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5화 〉 [5부 막간]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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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에서 일어났던, 아멜리아 왕녀의 폭주에 의한 참사로부터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곳 저곳, 부서진 도로들과 건물들.
지하 유적에 닿을 듯이 파고 들어간 구멍들을 메꾸기 위해, 왕도 주변의 평원에서 대량의 흙과 바위들이 옮겨져 왔다.
아카데미에서도, 왕도의 복구를 돕기 위하여 인력들이 파견되었으며, 길 곳곳에 아카데미의 제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법사들이 바위를 옮겨오면, 검술과의 학생들이 검을 휘둘러 필요한 모양으로 석재를 절단한다.
그 뒤에는, 건축학과의 학생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파손된 곳들을 보강하고, 수리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거리를 바라보며, 코트를 입은 금발의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학생들, 무료 봉사라는 것 같사와요."
잠깐 발을 멈춰서, 불쌍하다는 듯이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그 뒤를 쫓던 빵모자를 뒤집어쓴 은발의 소녀는 '으엑'하고 혀를 내두른다.
"왕국도 쩨쩨한 검다... 장학금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님까?"
"이번 사건으로 입은 손해를 메꾸는 데만 엄청난 비용이 들고 있다는 것 같으니까요. 몇 년 만에 찾아온 재정난이라는 것이겠죠."
금발 소녀는 멈추었던 다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며, 귀족가의 거리를 걸어간다.
평민들의 거리와 귀족들의 거리, 어느 쪽이 더 피해를 많이 받았느냐고 한다면
둘을 비교했을 때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귀족이라고 덜 공격 받았더라면.
평민이라고 더 공격 받았더라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겠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벌은 귀천의 구분 없이 평등하게... 인가."
금발 소녀의 말에 은발의 소녀는 대답한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다행입니다. 다친 사람은 꽤 되지만..."
"그 와중에 대신전이 폐쇄되었으니까요.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라고,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은 알아챘겠죠."
이렇게나 부상자가 많은 상황에서, 원래 같았으면 대 신전에 줄을 지어서 치료를 받기 위해 왕도의 백성들이 몰려갔어야 했겠지만.
교황 에스카 톨로지는 대신전의 폐쇄를 명하고, 폐쇄가 개방될 때까지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명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교황의 의지는 굳세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민간 성직자나, 하다못해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는 의원을 찾아야만 했다.
"...그 성전사... 베라스톨. 제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없었슴다."
"제가 당신을 깨웠을때도에요. 아마,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이겠죠. 그렇다면, 돌아간 곳은 대신전. ...에스카 톨로지 교황이 아멜리아 왕녀의 암살을 꾸몄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당신과 클레온의 목격증언이 전부. 그쪽을 조사하기에는, 이쪽도 지금은 힘이 부족해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춘다.
귀족가의 안에서도, 트로메이아 가문의 저택은 거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쓰러질 수 없는 왕국의 방패라는 것처럼.
정문을 장식하는 방패의 문장.
하지만, 누군가가 돌을 던진 것인지, 정문의 앞에는 돌 같은 것들이 굴러다녔으며 평소라면 서 있어야 할 경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용사 아루루가 아멜리아 왕녀에게 패배한 바람에, 피해가 더 커졌다.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것은, 금발의 소녀
아루루의 친구이자 라이벌, 그리고, 왕국 특무 수사관인 메르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온 것은 왕국의 회색 탐정 그레이.
탐정 사무소는 폐업하고, 지금은 메르카의 조수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레이는 메르카의 의수를 직접 만들어준 장본인이었고, 그녀가 의수를 망가트릴 때마다 고쳐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문의 문 뒤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메르카님."
메이드 복으로 전신을 감싼 그녀는, 갈색의 머리카락과 에메랄드색의 눈동자가 특징적인 여성의 모습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면 머리카락이 중력에 따라 흘러내렸다.
그레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입을 벌리며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우와. 진짜 바뀐검다... 순간 못 알아봤슴다."
"...놀리지 말아줘..."
얼굴을 붉히면서 입가를 가리는 그녀의 동작은, 이제는 남성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새로운 몸에는 익숙해졌나요? 유스티나."
"네. 동료로부터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한동안 격렬한 훈련은 삼가라고, 배틀 메이드의 업무도 휴가를 받았죠."
