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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되었던 마검사가 사실 파티의 기둥(물리)이었기 때문에 용사의 히로인들이 뒤늦게 매달려옵니다-294화 (294/506)

〈 294화 〉 교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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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아악!!!"

남성의 비명이 울리지만, 그 목소리는 두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이곳은, 화룡 프로미스의 클럽.

VVIP고객마저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그녀의 개인 방은, 프로미스가 원하는 대로 그 기능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소중한 반려자를 이차원의 틈 너머로 보내버린 괘씸한 실행범이라던가를 붙잡아놓고, 고문할 수 있는 방을.

루베라는 이전에 배워둔 적이 있는 방법으로, 그 남자를 괴롭히고 있었다.

의자에 앉혀서 묶어둔 채로, 손톱의 밑에 바늘을 찔러넣는다.

그때 마다 남자는 몸부림치고,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그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족쇄나 밧줄 따위가 아닌 화룡이 직접 만들어낸 화염의 사슬이었다.

라일라나 클레온이 사용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정교하게 짜인 술식 속에서 불타오르는 원초의 화염.

그것은, 그의 몸을 익은 스테이크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팔다리를 확실하게 구속하고 있었다.

물론, 프로미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화염 본연의 성질을 되찾아, 그를 바싹 익혀서 마이아르 반응을 일으킬 준비는 끝마쳐진 상태였다.

프로미스는 무심한 눈으로 소파에 앉은 채, 루베라가 고문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붉은 눈이 영혼마저 관통하고 있는 듯했다.

또, 함께 느껴지는 마력압은 그의 의지를 실시간으로 조금씩 깎아내고 있었다.

용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내뿜는 위압감은, 본래는 인간이 버틸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어서.

분노한 용의 주변으로 들어온 인간은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실성해 버리고 만다.

다만, 완전히 제정신을 잃으면 원하는 답을 받아내지 못하기에, 프로미스는 최대한 자신의 힘을 억누른 채로.

고문 자체에도 참여하지 않고 루베라에게 일임하고 있는 것이었다.

몇개 째 일지 모를 바늘을 꽂아넣고 나면, 남자의 손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고통의 비명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던 것인지, 피가 입술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라요. 제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비명이 아닙니다. 클레온을 불러올 방법과, 당신들이 그를 노린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루베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떨군 상태로 심호흡하며.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주지 않겠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글쎄... 하하, 이미 차원의 틈에서 괴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르지..."

"값싼 도발이로군요. 하지만 도발은 자신의 몸에서 전혀 좋을 게 없다는 걸 아직 모르시나요?"

루베라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준비되어 있던 도구 중에서도 바늘과는 다른 것.

검은 약물이 들어가 있는 약병이었다.

"...뭐지? 자백제인가? 그런 게 나에게 통할 것 같나?"

"자백제라..."

루베라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것에 붙어있는 역 오망성의 라벨을 훑어보았다.

그것은 이전, 포츈이 가지고 있던 블랙 메이커의 개량판으로 마시는 이를 조금씩 여성 음마로 바꾸어 버리는 효능을 가진 약이었다.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로미스가 회수하여 나중에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 정화할 생각이었지만.

고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것을 발견한 루베라가 이야기하여, 챙겨둔 물건이었다.

"추방 교단이라고 했던가요? 이 세계에서 교단의 이름을 걸고 행동하는 집단에 정상적인 이들은 없더군요. 성자의 가호 교단도 그러하지만, 당신들과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교단을 자칭하는 인간들이 모인 정신 나간 집단은 더더욱 말이죠."

"우리는, 만물의 아버지께서 정하신 법칙에서 벗어난, 마땅히 세계에 위협이 될 존재들만을 선별하여. 그들을 이 세계에서 추방하는 것뿐이다."

남자가 어딘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자, 루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만물의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지간히 보는 눈이 없나 보군요. 클레온이나 아멜리아가 없었더라면 악마들의 계획을 막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고. 절계수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텐데."

"아버지께서는 더욱 먼 곳을 보신다."

"그 아버지가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설계한, 그에게 있어서 형편 좋은 세계의 모습일 뿐이겠죠."

루베라의 말을 들은 남자는, 입꼬리를 비틀며 루베라를 비웃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너 같은 저주받은 일족의 인간이 이야기해 봤자,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렇습니까."

그러자, 루베라는 손에 들고 있는 약병의 내용물을, 주사기에 담았다.

"그렇다면. 당신도 한 번, 떨어져 주셔야겠군요. 고문받는 사람치고는, 너무 시선이 높잖아요."

"...그 혐오스러운 액체는, 대체 뭐지? 자백제가 아니라면, 독인건가?"

남자는 그때가 돼서야 조금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루베라가 가지고 있는 약을 바라보았다.

