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四. 곡우
화예 공주 이연. 화각 공주 이경. 장차 보위를 이을 태자 윤협. 화인 공주 이수. 화안 공주 이선. 만친왕 윤형. 화양 공주 이나. 화의 공주 이혜. 공친왕 윤섭. 은친왕 윤도. 숙친왕 윤혁. 화옥 공주 이슬. 완친왕 윤민.
설란은 자식들의 휘와 얼굴을 모두 외웠다.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 소질이 있는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때 가장 환히 웃는지···. 사랑하고 사랑하여 망막이 닳도록 바라보며 애달파 했다. 하면 희강은 어땠을까. 태어나는 족족 곤전에 처박기 바빴으니 아마 싸지른 이후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설란의 배가 언제나 부풀어 있길 원하였다. 오롯이 그것만을 원하였으므로 그녀의 배 속에 들어앉은 핏덩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짐승처럼 씨물만 싸지르는 데 열을 올렸으니 열이 넘는 자식들의 휘 또한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배가 박처럼 부풀면 걸음이 느려지니 도망치지 못하리라 믿는 사내에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느 날의 밤, 희강이 나른하게 속삭이던 절망이 떠올랐다.
‘끌어안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자식의 수가 많아지면 황궁의 담 근처로는 걸음도 못 하겠지.’
그래. 어미의 젖을 물면서도 빽빽거리며 울어대는 자식들을 데리고 궁을 나서지는 못할 테다. 그러니 설란은 언제나 그의 궁에 갇혀있으리라. 하여 설란은 언제나 회임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허리를 짚고 배를 쓰다듬으며···.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런 의문이 들었다. 희강이 계집을 첩으로 들인 게 아니라 암퇘지를 끼고 사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스운 꼴로 갇혀버린 게 아닌가···.
윤협을 낳고 나서는 봉긋하니 탐스럽던 가슴도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이 황자인 윤형을 해산할 즘에는 배에 튼 살이 돋았다. 더는 총애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내란 으레 시들어버린 계집은 찾지 않으니. 희강 또한 그녀를 외면하리라 생각했다. 차라리 그리하길 바랐다. 더는 걸음 하지 않기를. 그녀의 사랑이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낱알처럼, 속이 까맣게 비어버리면···. 그렇게 모두 비게 되면 증오 또한 마를 것 같아서.
한데 해가 저물고 밤이 오면 희강은 궁에 계집은 저 하나뿐인 것처럼 찾아와 그녀를 안았다. 자궁 속 아기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았으니 아이의 맥을 유의하라 태의가 일러도 듣지 않았다.
희강은 매일 밤 금금을 덮고 누운 그녀의 침의를 걷고 회음부에 양물을 문질렀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을 때면 허벅지 사이나 젖이 흐르는 가슴골에 양물을 끼운 채 허리를 흔들었다.
짐승 같은 사내였다. 짐승처럼 그녀를 안았다. 놓아달라 울고 보채도 계집은 너 하나밖에 없다고 속삭였다. 여인은···. 연모하는 여인은 너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 짐의 사랑스러운 설란으로 돌아와.’
열없는 속삭임이다. 설란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검고 우묵한 눈을 바라보았다. 우물처럼 검은 눈이 사납게 뒤척였다. 놓아달라 보채는 입술을 지려 밟듯 사려 무는 사내를 길게 쏘아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여윈 그녀를 안은 몸이 검은 덩어리처럼 단단하고 따뜻했다. 희강의 어둑한 눈이 그녀의 둥근 배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아이를 더듬고 있었다. 사내는 그녀가 아기를 많이 낳으면 그녀가 예전과 같이 사랑스러워지리라 생각했다.
그래. 예전과 같이···. 그러나 예전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사랑했고 희강이 얼마나 늠름하며 훤칠한 연인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였는지. 아기의 씨를 주고 울타리를 만들어주겠노라. 다복한 가정을 만들자. 너를 닮은 딸과 나를 닮은 아들을 세지도 못할 만큼 수북하게···.
아비에게 받지 못한 사랑. 갖지 못한 그늘. 모두 아낌없이 그녀를 위해 내어주겠노라고. 내게는 너뿐이야. 설란아. 설란아···. 짐의 연인. 짐의 아내. 너를 연모한다. 전부 공허한 허사다. 말뿐인 호사였다. 황제가 어찌 지아비가 될 수 있으랴.
한데도 그것을 믿어서···. 그것을 속삭인 이조차 사실은 그이의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설란은 그의 아내가 되기로 했다. 하여 무엇을 얻었느냐 하면···. 오욕과 멍에뿐이었다. 이따금 설란은 어째서 그의 궁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지난 삶이 꿈 같았다. 하여 지난 사랑도 꿈 같았다. 황후가 입궁했을 때를 떠올렸다. 희강을 사랑하니 그의 정궁과 도탑게 지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왜냐면 희강은 그녀만을 아내라고 생각하니까. 한데 아내에게서 아이를 앗아가는 지아비는 세상에 없다.
그녀에게 아기를 주고 아기의 울타리가 되어주겠노라 했지 않나. 그리하여 궁 밖의 촌부조차 혼례식 때 입는 혼례복 한 번 입지 못한 삶을 행복하다 여기며 살았다. 희강이 그녀를 사랑하니까. 희강이 그녀만을 아내라 여겼으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제게서 아기를 앗아가시는 거예요. 어째서 제 배 속으로 낳은 자식들을 어여쁘게 여기지 않으시는 거예요. 백일 된 첫아들이 황후의 적으로 들어간다 하였을 때는 울지 않았다. 첫아이를 빼앗겼을 때. 그때보다는 슬프지는 않아서.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희강에게 절망을 느낀 것 같다. 아들도 아닌데 데려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그녀의 아이를 데려가 버렸다. 그 아이를 만들던 밤 나누었던 온기가 그녀의 가슴속에 빼곡한데···. 황제는 그 아이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여 설란의 절규조차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후로 설란은 첫아이를 한 달에 한 번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를 빼앗겼을 때는 모르겠다. 난산이었다. 기진맥진하여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기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강이 저를 위하여 그리하는 줄 알았다. 한데 넷째부터는 달랐다. 첫아들이었던 윤협을 빼앗겼을 때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황후의 태에서 난 아들은 필요 없으나 그녀의 적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꺼이 바칠 생각이었다. 쉬지 않고 계속되는 회임 속에서 설란은 황후의 자궁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아들을 낳아 황제 내외의 씨받이를 그만둘 수 있다면 얼른 아들을 낳아 바치고 싶었다.
한데 딸이었다. 분명 넷째는 공주였다. 장남은 보위를 이어야 하니 황후의 적에 입적해야 한다 했다. 그러니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들이, 그녀의 윤협이 너무나 그리웠으나 다음부터 태어나는 아기는 그녀가 사랑하며 키울 수 있을 테니. 한데···.
‘아기는요?’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만을 하염없이 쓰다듬는 사내를 향해 물었다. 희강은 여전히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는 짙은 남빛이 도는 조복을 입고 있었다. 정무 중에 달려온 것인지 어느 때보다 정제된 모습이었다. 설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더듬었다.
‘아기는 유모가 데려갔다.’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 했잖아요.’
그럼 내가 키워도 되지 않나. 설란은 삐거덕거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나려 했다. 희강은 기력이 축날 테니 누워 있으라 했다. 설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나가는 손이 거칠었다.
발간 눈에 물기가 맺혔다. 희강의 표정이 엷게 굳었다.
‘유모를 불러주세요. 아기를 보아야겠어요.’
‘아기는 유모가 잘 데리고 있어.’
‘아기를 봐야겠다고요!’
노여워 소리쳤다. 온몸이 산산 조각날 것 같았다. 아기를 낳을 때보다 몇 배로 아팠다. 희강이 완연히 굳은 채로 그녀를 붙들었다. 어느새 설란은 목을 놓고 울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지 못한 지 몇 해가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배가 부풀었는데··· 그래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녀의 곁은 휑했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황제가 몇이나 후궁을 들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육궁이 채워지는 날에도 배를 쓰다듬으며 웃을 수 있었다. 혼례복을 입지 않아도 좋고 제대로 된 지아비를 갖지 못해도 좋았다. 황후가 그녀를 괄시해도 견딜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와 사이가 좋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설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매한 지위의 여인이니 고작 도독의 서녀로 태어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외숙의 슬하에서 자란 그녀 따위와 비교 선상에 두는 것조차 분수에 넘는 짓이었다. 그러니 황후가 인정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황제는 황후와 대혼례를 올린 이후 설란을 화심전에 가두듯 들이 앉혔다. 정궁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더는 희강의 사랑을 원하지 않으니까. 언제부터였을까.