유스티나의 말에, 메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 안에 있던 완벽의 결정이 빠져나가면서, 이제 몸도 마음도 완전히 여성이 되어버린 유스티나의 몸에는, 이전과도 같은 강력한 마력을 생산해낼 수 있는 마력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남성성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던 체력과 근력조차 조금 약해진 덕분에, 원래 알고 있던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될 때 까지는 또 조금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존댓말?"
분명, 3일 전에 만났을 때는 평범하게 반말로 대화하였을 터.
"일단은 지금은... 메이드로서의 업무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으니까요."
"아하. 그것은 또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그러면, 주인에게 안내해 주시겠나요? 병문안을 왔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종이 가방을 보이는 메르카.
유스티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채, 닫혀있던 정문을 연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자물쇠를 잠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그레이와 메르카는 조용히 바라본다.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으면 돌을 던지는 걸 넘어서 들어오려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화풀이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간덩이도 크네요. 공작가의 정문에 돌을 던진다니. 아무리 트로메이야 가문에서 허락한 일이라지만 실제로 한다니요."
메르카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유스티나가 안내하는 뒤를 따라 걷는다.
길고 긴 정원을 지나, 저택의 입구를 통과하면,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로비가 두 사람을 맞이한다.
"트로메이야 가문의 저택...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요. 그때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 같지만."
"...우와, 여기저기 보이는 가구들 전부 합치면 대체 얼마인검까...?"
귀족중에서는 꽤 검소한 편에 속하는 트로메이아 가문의 인테리어도, 그레이가 보기에는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의 물건들일 뿐이었다.
"오렐리아님은 지금 퍼시스 님과 함께 계십니다. 3일 전의 사고 이후로, 퍼시스 경께서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신 터라... 두 분께서 찾아오시는 것은 이미 전해드렸습니다."
"...그런가요. 부디 쾌차하셨으면 하네요."
유스티나의 이야기를 듣고, 메르카는 안타깝다는 듯이 그 두 사람을 떠올린다.
퍼시스 경이 딸을 지키고, 흑거성의 공격을 대신 받아 쓰러졌다는 사실은 이미 왕도 전역에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딸을 지킨 아버지로서 퍼시스 경을 칭송했지만.
덕분에, 지킴 받았음에도 아멜리아를 막지 못한 아루루에 대한 평가는 더욱 안 좋아졌다는 것이다.
"아루루 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스티나가 안내를 재개하면, 두 사람은 다시 저택의 복도를 걷기 시작하고
이윽고, 응접실의 앞에 도착한다.
유스티나가 문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루루 님. 메르카 님을 모셔왔습니다."
"응, 들어와도 괜찮아."
아루루의 허락이 떨어지면, 실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문을 열어젖힌다.
바깥의 햇살을 잔뜩 받아들이는 커다란 창문.
그리고, 티테이블과 함께 놓인 여러 가지 책들.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는 양과자들.
응접실의 안에서, 아루루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차를 즐기고 있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의 옆에서, 평소에 입는 움직이기 편한 제복이 아닌, 어딘가 잠옷 같아 보이는 옷을 입은 그녀.
평소에는 묶고 있는 금발을 전부 풀어두었고, 평소에 하는 푸른색의 귀걸이도 보이지 않는다.
이 모습만 보고 있자면, 평소에는 검 같은 것은 휘두르지 않고, 다과회를 주최하여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티타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귀족 영애와도 같이 보였다.
게다가 조금 야윈 채로, 시종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은 상태라면 더더욱 이다.
아루루의 직속 시종이 된 루베라는 그런 아루루의 뒤에 선 채로 조용히 메르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보냈다.
"아루루... 몸은 괜찮은거야? 그 의자를 보니, 아직 걸을 수 없는 것 같네..."
"응. 아까 아카데미 신성학과의 수석이 찾아와서 치료를 도와줬어. 다리에 생긴 상처에는 흑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지금은 상처의 회복이 더디다는 것 같아. 그래도, 낫지 않을 상처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곧 괜찮아지겠지."
"... 그런가요."
