용히 눈을 뜨며, 침대 앞에 서 있는 카인에게 가까이 가면, 그의 몸을 조이고 있던 검은 갑주­

인간의 영혼을 먹고 그 경도를 높인다고 하는 고대의 레어 메탈 `소울이터 메탈`로 만들어진 갑옷을 엮어내는 조임쇠를 하나둘, 풀어낸다.

철그럭, 철그럭 하는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지닌 갑주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은.

수라의 혼을 가졌지만,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한 청년이었다.

소울이터 메탈의 갑주는 방어력은 물론, 장착자의 흑마력도 강화하는 힘을 가졌지만, 그 부작용으로 장착자의 영혼마저도 갉아먹으려 한다.

판도라가 갑옷과 카인 사이에 개입하여, 직접적으로 영혼에 가해지는 피해는 없다고 하지만.

이 갑옷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카인은 서서히 표정이 없어지고, 감정이 메말라 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리라.

`복수`와 `증오`, `원한` 외의 감정이 일을 그르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애초에 배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 안의 나약한 부분을 모두 잘라내고, 공포와의 이별을 원했다.

하지만­ 그런 카인에게도 한가지 두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 ..."

릴림의 손길이, 마지막 조임쇠를 풀어내면 갑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카인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릴림은 그런 카인을 잠시 바라보다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카인의 손이 본능적으로 그런 릴림의 손을 밀어버리고 만다.

"...미안, 릴림."

카인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릴림`과의 접촉이었다.

어린 시절과 같이 머리를 빗겨 주는 것도.

욕탕에서 서로의 몸을 씻겨주는 것도.

팔베개를 해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며 볼에 입맞춤하는 것도.

모두, 이미 오래전의 풍경에 불과했다.

"릴림과 닿아있으면. 내가 버리려고 했던 것이 돌아올 것만 같아…. 불완전한 나의 부족한 부분을…. 다시 채우려는 듯."

카인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서며 릴림과 거리를 벌렸다.

"어쩌면, 릴림이 말한 대로. 나와 릴림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완전해지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래선 안 돼."

스스로 버린 것을, 릴림이 있다면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일이 끝난 뒤의 카인에게 있어선 `돌아갈 곳`이 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미안해, 릴림. 하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면­"

"괜찮습니다. 카인 님. ...저는, 5000년을 기다려 당신과 만났습니다. 앞으로 수년, 설령 수십 년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찰나와도 같은 시간입니다."

그런 카인을 위로하듯, 릴림이 입을 열었다.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경애에 답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청년을 향해.

"거기에, 당신에게 다른 여성들과 다른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나쁜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몸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그녀를 만들어낸 `이브 1호기`가 가진 결함이라고, 바알은 이야기했다.

덕분에, 그녀에게는 `수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반쪽이, 스스로를 돌아볼 날이 찾아올 때까지.

"그러니. 부디, 당신은 당신의 일을 끝내 주세요."

그날이 찾아올 수 있도록.

002

그날은 찾아오지 않았다.

카인. 카인 루프스 레기오스. 마검 황제.

릴림의 반쪽은, 용사 `레시아`에 의해 쓰러졌다.

스스로 싸울 힘을 가지지 않는 릴림은, 마지막 결전 직전 카인에 의해 용사 일행들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도록 했다.

그녀의 반쪽이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치워낸 뒤 돌아올 그 시간까지.

조용히, 조용히. 지독한 고독 속에서도 숨을 죽인 채.

[───...]

귓가를, 어떤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들었을 때.

릴림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은신처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숲을 지나고, 산길을 타고 걸어가­

그곳에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전신에 금이 가기 시작한.

`판도라`가 있었다.

"...릴림."

"... ..."

판도라는 자신을 찾아온 릴림을 바라보며, 심호흡한다. 그리고, 분하다는 듯, 전에 보인 적 없는 어두운 얼굴로 이야기한다.

"카인이 죽었어."

"... ..."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빛의 성검 `칼라드볼그`는 분명 압도적인 신성 마력을 휘둘러오는 검이었다. 빛의 화신이라고도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순수한 출력이라면 분명 자신의 쪽이 위였다. 신체 능력도, 카인이 용사를 압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스러져가는 자기 육체.

