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평행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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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해, 일레누. 기억과 자아는 욕망으로 연결돼.]
죽음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여신이 상주하는, 대성당의 안.
자신의 옥좌에 앉은 채 눈을 감아, 자신의 가장 첫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죽음의 여신 담피르 일레누는 눈을 떴다.
생기를 가진 자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 답이 있을 기억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채, 일레누는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쪽은 메이드. 이 영역 안에서 망령 계열의 언데드들을 관리하기 위해, 약간의 권한과 마력, 그리고 자아를 허락한 그녀의 가신이다.
그리고 그 옆에 선 것은... 자신이 이 영역으로 데리고 온 남자.
마검사 클레온.
상처에 응급처치는 해 두었지만,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도, 일레누는 다시 한 번 메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메이드의 눈을 보면서, 일레누는 드물게 가면의 밑에서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공허했던 메이드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온 것이 보였다.
"일레누..."
"일레누?"
메이드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자, 여신은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신 조차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데.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찾은 건가."
일레누의 그런 목소리는, 기쁘다기보다는 당혹과 슬픔, 그리고 껄끄러움이 혼재한 목소리였다.
마치, 그러지 않은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듯한 의지가 함께했다.
"맞아요. 당신의 이름은 일레누고, 저는"
메이드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일레누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클레온은 재빨리 메이드의 몸을 붙잡고 옆으로 몸을 날려서 땅바닥을 굴렀다.
"크윽...!"
땅바닥을 구르면서, 치료되었던 클레온의 상처 중 일부가 벌어지며 붕대 밑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땅을 구른 충격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 신성한 금속인 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부정적인 마력이 퍼져 흐르면서, 칼이 휘둘러진 곳 주변에도 보이지 않는 피해를 주는 것이다.
"클레온...!"
방금까지 메이드가 서 있던 자리에는, 은색의 레이피어를 든 채로 자신이 놓친 목표를 바라보는 은색의 여신이 있을 뿐이었다.
망자를 관리하는 여신은, 죽음 그자체이지만.
그 영혼에 또 한번의 죽음을 내리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당연하게 메이드를 레이피어로 베어내려 했다.
메이드는 놀란 얼굴이 되어서 그런 일레누를 바라보지만, 가면의 밑에서 느껴지는 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뿐이었다.
"일레누, 잠깐... 어째서"
"아무래도, 기억을 되찾은 게 그리 탐탁지 않은 것 같은데..."
클레온은 그렇게 말하면서 재빠르게 땅에서 일어나서 자세를 잡지만, 무기도 없는 맨몸의 그가 완전히 무장한 영역의 지배자와 대적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마검사. 네가 그녀의 기억을 되찾게 한 건가?"
"그래. 완전히 우연이었지만."
클레온의 말에 여신의 가면 밑에서 잠시 안광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잠시 눈을 감아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기다려 주세요 일레누...! 저는 당신을 위해서"
"그만. 기억을 되찾은 이상, 나는 너를 이 영역에 남겨놓을 수 없어. 이 세계에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역에 변화를 일으킬 욕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녀의 말에, 메이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걱정하지 마, 영혼을 소멸시키는 일은 하지 않아. 당신의 안에 있는 기억만을 베어낼 테니까.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장본인인 그 옆의 마검사도 함께."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메이드 역시 슬픈 표정이 되었다.
"일레누..."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나에게 이름은 필요 없어. 아니. 이 곳의 누구라도."
"그랬으면 날 데려오지 말아야지..."
클레온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몸의 상처 따위는 돌아보지 않은 채, 무장의 격차도 상관하지 않은 채 그녀를 막으려 했다.
"...우스운 꼴이네. 기껏 치료해서 조금은 산 사람처럼 만들어줬는데... 이제는 다시 산 송장이 되어버렸어."
"하, 그 말투를 들으면. 그때 그 담피르가 맞나 보군."
클레온이 여유를 가장하며 그렇게 대답하자, 일레누의 눈은 다시 찌푸려졌다.
"내가 당신을 데리고 온 것은... 그 자. 당신과 같은 세계에서 온 오염된 현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야. 당신이 죽으면 곤란해 보였으니까. 그 외의 이유는 없어."
일레누의 목소리는 차갑고,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드는 클레온에게 조금은 질려 있었다.
자신이 클레온을 데리고 와서 메이드가 기억을 되찾았다고?
틀려, 자신은 그저...
'일레누.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윽...!"