메르카는 아루루의 말에서 애써 자신의 상처의 심각함을 감추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메르카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아루루는 양손을 모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 다리 같은 건, 검술 훈련 중에 여러 번 다치는 거니까. 그야말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을 시절에는 몇 번이고 삐고, 생채기를 입고... 후후. 그리울 정도야."
"움직이지 못하면 답답하지 않슴까?"
그레이의 질문에 아루루는 '음'하고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며 고민하다가 대답한다.
"그다지? 어딘가에 가고 싶으면 루베라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어리광쟁이가 되어버리셔서 큰일입니다."
루베라가 농담조로 이야기 하면 아루루는, 하하... 하고 웃음을 보이면서 이야기 했다.
"뭐. 이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나도 다리 근육이 좀 빠져서 얇은 미각선을 손에 넣게 될지도 모르겠네. 허벅지가 굵은 거, 조금 걸렸거든."
"무슨 말을. 네 허벅지는 국보급의 물건이야. 그렇게 쉽게 사라져서는 안 돼. 재활치료에는 내가 집중적으로 달려들어서 도와줄 테니까."
메르카의 말에 아루루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핫, 아하핫, 하고 끊어지는 웃음을 흘리는 아루루를 보면서, 그레이는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임다. 저는 완전히, 클레온과 아멜리아 왕녀님이 없어져서 침울해하고 있었을 것 같았슴다."
그레이가 그렇게 말하면 아루루는 웃던 것을 간신히 멈추면서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닦아낸다.
"아 물론. 헤어진 것은 슬퍼. 한동안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우울해지지만...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아루루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그녀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메르카. 이야기했던 것은 가지고 왔지?"
"물론."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 하며,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커다란 지도를 꺼내 들어, 응접실에 놓여있는 책상위에 펼쳐두었다.
그것은, 왕도의 지도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오래전, 왕도에서 지하수로를 정비할 때 지하에 있는 유적들의 위치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당시 공사를 지휘했던 귀족 가문은 후손의 타락 탓에 수사관에 의해 고발되어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 때, 함께 압수되어 메르카의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장 정확하게 유적의 위치를 기록해 둔 지도이다.
그 자리에 모여있는 다섯 사람이 함께 지도를 살펴보면, 마치 미로와도 같이 이리저리 꼬여있는 지하수로와, 점점이 존재하는 지하 유적.
"이, 이렇게나 왕도의 지하에 유적들이 많다니."
"건축된 시기도 제각각이라는 문헌이 있어요. 마치, 필요 때문에 점점 늘려나간 것 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이곳."
메르카가 손가락을 들어, 가장 거대한 유적의 위치를 가리킨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지하수로로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져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지금의 왕도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 유적을 중심으로, 왕도 내의 여러 곳 특히나 영맥의 흐름이 굵은 곳에 유적이 자리 잡고 있어요. 중심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입구가 열리지 않아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모르는 유적이."
"...루베라."
"네."
루베라는 아루루의 명령을 받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현재의 왕도 지도를 꺼내 든다.
그리고 그것을, 메르카가 가지고 온 지도위에 겹치면.
메르카는, 광원 마법을 사용하여 지도를 아래에서 비추도록 빛을 밝힌다.
"... 이건."
그것은, 지하와 지상의 위치가 겹쳐지기에 보이는 것이었다.
가장 거대한 유적 즉, 유적들의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나 지상의 왕성과 이어져 있었다.
그 외에 지상과 연결된 유적의 위치를 살피면.
성자의 가호 교단의 대신전, 모험가 길드의 본부, 뒷골목의 일각, 수도원, 트로메이야 가문의 저택, 세토스 경의 저택의 여섯 장소.
마치, 원을 그리듯이 왕성을 중심으로 배치된 그곳들을 살피면, 아루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 유적의 위치와 지상의 건물들에는 무언과의 연관 관계가 있어. 그리고... 이 지하수로는 마치, 유적과 유적 사이를 이어주는 길목과도 같이 설치되어 있고."
"설마, 지하수로 자체가 유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인가요?"
루베라의 말에 메르카는 지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게다가, 이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왕도를 중심으로 한 거대 성벽. 그 지하의 배수로를 생각하면 마지막으로 이 지하수로를 빙 두르는 원형의 수로가 더해져서"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지도 위를 덮듯이 나타나는 빛의 궤적.