희강을 원하지 않았다. 희강과 나누었던 사랑 또한 그립지 않았다. 간절하여 애달프고 사랑했던 시절은 끝이 났다. 지독하게 서로를 사랑했던 시절은 아주 어린 날에 갇혀버렸다. 하여 그녀의 사랑은 그 시절에 갇힌 채 고여 흐르지 못했다.
어릴 때는 그를 더 사랑하지 못하게 될 날이 두려웠다.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날 또한 두려웠다. 그런 날을 떠올릴 때면 숨이 막혀 그의 전부가 되고 싶었다. 황후의 위에 오를 수 없다면 후궁이라도 좋다고 서슴없이 속삭였다. 겁 없던 시절이었다. 사랑이 불구덩이조차 두렵지 않게 했다. 제발 소녀를 버리지 말아달라, 그래서 간절히 매달렸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정말로 그녀를 버릴까 두려웠다. 한데 이제는 모르겠다. 희강은 그녀에게 후궁의 첩지를 주고 궁을 하사하던 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어미였다. 어미가 되니 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지아비가 없어도 괜찮다. 그래. 괜찮을 수 있었다.
그녀가 첫아이를 가진 후 희강은 공부 시랑의 장녀와 대혼례를 치렀다. 설란의 배가 많이 부풀었을 때였다. 엄숙하게 대혼례를 치르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아기만 있어도 좋다고. 처음에는 그리 생각하는 게 어려웠는데 매일 밤 배를 쓰다듬으며 마음먹으니 사랑하는 사내가, 아이의 아비가 그녀가 아닌 여자와 혼례 치르는 모습을 보아도 힘겹지 않았다.
정말로 아기만 있으면 되니까. 여자로 살 수 없다면 어미로 살아도 괜찮으니까. 그러니 그가 수없이 많은 후궁으로 육궁을 채워도 괜찮았다. 그녀에게 그늘은 그녀의 귀여운 아기들이었고 그녀의 울타리는 장성한 자식들이 되어줄 테다.
굳이 희강이 그녀에게 남을 필요는 없다. 사랑은 한철로도 족했다.
‘삼 황녀는 황후가 잘 돌볼 거야. 유온 또한 튼튼한 여자야. 설란이 네가 낫고 나면 화심전에 들라 하마.’
‘아니요. 폐하. 빈첩은 제가 낳은 아기가 보고 싶은 거예요.’
설란이 울며 소리쳤다. 진정할 수 없었다.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 싶었다. 혹시 그녀가 황후를 투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다른 후궁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고 생각했나.
그러나 설란은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살았다. 황후에게 거슬릴까. 그리하여 곤전에 있는 그녀의 아가들에게 위해가 될까. 감히 황후를 투기하며 질시하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사실은 희강을 더 사랑하지 않아서 투기 같은 것은 나지도 않았다.
아기가 그녀의 몸에 겨우살이처럼 덧났을 때부터는 다른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여력도 없었다. 희강을 탐내지 않으니 희강의 여자들 또한 눈에 들어오지 않은 탓이다. 어차피 그녀보다 고매하고 고상한 지위의 여식들이었다. 고관대작의 딸들만 간택하여 비빈으로 봉했다. 섣부르게 투기하여 덤벼들었다가는 그녀가 가진 유일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여 설란은 누구에게라도 납작 엎드렸다. 그리 살았다. 설란은 정말로···. 암투 따위 하지 않았다. 기실, 투기 또한 사랑의 일부이지 않나. 한데 그녀는 그를 더 사랑하지 않으니까. 희강이 그녀를 잊고 산다 해도 좋았다. 아예 더 걸음 하지 않는다면. 하여 그녀가 그를 사랑했던 시절을 완전히 잊을 수 있게 내버려 둔다면···. 그러나 희강은 매일 밤 찾아와 그들이 오롯하게 둘이던 시절을 자극했다. 결코, 그녀가 어미로 살도록 두지 않았다.
‘빈첩이 폐하와 황후 마마께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요. 제게 어째서 이러세요. 어째서 이렇게 가혹하신 거예요.’
날을 세워 소리를 지르다 맥이 빠진 설란이 고개를 떨궜다. 희강은 지쳐 쓰러지려는 그녀의 어깨를 받아 품에 안았다. 두꺼운 가슴팍에 설란이 머리를 기댔다.
‘황후 마마의 자궁으로 사는 것은 윤협으로 끝난 게 아니었나요?’
짓무른 눈으로 물었다. 부은 눈두덩의 살점이 헤지도록 발갛게 짓물러 있었다. 설란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 희강은 그저 그녀의 여윈 등을 쓰다듬고 있을 뿐이다.
‘산파가 그랬어요. 흐윽···. 황자가 아니라 공주라고요. 그럼 빈첩이 빈첩의 궁에서 키워도 되는 거잖아요.’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지긋지긋했다. 첫아기를 안지 못하고 빼앗겼을 때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황제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기는 정말로 기대했다. 산달이 차오를수록 그는 기껍게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설란은 달랐다.
그즈음 그에게 매여있던 관심이 배 속의 아기에게로 오롯이 쏟아져서 더욱 그랬다. 언제나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한데 황제는 그 아이를···. 그들이 만든 첫아이를 황후의 공주로 입적시켰다. 그러니 더는 설란의 아기가 아니라고 했다. 대체 그것을 어떻게 넘겼는지. 어떻게 삭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설란아.’
애달픈 그늘이 진 사내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울고 있는 설란의 입술을 다정하게 베어 문 뒤 녹진하게 혀를 얽었다. 설란은 옅게 할딱거리며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입술을 뗀 희강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네가 키워도 되는 아이는 없다.’
‘그게 무슨···.’
‘네 곁에 남아도 되는 짐의 자식은 없어.’
‘폐하.’
‘짐은 그것들이 네 자궁에서 열 달을 숨 쉬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단다.’
설란이 덜덜 떨었다.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희강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끔찍할 정도로 굳은 아내를 안은 채 연신 쓰다듬었다. 하나 정도는 남겨두려 했다. 그를 닮은 아이를 사랑하는 설란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데 설란이 제 입으로 그러지 않았나. 아이가 있으니 더는 그가 필요 없다고. 그녀의 자궁 속에 꼬물대는 아이가 자란다는 것조차 때때로 불쾌했다. 한데 그 아이가 그의 사랑을 가져간다면. 하여 설란의 세상에 그가 전부가 아니라면···.
‘네게는 나만 남는 거야. 다른 것은 없다. 너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없어.’
희강은 설란을 부드럽게 안았다. 다시 임신시킬 거다. 그녀의 몸속에 그의 양물이 아닌 다른 것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싫지만 아이를 가진 설란이는 예쁘니까. 또 사랑스러우니까. 게다가 그의 자식들은 훌륭한 족쇄였다. 하니 설란은 다시 배가 부풀어 그가 사랑하지 않는 그의 아이들을 자궁에서 키울 것이다.
희강은 박처럼 복부가 부풀어 뒤뚱거리는 아내를 생각했다.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그의 아기를 임신한 여자는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아기는 사랑스럽지 않지. 그것이 배 속에서 기어 나와 설란의 모든 것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숨을 틀어막고 싶다.
그러니 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는 창백한 낯으로 눈물만 흘리는 아내의 입술을 물었다. 설란이 매가리 없는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는 그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잡은 채 깊이 타액을 섞었다.
설란은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검기만 하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맺혔다. 그것이 광기란 것을 알아챈 것은 그때였다. 그와 연인이었던 시절에는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했다. 하여 그 습윤하며 어둑한 기운마저 사랑했다. 그러나 이젠···.
‘폐하를 증오해요.’
비탄에 젖은 저주가 입술을 새어 나왔다. 희강이 웃었다.
‘짐은 지옥에서도 짐의 귀인만을 사랑할 거야.’
나지막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
“폐귀비는 강친왕과 연친왕 형제의 생모지. 폐귀비가 궁금하니.”
설란이 되물었다. 그녀의 아들이 선택한 여자는 교각 건너 어화원에 핀 한 떨기 추앵처럼 가느다란 여인이었다. 그녀를 닮았고 또한 그녀를 닮지 않았다. 설란은 진통제 삼켰던 시각을 떠올렸다.
넋을 놓지 않기 위해 삼킨 약이 몸속에 고루 퍼지고 나면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한다. 하면 눈앞에 희강이 보이는 일도 없고 희강의 손이 제게 머물고 있다는 감각 또한 사라진다. 그러나 효험이 도는 시간은 몹시 짧아서 자주 음용해야 했고 그리 잦게 음용하다 보면 부작용 또한 필시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생시 속에서 그의 입술을 느끼는 일은 사라진다. 이 얼마나 좋은 약인가.
그러나 부작용만큼은 명백했다. 진통제를 연달아 마시면 마실수록 궐심통이 깊어지고 심장이 쇠약해진다. 설란은 제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희강이 죽고 미친 지 아홉 해가 넘었다.