일레누의 머릿속에서 언젠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통을 유발하는 그 목소리 자신이 닫아버린 기억 속에만 존재해야 할 목소리가.
심장 고동을 빠르게 만드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메아리.
다음 순간, 여신의 발밑에 뻗어있는 검은 그림자가 그 형태를 바꾸면서 마치 끈적한 혈액이 뭉친 것처럼 사람의 형태가 되어 일어났다.
그것은, 눈도, 코도, 입에도 구멍이 뚫려 있고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퀄리티가 떨어지는 진흙 인형 같았지만.
손에는 검을 들은 채로, 그 공허한 구멍의 시선을 클레온에게 향한다.
"뭐, 뭐야...?"
메이드조차, 일레누에게서 저런 것이 튀어나온 것은 처음 보는 것인지 당황하였다.
다만, 클레온은 그 인형의 검은 눈구멍과 눈이 마주치고 자신에게 향하는 살기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인형의 살기가 똑바로 자신만을 향해 있다는 것도 함께 느꼈기 때문이었다.
'젠장... 안 좋은 걸.'
게다가,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멈추지 못하면, 클레온은 서서히 눈앞이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곳에서 억지로 일레누와 이야기를 하려 해도, 닫힌 귀를 열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메이드는, 점점 클레온의 호흡이 가파라지는 것을 보더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크, 클레온. 일단 도망가요. 지금, 그 몸 상태로는 너무 위험해요..."
설마, 일레누가 이렇게까지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메이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을 무시하고 클레온에게 달려들려던 그림자 인형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대성당의 안에 놓여있는, 긴 의자를 비롯한 여러 가구가 음산한 초록색 불빛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마구잡이로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그림자 인형을 그대로 짓누른다.
"으으...!"
마력을 운용하는 공격을 하는 것은, 몇백 년 만의 일이었기에 메이드는 익숙하지 않은 마력 운용에 입에서 비명 같은 것을 내질렀다.
그나마, 마구잡이로 물건들이 움직이는, 제어되지 않은 가구들의 움직임이 역으로 그림자와 일레누를 위협했다.
그림자는 처음의 공격으로 한 번 몸이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두통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는 일레누를 지키듯이 감싼다.
"이, 이 틈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처가 벌어진 클레온을 이끌고 자신들이 들어왔던 대성당의 문을 통과하여 그대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기, 다려...!"
일레누는 두 사람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어보지만, 그런 일레누의 팔을 그림자 인형이 막았다.
"너는... 대체..."
그리고, 그 그림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레누도 모른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견딜 수 없는 두통에 의해 정신을 잃으면서, 쓰러졌다.
그림자는, 그런 주인을 내려보며 지켜보다가, 몸을 안아 들어서 그녀의 옥좌에 앉혔다.
그리고는, 옥좌의 뒤로 돌아가 땅에 박혀 있는 역십자를 바라보더니
그 표면에 붙어서, 상당한 크기로 재생한 흡혈귀의 육편을 자신의 검으로 찢어버렸다.
마치, 그 주인이 원래 해야 했던 일을 대신한 듯한 그것은, 그대로 다시 무너지듯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며 주인에게 돌아간다.
잠깐의 소란이 있던 대성당은, 그대로 다시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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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클레온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자신의 피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포션도, 치유마법도 없는 상황에서 이 피를 멈출 방법은 붕대에 의한 지혈 정도겠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클레온, 조금만 참아요... 약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대성당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공동묘지의 끝에 있는 낡고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메이드는 서둘러서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고, 조금 뒤에 문이 열리면
그곳에는 아까 전 메이드를 찾아와 듀라한의 머리의 행방을 물었던 리치가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얼굴에는 해골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밑에서는 공허한 잿빛의 눈이 보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메이드가 그렇게 급하게 자신을 찾은 것은 처음일뿐더러, 그 옆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 역시 리치에게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변화가 적은 이 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부, 부탁이에요. 리치 씨, 당신이라면 치유약을 만들 수 있었죠...?"
"... ... 일단 들어와. 그쪽의 죽어가는 산 송장도..."
리치는 무언가를 조금 생각하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자신의 오두막 공방의 안으로 들여보냈다.
원래라면, 마법사의 공방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안 됐지만...
메이드는 몇 번이고 자신의 공방 청소를 도왔으니, 괜찮겠지.
"하지만... 그 산 송장한테는 이걸 씌워야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리치가 꺼낸 것은, 칠흑의 천으로 만들어진 안대였다.
