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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되었던 마검사가 사실 파티의 기둥(물리)이었기 때문에 용사의 히로인들이 뒤늦게 매달려옵니다-269화 (269/506)

〈 269화 〉 행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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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 옷차림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소용돌이 문양이 새겨져서 뒤쪽의 눈동자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짙은 색의 안경.

대충 묶은 잿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베아트릭스는 왕도의 마도구 상점에 들러 오랜만의 친구와의 해후를 나누고 있었다.

어젯밤의 이야기보따리로는 아직 부족한 것일까, 이렇게 두 사람끼리 바깥에 외출하는 것은 실로 몇 년 만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사이에 있던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을 생각하면, 재회하고 사이를 회복한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었겠지만.

유심히, 손에 들고 있던 소형의 마법 소재를 살피던 그녀는 라일라에게 가까이 가서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연보랏빛의 구슬처럼 보이기도 하는 물건이었지만 정확히는 희귀한 정령의 핵이다.

"이거... 어때?"

"응. 나쁘지 않네. 이거라면, 그 녀석을 구속하기에는 충분할 거야."

그녀들이 말하는 `그녀석`이라는 것은, 클레온이 이전 창관에서 목을 잘라서 온 악마의 머리.

즉, 아스타로테의 서큐버스인 `카말라`를 이야기한다.

목의 밑 부분은 여전히 재생을 못 하는 중이지만, 카말라도 조금씩 마력을 회복하여 최근에는 라일라가 눈을 떼면 몸을 회복시키려 하는 듯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녀를 완전히 자신의 사역마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 라일라는 그녀를 깃들게 할 `그릇`으로서.

베아트릭스와 협력하여 `인공 정령 소체`를 만들어 내려 하고 있었다.

악마는 마력으로 신체가 이루어진 존재들이다.

흑마력에 오염된 정령, 혹은, 흑마력에 의해 존재 자체가 비틀려진 정령들은 있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오직 흑마력만으로 이루어진 정령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별의 촉각이며, 별의 의지는 흑마력과 이차원의 마력을 거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굳이 `흑마력의 정령`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야기하자면, 흑마력의 특징인 욕망을 극대화하는 성질을 가진 존재들.

그리고, 정령과 같이 몸이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들.

즉, 악마가 바로 흑마력의 정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악마 사역이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령을 부리는 것과 개념 자체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령이 깃들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고, 거기에 정령을 소환하여 계약을 맺고 담아낸다.

이제는 찾기 힘들어진 `정령 술사`라는 직업이 고대에는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들의 마법 체계가 현대로 오면서 더 이상 정령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자연현상을 견뎌낼 수 있고.

또, 원소 마력을 자체적으로 휘두르는 것 역시 가능해졌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정령 술사의 마법 체계의 일부분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 바로 `주술사` 혹은 `드루이드`라고 불리는 존재들.

작은 시골 마을의 무녀들은 신성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 마력을 통해 치유나 풍요를 불러오는데, 이들이 소통하는 `신`이나 `수호자`와 같은 존재들의 대부분은 그 땅에 뿌리를 내린 오래된 `자연의 정령`들이다.

그조차도, 이전의 왕국과 제국의 전쟁에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 쿠온이 살고 있던 마을과 같은 국경과 멀리 떨어진 산골이나, 사샤가 살았던 폐쇄된 마을 정도에만 그 신앙과 정령이 남아있는 것이지만.

다행히, 정령 사역에 대한 지식은 아직도 서적이나 문헌으로 내려오고 있어서, 아카데미의 도서관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라일라는 베아트릭스가 건네준 소체의 재료를 장바구니에 넣으면서 미소 지었다.

"베아를 데리고 와서 다행이야. 이런 마법 소재의 감정안은 베아 쪽이 나보다 좋으니까."

"으응, 그렇지 않아. 재료에 담긴 마력 같은 것을 알아내는 것은 분명히 곧잘 하지만…. 그걸 사용해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젬병인걸."

자신을 칭찬하는 라일라의 말에,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겸손을 표한다.

이렇게 함께, 무언가를 연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면 저절로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까도 물어보려 했는데. 그 안경은 대체 뭐야?"

"아. 이거는 집행과의 새 담당 교수님이 선물해 주신 거야. 내 언니가 마안 술사였다는 건 알고 있지?"

"엘리제 휴트러스. 물론, 알고 있지. 뭐…. 그리 좋은 인상은 없지만."

라일라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집행과의 실세였으며, 엘레시아에서 여러 가지 암약을 펼쳤던 마안의 마법사.