놀라울 만큼 오래 살았다. 가끔은 희강 없이 살아온 시간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윤협이 자식을 볼 만큼 오래 살지 않았나. 그녀는 지옥에서도 저를 사랑하고 있을 사내를 떠올리며 입술 끝을 당겼다.
“예. 폐하의 이복형제이신 황자 전하들을 뵈니···.”
“길 귀비가 좀 못나긴 했었지. 태후보다 인물이 끔찍했었거든.”
설란은 태후를 흘깃거리며 야트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증스러운 년···.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처박혀야 할 년. 한때는 가여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그녀가 누릴 수 없는 지위를 누리는 고귀한 여인이라고 해도 지아비의 냉대를 받는 여인이 어찌 가엾지 않을 수 있을까.
희강은 언제나 여 황후를 괄시하며 조롱했으므로 귀비 시절 설란은 마음이 불편했다. 하여 그 시절에는 그랬다. 황후를 떠올리노라면 언제나 가슴 끄트머리가 서늘했다. 그녀의 아가들을 가져간, 아가들의 어미가 되어 모후 소리를 듣는 그녀가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 또한 불편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아가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해도 지아비가 첩의 배를 통해 낳아온 자식 아닌가. 어찌 마냥 고울까. 미워하지 않고 박대하지 않아 주는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했다. 설사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가는 일이라면 손끝 하나 대지 않고 황후전의 유모들이 한다 해도 같은 마음이었다. 궁에 살며 제 배로 낳지도 않은 아이들의 울음이 하루도 끊이질 않고 들릴 것이다.
한데 황후는 그 모든 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주고 이해해주었으니. 그 아이들의 생부가 그녀에게 어찌 대하는지를 곱씹노라면 설란은 그녀를 성심껏 봉행해야 했다. 그래. 그때는 그리 믿었다. 그러나···. 이연이가 죽지 않았나. 그녀의 첫아이를, 우리 이연이를···. 아직도 눈 밑이 뜨끈했다. 여숙영이 이연이를 죽였다.
내 가엾고 어린 딸. 내 작은 연꽃···.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린 맛이 혀끝을 저릿하게 자극했다. 여숙영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다. 그 계집이 이연이를 죽였다. 설란에게 아가들은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였다. 곁에 두고 키우지 못해도 언제나 사랑했다. 하염없이 사랑했다. 하여 언제나 황후에게도 열과 성을 다하려 했다. 이연이 죽기 전까지는. 그녀의 첫 공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때까지는 희강의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니 닮지 않은 거지.”
설란은 아들의 여인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연이 곱다랗게 자라 처녀가 되었으면 이 아이처럼 어여뻤을까. 모르겠다. 이연이 자란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이연은 아주 아가일 때 죽었다. 정말 잗다랄 때 죽어 설란의 그 애의 짙어진 윤곽을 그릴 수 없었다.
더는 자라지 않은 딸이다. 그녀가 낳은 모든 딸은 자라 여인이 되고 부인이 되는데 이연이는 그리할 수 없었다. 그것이 여숙영을 증오하는 이유였다. 저리 고이 손을 붙잡고 앉은 제 딸은 곱다랗게 키워냈으면서. 설란의 딸은 뼈가 여물기도 전에 죽여 버렸다.
사람이긴 한가. 사람이라면 그 어린 것을 죽이고는 그 애의 형제를 사위로 볼 생각을 할 수 있나. 문득 웃음이 터졌다. 새하얗게 굳은 가비가 눈을 깜빡였다.
“사실은 본궁도 잘 몰라. 길 귀비를 잘 아는 것은 태후 마마지.”
설란이 태후를 돌아보았다. 태후는 대꾸하지 않았다. 설란이 태후와 함께 차를 마시던 유가란을 향해 눈을 휘었다.
‘감히 누구 아들에게 저따위 계집을 붙여? 사생아 주제에···. 제까짓 게 감히 내 아들의 황후로 들어와?’
피가 솟구쳤다. 그 꼴을 보느니 고꾸라져 뒤지는 게 나을 것 같다. 절대 태후가 사통하여 낳은 계집을 황후로 들이는 꼴은 보지 못한다. 이연이가 죽은 것만으로 세상에 더러운 꼴이란 더러운 꼴은 다 보았노라 생각했다.
여식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좆을 세워 그녀를 안던 사내를 받아냈다. 그것으로 세상에 참담한 일이란 참담한 일은 다 겪었다 믿었다. 잠잠하던 맥이 뛰었다. 이연이의 관 앞에서 맥을 추스를 수 없어 흐느끼기만 하는 설란을 눕힌 뒤 치마를 걷어붙이는 희강을 봤을 때 이미 세상이 한 번 무너졌다.
한데 그녀의 아이를 죽인 계집의 딸이, 그녀의 아들의 정궁이 되는 걸 보아야 한다? 차라리 뒈지는 게 낫다. 죽어도 그 꼴을 볼 수 없었다. 유가란이 태후가 사통으로 낳은 딸이어서 반대하는 게 아니다. 태후의 속에서 나온 계집이 그녀의 속에서 나온 아들과 붙어먹는 꼴을 볼 수 없어서다.
하니 눈앞의 이 가여운 아이는 궁을 나갈 수 없었다. 아이를 낙태할 수도 없었다. 저릿한 기운이 가슴 한편을 지그시 밟아 눌렀다. 가비가. 아니 은환이 가여웠다.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몇 배로 끔찍한 일이다. 결국은 사내가 아닌 아이로 인해 주저앉을 테니까. 한데도 화양을 시켜 아이를 살리라 일렀다. 윤협에게서 달아나지 못하게. 궁 밖의 삶은 꿈꿀 수 없도록. 오로지 제 목적 때문이었다. 유 승상과 태후의 여식이 황후가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흘깃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설란은 아들을 알고 있었다. 은환을 어찌 대하는지도. 결국,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하여 그리도 가학적으로 은환을 사랑할까.
“식은땀을 흘리는구나. 가비.”
“아···.”
“본궁의 앞에선 그리 긴장할 것 없단다. 본궁은 가비의 진짜 시모이지 않으냐. 가비에게 해로운 일이라면 하지 않아.”
설란은 공주들에게 미소 짓듯 미소 지었다. 가여운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폐귀비가 궁금하니?”
“그게···.”
“아니면 폐귀비가 낳은 자식들이 폐귀비의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 내막이 궁금한 거니?”
“마, 마마! 빈첩은···.”
나지막한 속삭임에 은환이 더듬거렸다. 설란은 입술 끝을 부드럽게 당겼다. 문득 곁에 앉아 있던 화양 공주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다만 한 가지 알려주자면···. 희강은 호색한이었지. 제 공주의 장례식에서도 나를 강간한 파렴치한이거든.”
은환이 하얗다 못해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설란은 환한 미소를 머금을 따름이었다.
“하나 그리 앞뒤 구분 못 하고 안은 여인은 나밖에 없어. 파렴치한이라 해도 유난스럽게 여인을 가리는 사내라 나밖에 안지 않았다. 그러니 폐귀비의 회임은 사통이었다. 희강은 그를 바로 알고 있었어.”
“하온데 어찌하여···.”
“후궁이 사통을 들키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유가 무어겠어.”
은환이 설란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헤아려도 이해되지 않았다. 선황은 화 태비밖에 안은 여인이 없다고 했다. 의심하지 않았다. 화 태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이 희강이 바란 사통이기 때문이지.”
“예?”
멍청하게도 되묻고 말았다. 설란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것도 알아듣지 못하느냐는 시선은 아니었다. 다만 그 정도만으로 알아두라는 듯 다문 입술이 완강했다. 문득 화양 공주와 시선을 마주쳤다. 멀리서 투레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과연 하남의 담비는 털이 고르고 윤이 반짝거릴 정도로 흘렀다. 게다가 제법 통통하니 살이 올라 핏물을 제거한 고기는 먹음직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비록 은환은 덩이째 실어나르는 고기를 보고 속이 뒤집히긴 했지만.
사냥에서 짐승을 가장 많이 도륙한 자는 황제였다. 매일같이 조복을 입고 정무를 보는 사내였다. 사냥을 즐긴다 해도 한시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그는 마치 사냥꾼처럼 재주가 좋았다. 말고삐를 움켜잡고 반나절을 달린 사내에게서 풀 내음과 바람 냄새가 났다. 은환은 익숙하게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언제나와 같이 쓰다듬을 받았다. 황제는 쌓이는 사냥감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뒤 총애하는 애첩을 한 팔에 끌어안았다.
“짐의 귀여운 조가비. 잘 있었느냐?”
황제가 물었다. 가비라는 봉작에 성을 더하니 ‘조가비’가 되었다. 바닷물이 내밀고 간 작은 조개껍데기···. 그런 작은 조가비를 내려다보는 양 황제의 시선이 다정했다. 은환은 고개를 들어 사내를 응시했다. 잘 지내고, 말고도 없었다. 딱 반나절이었다. 불상사가 생길 만큼의 시간도 되지 않았다. 은환은 그의 가슴팍에 묻은 바람 냄새를 깊이 들이켰다. 산처럼 쌓인 짐승의 사체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메슥거렸다.
