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앙혼
후궁이라곤 얼마 전 단 하나 맞아들인 금상과 달리 십일 년 전 붕어하신 선황제께서는 황후를 포함해 처첩만 열둘로 선황제께서 살아계시던 시절 육궁은 첩들의 웃음소리로 그득했다고 들었다. 또한 정궁이었던 지금의 태후와의 사이에선 황제를 포함한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지만 모두 태후의 태에서 난 친자들이 아닌 의숙 황태비 화씨와의 사이에 둔 황자, 황녀들이라 했다.
그리고 의숙 황태비는 태후에게 바친 두 아들과 네 황녀 외에도 세 딸과 네 아들이 있었다. 사사 당한 폐귀비, 길 귀비의 두 쌍둥이 황자를 제외한 황궁의 모든 황자와 황녀들이 오직 그녀의 소생인 것을 헤아린다면 화 태비는 가히 독보적인 총애를 받던 여인이라 할 수 있었다.
곱게 내리깐 시야에 침의 자락이 들어왔다. 고개를 들라는 명이 없기에 은환은 여전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황제에게 시집와 육궁 중 하나인 소창궁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된 그녀였다. 궁을 다스릴 수 있는 건 ‘빈’부터였지만 황제는 정궁조차 두지 않은 사내였다.
당연히 은환이 다스릴 후궁이 없었다. 후궁이라곤 은환 하나뿐인데 어찌할까. 게다가 아내라면 또한 아내인데 며느리 된 도리로 시모 되시는 태후와 태비께 문안을 드려야 하거늘 황제에게 골이 난 태후가 은환의 문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번번이 아침마다 태후가 문안을 거절하니 태후의 아랫사람인 태비 또한 거절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이것이 아침마다 은환이 골을 앓는 이유였다. 한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태후가 거절한 문안을 태비가 받겠다고 한 참이었다.
안 받던 것을 받겠다고 하는 데 이유가 특별히 없던 치라 은환은 어젯밤부터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서릿발 같으신 태후께서 태비께 기별을 넣은 것일까. 아니면, 아니면 태비의 마음에 무슨 바람이라도 분 것일까. 시선을 들 수 없으니 안색을 살필 수 없었다.
‘황제의 생모···‥.’
수방의 궁녀로 입궁한 지 칠 년. 황족이라면 그저 그림자만 눈으로 밟던 은환이었다. 한데 태비는 그 그림자조차 본 일이 없었다. 선제께서 붕어하신 이후 자녕궁에 칩거한 탓이었다. 선제가 붕어한 이후 안색이 날로 밝아지는 태후와 달리 태비는 하루가 다르게 뼈가 삭으신다는 말이 떠돌았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선제 폐하께서 화를 입으신 자객 사건 당시 곁에 있으셨던 탓일까. 선제의 붕어 이후 정신을 놓으셨단 말도 빈번히 나돌았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다.
금상은 생모인 자녕궁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감추려 했고 나아가 종종 있던 일도 없던 일로 만들었다. 황상의 뜻이 그러하시니 궁 안의 사람들 또한 자녕궁의 일이라면 모두 입을 삼갔다. 그러니 실제 태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부화용의 미인. 하남 출신의 완사녀浣沙女. 한미한 선비라고도 할 수 없는 나무꾼의 딸로 태어나 황제의 총희가 된 절세미녀···‥. 화 태비를 수식하는 말은 많았고, 많은 만큼 궂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덕혜제는 살아생전 태비만을 끼고 살았다 하지 않았나.
태비는 그 시절에는 화 귀비로 불리던 여인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육궁을 그득히 채운 사내가 한 여인만을···‥.
“본궁이 너를 부른 적이 있던가?”
“예?”
은환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엉켰을 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는 태비가 아니라 은환과 비슷한 연치의 여인이 앉아 있는 줄 알았으니까. 자세히 보면 나이를 먹은 티가 났다. 세월이란 게 덧없이 무상하여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살아있는 한 죽음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데도 태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이를 열셋이나 낳고도 그랬다. 홀쭉하게 기다란 몸. 은환보다 큰 키에 은환보다 창백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어깨에 올린 여인은 예상한 대로 침의 차림이었다. 반투명한 삼에 비단으로 된 오를 한 겹 두른 여인이 의아한 얼굴로 은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의 없이 순수하게 의아한 얼굴. 곱고 말갛다.
‘정신을 놓으신 지 오래지. 선황제께서 그리 붕어하신 이후로는···‥ 친자식도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그 정도 되면 궁을 나가 요양해야 하는 것 아니냐. 말끝을 흐렸지만 결국은 그 말이 요지였다. 저리 정신이 온전치 않은 분이 궁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은환은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동기 중 누군가 그리 뇌까리던 것이 지금 덧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마마. 어제저녁 마마께서 문안을 윤허하신 가 귀인 조씨입니다.”
“가 귀인이라고? 폐하께서 새로 맞아들인 후궁이 있던가?”
“마마. 가 귀인은···‥”
“본궁은 들은 적이 없는데. 폐하께선, 폐하께선 본궁의 배가 꺼질 시간도 주지 않고 회임을 시키면서···‥ 본궁의 뱃가죽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아이를 배게 하지 않았나! 한데 또 후궁을···‥!”
“마마. 가 귀인은 금상폐하께서 맞아들인···‥.”
“가 귀인이라 하였느냐?”
“예, 예. 마마. 그러, 그러하옵니다.”
은환이 덜덜 떨었다. 말갛기만 하던 여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배에 손을 올린 뒤 마치 임부처럼 느른히 등을 기대었다. 분을 칠하지 않고도 이런 표독스러운 얼굴이 나올 수 있구나. 선득하게 노려보는 시선이 스산했다. 은환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마른침을 삼켰다. 문득 찻잔이 날아왔다.
“악!”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은환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두려운 마음에 교의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정신 줄을 놓았다는 말이 몇 번이고 귀를 들쑤셨다. 울먹거리며 부들부들 떠는 은환에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궁은 너와 같은 계집을 무수히 보았다. 감히 황상의 밤을···‥.”
“마마. 아뢰기 송구하오나 가 귀인은 금상폐하의 후궁이옵니다.”
여관의 말에 태비가 눈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안다. 누가 그걸···‥.”
“태비 마마! 제발! 선제께오선! 태비 마마의 부군께선 붕어하시고 없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젠 제발···‥.”
여관이 울먹거리며 읍소했다. 눈살을 찡그리며 은환을 노려보던 태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이었다. 하여 정말로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여관을 응시하던 태비가 시선을 돌렸다.
“내 남편이 세상에 없다고?”
“마마.”
“하지만 저리 살아계신걸···‥.”
넋이 나간 목소리였다. 그러나 약간의 환희, 약간의 설렘. 핏기없이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임부처럼 교의에 기대어 있던 여인이 침의 차림으로 달려나갔다. 여관이 낯을 일그러트렸다. 은환이 고개를 들여 태비가 달려나간 쪽을 돌아보았다.
“마마···‥.”
여관이 흐느끼듯 읊조렸다. 은환은 아들의 목을 남편처럼 끌어안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
“폐하, 폐하···‥.”
교태가 묻어나는 매혹적인 목소리가 황제의 넓은 어깨에 뭉그러졌다. 두어 번은 토닥인 뒤 슬슬 떼어내리라 생각했던 황제는 커다란 손을 들어 어머니의 어깨를 집어 뜯듯 떼어낸 뒤 어깨를 붙잡았다. 태비는 정신없는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수줍음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파들파들 떨렸다.
“진정 소자가 지아비로 보이십니까?”
“폐하···‥.”
“아직도 눈앞의 사내가 죽은 부군으로 보인다. 이 말씀이십니까? 하여 며느리를 찬 바닥에 무릎 꿇려 놓은 것이고요?”
“신첩은···‥.”
“어머니!”
노성이 자녕궁의 천장에 닿았다. 표정이라 할 것이 없는 황제였다. 지나치게 평온하여 밋밋했던 얼굴. 태후의 앞에서 노성 한 번 지르지 않고 그녀의 속을 돋우던 사내. 한데···‥. 황제가 이렇게 노성을 지를 수 있는 줄 몰랐다.
구겨진 얼굴이 엉망이었다. 생모의 어깨를 붙잡고 무섭게 내려 보던 황제가 모욕감에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입술 끝을 비틀었다. 태비가 손을 올려 황제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알아. 내 아드님···‥.”