그리고, 결국 클레온과 페르디아에 의해 처단당한 여자.

"아무래도 나한테도 그녀와 비슷한 부류의 마안이 약하게나마 있다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 정도의 마안이라면 의도적으로 제어 하는 게 불가능 하다나 봐. 알게 모르게, 타인과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의 의지에 간섭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악의를 품지 않는 한, 마안은 선한 쪽으로 사람을 이끌 것이다.

다만,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고 마안의 힘으로 타인의 의지에 간섭하는 것은 베아트릭스 본인도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그럼... 그건, 마안 차단기라는 거야? 디자인이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눈에 띄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마치, 고전적인 이미지의 모범생들이 착용할 것 같은 상상 속의 안경을 그대로 형태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그걸 준 게 집행과의 새 담당 교수라면 ...빙룡 아나티스잖아? 사실은 엄청난 아티팩트인거 아니야?"

라일라는 괜한 호기심이 동하여 그녀가 쓰고 있는 마도구를 마력시를 켜고 살펴보면.

그저 단순하게, 마안의 위력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효능의 전부인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재질은 평범한 유리인데, 마력 전도율이 낮은 유리 그 자체에 마법을 담는 것은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매우 어려운 일로 칭해지고 있었다.

아주아주 만들기 어려운, 그리고 그 난이도에 비해 효과는 평범하지만 확실한, 건실한 마도구라고, 그 안경을 요약할 수 있겠지.

"하지만, 괜찮은 걸까? 악마 사역은 잘못하면 악마에게 그 영혼을 빼앗길 수 있다잖아."

"그 부분은 괜찮아. 악마 사역의 전문가를 알고 있거든."

정확히는 라일라가 아니라 클레온이지만.

메기도의 일족이라는, 악마 사역의 비술과 고대 혈족의 힘을 가지고 있는 플라로우스.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클레온에게서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조금씩 악마 사역에 대한 준비를 진행해 나가고 있던 라일라는 이번에 베아트릭스가 왕도에 방문한 것을 기회로 삼아서.

카말라에게 남아있는 잠재적인 위험 요소를 전부 배제할 생각이었다.

"태도 자체는 꽤 고분고분해졌지만. 결국 악마고. 악마는 믿지 못하겠단 말이지."

"...그렇게 치면, 그 `릴림`이라는 아이도, 원래는 악마라고 들었는데…?"

"릴림은... 좀 복잡해. 그녀의 악마로서의 부분은 지금 봉인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분리해 놓은 상태야. 게다가, 그녀는 원래는 흑마의 일족의 `인간`이었으니까. 그 육체 자체는 물리적인 실체를 띄고 있지.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반인반마도 그렇고."

릴림, 이슈탈, 플라로우스.

악마와 인간 사이의 혼혈로 태어났거나, 후천적으로 악마가 된 존재들.

그들은 마력의 양에 관계없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고, 악마 사역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의지 자체를 조종당하지 않는 대신에 물리적인 육체를 잃으면 당연히 죽게 된다.

악마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세계에서 육체를 잃더라도 지옥으로 돌아 간다는 법칙이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쓰러트린다는 것은 곧, `살인`을 의미한다.

라일라는, 자신이나 클레온이라면 그 업을 짊어지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외의 동료들...

특히, 자신보다도 어린 사샤가 살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말라와의 사역 계약은, 조금이라도 그들이 전장으로 나오는 일을 줄이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카말라와 사역 계약을 맺더라도, 그녀가 이슈탈과 맺고 있는 `맹약`을 덧씌우기 할 수는 없어. 어디까지나 본래의 소환자는 그녀니까. 하지만, 적어도 사역 계약을 하면 언령 하나만으로도 카말라는 부릴 수 있게 되니까. 육체가 재생되더라도 문제는 없겠지."

라일라가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은, 카말라와 이슈탈이 맺고 있는 맹약.

그 맹약의 일부분은 들었지만,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며, 꿋꿋이 입을 다물고 있는 카말라.

어쩌면, 그녀가 숨기고 있는 이슈탈과의 맹약에는 라일라도 눈치채지 못한 위협적인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라일라."

"...어떤 위협이라고 하더라도,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전부 불태워 버리면 되니까."

베아의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과거, 베아와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온을 찾았을 때.

그리고, 클레온에 의해 한번 완전히 부서진 마음에서 다시 한번 할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되새긴 뒤.

자신의 마법 실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느낀 라일라는, 과거의 이기적인 자신을 다시 한번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응. 나는 괜찮아. 베아. 자, 여기서 사야 하는 건 전부 준비했으니까, 그다음에는 베아의 장신구를 보러 가자."