주인을 잃은 마검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인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 뭐…. 그렇긴 하지. 그 녀석은, `전생`하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말을 남기는 판도라의 육체는 이제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재로 변하여 사라지기 시작했다.

릴림은 천천히 걸어가, 그런 판도라의 팔을 붙잡는다.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흑마력을 릴림이 주입하기 시작하면 판도라의 붕괴는 늦춰진다.

"...헛수고야. 카인이 없으면 나는­"

"저는 카인님의 반쪽입니다. 저와 계약해서, 당신의 존재를 유지하세요."

릴림의 말에, 판도라는 릴림을 올려다보았다.

"너,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 ..."

"너는 받지 못하는 카인의 손길, 그의 애정…. 마치, 나를 네 대신이라는 듯이 다루는 `카인`…. 그걸 그저 바라볼 뿐인 너."

판도라는 입꼬리를 비틀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있어. 그렇지?"

"... 언젠가 카인님이 돌아왔을 때.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릴림의 말에 판도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걱정은 마. 그 녀석은 전생할 때마다 새로운 마검을 가지게 되니까…. 말하자면, 나도 전생한다고 해야 할까."

"당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당신이 아니면, 카인님을 카인님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분을 `마검 황제`로 할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니까."

카인이 전생하면, 카인으로서의 기억은 모두 잃게 된다.

그리고, 판도라가 아닌 새로운 마검을 가지게 되겠지.

그것은 `카인`이었지만 `카인`이 아닌 존재가 된다.

카인이 다 이루지 못한 것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다음 역시 `카인`일 필요가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마치는 그때가 와야, 자신과 그가 이어질 수 있을 테니까.

다음 순간, 판도라가 가진 대량의 흑마력이 터져 나오며, 판도라를 감싼다.

"너...! 지금 여기서 내가 사라지는 걸 방해하면, 다음 카인­ 전생체가 마검을 가지지 못한다고! 그러면, 그 녀석은 무력하게 죽어갈지도 몰라!"

하지만, 릴림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판도라를 자신의 체내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큭... 이 성가신 여자...!"

판도라는 자기 몸이 반쯤 삼켜졌을 때, 스스로의 몸을 검의 형태로 바꾸었다.

붕괴하여가는 몸으로 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영혼에도 무리가 가는 행위였기에 하지 않으려 했지만­

`쩌억­!`

그와 동시에, 판도라의 남은 부분은 재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절반은 릴림의 안에 흡수되어, 그 안에서 절반의 힘을 가졌지만 새로운 판도라로서 깃들은 것이다.

판도라를 흡수한 릴림은, 마치 배에 품은 아기를 사랑하게 문지르는 것과 같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공허하게 변해있었다.

"...후후. 카인 님. 당신을,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아아. 그렇지, 다시 만났을 때는 조금이라도 매력적인 여성이 되어 있을 필요가 있겠네요."

"당신은 분명, 다음 생에도. 이런 어린아이의 몸을 가진 저를 안아주지 않으시겠죠."

"힘이 필요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아. 다음에는, 내가 카인님을 지킬 수 있도록…."

"아니­ 아예, 악마 그 자체가 되어버릴까…."

비틀거리면서, 릴림의 발걸음은 황궁으로 향한다.

분명 그곳에, 악마와 카인의 부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불량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을 사용하면….

003

검은 늪과도 같은 지면에서, 청년의 팔이 튀어나왔다.

깊고 깊은 의식의 밑, 자신의 영혼과 이어져 있는 사념의 공간에서 겨우 돌아오는 것에 성공한 것은.

카인의 인생을 모두 추체험한 클레온이었다.

비틀거리면서 늪에서 빠져나와 거칠게 심호흡을 하는 클레온의 머릿속은 복잡한 기억의 엉킴과 20하고도 수년의 인생을 그대로 본 결과.

자신이 클레온인지, 카인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레시아... 릴림... 큭... 나는...!"

"네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너의 역할은, `아담`으로부터 만들어진 인류의 폭주를 막는 것이니까."