황제가 어깨를 놓았다. 그는 바람 불면 스러 없어질 것처럼 야윈 어머니를 두고 은환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는 태후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은환을 달랑 들어 품에 안았다. 정신을 차린 여관이 넋이 나간 태비를 모셔와 볼을 닦아주었다. 태비는 아이처럼 여관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 습관처럼 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은환은 놀라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는 은환을 안아 궁을 나온 뒤 그녀를 다시 내려놓았다. 둘은 자녕궁의 연못 앞에서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 있었다.
“내 이리 무모한 짓은 하지 말라 하지 않았나?”
“하, 하오나···‥.”
“어떠냐? 네 시모가.”
“시, 신첩은 그저···‥.”
“넋이 나간 여인이다.”
“···‥.”
“부황께서 돌아가신 후로 쭉 이랬지.”
은환이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를 앞에 두고 역정을 누르던 남자가 입술 끝을 비튼 뒤 낮게 뇌까렸다.
“물론 살아 계실 때도 정신이 없었지만.”
“어찌 그런 말씀을···‥.”
“제정신이 아니니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 거지.”
“하오나 태비께선 폐하의 생모이신데 그리 사나운 말씀을 하시면···‥.”
“생모이면 무얼? 날 키운 건 곤전의 유온이었지. 태비가 아니거든.”
황제가 서늘한 눈으로 은환을 응시했다. 은환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문득 황제가 손을 들어 은환의 부은 이마를 쓰다듬더니 이내 낯을 구겼다. 은환이 욱신거림을 참지 못하고 뒷걸음질하자 황제의 손이 다시 그녀를 당겼다.
“다시는 태비를 찾지 말라. 불러도 오지 마라.”
“하오나 태비 마마께선 황실의 어른이십니다.”
“보지 않았느냐. 정신을 놓았대도.”
그래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다. 아들이 호통치자 금방 정신을 차렸고 맑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문득 자녕궁에서 그녀를 돌보던 여관이 나와 고개를 숙였다.
“태비 마마께서 가 귀인의 문안을 받고자 하십니다. 폐하께서도···‥.”
“며느리를 그리 찬 바닥에 무릎 꿇리시고 이젠 차를 내리시겠다?”
“폐하. 태비 마마를 이해해주십시오. 폐하께서 이해해주지 않으시면 세상에 믿고 의지할 분이 없으십니다.”
여관이 애끓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서느런 낯이었다. 은환이 그의 소매를 당겼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다시 계단을 올랐다.
자녕궁에 다시 들었을 때 태비는 어린 황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고작해야 일곱 혹은 여덟. 뼈마디가 잗다란 사내아이였다. 길고 연한 눈썹에 반듯한 코. 슴벅슴벅 감았다 뜨는 검은 눈. 그리고 도톰한 입술. 젖을 덜 뗀 아이처럼 어미의 품에 매달린 황자는 엄지를 입에 문 채 태비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완친왕. 폐하께 인사드려야지.”
태비가 황자의 여윈 어깨를 토닥거리며 아이를 채근했다. 젖을 문 것처럼 태비의 품에 매달려 엄지손가락을 쭉쭉 빨던 황자가 황제를 힐긋 보더니 일어나 예를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어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태비는 제게 답삭 안기는 황자가 어린 아기라도 되는 양 다시 품었다. 자리에 앉은 황제가 낯을 구기더니 엄한 목소리로 황자를 불렀다.
“윤민.”
“그냥 두세요. 황상.”
“태비께서 저리 싸고도시니 왕부를 열어야 할 나이에도 갓난아기처럼 구는 것입니다. 윤민을 저능아로 키울 셈이십니까?”
잘려 나오는 마디마디에 가시가 돋쳤다. 은환은 태비가 왈칵 눈물을 터트릴까 두려워 황제를 힐긋거렸다. 그러나 태비는 고요히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은환은 말간 얼굴로 어미에게 안긴 왕야를 응시했다. 일곱인가? 아니. 여덟인가. 많이 쳐 보아야 그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였다. 하나 황실의 사내아이라면 대개 또래보다 조숙하지 않나. 감안할 것을 모두 감안하고 나면 태비의 품에 안긴 황자가 이상하긴 했다. 물론 태비 또한 이상하긴 했지만.
문득 태비의 가슴에 매달린 왕야가 고개를 돌려 은환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황제의 아들인 줄 알았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큼 작은 아이였다. 황제 또한 그랬다. 일찍이라 할 것 없이 정궁을 맞을 나이에 대혼례를 올렸거나 은환 외의 승은을 내려 후궁을 두었더라면 충분히 자식을 두고도 남을 나이였다.
황제가 좀 더 제대로 된 사내라면 지금쯤 자식을 줄줄이 슬하에 두고 있었겠지. 당장 붕어하신 선제 폐하만 하더라도 이미 스물에 장녀를 얻었다. 그러나 그 또한 궁성에선 늦은 나이였다.
“완친왕은 내년 여름 왕부를 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리 어여뻐 해주어도 됩니다. 아직 어리광을 부릴 나이예요.”
태비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제를 응시했다. 완고한 눈이었다. 듣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를 아는지 황제 또한 더 입을 열지 않고 황자를 응시했다. 문득 태비의 품에 안겨 꿀에 절인 열매를 먹고 있던 아이가 입술을 열었다.
“어머니. 형님이 저를 무섭게 바라봐요.”
은환은 시선을 들어 황제를 보았다. 완친왕의 말대로 황제는 낯을 구긴 채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제였구나.’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통 사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닮긴 했으나 그에게 저리 어린 동생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황제의 가장 어린 아우가 대충 저만한 나이일 것 같긴 했다. 선황과 태비 사이에 자식이 열셋이라 했으니 말이다.
“폐하께서 많이 곤하신가 보다. 윤민은 이제 그만 태사를 뵈러 가보렴.”
태비가 막내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어미의 손에 마지못해 일어난 아이가 입술을 삐죽거리다 말고 은환을 휙 돌아보았다. 은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문득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예쁜 누나. 또 봐.”
황궁의 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사였다. 그러나 완친왕은 히죽거리며 인사를 한 뒤 신도 제대로 신지 않고 냅다 자녕궁을 뛰쳐나갔다. 왕야가 아니라 궁성 밖 골목을 뛰노는 어린아이 같았다. 은환은 당황한 얼굴을 재빨리 감춘 뒤 태비를 응시했다. 무어라 꾸짖을 줄 알았던 태비는 그저 환한 얼굴로 막내아들이 지나간 자리를 더듬을 뿐이었다.
“윤민이 어리광이 좀 많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완친왕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보통 황족 사내아이들이라면 저만한 나이에 어엿한 정궁과 함께 왕부를 열기 위해 궁을 나가는 게 보통이니. 한데 완친왕은 여전히 어미의 품에 매달려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다. 황제가 근심 어린 얼굴을 할만했다.
“해도 아직 열 살밖에 안 됐단다.”
“예···‥.”
태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옥가락지를 낀 하얀 손이 둥근 다기를 들었다. 좀 전과 달리 머리를 한 아름 틀어 올린 채 홍옥 장식의 비녀와 귀걸이를 한 태비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황제의 아름다운 외피를 고스란히 간직한 여자였다.
이런 여자의 아들로 태어난다면 아름다울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다기를 들어 벽라춘의 감미로운 향을 들이키던 여자가 시선을 들었다. 여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은환이 볼을 붉혔다. 태비가 엷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그 나이대의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적어도 어미로는 보였다. 다시 말하자면 마주 앉은 황제의 후궁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말이었다. 문득 태후가 떠올랐다.
검붉은 색에 봉황 혹은 용의 자수가 들어간 오를 두르던 태후와 달리 태비는 석류와 자귀 꽃을 금박으로 자수 놓은 자황색 비단 오에 우산군을 두르고 있었다. 직위가 태비밖에 되지 않더라도 지금의 착장은 황제의 젊은 후궁이나 할법한 착의였다. 특히 석류와 자귀 꽃의 문양은 더욱 그랬다.
물론 어색함 없이 잘 어울리긴 했다. 마치 남편이 살아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처럼. 그리하여 황제와 신혼을 즐기고 있는 후궁답게 가슴의 골이 드러나도록 단로장을 한 은환보다 더욱 새침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태비는 황실의 어른이었다. 황제를 위해 반 치나 젖가슴을 드러낸 은환의 신분과는 달랐다. 은환은 시선을 내려 포도 당초문을 새긴 제 진줏빛 오와 아름다운 월화군을 바라보았다.
“환아.”
“···‥예. 마마.”
“그리 부르면 되는 거니?”