"으, 응. 고마워 라일라. 귀족들의 파티는 처음이라 어떻게 입고 가야할 지 잘 알 수 없어서..."

"그런 거, 실례만 안 될 정도로 꾸미기만 하면 돼. 나도 그랬거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일라가 불려갔던 것은 학생들이 참여하지 않는, 교수들과 원로회가 모이는 회의 등이었지만.

천재 소녀 라일라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거대한 파티의 이미지를 조금 오해하고 있는 듯하였다.

"어머, 라일라양. 베아양.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그리고, 이동하려는 찰나 가게의 앞에서 만나는 얼굴.

공포와 성욕의 화신, 리오메스이다.

"뭐가 우연이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어쩐 일? 무언가 용건?"

"그렇게 차게 굴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라일라? 베아양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사러 간다고 들어서 도와드리러 왔을 뿐이에요."

리오메스가 그렇게 말하자, 베아트릭스와 라일라, 양쪽 모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베아트릭스가 주먹으로 자신의 옷깃을 꾸욱 잡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 죄송하지만 코걸이 피어스나 혀에 구멍 뚫는 건..."

"그, 그래! 베아에게는 청순한 게 어울린다고!"

"여러분은 제가 그런 걸 추천할 거로 생각하는 건가요? 저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 그렇죠? 저희가 오해한 거죠?"

베아트릭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이야기하자, 리오메스는 잠시 턱에 손을 올리더니 유심히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음, 하지만, 그 풍만한 흉부의 크기를 본다면 `코걸이`는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절대로 안 돼!"

라일라와 베아의 비명 같은 소리가 올라오면 리오메스는 농담이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 것이었다.

정말로 농담이었는지는, 그녀만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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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아멜리아는 조용히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익숙한 방. 자신이 유폐된 탑의 꼭대기 층.

그와 동시에,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에 살며시 이불에서 고개를 들어 보면 루베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루베라...? 저, 어젯밤에는…."

"아아, 아멜리아. 일어났군요. 잠시만요,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멜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일어난 것을 눈치챈 루베라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몸을 비켜, 찻주전자와 컵이 올려진 쟁반을 보여준다.

"아직 아침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으니, 조금 이야기할까 해서요."

"...저,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어떻게 된 건가요?"

루베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전혀 기억 속에 새벽의 거리를 걸어서 돌아온 기억이 없는 아멜리아가 그렇게 질문하면.

루베라는 조금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아멜리아는 어제, 그 클럽에서 프로미스의 음기와 열기에 닿애서 정신을 잃었었어요. 입고 있던 옷도, 완벽 하지는 않았단 거겠죠."

"그, 그러했군요... 그러고보니, 어제는 그런 일이 있었죠…."

바리사다와 함께 몸을 웅크리고, 클레온과 프로미스, 그리고 루베라의 정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멜리아.

어째서일까, 클레온이 봉인해 주었던 자신의 안에 있는 상처에서 또다시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루베라가 저를 이곳까지 옮겨와 주신 거군요."

"아뇨. 저도 그 뒤에는 여러모로 지쳐있던 터라... 부끄럽지만. 클레온이."

용의 반지 덕분에, 프로미스에 이어 루베라를 상대하고 난 뒤에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았던 클레온.

그에 반해, 루베라는 억지로 두 사람의 정사에 끼어들었던 덕분에 몸에 피로가 많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녀 역시 클레온이 보는 앞에서 반쯤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으며, 그런 그녀는 갈라테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등에 업어서 트로메이아 가문의 숙소에 데려다 놓았다.

루베라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옷가지를 챙겨입고, 일어났을 때 혼란스러워 할 아멜리아를 위해 다시 그녀를 찾은 것이었다.

"장본인인 클레온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또 오늘 저녁에 있을 귀족들의 파티를 준비하는 것 같지만요."

"귀족들의 파티... 승전기념일의 전에 이루어지는 파티라면 저도 시종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많은 귀족의 커플들이 탄생하는 곳이라고..."

"몇 번인가 유스테스의 뒤를 따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맺어지는 커플들이라는 것은 사전에 귀족의 부모들끼리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어있다고 하더군요. 귀족들에게 있어서 `첫눈에 반하다`라던가,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은 그다지 해당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루베라가 그렇게 이야기하며 들고 있던 찻잔을 건네자, 아멜리아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찻잔을 받아서 내용물을 홀짝였다.

벌꿀과 유자의 향이 가득한, 따뜻한 차였다.

"하지만, 귀족인 아루루는 정략결혼이 아닌데도 클레온과 만나서 맺어지려고 하고 있는데요?"