코를 가슴팍에 뭉개며 슬쩍 얼굴을 비비니 황제가 웃었다. 그를 애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아서 그녀는 제 엉덩이를 만지는 손도 내버려 두었다. 화양 공주가 제 남편과 함께 그를 지나가며 징그럽다는 듯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은환은 낯을 슬쩍 붉힌 뒤 고개를 숙였다. 눈가와 볼에 수차례 입 맞추던 황제가 은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짐이 잡은 사슴 고기를 먹자. 우리 아가도 아주 좋아할 거야.”
윤협이 은환의 허리를 안고 침실로 들어섰다. 해가 가물거리며 산등성이 너머로 넘어가자 도독부는 연회 준비로 바빴다. 그는 해쓱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모친을 향해 눈짓하여 인사한 뒤 은환을 안고 그녀를 지나쳤다.
그를 본 화의 공주가 오라버니가 어찌 저리 어머니께 무심할 수 있냐며 다 들으란 식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태비는 딸의 목소리를 작은 지저귐으로 여기는 듯 표정이 없었다.
“말을 달리는 내내 네 걱정만 했어.”
“하오나 사냥감은 제일 많이 잡으셨는걸요. 빈첩은 폐하께서 짐승을 하도 많이 도륙하셔서 셀 수도 없었어요.”
가시 돋친 어조였다. 죽은 짐승 중에는 새끼를 밴 사슴과 수달도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불룩하게 불러 축 늘어진 것들. 은환 왠지 그것들을 보니 배 속의 어린 아기가 떠올랐다. 사슴을 먹고 싶지 않았다. 수사슴이든 암사슴이든. 살아있는 것을 죽였다. 새끼 밴 짐승까지 죽였으니 반드시 원한을 품으리라. 그리고 그 원한이 아기에게 해가 되어 돌아올 것 같다.
“낭군이 왔는데 어찌 표정이 그리 살갑지 않아.”
윤협이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은환이 치대며 안기지 않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태후가 무어라 했나? 아니면 태비가···.”
“태후께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태비께서도 잘 해주셨고요.”
“하면?”
은환이 망설였다.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던 기다란 손이 은환의 턱을 부드럽게 쥐었다.
“새끼를 밴 죽은 짐승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아서···.”
고개를 숙일 수 없어 시선을 바닥에 깔았다. 윤협이 은환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운을 뗐다.
“아가에게 원한을 가질까 봐요. 새끼를 밴 채 죽었으니 분명 우리 아가에게···.”
“하하.”
심려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리는 은환을 향해 윤협이 웃음을 터트렸다. 은환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낯빛을 굳혔다. 쾌청하게 웃던 윤협이 작은 몸을 당겨 안았다. 두 팔 안에 감긴 몸이 포근했다.
“미물이 그런 한을 가질 리 있겠느냐.”
“하오나···.”
“우리 귀여운 조가비가 마음이 어여뻐서 심기가 불편한가 보군.”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던 은환이 그를 쏘아보듯 응시했다. 그런 게 아니다. 미물이라고는 하나 살아있던 것이 억지로 죽임을 당했는데 어찌 한이 맺히지 않을까. 하물며 그를 죽인 사내의 첩이 회임 중이지 않나. 은환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낯빛을 딱딱하게 했다.
호방하게 웃던 윤협이 도리어 딱딱하게 굳는 은환의 얼굴을 보더니 자리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제 허벅지를 툭툭 치며 올려다보았으나 은환은 움직이지 않았다. 윤협이 낮게 한숨 쉬며 그녀의 손끝을 당겼다.
“환아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내 여흥으로 죽임을 당했는데 어찌 한 맺히지 않을까. 짐이 환아의 깊은 생각을 헤아려주지 못했구나.”
윤협이 시선으로 아내의 연약한 얼굴을 더듬었다. 누르듯 그를 쳐다보던 은환이 그의 허벅지에 앉았다. 기다란 방망이가 누운 자리였다. 볼기와 볼기가 맞닿은 자리 움푹하게 팬 회음부에 그의 방망이가 닿았다. 문지르듯 엉덩이를 앞뒤로 들썩이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순식간에 음욕으로 마른 얼굴이 그녀를 위협적으로 쳐다보았다. 은환은 아무것도 모른 척 눈을 사붓이 감았다가 뜨며 두꺼운 가슴팍을 더듬었다.
“가비.”
탁한 음성이었다. 은환은 그의 탄탄한 목덜미에 입술을 뭉갰다.
“그만.”
은환은 듣지 않은 척 그의 목에 매달리며 풍만한 가슴을 비볐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젖꼭지가 손가락 사이에 끼였다. 은환은 달뜬 신음을 터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애달픈 그녀의 눈과 달리 윤협은 욕정으로 새카맣기만 했다. 불현듯 가슴팍을 더듬던 손이 잡혔다. 한 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는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던 손이었다.
“짐을 짐승으로 만들지 마라.”
욕정에 쉰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은환은 말끄러미 사내를 보다 속삭였다.
“접문해주세요.”
***
가랑이를 얽는 것처럼 입술이 빨개지도록 혀를 얽던 두 사람은 연회가 막 시작되기 전 간신히 침실을 나설 수 있었다. 강 친왕 형제와 같이 사냥에 참여했던 유 승상의 양자가 부친을 보좌하며 연회에 참석해있었다.
은환은 긴 머리를 한 아름 틀어 올리는 대신 단정하게 묶어 한쪽으로 늘어트렸다. 비녀나 화잠은 일체 올리지 않고 다홍색의 얇은 삼만을 입은 그녀는 가을의 호젓한 바람을 막기 위해 백호의 가죽을 어깨에 덮은 채였다. 지난해 황궁의 사냥터에서 황제가 잡았다던 백호의 가죽은 털이 고르고 질이 좋았다. 사뿐사뿐 황제와 걸어온 은환이 그와 나란히 앉았다. 황제는 익숙하게 총희를 품에 안은 채였다.
황제가 상석에 앉아 자리를 채우자 가장 먼저 하남 일대의 토호들과 관리들이 모여들어 진상품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 건너 양인들이 만든 패물부터 코끼리의 상아를 깎아 만든 공예품까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려한 진상품들이 줄지어 올라왔으나 황제는 시큰둥할 뿐이었다.
대신 은환의 허리를 안고 볼에 입 맞추며 나직이 물었다.
“마음에 드는 진상품이 있나. 가비.”
전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전부를 그녀의 손에 쥐여줄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은환은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임신한 아내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함박 웃던 윤협이 다시 시큰둥해졌다. 은환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말고 가란을 쳐다보았다.
얇은 다홍색 삼만 입은 은환과 달리 가란은 낮보다 더욱 화려해진 차림이었다. 머리에 얹었던 비녀며 소체가 모두 각각 달랐다. 문득 가란과 시선이 얽혔다. 곧장 눈을 돌리려 했지만 어둑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는 통에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시선을 옮기려다가 저를 빤히 보는 여자를 다시 응시했다. 봄이 오면 윤협은 저 여자와 혼례를 올릴 것이다. 이렇게 보란 듯 그의 옆을 차지하고 앉은 것 또한 이번이 마지막일 터.
지난 계절 황제가 제 손으로 잡았던 백호의 가죽을 그녀의 어깨 위에 직접 덮어주었다지만 그저 죽은 짐승의 가죽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은환은 태후를 닮은 여자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움켜잡았다. 오한이 옅게 들었다. 언젠가부터 같은 이유로 이성을 잃는다는 것을 알았다.
절단이 날 정도로 파헤쳐지다 아물기를 반복. 황제는 혼례를 올리지 않으리란 말은 하지 않았다. 혼례를 올린다 해도 변하지 않으리라 말할 뿐. 그러니 다음 계절이 돌아오면 여자는 그녀의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은환을 보는 게 아니라 은환의 자리를 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속이 더부룩해졌다. 태후의 시선과 황자들의 시선 또한 의식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가란만이 그녀를 본다고 생각했을까. 볼이 달아올랐다. 마침 마지막으로 올라온 진상품이 태감의 손에 들려 옮겨졌다.
연회의 막이 올랐다. 하늘거리는 무복을 입은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허리를 쓰다듬던 팔이 은환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음악이 멈추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던 무희들이 예를 올린 뒤 물러갔다. 문득 자리에 앉아 있던 승상이 일어났다.