불현듯 태비가 둥근 다기를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은환은 다기를 드느라 흘러내린 소매 밑으로 보이는 투명한 피부를 바라보았다. 말갛고 환한 얼굴에 우미한 이목구비. 새침하게 올라간 눈꼬리에 발그스름한 기운. 붉은 산수유 빛 매혹적인 입술. 과연 완사녀도 울고 갈법한 황홀한 미녀였다.
“봉작을 부르십시오. 환아는 가 귀인입니다.”
태비가 흘깃 맏아들을 응시했다. 자황색의 비단 오에 금박으로 자수 놓인 석류와 자귀 꽃이 둥근 창을 통해 들어오는 볕에 도드라졌다. 엷은 침묵이 깔렸다.
“내 며느님인걸요. 황상. 궁에 살면 누구나 이름을 잃게 되지요. 설란이 설란이 아니게 되고 화 귀비가 된 것처럼. 그러니 은환도 이름을 불러줄 이가 필요합니다.”
태비가 완강한 얼굴로 대답했다.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마저 어딘가 황제를 닮아 있었다. 마음먹은 것이라면 저 내킬 때까지 고수한다는 점까지 어미에게서 물려받은 것일까. 계집의 살갗이 싫어 스물일곱이 될 때까지 정궁을 들이지 않았다는 황제를 생각했다.
“은환은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짐이 매일 불러줄 테니까요. 게다가 태비께서도 이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봉작을 받은 이후로도 부황께서 밤마다 그리 설란이라고 불러주셨는데 어찌 며느리에게 거짓을 늘어놓는 것입니까?”
황제가 빠르게 속삭였다. 죽은 아버지를 입에 올리는 황제는 거침없었다. 태비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눈두덩이 파르르 떨리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황상.”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가 귀인 또한 무릎이 시릴 것이니 데리고 가겠습니다.”
“황상.”
“소자가 돌아올 때까지 넋을 잃고 계시면 안 됩니다.”
“···‥.”
“저녁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일어나란 말도 들리지 않는데 황제가 일어났다. 멀뚱멀뚱 모자를 보던 은환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황제는 일어나지 않는 은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태비는 단단히 굳은 얼굴이었다.
이만 물러나겠다 고하고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은환의 손목을 훽 하고 잡아당겼다. 얼결에 그에게 안기게 된 은환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태비를 닮아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우미했다. 낯을 굳힌 모습마저 생모를 닮은 사내였다. 한데도 이리 어긋나다니. 거의 태비가 말을 붙일 때마다 골을 내며 어깃장 놓는 수준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래도 저녁에 다시 들린다 하였지.’
“무얼 그리 보느냐?”
함께 연에 오를 때였다. 황제가 심드렁한 말투로 은환에게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왜? 짐이 태비에게 너무한 것 같으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귀인은 항상 말을 하다 마는구나. 짐은 그런 여인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둬라.”
은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이 덜컹거렸다.
“그러니 어서 고해. 무얼 생각하였는데? 이 작은 머리통에 무얼 주워 담고 있었던 게야?”
차가운 낯으로 그런 여인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퉁을 주던 황제가 입술을 꾹 깨무는 은환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환이 여전히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치를 보자 그녀의 볼에 입술을 맞춘 황제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저, 그저 폐하께서 태비 마마를 많이 닮으신 것 같아서요.”
“친아들이니 닮을 수밖에 없지.”
“예.”
“특히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께서도 그러셨지. 내가 당신보다 당신의 아내를 더욱 닮았노라고.”
“···‥.”
“한데 어머니께선 아버지만 빼닮았다고 하더군.”
은환은 놀란 눈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가 태비를 ‘어머니’ 선황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보다 그녀의 앞에서 자신을 ‘나’라고 거듭 칭한 것이 놀라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젠 태후께서도 나더러 아버지만 닮았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얼굴은 잘 안 보인다고 하던데 환아 네가 보기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남아있는가 보군.”
황제가 엷게 웃었다. 은환은 눈만 슴벅거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움켜잡았다.
“어머니께 자주 가지 마라.”
“그건···‥.”
“대답해. 휘락궁에도 걸음 하지 말고.”
“하오나···‥.”
은환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후궁이라면 황제의 명이 우선시 되어야 했다. 후궁이 아니라 궁의 어느 이라도 그랬다. 황제는 궁에서, 아니 나라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다. 게다가 은환은 그의 신하이기도 했다. 정궁이 아닌 이상에야 모두 그러한 처지였다.
후궁은 품계를 받은 가신이다. 그러니 어줍게 며느리 된 도리를 다한다느니, 아내로서 책임을 다하고 싶다느니. 그런 당치 않은 사명감으로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정궁도 아닌데. 그런 일은 황후나 하는 일인데···‥.
게다가 은환은 평생 후궁으로 살 마음이 없는 여자였다. 그는 태후께서 미리 언질을 준 바이기도 했다. 계속 이리 지내지 않을 거라고. 궁을 나가 살게 해주겠노라, 그리 언약하였다. 신뢰할 것이라곤 태후의 입에서 나온 그 ‘언약’. ‘본후가 약조하마.’ 하고 나직이 읊조리던 것밖에 없었다. 그리 등 떠밀린 채 황제의 하룻밤 계집이 되었거늘. 이제는 후궁인 신세다.
이젠 태후가 ‘약조하마.’ 하고 속삭이던 것을 잊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후가 본래 약속한 바도 후궁이 아닌 궁녀의 신분인 상태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은환에게 배신감과 함께 모욕감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하룻밤 계집에서 끝나지 않은 것은 결코 은환의 뜻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녀의 작은 의지조차 존재하지 않은 일이다.
“무얼 생각하고 있어?”
대연이 화심전에 당도할 무렵이었다. 넋을 놓은 은환에게 황제의 시선이 닿았다. 감히 황제가 친히 대연에 태워 어여삐 아껴주고 있는데 정신을 다른 데 쏟느냐는 눈이었다. 화들짝 놀란 은환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 연에서 내렸다.
“환아야.”
“예?”
화심전으로 돌아온 황제가 은환을 불렀다. 은환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황제의 옥음이 들리길 기다렸다. 문득 기다란 손이 은환의 턱을 들어 올렸다. 황제가 궁인을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반을 든 궁녀 하나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나가봐라.”
궁녀를 시켜 다친 이마를 살피게 할 것이란 생각과 달리 황제는 직접 비단 영견을 들어 조심조심 은환의 이마를 살폈다. 오른쪽 눈썹 위 다기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빨갛게 부풀고 있었다.
“쯧.”
황제가 혀를 차며 낯을 일그러트렸다. 아끼는 물건에 흠이 간 양 사나운 표정이었다. 은환은 차마 시선을 얽을 수 없어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황제가 거칠게 그녀의 턱을 잡아 든 뒤 굳은 낯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새기거라. 짐은 짐이 소유한 것에 흠이 나는 걸 싫어한다.”
“···‥예.”
“계집 또한 마찬가지다.”
“예. 폐하.”
잔뜩 쪼그라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제는 그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빛을 굳혔다. 은환은 숨 한 오라기 쉴 수 없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문득 눈두덩에 열이 몰려들었다. 눈을 깜빡여 열기를 몰아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차오르는 시야가 끔찍하게도 탁했다.
주르륵-
볼을 타고 내리는 물기가 입술 사이 고였다. 문득 턱이 그대로 당겨졌다. 말캉한 촉감의 살덩어리가 입술 사이 고인 물기를 훔쳤다. 은환은 눈을 감은 채 남자의 입맞춤을 받았다. 옅은 회향이 비강에 스며들었다. 말랑한 살갗이 입술을 뭉개고, 문지르고. 간질간질한 열기가 비벼지다가 마침내 안으로 밀려들었다. 두꺼운 혀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하으응···‥.”
연구개를 훑은 혀가 치열을 쓸었다. 젖꼭지가 뾰족 솟을 정도로 간질거리는 감각이 그녀를 채웠다. 턱을 잡았던 손이 허리를 감아 당겼다. 은환은 감은 눈을 살며시 떴다. 조심스레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더는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부드럽게 밀어내는 대신 옷깃을 움켜쥐자 질척하게 혀를 섞던 사내가 눈을 떴다. 입술이 떨어진 사이 타액이 길게 묻어났다. 은환은 가쁘게 호흡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흐른 눈가는 여전히 축축했다.
“목을 감아.”
두 눈을 슴벅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황제는 지엄하게 명했다. 은환은 그를 바라보다 말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태후를 생각했다. 정확히는 태후가 말했던 바를.
‘황제는 여인을 모르는 사내란다. 그는 살갗에 여인이 아니라 사람의 살갗도 닿는 것을 싫어해.’
