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화 〉 업보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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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소란스러운 왕성.
귀족들은 왕국병사들과 기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누구 한 사람 다치거나 하는 일 없이 무사히 왕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는 각자 가문의 저택으로도 돌아가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이번 일의 원인을 따지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귀족들.
“대체 어째서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듣자하니 암살자들도 움직이고 있었다고 하는데! 왕국의 경비병들은 대체 뭘 하고 있던 겁니까!”
“암살자들이 움직이고 있던 것도 분명 그 제국인과 관련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아멜리아 왕녀까지 이상해졌다고 하던데… 역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자유를 허락한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 겁니까?”
“우선, 왕성의 경비를 강화하고, 혹시라도 그 제국인이나 아멜리아 왕녀가 이쪽을 향할 수도 있으니…”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들의 보신을 생각하는 귀족들.
리겐트는 그런 귀족들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지금은 쓰러져 아내의 곁에 누워있는 자신의 오랜 친구, 퍼시스를 바라본다.
비록 두 가문은 오래된 대립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친밀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지만, 두 사람은 이전의 대전에서 제국과의 싸움을 함께한 동지였다.
방패로서, 그리고 왕국민들의 삶을 책임지는 재상으로서 건국 이래의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두 사람.
'그런 네가, 지금은 그 제국의 잔당에 당하여 누워있다. ...이 나라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인가.'
리겐트는 귀족들의 소란을 잠재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피곤한 얼굴로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 도중
철걱, 철걱 하는 특징적인 판금 갑옷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귀족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지면서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그곳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루시우스를 방으로 옮긴 뒤 어두운 얼굴로 돌아온 카시우스 왕세자와, 그의 뒤로 따라온 용의 기사 드레이크가 서 있었다.
리겐트 공작은 카시우스가 돌아온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왕세자 전하. 폐하께서는..."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이 드셨습니다. 오티스... 그자에게 상당히 겁을 먹으신 것 같군요. 정신적으로도 피로하신 것이겠죠."
오티스와 아버지의 악연에 관해서는, 이전 들은 적이 있었기에 카시우스도 인정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리겐트 공작. 지금 왕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요."
"맞습니다. ...루시우스 폐하와 퍼시스 경이 명령을 내리실 수 없는 지금, 왕국군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군사권은 전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카시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귀족들을 바라본다.
이 자들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은 이곳까지 오면서 대부분의 평민을 그대로 버려두고 왔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쉰 카시우스는 우선 손을 펼치며 이야기한다.
"혼란에 빠진 왕도를 지키기 위해, 왕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왕국군과 기사들을 출정시키시오. 적의 토벌보다도, 시민의 구출과 2차 피해의 방지에 주력하도록 명하겠소."
"허, 허나. 병사들이 성에서 나가게 되면, 이 성은 누가 지킨다는 것입니까?"
어떤 귀족이 그렇게 목소리를 내자, '맞습니다'라는 대답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왕성의 보물고에는 명검과 갑옷이 진열되어 있소. 그대들에게 빌려줄 테니, 스스로 몸을 지키시오."
"그, 그런...!"
카시우스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무언가를 외치려 하지만, 쿵! 하고 땅을 울리는 듯한 충격이 카시우스의 곁에서 울렸다.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드레이크가 창으로 지면을 찍으며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었다.
카시우스는 우선, 바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리겐트의 보호를 받으며 왕성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들은 내용이라고는, 아멜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입을 벌리지 않으려는 리겐트를 원망스럽게 생각하며, 카시우스는 자신의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휘릭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또 다른 검은 판금 갑옷을 입은 여기사 한 명이 왕성의 천장에서 떨어지듯이 나타났다.
그는 카시우스의 옆에 곧바로 착지하더니 무릎을 꿇는다.
드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명을 본뜬듯한 동물의 형태를 가진 갑주를 걸친 그녀의 형상은, 마치 무당벌레와도 같았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붉은색의 망토 위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 7개의 검은 원.