“폐하. 신의 가문에만 내려오는 비기가 담긴 술을 폐하께 진상하여 이 복된 날에 기쁨을 더하고자 하옵니다. 비록 어주와는 비교할 수 없이 미흡하오나 소신의 여식이 폐하를 위해 성심껏 빚었사오니 진상을 윤허하여주신다면 황은에 감사할 길이 없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고두하는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은환은 승상을 보다가 황제의 파르스름한 턱을 보았다. 어주를 마시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환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을 위해 그리고 황제를 위해 술을 빚었다는 여자를 생각했다. 황제가 윤허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가란이 일어나 몸종을 통해 전달받은 술을 들고 다가왔다. 은환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협이 그녀를 보았다.
“유 소저께서 직접 폐하께 술을 올리려 하나 봅니다.”
윤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환은 그를 동의로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란을 향해 비켜주었다. 그러나 곧장 손목이 잡혔다. 은환이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자리에 앉아.”
“폐하.”
평연한 표정이었다. 일그러짐 하나 없이 반듯했다. 그러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은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말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란을 일으킬까 두려웠다. 가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제가 태감에게 눈짓했다. 태감이 가란에게 다가와 술을 받으려 했다. 은환은 좌불안석이 되어 낯빛을 굳혔다.
“소저께서 노비에게 술을 주시면 폐하께 직접 진상하겠나이다.”
표정을 가다듬고 있는 가란을 향해 태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은환은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빈첩이 오늘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침실로 돌아가 있으려 합니다.”
어주의 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윤협이 은환을 바라보았다. 스산한 시선이었다. 은환은 개의치 않았다. 잡힌 손목을 당겼다. 분분한 노기를 삼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던 황제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기어코 손목을 놓지 않던 황제가 입술을 열었다.
“침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를 돌았다. 황제와 비를 살피던 태감이 가란에게 길을 터주었다. 가란은 사뿐히 황제의 옆에 앉았다. 걸음을 옮기던 은환은 그들의 뒷모습을 길게 쳐다보았다. 가란이 황제에게 술을 올렸다. 더운술인지 김이 모락모락 났다.
“마마.”
소 상궁의 부름이 들렸다. 은환은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는 매일같이 볼 모습이다. 황제와 혼례를 올릴 유일한 여인이니.
‘개두를 쓸 수 있는 황제의 유일한 여인···.’
문득 신방에 앉아 가란의 개두를 벗기는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서느런 기운이 가슴 한편을 야금야금 좀먹기 시작했다.
***
“마마. 태의를 부르리까?”
소 상궁이 물었다. 몸이 불편하여 자리를 떠난다는 말을 기억한 것 같았다. 은환은 고개를 저었다. 윗전이 되어 보니 상궁들이 참 섬세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될 말을 기억하여 저리 세심하게 챙기는 걸 보면 말이다.
“산책을 좀 하고 싶어.”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혼자서···.”
“하오나 밤이 깊었는데···.”
“괜찮아. 요 앞만 걸을 거야.”
“속이 정말로 편하지 않으십니까?”
소 상궁이 다시 물었다. 은환은 염려스러운 얼굴을 한 여자를 깊이 보다가 입술을 뗐다.
“소 상궁은 본궁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아나?”
“예?”
소 상궁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아직 회임을 공표하기 전이었다. 한데 모두가 그녀의 회임 사실을 알고 있었다. 궁에 눈이 얼마나 많고 귀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궁 밖의 공주까지 알 정도니 소 상궁이라면 당연히 알겠지. 태후가 내민 약을 누가 바꿔놓았겠는가. 은환은 쓴 미소를 지었다.
“아는구나.”
“마마. 노비는···.”
“괜찮다. 후궁이라 해도 본궁은 비천한 출신이었으니 혼자 있는 것이 두렵지 않단다.”
놀란 소 상궁이 말을 더듬었다. 은환은 그녀를 지나쳐 후원으로 나갔다. 보름달이었다. 불이 밝아 어둠이 옅던 연회장과 달리 후원은 이슥하고 쌀쌀했다. 은환은 추위도 잊고 연못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린 연봉의 윤곽이 옅고 가늘었다. 가능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앞으로의 일상이 오늘과 같을 것이다. 한데 매일 비감에 젖어 청승을 떤다면 어찌 어미가 될 수 있을까.
그래. 어미. 그녀는 어미가 될 몸이었다. 배 속에 아기가 있었고 내년 가을이면 강보를 안고 있을 터였다. 여자로 살지 못하면 어미로 살면 돼. 그러면 돼···. 비록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첩 신세는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황제는 아비와 다르니까.
아기를 어여삐 여길 거다. 지금도 ‘우리 아가’라며 예뻐하지 않나. 게다가 다른 여인은 안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은환은 연못에 비친 달을 응시했다. 노란 달 아래 가느다란 그녀가 비쳤다.
‘그 말을 믿니. 은환?’
물에 비친 자신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심장이 조금씩 저몄다. 스스로 물었다. 황제가 약속했던 바를 믿느냐고. 은환은 황제를 믿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사내의 말에 일생을 거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그러니 대단한 것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조은환.’
황제가 진심을 보이며 사랑을 속삭일 때마다 맺혔던 눈물이 식었다. 매번 같은 이유로 이성을 잃고 눈물을 흘려도 가슴팍에 안기어 지아비의 온정을 느끼면 진정이 되는 것이다. 회임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하나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은환이 아무리 울며 도리질을 해도···. 어느 것도,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편에서 생각하노라면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이리라.
어느 황제가 한낱 계집의 눈물에 국모의 자리를 비워둘까. 하물며 은환이 그 자리를 대신할 만큼 세도 있는 가문의 여식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은환의 고통은 생떼에 불과한 것이다.
‘이젠 아이까지 가졌으니 더욱 도리가 없어.’
황녀의 말을 곱씹으며 둥둥 뜬 달을 바라보았다. 비감에 젖은 채라 물 위 뜬 부연 달빛마저 덧없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었다. 소슬함에 어깨를 웅크린 은환이 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
두 잔째였다. 가란은 술잔을 덮는 우아한 손가락에 흠칫했다. 고개를 들어 황제의 용안을 살폈다. 짙은 눈썹 아래 기다란 눈이 오연했다. 살피래야 살필 수 없는 눈이었다. 어찌하여 뒤틀렸는지 하여 그녀가 무엇을 실수했는지.
술병을 거둔 채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다소곳이 앉아 그가 무엇이라도 하문하기를 바랐다. 트집을 잡고 싶다면 트집이라도 잡아 그녀가 입을 열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언젠가부터는 너무 간절하여 결례라도 저질러야 하나 하는 멍청한 생각까지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생각해도 멍청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시선을 끌고 싶었으니까. 다행히 태후께서 그녀의 마음을 알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었지만···.
“폐하.”
어렵게 입술을 떨어트렸다. 뱀 앞에 쥐새끼처럼 웅크린 채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린 듯 기려한 얼굴에 수치스러움은 잊혔다. 간절했다. 결코, 눈길을 주는 법 없어 더욱 매달리는 분이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녀가 빚은 술이 마음에 차지 않으신지요? 아니면···.”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반응하지 않는 황제를 보다 슬쩍 태후를 돌아보았다. 문득 그녀의 옆에 앉은 황제의 생모가 눈에 들어왔다. 모란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가시처럼 돋아나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 땀이 배어났다.
이 자리에 앉아 교태를 부리던 계집이 떠올랐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세도가 귀족의 여식도 아니오, 대 토호의 여식도 아닌 계집이었다. 한낱 수방의 궁녀였던 천한 것이···. 고작 재물로 벼슬을 사려드는 장사치와 그의 천첩을 부모로 둔 계집이 귀인에서 시작하여 비의 자리까지 올랐다. 고작 반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황제가 단단히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단 하룻밤으로 후궁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 요분질이 얼마나 천박하고 요사스러울까. 유곽의 매춘부가 따로 없었다. 그래. 태후는 가비란 계집이 매춘부나 다름없다고 했다.
가란은 그저 속이 상했다. 태후와 황제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적모였다. 황후전의 유모가 그를 키우기도 했다. 한데도 황제는 노골적으로 태후를 싫어했다.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가 아니라 태자이던 시절부터 그리했다고 했다.
연유야 많다고 했지만, 궁 밖에 사는 가란에게는 모두 두루뭉술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시처럼 돋아난 듯 자리를 지키고 앉은 여인. 그녀를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황제의 생모인 태비가 태후와 지독히도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런 것이 아닐까.
태후의 말로는 그랬다. 화 귀비이던 시절부터 태비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총희였는데 그 총애를 등에 업고 보위에 오를 아들까지 낳아 번번이 곤전을 능멸하며 괄시했다고 했다. 그런 태비의 영향으로 장차 보위를 이을 태자가 나쁜 영향을 받을까. 당시 황상이시던 선황께서 친히 장남을 황후전에서 키우게 했다 하였다.
그런데도 태비는 여전히 태후를 우스이 여겼고 그녀의 장남인 황제 또한 태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가란. 너만이 희망이다. 네가 황후가 되어 후궁의 법도를 바로 세우고 폐하와 태후 마마의 관계를 돈독히 만들어야 한다.’