그때, 자신밖에 없어야 하는 이 공간 속에, 자신과 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온이 고개를 치켜들면, 그곳에는 검은 갑주를 몸에 걸친 채, 익숙한 대검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는 `흑마의 일족`이 서 있었다.

그 생김새는 클레온 본인과 거의 일치했다.

"마검, 황제­"

클레온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그 이름으로 지칭했지만, 이내 그 안에서 느껴지는 다른 존재에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다르군. 너는, 내 안에 있는 전생 인자…. 그것이 만들어낸 환상인가."

"나의 존재도.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의 의의는 흑마의 전생자가 스스로의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것."

마검황제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클레온은 대검의 끝으로 가리킨다.

"그를 위해서라면. 이레귤러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불러일으켜 진 과거의 자아를 다시 되살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쪽이 더 효율적으로 아담에 대항할 수 있다면."

"뭐라고...?"

클레온은 그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뭐가, 효율적이냐…! 아무리 대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국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는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슬퍼해야만 했는데…!"

"필요한 희생이다."

"이 세상에 필요한 희생 같은 건 없어! 희생은 남에 의해 강요되는 게 아니다!"

클레온이 분노하여 그렇게 외치면, 카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번의 전생체는 이레귤러이군. 무엇이 원인이지…? 과거의 전생체들은 모두, 일정한 감정선에 도달하면 목적을 위해 강력한 힘을 휘둘러 왔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너는 전생체의 자아에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카인은 대검을 클레온을 향해 휘둘러왔다.

클레온은 재빨리 몸을 굴려 각인으로부터 라일라의 마법을 빌리려 했지만.

"각인의 연결이…!"

"이곳은 네 안의 공간이다. 외부의 힘을 끌어오는 것은 불가능해…. 나에 의해 대체되어라."

카인이 흑마력의 출력을 늘리며 클레온에게 쇄도한다.

판도라와 같은 형태를 지닌 대검을 가진 카인에 비해, 클레온은 맨손.

이곳이 자신의 안이라고 하지만, 저것에 베여 의식을 잃게 된다면….

"웃기지 마…!"

클레온은 재빠르게 팔을 들며, 카인의 품까지 파고든다.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검을 잡은 손이 내려쳐지는 것을 붙잡아 막는 것이었다.

"사명을 받아들여라...! 전생자!"

위에서 짓누르는 카인과 그것을 아래에서 지탱하여 막는 클레온.

"사명... 운명... 의의... 그런 건 전부, 멋대로 정해진 거잖냐…!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하기 위해서만 검을 휘두르겠다고 정했어…! 그녀가 지킨 이 세계와…. 동료들…! 그리고, 레시아마저도...!"

클레온의 외침에, 카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것은, 마치 흉물을 보고 있는 듯했다.

"자기가 용사라도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네 자아는 `전생체`의 자아에 부적합하다…! 너를, 추방한다! 이 세계에서…. 이 몸에서!"

다음 순간, 카인의 검이 수 배는 무거워지는 감각과 함께 클레온을 짓눌렀다.

"큭...!"

이 이상, 버티는 것은 힘들다. 클레온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눈앞의 적을 막으려는 순간­

[클레온!]

공간을 뚫고, 아름다우면서도 낯익은 검이 카인의 손으로 날아들어 왔다.

"갈라테아...!"

클레온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갈라테아의 전신에서 마력의 파동이 터져 나와, 카인을 밀어버린다.

재빠르게 거리를 두며 자세를 잡는 클레온은 갑자기 나타난 갈라테아를 내려다보았다.

[... 무기도 없이 싸울 생각이야?]

"... 아니. 설마."

카인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클레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 ...]

"아무래도 미쳐버린 건 `아담`만이 아닌 것 같은걸."

클레온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갈라테아를 카인에게 겨눈다.

"아담은 막는다. 하지만, 그걸 위해 모든 걸 내던져 버릴 생각은 없어. 동료와의 인연도, 나 자신도...! `레시아`가 과거에, 그렇게 한 것처럼...!"

갈라테아에게서 흘러나온 흑마력이 클레온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내, 검은 갑주와도 같이 경질화한 마력의 투구 사이로­ 섬광 같은 안광이 빛을 발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 나는 나의 신념을 가지고, 검을 휘두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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