그리고, 곤충과도 같은 외골격과 같이, 그녀의 몸에 딱 달라붙어 다른 판금 갑주에 비해서도 가벼운 인상을 보이는 그녀는, 카시우스의 측근 기사이기도 했다.
"무당 벌레의 기사, 마리키타. 이곳에. 부르셨습니까 카시우스 전하."
"마리. 바깥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겠지."
"네. 빠짐없이."
그녀는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과, 뛰어난 시력을 이용하여, 카시우스의 눈이 되어주는 기사이기도 했다.
"아멜리아 왕녀님은 흑마력의 폭주를 일으키셨습니다. 현재, 왕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은 아멜리아 님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아멜리아가!?"
카시우스는 그녀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이 왕도를 지금까지 지켜온 세인트 프린세스이다.
성령의 가호를 받으며, 신성 마력을 휘둘러 악마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존재인 그녀가, 어째서?
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가까이 있던 클레온이 무언가 조처를 했을 것이다.
카시우스가 마리에게 자세한 일의 전말을 물어보면, 그녀는 빠짐없이 자기가 살핀 것을 대답한다.
클레온이 칼에 찔린 뒤, 아멜리아가 이상해진 것.
그리고, 그 아멜리아가 왕국의 백성들과 대응하기 위해 출동한 왕국군 중 일부로부터 마력과 생명력을 흡수한 것.
아루루, 그리고 그녀의 여시종인 흑마의 일족과 전투를 벌인 것까지.
"지금은 왕국 광장에, 검은 결계가. 아마, 그 안에서 전하께서 고용하신 흑마의 일족이 아멜리아 왕녀님을 막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설마 아멜리아 왕녀님께서 흑마력을 가지고 게셨다니... 성스러운 일족이라고 일컬어지던 그녀의 어머님의 힘을 물려받지는 않으신 걸까요..."
카시우스의 곁에서 무당 벌레의 기사의 이야기를 듣던 리겐트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카시우스는 조용히 리겐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누구나 마음 속에 어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어둠을 자극한 것은, 오히려 우리일지도 모르지요."
"... ..."
카시우스는 그렇게 이야기한 뒤, 아멜리아를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 기사들이나 병사들로는 애초에 전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마리가 이야기 한대로 그녀의 힘이 왕도 전체로 퍼져 나가 있다면 말이다.
카시우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의 그림자와 같이 뒤에 서 있던, 왕국 최강의 기사에게 시선을 보낸다.
"드레이크 경."
드레이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한쪽 무릎을 꿇는다.
"기다려주십시오, 설마, 드레이크 경을 보낼 생각이신 겁니까?"
리겐트는 카시우스의 그런 행동에 당황해 하면서 그를 말리려 한다.
"드레이크 경은 움직이실 수 없는 국왕 폐하를 지켜야만 합니다. 혹시라도 흑거성이 다시 나타난다면"
"리겐트 공작. 아버지께서 명령을 내리실 수 없는 동안, 기사와 군의 지휘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분명 당신일 터입니다."
"... ..."
리겐트는 카시우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카시우스는 그것을 그의 납득이라고 받아들이고,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무릎 꿇은 용의 기사에게 명령한다.
"저의 친구, 클레온 씨를 도와주십시오. 그와 함께 이 왕도를 지키는 겁니다."
드레이크는 카시우스의 명령을 들음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왕성의 정문이 있는 쪽을 향해 조용히 걸어간다.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과도 같았지만, 그 존재가 가진 힘이라면, 분명 클레온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카시우스 전하. 아멜리아 왕녀님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 논의 드릴 것이 있습니다."
"... ..."
리겐트의 말에 카시우스는 조금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잡히지도 않은 이의 처벌을? 리겐트 공작. 전 그 아이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게 됐는지, 벌써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희에게는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리겐트의 조용한 말에 카시우스는 쾅. 하고 자신이 서 있던 곳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이차원의 틈의 마력 때문에 뒤틀려 버린 그의 팔은, 손쉽게 그 철제의 손잡이를 구부러트렸다.
