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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순흔 (3/8)

 三. 순흔

 이른 아침이었다. 간신히 눈을 뜬 은환은 빈자리를 더듬으며 일어났다. 동이 틀 무렵까지 그녀를 안고 달래던 사내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은환을 두고 황제는 연신 입을 맞추며 그녀를 달랬다. 몰려오는 졸음에 의식이 흐려질 때까지 그에게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던 은환은 아침이 되었을 무렵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귀인 마마. 휘락궁에서 채 상궁이 들었나이다.”

 조반으로 죽을 뜨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모시는 여관이 들어왔다. 은환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채 상궁이라면 수방에서 그녀를 휘락궁으로 데려간 태후의 지밀상궁이다. 은환은 겁먹은 얼굴을 숨기려 표정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휘락궁으로 듭시라는 전갈입니다.”

 은환이 쥐고 있던 수저를 놓았다. 휘락궁의 명을 가져온 여관은 상전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다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조반으로 뜨던 죽 한 그릇조차 제대로 비우지 못해 저분질을 느리게 하는 여인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총희임에도 태후의 기에 눌려 기 한번 펴지 못하는 게 언제나 안타까웠다. 태후를 생각했다. 귀인이 황제를 모시다 앓아누웠다는 사실을 태후가 알지 못할 리 없었다. 기어코 이리 아픈 사람을 불러낸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여관은 창백한 얼굴로 죽 그릇을 더듬는 여인을 보다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고 하던데 어찌 그리 해쓱한 얼굴인가?”

 옥빛이 도는 둥근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그 매끈한 미소에 가려진 적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은환은 예를 다해 절을 한 뒤 태후의 앞에 섰다. 태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실 뿐 그녀에게 앉으라 권하지 않았다.

 치마를 고르게 핀 뒤 모은 두 손에 땀이 맺혔다. 태비의 궁인 자녕궁에 들었을 때를 생각하며 평소보다 차분하게 단장했다. 따뜻한 진줏빛이 도는 오에 백화 군을 차려입은 그녀는 금박으로 쌀알 무늬 수를 놓아 아름다운 피백 또한 하지 않고 그저 밋밋한 색의 피백을 늘어트린 채였다. 황제가 사랑하던 검은 머리 또한 낮게 틀어 올린 뒤 은으로 된 장잠만 두 개를 꽂았으니 황제가 퍼붓는 총애에 비해 몹시도 검소한 차림이었다.

 “게다가 그 궁벽한 차림새는 무엇이고.”

 “나라가 안팎으로 소란스럽고 곡창 지대인 하남과 서남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하여 귀인이 검박하게 차려입었다고?”

 태후가 물었다. 그녀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문득 여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후 마마 유 소저가 들었나이다.”

 “어머. 늦는다 하더니 이 늙은이의 명에 걸음을 빨리 했는가 보군. 들라 하게.”

 서늘하던 웃음이 따뜻하게 바뀌었다. 은환은 유 소저란 말에 당황하여 뒤를 돌았다. 여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던 문이 열리며 곧 작은 여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은환은 빠르게 고개를 돌린 뒤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 소저.”

 “태후 마마.”

 옥이 굴러가듯 맑고 환한 목소리였다. 지저귐이 새소리처럼 높고 투명해 꼭 금사작이 방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은환은 눈을 깜빡였다. 사뿐사뿐 걸어온 여자가 은환의 곁에 섰다. 은환은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한사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태후가 일어나 여자의 두 손을 잡았다.

 “잘 왔어요. 소저. 날이 추웠을 텐데 고뿔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예비 며느리를 맞이하는 태후의 태도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시어머니가 아니라 꼭 친어머니처럼. 모처럼 만에 멀리 시집보낸 여식을 본 여인처럼. 그렇게 온화할 수 없었다. 마치 꼭 다른 사람을 마주한 것 같았다.

 태비를 생모로 두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간에 ‘아드님’이라 부르는 황제에게 또한 저리 다정하진 않았다. 은환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제 맞은편 자리로 여자를 이끌던 태후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은환은 금방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분은···.”

 “가 귀인입니다.”

 “아.”

 유 소저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은환은 식은땀을 흘리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유 소저는 그 뒤로 딱히 말이 없었다. 인사 또한 하지 않았다. 태후는 여관을 시켜 다과를 더 내어오라 했다. 그 다과에는 은환의 몫은 없었다.

 “과연 용모가 아름다우신 분이로군요.”

 인사 한번 하지 않던 여자가 은환을 위아래로 훑더니 작게 읊조렸다. 은환은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술을 사려 물었다.

 “가 귀인의 용모가 출중하긴 하지요. 수방에 있을 때부터 그 미모로 유명했었고.”

 유 소저의 시선에 이어 태후의 시선 또한 은환에게 닿았다. 은환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 또한 눈을 들어 유 소저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태후의 서슬 퍼런 눈길이 무서워 그러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죄지은 노비처럼 그들의 앞에 있었다.

 “하여 내 황상의 침실에 밀어 넣은 것입니다. 유 소저가 황후의 위를 받기 전까지 황상 또한 사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후가 웃었다. 마치 은환의 존재는. 아니. 은환이 그 밤 황제의 시침을 들었던 건 유 소저를 위한 일이기라도 한 양. 그러나 기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은환은 황후를 위한 존재였다. 그녀가 내키지 않은 시침을 억지로 들었던 이유 또한 황후의 지아비인 황제를 사내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은환은 그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것을 위해 황제의 옆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어젯밤에도 황제가 무어라 하든···. 그가 무어라 감언이설을 늘어놓든. 마디마디 달지 않고 감미롭지 않은 말은 없었는데···.

 황제는 그녀의 사내가 될 수 없으니까. 한 여자만을 위해 살 수 없는 사내이니···.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유 소저가 보였다. 작은 여자였다. 키는 그녀보다 조금 작았고 체구는 비슷했다. 은환은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를 지녔는데 여자는 볕 아래서 밝은 갈색으로 보일 만큼 머리가 환한 빛이었다.

 눈썹이 짙고 우미했지만 속눈썹은 길지 않았다. 코는 자그마한 했고 입술 또한 작고 얇았다. 얼굴이 몸집만큼이나 작은 편이라 이목구비 또한 작고 오밀조밀한 인상이었다. 궁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태비이니 그녀를 기준으로 두고 보자면 그리 썩 출중한 미색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단정하고 정숙한 자태였다.

 마치 태후처럼···. 그래 유 소저는 태후와 닮아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부터 여백을 남기지 않고 오밀조밀하게 채운 이목구비까지. 유독 목소리가 투명하고 높은 것 또한 흡사했다. 그래서 그녀를 아끼는 걸까. 은환은 친딸처럼 유 소저의 손을 잡고 손등을 어루만지는 태후를 응시했다.

 그토록 표독스럽던 눈가에 온순한 빛이 흘렀다. 태후가 시선을 돌려 은환을 바라볼 때였다. 태감이 황제의 행차를 알렸다. 느닷없는 행차가 아닌지 태후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유 소저를 향해 밝게 미소 지으며 ‘유 소저의 낭군이 드디어 오시는가 봅니다.’ 하고 속삭일 뿐이었다.

 “정무가 바빴나 봅니다. 분명 아침 일찍 채 상궁에게 기별을 넣으라 하였는데···.”

 “모후의 말씀대로 정무가 급했습니다.”

 태후의 앞에 선 황제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반듯했다. 늠름한 얼굴에 심연처럼 검푸른 색의 오가 위압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토록 젊고 화려한 얼굴인데 막상 앞에 서면 지존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은 만끽하지 못했다.

 은환은 예를 다해 절한 다음 본래 있던 자리에서 세 발자국 물러나 황제의 뒤에 섰다. 눈치껏 뒤로 빠진 그녀를 향해 태후가 살풋 미소 지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유 소저의 옆자리를 권했다. 은환은 둘을 바라보다 저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생각했다. 대충 태후가 가리킨 자리에 앉으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태후가 계속 서 있길 원한다면 그래야 했다.

 “귀인.”

 눈동자를 뛰룩뛰룩 굴리며 방 안의 자리를 살필 때였다. 고개를 들어 사내를 보았다. 황제가 은환을 향해 손짓했다. 곁에 있던 유 소저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태후를 바라보았다. 은환은 꾹 다문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뒤 그에게로 걸어갔다.

 태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후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유 소저 또한 창백한 얼굴로 자리를 비켰다. 은환은 그의 옆자리를 한 걸음 앞두고 발을 멈췄다. 시선을 들어 황제를 흘깃거렸다. 예가 아니란 건 알지만 태후를 앞에 두니 본능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무연한 눈의 사내가 엄한 시선을 보내올 것도 없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은환은 숨을 멈춘 채 멈칫거렸다. 유 소저가 태후의 왼편에 앉았다. 착석하지 않은 사람은 은환뿐이었다.

 “방석이 편하지 않아 자리에 앉지 못하는 건가? 귀인.”

 황제가 입술 끝을 당기며 물었다. 당황한 은환이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짐의 허벅지를 내어주랴?”

 “아, 아닙니다.”

 고개를 빠르게 저은 은환이 그의 곁에 앉았다. 심장이 북 치듯 빠르게 울렸다. 발그레 달아오른 볼과 눈 밑이 쉼 없이 경련했다.

 “귀인을 빼놓고 다과를 드신 겁니까?”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은환을 두고 윤협이 태후에게 물었다. 불러놓은 객은 둘인데 찻잔은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는 앉았고 하나는 죽을 듯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면피를 주고자 함이었다. 감히 그의 아내를 화심전 밖으로 끌어낸 다음 개망신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윤협은 부드럽게 웃었다.

 “어머. 내 그것을 잊고 있었군. 유 소저가 입궁하느라 귀인의 몫을 챙기지 못했어요.”

 차디찬 얼굴에 스민 매끄러운 웃음을 본 태후가 눈가를 파르르 떨다가 대꾸했다. 독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눈가에 깊이 고여 있었다. 황제의 지적에 태후가 여관을 불러 황제와 은환 몫의 다과를 내어오게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궁녀 하나가 다과를 내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는 태후와 유 소저가 마신 벽라춘과는 다른 차로 황제가 즐겨 마시는 차 중 하나인 대홍포였다. 선황과 달리 황제는 태후의 집안인 여씨 집안이 사랑하는 벽라춘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기 때문이었다.

 비탈진 산길. 굽이진 봉우리를 넘어 사람의 손이 쉽사리 닿지 않는 돌 틈에서만 자란다는 잎은 신묘한 암운을 품고 있다고 했다. 맛과 향기의 조화가 일품이라 극소량만으로 채취되는 잎은 황실에 진상되었고 황제는 태후의 벽라춘이 아닌 대홍포만을 즐겨 마셨다.

 그래 보았자 일개 궁인 출신의 첩이자 포목 장사치의 서녀인 그녀는 두 차의 맛이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귀한 이들이라면 제각기 즐겨 마시는 차가 다르며 그 값어치 또한 다르게 매긴다고 했다. 아마 은환은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테지만.

 “그간 정무에 몹시 바쁘고 고되셨다 들었습니다. 이리 태후 마마께서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해가 넘도록 소녀는 폐하를 뵙지 못했겠지요. 언제나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성심껏 보좌할 수 있길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감히 소녀의 자질이 미흡하여 폐하를 모실 수 없다면 먼발치에서나마 폐하를 뵈옵길 바랐고요.”

 “그랬군.”

 유 소저. 아니. 유가란이 숨이 넘어가도록 긴 안부와 동시에 그리움을 호소했으나 황제는 그녀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괜히 은환이 무안해질 만큼 무심한 태도였으나 유가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모처럼 만의 입궁으로 가 귀인 마마를 뵈니 더욱 기쁩니다.”

 유가란이 은환을 응시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윤협은 시선을 돌려 아내를 쳐다보았다. 긴장했는지 여자는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한 모금의 차도 마시지 않고 눈만 슴벅이고 있던 여자가 가란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빈첩 또한 유 소저를 뵙게 되어 몹시도 기쁩니다.”

 더듬더듬 입술을 연 은환이 다시 입을 꾹 다문 뒤 고개를 숙였다. 윤협은 어느 하나 제 안색과 어울리는 것이 없는 치장을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태후의 앞이라 부러 검박하게 입은 것 같았다. 행색이 승상의 딸보다 못했다.

 “한데 가 귀인은 짐이 준 패물은 다 어찌하고 고작 은잠 두 개에 그런 물 빠진 비단이나 걸치고 있는가.”

 퍽 냉랭한 일갈이었다. 은환은 당황해서 황제를 보았다. 휘락궁에 들어섰을 때부터 심기가 편해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어젯밤의 일이 앙금으로 남아 그녀에게 차가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환은 태후와 약혼녀 앞에서 냉랭한 황제에게 서러워졌다.

 “근래 들어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폐하의 후궁 된 빈첩이 호화로운 비단과 패물로 치장한다면···.”

 꾸역꾸역 태후의 앞에서 꺼내다 면박을 들었던 대답을 욀 때였다. 면박을 들었는지라 그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나치게 긴장했기 때문인지 식은땀이 났다. 하얘진 머릿속을 더듬으며 가쁜 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귀인.”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 형편없는 꼬락서니가 어찌 비칠까 두려웠다. 황제가 손을 들어 은환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는 어찌 그런 얼굴이냐 묻는 대신 굳혔던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짐이 귀인에게 하사한 패물이 얼마인데 그런 행색일까 고민했는데 아주 기특한 생각이었구나.”

 “···그러하옵니다.”

 은환이 간신히 대답했다. 윤협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들어서자마자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여자였다. 벽에 눌어붙은 얼룩처럼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여자를 보자마자 심기가 뒤틀렸다. 아니. 심기는 이 여자가 휘락궁에 불려갔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뒤틀렸다.

 게다가 승상의 여식까지 눈앞에 보이자 정말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어지간해선 뒤틀리지 않는 심사가 근래 들어선 이 여자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가 하늘을 날길 여러 번이었다. 윤협은 이 자리에서 차 한 잔을 비워내지 못한 여자를 바라보다 엷게 미소 지어 주었다. 툭하면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여자가 그의 미소에 긴장을 누그러트렸다.

 왜 일찍 이리 웃어주지 않았나 후회가 되었다. 그가 들어왔을 때부터 은환은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리 매달리듯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그는 은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기특하기 이를 데 없어. 그렇지 않습니까? 모후.”

 열감에 달뜬 여자의 허리를 팔로 감아 끌어당기며 태후에게 물었다. 태후는 나란히 부부처럼 앉은 윤협과 은환을 보더니 픽 하고 웃었다. 마치 조소처럼 날카로웠다.

 “과연. 가 귀인이 총명하고 지혜롭군요.”

 “그러합니다. 이리 어질고 지혜로운 여인을 며느리로 두셨으니 모후 또한 후사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은환의 잘록한 허리를 안고 빙글빙글 미소 짓던 윤협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태후는 그를 향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둥근 찻잔을 다시 움켜잡았다.

 “가 귀인이 이리 어질고 영명하니 이 늙은이 근심이라 할 것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리 용모 또한 출중하니 귀인에게서 나올 황손이 참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시선을 내리깐 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보고 있던 태후가 시선을 들었다.

 “적자는 황후의 태에서만 날 수 있는 법이지요.”

 악의가 비치지 않는 눈이었다. 가시를 세우는 법 없이 평연한···. 그러나 은환은 심장 한편이 얇게 저민 것처럼 아렸다. 이리 어질고 영명해도 첩이다. 높은 가문의 귀한 여식으로 간택된 후궁이라 해도 첩일 뿐이었다. 그러나 은환은 그조차 되질 못 해서···.

 어질고 영명하단 것조차 입에 발린 말인 것이란 걸 알았다. 이미 알고 있기에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니. 황제가 그녀에게 연모를 바랄수록···. 기실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지 않으냐고.

 지나간 시간이 그녀를 깨웠다. 귀족의 벼슬을 사고자 악귀같이 산 사내가 노비를 품어 태어난 계집아이. 그리하여 그 아비의 수많은 처첩 중 가장 미천한 신분의 자식···. 어미와 같은 삶은 사는 게 싫어 결코 혼인하지 않으려 했다.

 고작해야 서녀. 노비 출신인 비첩의 딸이라 번듯한 신분의 사내와는 혼인할 수 없다고 했었나. 아버지는 담배를 뻐끔거리며 아들만 셋을 둔 중년 고관의 첩 자리를 권했다. 재취도 아니고 첩이었다.

 모아둔 재산 한 푼 없는 양민이라도 좋으니 첩은 싫었다. 아비의 그늘 아래서 어미가 어떤 삶은 살았는지 그 굴레가 자식에게 어떻게 씌워졌는지 알아서 그랬다. 제대로 된 혼인을 하지 못할 신분이라면 그냥 혼자 사는 게 나았다.

 아비에게 재산 한 푼 넘겨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본래도 아비의 재산이 녹록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준 건 아니었다. 비첩의 딸이란 이유로 아비가 사는 집에서 살지 못했던 그녀였다. 언제나 그와 사는 집과 멀리 떨어진 낡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그 집에서 쓰는 양식은 모두 아비의 하인들이나 입에 대는 저급한 식재들이었다.

 한데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고자 살았겠나. 은환이 바란 것은 어머니의 주인이자 저를 수태시켰던 사내의 그늘을 떠나 검박하더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게 꿈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녀였다. 입궁한 이후로는 언제나 그 삶을 위해 녹봉을 모아두었다.

 언젠가 출궁하게 되면 모아둔 녹봉으로 서남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살 작은 집을 사고 싶었다. 한데 눈을 떠보니 누군가의 첩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재취 자리가 낫겠다며 아비의 역정을 피해 입궁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버지와는 달리 황제의 의지는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런 꼴인 것이다. 아버지가 내민 첩 자리를 피해 궁으로 왔는데 황제의 첩이 되다니. 웃음이 조금 나왔다. 어쩌면 팔자에 제대로 된 혼인 자리는 없어 첩 신세를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 사는 게 진정 분수에 맞는 삶이라 그래서···.

 “하니 책봉식은 언제가 좋을까요? 황상.”

 ***

 황후조차 황제를 사내로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육궁을 둔 황제가 한 여인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인지.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게 황제인데 은환은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니 실망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태후가 그 자리에서 너는 죽어도 후궁으로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은환이 바라는 것은 태후가 들어줄 수 있었다. 태후는 은환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또 그녀가 후궁으로 남아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 눈치이니.

 그러니 은환이 괴로워할 건 없었다. 어쩌면 책봉식 이후 평생 소원하던 것을 태후가 들어줄지 모르는데 근심으로 괴로울 게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괴롭다. 머릿속에 하얗게 비워질 만큼.

 “폐하께서 드셨사옵니다.”

 화심전으로 돌아온 지 수 시간이 지났다.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조반 때문에 궁녀는 더욱 중반을 잘 챙겼다. 그러나 저분질을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중반을 물리니 해가 기울어졌다. 은환은 황제가 들었다는 말에 표정을 어찌할지 몰라 허둥지둥거렸다.

 “석반을 들지 않았다고 들었다.”

 “예?”

 “아침이고 점심이고 끼니를 거르는 게 취미냐?”