한데 은환은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은환의 음부라면 역겨워하지 않고 파고들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니 황제에게 여인을 알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고 나면···‥. 그러니까 황제가 여인을 알게 되고 나면 황제에겐 황후가 생길 것이다. 마땅히 정궁을 맞아들인 다음에는 후사를 번성시킬 육궁을 채우게 될 것이고.
수많은 처첩이 전각을 채워 그의 곁을 맴돌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은환은 마땅히 그리하길 바랐다. 은환을 안고 난 뒤에 여인을 알게 되면 그의 부황이 그러했고 선대의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꽃 같은 비빈들을 안고 셀 수 없이 많은 황자와 황녀들의 아버지가 되길 바랐다.
“으응···‥.”
다시 입술을 겹쳤다. 비음이 새어 나왔다. 비어져 나오는 호흡에서 회향이 났다. 음부가 욱신거렸다. 그가 거칠게 가슴을 움켜잡았다. 젖무덤이 비칠 만큼 깊이 파인 가슴이었다. 젊고 아리따운 후궁이라면 언제든 황제를 유혹한 뒤 허리에 다리를 감을 수 있도록.
가슴을 묶은 끈을 푼 황제가 봉긋한 가슴을 움켜잡았다. 은환이 어깨를 뒤틀며 그의 등을 긁었다. 도리질을 하며 그를 밀어내려 하자 혀가 더욱 깊이 맞물렸다. 그녀를 당겨 안은 황제가 가슴을 주무르며 둔부를 움켜잡았다.
어쩌다 이렇게 얽혀들었는지 음부에 기립한 양물이 닿았다. 은환은 눈길을 떨어트려 석류군을 걷어붙이는 손을 응시했다. 황제는 여인을 혐오했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소년일 때부터 그러했다. 즉위한 이후 태후가 보낸 시침녀들 또한 번번이 역겨워하며 쫓아내기 일쑤라 하였다. 한데 은환이 겪은 황제는 달랐다. 처음의 정사 이후 일주일을 제외하면 황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투실투실한 볼기를 주물럭거리며 발기한 성기를 회음부에 비볐다. 후궁 된 처지로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대개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궁 안의 여인들이 그런 것처럼 은환에게도 비빌만한 친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대개 그런 후궁들은 다른 후궁들보다 입지가 낮았다. 황후와 비슷하게 정식으로 간택 받아 입궁한 귀족 여식들과 달리 품계 또한 낮았다.
은환과 화 태비가 조금 이례적인 일이긴 했지만 평생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열셋이나 되는 자식을 낳은 태비조차 태후의 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아마 귀족의 여식이었다면, 그리하여 정식으로 황제에게 시집왔다면 황제의 생모로서 성모 황태후로서의 지위를 누렸을 텐데.
“···‥무얼 생각해.”
초점을 잃은 눈동자 속에서 번민을 읽었을까. 황제가 다시 물었다. 은환은 제가 왜 이리 황제의 노여움을 자주 사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방사를 벌이려 하는 황제는 은환에게 자주 화도 냈다.
할 수 있을 만큼 비위를 맞추고 예를 차리는데도 그는 종종 낯을 굳혔다.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생 이리 산다면 애가 달아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은환.”
“아무, 아무것도···‥.”
고하라 하여도 무얼 고해야 할지 몰랐다. 황제가 여인을 안지 못한다고 했던 태후의 말이 믿기지 않는 것? 황제는 그 언질과는 도통 무관하게 굴었다. 여인을 혐오하여 살갗에 닿는 것조차 기피한다는 태후의 말은 거짓인 것 같았다. 궁 안의 풍문 또한 믿을 수 없었다. 사내라면 황제를 제외하고 겪은 바도 없는 은환이지만 황제처럼 정욕적인 남자를 알지 못했다. 여인과의 정사에서 알지 못하는 바가 없는 듯했다.
물론 시침녀와 동침하지 않아도 방사에 대한 교육은 이미 받았을 테니 알 만큼 알 것이라 생각하긴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여인을 혐오하는 사내 같지도 않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환아야.”
시선을 둥글리던 은환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눈 밑이 파드득 경련했다.
“왜 그리 자주 놀라.”
“···‥.”
“왜 그리 나를 두려워하느냐. 어찌 지아비를 이리 두려워해.”
황제가 작게 속삭였다. 허공에 닿은 발밑이 우지끈- 하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
***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난향을 품고 있었다. 윤협은 아내의 기다란 머리칼을 집어 입술과 코끝에 문질렀다. 그런 다음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마디마디 희고 동그란 여자였다. 윤곽은 엷었고 문지르면 사라질 것처럼 희붐했다.
그러나 올라간 눈꼬리만큼은 짙고 새침하다. 나붓한 속눈썹 아래 검고 축축한 눈동자. 눈가에서 물기가 마른 적이 없는 어머니···‥. 그리하여 아내는 그의 저속한 음욕을 돋우면서도 어딘가 불쾌하게 만들었다.
“은환.”
윤협은 아내를 작게 속삭였다. 이름을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잠이 들면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다 누가 업어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망념인데 우습게도 윤협은 누군가 그가 모르는 사이 그녀를 훔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봉작과 함께 궁을 내리고도 화심전에만 묶어두었다. 처음에는 마땅치 않게 여기던 그의 태감 또한 이젠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은환.”
깨어나지 않는 여자를 한 번 더 읊조리며 여자를 안았다. 기다란 팔로 옭아매듯 어깨를 안아 깊이 당기니 여자가 작게 칭얼거렸다. 아기 같은 여자였다. 아이는 싫어하는데 이 여자의 아랫배에 아기가 들어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사는 이어야 하니···‥.’
“어디서 이런 걸 주웠을까. 응? 어디서 이런 예쁜 걸 주워 내 방에 갖다 두었을까.”
언젠가였나. 휘락궁으로 걸음 했을 때였다. 태후는 후사를 족히 일곱은 보고도 남을 나이에 정궁도 들이지 않고 후궁 하나 없느냐 노여워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면서도 광증과도 같은 혐오증을 곱씹었다.
계집이 싫었다. 비단 계집뿐만 아니라 사내건 아이건 살에 스치는 남의 살이 싫었다. 산 사람의 온기를 느낄 바에 차라리 죽은 시신을 만지는 게 나았다. 한데 은환은 달랐다. 그는 아직도 은환과 제 침실을 찾아들었던 발칙한 계집들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다 같은 계집이었다. 우묵한 음부도 말캉한 젖가슴도. 한데 어느 계집은 역겹고 어느 계집은 달았다.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은환은 한낱 ‘계집’이 아니라 그저 ‘은환’이어서.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은환은 향기롭고 또 달콤했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꼬리와 부드러운 입술을 갖고 있었다. 문대고 뭉개면 간질간질해지며 열기가 하초로 몰렸다. 다른 시침녀들이 손을 댈 때면 역겨워 구역질이 났는데.
‘이번에는 마음에 드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내치지만 말고 자세히 들여다봐요. 황상의 밤을 즐거이 해줄 만큼 참하고 어여쁜 아이예요.’
태후는 꽤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윤협은 대꾸하지 않고 작게 웃었다. 그저 다정하기만 한 시선이었거늘 손톱 끝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신경을 갉작거렸다. 그리고 자정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은환은 보자기에 돌돌 말려 있었다. 두터운 금금 사이 하얀 얼굴이 배꽃 같았다.
모친을 능멸하듯 눈웃음 한 번으로 그를 능멸한 태후에게 보복 삼아 계집을 조롱하리라 생각했다. 음부를 벌리고 제 손으로 밑을 쑤시게 하면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이 가시려나. 침전으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머리 꼭대기까지 노기가 득실거렸다. 감히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기에. 고작 황후궁 전각에서 자랐다고 친자라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그는 태후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어떤 여자인지도 알았다. 윤협이 태후를 어미로 여기지 않는 까닭은 그녀의 배를 빌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최소한 태후가 윤협을 친자로 생각했다면 입만 ‘모후’라 지껄이진 않았겠지.
그러나···‥.
“은환.”
감은 눈꺼풀이 배추흰나비의 하얀 날개 같았다. 악몽을 꾸는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 겹의 침의만 걸친 윤협이 쏟아지듯 은환의 가느다란 몸을 덮었다. 희고 여윈 몸을 안은 두꺼운 가슴팍이 옅게 떨렸다.
은환을 무어라 생각해야 할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은환은 존재 자체로 제게 모욕이었다. 이 침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태후로 인해 진상된 그 순간부터. 그녀는 태후가 내민 모욕이었다.