"적당히 하시오 리겐트 공작. 아멜리아와 같은 여자아이 하나의 희생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나라를 만든, 당신들의 무능함을 내가 꼭 지적해야 합니까?"
"... ..."
리겐트는 카시우스의 말에 입을 조용히 다문다.
'어쩌면, 모든 것은 업보일지도 모르지. 아멜리아를 몰아붙이고, 제국의 잔당을 필요 이상으로 사냥하고 다녔으며, 거기에 더하여 귀족들은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암살자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합리화 하는 지금의 비틀린 왕국 자체가.'
카시우스는 그렇게 생각 한 뒤, 자신의 기사에게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이어서 왕도를 감시하라.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다면 보고하도록."
"...네, 전하."
마리키타는 그렇게 이야기 한 뒤, 가볍게 뛰어올라, 천장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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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앗!"
다시 한 번 기합 소리가 울리면, 섬광이 흑수정들의 사이를 꿰뚫고 지나간다.
시끄럽게 금속과 수정이 부딪히는 소리와, 그것들이 서로 부서지는 소리.
그런 광경을 보면서, 아멜리아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검지를 일정 간격으로 두드린다.
"판도라...!"
그리고, 그 섬광의 뒤를 이어서 쫓아오듯이 펼쳐지는 검은 장막과도 같은 마력의 참격.
일격에, 그들을 사방에서 감싸듯이 몰려들었던 흑수정의 병사들이 몇십 체나 부서져 내렸다.
릴림과 사샤는, 아멜리아가 예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오래, 그리고 질기게 버티면서 흑수정의 군세들을 처리해내고 있었다.
"어째서 안 죽고 있는 거야... 저년들...!"
다음 순간, 아멜리아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
아멜리아는 손을 움직이는 동작조차 보이지 않은 채, 그것을 흑수정의 꼬리를 이용해 막아낸다.
"큿..."
이번에도 막혔다는 사실에 사샤는 분한듯한 목소리를 내지만, 그런 그녀의 시도조차, 아멜리아에게는 짜증 나는 발버둥 정도로 느껴졌다.
자신이 곧바로 그녀들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최대한 절망스럽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지를 여유를 주면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클레온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야만, 클레온이 지금까지 동료라고,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켜왔던 것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고.
그저, 그의 발목을 잡을 뿐인 존재라고 확실히 각인시킨 후에.
그가 느낄 절망, 슬픔, 그리고 분노를 영양분 삼아, 그의 안에 심어둔 씨앗이 자라날 수 있도록 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자신의 흑수정의 병사들은 물론 원본에는 미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클레온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하나를 상대하는 데에도 애를 먹을 수준으로 조정을 마친 물건이다.
특히, 루베라를 모방한 인형에 관해선 아멜리아 본인이 가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꽤나 비슷한 수준까지 완성도를 끌어올린 병사인데.
그것을, 저 짐승귀 달린 소녀가 활과 화살만 가지고 어떻게 해낸 것에는 충격과 굴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초조한가?"
그 때, 옆에서 들려오는 클레온의 목소리.
여전히 흑수정의 십자가에 매달린 채였고, 배에서 흘러나오는 핏방울이 뚝... 뚝... 소리를 내며 지상으로 떨어진다.
이미, 그의 검인 갈라테아는 흑수정으로 뒤덮어서 구석에 던져둔 상황.
마력이 남아있지 않은 그녀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애초에 무언가 시도를 할수는 있는지조차 의심되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심각한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마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에서 자신을 거의 죽이기 직전까지 간 둘이다.
경계는 충분히 하더라도 부족하지 않겠지.
다만, 그가 입에 담았던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초조하냐구요?"
아멜리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초조? 어째서 자신이 초조해 할 필요가 있지?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런 '전투 놀이'같은 것에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모르겠나요? 시간을 끄는 것은 제 쪽이라는 걸요! 당신이라도 죽음이 가까워진다면, 제 말을 들어주겠죠. 그 모래시계의 내용물 같은 혈액이 바닥나는 순간에 말이에요."