 황제가 날카롭게 물었다. 황제는 은환을 물끄러미 보다 태감을 시켜 석반을 들이라 명했다. 넋을 놓은 은환이 기다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왼 눈썹이 꿈틀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은환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윤협이 가볍게 한숨 쉰 뒤 나붓한 허리를 당겨 안으며 볼에 입을 맞췄다. 평소라면 도홧빛으로 달콤하게 달아올라야 할 얼굴이 창백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품에 안긴 여자는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깊이 숙일 뿐이었다. 하얀 턱을 붙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은환.”

 뒤꽂이 하나 하지 않은 검은 머리와 대조되는 얼굴이 유달리 창백했다. 근심 어린 빛을 애써 지우려 해도 그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말랑한 턱과 볼을 더듬던 그의 손이 아내의 가붓한 몸을 안으며 물었다.

 “어째서 이런 얼굴이야?”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핏기없는 입술을 지분거리기 위해 입술을 가까이 하던 그가 아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문득 석반을 든 궁녀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은환은 비취 색 호화로운 식기에 차려지는 요리들을 응시했다. 잉어와 대금저, 검은 해삼과 사슴 같은 잡기도 먹기도 힘든 식재들이 갖은 향신료와 함께 조리되어 식탁을 장식했다.

 고작해야 돼지 몇 근을 위해 종일 일을 했던 궁 밖의 생활이 떠올랐다. 부친이 그들 모녀를 저택 밖으로 내몬 후부터는 궁핍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입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한 은전 보내오는 대신 하인들을 보내 저택에서 남은 음식과 옷을 보내왔다. 그러나 질이 좋고 넉넉했다면 모를까, 식은 음식과 헝겊만도 못한 것들이 전부였기에 은환은 언제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그것도 아버지의 저택에서. 자매의 시중을 들며···.

 “이리 온.”

 물끄러미 식탁을 보는 은환을 향해 황제가 손짓했다. 은환은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은환과 식사를 할 때 황제는 언제나 그녀를 제 옆에 앉혔다. 맞은편도 아니고 바로 옆자리. 예법에 따르면 황제는 누구와도 한 식탁을 쓸 수 없었다.

 기껏 함께 식사한다 해도 황후나 가능할까. 황후조차 황제의 권유 없이는 그가 석반을 들 때면 그의 옆에 선 채 시중을 들어야 했다. 한데 일개 후궁이 황제의 식탁에 앉아 저분질을 할 수 있을까. 설사 황자까지 출산하여 황제의 총애에 목숨 걸지 않는 후궁이라 해도 후궁은 황제의 신하이며 노비이다.

 태후가 아무리 예뻐하며 며느리로 여긴다 해도 후궁의 권력은 황제로부터 나온다. 총애를 잃지 않으면 된다지만 후궁의 처지란 어화원에 핀 모란보다 못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환아야.”

 황제의 낯빛이 어두웠다. 은환은 멈칫거리다가 그의 옆에 앉았다. 첩지를 받고 화심전에서 살기 시작한 후부터는 언제나 그와 함께 식사했다. 황제는 끼니를 거르는 것이 습관이 된 그녀를 깨워 꼭 조반을 먹이려 했고 아주 바쁠 때를 제외하면 그녀와 함께 식사한 뒤 정무를 보았다.

 가라앉은 낯빛을 지우려 노력하며 수저를 잡았다. 황제는 그녀를 힐긋 보더니 잉어 살을 한 점 떼 내 은환의 숟가락에 올렸다. 머뭇거리던 은환은 잉어 살을 한 점 삼킨 뒤 곧장 황제의 숟가락에 잘 익힌 대금저 요리를 한 점 올려주었다.

 황제가 그녀의 식사를 챙기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시중을 누가 드는 건지 후궁이 된 은환이 먼저 해야 할 일을 황제가 먼저 했다. 가장 처음 식사를 할 때부터 그랬기에 지금은 놀라지 않았으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이리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조차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처지에 맞게 그의 식사 시중이나 들었다면 마음이 고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는 부득불 은환을 제 옆에 앉힌 뒤 꼬박꼬박 밥이며 반찬을 먹였다.

 그리고 언제나 은환은 기계적으로 황제가 했던 일을 되풀이했다. 그가 잉어 살을 올려주면 그녀는 익힌 꿩 살을 올려주고 그가 해삼 요리를 입에 넣어주면 은환은 전병을 빈 그릇에 올려주었다. 그리해야 마음이 편했다.

 “음식이 내키지 않는 것이냐. 입에 맞지 않아?”

 “···아닙니다.”

 사실은 그랬다. 무얼 넣어도 입에 맞지 않았다. 생선이며 쌀이며 전부 입에 넣는 즉시 까끌까끌했다. 살짝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고 냄새가 거슬리기도 했다. 회임인가 싶었지만 어제 그녀를 진찰했던 태의는 회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분명 맥이 잡혔다면 황제에게 고했을 텐데···.

 “죽을 좀 들라 할까?”

 그가 구운 꿩을 다시 은환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은환은 고개를 저었다.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달리 그것밖에는 느낄 수 없었다. 은환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 시선을 돌렸다.

 가끔 신기했다. 자신이 황제에게 ‘염려’라는 것을 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니. 그가 저런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를 처음 볼 때만 해도 이렇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첩지를 받는 일도, 화심전에 거처를 마련할 일도···. 기어코 어미와는 다른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 그래서인가? 그래서 음식이 내키지 않았던 걸까. 자리가 불편하긴 해도 곧잘 먹기는 했던 그녀였다.

 “죽을 좀 내어오라 하겠다.”

 “빈첩은 괜찮습니다.”

 “하면?”

 “충분히 섭식했으니 괜찮습니다.”

 “다과를 좀 내어오라 할까?”

 황제는 집요했다. 끊임없이 무얼 먹이려 하는 통에 귀찮기까지 할 정도였다. 은환은 거절하려다가 그에게 더 염려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온.”

 빈 그릇을 치우기 시작한 궁녀들을 보고 있던 은환에게 황제가 손짓했다. 그녀는 일어나 익숙하게 황제의 허벅지에 앉았다. 커다란 손이 탄탄한 허벅지를 뭉개는 엉덩이를 주물거렸다. 은환은 볼기에 닿는 길쭉한 양물을 느끼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황제는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녀가 안기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만졌다. 통통한 엉덩이부터 잘록한 허리와 납작한 배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가슴까지. 은환은 그의 손길을 느끼며 두꺼운 가슴팍에 볼을 문댔다.

 황제와 식사하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그의 품에 안기는 건 이제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따금 자신도 헷갈렸다. 그를 좋아하는 건지, 좋아하는 게 아닌지. 후궁이라면 모두 황제에게 애교를 부리며 살뜰히 그를 받들어 모셔야 하지만 직분에 충실한 것과 그를 좋아하는 일은 별개의 일이다.

 애첩답게 애교를 피우며 황제를 모시는 일은 후궁의 일이지만 그를 사랑하는 일은 첩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환은 그에게 안기는 일은 불편하지 않지만 그와 식사하는 일은 어려웠다. 분수를 아는 까닭이었고 첩의 일에만 충실한 까닭이었다.

 “태후가 네게 모욕적이었단 걸 안다.”

 가슴의 여밈을 푼 뒤 젖무덤을 지분거리던 황제가 문득 낮게 읊조렸다. 웅크린 채 그가 가슴을 만지는 걸 내려다보던 은환이 시선을 들었다.

 “모욕적이지 않으셨어요.”

 은환이 가슴팍에서 머리를 떼어낸 뒤 담담히 읊조렸다. 아무리 어질고 영명한 후궁이라 해도 적자를 낳을 순 없었다. 적자는 황후의 태에서만 날 수 있는 거니까. 그리 말하지 않아도 은환은 알고 있었다.

 그 경고가 은환에게 대단한 상처였던 것도 아니다. 은환은 궁 밖에서 살길 원하는 여자였다. 지금이라도 출궁시켜주면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나가 살 것이다. 그러니 은환은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꼴이었다.

 “환아야.”

 “유 소저도요. 빈첩에게 친절하셨어요.”

 유 소저를 입에 담자 황제가 눈썹을 좁혔다. 은환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얼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태후가 마지막으로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언제 대혼례를 올릴지에 관한 것이었다. 은환을 첩으로 두어도 황제는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은 총각이었다.

 처를 맞이해야 제대로 된 가정을 일군 것이니 태후가 마음 쓰는 것 또한 당연했다. 눈가에 열기가 조금씩 모여들었다. 은환과 무얼 어찌해도 황제는 아직 순백이다. 그의 첩이므로 은환은 그에게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어머니처럼···. 그에게 유의미한 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려물지 않은 입술이 엷게 떨렸다.

 대혼례를 올린 뒤를 생각했다. 지금도 끔찍하지만 그때는 더욱 끔찍할 것이 분명했다. 처지가 더욱 확연하게 느껴질 것이므로. 그런 뒤에 회임하여 황자를 출산한다면 더욱 끔찍하겠지.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문득 다과를 준비한 궁녀들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은환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힐긋거렸다. 황제는 가슴의 여밈을 바로 해주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오를 주워 다시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양인들의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느냐?”

 궁인들이 곡옥 색이 도는 그릇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두고 물러났다. 윤협은 창백한 아내의 볼에 입술을 문댄 뒤 그녀에게 물었다. 여자는 동그란 눈을 하고 그릇을 바라보았다. 노란색 눈처럼 보송보송한 겉면에 가장 윗면은 짙은 갈색이었다. 당연히 처음 보는 음식이었고 보는 것도 처음이니 입에 대본 경험이 있을 리 없었다.

 “단것을 좋아하는 환아를 위해 준비했단다.”

 황제가 은환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뒤 그릇을 가까이 당겼다. 서양의 다과란 말에 은환이 잠시 시름을 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윤협 또한 기분이 좋았다.

 “한 입 먹어보렴.”

 “폐하부터요.”

 젓가락을 들어 보이는 윤협을 향해 은환이 말했다. 은환은 윤협이 든 젓가락을 받아든 뒤 조심스레 잘라 그에게 먹여주었다. 다과를 한 입 먹은 윤협이 은환이 든 젓가락을 가져간 뒤 보송보송한 살점을 잘라 은환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떠냐?”

 은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물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윤협은 아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람쥐처럼 오물거리는 입이 귀여웠다. 눈에 띄게 달라진 얼굴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꼭 딸랑이를 쥔 아기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맛있어요.”

 “환아를 위해 준비한 것이니 환아가 전부 먹어도 된다.”

 윤협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은환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가 그릇에 담긴 다과를 보았다. 황제는 그녀가 단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끼니를 들지 않으면서도 중반 후에 나오는 다과는 꼬박꼬박 챙겨 먹으니 식성이 어떻다는 것쯤이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은환은 황제가 무얼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얼 싫어하는지 알지 못했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일···.

 “설고란 거다. 십수 해 전 사절단이 왔었지. 천주를 모시는 이들 또한 섞여 있었다.”

 은환은 입가에 묻은 가루를 닦아주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밋밋한 배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크고 따뜻했다. 그가 한 입 더 잘라 은환의 입에 넣어주었다. 지독한 단맛이었다. 입 안에서 부스러질 일도 없이 타액에 젖는 동시에 사르르 녹는 감촉이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어떻게 이런 질감으로 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다.

 “환아 네가 원한다면 매일 중반 상에 올리라 하겠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은환은 입술을 달싹였다. 서양의 천주인들이 만드는 다과라면 황제를 포함한 태후나 태비 그리고 황녀들 또한 쉽게 들 수 없는 음식일 텐데 한낱 후궁의 중반 상에 오르다니···. 은환은 눈길을 잠시 내리깐 뒤 거절의 말을 다듬었다.

 “하오나···.”

 “며칠째 섭식을 제대로 못 하지 않느냐.”

 “날이 급격히 추워지는 바람에 식욕이 돋지 않았을 뿐인 것을요.”

 “날이 추워지는 것과 식욕이 무슨 상관인데.”

 “빈첩은 계절이 바뀌는 기간에 몸이 좋지 않아서···.”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환은 횡설수설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그를 응시했다.

 “정말이에요. 빈첩은 계절이 바뀔 때···.”

 “알겠다. 하면 더 잘 먹어야겠지. 중반 상에 매일 올리라 할 테니 챙겨 먹어라.”

 “그래도 이리 귀한 것을 빈첩이 어찌 독차지하겠어요.”

 은환이 약하게 도리질했다. 괜히 윗전의 눈에 거슬릴까 두려웠다. 하여 태후가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하나 고민되었다.

 “태후나 짐이나 단것은 즐기지 않는다. 짐의 누이들 또한 단것이라면 어릴 때만 즐겼지. 환아 네가 짐에게 시집오기 전까진 황실에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사희방이 한가로웠어.”

 은환은 잠자코 황제를 쳐다보았다. 나긋하고 사분사분한 읊조림이 다정하기도 했다. ‘네가 짐에게 시집오기 전까지.’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별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에 맥이 조잡하게 뛰었다. 은환은 우두커니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두툼하고 굵직한 근육이 밀도 있게 짜여 틈 없이 맞물려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어머니 또한 단것이라면 회임했을 때나 자주 들었지 요즘은 단것이라면 입에 물리시는지 통 입에 대질 않으신다. 그러니 천주인들이 만드는 설고는 전부 네 몫이다.”

 기다란 손가락이 은환의 흰 턱을 쓰다듬었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속눈썹이 파드득하고 떨리더니 이내 열감으로 발갛게 데워졌다. 황제가 이토록 다정할 때마다 그가 황제가 아닌 사내로 보였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런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속삭임에 넘어가면 안 되는데 자꾸만 다른 것을 꿈꾸게 되었다.

 부질없고 허황된 바람이란 걸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었다. 은환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굳게 다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에게 마음을 주면 안 된다. 지존을 사사로이 연모하는 것만큼이나 헛되고 열없는 것은 없다.

 ‘정신 차려라. 조은환. 오늘은 태후까지 만나 현실을 맞닥트리지 않았니. 황제가 그 질문에 무어라 대꾸했어. 그의 약혼녀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약속했었는지 잊었어?’

 그를 보던 시선을 돌린 채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그때의 비참함이 마르지도 않은 하루였다. 황제는 예정대로 처를 맞이할 테고 육궁은 빠르게 채워질 터였다. 밤이면 패를 뒤집어 후궁을 회임시킬 테고 육궁을 채운 여인들의 배는 쉼 없이 부풀어 오를 테다. 태후가 그리도 바라던 대로 황궁에 아기 울음소리가 쉬지 않고 들릴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지금이야 황제의 첫 시침녀로 총애받고 있지만 육궁의 여인 중 가장 미천한 신분이다. 간택 후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처지가 나쁠 터. 황자와 황녀들 또한 그럴 것이다. 먹는 것 하나 입는 것 하나 질적으로 다르겠지. 차이는 눈에 도드라질 것이다.

 다 같은 황제의 자식이라 해도 황후가 낳은 적자와 고관대작들의 여식 중 뽑아 올린 후궁에게서 난 서자들. 그리고 하룻밤 승은으로 첩지를 받은 자신. 다르지 않을 리 없었다. 존귀함에서부터 차이 날 테니 먹고 입는 것만이 문제는 아닐 테다.

 눈을 깜빡였다. 황제의 우미한 손이 은환의 젖무덤을 맴돌았다. 열감으로 부드럽게 데워졌던 눈가는 어느덧 식어 미지근했다. 붉은 입술이 은환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으응···.”

 우묵하게 팬 쇄골에 더운 숨이 미끄러졌다. 반듯하게 돋은 쇄골 뼈에 뾰족한 혀끝이 닿았다. 은환은 팔로 감은 목에 매달린 채 허공을 더듬었다. 귀하지 않은 자식들의 삶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하염없는지 귀동냥하여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 바였다. 그녀의 삶이 그리 지난했고 끔찍했던 삶이므로.

 그리 피하고자 달음박질했던 끝에 다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팔자에 없는 것을 바라고 욕심냈던 끝에 가장 비루하게 여겼던 덫에 처박힌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은환은 어미처럼 살 것이다. 눈총 받고 냉대 받으며 하루하루 제 손으로 죽지 못해 사는 계집이 될 것이다.

 그러다 혹여나 그 끔찍한 삶에 볕 한쪽 들지 않을까 고대하며 살다 고꾸라지길 거듭하겠지. 이 밋밋한 배 속에서 자라날 어린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목덜미에 피어난 순흔을 핥다가 고개를 든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주하기 싫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

 사흘이 흘렀다. 황제는 매일 중반 상에 설고를 올렸다. 정사각형으로 보송보송한 촉감의 다과는 겉면이 나무처럼 진한 갈색으로 그 아래는 영춘화처럼 노랗고 보들보들했다. 그러나 은환은 중반을 들기 전 잠이 든 상태여서 중반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대신 중반을 먹기 전 조반으로 단술과 구기자 탕원이 든 죽을 먹어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요즘은 뭐든 그랬다. 황제가 내리는 음식이라면 죽과 단것밖에 먹지 못했고 그마저도 소화시키지 못해 속이 더부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졸음은 어찌나 오는지 황제와 조반을 든 후 바로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을 자는 것으로 보내는 게 싫어 꾸벅꾸벅 졸면서도 어떻게든 일어나 있으려 했으나 궁녀가 차라리 잠시 눈을 붙인 후 다시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한 후부터는 조반을 들고 바로 잠에 들었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어쨌든 정오가 지나자 정신이 좀 맑아져 다행이었다.

 “마마 혹시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어화원에 핀 한 무더기 꽃들을 말끄러미 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곁에 선 소 상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 상궁은 그녀의 지밀상궁으로 수방에 있을 때 수방의 최고 책임자 중 하나였다. 평생 수방의 궁녀로 일하다 나이를 먹은 뒤부터는 수방의 상궁이 되었는데 은환이 첩지를 받고 귀인이 되자 그녀의 지밀상궁이 되었다.

 황제의 명에 의해서였다. 은환은 소 상궁을 길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소 상궁과는 수방에서도 그리 가깝지 않았다. 그녀의 윗전이었으므로 친밀감을 느끼기는커녕 어렵고 불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부리는 궁녀가 반듯하며 매사 꼼꼼해도 상전의 눈에는 곱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 상궁이라 하여 은환을 달리 볼 이유가 없었다. 멀지 않았던 과거 소 상궁은 은환이 무얼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 눈빛을 보내던 여인이었다. 지금이야 처지가 뒤바뀌어 은환의 눈치만 살피는 그녀였지만 은환이라고 하여 지금의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하룻밤 황제와 동침하여 예쁨 좀 받는다는 이유로 그녀의 상전이 된 양 하대하는 일이 어려웠던 까닭이다.

 “마마. 잠시 쉬어갈 수 있게 차를 내어오리까?”

 “···아니.”

 어렵게 입술을 떨어트렸다. 중반으로 올라온 식사가 소화되지 않았다. 저분질을 몇 번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설고는 차와 함께 남김없이 먹었으므로 차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은환의 거절에 소 상궁이 머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고개를 돌려 어화원을 흐드러지게 장식한 가을꽃을 바라보았다. 해국과 추앵이 화려하게 열을 지어 핀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정말 없으시지요?”