루베라는 그런 남자의 말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효과를 지금부터 당신이 직접 체험할탠데... 굳이 제 입으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역시 비열한 일족답군.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일은 없을 거다."

"그거 기대되네요."

다음 순간, 예고도 없이 주삿바늘이 남자의 피부를 꿰뚫고 들어갔다.

바늘 자체는 얇았지만, 꽤 길어서, 따끔한 감각에 남자는 잠시 몸을 움츠리지만.

주사기 안의 액체가 곧바로 그의 몸 안으로 주입되기 시작하면.

남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

이윽고, 그 안에 검은 액체가 들어가 있었던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주사기의 안이 텅 비어버리면 루베라는 거칠게 주사기를 뽑더니 두 발자국 정도 남자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이 개량된 블랙 메이커는, 인간에게 강제적으로 흑마력을 주입하는 효과가 있던 원본에 더해서, 사람을 음마화 시킨다.

그것도, 남자의 경우는 인큐버스가 되는 것이 아닌, 한 번 여성으로 바꾸어서 서큐버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클럽에서 사용되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변화가 나타나면 곧바로 의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희석한 물건을 음용 하는 것으로 천천히 바꾸어 나갔던 것이지만.

이것은, 그 원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그대로 체내에 주입한 것이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큭!? 윽...! 뭐, 냐, 이건...! 역시, 독, 이었나...!"

남자는 괴롭다는 듯이 몸을 비튼다.

루베라는 그 장면을 무감정하게 지켜보면서, 그의 변이가 어디까지 이루어지는가를 지켜보았다.

"그러면... 지금의 당신의 모습에게 작별 인사를 해 두시지요."

"네, 네 녀석...!"

이윽고, 남자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짧았던 머리카락은 서서히 길어지더니 검은색으로 변해서 허리까지 내려오기 시작했고

입고 있던 몸의 밑은 탄탄한 근육질이었던 것이 서서히 굴곡이 진 것으로 변화한다.

얼굴의 피부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지고, 턱선을 가늘어졌으며.

전신의 살갗은 밝은색으로 변한다.

실시간으로 변이가 진행되는 도중, 그­ 아니,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고통을 동반한 그 변화가, 가져오는 것은 단순히 고통뿐만이 아니라, 몸의 안에서부터 영혼까지 변화하는 것만 같은 공포였다.

그렇게, 몇 분 정도가 지났을까.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은 다시는 아까까지 루베라를 조롱하던 남자가 아닌.

머리에는 작은 뿔이 자라나 있고, 등에는 반쪽짜리이지만 날개가 생겨난 서큐버스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목소리가 낮아진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루베라를 황급히 돌아보면, 그곳에는 비릿한 표정을 지은 채, 거울을 들고 있는 루베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에 비친 것은, 완전히 남성에서도, 인간에서도 벗어난 악마로 변이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흑발에 흑안.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던, 흑마의 일족과 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진.

"으아아아아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워 보였다.

프로미스도 루베라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동정심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비명을 지를 수 있다니, 다행이군요."

루베라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서큐버스가 된 그녀는 분노해서 루베라에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 네 년! 나, 나를, 이런 모습으로... 악마로 바꾸어 버리다니...!"

"당신은 아무래도, 스스로에게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기에... 우선, 그 부분을 무너트려 봤습니다. 일단은 육체­ 그리고 다음은, 영혼이겠죠."

"... 읏...!"

루베라의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순식간에 이해했다.

방금, 자신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 거울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을 때.

거기에 비친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혐오감이 조금은 사라진 것이었다.

"아냐, 아냐! 그럴리 없어!"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듯이 그녀는 몸부림쳤다.

"방금 당신에게 투여한 것은 블랙 메이커라고 하는 약입니다. 이것의 원재료에는... 흑마의 일족의 혈액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 덕분일까요, 당신도 저와 같은 흑마의 일족 같은 외모가 되었군요."

주저 없이 그녀가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진실을 이야기 하는 루베라.

서큐버스가 되어버린 그는, 서서히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자, 그럼. 서큐버스.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만물의 아버지와 이전의 당신이 속해있던 '추방 교단'은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이고. 누구의 지시로 클레온과 아멜리아, 카시우스 칼데아리스를 이차원의 틈으로 보낸 거죠?"

다시 한 번, 서큐버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더이상 아까와 같은 광신도는 없었다.

그저, 한 마리의 나약한 음마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답해주면, 풀어줄 거야?"

001

"좋아... 이걸로 준비는 다 끝냈고... 남은 건 베아트릭스가 돌아온 뒤에 할까?"

라일라는 악마 사역 계약의 준비를 끝마친 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어질러진 공방을 둘러봤다.