클레온은 그녀의 말에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바로 네가 그녀 아멜리아와는 다르단 점이로군. 힘을 얻고 자만해져서, 자신의 승기를 계속해서 놓치려고 하고 있어. ...말해두지만, 그 아이는, 나보다도 승리에 더욱 탐욕적이야. 그녀에게는, 지켜야할 것들... 짊어진 목숨의 수라는 것이 다르니까."
"... ..."
클레온의 말은, 그녀에게는 패배자의 변명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 남자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각인이 욱신거려오는 것이다.
그 부분에 손을 올린 채 강하게 주먹을 쥔 아멜리아는 몰려오는 짜증을 흑마력에 담는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면, 저 둘은 바로 지금. 당신의 눈앞에서 목을 날려주죠..."
그렇게 말한 그녀가 양손을 펼치자, 공기에 진동이 퍼져 나간다.
거대한 마력이 모여드는 것에 대한 전조.
마치, 전장을 지휘하듯이 움직이는 그녀의 양팔에 이끌려서 마법이 술식이 짜여간다.
"나의 눈에 닿는 존재를 절망의 늪으로. 나의 팔에 닿는 존재를 슬픔의 구렁텅이로. 나의 숨에 닿는 존재를 배신의 유혹으로. 나의 의지는 오직 나로 인해 이어지며, 무한한 어둠 앞에 모든 옳음은 반전하여 부정해진다."
그녀의 노랫소리와도 같은 영창이 울려 퍼지면, 그녀의 몸 앞에 거대한 흑마력의 덩어리가 그 형태를 바꾸어간다.
그것은 거대한 문이었다.
오랜 시간, '지옥'이란 무엇일까를 상상하여 온 조각사가 만들어낸, 지옥으로 통하는 문처럼, 그 문에는 몇 명이나 되는 인간들이 절망에 휩싸인 채 구원을 바라며 빛을 향해 매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문을 구성하고 남은 검은 마력이, 안개처럼 깔리면, 그 문은 쿵, 하고 지상으로 떨어진다.
분명, 그 문의 두께 자체는 그렇게 넓지 않았음에도 어느 한 쪽으로 넘어지지 않는다.
릴림도, 사샤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문에 놀란 듯이 그쪽을 바라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멜리아는 그 당황한 모습이 썩 맘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면서 주먹을 쥐고 낮은 목소리로 영창을 마무리한다.
"그러니, 그대. 죄 많은 존재여. 나의 앞에서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다음 순간, 릴림과 사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흑수정의 군세들을 앞에 두고, 지옥의 문이 열린다.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하고 끔찍하게 생긴 망령의 물결이었다.
눈이나 입, 그리고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손들이 꿈틀거리면서 거대한 덩어리를 이룬 채, 파도와도 같이 쏟아져나오며 사샤와 릴림이 있는 쪽을 향한다.
그 사이에 있는 흑수정의 병사들마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우앗...!"
사샤는 그 물결을 보고 본능 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판도라의 방어막도, 저렇게 대량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물결 그것도 같은 흑마력이라면 상쇄되는 것도 아닌 일방적으로 집어 삼켜져서 방어를 무력화될 가능성이 컸다.
"자아! 어둠의 물결에 휩싸여서, 추태를 보이며 죽어가세요!"
마녀와도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사샤와 릴림의 패배를 확정시키는 아멜리아.
하지만, 다음 순간.
[어림도 없죠.]
사샤에게서 다시 한 번, 뽑혀나가듯이 스스로 움직인 성검 칼리번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면.
강력한 빛과 함께 강림한 천사처럼, 땅으로 내려서 양팔을 앞으로 뻗는다.
그러면, 백금색의 방벽이 전개되며 릴림과 사샤를 지켜낸다.
"카, 칼리번 씨!"
사샤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면, 곧이어서 루벤이 사샤에게 목소리를 건넨다.
[멍하니 있지 말고! 저 문을 파괴하는 거다! 마지막 남은 꽃의 화살을 걸 거라!]
"읏... 네, 네...!"