병증과도 같은 광기. 이길 수 없는 무력함. 남의 살갗을 더듬을 바엔 시신을 만지는 게 나으리라 생각될 정도의 오심. 계집이 싫은 그였기에 화심전에는 궁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정말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그 또한 그의 광증을 잘 알고 있었다. 하니 태후가 매번 불러들여 그의 침상에 앉히는 여자들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나아지지 않는 광증에 대한 조소일 뿐이다. 윤협은 은환을 부드럽게 안으며 봉긋한 입술에 제 입술을 비볐다. 역하여 손끝이 닿는 것조차 끔찍한 게 계집인데 은환은 다르다. 은환의 가슴은 황홀했고 은환의 음부는 아찔했다. 옅은 음모 아래 움푹 팬 음부, 환히 드러난 구멍, 질척이는 소리···‥. 응당 모욕이니 전과 같이 머리채를 잡아끌어야 하거늘. 은환을 보면 그저 입술을 맞춘 뒤 농익은 소리를 듣고 싶었다.
‘미친 게지.’
봉긋한 입술에 제 살갗을 문대던 윤협이 어둑한 눈으로 은환을 들여다보았다. 새침한 눈꼬리, 부드럽게 활강하는 코, 희고 연약한 턱선과 나붓한 목덜미. 여름 볕에 맺힌 꽃봉오리 같은 계집이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모든 것이 젖빛으로 매끄러웠다. 그는 손을 들어 야문 눈꼬리를 더듬었다. 이 눈을 치뜰 때면 오심이 일 정도로 야릇했다. 묵직하게 늘어진 하초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눈꼬리를 더듬던 손으로 자그마한 귓불을 만졌다. 슬슬 일어나기 시작하는 양물에 은환의 무릎이 닿았다. 귓불에서 손을 떼고 둥그런 가슴을 움켜잡았다. 어지간한 사내보다 두 뼘이나 큰 손이었다. 한데도 은환의 가슴은 그의 손아귀에 부족함 없이 알맞았다.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계집처럼. 나기를 그리 나서 시의적절한 때 그의 침상에 진상된 것 같았다. 가슴을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일어나지 않는 은환을 진득하게 쳐다본 윤협이 그녀의 젖꼭지를 물었다.
“응···‥.”
은환이 어깨를 비틀며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다. 윤협은 개의치 않고 콩알처럼 동그랗고 통통한 젖꼭지를 쭉쭉 빨았다. 빈 젖이었다. 애를 밴다면 무엇이라도 나왔겠지. 아쉬운 마음에 젖을 빨다가 몽둥이 같은 물건을 구멍에 조준했다. 은환이 칭얼대며 그를 걷어내려 했다.
“쉬이-”
구멍 주변을 더듬던 양물로 은환을 꿰뚫었다. 그리고 허리를 움직이지 않고 다시 잠이 들길 기다렸다. 눈가를 좁히던 여자가 이내 다시 곤히 잠들었다. 그는 느리게 허리 짓 하기 시작했다. 구멍 안으로 미끄러지는 선단이 질 내부의 감촉을 즐겼다.
“은환.”
투실투실한 허벅지를 더듬으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처럼 순한 여자였다. 잠이 든 얼굴도 그리 순했다. 반반한 낯짝이었다. 궁 밖에서든 궁 안에서든 구애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계집이 이런 요사스러운 얼굴로 태어났는데 양물이라고 달린 놈들이 달라붙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정도 꽤 앙칼스러울 법한데···‥.”
이리 순하지. 그는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흐응···‥.”
물건을 크게 찔러 넣었을 때였다. 아이처럼 팔을 벌린 채 자고 있던 은환이 낯을 일그러트리며 비음 섞인 교성을 흘렸다. 윤협은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환이 회음부에 부딪히며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여자가 가슴을 뒤틀며 할딱였다. 그는 자세를 고쳐 여자를 옆으로 돌린 뒤 뒤에서 끌어안았다. 다시 양물을 집어넣고 볼에 입을 맞춘 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귓바퀴를 혀로 쓸며 성기가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연신 쑤셔 박으면서도 입 안이 말랐다. 손을 들어 구멍을 더듬을 때였다. 문득 죽은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 또한 어머니를 이렇게 안았다. 이런 자세로 가늘게 우는 어머니를 오래도록 안았다. 가슴밖에 없는 여윈 몸이었다. 회임으로 인해 박처럼 커다란 어머니의 배가 눈앞에 그려졌다. 부황은 부서질 정도로 우는 어머니를 안은 채 물건을 흔들었다.
이미 구멍 속으로 흘려 넣은 정이 자궁 속에 자리 잡아 자라나고 있는데도 허리는 멈추지 않았다. 괴이한 광경이었다. 어린 날의 그가 보기에는 넘치도록 기괴했다.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나신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역하여 속이 느꺼웠다. 뒤집힌 속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게워냈다. 아버지는 그제야 그가 간신히 궤짝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구역질을 하며 반쯤 기어 도망가려던 그였다.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얽힌 남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물건에 꿰뚫린 어머니가 허우적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부황이 그녀의 의사를 묵살하고 허리 짓을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응, 흐응, 아흐, 아아!”
은환이 울었다. 윤협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은환은 태후가 그를 조롱하기 위해 보낸 계집 중 가장 큰 모욕이었다. 이리 생겨 먹은 것 자체가 그에게는 능멸이었다. 한데 이런 낯짝으로, 이리 달콤하게 울면서 그에게 매달리니. 오한이 돋았다. 휘락궁의 여자는 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계집을 보고 발정한다면. 하여 그녀를 안는다면···‥.
“폐하···‥.”
“태비를 닮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
은환의 시선이 달그락대고 있는 제 음부를 향했다. 겁먹은 눈이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좆을 놀리는 박자에 맞춰 여자가 흐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비음을 산발적으로 흘리던 은환이 금침을 꼭 쥐었다. 겁을 먹은 기색이 완연했다. 울음을 터트리기 전 한 번 더 물었다.
“화설란을 닮았단 말을 듣지 않았어?”
***
굳은 얼굴이었다. 좋은 말로도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노여움이 분분한 얼굴에다 대고 무어라 입을 달싹이지 못했다. 사나운 기색이 완연한 눈에 메다 꽂히는 성기마저 거칠었다. 은환은 가슴팍에 맺힌 땀방울이 짙게 팬 복근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응시했다.
“앙, 하, 하아···‥.”
입술을 물어 삼키려 해도 비음이 흩어졌다. 반복적으로 같은 곳에 박히는 물건이 거칠었다. 볼기가 파드득 떨렸다. 생리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낯을 일그러트린 뒤 그의 호흡을 느꼈다. 은환이 어깨를 비틀자 남자의 손이 훽 그녀를 일으켰다. 가슴이 크게 출렁거렸다.
“은환.”
양 젖꼭지가 붙잡혔다. 은환은 아픔에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폐하’ 하고 작게 웅얼거렸다.
“음부를 벌려봐.”
“폐하.”
“어서. 네 손으로 벌려 이 위로 올라와.”
황제가 제 양물에 턱짓했다. 그를 보던 은환이 제 대음순을 스스로 벌렸다. 황제의 시선이 그에 길게 머물렀다. 그가 다시 쉰 목소리로 말했다.
“구멍까지 뒤집어 보여야지.”
“폐하. 제발···‥.”
“짐은 네 사내이지 않나. 이미 수차례 보았다. 하니 낯을 붉힐 필요 없어.”
“그렇지만···‥.”
몽롱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은환이 구멍 속을 뒤집어 보였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선홍색이었다. 허연 정이 반쯤 삐져나온 모양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우스운 일이었다. 어째서 은환인가. 생각하노라면.
“올라와.”
구멍을 뒤집어 보이던 은환이 작게 할딱거리며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기립한 물건을 다시 넣기 위해 끙끙대는 여자가 그를 힐긋거렸다. 윤협은 그녀가 구멍에 조준하기 위해 궁둥이를 굼실굼실 떠는 모습을 응시했다.
“폐하···‥.”
“하던 말 마저 해. 짐이 무얼 해주어야 해.”
은환이 훌쩍거렸다. 윤협은 혀를 차며 여자를 냉랭히 바라보았다. 은환은 어미를 닮았다. 굵직한 윤곽부터 자잘한 성정까지. 그의 어미 또한 죽은 부황의 앞에서 말끝을 자주 흐렸다. 자주 울었고 신경질을 냈다. 심심하면 용안에 흠집을 냈다가 저 혼자 바들바들 떨며 울었다.