"음... 어차피 악마를 소환하고 나면 또 어지러워 질 테니까, 이건 이것대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는, 해야 할 뒷정리에 대해서는 나중으로 미뤄버린 채 의자에 앉으면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것과 동시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로켓 목걸이를 바라본다.

클레온이 왕성으로 떠나기 전에 맡겨놓은 물건인 그것은, 죽은 모험가의 유품이라는 듯하여서.

자신이 땅에 떨어트렸을 때 망가진 것 같으니, 수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었다.

물론, 라일라도 마도구를 다루는 법 정도는 알고 있기에, 흔쾌히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수리하려 했는데.

로켓의 뚜껑을 열고 안쪽에 보이는 가족의 초상화를 바라보면, 어딘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 ..."

이렇게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라도, 순간의 실수로 가장을 잃을 수 있다.

유품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이것을 잃은 이의 가족의 품에 이 유품이 돌아갈 수 있을지는 물론이고.

어쩌면, 가족의 죽음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클레온이나 쿠온, 사샤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런 일을 당해서.

혹은, 자신이 언젠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삶을 마감하게 되거나.

더이상 만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면.

남겨지는 이들과, 남게 만든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라일라는 머릿속에서 털어내려 했다.

클레온과 자신들은 강하다.

스스로 이야기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가 된 것이다.

비록, 자신들이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적들도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들과 싸울 때, 클레온의 곁에는 자신이, 자신의 곁에는 클레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문득, 그 로켓의 표면에 음각된 작은 문자를 손끝에서 느끼고 라일라의 몸은 굳었다.

'메멘토 모리'.

라일라는 자신이 고대어를 공부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괜한 후회를 하며 로켓을 움켜쥐었다.

그 단어의 뜻은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이었으니까.

클레온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왕도에 오고 나서부터 점점 짧아져만 갔다.

자신은 자신대로 여러 가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클레온도 왕도를 지키며 트리스 메기스토스의 흔적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클레온과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라일라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적들이 서서히 진심이 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강해진 자신들을 더 강한 적들이 가로막으려 하는 것일까.

"... ...읏."

그리고, 그 불안은 언젠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실제로 라일라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무리를 한 클레온이 크게 다치는 모습을 봐 왔으니까.

알베인과 대결을 했을 때.

엘레시아에서 절계수를 쓰러트렸을 때.

아카데미의 사건 끝에 이차원의 틈에서 귀환했을 때.

그 끝에는 모두, 클레온이 크게 다치면서 겨우겨우 거머쥔 승리가 있었다.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클레온은 무사할 것이라는 믿음이, 은연중에 있었다.

만약에.

클레온이 자신의 곁을 떠나, 더이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목이 메어온다.

싫어. 싫어. 싫어.

머릿속에서 그런 현실을 부정하는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라일라 플레임워치는 현명한 인간이고, 또 다양한 지식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조금 엇나간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가, 이제는 평범한 사람만큼의 공감이나, 교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클레온과 쿠온의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라일라는 힘을 가진 이로써.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둠 너머에서, 라일라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그래... 소중한 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너 스스로 한계를 깨부숴라...'

그 목소리는, 라일라 자신의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로켓의 안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저주였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이 라일라는 그 로켓을 내려다보다가, 재계약을 위해 봉인된 카말라의 머리가 들어있는 철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클레온과 모두는... 내가 지킬 테니까."

어딘가, 불안한 듯한 모습을 애써 감추려는 듯이, 라일라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책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먼지 쌓인 책을 꺼내 들었다.

'사자의 서'라고 불리는 그것은, 고대의 금서를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 것의 또다시 재생산된 판본으로.

원본이 가지고 있는 독기를 가능한 한 정화한 물건이었으나.

그럼에도, 읽는 이들의 제정신을 갉아먹을 정도로 금단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에 생산이 중지된 물건이었다.

할아버지의 서고,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이 물건을 라일라도 호기심 삼아 한 페이지 넘겨보았지만.

기어오는 듯한 그림자가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책을 바로 덮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차원의 틈 너머의 존재에게서 계시를 받아 집필되었다는 이 책의 안에.

어쩌면, 클레온과 모두를 지킬 힘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독기에 저항할 수 있는 마법을 자신에게 건 뒤.

몇년 만에, 그 금서의 첫 장을 넘기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 것은.

어둠 속에 숨은 채, 동물의 가면을 쓴 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런 라일라를 내버려 둔 채로 서서히 사라져 흩어지는 것이었다.

002

"읏... 으윽..."

그레이는 어찌 저 찌, 전신이 쑤시는 고통 속에서도 눈을 뜰 수 있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멜리아를 데리고 사라져버린 가면남에 대한 것과­

"크, 클레온!"

드디어 다시 만난 클레온이 자신을 살폈던 것을 떠올리며 상체를 일으키면.