 그녀를 우두커니 보던 소 상궁이 거듭 물었다. 은환은 고개를 돌려 의아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노비가 염려되어 그렇사옵니다.”

 “졸음이 자주 오고 속이 더부룩해서 그렇지 달리 아픈 곳은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존대가 나왔다. 소 상궁은 지적하지 않는 대신 헛기침을 했다. 은환은 실수를 깨닫고 볼을 물들였다. 그녀는 황제가 자주 쓰다듬던 아랫배를 응시했다. 달거리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다.

 속이 더부룩하거나 졸음이 자주 오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은환은 본래 계절이 바뀌면 자주 앓고는 했다. 속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머리가 어지럽거나 허리가 아프기도 했다. 게다가 달거리 전까지 치르는 고역 또한 만만치 않아서 종종 이리 앓고는 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곧 괜찮아졌다. 그러니 회임은 아니었다. 얼마 전 태의가 왔을 때 그랬지 않나. 황제와 은환이 회임에 힘쓰면 곧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만약 은환이 회임했다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황제부터가 알았을 테고 아이를 갈망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회임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아직이었다. 은환은 눈썹을 좁힌 채 흐드러진 추앵 군락을 바라보다 입술을 다물었다.

 소 상궁에게 회임은 아닐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것을 입에 담는 일조차 두려웠다. 두려워 피임약을 먹고 싶은데 구할 길이 없었다. 소 상궁을 시켜도 아니 될 일이었다. 지밀상궁이라 하여 정말로 그녀를 수족 부리듯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선을 떨어트려 맑은 빛깔을 띠는 진주군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녀가 총희답게 아름답고 화려하길 바랐다. 어제는 대놓고 검박하게 입는 여자는 취향이 아니라고도 했다. 은환은 아주 화려하게 아리따운 얼굴이니 총희답게 붉은 석류군이나 월화군같이 화려한 차림을 하는 게 더욱 아름답고 권위에 맞는 모습이라고. 은환은 그의 뜻을 알았으므로 그의 취향에 맞게끔 차려입었다.

 이 배에서 자식은 열쯤 보고 싶다고 했으니 석류 알을 듬뿍 자수 놓았고 부부애를 상징하는 나비 문양을 더했다. 정말로 부부였다면 그의 모든 행동과 그의 모든 말이 기뻤으리라. 아마 은환이 그의 진짜 아내였다면 말이다. 그랬더라면 임신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짧게 떨었다가 아른거리는 검은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태후 마마.”

 소 상궁이 소스라치듯 속삭였다. 은환 또한 놀라 예를 취했다. 태후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은환을 향해 입술을 뗐다.

 “어화원의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지?”

 “그렇사옵니다.”

 “흐드러지게 핀 추앵 군락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과 시름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야.”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장관이니 그럴만했다. 은환은 따로 말을 받지 않고 그녀가 이을 말을 기다렸다.

 “따로 귀인에게 할 말이 있다. 본후를 따라오겠느냐.”

 “저 태후 마마. 어딜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소 상궁이 놀라 물었다. 태후는 그녀를 힐긋 보더니 은환을 쳐다보았다. 은환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히 수락의 여부를 물었으나 은환에게 선택권이 있을 리 없었다. 소 상궁이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은환은 안심하란 듯 미소 지으며 태후를 따랐다.

 ***

 태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작은 누각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추앵은 더 보이지 않았고 대신 울금향이 옅게 맡아졌다. 누각과 어화원을 잇는 교각 양옆으로 잉어가 사는 연못이 있었다. 은환은 혹여나 긴장을 푼 사이 태후의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이곳에 밀어 죽이진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며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연봉과 연잎이 뒤덮은 녹색 연못에 백련과 홍련이 나란히 피어 있었다. 누각은 화려했다. 두고 온 궁녀들이 무색하게 다기를 만지는 궁녀들이 둘. 울금향을 피우며 주인을 기다리는 궁녀가 하나였다. 은환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 천이 걸린 난관은 백옥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들이 앉을 방석에는 청학과 꽃이 화려하게 자수 놓여 있었다. 주인이 들지 않아도 언제나 이렇게 관리되는 것일까. 고개를 돌렸다.

 태후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은환은 그녀를 따라 맞은편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유 소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제를 만나기 위해 입궁할 것이란 걸 알았다. 겨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가을 사냥이 시작될 테니.

 태후가 만남을 목적으로 입궁을 주도한다면 언제든 그의 옆에 설 수 있었다. 게다가 황제 또한 뜻대로 하라 이르지 않았나. 유 소저가 입궁하여 태후의 곁에 앉았을 때 말이다. 분명 무심한 눈으로 그리하라 일렀다.

 “근래 들어 많이 쇠약해졌다고 들었어.”

 화로에서 차를 달이고 있던 궁녀 하나가 다기를 들고 다가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찻잔에 엷은 연둣빛 찻물이 채워졌다. 은환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젊은 황상을 모시기가 쉽지 않지. 사내로서 정력이 제일 활발할 때라고 하지 않았니. 특히 밤을 나눌 후궁이 귀인 하나밖에 없으니 더욱 그리할 테고.”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했다. 얼이 나간 채 창백한 은환을 본 태후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은환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눈 밑이 작게 경련했다. 은환은 당황하지 않으려 마른침을 삼켰다.

 “내 주가의 사내들이라면 물리도록 알지. 본래도 아랫도리에 힘이 좋은 사내들이란다. 윤협이 제 부모로 인해 계집 살이라면 질겁하여 내빼긴 해도 밤일은 잘 했을 거야. 그렇지?”

 태후의 붉은 입술이 저속하게 움직였다. 눈웃음을 치는 태후의 눈가는 팽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인도 아니고 저토록 젊은 얼굴의 여인이 아랫도리며 밤일이란 말을 입에 담으니 귓불이 홧홧했다.

 “동정이긴 해도 숙맥은 아니었을 테지.”

 입술만 하염없이 달싹이는 은환을 향해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러나 콧등만 물들일 뿐 입술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것은 없었다. 태후가 연둣빛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은환은 오늘도 태후가 내어준 차를 마시지 못했다. 이리 단둘이 있는지라 더욱 삼킬 수 없었다.

 이 차에 독이 들었다면 어떡할까. 같은 다관에 내어 왔다 해도 은환의 찻잔에 독이 발라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은환은 비취빛이 도는 다관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왜 독이 들어 있을까 봐?”

 “아니옵니다.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본후가 네 목숨을 앗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한들 이리 멍청한 방법으로 너를 죽이겠느냐.”

 은환이 시선을 들었다. 태후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미소를 머금지 않았으나 타고난 얼굴이 인자하고 자애로웠다. 그리하여 가끔은 내뱉는 모든 말에 날이 첨예하단 걸 잊곤 했다. 은환은 하얗게 질린 채 그녀가 이을 말을 기다렸다.

 “윤협이 네게 얼마나 목을 매는지 아는데 말이다.”

 태후가 다시 찻물을 홀짝거렸다. 교각을 건너온 태감이 시중을 드는 궁녀에게 옥색 그릇에 담긴 다담(茶啖)을 전해주고는 물러갔다. 문득 손끝이 저릿저릿 울렸다. 궁녀가 탁자 한가운데 그릇을 내려놓았다. 반듯한 사각형에 겉면이 노란 다담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명치가 알알하니 아릿했다. 목이 말랐지만 차마 차를 삼킬 순 없었다. 이런 데서 너를 독살하지는 않으리라는 말을 들었어도 태후가 내어준 것이라면 독이 아닌 약이라도 그녀의 숨을 멎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주가 사내들이라면 물리도록 안다 하였지.”

 태후가 비스듬히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리며 은환을 향해 읊조렸다. 은환은 탁자 한가운데 올라온 설고를 바라보았다.

 “제 계집이라면 돌아버리는 게 주가 사내란다. 은환. 본후가 모셨던 선황 폐하 또한 고작 낯짝 반반한 첩년에게 미쳐 본후가 그년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노여워했단다. 하니 윤협 또한 지금 네가 본후의 앞에 있다는 걸 알면 경기를 할 테다.”

 호흡이 삐거덕거렸다. 태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태비를 ‘그년’이라 한 것은 분명했다. 얼굴에 핀 자애로운 미소가 오싹했다. 감히 눈을 마주하기 어려워 태후를 음해했던 붉은 입술만 바라보았다.

 태후가 그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윤협이 그녀에게 목을 매니 그녀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일까. 하니 성총이 떨어지는 날 그녀의 숨을 앗아가겠다는 것일까.

 열감이 머리를 우둔하게 만들었다. 은환은 눈을 깜빡였다. 호흡을 정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태후와 독대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황제는 그녀가 태후와 만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니까. 오늘 밤에도 무슨 경을 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약속받았던 것을 확인해야 했다. 결코, 그녀가 유 소저에게 해가 되지 않으리란 말 또한 전해야 할 것이다.

 “마마. 빈, 빈첩은 유 소저께 결코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제대로 고부라지지 않은 혀 때문에 발음이 모호하게 들렸을까. 은환은 다시 한번 고했다.

 “황후가 되실 유 소저께 결코 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이미 해가 되고 있지 않으냐.”

 시선을 내리깐 채 거듭 약속하는 은환에게 나직하되 독기 서린 읊조림이 들려왔다. 은환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증스럽다는 눈이었다. 맹독처럼 서슬 퍼런 안광이 무자비하게 그녀를 덮쳤다.

 “빈첩은···.”

 “배 속에 버젓이 용종을 품고 있으면서 장차 황후가 되실 분께 해가 되지 않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턱이 덜덜 떨렸다. 한기가 그녀를 삼켰다. 오한을 누를 길이 없어 은환은 작게 떨기 시작했다. 눈앞이 희부옇게 번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 눈앞이 어질거렸다.

 “선황의 귀애 받던 황녀들도 매 중반마다 입에 대기 힘든 다과를 대접받는 네가 황제의 하룻밤 계집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한데 황후가 입궁하기도 전에 황손을 배태했지.”

 어룽어룽 맺혔던 물기가 눈 밑을 적셨다. 은환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조가비처럼 꾹 다물었다. 젖은 숨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웠다. 태후의 앞에서 눈물을 터트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아득해진 머릿속으로 자비 없는 속삭임들이 스며들었다.

 “황제의 총애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얼마나 많은 계집이 그 총애를 등에 업고 곤전을 무시하고 조롱했는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태후 마마. 빈첩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빈첩은, 빈첩은 그저 출궁하여···.”

 “닥쳐라! 화설란 그년이 날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네년이 아느냐!”

 격앙된 목소리가 누각을 울렸다. 쩌렁쩌렁한 고성에 은환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 실금을 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은환은 벌벌 떨며 방석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줄줄 볼을 타고 흘렀다. 고개를 설설 저었다. 어째서 화 태비와 그녀를 같은 사람으로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부연 눈으로 바라본 태후는 화 태비가 안전에 앉아 있기라도 한 양 광기에 찬 눈이었다.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이 은환의 목을 조였다.

 “본후가 너 같은 계집을 모를 줄 아느냐. 한평생 너 같은 계집과 맞서며 곤전의 위엄을 유지해온 게 본후다. 하니 그 알량한 총애로 어리고 가엾은 가란을 핍박하며 조롱하리란 걸 안다. 본후가 그것을 두고 볼 줄 아느냐?”

 태후가 입술 끝을 당겼다. 가느다랗게 핀 미소가 조악했다. 은환은 연신 도리질하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유 소저에겐 아무 악의가 없었다. 회임한 것 또한 오해일 것이다. 분명 진맥한 태의가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

 “빈첩, 회임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절대 회임한 일이 없습니다.”

 “피임한 것이 아닌데 어찌 그걸 확신해?”

 “그, 그렇지만 빈첩을 진맥한 태의가 회임에 대한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마.”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보던 태후가 피식 웃었다.

 “멍청한 것.”

 “···마마.”

 “녹을 받는 자들의 말을 믿느냐? 태의의 말을 한 치 거짓 없이 믿어?”

 입술을 깨물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뉘가 동맥을 잘라 그은 양 피가 죄 빠지는 기분이었다.

 “궁에서 녹을 받는 것들은 인간이 아니란다.”

 태후가 눈을 휘었다. 작은 병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옻칠한 것처럼 매끈한 광이 도는 검은 병이었다. 함빡 젖은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검은 머리 짐승이지.”

 “···.”

 “쓰고 말할 줄 아는 짐승들이야.”

 누각이 무너질 정도로 고성 치던 태후는 언제 그랬다는 양 부처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다. 은환은 그녀가 내민 병을 바라보았다. 소매에 감출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병이었다.

 “황손을 배 속에 담고 있는 계집이 궁 밖을 나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태후가 고개를 기울였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용봉잠이 함께 기울여졌다. 은환은 냉랭한 눈을 한 여자를 응시했다.

 “너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니 더 말하지 않으마. 가란은 내년 봄 대혼례를 치르고 입궁할 것이다.”

 태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머릿속에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혼녀가 있는 앞에서 거짓을 고할 리 없으니 이 겨울을 넘기면 유가란은 황후로 책봉될 것이다. 태후의 노여움은 타당했다. 황후가 책봉되지도 않았는데 회임이라니. 세상 어느 정처가 그를 달가워할까. 세상 어느 황후가 그를 기꺼워할까. 시선을 사뿐히 내리깐 뒤 마른침을 삼켰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고하라.”

 “약조했던 것을 지켜주실 수 있으신지요?”

 “···본후는 받은 것이라면 모두 기억한다. 그것이 원한이든 은혜이든.”

 낭랑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작고 매끈한 병을 은환의 손이 삼켰다. 눈물은 더 흐르지 않았다.

 ***

 ‘겨울이 지나면 대혼례를 올릴 것입니다.’

 병을 쥔 손을 말아 쥐었다가 풀길 여러 번이었다. 하루 세 번이었고 사흘을 음용하면 핏기가 비친다 했다. 그리고 핏기가 비친 아침 하혈을 하며 유산하는데 흘러나온 피가 반 사발 정도면 유산이 된 것이라고 했다.

 속이 메슥거렸다. 배 속에 황제의 아이가 자리 잡았단 것 또한 믿기지 않는데 제 손에 낙태약이 있단 것 또한 믿기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모든 게 꿈 같았다. 생시가 아닌 꿈 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문득 병을 쥔 손이 후드득 떨렸다. 이 병 안에 든 약을 모두 삼키면 배 속에 자리한다는 애가 핏덩이로 잘게 으스러진다고 했다. 눈가가 파드득 떨렸다. 태후의 나직한 읊조림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배 속에 황손을 품고서 출궁한 계집을 본 적 있느냐고. 내리깐 시선에 두려움이 번졌다.

 ‘어쩌자고 회임했지? 어쩌자고···.’

 태후가 그리 말했으니 회임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근래 들어 회임한 여자처럼 까닭 없이 속이 좋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막막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황제와 가랑이 섞은 날을 후회했다. 뭉개듯 가슴을 주무르던 손길이 떠오르자 열이 볼을 데웠다. 회임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분명 애가 덜컥 들어설 일이 두려워 한갓진 날이면 시름에 잠겼다. 그러나 상대가 황제이지 않나. 매야 붙어먹기 위해 그녀를 안는 사내를 어찌 막을까.

 하다못해 피임약이라도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선을 들어 옻칠이 된 병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이 병이 피임약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괴로워하지 않고 약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낙태약이라니···.

 “대체 뭐가 두려운 건데 조은환···.”

 아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황제의 아이를 낳길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 은환은 누구의 아이도 낳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아내로도 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은 의미에서였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발목에 족쇄를 매단다는 뜻이었다.

 아이가 아니라 해도 매단 족쇄가 많은 은환이었다. 이미 비참한 처지에 돌보며 살펴야 할 대상이 존재하는 은환이었다. 한데 어느 사내의 아이라니···. 첩 팔자가 싫은 것은 그녀 혼자만 불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먹는 것 하나. 입는 것 하나. 사소하며 자잘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까지 차별받기 때문이다.

 적서의 지위가 분명한 만큼 차등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왜 그녀의 아이가 차등 받아야 하나. 왜 그녀의 아이만이 그림자 속에 살아야 하는 걸까. 욕심낼 수 없어 그림자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삶은 그녀 하나로 족했다.

 그러니 이 약을 삼키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 떨쳐내고 나면 황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도 원하는 삶을 살며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손가락이 하염없이 떨렸다.

 “겨울이 가면 너희 아버지는 귀한 집안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거야.”

 마른침을 삼키며 밋밋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눈시울이 젖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며 마음을 단단히 했다.

 “제발···.”

 아프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흩어지되 안락했으면 좋겠다. 이기적임에도 그랬다. 이렇게 어린. 덩어리조차 되지 못한 자식에게 어미의 마음을 생각해주라 하고 싶었다. 죽길 바라면서도 아이를 쓰다듬었다. 고통에 신음할 틈 없이 갔으면 좋겠다고···.

 “으흑···.”

 깨문 입술 틈으로 눌린 울음이 흘렀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 은환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약하고 쓸모없었다. 부스러지기는 얼마나 쉬운지 끊임없이 돌보지 않으면 숨이 끊겼다.

 그런데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보고 싶었다. 분명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아이였다.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어 그 자신까지 불행해질 아이였다. 그런데도 강보 속에서 쌕쌕 우는 아기가 보고 싶었다. 황제의 아기이니 황제를 닮았을 테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눈송이보다 가벼운 숨을 내쉬며 젖을 찾을 것이다. 물기가 눈을 함빡 적셨다. 눈썹 한 올, 작은 콧등, 솜털 같은 머리털 하나하나.

 눈 안에 박힐 때까지 바라보고 싶었다. 울음이 터졌다. 어전을 지키던 태감이 황제의 행차를 알렸다. 은환은 손을 덜덜 떨며 경대 밑 서랍장 속으로 병을 감췄다. 멎지 않는 울음을 끅끅 삼키며 그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합화가 비쳤다. 은환은 옅게 할딱거리며 일어났다.

 “귀인.”

 부연 시야를 몰아내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작게 비틀거리자 커다란 손이 작은 어깨를 감쌌다. 은환은 매달리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둑한 시선이 핏기없는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은환.”

 일그러지는 눈이 아름다웠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황제의 면면은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때때로 구겨지는 눈가마저 오한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이도 그럴까? 아버지를 닮아 구겨지는 눈가마저 완벽할까. 본 적도 없는 애가 눈앞에 그려졌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기는 아버지를 닮는 법이다. 황제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기이니 그를 닮았을 것이다. 엄지손가락이 젖은 볼을 더듬었다.

 붉은 입술이 그녀를 삼켰다.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맥이 풀렸다. 그녀는 주저앉듯 흘러내렸다. 두꺼운 팔이 그녀의 등을 받쳤다. 은환은 헐떡이며 그와 혀를 섞었다. 가슴이 들썩거릴 때마다 동여맨 여밈이 갑갑했다.

 “음, 읏···.”

 질척하게 섞이는 타액과 함께 가쁜 비음이 흘러나왔다. 윤협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자를 들여다보았다. 비녀 하나 꽂지 않은 채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가 흑단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잡아채듯 머리채를 움켜잡은 뒤 고개를 들게 했다.