그것이 한 바퀴 돌고 나면,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드디어, 지하수로와 유적이 만들어낸 문양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곳에 마법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박식한 인물은 없었지만, 그 모양을 보면 어렴풋이 지하수로가 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왕도의 지하가, 거대한 마법진이 되어있었다니."
메르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것을 살핀다.
"...그렇다면, 이 왕도 전체를 휘감는 마법진으로 대체 무슨 마법을 하려는 것일까요?"
루베라의 당연한 의문이 이어지지만, 아무도 그 의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알려주도록 하마."
다음 순간, 화르륵! 하고 허공이 불타오르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화염을 휘감은 붉은 머리의 소녀가 나타난다.
땅에 착지하는 순간, 몸을 뒤덮고 있던 화염이 사라지면, 머리에 돋아난 작은 뿔한쪽이 달려 있었지만.
그리고,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에서,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베라와 아루루를 제외한 세 사람이 놀라서 경계하려 하면, 루베라는 세 사람을 말린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당신들과 같은 이 저택의 손님... 진실의 화염, 프로미스 님이십니다."
"프로미스...!? 다섯 용 중 하나라고 하는, 화룡 프로미스인가요!?"
루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가리면, 프로미스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이 살피던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왕도의 지하에 위치한 유적들은, 계승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해서 증축됐다. 그때그때, 이 장소에 살던 인간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유적들을 건설했지."
"... ..."
"그중에는, 내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건축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허나 용들의 기록에 따르면, 야만적인 '인신공양'의 문화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의 것들이라고만 알 수 있었다."
프로미스의 말에, 그레이는 눈을 찌푸린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그거 말임까?"
"그래. 인간의 영혼을 이용한 의식, 마법, 그리고 뭐... 좋지 않은 연금술. 당연하게도 인간의 영혼을 재료로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엄청난 부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법이다. 이 유적들은 하나하나가 그런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프로미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수백, 수천... 수만의 영혼들이 '저 유적'... '도가니'의 안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으며 무한에 가까운 부정적인 마력을 쌓아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담'의 의지에 의해서 말이다."
"아담..."
루베라는, 자신이 흑마의 일족을 해방했던 3일 전.
프로미스로부터 이미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아담의 계획이 진행되어 가는 가운데,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용들이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허나 다섯 원소용이 인간 세계에 개입하기 위해선, 그들의 맹약으로 맺어진 제약을 풀어헤칠 필요가 있었다.
그 제약에는 다섯 용과 각각의 용이 선택한 대리자들.
즉, 10 존재가 모여서, 맹약의 파기를 선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프로미스는, 자신의 대리자로서 루베라를 선택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간 중 하나이기에,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각각 다른 용들도, 자신의 대리자를 선택하겠지.
감응자와는 달리, 대리자는 그 연결고리가 약하지만, 신뢰의 관계로 엮여있는 존재들이다.
몸의 부담을 견뎌낼 정도라면, 용의 힘을 빌리는 것도 가능하였기에, 대리자를 선정하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다섯 대리자를 모아 맹약을 파기하면 되지 않은가.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 연락이 가능한 것은, 나 화룡 프로미스를 포함한 네 용. 풍룡 루티오스. 뇌룡 레티오스. 빙룡 아나티스."
"... 한 분이 비는군요."
루베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프로미스, 그리고 이야기한 것은.
"...마지막 지룡. 가이오스는 수년째 종적을 감춘 채야. 제국과 왕국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몇년 뒤의 일이었지. 용의 반지에 관한 상담이 끝난 뒤."
프로미스의 말에 따르면, 가이오스는 꽤나 제멋대로인 성격에, 다른 용들과는 달리 선에도 악에도 온건한 견해를 밝히는 것 처럼 보이는 용이라고 하였다.
그런 그녀가 사라진 지금, 다섯 용이 모여서 맹약을 파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녀석의 흔적을 쫓아서 가이오스 녀석을 찾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그동안 너희는, 아담과 싸우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가는 거다."
프로미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해내며, 루베라는 3일 전의 일에 대한 회상을 마치고.
현재로 돌아와 프로미스와 눈을 마주친다.
"'아담'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흑마의 일족. 그리고, 그 흑마의 일족과 강한 인연으로 묶인 존재들. 그렇죠? 프로미스님."