그게 두려움에서인지 아니면 자책감에서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가랑이를 벌어 트린 채 멈춘 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반쯤 젖어 들어간 얼굴이 하얗고 말갰다. 손을 들어 은환의 음부를 부드럽게 쓸었다가 골반을 잡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앉혀 주었다.
구멍 안으로 밀고 들어간 성기가 빡빡했다. 은환이 이물감에 허리를 뒤틀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이마와 눈가. 콧등과 인중. 그녀가 편하도록 고쳐 안았고 가슴팍에 기댈 수 있게끔 자리도 잡았다. 우미한 허리를 바싹 당겨 안은 뒤 허리를 움직였다. 은환이 가쁘게 숨 쉬며 교성을 터트렸다.
“앙, 아, 하아! 앗, 흑, 흐응···‥.”
부서지는 어미가 떠올랐다. 젊은 아비의 탄탄한 가슴팍에서 하염없이 울던 여자가. 자식을 발견하고도 그 저속한 허리 짓을 멈추지 않던 부황이. 광증으로 번질 정도로 부모를 혐오하면서 결국에는 꼭 그 같아지는 모습이. 이 지저분하고 천박한 행위에 열을 올리며 여자를 안는 그가···‥. 그를 이렇게 만든 이 계집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은환.”
“아아앙. 하응, 하으응! 폐하, 폐하!”
쳐올리는 허리 짓에 맞춰 함께 젖을 흔들며 궁둥이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은환이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봉긋한 입술이 그의 턱에 부딪혔다. 젖을 찾는 것처럼 달라붙는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은환의 둥그런 가슴이 제 탄탄한 가슴팍에 끼였다. 그는 여자를 안고 양물을 출납하다 자세를 바꾸기 위해 일어났다. 은환이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숨을 할딱였다.
“허리를 안은 허벅지에 힘을 줘.”
성마른 목소리였다. 은환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 땀을 뻘뻘 흘렸다. 눈가에 맺혔던 물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길고 굵다란 성기가 회음부를 툭툭 건드렸다. 아릿한 구멍에 다시 열이 슬금슬금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벌레가 내벽을 갉아 먹는 것처럼. 구멍을 스치는 거근을 삼키고 싶어 뻐끔거렸다.
“원하지?”
황제가 탁한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은환은 열이 오른 채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구멍으로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머리는 없고 음부만이 환한. 하여 늘어트린 젖과 투실투실한 궁둥이뿐인 여체. 그대로 박힌 채 자지러지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
“이 밑구멍이 내 좆을 받길 원하지 않나.”
탁한 웃음을 지운 황제는 사나웠다. 은환은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허리를 꽉 끌어안은 허벅지가 경련했다. 그의 손이 음모를 쓸고 샅을 스쳤다. 은환은 그가 발기한 좆처럼 통통해진 음핵과 거무스름한 음순을 헤집는 걸 바라보았다. 구멍이 빠끔거리며 집어삼킨 정액을 흘렸다. 긴 손가락이 구멍을 쑤셨다. 그리고는 싸지른 정액을 긁었다.
“아으응···.”
허리가 잘게 떨렸다. 제 씨물을 직접 본 황제가 그것을 귀두로 구멍에 밀어 넣었다. 은환이 고개를 젖히며 가슴을 흔들었다. 볼기를 쭉 잡아 벌리며 허리 짓을 시작한 황제가 낮은 신음을 터트렸다. 각좆보다 두껍고 뜨거운 물건이 내벽을 푹푹 쑤실 때마다 은환이 손톱을 세웠다.
“아앙! 아아! 폐하! 폐···하! 응, 읏!”
역삼각형의 두꺼운 가슴을 긁던 손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목을 감았다. 은환은 울퉁불퉁한 근육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음순이 바들바들 떨렸다. 극한으로 치닫는 감각에 외설적인 교성이 입술을 터져 나왔다. 고양이처럼 길게 울던 은환이 덜덜 떨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연신 쑤셔 박던 황제가 그녀의 귓불을 물며 귓바퀴를 혀로 쓸었다. 순간 참고 있던 물이 터져 나왔다. 황제가 물건을 빼낸 채 은환의 구멍에서 쏟아지는 물을 응시했다. 놀란 은환이 물러나려 허벅지를 풀려 했으나 그는 봐주지 않았다. 볼기를 쥔 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았다.
“폐하, 폐하. 싫습니다. 싫습니다. 으으응, 싫어, 싫어···.”
정신을 차린 그녀가 기겁하며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황제는 제게 매달린 그녀를 우두커니 쳐다보다 바닥에 눕힐 뿐이었다. 은환이 물러나려 뒷걸음질 쳤다. 그가 얇은 발목을 잡고 미끄러트렸다. 은환이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으, 흑, 흑··· 싫어요···.”
엉엉 울며 고개를 젓는 은환을 본 황제가 그녀를 당겨 안은 뒤 길게 팬 외음부를 찰싹 때렸다. 은환이 놀라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황제는 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마지못해 다리를 벌려 음부를 벌렸다. 황제는 그녀를 제 허벅지에 앉힌 뒤 손가락을 구멍에 넣고 허리 짓하듯 출납했다.
“앙, 아아···!”
짜릿한 감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만 들어갔을 뿐인데 사정없이 몰아치는 감각이 매서웠다. 은환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젖혔다. 골반이 뒤틀렸다. 그녀는 어찌할 바 몰라 황제의 어깨를 잡아 긁으며 엉엉 울었다.
반쯤 들린 엉덩이를 끌어 내린 그가 그녀의 가슴을 쥐어뜯듯 주무르며 구멍에서 물을 빼냈다. 수치스럽게도 물은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은환은 폭력적일 정도의 쾌감에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아흐윽! 폐하! 아, 흐응!”
황제가 숨을 깔딱대는 그녀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구멍에서 손을 뗀 그가 음핵을 빠르게 문지르며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반쯤 눈을 까뒤집으며 그에게 매달리던 그녀가 절정에 이르러 축 늘어졌다.
“환아야?”
놀란 윤협이 그녀를 침상에 눕힌 뒤 가슴에 귀를 댔다. 다행히 심장 소리는 계속 들렸다. 그는 낯을 조금 일그러트린 뒤 기절한 여자를 내려다보다 태의를 불렀다. 검붉은 성기는 아직도 꼿꼿한 채였다. 그는 제 물건을 짜증스럽게 내려다보며 기절한 여자에게 살그머니 입술을 맞춘 채 성기를 흔들었다.
***
말아 쥔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했다. 은환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바닥만 더듬었다. 태후의 붉은 입술에서 나지막한 읊조림이 흘렀다.
‘본후는 받은 것이라면 모두 기억한단다.’
입 안이 말랐다. 눈앞이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식은땀 맺힌 이마가 축축하여 곤란스러웠다. 소매를 들어 닦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물고 있을 때였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음산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귓불을 타고 들어오는 화사한 음성은 태후의 새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그런데도 오한이 돋았다. 상전을 앞에 두고 정신이라도 놓을까 숨을 참았다. 고개를 들었다. 태후는 처음 들어와 마주했을 때처럼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받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억한다는 말이.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다는 말이 섬찟했다.
‘그러니 은환. 네가 내 아드님의 동정을 갖는다면 본후는 네 원하는 바를 들어줄 것이다.’
사려 물었던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아스라한 감각이 온몸을 울렸다. 그제야 꿈이란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열고 싶지 않아도 입이 멍청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모두 꿈이라서였다. 하긴 생시의 감각이 이렇게 지독할 리 있나···.
‘하오나 태후 마마, 노비는 남녀의 일을 몰라···.’
‘네게 어머니가 있다고 들었어. 아비의 첩 중 가장 천한 비첩婢妾이라 너를 포함하여 자식을 셋이나 낳아도 첩 대우는커녕 육병풍肉屛風으로도 쓰지 못할 계집이라 욕했다지. 하여 너 또한 아비의 호화로운 저택에는 발도 디디지 못한다고 들었다.’
태후가 웃었다. 마치 재미있는 농이라도 들은 양. 짧게 터트린 웃음마저 잔혹할 정도로 화사했다. 은환은 얼어붙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히 아랫것이 상전을 똑바로 올려다본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발끝부터 스멀스멀 뜨거워진 몸이 눈시울 끝으로 고였다. 첩 중 가장 천한 천첩, 육병풍으로도 쓰지 못할 계집. 모두 잔혹한 부친이 어머니께 내뱉었던 폭언이었다. 하여 은환은 어찌하여 제가 입궁하게 된 것인지, 또 어찌하여 출궁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는지 곱씹게 되었다.