 거친 손길에 은환이 겁먹은 눈을 했다. 말끄러미 그녀를 보다 등롱의 불빛이 미끄러지는 가슴골을 핥았다. 애를 밴 가슴은 보기 좋게 통통하며 풍만했다. 동여맨 여밈을 거칠게 풀어 부푼 가슴을 확인했다.

 머리채를 쥔 손을 놓았다. 은환은 주저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발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울음을 멈추지 않는 여자의 앞에 앉아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 우느냐?”

 조회를 마친 뒤 정전에서 집무 보던 중 태후전에 심어놓은 궁녀가 찾아왔다. 은환이 태후와 독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궁녀를 돌려보낸 뒤 지밀상궁과 궁녀에게 은환의 행동을 주시하라 일렀다.

 회임한 여자였다. 자궁에서 움트고 있는 어린 것은 그가 임신시킨 핏덩이였고 그의 장자이자 태자가 될 아이였다. 그런데도 은환은 자신이 회임한 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낮 태후가 알려주었을지도 모를 사실이나 그냥 알려주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 울어.”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폐하. 몸이 아파요. 눈물이 나와요.”

 달덩이처럼 부푼 가슴이 희고 말랑했다. 그녀는 옹송그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는 바짝 곧추선 젖꼭지를 바라보다 시선을 들었다. 평연한 얼굴이 냉랭하다 생각되었는지 그녀는 더 매달리지 않고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다.

 그녀를 관찰한 지밀상궁이 전해 올리길 딱히 아픈 곳은 없었으나 태후를 접견하고는 곧장 화심전에 칩거하여 석반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은환의 볼을 감싸 쥔 뒤 시선을 맞췄다. 미열이 느껴졌다. 앓을 이유가 없다 해도 임신한 여자였다. 임신한 여자는 잘 아프고 잘 울었다. 그는 은환을 끌어당긴 뒤 품에 안았다. 여자는 저항 없이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어째서 아픈 것일까?”

 “모르겠어요.”

 은환이 반복했다. 윤협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계집들은 몸의 변화에 민감하다고 했다. 달거리를 한 번만 걸러도 곧장 제 몸의 변화를 의심한다고 했는데 은환은 아니었다. 가슴이 이리 부풀어도 제 몸이 회임한 줄을 몰랐다. 의심하지도 않았다.

 입에 대는 음식마다 모래를 씹는 기분이라고 했으면서. 제 낭군이 정무를 보러 나가는지도 모른 채 종일 잠만 자면서···. 한데도 회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회임을 거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은환은 눈을 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윤협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궁녀에게 석반을 들라 명했다.

 “태후가 무슨 말을 하던가.”

 부드럽게 물었다. 알고자 한다면 모를 것도 없었다. 진맥했을 당시 태의가 말하지 않았던 회임 여부를 알았던 것 또한 태후를 통해서다. 화심전에 드는 태의를 매수한 태후는 회임 여부를 제게만 알리라 명했다.

 아마 그가 모르는 사이 은환이 품은 아이를 죽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황제이자 아비인 그가 알게 된다면 아이를 해치는 데 귀찮아질 테니.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휘락궁에 심은 궁녀와 태감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었다.

 굳이 휘락궁의 궁인을 매수하지 않는다 해도 궐의 주인은 황제였다. 궐에 일어나는 일 중 그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모든 궁인이 그의 눈이며 그의 귀였다. 알고자 한다면 알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니 은환이 스스로 말해주길 바랐다.

 “궁금하군. 모후가 짐의 귀인을 어떻게 겁주었는지.”

 은환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회임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알게 되었다면 왜 입을 열지 않는 걸까. 은환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들뜬 얼굴로 달려와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라며 속삭이기를. 그리한다면 응당 그녀를 끌어안고 입 맞춘 뒤 ‘내 사랑스러운 아내.’라 외칠 텐데. 짐의 보배가 짐의 귀한 아들을 회임했노라며 조정에 선언할 텐데···. 그러나 은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은환.”

 “그저 요즘 몸이 쇠약해져 염려된다고···.”

 눈이 가늘어졌다. 은환은 시선을 내리깐 뒤 다시 입술을 닫았다.

 “태후께서 며느리 걱정을 하셨구나.”

 “예.”

 새카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다란 머리가 가슴을 가렸다. 이 사랑스럽고 발칙한 여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좀 전처럼 머리채를 움켜잡고 싶었다. 깨물고 핥는 것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갈증에 대해서 생각했다.

 은환을 사랑했다. 한데 은환을 흔적도 없이 씹어 삼키고 싶었다. 그녀가 지금처럼 그의 시선을 피할 때마다, 그에게 거짓을 고할 때마다 그리하고 싶었다. 문득 은환이 고개를 들었다.

 “···태후께서 겨울이 지나면 폐하께서 대혼례를 올린다고 하셨습니다.”

 대단한 용기라도 낸 양 겁을 밀어 넣은 얼굴로 은환이 읊조렸다. 윤협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환은 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윤협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잘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유 소저께서 어리고 연약하신 관계로···.”

 “은환.”

 그녀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주하기 두려운지 그녀는 도망치듯 시선을 피했다. 윤협은 턱을 움켜잡았다. 긴 머리에 가린 하얀 얼굴이 서러움으로 일렁거렸다.

 “유가란은 내 아들을 낳지 못할 것이다.”

 “···.”

 “유가란에게서 자식을 볼 생각이 없다.”

 핏기없는 살점. 앓은 흔적이 역력한 입술이 꿈틀거렸다. 은환은 울음을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 윤협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습관처럼 허벅지에 앉혔다. 은환은 눈물을 삼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유 승상에게 짐의 아이를 손자로 안길 마음이 없거든.”

 “빈첩은···.”

 “짐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건 너 하나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은환이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느리게 도리질하며 헐떡거렸다.

 “으, 흐윽··· 빈첩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하셨잖아요.”

 헐떡이며 울던 은환이 소리쳤다. 삼킨다고 삼킨 눈물이 왈칵 몰려나왔다. 윤협은 일그러진 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너만이 내 아내야. 변하는 것은 없어.”

 황제의 말이 변했다. 스스로를 지칭함에 ‘짐’이 아니라 ‘나’였다. 은환은 의식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

 “···변하는 게 없다고요?”

 은환이 옷깃을 쥐었다. 울긋불긋 눈두덩을 물들인 여자가 씨근거리며 되물었다. 윤협은 그녀의 허리를 깊이 안은 다음 입술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은환이 도리질하며 그를 피했다. 윤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은환은 그를 우두커니 쳐다보다 입술을 열었다.

 “오롯이 빈첩만을 바라보는 신실한 지아비가 된다고 하셨어요. 폐하께서 그리하실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어찌 지존이 한 여인만을 바라보는 지아비가 될 수 있겠어요. 궁 밖의 천한 장사치조차 그리하지 못한 것을요.”

 은환이 조금 웃었다. 젖은 입술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윤협은 그를 놓치지 않고 새겨 넣었다. 망막에 인이 박일 만큼 깊이···. 창백하게 달뜬 채 그의 가슴팍을 움켜잡았던 여자가 손을 거두어들였다.

 “하면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어야 했어요.”

 습윤한 읊조림이었다. 윤협은 노엽게 가라앉은 여자를 들여다보았다. 은환은 비치적거리며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윤협은 강박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당긴 다음 움직일 수 없도록 조여 안았다.

 “놓아주세요.”

 “내 진심을 의심하는 건가.”

 은환이 입술을 세게 깨물며 노려보았다. 이제는 예를 차리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느샌가부터 은환에게 황제는 사내였다. 그리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리 보고 있지 않노라 스스로를 속였는데 은환에게 황제는 사내로 들어와 있었다.

 그의 의도였고 그의 의지였다. 은환은 부들부들 떨며 아랫배를 감쌌다.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후궁으로서 황제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계집으로서도 이 사내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회임부터 연모까지.

 연모해달라 청하던 황제는 지존이 아닌 사내였다. 그리하여 은환에게 무얼 약속했고 무얼 바랐나. 은환에게 무엇이 된다고 했나. 다시 망막에 물기가 차올랐다. 어룽어룽 맺힌 눈물이 그녀를 발갛게 만들었다.

 ‘오롯이 너만을···.’

 그런 형편없고 허황된 속삭임에 달콤함을 느낄 만큼 어리석어서는···. 멍청하게도 넋을 놓고 자빠졌지. 은환은 주먹 쥔 채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내게 지어미는 너 하나야.”

 “대혼례를 올린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지어미가 둘이 되겠죠!”

 욕지기가 치밀었다. 더는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하지 않길 바랐다. 집요하고 너저분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은환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처럼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별안간 스치는 사실에 소리쳤다.

 “아니지요. 황제에게 정궁은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황후께서 폐하의 정궁이신데 어찌 일개 첩인 빈첩더러 지어미라 하세요. 가례도 올리지 못했는데···. 여인이라면 모두 쓸 수 있는 홍 개두조차 쓰지 못했는데!”

 은환이 악을 질렀다. 쩌렁쩌렁 침전을 울리는 노성이 비명 같았다. 마구잡이로 가슴팍을 밀치고 때리던 은환은 제 노성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숨을 씨근거릴 때마다 환히 드러난 가슴이 볼썽사납게 들썩이는 것 같았다.

 문득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노여워할까. 왜 황제가 속삭였던 것에 목을 맬까. 고작 후궁을 향한 희롱이었는데. 그녀는 주먹질하던 손을 내려놓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노여워할 필요가 없었다. 노여워할 계제도 되지 못했다. 알고 있던 바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궁에서 달아나려 했다. 처지가 더 우스워지기 전에 말이다. 한데 왜 이 자리에서 그에게 속을 드러내며 분풀이를 했을까. 게워낼 분이 어디 있으며 분을 낼 이유 또한 없다.

 ‘조은환 정신 차려!’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은환.”

 불경하게도 주먹질하는 손을 그대로 맞고 있던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은환은 몽롱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송구합···.”

 “끝이 났나?”

 “송구합니다. 폐하. 빈첩이 정신이 나가서··· 근래 몸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짐의 청혼에는 티끌만 한 거짓조차 없었다.”

 은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대꾸할 힘도 없었다. 시선을 끌어 올리지 못해 물끄러미 바닥을 더듬은 은환을 향해 그가 좀 더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다음을 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네가 알아야 할 건 하나야.”

 그의 손이 은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습기로 반질거리는 눈동자에 그의 상이 맺혔다. 윤협은 검은 동공 속에 박힌 자신을 응시하며 씹어 뇌까리듯 말했다.

 “네 지아비는 짐이고 짐의 지어미는 너다. 너만이 내 지어미야. 나 또한 너만의 지아비다. 다른 계집에게는 아니야. 여기에 다른 계집이 설 자리는 없다. 짐이 틈을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은환은 맥없이 그 말을 들었다.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도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사실은 이해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황제만의 세계에 그녀를 가두어두려 했다. 그 세계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규칙과 이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저항은 무용했고 이해하는 일은 의미 없었다.

 “유 소저는요?”

 “황후는 황후일 뿐이야.”

 “···.”

 “은환.”

 시선을 떨궜다. 은환은 비참함을 곱씹었다. 이런 기분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입궁하기 전 수도 없이 느꼈다. 한데 몰아칠 때마다 그녀를 덮어 삼킨 이 기분이 그녀를 잘근잘근 으스러트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형부 시랑이나 승상과 같다. 황후는 짐이 벼슬을 내린 여자야. 그러니 유가란은 짐의 신하이고 너는 짐의 아내다.”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반대가 아닌가. 보통은 반대였다. 황후는 황제의 아내이고 후궁은 그의 노비이며 신하였다. 황후는 품계가 없지만 후궁은 품계가 있었다. 적서는 그래서 명확했다. 서자는 결코 황제의 가족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자식이되 그의 신하였다.

 그리하여 은환은 그가 정궁에게서 낳은 자식의 발밑에 진 그림자조차 어려워해야 할 사람이었다. 한데 아내라니···. 터무니가 없어도 지나치다. 은환은 비뚜름한 미소를 짓는 대신 넋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환아야.”

 대답하지 않았다. 목이 말라 삭정이처럼 비틀어 빠진 것 같았다. 윤협은 대꾸하지 않는 그녀의 눈가를 더듬었다. 더는 울부짖지 않는 여자를 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가슴 한편이 닳아 빠지는 것처럼. 화가 나는데 애가 닳았다. 동시에 자신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여자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마음이었다.

 윤협은 시선을 떨어트려 희고 둥근 가슴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젖으로 가득 차 더욱 풍만해질 가슴이었다. 그는 제 아이로 인해 둥글게 부풀 복부를 더듬었다. 은환은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대신 하얀 손을 덮은 뒤 입술을 뗐다.

 “너를 비에 올릴 것이다. 누구도 네 존귀함을 넘볼 수 없도록.”

 윤협은 고개 숙여 둥근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은환은 옹송그린 채 말랑한 입술이 이마를 떠나 콧등에 닿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너만이 짐의 아내다. 짐의 사랑스러운 부인은 그것을 잊으면 안 돼.”

 은환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

 은환은 그날 석반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한 차례 울고 난 다음일까 졸음이 쏟아졌다. 근래는 잠드는 것 외에 끌리는 게 없었다. 평소 즐겨 놓던 자수며 책이며 모든 게 따분하고 의미 없이 느껴졌다. 이것도 회임의 영향일까. 모르겠다.

 은환은 그리 소리를 질러대고도 황제의 팔을 베고 자는 자신이 우스웠다. 감히 후궁 주제에. 간택하여 입궁한 귀족의 여식도 아닌 한낱 궁녀가 황제를 대상으로 역정을 내다 못해 주먹질을 했다고 생각하니 잠시 제가 미쳤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대로 돌지 않고서는 그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은환은 그날 밤 황제의 팔을 베고 눈을 감았다. 한 팔과 함께 제 품을 내어주는 황제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일상을 마친 여느 때처럼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잠들었다. 그리하여 은환은 자신보다 황제가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안전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도 모자라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린 후궁에게 그저 사분사분하기만 하다니.

 ‘총애란 이런 걸까.’

 문득 그런 물음이 들었다. 총애받는 애첩이니 노성도 주먹질도 괜찮은 것이다. 그러니 모든 후궁이 실총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은환은 경대 아래 서랍장을 열었다. 태후에게 받은 낙태약은 그녀가 넣어둔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병을 꺼내 만지작거린 후 다시 넣어두지 않고 소매에 감췄다. 조반은 황제와 든 덕에 죽에 탈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중반부터는 넣을 예정이었다. 그리 사흘을 꼬박 음용하면 아이가 죽는다고 했다.

 은환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는 가을 사냥이 오기 전 그녀를 비에 봉하리라 하였다. 또한 그가 한 청혼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고민한 뒤 답을 하면 그녀가 만족할만한 선물을 할 것이라 했다. 궁금하지 않았다. 진봉하는 것 또한 관심 없었다. 정말이지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도리어 그날 저녁 있었던 일로 인해 결심만 굳어질 따름이었다.

 첩지가 얼마나 더 높든 첩은 첩이다. 천자에게만큼 지아비의 삶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런 사내의 지어미가 된다 한들 황후면 무엇할까. 생각해보면 은환이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혼인이란 제도였다.

 정궁이든 후궁이든 혹은 정처이든 첩이든 여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혼인이었다. 애먼 여자들끼리 서로를 미워하게 하고 다투게 하고···. 그 끔찍한 다툼에 자식마저 괴롭게 하는 것이 혼인이었다. 한데 사내는 그 불행 속에서 혼자만 쏙 빠져 행복했다.

 병을 쳐다보는 은환의 시선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어미는 너를 불행하게 하지 않을 거야. 절대 불행하게 하지 않을 거야. 아가.”

 배 속의 아기를 향해 열없이 속삭이고 있을 때였다.

 “귀인 마마. 폐하께서 중반을 어화원에서 함께 들자 하옵니다.”

 소 상궁이었다. 은환이 낯빛을 굳히며 망설였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던 소 상궁이 주름이 잡힌 소매를 흘깃 쳐다보다 경대 아래 서랍장을 보았다. 방금 전 태후전에 심어놓은 궁녀에게 전해 듣길 가 귀인이 태후에게서 무언가를 받아왔다고 했다. 누각에서 시중을 든 건 궁녀 셋으로 모두 뼛속까지 휘락궁의 사람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긴 어려웠고 태후가 가 귀인에게 무언가를 내민 건 분명하다고 했다.

 아마도 낙태약이리라. 가 귀인이 제 회임 사실을 안 것은 당연한 것일 테고 그 약을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 그녀가 회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소 상궁은 가 귀인의 회임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을 떠올렸다. 태의의 입에서 회임 사실이 들렸다면 응당 모든 궁인이 축복하며 귀인을 보호했겠지만, 귀인의 회임을 아는 이들. 황제를 포함한 소 상궁과 같은 일부 궁인들은 휘락궁의 간자로부터 들었다.

 가 귀인이 알기도 전에 말이다. 황제는 그녀의 심신이 편치 않은 고로 스스로 회임을 의심하고 진맥을 청하기 전까지 지켜보며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모시라 했으나 소 상궁은 그것이 귀인을 기만하는 일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소 상궁은 상전이 소매 사이로 감춘 까만 병을 보다 입술을 열었다.

 “마마.”

 “아, 알겠네. 채비하도록 하지.”

 “예.”

 귀인이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 상궁은 사뿐히 시선을 내리깐 뒤 침전 밖 황제의 태감을 향해 걸어갔다. 태감이 그녀를 어둑한 눈으로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인께서 태후께 무얼 받으셨는지 알아냈는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낙태약일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휘락궁에 심어둔 아이들을 통해 아는 사실 아닙니까?”

 “자네 말이 맞네. 오늘 아침 전달받으셨어.”

 “예.”

 소 상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태감은 단호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일렀다.

 “어쨌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귀인이 음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걸세.”

 “귀인께서 어화원으로 가셨을 때 병을 바꿔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정확히 그 병에 든 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테니 귀인께서 받은 병은 폐하께 올리도록 하겠네.”

 “예. 궁녀 아이를 통해 전하겠습니다.”

 태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 상궁의 명석한 대답에 흡족한 듯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녀들과 함께 가 귀인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긴 머리를 한 아름 높이 틀어 올린 채 홍옥이 달린 화잠과 은으로 도금한 소채를 얹은 여자는 달빛 아래 선녀 같았다.

 옅은 불안함이 스민 두 눈이 소 상궁을 향했다. 귀인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열 폭의 천으로 만든 담자색 월화군이 나풀거렸다. 소 상궁은 오늘도 귀인이 궁에서 가장 아리따운 여인인지 확인한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황제는 언제나 자신의 아내가 궁에서 가장 아리땁길 원했다.

 육궁이 모두 빈 지 오래라 황녀들을 제외하면 궁의 젊은 여인이라곤 가 귀인 한 사람밖에 없는 데도 그러했다.

 가 귀인이 뒤따르는 소 상궁을 자꾸만 쳐다보았다. 본래도 희고 연약한 얼굴이었으나 회임 후로는 더욱 여윈 빛이 짙어져 볼 때마다 가슴 끝이 저렸다. 그래도 타고난 미색은 가릴 수 없는 법.