그것은, 마력을 이용해서 씌운 자의 시력을 일시적으로 빼앗는, 눈을 가린다는 목적만을 위해 특화된 마도구였다.
"크, 클레온 이에요. 산 송장이 아니라."
"그래, 이름이 뭐던 간에. 내 공방을 볼 수 있는 건, 여신님과 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면 충분해."
리치는 그렇게 말하면서 클레온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마도구를 뒤쪽으로 두르면
힘겨워 보이는 클레온의 얼굴을 보고, 무언가가 머리속을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윽..."
비틀 거리면서 뒤로 물러난 리치가, 손에서 천을 떨어트리는 것을 보고 메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당신도...?"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안대는 네가 씌워..."
머리를 털어내듯이 두통을 떨쳐내려 하는 리치는, 안대를 던지듯이 메이드에게 건네더니 탁자 앞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메이드가 클레온에게 안대를 씌우는 것을 바라보며, 조금이지만 정신의 흔들림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이, 이것으로 됐죠? 그럼, 치유약을..."
"잠깐. 들어오라곤 했지만, 약을 준다고 한 적은 없어. 우선, 네 상태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야, 메이드."
리치의 말에 메이드는 움찔하고 몸을 떨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의 네 상태... 평소와는 달라. 동요, 걱정, 슬픔... 그리고 약간의 분노. 이전보다도 자아가 강해진 것이 느껴져. 그리고 그쪽의 남자에 대한 특별한 감정까지."
그녀의 말에, 메이드는 점점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녀도 여신 일레누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되찾은 이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그건..."
"솔직하게 대답해."
그녀의 손 위에서 불씨가 춤추는 것이 보였다.
메이드는 그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클레온의 목숨에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결국, 메이드는 손을 쥐면서,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 맞아요, 저는 생전 기억의 대부분을 되찾았어요. 클레온 덕분에..."
"... 그 남자 덕분에?"
메이드는 리치의 확인하는 듯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러고는 리치의 손을 붙잡으면서 이야기한다.
"마, 맞아요. 저는, 생전에 그와 여행의 동료였어요. 같이 몇번이고 생사의 고비를 넘었고... 덕분에, 영혼에 감추어져 있던 기억을 다시 꺼낼 수 있던 거에요!"
"... ..."
메이드의 말에, 리치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육체에 깃드는 것이었고, 영혼에 남은 것은 그 흔적일 뿐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풍화되어간다,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이 인간과 만나는 것만으로 회복했을 리는 없다.
곰곰히 생각하던 그녀는 아까 전, 자신이 찾아갔을 때 보았던 그녀가 이상했던 것을 떠올렸다.
"─잠깐, 설마. 그 때..."
무언가가 이어지는 것을 느낀 리치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메이드는 그대로 리치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 뭐?"
"이제 기억났어요... 아니, 기억을 되찾고, 당신을 보니까 기억 났어요...! 당신도, 저와 마찬가지로 클레온과 일레누의 모험 동료였어요!"
"... ..."
리치는 메이드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클레온과 메이드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일레누는 또 누구고...?"
"여신님의 이름이에요. 걱정하지 마요, 당신의 기억도 되찾게 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 전에 클레온에게 약을"
"기다려...!"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그녀를 리치는 마력을 이용해서 밀어내서 의자에 앉힌다.
"기억을 되찾을지 아닐지는 내가 정해. 그렇게 그를 구하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겠지만... 기억은 내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바깥 세계의 마법 지식이지."
"마법... 지식?"
메이드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클레온을 내려다보았다, 서서히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상처는 심각했다.
그런 상황에, 지식 같은 것을 원한다고 이야기 하는 리치가 조금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차원의 틈, 특히 이 세계는 정체된 세계. 나는 여신님으로부터 '언데드를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는 마법'의 개발을 부탁받았어. 하지만, 이렇게 변화 없는 세계에서 새로운 마법을 만드는 건 힘들지."
그렇기에, 리치는 클레온에게 다가가며, 가면을 벗었다.
"그러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바깥 세계의 마법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마법을 개발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약을 만들어 줘도 좋아."
그리고 후드를 벗으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붉은색의 사이드 테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계약이야, 이방인. 당신의 마법 지식을..."
그리고, 손가락을 뻗으며 클레온의 이마를 검지로 누른다.
"이 라일라 플레임워치에게 제공해 줘."
익숙한 이름을, 클레온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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