"...그건, 그녀가 조금 특이할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귀족다우면서도 소탈한 면이 있으니까. 직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 몇 안되는 귀족이죠."

전체적으로, 트로메이아 가문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하고 루베라는 덧붙였다.

"뭐, 딱히 본인들의 감정이 어떻든, 부모님의 의지로 맺어졌던. 행복한 결혼 생활하는 이들은 많지만요."

"...행복한 결혼 생활."

아멜리아는 루베라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는 왕국의 왕녀이자, 반역자의 친족으로서. 아마, 평생을 이 탑 안에서 지내야만 하겠죠. 그런 저도, 누군가와 맺어질 수 있을까요?"

그녀의 표현은, 조금 자조적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라 하더라도, 아무리 총명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피에는 `반역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뒤에 악마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만인의 눈에 비치는 현실은 바로 그런 형태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정략결혼의 상대로서의 가치도 없었고, 본래라면 남성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환경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릴 권리조차, 본래는 용서되지 않았다.

그녀가 만약, 세인트 프린세스가 아니라, 평범한 소녀였다면.

바깥으로 나가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떨려오는 손에, 찻잔 속의 액체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멜리아. 당신은­"

"아뇨, 괜찮아요. 루베라. 당신이라면 분명, 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겠죠... 고마워요."

루베라의 말을 자른 아멜리아는 조금 지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질문한 제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저에게, 그런 권리는 없다는 것을. 괜찮아요! 오렐리아가 언젠가 이야기한 대로, 독신의 여성은 강하고, 자유로울 테니."

자유롭다라.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단어보다도, 아멜리아에게 자유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창 바깥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울린다.

왕성 내에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였고, 이 종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곧 아멜리아의 아침식시가 준비되어 온다는 뜻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멜리아."

루베라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루베라. 루베라는... 앞으로 클레온과 맺어지고 싶은 것이겠죠?"

"읏!?"

갑작스러운 질문에, 루베라는 그녀 답지 않게 당황한 목소리를 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누군가가 오기 전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머뭇거리다가.

"...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그렇군요. 라이벌은 많겠지만. 저는 루베라를 응원할게요. 제, 첫 친구니까요."

"...감사합니다. 아멜리아."

루베라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벽의 숨겨진 문을 열고 탑을 빠져나갔다.

아멜리아는 사라진 루베라가 서 있던 곳을 잠시 바라보며, 어깨의 상처가 있던 부분에 손을 올렸다.

"...응.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응원뿐. 그 행복을 내가 바라는 것 따위. 사치이니까."

마치,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듯이 이야기하는 그녀.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시종이 들어온다.

"아멜리아님, 아침 식사를 대령했습니다."

아멜리아는 침대 위에 앉은 채로 그녀를 돌아본다.

그리고 문득, 평소와는 다른 시종이 온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었다.

"...처음 뵙는 분이네요."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은빛의 포니테일을 한 소녀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과 구겨짐도 없는 완벽한 핏의 여시종 복을 몸에 걸치고.

손에는 아멜리아의 아침 식사가 담겨 있는 쟁반을 든 채.

빛이 깃들지 않은, 잿빛의 무감정한 눈으로 왕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오늘부터 왕성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엑시아`라고 합니다."

"엑시아군요. 잘 부탁드려요. 저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죠."

아멜리아는 쓴웃음을 짓자, 엑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가까이 다가왔다.

문득, 그녀의 손을 아멜리아가 바라보면, 그곳에는 조금 특이한­ 동물을 본뜬 듯한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는­"

아멜리아는 그 반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녀의 것은 박쥐를 본뜬 듯이 생겨있었고.

이전, 어린 시절, 어디에선가 본적이­

"...죄송합니다. 반지를 빼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첫날이다 보니..."

엑시아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서 반지를 슬쩍 감추더니, 손에서 뽑아 그대로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런가요. 아뇨, 괜찮아요."

아멜리아는 이내 조금 멍해진 듯한 머릿속에서 반지에 관한 것을 지워버리며 그녀가 건네준 식사를 받아서 들었다.

"고마워요. 엑시아."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을 전달해 드리려 합니다. 오늘, 왕성에서 왕녀님께, `귀족들의 파티`에 참석을 부탁드린다고 합니다."

아멜리아는 받아서 든 쟁반 위의 그릇에서 스프를 뜨려다가 잠시 움직임이 굳었다.

"물론, 참석할 때는 정체를 숨길 수 있도록 면포를 착용하라고 하셨습니다."

"... ..."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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