 수방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살펴봐 왔기에 그럴지는 몰라도 소 상궁의 눈에는 가 귀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태후가 이상할 정도로 유 소저를 챙기며 그녀의 미색을 칭찬했지만 어림없는 소리. 누가 보아도 미색은 귀인이 압도적이었다. 유 소저가 감히 비할 데가 되나.

 새침한 눈꼬리에 나붓하고 우미한 속눈썹, 반듯한 콧등과 앙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미인만의 고집은 서시의 재림이며 양귀비의 화신이라 불릴만했다. 태후가 저리 가 귀인을 두고 잠시도 분을 참지 못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귀인이 황후가 될 여인보다 아리따우며 사랑스럽기에. 그녀가 하룻밤의 시침녀에서 그치지 않고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총희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귀인이 화 태비를 닮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 이유가 클 것이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하다면 이 앳되고 어린 여인을 시기하듯 쳐다보진 않을 것이다. 소 상궁은 걸음을 멈춘 채 잠시 뒤돌아 화심전을 응시하는 귀인을 보았다.

 “마마. 어디 불편하신 곳이 계십니까?”

 “···아니. 괜찮아.”

 귀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화원에는 이미 황제의 태감들로 가득했다. 귀인의 시선이 흐드러진 추앵을 떠나 교각 건너 누각에 닿았다.

 ***

 가을볕이 포근하며 따사로웠다. 윤협은 교각을 건너오고 있는 아내를 응시했다. 담홍색의 오에 금박으로 꽃무늬를 입힌 피백. 가을볕에 만발한 한 떨기 추앵처럼 작고 가녀린 여자가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는 중이었다.

 윤협은 시선을 떨어트려 제 손아귀에 들린 병을 바라보았다. 태후가 이 자리에서 내민 것이라고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경대 아래 서랍장에 있었다고 했고. 은환이 이것을 삼키려 했었다. 이것이 은환의 몸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은환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제 몸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리하여 알고도 지니고 있었을 테다. 은환에게 이것이 무엇인지 물을 생각은 없었다. 어쩐지 그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무엇인지 듣고 나면···. 그리하여 은환이 제 입으로 배 속의 아이를, 그가 지난밤 동안 공들여 만든 새끼를 죽이려 했노라. 그리 고한다면···. 병을 움켜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그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은환이 낙태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가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돌아버릴지 알 수 없다. 울고 매달리며 읍소한다 해도 잘린 이성의 끈이 돌아오지 않을 텐데···.

 “폐하. 가 귀인이 들었사옵니다.”

 은환이 누각에 가까워질 무렵 윤협은 손에 들린 병을 감추었다. 은환은 그를 보지 못했던 고로 그저 누각으로 발을 내디딜 뿐이었다. 윤협은 맞은편에 착석하려 하는 은환을 향해 손짓했다. 은환은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윤협이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은환은 언제든 그의 허벅지에 앉을 수 있도록 바투 붙어 앉았다. 윤협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평소처럼 아내의 가붓한 허리를 당겨 안은 뒤 볼에 입 맞췄다. 은환은 익숙하게 그의 입술을 느끼며 목덜미를 파고드는 남자를 받아들였다.

 “귀인.”

 목덜미에 입술을 찍은 남자가 오목한 쇄골 안을 혀끝으로 핥으며 그녀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가 숨을 들이켜며 턱으로 살갗을 뭉갤 때마다 음부가 저릿했다. 은환은 궁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윤협의 가슴팍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폐하···.”

 “응?”

 “궁인들의 눈이 두렵습니다···.”

 “하면 다 뽑을까?”

 윤협이 입술 끝을 당겼다. 우미한 입가에 걸린 미소가 스산하며 조악했다. 은환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곧장 농이라며 그녀를 눙치려 들 줄 알았던 황제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다. 은환은 하얗게 질린 기색을 숨기며 입술을 말았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남자가 웃음을 터트린 뒤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전조 없이 덮쳐진 입술에 은환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했다. 오늘따라···. 어디가 다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황제는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응, 흐읏···.”

 입 안으로 들어온 혀는 무람없기 이를 데 없었다. 은환은 가쁜 숨을 내쉬며 할딱거렸다. 타액이 뒤섞이며 얽힐 때마다 야릇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환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다 말고 옷깃을 쥐어뜯듯 움켜잡았다.

 문득 저고리를 동여맨 여밈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말랑한 가슴을 감싼 손에 놀란 은환이 눈을 떴다. 사내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은환은 검은 눈동자 속에 번들거리는 것을 응시했다. 안광. 푸른 기가 돌 정도로 새카만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질거렸다. 입술이 흠뻑 젖을 정도로 물고 빨던 사내가 손아귀의 가슴을 터트릴 듯 세게 쥐었다.

 “읏···.”

 은환이 아픔에 신음을 내뱉었다. 깊숙이 혀를 얽던 윤협이 입술을 뗀 채 은환을 바라보았다. 발갛게 달아올라 쌕쌕대는 계집을 보고 있으려니 이대로 치마를 걷어붙이고 싶었다. 능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손이 움직였다. 치맛자락을 걷어붙인 손이 투실투실한 허벅지를 더듬었다. 농염하기 이를 데 없는 선이 매끈한 엉덩이의 굴곡과 이어져 아찔했다. 혀로 핥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게걸스럽게 회음부로 이어지는 굴곡을 핥은 뒤 구멍 속으로 혀끝을 집어넣고 싶었다.

 “···폐하!”

 은환이 단말마처럼 비명을 질렀다. 윤협이 시선을 들었다. 교각을 건널 때만 해도 선녀처럼 곱고 아리땁던 여자가 어린애처럼 일그러져 울고 있었다. 윤협은 그 눈물을 물끄러미 보다가 치맛자락을 거세게 들추었다. 아예 속곳을 끌어 내려 음부가 보일 정도로.

 “흑, 싫, 싫어!”

 벌새처럼 날아든 손이 뺨을 후렸다. 윤협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음부 안으로 미끄러지던 손이 멈추었다. 뺨을 맞은 윤협이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채 울고 있던 여자가 호흡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물러나 재빨리 머리를 바닥에 박으려 했다. 윤협은 물러나려는 여자의 손을 움켜잡은 뒤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폐하!”

 젖은 울음이 누각을 울렸다. 은환은 쌕쌕대며 바르작거렸다. 그는 아내의 등을 쓸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적잖이 놀랐는지 심각하게 떨고 있었다.

 “폐하. 폐하.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빈첩이···.”

 “괜찮다. 귀인.”

 “하오나, 하오나···.”

 “쉬이. 많이 놀랐구나. 우리 귀인.”

 “폐하. 흑, 흐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가슴팍에 안겨 울던 여자가 거푸 읍소했다. 윤협은 자신이 반쯤 돌았던 이유를 되뇌다가 진정되지 않는 여자와 시선을 맞췄다.

 “아니야. 귀인. 짐이 잘못한 것이다. 짐이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귀인을 희롱했으니 짐의 잘못이란다.”

 윤협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은환의 턱을 쥐었다. 은환이 파드득 떨며 울음을 삼켰다. 윤협은 궁인들을 물린 뒤 그녀를 허벅지에 올렸다. 혀를 섞으면서 발기한 상태라 은환의 회음부에 두툼한 성기가 닿았다. 은환은 훌쩍이며 그의 허벅지에 앉아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미안하다.”

 그가 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은환은 기진맥진하여 그를 들여다보았다. 윤협은 영견을 꺼내 은환의 볼을 닦으며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를 다시 빗기 위해 소채와 화잠을 하나씩 뽑았다. 이윽고 은환은 다시 긴 머리로 돌아와 있었다.

 은환은 간신히 진정한 채 궁인을 통해 건네받은 경대 속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황제를 위해 성심껏 했던 치장이 무색하게도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눈이며 입술이며 흐트러지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환아야.”

 은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영견으로 입술과 눈가를 닦은 뒤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왔다. 윤협이 그녀를 부드럽게 불렀다. 은환은 멍이 든 입술을 말아 물지 못해 그저 시선을 바닥에 깔았다.

 “그만, 그만 돌아가고 싶습니다.”

 용기 내 간청했다.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먹고 싶지 않았다. 차려진 식사만 보아도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연고는 바르고 돌아가.”

 윤협이 어둑하게 읊조렸다. 은환은 시선을 돌려 연고가 든 예반을 들고 빠르게 걸어오는 궁인들을 응시했다. 황제 또한 중반을 들지 않을 예정이었는지 다시 궁인들이 들어와 중반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 속에서 꿈틀거리던 안광이 조금도 마르지 않은 채 습윤하게 번들거렸다.

 ***

 황실의 가을 사냥이 열리는 사냥터는 하남으로 황도인 양천과 그리 멀지 않은 성이었다. 야트막한 산과 구릉으로 이루어진 성은 황실의 사냥축제가 치러지는 열흘 동안 축제 분위기로 한껏 들뜨고 분주하다고 했다.

 태후는 물론 태비와 그녀의 어린 황자, 황녀들. 사사된 길 귀비의 쌍둥이 황자들과 겨울이 지나 책봉될 유승상의 여식까지. 황실의 종친들과 함께 고관대작들이 겸하여 치러지는 행사는 황실의 가을 연례행사로써 후궁이 된 은환이 참여하는 황실의 첫 행사였다.

 그러나 춘절같이 여인들을 중심으로 치러지는 명절도 아니고 가을 사냥은 철저히 사내들의 축으로 치러지는 행사였다. 하여 은환이 할 일은 또한 별로 없었다. 기실 어린 후궁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있을 리가···. 그럼에도 은환은 황제와 함께 하남으로 떠날 일이 끔찍했다. 겨울이 오는 게 싫었고 겨울이 지나는 것 또한 싫었다.

 그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은환이 할 수 있는 일은 태후가 준 병을 만지작거리는 일밖에 없었다. 매끈하게 옻칠 된 검은 병. 경대 아래 서랍장에 넣어둔 뒤 매일같이 더듬어보고 있는 낙태약. 아기를 죽이는 약···. 누각에서 일이 그렇게 흘러가 버린 후 은환은 더욱 마음을 굳혔다. 사냥터로 떠나기 전 ‘귀인’에서 ‘비’로 진봉되었건만 결심이 흐무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사냥터로 떠나기 이틀 전. 은환은 끼니마다 올라오는 음식들에 약을 섞었다. 사냥을 앞두어서일까. 황제는 정무를 보느라 같이 식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어쩌면 누각에서의 일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

 은환은 여관들 몰래 죽과 탕에 약을 섞은 뒤 조금씩 삼켰다. 되도록 아기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적어도 저분질을 하는 동안에는···. 고통을 느낄 만큼 영글지는 않았으리라고 믿었다. 그리고는 신물과 함께 뒤집히는 속을 부여잡으며 숨죽여 흐느꼈다.

 ‘어미는 지옥에 갈 테니 우리 아가는 천국에 가야 해. 성불하여 어미를 떠난다면 어미처럼 나약하고 부끄러운 계집이 아닌, 자애롭고 따뜻한 어미의 자궁으로 가야 한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죽죽 흘러내린 눈물이 입술에 괴였다.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는 주제에 자식의 성불을 바라는 미친년이 여기 있었다. 스스로 가증스럽고 부끄러워 숨을 쉴 수 없었다. 배 속에 영글지도 않은 어린 자식을 죽이는 계집이 자식의 성불을 바라다니.

 부처도 구제하지 못할 악귀가 그녀였다. 약병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하루에 세 번 사흘···. 약을 삼킨 지 이틀째 점심이었다. 은환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게워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물었다. 약병을 서랍장에 밀어 넣은 다음 자리에 누워 부연 천장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데웠다. 한기가 느껴졌으나 금금을 감지 않았다. 자식을 죽이고도 삶을 바라는 자신이 끔찍했다. 멍이 스민 입술을 한껏 씹으며 베갯잇을 물었다. 눈을 감았다. 진이 빠지도록 흐느끼던 은환은 석반에 나온 뜨거운 탕병 속에 다시 약을 넣었다.

 ‘미친년이 따로 없구나. 조은환.’

 탕병 속에 약을 흘리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약을 삼켰다. 얇게 저민 고깃덩이에 채소를 이로 부수며 자궁 속 아기를 녹이는 약의 맛을 더듬었다.

 쓰디쓴 쑥 향기. 혹은 짙은 약초를 씹는 것처럼 쌉싸름한 향기가 혀끝을 저리게 했다. 은환은 서둘러 고깃덩이를 씹어 약의 향기를 지워낸 뒤 상을 물렸다. 여관의 시선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닿았다.

 은환은 그녀를 힐긋 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아이의 아비는 자정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그가 축 늘어진 은환의 몸을 깊이 안았다. 은환은 눈을 감고 사내의 숨결을 느꼈다. 사내의 비강을 드나드는 고른 숨이 달고 청결했다. 언제부턴가 그에게서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한갓진 시간 종종 태우던 담뱃잎 또한 침실에 찾아볼 수 없었다. 은환의 앞에서 부러 담배를 태우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가슴팍에 안긴 채 그에게 아양을 피우던 때 종종 담배 냄새에 미간을 일그러트리곤 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애연가였다. 은환이 미간을 좁혀도 제가 내킬 때면 종종 담배를 태웠다.

 그런 사내에게서 언젠가부터 담배 냄새가 나지 않은 것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은환에게 기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이 귀 뒤에 꽂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더는 잠든 척하기 힘들었다. 은환은 황제를 응시했다. 길고 우미한 손이 그녀의 배를 만졌다. 아침이 밝으면 핏기가 비칠지도 몰랐다. 오늘은 비치지 않았지만 내일은 이부자리에 벌건 피가 보일 것이다.

 입술이 떨렸다. 검은 눈동자가 스산했다. ‘폐하’ 하고 그를 부르고 싶었다. 부른 다음 아기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영글지도 못한 당신의 아기가 어미의 배 속에서 난도질당하고 있다고.

 그리 진심을 게워낸 뒤 아기를 살려달라 말하고 싶었다. 맺힌 줄 몰랐던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황제는 그것을 보았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은환은 소리 없이 훌쩍이다가 아랫배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마침내 황제의 입술이 그녀를 찾아들었다. 말캉한 살이 그녀를 덮쳤다. 익숙한 따뜻함이었다. 그런데도 기이하게 섧고 두려웠다. 두툼한 혀가 입 안을 휘저었다. 혀와 혀가 얽히며 나는 소음이 야릇했다.

 뜨거운 숨 덩어리가 부딪힐 때마다 음부가 젖는 것 같았다. 마침내 질척한 입맞춤이 끝났다. 은환은 할딱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잔뜩 고조되어 발그레해진 은환과 달리 정제된 얼굴이었다. 갈무리가 성급했음에도 음욕 하나 비치지 않았다.

 “폐하.”

 “여태 잠들지 않고 무엇했어.”

 퍽 다정한 질문이었으나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서늘했기 때문이다. 은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만 자라.”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내리누르고 있던 무게가 사라지자 한기가 돋았다. 은환은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서 잠들지 않으실 건가요?”

 어렵게 입술이 떨어졌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지 않았다.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뒤를 돌았다. 어디로 간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은환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

 하남으로 떠나는 아침이었다. 핏기가 비치지 않았다. 이틀째 아침부터 핏기가 비쳐야 한다고 했는데 아랫배만 조금 알알할 뿐 핏물이 비치는 일은 없었다. 속곳 또한 깨끗했다. 대신 희멀건 죽이 속 안에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은환을 보는 황제의 시선이 그늘졌다. 눈가가 엷게 떨렸다. 은환은 습관적으로 아랫배를 감싼 뒤 집요하도록 자신을 보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속이 안 좋나?”

 “···아뇨.”

 커다란 손이 은환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열이 미지근했다. 그는 붉게 칠한 은환의 입술을 톡톡 친 뒤 그녀의 엉덩이를 슬그머니 움켜잡았다. 은환은 별달리 저항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엉덩이를 쥔 손을 푼 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윤협은 아내의 턱을 들어 올려 입술을 맞췄다. 혀를 집어넣어 타액을 훔쳤다.

 달콤한 과실 향이 맡아져야 할 입 안에서 약 맛이 느껴졌다. 은환이 세게 도리질하며 그를 밀어냈다. 윤협은 낯을 붉힌 채 파르르 떨고 있는 여자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은환은 열정적으로 혀를 얽던 좀 전과 달리 시큰둥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남자를 힐긋거렸다. 위장 안에서 꿈틀대던 독이 자궁으로 번지는 것 같았다. 숨이 가빴다. 배 속의 아기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잠겼다. 핏기가 비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은환은 이게 제 기분 탓인지 아니면 약의 효능 때문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약을 삼킬 때마다 두려움이 들었고 헤어나올 수 없는 괴로움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겁을 집어먹은 은환이 걸음을 떼지 못한 채 멀어지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조복을 입는 대신 사냥복을 입은 채 사냥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황제가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은환은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가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말에 오르려 하던 황제가 그녀에게 돌아왔다. 은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가온 황제가 그녀의 얼굴을 잡고 볼을 감쌌다.

 “얼굴이 해쓱하군. 어디 아픈 곳이 있나?”

 “배가 조금···.”

 “배가 조금?”

 “아, 아픈 것 같습니다.”

 “그래?”

 “···예.”

 “그럴 리가 없는데.”

 시선으로 바닥을 더듬고 있던 은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길게 쳐다보던 황제가 입술 끝을 미끄러트렸다. 은환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은환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분 탓일 거야.”

 “···.”

 “짐과의 순행은 처음이니까. 그러나 가비는 앞으로도 짐과 순행을 자주 다닐 테니 긴장할 것 없다.”

 은환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황제는 매끄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황궁에 남아있겠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여행 도중 피를 흘리거나 하남의 별궁에서 하혈하면 곤란하니 황궁에 남으려 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저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 뿐이었다. 마차 앞에서 황제가 다시 은환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임신한 아내를 달래듯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그리하여 은환은 하남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하남까지는 반나절이 걸린다고 했다.

 “마마. 속이 많이 불편하십니까? 하남에서 진찰을 보실 수 있도록 시의를 준비해두라 할까요?”

 “아니. 아니다.”

 은환이 고개를 저었다. 소 상궁이 어두운 얼굴로 물러났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곧이어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환은 소매 속에 감춰둔 약병을 꺼냈다. 벌써 반 이상을 비웠다. 남은 양이라곤 정말 조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핏기가 비치지 않고 있었다. 약을 음용하는 방법이 잘못된 걸까. 아랫배가 조금 저릿한 것 같긴 하지만 별 이상은 없었다. 은환은 복잡한 마음으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슴푸레한 땅거미가 하늘을 뒤덮는 저녁이었다. 호수에 낀 물안개처럼 짙은 황혼이 스치는 하남의 하늘은 유독 높고 광활했다. 성문을 통과한 마차가 도독 일가와 그 식솔들이 머무는 성터로 이동했다.

 소 상궁의 부축을 받고 마차에서 내린 은환은 흡사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처럼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도독을 응시했다. 황제가 말에서 내리자 도독과 그 일가가 무릎을 꿇은 뒤 절했다. 도독 내외의 뒤로 늘어선 식솔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어나라.”