금세 몸 전체에 격통이 퍼져 나갔다.

"~!#$!$!"

단어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비명 같은 것을 내지르는 그레이를 바라보며, 클레온은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포션을 건넸다.

프레이야가 걸었던 회복 마법만으로는 완전히 낫지 않은 듯한 그레이.

"크, 큰일임다! 아멜리아가!"

"그래, 기절하기 전에 들었어. 요새에 잡혀갔다고."

클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레이는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쥐어 땅바닥을 내리쳤다.

"젠장...! 거의 다 도망쳤었는데...! 뭠까 그 번쩍이더니 엄청 아팠던 거...! 그런 거, 반칙임다!"

"지, 진정하라고... 그렇게 소리쳐 봤자, 그 공주님이 돌아오는 게 아니니까..."

그런 그레이를 옆에서 말리는 페루루카는, 흡혈로 변모했던 모습이 거의 다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담피르로서의 힘을 봉인 당했던 탓에, 흡수한 피의 힘을 길게 유지하는 것이 힘든 것 같았다.

"아. 페루루카도 무사했슴까..."

"뭔가, 그 공주님에 대한 걱정의 크기랑은 좀 차이가 나지 않아...?"

페루루카의 그런 말을 듣던 그레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헤르메스가 보이지 않슴다."

"혹시, 그 기계 쥐를 말하는 건가?"

"맞슴다! 어디에 있슴까?"

클레온의 말에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온은 자신이 챙겨두었던 헤르메스의 기계 몸체를 들어서 그레이에게 보여주었다.

높은 곳에서 추락할 때, 헤르메스는 충격의 완화를 덜 받았던 것일까.

한쪽 다리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고, 찌그러졌던 머리는 반쯤 나가 있었다.

"...헤, 헤르메스..."

그레이는 울상이 되어, 그런 자신의 파트너의 변해버린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 죽어버린 검까...?"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그녀가 어떻게든 헤르메스를 깨우기 위해 그 망가진 몸을 흔들어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흑... 헤르, 메스... 혼자 두지 말란검다..."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친구의 몸을 끌어안은 그레이를 바라보며.

클레온도, 페루루카도 어딘가 조금 마음의 한쪽이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죽었다는 거냐. 네 의식이 되돌아올 때까지, 정보의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 역시 살아있었슴까."

물론, 그것이 그레이의 오버였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지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레이의 펜던트 쪽이었다.

애초에 헤르메스는 인공 정령이다.

물리적인 육체는 일시적인 그릇이고, 언제든지 그레이의 몸, 혹은 그녀가 가진 여러 마도핵을 지닌 물건으로 옮겨 다닐 수 있었다.

"사람을 헷갈리게 하지 말아줘..."

클레온은 조금 전의 안타까움을 되돌려 달라는 듯이 그레이에게 이야기했다.

그레이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일단은 헤르메스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어떤 정보를 정리하던 검까?"

[저 천공 요새의 내부 설계에 대한 분석이다. 아까, 염소의 몸에 잠시 들어갔을 때 그것과 연결된 요새의 내부 시스템의 안도 잠깐이지만 살필 기회가 있었다.]

"정말임까!? 약삭빠른검다!"

[말해두지만, 약삭빠르단 것은 그다지 칭찬이 아니다.]

그렇게, 자아를 가진 인공정령과 만담을 이어나가는 그레이를 보며, 클레온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내부의 구조도 알 수 있다는 건가?"

[바로 그렇다. 지금 내게는, 요새 내부의 구조도가 전부 완성되어 있다. 출발한다면, 안내하도록 하지.]

"하지만, 저렇게 하늘에 있는 검다, 염소를 하나 정도 더 잡을 필요가 있지 않겠슴까?"

그레이의 말에 페루루카는 아까 전 염소에게 도망쳐다니던 것을 떠올리더니 창백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염소는 필요 없다. 지상에서 요새의 안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장비를 찾아냈으니까. 주변의 산에서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장소이다.]

"오..."

그레이도 그 말을 듣고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선 그곳으로 가야겠군. 슬슬 내 동료들도 돌아올 때야."

클레온이 그렇게 말하면, 확실히 멀리에서 프레이야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클레온은 그레이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그레이."

"응? 뭠까?"

"...갑자기 사라졌던 이유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무사해서 다행이야."

"... ...걱정해 줬던 검까?"

클레온에게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질문하면, 클레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함다. 저도, 말없이 사라져서 미안했던 검다. 사정은 있었지만..."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전부 말하고 다니겠슴다."

"...그래. 부탁하마."

그레이가 웃으면서 내민 주먹에, 클레온도 주먹을 부딪쳤다.

"자, 아멜리아를 구하러 가는 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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