"그래. 그 중에서도, 클레온은 더욱 특별한... 말하자면 '특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아담에게 있어서는 '카운터'와 같은 것이지. 지금까지는 전생인자의 폭주로 계속해서 아담의 승리가 이어져 왔지만..."
"클레온은, 스스로의 과거를 이겨내고, 전생 인자의 업에서 벗어났어요."
아루루가 프로미스의 말에 대답하면, 프로미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그 녀석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모든 인연, 모든 운명을 하나로 모을 때가 된 거야.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들 인간들을 포함하여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아담'이 만들어낼 무자비한 신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프로미스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하나의 화염이 허공을 춤추며 그녀의 손 위로 떨어졌다.
"...이것은 불씨다. 무력했던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녀석의 손 위에서 놀아나면서 몇번이고 꺼질 뻔했던, 불씨. 바람이 불고, 비가 몰아치고, 모래를 끼얹어져도, 이윽고 타오르는 불."
그리고, 그 화염을 감싸듯이 세 개의 화염이 나타나 그 주변을 돌고.
화염에서 화염으로 뻗어 나가듯이, 빛과 불꽃이 거미줄처럼 이어지며 허공을 수놓아간다.
"그리고 그 불씨는, 이내 주변에 새로운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은 또 다른 불꽃으로 이어져가며, 이 세계에 널리 퍼져 나갔다. 아직도, 이 불길의 전파는 멈추지 않고 있어. 아담은 눈치채지 못할거다. 아니, 알고 있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거다. 녀석의 눈에는, 여전히 작게 보였고, 무의미해 보일 테니 말이다."
이윽고 프로미스가 손을 휘저으면 퍼져 나갔던 불꽃들이 하나로 모여, 거대한 화염이 된다.
"녀석이 만들어낸, '겉만 번지르르 한 평화' '위선 된 세계' '희생 위에 성립하는 질서'. 종이를 접어 만들어낸 인형극장 같은 세계를 태우려면. 이 불씨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것은 엘레시아에.
그것은 아카데미에.
그것은 왕도에.
그것은 이차원의 틈 너머에.
그리고 어쩌면 보지 못한 머나먼 땅에도.
프로미스는 그 불꽃을 양손으로 소중히 모아, 이내 주먹을 쥐어 천천히 사그라지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 모여있는 인물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선언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화염이. 녀석의 세계를 집어삼킬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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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덜그럭거리며 움직이던 마차의 소리가, 겨우 멈추었다.
주변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거의 기절하듯이 잠들어있던 클레온의 의식도 원래대로 돌아온다.
무언가 프로미스와 루베라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꿈이었나, 라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눈을 뜨면
"... ..."
새근 새근 들려오는 숨소리와, 자신의 몸에 기댄 채 잠들어있는 누군가의 감촉에, 클레온은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그것이 아멜리아라는 것을 안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무래도, 며칠 동안 잠들어있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아... 일어, 나셨군요."
그 때, 클레온은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건너편에 앉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듯, 고개를 고정한 헤르티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클레온은 그녀에게 이야기 한다.
"...도착한 건가?"
"네. 동방국의 수도 '아스테리스'입니다."
그녀의 말에, 클레온은 조심스럽게 아멜리아의 몸을 움직이며 몸을 일으켜, 창 바깥을 내다본다.
그곳에는 지금 까지 자신이 알고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진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동방국."
"그러면, 가실까요?"
헤르티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차에서 내린다.
"...간다니, 어디로?"
"제가 운영하고 있는 상회의 건물입니다. 미염공께서는, 여러분들의 거처를 제공하시라고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클레온은 그녀의 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뒤, 아멜리아를 품에 안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기묘한 향의 향기가, 클레온의 코를 간지럽혔다.
"참, 그리고, 미염공께서, 전언을."
"... ..."
헤르티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잠시 호흡을 하더니 클레온을 향해 똑바로, 그의 마음을 향해 말을 걸듯이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대의 검에서 손을 떼지 말지어다.' ...라고."
"... 아아, 알고 있어."
클레온은 미염공이 남긴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자신의 품에 안긴 아멜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절대로 지지 않을 테니까."
스스로의 약함, 부족함을 극복할 투지를 새기듯이 클레온은 눈을 감는다.
그의 안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