 납작 엎드린 군중이 단조로운 명령에 굽혔던 무릎을 폈다. 은환은 시선을 내리깐 뒤 황제의 옆으로 움직이지 않고 태후의 뒤편으로 가 두 손을 가지런히 했다. 으레 후궁들이라면 순행을 위하여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장했겠지만, 은환은 아니었다. 시야에 걸리는 것만으로 태후의 노여움을 사는 그녀였다. 그리하여 태후의 옆이라면 숨도 버거웠다.

 청람 빛의 오에 금으로 도금한 봉황 비녀와 청옥 뒤꽂이들을 아름드리 꽂은 태후는 같은 마차를 타고 왔는지 유가란과 나란히 있었다. 문득 유가란이 은환을 향해 힐긋 눈길을 돌렸다. 은환은 가란과 눈을 마주했다.

 여자는 연교처럼 환한 금황색 오에 치자 빛 월화군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틀어 올리지 않았으나 산호와 진주로 치장해 아주 맵시 있고 아름다웠다. 은환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가란을 마주 보다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은환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자 가란 또한 고개를 돌렸다.

 가지런히 모은 손끝에 땀이 축축했다. 태후가 친모라도 되는 양 팔짱을 낀 가란이 그녀의 앞에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애정 어린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태후의 마차보다 늦게 출발한 태비와 황녀들의 마차가 성터에 도착했다.

 은환은 시선을 들어 마차에서 느릿하게 내리는 태비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생모가 마차에서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도독 하용문과 인사만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태비의 금련이 바닥을 밟았다. 하화荷花의 잎처럼 작고 우아한 발이었다.

 하용문이 그녀의 앞으로 나아갔다. 중년답지 않은 나붓하고 가느다란 몸은 시집간 딸을 여럿 둔 여인 같지 않았다. 하용문이 다소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 예를 취했다. 태비는 하용문을 향해 엷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를 피하고 싶은 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태비가 하남 출신이라고 하나 안면을 읽힐 접점은 없었을 텐데 시선을 피하는 둘을 보노라면 마치 낯이 익은 사람들 같았다. 하용문을 지나쳐 간 태비가 태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인사 같지 않은 인사였다. 정말로 고개만 까닥했으니. 그런데도 좌중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황제의 생모이니 그럴 테지. 결국, 권위란 그녀가 낳은 아들에게서 오는 것이다.

 태후는 예상대로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 같잖은 인사 따위 도리어 조롱이라 여기는 듯했다. 태비는 아무래도 좋은지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황녀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려 하던 태비가 뒤를 돌았다. 그녀의 시선이 태후와 모녀처럼 나란한 유가란을 훑었다. 이내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태후의 낯이 곧장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유가란 또한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마지막으로 태비는 태후의 뒤에 선 은환을 응시하더니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어린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나아가 인사를 할까 어찌할까 고민을 하던 은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태비와 함께 온 황녀 중 하나를 모시는 태감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황녀의 태감이 은환에게로 바쁘게 다가왔다.

 “칠 황녀 마마께서 가비 마마를 뵙고자 하십니다.”

 은환이 칠 황녀라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소녀였다. 태비와 함께 성안으로 사라진 황녀들과 달리 아직 앳된 기가 풋풋했으나 기혼인 듯 머리를 한 아름 틀어 올렸다. 은환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후의 낯빛이 눈에 띄게 굳기 시작했다.

 ***

 “황녀 마마를 뵈옵니다.”

 은환이 고개를 숙였다. 칠 황녀의 부름에 그녀의 앞에 선 은환은 고개를 조아린 채 황제를 생각했다. 칠 황녀의 곁으로 가는 자신을 붙잡을 줄 알았던 황제는 태비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본 척 만 척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곧장 칠 황녀를 마주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황제의 누이를 뵈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린 완친왕과는 어쨌든 다르리라. 칠 황녀의 나이가 어찌 되는지 알 수 없고 집안의 서열로만 따지자면 황녀는 황제의 여동생이므로 은환의 시누이였으나 공주는 선황제의 여식이고 은환은 후궁이었다.

 “고개를 드세요. 가비 마마.”

 황녀가 속삭였다. 은환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황녀를 마주했다. 화사한 자태였다. 태비와 오싹할 정도로 닮았고 그리 빼닮은 만큼 처연한 아름다움이었다. 은환도 태비를 닮았다는 평을 듣긴 했으나 눈앞의 황녀만큼은 아니다. 밀랍처럼 하얀. 연약하고 청초한 얼굴과 대조되는 새카만 머리. 도홧빛이 도는 볼과 눈꼬리. 높은 콧대와 고집이 느껴지는 입술. 그 창백한 아름다움과 대조되는 숙람색의 하늘거리는 오와 걸음을 걸을 때마다 흐트러지는 백첩군. 늘어트린 피백이 하늘의 선녀 같은 모습이었다. 찬찬히 그녀를 살폈다.

 작은 얼굴에 가득 찬 오밀조밀한 선이 모두 어리고 사랑스러웠던 시절의 화설란이었다. 딸을 보는 선제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 갔다. 족족 태어나는 자식을 정실의 적에 입적시키던 황제였다.

 태자의 생모이긴 해도 일개 후궁에 지나지 않았던 태비가 그를 곱게 볼 리 만무했다. 내외 사이가 얼마나 차고 끔찍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은환 또한···. 은환 또한 용서할 수 없으리라. 강박적으로 아랫배를 움켜잡은 뒤 시선을 떨어트렸다. 넋이 나간 채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을 때였다. 살풋 터트리는 미소에 넋이 돌아왔다.

 “오라버니 때문에 고생이 많죠?”

 황녀가 사분사분하게 물었다. 태비와 닮은 건 외양만이 아닌 것처럼. 태비가 앳되던 시절 이리 꼭 아름다우며 차분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때때로 정신을 놓아버려 춘절이나 가을 사냥 같은 행사가 아니면 자녕궁에 칩거하여 코빼기도 안 보인다지만···. 어린 시절 화 태비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총명하며 재치 있는 여인이라고 했다.

 문득 공주에 대해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나자마자 태후의 적으로 입양된 언니들과 달리 칠 황녀 화양 공주는 태비의 품에서 자란 공주라고 했다. 그리하여 언니들과 달리 적嫡 공주가 아니라 황제의 서녀에 불과했으나 선황제의 독보적인 사랑을 받았기에 다른 공주들보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자랐다고 했다.

 어찌하여 사랑을 많이 받았는지. 그 사랑이 단순한 총애가 아닌 ‘사랑’, 아버지가 딸에게 내리는 ‘사랑’인 것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오라버니가 아버지를 닮고 가비 마마가 어머니를 닮았으니 당연하죠.”

 황녀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 없이 흩어지는 미소가 아니었다. 은환은 시선을 들어 오도카니 그녀를 보았다. 은환과 마찬가지로 틀어 올린 머리와 깊이 팬 가슴골이 새색시 같았다. 공주 또한 막 새댁이 된 젊은 여인이었다. 은환보다 어리고 앳돼 보였지만 황녀이니 혼례는 은환보다 빨리 올렸으리라. 수방에 있었을 때 칠 황녀의 혼례복을 만들기 위해 분주했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래도 아기는 살려요.”

 “네?”

 “모르리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빈첩은 황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황궁에는 비밀이 없어요. 가비 마마.”

 눈가에 미끄러졌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살얼음 낀 얼굴도 아니었건만 은환은 눈앞의 황녀가 두려워졌다. 호흡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파드득 떨렸다. 황녀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 자신을 과신하지 마세요.”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무릎이 무너질 것 같았다. 흔들리는 눈앞에 혈관과 혈관이 잘린 채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꼭 그물에 낚여 펄떡거리는 생선과 비슷했다. 식은땀이 맺혔다. 핏기없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은환을 본 황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임부를 괜히 건드린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낭패스러운 감정이 흩어지는 얼굴에 은환이 시선을 돌렸다.

 “낙태가 가능했으면··· 황제를 아비로 둔 아이를 지우는 일이 가능했다면 말이에요.”

 황녀가 건넬 말을 골랐다. 은환은 비스듬히 돌렸던 시선을 바로 한 뒤 그녀의 응시했다. 미소가 사라진 황녀의 얼굴은 황실에서 나고 자란 이답게 오연했다. 제 삶을 되돌아보듯. 혹은 제 존재를 사유하는 듯한 황녀의 눈길이 퍽퍽했다. 귀비 시절, 태비가 낙태할 수 있었다면. 그녀의 남편이었던 선제가 그것을 허용했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없었으리라 말하는 눈이었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겠어요?”

 황녀가 다시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짙고 쓸쓸했다. 그제야 황제가 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궁 밖으로 시집가 모친의 부름이 있을 때나 종종 입궁한다는 황녀였다. 한데 그런 이까지 그녀의 회임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시도하는 것 또한···. 차라리 바람일 것이다. 아이의 아비가 그 어느 것 또한 모르고 있다고 믿는 것은. 부질없는 바람일 것이다.

 “저는, 저는···.”

 ‘빈첩’이 아닌 ‘저’라고 내뱉은 여자를 화양은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가 화심전에 계집을 들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 계집이 하룻밤 계집이며 심지어 태후가 붙여준 시침녀란 사실을 들었던 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하물며 그 계집이 하룻밤이 아닌 그 이후의 모든 밤을 황제와 나누게 되었다는 전갈에 얼마나 끔찍했는지.

 결국은 오라비 또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화양은 눈을 깜빡였다. 마치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비를 포함해 태후와 궁인들은 그녀만큼이나 화 태비를 닮은 사람은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동의하지 않았다.

 화설란의 유순함. 화설란의 미련함, 화설란이 황제에게 간직했던 사랑과 증오. 증오마저 극진했던 그 여자의 사랑. 외로움과 비참함···.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은 그녀의 딸이 아닌 그녀의 아들이 선택한 여자였다.

 그리하여 화양은 어머니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의 어머니 말이다. 그래도 그 시절 어머니는 첫 아이를 볼 생각에 아버지와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차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기껍지 않았다고 했었지만. 처음 회임 사실을 태의에게 들었을 땐 어머니를 번쩍 들어 빙글 돌렸다고 했었다.

 어머니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를 들일 것을 알았음에도 잉태한 아이를 극진히 사랑하여 해산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때는 그런 시절을 보냈음에도 그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화양은 잘 알고 있었다. 화양이 나고 자라는 동안 본 것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강박과 집착이었다. 자신을 더 연모하지 않는 여자에 대한 노여움. 애착과 애정. 보답받고자 하는 마음···. 엇갈린 사랑이 참으로 지독했다. 그러니 오라비가 어떤 사랑을 할지는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 여자에게 아기는 살리라 했다. 어머니의 분부였다.

 “당신 손으로 아기를 죽이려 하지 마요.”

 곧 무너질 듯 하얗게 굳어있던 여자의 눈이 발갛게 무르익기 시작했다. 화양은 그만 걸음을 돌리며 속삭였다.

 “···내 어머니는 그것을 가장 후회했었어요.”

 눈물이 하얀 볼을 주르륵 타고 흘렀다. 그만 시선까지 거두고 몸을 완전히 틀려 하는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어둑한 시선이었다. 화양은 입술을 말아 문 채 날카롭게 번득이는 안광을 마주했다. 음울함을 가린 짙은 노여움. 화양은 울음을 터트린 여자를 힐긋거렸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를 지나쳐 제 후궁에게로 갔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손목이 잡혔다. 그리고 질질 끌려갔다. 화양은 고개를 들어 둘을 바라보았다. 키가 작달막하던 시절 늘 아버지에게 질질 끌려 화심전으로 돌아가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한번 어머니를 화심전에 가둬 두면 어머니는 몇 달이고 화심전 밖을 나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그녀 이후 낳은 자식들을 아버지에게 뺏기지 않고 양육한다 해도 주 양육자는 아버지가 붙인 유모였다. 화양을 포함한 형제와 자매들은 나흘에 한 번 어머니를 보았고 그마저도 아버지가 내킬 때만 허락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비위를 상하게 하거나 그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을 때면 그조차도 없었다.

 아주 무작스럽게 강간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대체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강간하여 권위를 내세우려 했다. 권위를 내세워 인정받는다는 게. 그런 식으로 어머니가 순종하는 일이 그녀의 사랑을 받는 일이 아닌데. 그럼에도 아버지는···.

 “유모.”

 “예. 마마.”

 계단을 올라 돌아온 화양을 향해 유모가 염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화양은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좇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라버니도 그럴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자기를 연모하지 않는 여자에게 연모를 바랄 때 그녀를 강간할까?”

 “마마.”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식들이 불행한 줄도 모르겠지?”

 “마마. 그런 불경한···!”

 “자신을 더 연모하지 않는 아내를 강간하고···. 그렇게 태어난 자식들이 그녀에게 전부나 다름없는데 족족 앗아서 증오하는 다른 여자에게 주고···. 보지도 못하게 하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그러다 그렇게 바라고 사랑하던 첫 아이가 살해당하였는데도 개의치 않고. 하여 그 아이의 관 앞에서 다시 임신하게 하고.”

 “마마. 제발···.”

 유모가 울음을 터트렸다. 화양은 울지 않았다. 그저 그런 것도 사랑이라서. 그런 짓을 해도 사랑하는 남자라서. 사랑을 잃고 미쳐버린 어머니가 가여울 따름이었다.

 “오라버니도 그렇게 될까?”

 화양이 유모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모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오싹함을 느낀 표정으로 울음을 그칠 뿐이었다.

 ***

 “아파요. 폐하! 아···.”

 잡힌 손목이 떨어져 나갈 듯 아렸다. 그러나 손목을 붙잡은 채 질질 끌고 가는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은환이 울음을 터트렸다.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은환은 헐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격앙된 얼굴로 씨근거리리라 생각했던 황제는 의외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은환은 두려움에 움츠러들었다. 황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궁 밖의 황녀 또한 알고 있다면 황궁 내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주 미천한 아랫것들까지. 모두 알고 있겠지.

 이쯤 되니 홀로 비밀이라며 입 벙긋하지 않고 있던 그녀가 우스웠다. 궁인들에게 멍청하고 한심하게 비쳤을 것이다.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은환은 눈물이 차올라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나 한낱 궁인들에게 우습게 비치는 일보다 중요한 건 이 남자였다.

 왜 말하지 않은 거지···?

 “···폐하.”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눈물이 고인 입술 사이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은환이 놀라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곧 침실로 들어갔다.

 내팽개치듯 은환을 침상에 팽개칠 것 같던 황제는 그녀를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집어먹었던 겁이 옅어지고 있었다. 은환은 배를 가린 채 다물었던 입술을 뗐다. 황제의 시선이 그녀가 가린 배에 닿았다.

 ‘알고 있다. 틀림없이···. 전부. 전부 알고 있어. 그럼 약까지 손을 쓴 걸까?’

 호흡이 가빠졌다. 은환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침잠한 사내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은환은 입술을 벌린 채 그의 기다란 손이 얼굴에 닿는 것을 느꼈다. 황제는 그녀의 젖은 볼을 조금씩 닦더니 눈물이 타고 흘러내린 목을 더듬었다.

 “폐하. 읏!”

 목을 움켜잡혔다. 커다란 손에 조악한 힘이 실렸다. 은환은 이겨내지 못하고 곧장 침대로 쓰러졌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삼킬 듯 쏟아졌다. 일시에 숨이 막혔다가 다시 트였다. 그러나 목에서 손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언제든 조일 수 있고 꺾을 수 있다는 것처럼 황제가 은환을 보고 있었다. 아기가 걱정되었다. 죽여 없애려 한 주제에 배 속에서 아기가 받을 충격이 염려됐다. 아비는 어미의 목을 조이고 어미는 자신을 죽이려 약을 처먹는 부모를 둔 핏덩이가 가여웠다.

 “흐윽, 흐윽···.”

 “어찌 그런 얼굴이야.”

 은환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손이 목을 감싸고 있는 것임에도 그랬다. 가쁜 숨에 가슴이 바쁘게 오르내렸다. 젖은 입술에 숨이 닿았다. 그는 목을 쥔 손을 떼고 대신 은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망막에 찬 얼굴이 조악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했다. 한순간도 다정하지 않은 적 없는 사내라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대했을지. 약에 손을 댔다면 분명 그녀가 태후에게 하달받은 바를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가 그것을 음용하여 아이를 죽이고자 했단 것 또한···.

 “폐하.”

 “어찌 그런 얼굴이냐고 물었어.”

 사나웠다. 그러나 사납다는 감상보다 망가졌다는 감상이 우선이라···. 마른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은환이 그를 다치게 했다. 그를 망가지게 했고 그를 흐트러지게 했다.

 “저는 아이만을 보고 살 수 없어요.”

 망설인 끝에 바닥이 드러났다. 그녀를 올라탄 남자의 얼굴이 더욱 험하게 일그러졌다.

 “저는 폐하의 아이만을 보고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어요. 폐하···.”

 은환이 온몸으로 흐느꼈다. 그녀라고 아이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갖고 있단 것을 안 순간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미워한 적이 없었다. 어찌하여 그녀의 태에 들어섰을까 괴로워하다가도 분명 작고 어여쁠 것일 테니까. 닳을 정도로 보고 또 보고 싶은데···.

 “폐하···.”

 어머니가 되는 게 두렵고 비참했다. 사무치게···. 너무 비참해서 넌더리 치고 싶은데 그리할 힘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를 곱씹었다. 완 귀인. 화 비. 화 귀비. 소화 황귀비. 의숙 황태비. 그리고 화설란···. 황제의 후궁이 아니라 황제의 여자로 살았기에 미칠 수밖에 없던 여자. 차라리 황제가 그녀를 후궁으로 아꼈다면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눈물이 볼을 하염없이 적셨다. 칠 황녀가 전한 말이 떠올랐다. 화 태비는 아이를 죽이려 한 일을 가장 후회한다고 했다. 궁에서 그리 긴 생을 보냈음에도 뼈에 사무치게 후회하는 일은 그것이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약을 건네받았을 때부터 제정신으로 사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미친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아요. 폐하. 미친 어미로 사는 것도 싫어요.”

 은환은 설란보다 비겁한 여자였다. 황제를 사랑하는 일보다 황제를 사랑하는 여자로 살며 그의 곁에서 미쳐갈 일이 두려웠다. 최소한 어리던 시절의 화설란은 용기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를 더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그리하여 그녀를 향한 사랑이, 황제의 사랑이 식는다고 해도 그가 안긴 아이들로 인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자가 아닌 어미로 살아가는 일은 여자로 살아가는 일보다 쉬우니까. 황제가 아닌 황제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황제가 얼마나 많은 후궁을 들이고 얼마나 많은 여자를 안든. 그가 그녀가 아닌 태에서 자식을 보고 그 자식을 아낀다 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그가 아니라 해도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많으니까.

 은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어쩌면 아주 잠시는 그렇게 마음먹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내의 품이 가슴이 저릴 만큼 다정해서. 예정된 불행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면서도···.

 “폐하···.”

 “···닥쳐라.”

 한 음절 한 음절 으스러트리듯 씹어 뇌까리는 낯이 형형했다. 왈칵 서러움이 치밀어 그를 노려보았다. 잡힌 손목이 알알했다. 은환은 한참 만에 그를 쏘아보며 읊조렸다.

 “누구도 저를 그리 비참하게 만들 순 없어요.”