아버지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란만이 희망이라고 했다. 굳이 희망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란은 황제의 여인이 되고 싶었다. 제게 언제나 극진한 태후를 그리 능멸하고 아버지를 위협하며 유씨 가문과 그들의 지지대가 되는 일가들을 조정에서 걷어내려 해도 마음은 언제나 황제를 향했다. 비록 서느런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사내이지만. 황제가 그리 차갑고 냉랭할수록 사랑은 집요해졌다.
“폐하.”
대답은커녕 눈길 한 번 돌리지 않는 사내를 향해 가란이 작게 그를 불렀다. 문득 진상한 술을 대신해 어주를 마시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유 승상.”
“예. 폐하.”
“내일 짐과 함께 범 사냥에 나서볼 텐가?”
가을 사냥의 별미는 범 사냥이었다. 가장 마지막 날 이뤄지는 사냥은 황궁의 고상한 사내들이 즐기는 여흥 중 가장 큰 여흥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나 범을 잡은 이는 황제였다. 그는 범의 털과 가죽을 모친과 누이들에게 각각 나눠준 후 형식적으로나마 태후에게도 가죽을 나눠주었다.
아마 내일도 황제는 범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는 가장 질이 좋은 부위의 털과 가죽은 가비에게 돌아가겠지. 황제는 솜씨 좋은 화혜장에게 가비의 털신을 만들라고 명령을 내릴 것이다. 또 그것을 생각하니 속이 탔다. 태후가 어째서 그런 계집을 황제에게 안겼을까. 모든 게 가란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분했다.
황제가 그녀를 후궁으로 들여서가 아니다. 아주 조금의 마음이라도 얻어야 할 그녀의 입장에서 그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물고 싶은 것을 참고 있을 때였다.
“폐하. 신의 다리가 불편하여 보좌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신의 장남인 유 중랑장이 성심을 다해 폐하를 보좌할 것이옵니다.”
“안타깝군. 젊은 시절 수차례나 범을 잡은 그대가 아닌가.”
황제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저 오연한 눈이 휘어지며 입술 끄트머리가 당겨졌을 뿐인데 서느런 빛이 맺혔다. 가란은 호흡을 멈추고 부친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범이 두려운 것은 아닐 테고. 낙마하여 다리를 다쳤다고는 해도 그대가 승마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어주를 비운 그가 매끈하게 미소 지었다. 부친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있던 오라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시 다른 게 무서운가?”
“폐하.”
어주가 담겼던 잔의 겉면을 쓸던 윤협이 물었다. 가란이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주를 삼켜 텁텁한 술맛을 지워내려 했으나 입 안에 남은 술 향이 독했다.
“승상.”
“송구하오나 신이 늙고 우둔하여 폐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사옵니다.”
당장이라도 고두하여 사죄할 기세로 고개를 숙인 늙은이를 향해 윤협이 미소 지었다. 그는 더 도발하지 않았다. 도발하여 얻을 실익이 없었다. 앙상한 가시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그를 응시했다. 윤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승상의 여식이 그를 뒤따르려 했다. 그는 태감에게 손짓했다. 태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계집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윤협은 자신을 따라 일어나는 모친을 보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그 계집애와 기어코 혼례를 올리려고?”
“기억나지 않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기억나지 않는대? 다 기억나! 다 기억난다고!”
설란이 악귀처럼 소리를 질렀다. 윤협은 창백한 눈으로 어미를 바라보았다. 지아비를 잃고 넋을 잃은 여자였다. 아니, 그전부터. 아버지가 살해되기 전부터 이따금 정신을 놓았다고 했다.
아마도 화예 공주가 죽었을 때였을 것이다.
죽은 딸이 든 관 앞에서 범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데 그런 욕을 보인 사내가 그녀의 지아비 아니었나. 그자가 눈앞에서 죽으면 머리에 꽃을 달 게 아니라 춤을 춰야 할 텐데 어미는 성마른 얼굴로 그를 몰아붙였다. 유 승상의 여식과 혼인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게 그 악다구니의 이유였다.
“증언으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 않으십니까. 하여 태후가 어머니의 입을 막았습니다. 넋을 잃고 깨어날 때마다 하는 말이 각기 다르니 그리할 만도 하지요.”
“너!”
“자중하십시오.”
“윤협아. 제발···.”
씨근거리던 어미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여전히 아리따웠다. 주인을 잃은 아름다움이었다. 아비가 없으니 어미의 아름다움은 무용했다. 윤협은 마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움켜잡은 손을 걷어낸 뒤 입술을 열었다.
“환아에게 이상한 입김 불어넣지 마십시오. 이나를 통해 무언가를 전했단 것 압니다.”
설란이 낯을 굳혔다. 윤협은 그녀를 두고 뒤돌려 했다.
“내가 무얼? 내가 무얼 전한 줄 알기나 하니?”
“···.”
“나는 그 애가 배 속의 아이를 죽이려 하기에 그걸 막은 것일 뿐이야.”
“내가 알아서 합니다.”
“네가 알아서 하긴 무얼 알아서 해? 그 애가 왜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면서 기어코! 그 계집애와 혼인하려 하지 않느냐. 그 애가 그걸 견딜 것 같아?”
설란이 낯을 일그러트렸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죽어도 그 꼴은 못 본다. 여숙영 그년의 딸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품은 아들인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가. 무엇을 지키려 그녀가 지금껏 살았는지 모르겠다. 여숙영 그 씹어 죽여도 모자랄 계집의 딸년이 그녀의 아들을 당당히 가지는 꼴을 보려 지금껏 살았을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네가 나 사는 꼴을 못 봤니? 못 봐서 이래?”
악다구니를 쓰며 아들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울음이 다시 터졌다. 연회장을 나올 때부터 유 승상, 아니 유경효 그자의 낯짝을 볼 때부터 허파가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눈물이 새어 나왔다. 희강을 죽인 자였다.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가 보는 앞에서 희강을 베었던 자였다. 한데 희강의 아들이 그자의 여식과 혼례를 올린다고? 미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돌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일이다.
“들어가십시오.”
그녀를 헤아리듯 어둑한 눈으로 응시하던 아들이 설란의 손을 떼어내며 읊조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씨근거리던 설란이 아들의 뺨을 후렸다. 철썩 소리가 나며 윤협의 뺨이 돌아갔다. 아무리 아랫것들을 물린 채 마주 보고 있다고 하나 설란의 행위는 지나치게 무도하고 거침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윤협은 그저 아들일 뿐이었다. 황제가 아니라 내 아들. 희강이 남긴 분신···. 하니 어려울 것 없었다.
“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진정 모르니?”
“압니다.”
“한데 어찌 네가 이럴 수 있어!”
설란이 악에 받쳐 쏘아붙였다. 희강이 남긴 아들이었다. 황후전에 떼어놓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그리워하던 아이였다. 한데 희강의 죽음을 알고도 저런 낯짝이다. 아주 아무렇지 않다는 양, 아비를 죽인 원수의 딸과 혼례 치르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아들에게까지 미친년 취급을 받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한데 제 배 아파 낳은 아들이 기어코 지아비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정말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씨근대고 있는 설란을 향해 고개를 바로 한 윤협이 읊조렸다.
“어머니를 강간했던 자가 아닙니까?”
“너!”
나지막한 비수였다. 차갑고 예리한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감각이었다. 설란은 덜덜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윤협은 망설임이 없었다. 뺨을 후리려 들어 올리는 어미의 손목을 움켜잡은 뒤 뇌까렸다.
“누이의 관 앞에서 어머니를 범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도 그리 서슴지 않고 아내를 욕보였던 사내입니다. 한데도 그리 좋습니까? 사랑하여 미칠 것 같습니까?”
명치가 뚫린 얼굴이었다. 윤협은 젖은 얼굴로 매달리는 여자를 놓았다. 순간 무릎에 힘이 풀린 설란이 주저앉았다. 윤협은 설란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시선을 맞췄다. 설란은 하얗게 질린 채 아들을 더듬었다.
희강의 윤곽이었다. 속절없이 아기들을 빼앗고 다시 회임시키던 그 시절, 늠름하고 훤칠한 지아비의 얼굴이었다. 하여 더 맥이 풀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황후의 자궁처럼 희강의 아이를 낳던 시절을 생각했다. 이리도 매정하게 자란 윤협을 두고 간신히 해산한 핏덩이를 연상하긴 힘들었다.
‘그래도 내 아기지. 내 사랑스러운 아가였어.’