루벤의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린 사샤는, 그녀가 마력을 담아 만들어내는 화살
눈의 화살과 달의 화살에 이어지는, 꽃의 화살을 시위에 걸어 사냥꾼의 각인에 불을 붙였다.
'궤도는, 최대한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정확하게 문을 구성하는 술식의 약한 부분을 노려서 쏜다면'
빠르게 돌아가는 두뇌 회전, 그리고 최대한으로 당겨진 시위를 붙잡은 그녀의 팔근육이 딱딱해질 정도로 부풀어 오른 다음 순간
핑! 하는 현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마력을 머금은 화살이 정직한 궤도를 그리며 아멜리아가 불러낸 지옥의 문을 향해 날아간다.
"아~아~ 그런 화살로 뭘 하겠다는 건지. 저건 제 마법이라고요? 그런 물리적인 공격이 통할 리가"
하지만 다음 순간, 사샤가 발사한 화살이 지옥문의 윗 부분에 달린 장식 그 정 가운데에 부딪히면서 퉁겨져 나오는 것을 보고 아멜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충돌했어?'
마법과, 물리적인 화살이?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화살에 담겨있던 마력의 각인이 터져 나온다.
만개한 꽃나무의 밑에 서 있을 때와 같이, 흩날리는 꽃잎으로 지옥문의 주변이 가득해진다.
"꽃잎...?"
정작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하 하하!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로는 제 마법을"
"불의 꽃, 마지막 춤."
사샤의 시동어가 그렇게 전달되면.
흩어진 꽃잎 하나하나가 품고 있던 마력이 커다랗게 진동하면서 폭발을 일으킨다.
그 수가 절대 적지 않았기에, 아멜리아가 지켜보던 지상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가득해지는 것이었다.
"뭐, 뭐에요!? 대체...!"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던 흑수정의 건틀릿에 금이 간다.
"큭...!?"
'마, 마법과 흑수정의 병사들이 강제적으로 철거되면서... 리바운드가... 마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서...'
그녀의 머릿속에 상황을 판단하기 위한 문장들이 강제적으로 떠오르면, 어떻게든 손실한 마력을 메꾸기 위해서라도 영맥의 마력을 끌어오려고 한다.
하지만
번쩍이는 황금색의 빛이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일격이었다.
아멜리아의 눈은 천천히 돌아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
어딘가 멍한 목소리가, 그녀의 목에서 울렸다.
그곳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력을 추진력 삼아서 뛰어오른 릴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당연하게도 거대한 마검 판도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어느샌가 성검의 형태로 돌아온 황금의 성검.
칼리번.
[말했죠? 저는 클레온의 비장의 패라고...]
칼리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하면, 그녀들이 베어낸 것은 아멜리아의 한쪽 뿔에서부터 오른쪽의 팔까지.
허공에 만월을 그리듯 1회전 하면서 그려진 그 검의 궤도는 아멜리아의 팔에서 피를 뿜어나오게 하는 것과 더불어.
십자가에 묶여있던 클레온을 구출해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큭...!"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얼굴을 분노로 물들이며, 아직 멀쩡히 움직일 수 있던 꼬리를 움직인다.
이렇게 되면, 클레온이 떨어지기 전에 붙잡아서
하지만, 그것마저도 읽고 있었다는 듯, 릴림은 이번에는 칼리번을 놓으며 허공에서 마력을 통해 자신의 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틀어
콰직!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렬한 타격과 함께, 클레온을 지키듯이 양다리와 양 팔을 뻗어 대신 붙잡히는 것으로 그의 몸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사, 샤!"
그리고 그녀가 지상에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부르면, 사샤가 재빨리 뛰어가 땅으로 떨어지는 클레온의 몸을 대신 받아든다.
"캐, 캐치!"
사샤도 아슬아슬하게 그 몸을 받아내는 것이다.
"큭, 리, 릴리이이임!!!"
다음 순간, 아멜리아는 상황이 순식간에 뒤집힌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지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한쪽 손 아직 남아있는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
릴림의 목을 크게 베어내는 것이었다.
'...아'
릴림은 이것마저도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