 젖어 흐물흐물한 읊조림이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황제는 알아들은 것처럼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은환은 지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를 진창에 처박을 수 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어미처럼 살게 할 수 없었다. 그게 황제라 해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내라고 해도···.

 “저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절대 비참해지지 않을 거··· 아흑!”

 은환이 높은 비음을 터트리며 치맛자락을 걷고 음부로 들어온 손을 피해 골반을 비틀었다. 그러나 붙은 허벅지를 가르고 들어오는 손은 피할 수 없었다. 은환이 놀라 헐떡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누가 너더러 비참해질 거라고 했나.”

 “폐하. 으응···.”

 “누가 너를 미친 계집으로 만들 거라고 했어!”

 낮은 음성이 선득하게 울렸다. 발끝부터 타고 오른 열이 천천히 그녀를 데우기 시작했다. 격앙되어 몸부림을 치느라 나는 열인지 음부 안으로 기어 들어온 손가락이 난잡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손가락이 질구에 닿았을 때 소스라쳐 그의 뺨을 후렸다. 황제는 돌아간 얼굴을 바로 했다. 은환이 덜덜 떨며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폐하. 흑···.”

 손톱에 턱 끝이 긁혔는지 핏방울이 맺혔다. 은환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씨근거렸다. 용안에 손을 올린 게 대체 몇 번째인지. 은환은 제 불경함을 되돌아보며 입술을 열었다.

 “송구하옵니··· 아!”

 발목이 잡혔다. 그대로 황제의 밑으로 끌려온 은환은 덥석 다리가 벌어졌다. 그의 손이 빠르게 가슴 여밈을 끌어 내렸다. 하늘하늘한 유색의 능라 비단이 억센 손에 반쯤 찢기듯 했다. 은환은 놀라 그의 팔을 움켜잡으며 도리질했다.

 “앙!”

 기어코 구멍에 손가락이 들어왔다. 움푹 쑤시고 들어온 손가락에 은환이 교성을 터트렸다. 황제의 성마른 낯에 음욕이 비쳤다. 은환은 입술을 깨물며 도리질했다.

 “폐하, 응. 읏······ 안. 안 돼요. 안 돼요. 폐하. 흑······.”

 황제가 입술 끝을 미끄러트렸다. 은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손을 걷어내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앞섶이 부풀었다. 은환은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축축해지는 질구를 느꼈다.

 “애를 배고도 구멍이 이리 젖는데···.”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배 속에 아기가 있다며 그를 밀어내려 했던 은환이 절망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환의 얼굴에 윤협이 낮게 웃으며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어째서 그런 얼굴이냐.”

 “흑···.”

 “내 아이를 죽이려 하지 않았나.”

 선득한 물음이었다. 설마 그럴까 싶었다. 애가 있다는 걸 잊고 그녀를 범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성욕이든 노여움이든 미쳐서 아이가 있다는 걸 잊고 그녀를 범하려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한데 그따위 얼굴은 뭐야.”

 황제가 은환의 볼을 툭 건드렸다. 은환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를 보는 윤협의 얼굴이 당장 찢어질 것처럼 고통으로 가득 찼다. 내내 이가 갈렸다. 기어코 그 몰래 아이를 죽이려 했던 여자였다. 낙태약을 약초 달인 물로 바꾼 뒤 은환을 지켜보았다.

 은환은 약이 바뀐 줄 모른 채 끼니마다 약을 탄 뒤 먹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매 끼니를 그렇게 삼킨다는 보고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은환이 알까? 배 속에 있는 애를 죽이기 위해 아이의 아비 몰래 약을 삼켰던 주제에 아이에게 해가 될까 교접을 피하는 꼴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그럼에도 사랑스러워서···. 이 여자를 완전히 그어 잘라낼 수 없는 마음이 진저리났다.

 “폐하···.”

 “네 손으로 내 자식을 죽이는 건 괜찮고 내 손으로 내 자식의 안위를 해치려 하는 것은 안 된다?”

 입꼬리를 당기며 물었다. 은환은 완전히 얼어붙은 채였다. 그는 습윤한 구멍 속으로 길쭉한 방망이 같은 성기를 밀어 넣었다. 부피감에 은환이 눌린 신음을 흘렸다. 윤협이 풍만한 가슴을 움켜잡았다. 바짝 선 젖꼭지를 긁으며 출납을 시작했다.

 “아니면 내 앞에서 같잖은 어미 노릇이라도 하려고? 하여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은환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윤협이 눈썹을 좁혔다. 애액으로 미끄러운 구멍 안은 여전히 조붓하며 따뜻했다. 노여움으로 조잡한 머릿속이 쾌락으로 더럽혀졌다. 미칠 것 같았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왜 이 여자에게만 발정할까. 왜 노여운 순간에도 이 여자에게 좆질을 해대고 싶나.

 그는 성마른 얼굴로 욕을 뇌까렸다. 애를 밴 여자를 범하는 일이 달콤했다. 미친 것 같은데 그랬다. 제 새끼를 밴 여자를 범한다는 것이 그를 더 흥분하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부황이 이랬을까. 배부른 어미를 범하며 그 울부짖음에 달콤해 했나. 제 자식이 자라고 있는 자궁까지 쑤셔 박으려 달려들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나. 윤협은 음모가 옅게 자란 대음순을 넓게 벌린 뒤 가뭇해진 소음순과 제 거근을 물고 있는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희멀건 거품이 비어져 나온 구멍이 작게 경련했다.

 그는 젖꼭지처럼 불거진 음핵을 살살 쓰다듬은 뒤 꼬집었다. 은환이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렸다. 그는 방망이 같은 굵은 성기를 뽑아낸 뒤 귀두로 발딱 일어난 음핵을 누르며 소음순 위로 미끄러졌다.

 “아앙···.”

 은환이 골반을 뒤틀며 교성을 흘렸다. 윤협은 천천히 허리를 돌리며 가슴을 쥐었다. 박처럼 부푼 가슴이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았다.

 “폐하. 제발···.”

 고양이처럼 비음을 터트리던 은환이 할딱거리며 속삭였다. 자세를 낮춘 뒤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은환은 달았다. 판판한 가슴에 뭉개지는 젖가슴도, 그의 자식을 수태하고 짙어진 젖무덤의 색깔도, 낭창한 허리와 조붓한 안까지. 모두 그를 돌아버리게 했다. 달고 해로운 여자였다. 알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열없이 사랑했고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었다. 한데도 돌아오는 것은 이런 기만이다. 그를 믿지 못했다. 하여 그의 아이까지도. 그들이 만든 자식까지도 제 손으로 죽여 없애려 했다. 그리 가증스러운 짓을 한 주제에 무얼 잘 했다고···. 윤협은 울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좆으로 때리듯 마찰하며 나는 소리가 거칠었다. 사정없이 좆을 쑤시자 그녀가 약하게 속삭였다.

 “아기···.”

 아기. 그래. 그의 아기. 그의 아기가 이 배 속에 있었지. 윤협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발갛게 씨근대던 은환이 그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간지러웠다. 그는 완전히 상의를 벗은 채 좆을 흔들었다. 발기한 채 구멍을 쑤시면서도 욕정이 해갈되지 않았다. 눈썹을 좁힌 뒤 은환의 목덜미를 핥았다. 이를 박아 넣은 자리는 금방 벌겋게 부어올라 울긋불긋했다. 짐승처럼 어깨와 쇄골을 씹은 뒤 젖꼭지를 쭉쭉 빨았다.

 젖무덤을 혀로 핥으며 게걸스럽게 젖꼭지를 빨아댔다. 은환이 애를 낳아 젖을 흘리면 애는 젖어미에게 맡기고 그가 대신 젖을 빨 것이다. 젖이 텅텅 비어 마를 때까지. 전부 그가 차지할 것이다.

 그는 품고 있는 계집이 낳을 아이를 떠올렸다. 쌕쌕대는 발간 핏덩어리. 미칠까 봐 낳지 않으려 했다는 그의 계집. 그의 아내. 기어코 품어 새끼를 배게 했다. 그는 낯을 일그러트렸다. 좆질을 할수록 하얗던 볼기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윤협은 금금을 움켜쥐고 있는 작은 손을 응시했다. 그 손을 뜯어내 제 목에 둘렀다.

 “아흐윽···!”

 단박에 좆을 쳐올렸다. 은환이 단말마처럼 교성을 질렀다. 고환이 회음부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천박할 정도로 야릇했다. 체액이 벌름거리는 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내내 배에 무리가 갈까, 혹은 자궁 속의 아기에게 해로울까 두려워하던 은환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배배 비틀었다.

 “하으, 흐, 흐윽! 으응, 아! 아! 폐하··· 그만, 그만!”

 은환이 자지러졌다. 작은 손이 넓은 어깨를 긁었다. 윤협은 여자를 옆으로 돌린 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은환이 소스라쳐 고개를 흔들었다. 윤협은 그녀의 입술에 깊게 입 맞추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괜찮아.”

 은환이 머리를 저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윤협은 구멍에서 뽑은 성기를 다시 밀어 넣은 뒤 가슴을 쥐어 잡았다. 두려움에 차오른 눈이 그를 향했다. 윤협은 그녀의 안에 깊숙이 자신을 묻듯 성기를 쑤셔 넣었다. 은환이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해 고양된 숨을 뿜어내기만 했다. 느리게 성기를 돌리자 은환이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허리를 뒤로 휘었다. 가슴팍으로 그녀를 안으며 젖꼭지를 꾹꾹 눌렀다.

 “으응, 흣, 아아! 흐으!”

 은환이 턱을 덜덜 떨었다. 베갯잇을 세게 쥐어뜯으며 느리게 추삽질하는 좆에 맞춰 엉덩이를 돌렸다. 속이 지릿지릿하며 간질거렸다. 은환은 발갛게 달아올라 울면서도 제 손으로 보지를 벌렸다. 좆이 박힌 구멍에서 하얀 체액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구멍 속에 박힌 선단의 일부를 더듬으며 헐떡거렸다.

 “아앙, 으으흣!”

 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들어찬 기둥에 핏줄이 번들거렸다. 진심으로 짐승의 물건 같았다. 은환은 흐느끼며 허리를 뒤틀었다. 얕게 출납하던 그가 질벽을 누르며 거세게 흔들었다. 깊이 파고들어 몰아치는 감각에 은환이 경련했다.

 “아아! 하윽! 응, 으! 아아! 폐하!”

 “이름을 불러.”

 윤협이 낮게 속삭였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쾌감에 울던 은환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한쪽 다리를 든 채 교접하던 윤협이 일어나 그녀를 제 허벅지에 앉힌 뒤 다시 물건을 집어넣었다. 은환이 좋아하는 자세였다. 옆으로 안긴 채 교접하는 것이나 엎드린 채 박히는 일은 싫어했다. 애초에 낯선 행위였고 그를 시야에 담지 않은 채 행위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은환이 가장 흥분한 채 엉덩이를 흔드는 행위는 엎드린 채 짐승처럼 그를 받아내며 우는 행위였다.

 윤협으로선 아무래도 그녀가 흥분하여 더욱 조이는 게 마음에 들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아이처럼 우는 여자를 제 허벅지에 앉힌 뒤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구멍에 넣지 않은 성기가 그녀의 보지 밑에 깔렸다.

 “하응···.”

 애달픈 비음이 흐물거렸다. 윤협은 번들거리는 입술을 물었다. 은환이 구명줄을 찾는 것처럼 그의 목을 더듬어 감은 뒤 눈을 감았다. 윤협은 익숙하게 혀를 얽고 타액을 긁어내 훔친 뒤 입술을 비비고 빨았다.

 “널 미치게 하지 않을 거야.”

 은환이 눈을 떴다. 윤협은 맹세하듯 속삭였다.

 “너를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

 “너를 내 어머니처럼 살게 두지 않을 거야. 은환아. 내가 내 부황 같아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노도처럼 화내며 목을 조이던 남자를 은환은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빨던 그가 그녀의 콧등에 제 코를 비비며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쓸었다.

 “은환아.”

 “폐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해치려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은환이 일그러진 채 제 속을 게워냈다. 이럴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바닥까지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만···.

 “폐하의 옆에 있으면 제가 미쳐요. 반드시 미치고 말 거예요.”

 은환이 괴로움에 차 소리쳤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를 죽이는데 미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해하려 하지도 않았겠지. 적당히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양을 부리며 이런 삶 또한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을지 모른다.

 “아내는 저 하나라고 하셨지만 폐하는 다른 여인들을 안을 거잖아요. 그게 저를 미치게 해요. 폐하. 폐하를 사랑해서···.”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당신을 나만이 독점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바닥을 보이고도 결국 이해받을 수 없겠지. 용납받을 수 없는 감정인 것이다. 은환은 울었다. 결국은 그녀만이 괴로운 것이다.

 진저리치지 못해서 웅크린 채 울었다. 쾌감으로 저릿했던 몸이 천천히 식기 시작했다. 문득 낮고 아스라한 속삭임이 들렸다.

 “후궁은 너 하나야. 너만이 내게 안길 것이다. 말하지 않았느냐. 아무도 나를 가질 수 없다고. 너만이 나를 가졌어. 또한 나만이 너를 가졌다. 모르겠느냐?”

 “하지만···.”

 “유가란이 황후의 위를 가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유 승상과 태후를 오나라에서 걷어내고 나면 폐할 것이다. 그러니 아주 잠시야. 네가 그 계집을 견디는 것은.”

 “흐윽. 흐으윽···.”

 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협은 붉게 멍든 그녀의 목을 더듬으며 거듭 속삭였다.

 “마지막에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만이 궁에 남을 거야. 결코, 네가 염려할 일은 없다. 나를 믿어도 좋아. 나는 네 사내고 너만의 지아비다. 누구도 너를 무시할 수 없게 하마. 유가란이 너를 능멸하려 한다면 내가 그 계집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일그러진 채 울긋불긋한 손자국을 더듬던 윤협이 고개 숙여 은환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축축한 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살갗을 핥고 빨았다. 은환은 훌쩍임을 그치지 않았다. 순흔과 뒤섞인 손자국을 소리 나게 핥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은환.”

 연약한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다. 회음부 아래 맞댄 성기를 다시 구멍 안에 찔러 넣었다. 약한 비음이 훌쩍임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는 여자의 잘록한 허리를 안은 채 발갛게 젖은 얼굴을 마주했다.

 “환아야.”

 은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목을 뒤덮은 손자국을 보며 윤협이 입술을 씹었다. 임신한 아내의 목을 조른 제 손을 자르고 싶었다. 후회가 몰아쳤다. 어째서 그렇게 이성을 잃었을까. 은환이 자신 몰래 약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 차례 머리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래도 절제했다. 그는 지존이며 천자이니. 윤협에게 감정을 절제하는 일이란 퍽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니 은환을 어르고 달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두려움과 불안에 잠긴 여자였다. 여자가 임신했을 때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화 태비야말로 반평생 임신으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니. 지아비 된 몸으로 처의 염증과도 같은 불안을 달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도 이렇게 어긋났다. 은환의 목을 졸랐던 손을 잘라낸 뒤 불에 태우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세게 짓씹은 뒤 여자를 응시했다.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턱과 볼에 입 맞추며 그녀의 호흡을 들었다.

 “미안해. 환아야.”

 허공을 더듬던 은환이 그를 쳐다보았다. 윤협은 너부죽한 등을 어루만지며 기다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하얀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은환은 여전히 슬픔에 잠긴 얼굴이었다. 윤협은 젖은 눈 밑을 닦아주며 입술을 맞췄다.

 “환아야.”

 반응하지 않는 여자를 향한 시선이 눅눅했다. 생살이 썰리는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냉대를 견디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통제되지 않았던 자신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노여움을 절제할 수 없어서.

 결코, 이런 식으로 은환에게 손을 대본 적 없었는데 결국 그도 부황과 매한가지로 너절하고 끔찍한 사내였다. 그러나 은환이 임신하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은환 하나만으로 귀하고 사랑스러운데 은환이 그의 아기를 가지게 되면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닳도록 아끼고 사랑해주리라.

 아기를 갖게 되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해줄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매야 아이를 갖게 하려 교접할 때마다 생각했다. 그의 정으로 인해 배가 부른 은환과 그 배를 소중히 어루만지는 자신···. 불현듯 은환이 입술을 뗐다.

 “제가 서녀란 것은 이미 아실 테죠.”

 습윤한 눈동자가 검게 반질거렸다.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은환이 흐느낌 하나 없는 속삭임을 흘렸다. 윤협은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비워내듯 속을 게워내는 아내의 얼굴이 부서질 듯 하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첩이었어요. 첩 중 가장 천했죠. 노비였거든요.”

 “···.”

 “그러니 제 피의 반은 노비예요.”

 “너는 이제 존귀하다.”

 은환이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윤협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은환은 평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녀가 스스로 비천하다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은환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와 존재가 천하다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경멸당하며 산 삶이다. 한데 말 몇 마디가 대수일까.

 은환은 어머니를 생각했다. 곱씹은 만큼 곱씹은 자리가 아픈 사람이었다. 궁녀로 입궁한다고 했을 때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 한편이 시큰거렸다. 아버지는 왜 어머니를 안았을까. 열이 넘는 첩에 정실에게서 번듯한 자식까지 보았으면서···. 시퉁한 눈으로 어머니를 보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눈에 들어왔고 하여 꺾었을 뿐. 재물을 가진 사내가 계집을 취하는데 이유가 있을까. 노비이니 더욱 망설임 없었으리라. 은환은 감히 제 아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존귀한 사내를 더듬었다. 파르스름한 턱이 강인하고 날카로웠다.

 “어머니는 노비여서 자식을 낳았어도 인정받지 못했어요. 저도, 제 오라비도.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정실이자 저희 집안의 안주인 되는 분께서 총애받으며 사신 것은 아니에요. 아버지는 첩이 아주 많고 퍽 귀한 집안에서 시집온 분도 계시거든요. 그러니 제 어머니로 인해 아버지의 부인께서 고달프셨던 건 아니에요. 제 어머니는 그 집안에서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라···.”

 “그래서 너도 그런 존재였느냐. 네 아비가 너를 가혹하게 대했느냐.”

 윤협이 물었다. 은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일 또한 없었으나 침묵은 긍정이었다. 윤협은 낯을 사납게 굳히는 대신 그저 은환을 바라보았다. 눈 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자였다. 금금에 쌓여 그의 침상에 누워 있을 때부터 사랑스럽지 않은 때가 없었다.

 도토리만 한 키에 꽃씨만큼이나 작고 홀쭉했을 은환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릴 만큼 사랑스러웠다. 입에 단것을 물지도 않았는데 은환의 타액 맛이 남은 입 안이 달았다. 한데 그리도 사랑스러웠을 소녀를 냉대했다는 사내의 생각에 심장 한편이 차게 굳었다. 그러나 노여움을 숨기고 은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은환이 흘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워 삼키는 그였다. 그녀의 유년 시절에 관해서는 일찍이 태감을 통해 전해 들은 바 있으나 은환이 스스로 제 과거를 속삭이는 일은 처음이었다. 벌써부터 낯을 붉혀 입을 닫게 하고 싶지 않았다. 봉긋 솟은 입술이 무어라 달싹일지 궁금했다.