‘출궁하는 것이 소원이지 않으냐. 배 아파 낳은 아들들조차 버린 네 가난한 어미를 모시고 사는 게 소원이지 않아?’
벽라춘을 한 모금 삼킨 태후가 은환을 부드러이 응시했다. 은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부처처럼 앉아 속을 꿰뚫어 보는 양에 소름이 돋았다.
‘본후가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 모자라지 않게. 너희 모녀가 넉넉하게 살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을 베풀 것이다.’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그러니 황제의 하룻밤 계집이 되어라. 태후가 어린아이 어르듯 얼렀다. 바라는 모든 것을 손에 쥐어줄 수 있다는 양 사근거렸다. 은환은 뜨겁게 얼어붙은 채 그녀를 응시하다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하룻밤 계집이 아니라 황제의 첩이 되었다. 육병풍으로도 쓰지 못할 그런 천첩으로 여기 남게 되었다. 은환은 눈을 떴다. 생시 같은 꿈이었다. 가물거리는 눈앞에 잔혹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졌다. 눈을 한 번 더 감았다가 떴다. 그녀를 하룻밤하고도 더 많은 밤을 안았던 사내가 보였다.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결국에는 그 사내가 떠올랐다. 어미에게 유독 모질고 사나웠던 그 사내 말이다. 은환이 집을 떠나 입궁하는 순간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역정을 내던 모습이 짧게 스쳤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녀를 어머니와 같은 삶의 궤에 올려놓은 것인지 모른다. 지긋지긋했다.
“은환.”
금금 속으로 차가운 손이 들어왔다. 은환은 눈동자를 굴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이리 앓아누운 저보다 창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한동안은 자제하시고 기를 보하시면 무탈히 회임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황제의 등 뒤에서 태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꺼운 금침을 목 끝까지 덮어쓴 채 숨을 씨근거리고 있던 은환이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회임? 회임이라고 했나? 내가 회임을 하였나? 은환은 놀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미지근한 얼굴로 태의를 보던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의가 침실을 나갔다. 은환은 붕어처럼 눈을 껌뻑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 제가 회임한 건가요?”
‘빈첩’이란 말조차 까먹고 속삭인 질문이 형편없었다. 예를 갖춘 뒤 여쭈어야 함이 옳은데 이렇게 형편없다니. 내뱉은 말을 두고 덜컥 겁이 들었다. 그러나 황제는 다정한 얼굴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을 뿐 꾸짖는 기색이 없었다. 은환은 초조하게 그를 보다 한 번 더 입술을 움직였다.
“회임하여 태의가···.”
“그리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태의는 우리가 더욱 노력이 필요하다 하더군.”
황제가 아깝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로 아쉽다는 양 금금 속을 기어들어 온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문질렀다. 문득 시침을 들던 도중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왜 이렇게 애가 안 생기나?’ 대충은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벌써 한 달 가까이 밤을 보내고 있는데 애가 생기지 않아 갑갑한 듯했다. 그러나 은환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아마 황제에게도 다행인 일일 것이라 믿었다. 아니. 비단 황제뿐만 아니라 온 황실이 그런 생각일 터였다.
아직 황후를 맞이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시침을 들어 첩으로까지 맞이한 계집이 황제의 씨를 태에 키우고 있다니.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 언젠가 황후가 될 유 승상의 여식 또한 은환에 대하여 적잖이 마음 쓰고 있을 터였다.
“푹 쉬고 나면 몸은 곧 회복된다 하였다.”
“예···.”
“우리가 젊으니 아이 또한 곧 들어설 테고.”
그 말에는 대꾸할 수 없었다. 은환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분 나쁜 울렁임은 아니었는데 괜스레 심장이 뛴다 생각하자 자리가 편치 않았다. 골반을 조금 틀자 곧장 음부가 욱신거렸다.
“아···.”
느닷없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자 황제가 눈썹을 좁혔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은 곧 가라앉았다. 은환의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던 황제가 조용히 말했다.
“짐이 과했다. 자제해야 하는데 조절하지 못했어.”
“아닙니다. 빈첩이···.”
“그리 과하게 했다간 들어설 애까지 떨어져 나가겠지?”
미안한 얼굴로 읊조리던 황제가 옅게 웃었다. 은환은 입을 닫았다. 더없이 다정한 얼굴이었다. 앓아누운 부인을 염려하는 지아비처럼. 그들이 제대로 혼인한 부부라도 되는 착각이 들었다. 은환은 입술을 물었다. 정말로 아이를 원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가벼운 농 정도라 여겼던 그녀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황제는 언제나 그녀가 회임하길 원했다. 은환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눈꺼풀만 떨었다.
“그때 태감이 네 음부를 보았느냐?”
“무슨 말씀이시온지···.”
“처음 시침을 들었던 날.”
황제가 조금 싸늘해진 얼굴로 물었다. 엷게 굳은 표정이었으나 그것만으로 은환은 숨이 멎었다. 처음 시침 들었던 날을 말하는 거라면 응당 그리했다. 태감의 앞에서 음부를 보였는가 하고 묻는 게 이상했다. 그때는 후궁이 아니었으니 곧장 황제의 침실에서 빠져나와 질구 속에 있는 정을 긁어냈다. 그리한다고 애가 들어서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으나 어쨌든 그리하는 게 절차였다.
“···예. 그리했사옵니다.”
은환은 눈을 깜빡였다. 숨길 일이 아니었다.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는 완연히 굳은 표정이었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폐하.”
“그렇군.”
“빈첩이 무얼 잘못하였나이까.”
하얀 입술을 떨며 물었다. 은환의 물음에 황제는 곧장 표정을 풀었다. 억지로 꾸며낸 미소가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번졌다.
“귀인이 잘못한 것은 없다.”
“하오면···.”
“잘못된 것은 없느니라.”
“하온데 폐하의 심기가 편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은환은 조심스러웠다. 황제는 그녀를 보더니 픽 하고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잘못된 것은 없는데 기분이 더럽구나.”
“폐하···.”
아랫배를 더듬던 황제가 열기로 욱신거리는 음부를 덮었다. 은환이 쓰린 표정을 짓자 그가 입술을 맞췄다. 촉 하고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태감이 네 음부를 보았다는 것이 짐의 심기를 어지럽힌다.”
“그것은···.”
“네게 흘린 짐의 정을 그자가 긁어냈다는 것 또한 짐의 심기를 어지럽혀.”
황제는 냉랭했다. 은환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사내만을 바라보았다. 욱신거리는 음부에서 손을 뗀 황제가 그녀의 금금을 꼼꼼히 덮어주며 다시 한번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는 물었다.
“그자를 벌할까?”
가벼운 농처럼 던진 말에 은환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태감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알아.”
은환이 두려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억지로 웃어 뒤틀린 기운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황제가 고백했다.
“빨리 애가 들어섰으면 좋겠군. 선황과 태비는 단 하룻밤에 첫아이가 들어섰다 들었는데 어째서 우리에겐 아이가 늦는 것일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황제가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응시했다. 날카로운 눈이 찌르듯 그녀에게 닿았다. 의심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음용하여 애가 들어서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런 것을 의심하기에 아직 한 달하고 보름 남짓이었다. 게다가 은환이 정말로 피임약을 먹는 것은 아니었다. 태후나 혹은 유 승상에게 그것을 전달받기엔 그녀가 지나치게 화심전에 칩거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미 이 태에 짐의 아기가 생겼는데 태의가 맥을 짚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황제가 입술 끝을 미끄러트렸다. 괜히 위협적으로 느껴져 심장 한편이 떨렸다. 은환은 시선을 둥글리며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 폐하. 빈첩이 먼저 회임하는 것은 장차 황후의 위에 오르실 유 소저께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 것인데···.”
은환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제는 유 승상의 여식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가 순리대로 살았다면 유 승상의 여식은 지금쯤 황후의 위에 봉해졌어야 하며 자식도 두엇 두어야 했다. 그러나 황제는 무슨 연유인지 시침녀란 시침녀는 다 내치고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 황후를 들이지 않으니 후궁을 간택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 또한 순리대로 되었다면. 그러니까 황제가 여인 혐오증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육궁이 후궁들로 가득 채워졌을 것인데. 어쨌든 이르나 늦으나 황제는 그리될 터였다. 육궁은 후궁들로 넘쳐나고 정궁은 정궁대로 번듯하게. 그가 이리 안달복달하며 아이를 원하지 않아도 그는 무수히 많은 자식을 보게 될 터인데 이리 조급해할 필요가 있을까.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유 소저께서 황후의 위에 오르신다면 응당 적자이신 황자 아기씨와 황녀 아기씨를 생산하실 것입니다.”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를 향해 은환이 약하게 읊조렸다. 그러나 황제에게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표정 또한 지운 듯 깨끗했다. 은환은 또 불안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가.”