가물거리는 그 시간을 되뇌며 아들을 응시했다. 희강도 제 어미에게 이리 매정했을까. 문득 삐거덕거리며 찾아오는 심통을 느끼며 아들의 어린 날을 떠올렸다. 윤협은 효자였다. 유모라 해도 결국 황후전의 사람이었을 테니 생모에 한해 좋은 소리를 늘어놓지 않았을 텐데 윤협은 언제나 그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걸을 때부터 어미를 찾으며 귀비전으로 데려가 달라 울었다 했다. 떼어놓은 아들이 어미를 찾으며 울었다고 할 때면 속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딱 백일 동안만 함께했던 그녀의 아가였다. 젖을 먹이며 이마에 입을 맞추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닳을까 두려워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아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고 헤어질 시간이 두려웠다. 황후전에서 유모가 찾아와 윤협을 가져간 날은 여전히 생생했다. 아장아장 걸음을 걸으며 그녀를 다시 찾아왔던 날 또한 마찬가지로 선명했다. 젖니가 난 입술로 옹알이가 아닌 제대로 ‘어머니’ 하고 부르며 달려오던 어린 아들이 훤칠한 얼굴 위로 겹쳐졌다.
어린 시절 윤협은 종종 몰래 그녀를 찾아왔다. 희강은 태자의 위에 봉해지고도 어미젖을 떼지 못했느냐며 고작 다섯 살 먹은 아이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설란은 언제나 아들의 발걸음이 기뻤으므로 내치지 못했다. 아니. 내칠 수 없었다.
어미를 기쁘게 하려 들꽃을 따오던 아이를 어떻게 내칠 수 있을까. 중반에 맛있는 간식이 나왔다며 몰래 들고 와 어미의 입에 넣어주던 아이를 어떻게 혼낼 수 있을까. 설란에게 장남은 언제나 가슴이 찢길 만큼 애달픈 존재였다. 한데 언제부터 이렇게 매정해졌을까.
“돌아가십시오.”
윤협이 물렸던 주위를 다시 불러들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자녕궁의 상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설란은 아들을 말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뒤돌 것 같지 않던 윤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윤협아.”
젖기 시작한 목소리가 끔찍했다. 설란은 더 추한 꼴을 보이기 전에 마저 말을 이었다.
“어미와 아비로 인해 받았던 상처···. 네게 얼마나 많은 독이 되었을지 알고 있단다. 정말 미안해. 그러나 이젠 아버지를 용서해주렴. 이 어미를 보아서라도···.”
윤협이 고개를 돌렸다. 설란이 울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했다. 어미가 우는 것은···. 지난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안겨 우는 어미. 누이를 끌어안고 우는 어미. 아비가 죽고 난 이후로는 넋을 잃고 저에게 안겨 울었다. 그 눈물이 얼마나 비통하던 윤협으로선 지겹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지겨워 염증을 느끼면서도 맥이 풀렸다.
그러니 더욱 싫었다. 더욱 환멸이 들었다. 은환이 우는 것이 싫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어미를 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어미를 닮아서가 아니라. 어미처럼 눈물을 흘려서가 아니라···. 자신 또한 어미를 울리던 시절의 아비가 된 것 같았다.
그리 살고 싶지 않은데 그자의 외피를 하고는 은환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걸음을 돌렸다. 주희강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치세에 만민이 얼마나 복을 누렸든 간에 끔찍한 사내였다. 어미가 악다구니를 쓰며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나 사는 꼴을 못 봤니?’
웃음이 났다. 그 수욕을 알지 못할 리 없었다. 열 살 하고 두엇 더 먹은 화옥 공주나 완친왕같이 어린 형제자매들이 아니라면 모를 리 없었다. 선황이 얼마나 가혹하게 그녀를 사랑했는지. 그러나 어미의 눈은 어땠나. 뱃가죽이 마르기도 전에 그녀를 회임시키는 남자에게 미쳐 정신을 놓아버렸다.
은환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다. 은환을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한데 어미는 제게 미안하다 목 놓아 울면서도 너는 네 아비와 같아질 거라는 눈이었다. 네가 감히 그리 살지 않을 리 없다고 읊조리는 눈이었다.
유경효와 태후의 딸을 황후에 봉한다면 필시 너도 그리 살 것이라고. 그러나 유경효의 딸은 패에 불과하다. 유경효와 태후의 사지를 끊어낼 패. 그러니 아비의 복수를 원한다면 그녀도 받아들여야 했다.
선황의 죽음을 증언할 이가 그녀인데도 정신을 놓았다는 이유로 넋 나간 계집의 넋 잃은 소리로 치부하지 않았는가. 유씨 일가의 세가 그리도 막강했다. 조정에서 걷어내야 할 유경효의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천인공노할 역적의 죄를 짓고도 그들을 끊어낼 수 없는 이유였다.
하나 유경효의 여식을 황후로 맞이하면 달라진다. 황후의 아비는 관직에 나설 수 없다. 사병 또한 일정 이상으로 수를 줄여야 하며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재산 또한 일부를 황실에 헌납해야 한다. 양자인 중랑장 유정헌의 관직이야 오를 테지만 조정에 닿은 그의 입김을 걷어낼 수는 있었다.
아비를 벤 사람이 유경효다. 분명 어미가 그자의 얼굴을 그곳에서 보았다. 어미의 증언이 매 순간마다 다르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사냥 중 그를 보좌하기 위해 따라나선 유경효가 어미의 앞에서 아비를 죽였다는 것.
간신히 살아난 어미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관철하려 했으나 유경효의 입김이 닿은 세력이 조정에 잠식해있었다. 걷어내려면 유경효를 쳐내야 한다. 그러니 유가란은 필시 황후가 되어야 했다.
‘그 역적들은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추락할 것이다.’
유경효의 낯짝을 곱씹으며 별채에 도착한 윤협이 불빛만이 환한 둥근 창을 보았다. 눈썹이 좁혀졌다. 흩어질 듯 여윈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은환은?”
상궁을 돌아보며 물었다.
“홀로 산보를 나가셨습니다.”
윤협이 좁혔던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소 상궁이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너는 그것을 두고 보았느냐.”
“폐하. 그것이···.”
“너는 짐의 여인이 아직도 네가 부리던 아랫것으로 보이나?”
윤협이 서늘하게 일갈했다. 한 음절 한 음절, 벼린 듯 날카로운 물음이었다. 소 상궁이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윤협이 발발 떠는 여자를 시퍼렇게 노려볼 때였다. 부스럭거리는 기척과 함께 안타까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
“가까이서 보니 정말 곱긴 곱군요. 가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습니다.”
“···강 친왕 전하이십니까?”
어둑한 밤빛에 윤곽이 희끄무레했다. 사냥복을 입은 사내는 술에 절여져 있었다. 은환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한 발 물리며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사내가 가슴의 여밈을 끌어 내리려 한 것도 아닌데 웅크린 채 옷차림을 단속해야 할 것 같았다.
“아. 이 몸을 한눈에 알아보는군요. 하하. 날 잊을 수 없었나 봐.”
무슨 헛소린지 알 수 없었다. 알아본 것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오늘 낮 사냥을 나서기 전 그가 태후와 담소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은환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응시했다. 황제가 기거하는 침실이었다. 오나라의 건국 황제인 주엽명이 하남의 도독으로 시작한 고로 하남의 도독부는 오나라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그리하여 가을마다 하남으로 사냥을 떠나는 것이라고. 도독은 매년마다 황제를 모시기 위해 별채를 비워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니 강친왕이 제정신이라면 이리로 발걸음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틀거리는 발을 보니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술에 많이 취하셨나 봅니다. 태감을 불러드릴까요?”
은환이 조심스레 물었다. 강친왕이 고개를 들었다. 번들거리는 눈이 음습하고 느꺼웠다. 은환은 불길함에 자리를 뜨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손목이 홱 잡혔다. 은환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다. 뭉툭한 윤곽이 서늘했다.
“전하!”
“수방에 있었다지요? 이리 고운데 어찌 본 왕이 찾지 못했을까요? 응? 내 왕비의 자리는 주지 못해도 측실로 들어앉힐 수 있는데.”
그가 마른 웃음을 흘렸다. 미친 것 같았다. 은환은 잡힌 손목을 뽑아내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버둥거릴수록 조악한 힘이 강해졌다. 맥이 세차게 뛰며 오한이 들었다. 사내가 호흡할 때마다 고기의 기름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했다. 끔찍함에 입술을 악물고 밀어내려 할 때였다. 강친왕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은환이 비명을 질렀다. 겁도 없이 황제의 후궁을 추행하다니.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
“전하! 이게 무슨!”
비명을 지른다면 필시 사람이 모여들 테지만 황제의 후궁이 친왕에게 추행당했다는 소문은 내고 싶지 않았다. 은환은 억세게 입술을 문 채 그의 손을 걷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저항할수록 강친왕은 더욱 대범하게 그녀의 엉덩이며 가슴을 더듬었다.