 “저는 그 집안의 여자들이 모두 가여웠어요.”

 은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더 울지 않았다. 눈물이 식은 눈 밑은 여전히 축축했다. 은환의 시선이 지아비의 기려한 얼굴을 둥글렸다.

 “저를 미워하던 아버지의 애첩도, 저에게 무관심하던 아버지의 정처도···. 아버지가 거느린 여자들이라면 모두 불행해 보였어요.”

 그리하여 혼인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의 벼락같은 노성에 다리가 후들거리면서도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 다짐하니 아버지가 내민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아버지가 내민 혼사 자리를 얌전히 수락하거나 입궁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것.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기실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로 은환은 짐을 싸 궁으로 왔다. 어느 사내의 계집으로 사는 일이 싫어서. 차라리 그럴 바엔 나라의 녹을 먹는 여자가 되는 게 나아서. 어느 사내의 처도 어느 사내의 첩도 그녀의 눈에는 모두 비참해 보였는데 자진하여 그리 살 순 없었다.

 “그 집에서 행복한 사람은 아버지 한 분밖에 없었거든요. 심지어 아버지가 아끼시던 첩조차 행복해 보이진 않았어요. 매야 아버지의 애정이 다른 여자에게로 갈까 근심하고 경계했으니 당연했겠죠. 차라리 저희 어머니는 버림받아 마음이 편했으니 어쩌면 그분보다 잠자리가 편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은환이 웃었다. 귀족의 부인처럼 화려한 비단에 금과 옥으로 만든 화잠을 빼곡하게 꽂고 있던 여자가 떠올랐다. 심심하면 은환을 불러 손찌검하며 종처럼 부리던 여자였다. 유달리 어머니를 미워했고 미워하는 만큼 은환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유년 시절 당했던 고통의 반은 모두 그 여자로부터 비롯한 것이었으나 은환은 그 여자 또한 가여웠다.

 “그러니 저는 유 소저 또한 가여워요. 결코, 그분을 미워하지 못할 거예요. 폐하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그분을 냉대하시리라 말씀하셨지만. 지아비께 미움받는 그분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

 그래. 그럴 것이다.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다. 황후든 후궁이든, 그녀로 인해 미움받는 그의 다른 아내들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그녀가 아닌 여자들이 총애를 얻는 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경험하지 않았나. 차라리 그럴 바에는 어머니처럼 외면받는 일이 나았다. 총애를 받으며 그 총애가 언제 다른 후궁들에게로 옮겨갈까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일보다. 차라리 버림받은 후궁으로 사는 게 마음은 편할지 모른다.

 은환은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황제는 달랐다. 아버지는 이토록 훤칠한 미장부가 아니었다. 다부진 체격이긴 해도 다소 강퍅한 인상이었다.

 그런데도 황제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떠올랐다. 그래도··· 약속한 바는 어기지 않는 사내이니 은환은 그의 곁에서 정말로 행복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제 정궁을 미워하는 그를 보며 마음이 편할까.

 황후를 미워하는 그를 보며 언제나 그가 자신을 총애한다고 믿을 자신이 끔찍했다.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으면 그런 여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이 생기면 총애는 단순한 총애가 아닐 테니. 태어난 아이가 황자라면 은환 또한 윤협의 사랑을 단순한 사랑으로만 치부하며 달콤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후궁에게 총애란 지아비의 사랑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니. 그래. 후궁이 받는 총애란 곧 자식의 미래인 것이다. 그러니 허울뿐인 황후가 된 유 소저를 보며 안도를 느낄 자신도, 그 허울뿐인 지위조차 지위이기에 속이 썩을 자신도. 매한가지로 끔찍했다.

 “그러니 저를 위해 그분을 미워할 것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황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은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첩을 위해 맞이하지도 않은 부인을 미워하는 남편이 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왔다. 길쭉한 성기가 뽑히자 구멍에서 하얀 정액이 질금질금 샜다. 발기된 성기를 풀어주려 움켜잡으려 할 때였다. 손목이 홱 잡힌 채 금금 위로 쓰러졌다. 은환이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천한 장사치와 황제를 비교하느냐.”

 “폐하···.”

 “그저 귀하다. 어여쁘다. 짐이 네 앞에서 천치처럼 구니 황제가 아주 우스운 모양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 한 겹 덮인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심사가 어그러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귀두가 그녀의 허벅지에 닿았다. 연유를 캐물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커다란 손이 음부 속으로 밀려들었다. 조야하게 일그러진 사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회음부에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은환이 신음을 터트렸다.

 “아흑!”

 “짐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목이 수십 번은 더 잘렸을 계집이···.”

 “흣···.”

 “너는 짐을 능멸하는 일이 그리도 쉽나?”

 “폐하···. 흣, 흑!”

 귀두가 질구를 찔렀다. 한 차례 체액으로 흠뻑 젖은 질구에 선단이 비집고 들어왔다. 은환은 판판한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대체 무엇에 심사가 틀어진 건지 험악하던 사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 멋대로 나를 주무르려 하지 마.”

 서늘하게 일갈한 황제가 고개를 숙였다. 말랑한 입술이 둥근 이마에 닿았다. 들려오는 일갈처럼 서늘하리라 생각했던 입맞춤은 다정하고 상냥했다. 그러나 은환은 맞닿는 온몸이 부스러질 것 같았다.

 ***

 화각 공주가 활을 높이 들었다. 눈앞에 여우라도 있는 양 화살을 건 시위를 쭉 당겼다. 은환은 어릿한 음부를 느끼며 공주를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활의 상태를 확인한 공주가 태감에게 활을 맡긴 뒤 뒤를 돌았다.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를 높이 묶은 공주는 능라 비단으로 지은 군이 아닌 사냥복을 입고 있었다. 늘씬하고 큰 키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 하얗고 아리따웠다. 그러나 두 눈에 반짝이는 생기. 붉은 입술이 그리는 호방한 미소는 여인의 수줍음과는 달랐다.

 ‘여인이 아닌 고운 미장부를 보는 것 같구나.’

 황자들만큼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태감만큼이나 큰 키를 지닌 공주가 푸르릉거리는 말을 쓰다듬었다. 은환은 물끄러미 공주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화각 공주는 선제의 둘째 공주로 태어났으나 첫 딸이었던 화예 공주가 여덟 살에 열병으로 목숨을 잃은 후 태비와 황제의 첫 번째 자식이 되었다.

 장녀였던 화예 공주가 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선황의 맏딸이라 불려도 마땅했다. 그러나 태비는 여전히 첫 아이를 잊지 못했다. 그리하여 화각은 언제나 선머슴 같은 둘째였다.

 “아.”

 넋을 놓은 사람처럼 공주를 바라보고 있는 은환의 볼에 입술이 닿았다. 언제 사냥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것인지 조복 차림이 아닌 황제가 낯설었다. 은환은 제 볼에 입을 맞춘 훤칠한 장부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볕에 나와 있어?”

 황제가 물었다. 지난밤의 악몽이라고는 단 한쪽도 떠올리게 하지 않는 다정한 물음이었다. 은환은 핏기가 엷은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그를 뚜하니 쳐다보았다.

 “그늘에 앉아 있거라. 우리 아가가 힘들 테니.”

 커다란 손이 은환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 밋밋한 배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 침실에 들었던 태의가 그러지 않았나. 분명 배에 아기가 있다고. 그리고 조금도 상하지 않았노라···. 태중의 아기씨께서는 건강하시다. 그렇게 고했다.

 지난 며칠간 아기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에 덜덜 떨며 식은땀을 흘리던 시간이 무색했다. 어쩌면 아기가 상해서 식은땀이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또한 헛웃음이 나올 만큼 우스운 허상이었다.

 아기는 건강했다. 그래서 기뻐해야 하나. 모르겠다. 심란한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는 벌써 은환이 강보를 안고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굴었다. 간밤 그리 역정을 내고도 몇 번 질구를 출납하더니 그녀의 벗은 몸을 안고 우리 아기가 기대된다고 했다. 은환이 게워냈던 불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좋은 아비가 될게. 너만을 사랑하듯 네 아기만을 사랑하고···. 환아야. 내게는 너와 우리 아기뿐이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은환은 허물어지는 윤곽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등장에 예를 표하던 황족들이 고개를 들었다. 은환은 형제들과 나란히 선 화각 공주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뗐다.

 “이 황녀님께선 몇 해 전 부군이 돌아가셨다지요?”

 “화각 누이 말이냐?”

 “예.”

 “한증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젊은 사람이 그리 쉽게 갈 줄은 몰랐지. 누이는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지만.”

 황제가 무심하게 읊조렸다. 그는 자신을 보지 않는 아내를 품에 안고 연신 볼에 입 맞추며 시선을 끌려 했다. 그러나 은환은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사내처럼 키가 크고 늘씬한 공주에게 가 있었다.

 은환의 눈길을 받지 못한 윤협은 그녀의 턱을 강제로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가볍게 입술을 맞춘 황제가 은환을 그늘로 데려갔다. 비단으로 천막을 만든 곳에는 태후와 태비, 화각을 제외한 황녀들과 유 승상 일가의 여인들. 그리고 도독 가문의 여인들이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은환은 불안한 눈으로 황제를 흘깃거리다가 시모들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여기 앉으려무나.”

 팍팍한 얼굴의 태후와 달리 태비는 봄볕처럼 화사한 얼굴이었다. 직접 며느리라도 챙길 생각인지, 그녀는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윤협은 하얀 얼굴로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는 여자의 볼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태비의 옆에 그녀를 앉혔다.

 “이런 걸 보면 황상이 참 선황 폐하를 닮았어. 그렇지? 태비.”

 태후가 윤협을 힐긋거리며 물었다. 태후의 옆에 앉은 정혼녀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어린아이처럼 더듬거리고 있는 후궁을 챙기는 꼴이 가관이란 뜻이었다. 은환은 태후의 날카로운 물음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분명 태비를 향해 물었음에도 그녀는 듣지 못한 양 제 장남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제 말을 씹은 태비를 향해 태후가 눈썹을 좁혔다. 은환이 불편할까 자리를 챙기고 있던 황제가 제 친모를 응시했다. 여자는 매끈한 미소를 뒤집어쓴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은환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곧장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황제의 적모와 생모가 대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처신을 어떻게 해야 미움을 사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화 태비가 가을 사냥에 참석할 줄 몰랐다. 드문드문 넋을 잃는 병을 앓고 있었고 선황이 훙서한 이후로는 건강까지 쇠약해져 자녕궁을 나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올해 태비는 맨정신으로 태후의 옆에 앉아 있었다. 은환은 하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속이 불편한가?”

 시모를 흘깃거리고 있는 은환을 향해 황제가 물었다. 은환은 고개를 저었다. 한쪽 무릎을 굽힌 뒤 그녀와 시선을 맞춘 황제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선 태감은 적잖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은환에게 고였다.

 “괜찮아요. 폐하. 빈첩은 괜찮아요.”

 그녀는 더욱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은환이 대답했으나 윤협은 물러나지 않았다. 커다란 두 손이 은환의 작은 턱과 무른 눈 밑을 더듬었다.

 “폐하···.”

 은환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말랑한 눈가를 더듬던 손이 은환의 아랫배를 덥석 움켜잡았다. 은환은 놀라 움찔했다. 시선이란 시선은 모두 묶어 놓고 보이는 행위가 단순했다. 이 배 속에 황제의 용종이 자라고 있다.

 “담비를 잡아 오마. 하남의 담비는 털이 고르고 윤이 난다. 털신으로 만들면 아주 예쁠 거야.”

 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가죽으로는 우리 아가의 신을 만들면 좋겠군.”

 윤협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누가 들을까 겁이 난 은환이 어깨를 옹송그린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환 또한 일어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문득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런 얼굴을 하니 혼자 두고 가기 힘들지 않으냐.”

 은환이 시선을 들었다. 야차 같던 지난밤과 달리 곡풍이 부는 황제의 얼굴은 그저 첫 아이를 가진 지아비의 얼굴이었다. 은환은 할 말이 나지 않았다.

 밤에는 그리 무섭게 굴더니 아침이 밝자마자 태의를 불러 회임을 확진 받았다. 환궁하면 은환의 회임 사실부터 조정에 밝히리라. 새신랑처럼 말쑥한 얼굴에 그린 듯 환한 미소를 보며 오늘 아침 태의가 한 말을 곱씹었다. 태의는 언제나 아기의 맥이 놀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 아가라서. 코나 입도 생기지 않을 시기의 아가라 교접을 자중해야 한다고. 굳이 태의가 주의주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교접은 아기를 낳고 한참 뒤에 해야 한다. 그러나 황제는 회임 중에도 교접을 하고 싶어 했다. 하여 진맥을 마친 뒤 나가려는 태의를 붙잡아 언제쯤 교접을 할 수 있느냐 물었다.

 당황한 늙은이가 파란 얼굴로 젊은 남녀의 교접 시기를 짚어주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문득 입 안이 씁쓸했다. 그녀의 아기를 사랑한다는 남자였다. 그러나 이럴 때면 정말로 아기를 사랑하는 게 맞는 건지 헷갈렸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예.”

 “강친왕이 정말 사냥을 못 하거든.”

 그가 비웃듯 입술 끝을 미끄러트리며 걸어 나오는 사내 둘을 보았다. 연친왕과 강친왕. 선황의 쌍둥이 아들들이었다. 궁에서 유일하게 화 태비의 소생이 아닌 자식들이기도 했다.

 “태후 마마를 뵈옵니다.”

 “오랜만이군요. 연친왕. 그리고 강친왕.”

 태후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황제의 사늘한 얼굴을 들여다보던 은환 또한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강친왕이 은환을 길게 훑더니 태후를 향해 소리쳤다.

 “수방에 이런 절세미인이 있었다니. 모후의 안목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소리였다. 문득 그가 여색을 밝힌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태후 또한 그녀를 황제의 침전에 디밀어 넣을 적 그리 이야기하지 않았나. 강친왕이 너 같은 계집을 가만히 두었느냐고.

 은환은 시선을 돌려 화각과 농담을 주고받는 황자들을 응시했다. 차례대로 스물하나. 열여섯. 열다섯. 열셋. 그리고 열 살. 화 태비가 낳은 소생들이 열이 넘다 보니 나이와 봉작을 외우기도 힘들었다. 죽은 아이들까지 더하면 이보다 더 많을 테지만 황제의 장성한 형제자매들은 모두 열둘로 육 남 육 녀. 죽은 화예 공주까지 더하면 선황과 태비는 여섯 아들과 일곱 딸을 둔 셈이었다.

 “가비가 자못 미색이 아름답지요. 젊은 시절의 화 태비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태후가 황제를 흘깃 쳐다보았다. 태비는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옆에 앉은 화양 공주가 눈을 새치름하게 치떴다. 강친왕이 그것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시니 정말로 어머니와 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가비께서 태비 마마와 저리 닮으셨으니 밤마다 기분이 묘하셨겠습니다.”

 심장이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은환은 볼을 붉힌 다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고개를 돌려 황제를 응시했다. 그러나 평연한 표정이었다.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을 텐데도 황제는 작은 수치감조차 느끼지 못한 듯 일견 온화해 보이기까지 했다. 은환은 혼자 눈두덩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한편 참지 못하고 반격에 나선 것은 화양 공주였다.

 “어머니와 가비 마마가 자매처럼 닮았다 한들 유 소저와 태후 마마만 할까요? 역시 고부가 될 사이라 그런지 그림같이 닮지 않았습니까? 본 황녀는 유 소저를 뵙자마자 태후 마마의 친딸인 줄 알았지 뭐예요.”

 화양이 앵두 같은 입술로 종알거렸다. 비단을 수놓은 모란처럼 화려한 얼굴의 공주가 미소 한번 짓지 않은 채 쏘아붙였다. 서리 낀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이나야.”

 분을 참지 못해 씨근대는 공주를 붙잡은 것은 태비였다. 그녀는 점잖게 딸을 부르더니 눈치를 주었다. 화양은 속이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바들거렸다. 은환은 태후와 유 소저를 번갈아 보았다. 수 싸움에 속하지도 않을 공주의 발언이었다. 태비였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으나 화양의 성정 상으로는 발끈하여 쏘아붙이는 것이 전부. 그러나 황제와 태비는 새벽녘 우물 속으로 가라앉은 쇳조각처럼 서늘할 뿐이었다.

 “고부가 될 인연이라 그런 것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황상.”

 딱딱하게 굳은 유 소저와 달리 태후는 부처처럼 편안한 미소였다. 눈을 접으며 대꾸할 줄 알았던 황제는 예상과 달리 은환을 자리에 앉힌 뒤 뒤를 돌았다. 황제마저 태후의 말을 무시하니 모자가 작정을 하고 그녀를 따돌리는 것 같았다.

 황제가 동복의 형제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강친왕과 연친왕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핏줄은 속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았을 땐 분명 그랬다. 눈앞의 기려한 얼굴이 사람 같지 않아서···. 어찌 저리 생겼을 수 있을까.

 타고나길 그리 타고난 사내가 종종 의아했다. 한데 태비를 보니 저런 여자의 속에서 난 사내라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모아보니 그의 형제들 또한 유난스러울 만큼의 미장부들이었다.

 선황 또한 기려한 용모의 미장부였다고 듣긴 했지만 강친왕과 연친왕의 인물이 영 못한 것을 떠나 화 태비 소생의 친왕들과 달리 부친의 작은 조각조차 갖지 못한 것처럼 닮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들었다.

 황제의 생부는 어떤 사내였을까. 화 태비의 소생인 황자들에게는 제 모든 것을 물려준 것처럼 빼박은 아들들을 임신시켰으면서 길 귀비의 두 아들은 꼭 황실의 핏줄이 아닌 것처럼···.

 “아···.”

 태비를 돌아보았다. 상제의 딸처럼 그린 듯 아리따운 여자가 제 장남만을 닳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화각을 제외한 네 딸은 모두 그녀의 옆에 모여 앉았고 태후는 유 소저만을 곁에 둔 채 앉아 있었다. 심장 한편이 서느렇게 굳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윤민을 같이 보내도 괜찮을까요?”

 “이제 열 살이지 않니.”

 “그래 보았자 어린애인걸요. 윤민처럼 조심성 없는 애가 말에서 떨어질까 두려워요.”

 팔 황녀 화의 공주였다. 화양의 바로 손아래 누이. 화양과 비슷했지만 화양과는 달리 이목구비가 좀 더 차분하며 오밀조밀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태비의 공주들을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길 귀비의 쌍둥이들을 생각했다.

 붕어한 황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한 후궁에게 매달리는 남자였다. 황제가 은환에게 하는 것을 보면 둘 사이가 어땠을지는 대강으로나마 짐작이 갔다. 보통의 사이는 아니었겠지. 젊은 시절 그리도 애달프게 서로를 흠모했다는 연인이었지 않은가. 그 끝이 애증으로 변질되었다 한들 황제가 태비를 두고 다른 여인을 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불안한 얼굴로 태후의 곁을 지키는 유 승상의 여식과 눈이 마주쳤다. 은환은 고개를 돌렸다. 말라붙은 입술을 빠끔거리다가 태비를 향해 물었다.

 “사사당한 폐귀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요?”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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