“예. 태후 마마께서 육궁을 채울 후궁 마마들 또한 알아보고 계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황제가 성의 없이 말을 받았다. 은환은 조금 안심하여 내심 속에 있는 말을 뱉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면 후사 또한 튼튼해질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빈첩 또한 그때는 소임을 다했으니 마음이 편할 테고요.”
“소임이라···.”
열이 발그레 달아오른 은환의 볼을 쓰다듬고 있던 황제가 그녀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귀인의 소임은 무엇인가?”
“빈첩의 소임은···.”
“그래. 빈첩이 다한다는 소임이 무엇인데?”
황제가 웃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태후가 보였던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황제 쪽이 사늘했다.
“그것은 폐하께서, 폐하께서···.”
무의미한 뻐끔거림이 입술에서 비어져 나왔다. 기포처럼 엷은 속삭임이었다. 결코, 대답이 될 수 없는 중얼거림에 황제가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네 소임이 무어야?”
“폐하.”
눈물이 차올랐다. 은환은 흘리지 않으려 했다. 곧장 열기가 몰리는 눈시울을 본 황제가 손을 거두었다. 은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답을 못 하니 다른 걸 묻지. 그 소임에 끝이 있나?”
은환의 일부가 어디든 쥐고 쓰다듬던 황제가 손을 거두고 그녀를 냉랭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완연히 차가워진 걸 깨달은 은환이 삐걱거리는 몸을 끌고 일어나 앉으려 했다. 어째서 이런 분위기가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소임이 끝나면 넌 무얼 할 건데.”
“폐하. 빈첩은 그저, 그저 폐하께 성심을 다하려고···.”
“은환.”
“송구합니다. 폐하. 흑···.”
울음을 터트린 은환이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려 했다. 황제는 치미는 짜증을 삼키며 무릎을 꿇으려 하는 그녀를 막았다. 은환은 음부가 저린지 새하얀 얼굴이었다. 훌쩍거리며 잘못을 비는 그녀를 향해 사납게 낯을 일그러트린 황제가 그녀를 다시 눕히려 했다. 그러나 은환은 부득불 일어나고 싶다는 양 바르작거렸다. 별수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열이 오른 은환이 눈을 깜빡거렸다.
“바르작거리지 마.”
“하오나···.”
“하오나란 말도 그만해라. 듣기 싫으니까.”
여자가 입술을 다물었다. 반쯤 깨문 입술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윤협은 툭하면 눈물을 죽죽 흘리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열이 끓었다. 그런 주제에 입만 살아선 그의 성질을 돋웠다.
“네 소임이 무어야?”
다시 물었다. 은환이 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윤협은 표정을 조금 더 누그러트렸다.
“잘 생각해. 귀인은 짐의 후궁이다. 후궁은 무엇을 하는 여인이냐.”
“···폐, 폐하의 후사를 잇는 여인입니다.”
눈동자를 뛰룩뛰룩 굴리던 은환이 조심스럽게 소리 냈다. 그녀의 허리를 쥐고 있던 윤협이 입술 끝을 미끄러트렸다. 겁을 집어먹은 은환은 잔뜩 옹송그린 채 그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윤협이 은환의 볼을 툭툭 두드리며 이어 물었다.
“하면 어찌해야 하느냐?”
“폐하의 아드님을 회임하도록 성심을 다해야 합니다.”
“한데 어째서 너는 들지도 않은 여자를 생각하지?”
서릿발 같은 음성이었다. 날아와 꽂힌 것만으로 귓바퀴가 시렸다. 높은 천장을 보던 은환이 눈썹을 좁혔다. 황제를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눈발처럼 서느런 표면의 사내가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억울했다. 억지로 입술을 떼어내 오해를 풀어볼까 했지만 또 무섭게 굴 것 같아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억울한 표정이군. 할 말이 있나?”
“아니, 아닙니다.”
“은환.”
고개를 저었다. 맞닿는 시선이 어둑하게 변모했다. 그래도 은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황제의 손이 그녀의 말랑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은환은 그의 손길을 받으며 다시 침상에 눕혀졌다. 눈을 감았다. 금침이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 끝까지 금침을 올려준 뒤 사라지리라 생각했던 황제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더듬더니 이내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그녀를 깊이 당겨 안았다. 은환은 저항하지 않고 그에게 안겼다. 두툼한 가슴에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다.
살갗이 맞닿는 것만으로 오한이 돋아 오금이 저리던 사내였다. 사실은 지금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슴팍에 이마를 맞댄 채 숨을 씨근거리고 있는 지금이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열이 자작한 볼을 부드럽게 스쳤다. 마치 시선을 들라 신호를 주는 것 같았다.
은환은 시선을 끌어다 올렸다. 언뜻 무표정한, 그러나 각 없이 둥글고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들지도 않은 여자’에 대해 읊조리던 황제가 생각났다. 그녀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면 황제는 그녀를 입에 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슴 한편이 으스러지듯 아팠다.
“너를 편안하게 해주겠다.”
“···.”
“언제나 기쁘고 만족스러운 날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긴 손가락이 달라붙었던 입술 사이로 밀려들었다. 은환은 그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네 아들을 짐의 태자로 봉할 것이며 네 딸을 짐의 가장 복된 여식으로 아껴줄 것이다. 그러니.”
입술 사이에 밀려들어 한동안 괴여 있던 손가락이 떠났다. 그는 은환의 턱을 들었다. 깊고 진한 시선이 진솔했다. 한 점의 거짓이 없었다. 그러나 은환은 부서질 것 같았다. 함께 마주 누운 이 자리를 떠나 그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짐을 연모해라.”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그의 가슴팍 근처에 두었던 손을 거두어들이려 할 때였다. 턱을 집었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짐의 아내가 되어 변치 않을 연모를 맹세해.”
“폐하···.”
“그리하면 네게 오직 기쁨만을 줄 것이다. 짐 또한 네 신실한 지아비가 되어 오롯이 너만을 위해 살겠다.”
어찌 그런 게 가능하냐 묻고 싶었다. 혹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황제의 삶은 어떤 삶이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술 밖으로는 아무것도 비어져 나오지 않았다. 오직 다급한 숨만이 전부였다. 잡힌 손목을 거두어들이려 끙끙거리고 있자 황제가 눈썹을 좁혔다.
“은환.”
“놓아주세요.”
부스러질 것처럼 약한 중얼거림이 흩어졌다. 윤협은 대답하지 않는 여자의 입술을 조악하게 베어 물었다. 덮치듯 삼킨 입술이 끔찍하도록 감미로웠다. 방금 제가 무슨 소리를 했고 무얼 원하며 돌아버린 건지 잊을 정도로. 끝내 그를 밀어낸 계집 아닌가. 노여워 내칠 만도 한데 그저 분에 겨웠다. 손목을 움켜잡는 것만으로 부스러질 것 같은 여자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녀를 바닥에 밀어 넘어트린 뒤 위에 올라탔다. 입술을 떼자 은환이 물기 맺힌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꼴에 상전을 향한 예는 잊은 적 없다고 믿는 여자였다. 그에게 계집으로 안긴 적이 없는 양. 저는 그의 명에 순종하는 노비인 양 그렇게 그를 능욕했다.
틈만 나면 그를 피하려 하는 계집을 보고 있노라면 모욕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은환이 진정 노비라면, 하여 그의 눈짓 하나에 변을 당할 수 있는 계집이라면 진작 회를 쳤다. 한데 그럴 수 없으니까.
주윤협은 죽어도 이 계집의 손가락 하나 상하게 할 수 없으니까. 좋아하는 여자를 신형사에 처박을 수는 없잖아. 그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연모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그리 무작스러운 사내는 없다. 하지만···.
“환아야.”
노려보던 눈이 온순해졌다. 발갛게 짓무른 눈두덩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내의 눈이 엷게 일렁거렸다. 그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안은 여자 또한 그를 사내로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무의미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려 밀어내는 것은 괜한 상처를 만드는 것일 뿐.
“그만 나를 받아들여라.”
발그스름한 눈두덩에 입술을 맞췄다. 먹을 삼킨 것 같은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윤협은 애처롭게 우는 아내를 끌어안은 뒤 다정하게 사랑을 종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