거머리같이 달라붙는 손길에 속이 메스꺼웠다. 심지어 앞섶이 불룩하니 커지고 있었다. 끔찍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가슴팍을 밀치며 주먹질을 하던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렸다. 술에 취한 채 정신없이 그녀를 더듬고 있던 사내의 뺨이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돌아갔다.
“흑···.”
울음에 젖은 숨결이 거칠게 쏟아졌다. 뺨이 왼쪽으로 돌아갔던 사내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왔다. 소름이 돋았다. 이슥한 밤에 가린 눈이 매섭게 번들거렸다. 은환은 덜덜 떨며 입술을 열었다.
“···정신을 차리세요.”
“맹랑한 계집 같으니. 고작 낯짝 하나 반반하다고 겁도 없이···!”
강친왕의 손이 침의 자락을 뒤집었다. 은환이 놀라 얼어붙은 채로 허벅지를 붙였다. 그러나 거친 손길이 그녀의 음부를 만지기 위해 비집고 들어왔다.
“아악!”
결국, 비명이 터졌다. 강친왕의 다른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어코 허벅지를 벌린 사내가 앙가슴에 입술을 뭉개며 살 내음을 들이마셨다. 발기한 물건이 허벅지에 닿았다. 그녀가 버둥거리며 온몸을 뒤틀었다.
“흡, 싫어. 놔아악!”
가슴골에 혀가 닿았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지네가 가슴골에 앉은 것처럼 더럽고 불쾌했다. 헐떡이며 들썩거릴 때였다. 가슴을 핥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어나.”
냉랭한 명령 뒤로 히익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몸을 짓누르는 힘이 사라졌다. 은환은 눈을 떴다. 달의 희붐한 빛이 기다란 칼 위로 흘렀다. 아찔한 섬광이었다. 그녀의 위에 엎어져 미친 짓을 하고 있던 강친왕이 발딱 일어나는 듯하더니 뒤로 넘어졌다.
“폐, 폐하!”
형님이 아니라 폐하였다. 막내 완친왕을 비롯한 동복의 형제들과 달리 강친왕은 덜덜 떨며 극도로 공대했다. 고두하기 위해 다시 몸을 둥글게 만 강친왕이 칼을 보며 히익 거렸다. 한심했다. 저리 발발 떠는 주제에 황제의 후궁을 탐하려 했다니. 은환은 젖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달려온 소 상궁이 오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러나 무어라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서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소 상궁이 훌쩍거리기 직전의 얼굴로 그녀의 어깨며 차가운 손 따위를 주물렀다. 은환은 정신없는 얼굴로 부축을 받다가 들려오는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아악!”
기다란 칼이 강친왕의 손을 뚫었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검날을 붙잡았다. 은환의 음부를 뒤집던 손이었다. 소 상궁이 그녀가 보지 못하게 어떻게든 그녀를 잡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었다.
“마마. 침전으로 드시옵소서.”
간절한 부탁이 들렸다. 그러나 은환은 다리를 움직이기엔 맥이 풀렸다. 칼이 강친왕의 손가락을 하나씩 도려내는 것 같았다. 종내는 다섯 개 모두 끊어낼 것처럼. 징그러운 광경이었다. 듣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비명이 들렸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폐하.”
손을 난자하던 칼이 움직임을 멈췄다. 강친왕이 벌벌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핏물이 고인 듯 형형한 눈에서 물기가 주르륵 떨어졌다. 소란에 하인들과 도독 일가가 모이기 시작했다. 은환은 옹송그린 채 가쁘게 호흡했다. 이목이 모이고 있음에도 황제는 여전히 칼을 뽑지 않았다. 잠시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은환이 그를 향해 기어갈 마음으로 움직였다. 소 상궁이 그녀의 의지를 알고 부축했다.
“수, 술에 취했습니다. 하여, 하여 폐하의 후궁인 줄 모르고··· 저, 정말입니다. 눈을 뜨니 가비께서··· 아흐윽!”
칼이 기어코 마지막 하나 남은 손가락을 끊어냈다. 난자된 손이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파헤치듯 끔찍해진 손을 본 강친왕이 짐승처럼 울었다. 태후와 연친왕이 달려와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이 무슨!”
“형님! 살려주시오! 나 좀···.”
짐승처럼 울던 강친왕이 연친왕을 보며 소리쳤다. 태후는 바짝 굳은 얼굴로 형제를 보다 황제를 응시했다.
“이 무슨 일인가?”
황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태후를 보는 일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말려야 했다. 손을 찢었던 검이 뽑혔다. 핏물이 주르륵 검날을 타고 흘렀다. 칼끝이 짐승처럼 우는 사내의 목울대에 닿았다.
“폐, 폐하. 제발 목숨만은···.”
강친왕이 벌건 얼굴로 목숨을 빌었다. 정말이지 목이라도 칠 기세였다. 은환이 그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폐하···.”
머리를 저으며 간곡히 빌었다. 지금은 안 된다. 여기서는 더욱···. 은환이 추스르지 못한 침의 차림으로 속삭였다. 황제의 시선이 은환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미동 없는 그를 향해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입술을 달싹였다.
“···아기집이 아픈 것 같아요.”
***
아기집이 아프단 말 한마디에 황제가 검을 던졌던 것은 기억났다. 그녀를 안아 든 황제가 침전으로 들어왔다. 은환은 넋 나간 표정으로 침상에 앉아 그를 보았다. 남의 살을 찢고 뼈를 동강 냈음에도 황제는 서늘하며 평연했다.
야차 같은 짓을 하고도 부처처럼 평온한 사내였다. 은환은 깜빡임 하나 없이 그를 보다가 그의 손에 침상에 뉘어졌다. 그리고는 곤히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황제의 명에 침전에 든 태의가 보였다.
은환은 핏기가 살짝 비친 속곳을 벗어 상궁에게 내밀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의는 배 속의 아기와 자궁이 놀랐다며 뜸을 뜰 것을 권유했다. 황제는 범을 잡으러 나가지 않고 은환의 옆에 앉아 배 속의 아기가 진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본래라면 범을 잡으러 사냥터로 향했어야 할 황제였다. 은환은 가끔 눈을 떠 그에게 범 사냥을 가지 않으냐 물었다. 그때마다 황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을 사냥의 마지막 날이 지났다. 황제가 사냥에 나서질 않으니 누구도 사냥터를 누빌 수 없었다.
하여 올해는 범이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은환은 그 밤 이후로 열에 잠겨 앓다가 이따금 눈을 떠 황제를 바라보았다. 안광이라 할 것도 없었다. 정말로 평연했다. 다문 입술이 언제나처럼 완고했고 짙은 눈썹은 우미했다. 그녀가 홀로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달빛이 한적한 연못이었다. 한데 모든 것이 조각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황제는 그런 얼굴로도 사람의 목숨을 끊어낼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런 평온한 얼굴로도 남의 손가락을 끊어내며 거짓으로나마 형제로 지내왔던 자의 비명을 삼킬 수 있는 자였다.
‘일그러짐 하나 없이···.’
은환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아기가 있는 자리를 더듬는 손이 다정했다. 하남을 떠나 황궁으로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
***
마차를 타고 떠나왔을 때처럼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가을이 깊어 낙엽이 모두 졌다. 은환은 배가 조금 부풀었다. 그러나 가슴을 두른 군 때문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핏기가 비쳤던 속곳 때문에 염려했었다. 황궁에 돌아와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태의였다. 그는 아기씨가 건강하다고 했다. 다행히도 어미가 놀라 어미가 내어준 아기집만이 조금 상한 것이라고 했다. 황제는 그제야 범을 잡지 못해 속상하다고 했다. 범을 잡아 너와 우리 아기의 털신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은환은 짐승이 죽는 게 싫다고 대답했다. 강친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궁은 묻지 않아도 들려오는 말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강친왕은 하남에서 돌아오는 즉시 거세되었다. 궁에는 그런 법도가 없었다. 그러니까 친왕이 후궁을 범하려 하면 어떻게 되는지. 적어도 재판에 회부되어야 했으나 황제는 회임한 후궁을 탐하려 한 형제를 용서하지 않았다. 연친왕과 태후의 면을 봐 목숨을 살리나 거세된 채 친왕의 작위가 빼앗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한평생 오입질로 살아온 사내였다. 강친왕비뿐만 아니라 측실만 열이 넘었고 자식 또한 여럿이었다. 오입질로 인해 기녀며 궁녀며 측실로 여럿 들였으니 아쉬울 것이 없어 보였으나 당사자는 어떨지 모른다.
은환은 입궁이 불허된 관계로 더 볼 일이 없는 사내를 떠올리다가 배를 쓰다듬었다. 친왕의 작위를 빼앗겼으니 왕부에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족히 일곱은 넘는 그 자식들 또한 왕부를 이어받을 수 없겠지. 종내는 황도에서 밀려날 것이다. 은환은 언덕이 솟아난 것처럼 야트막하게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하남에서 돌아오고 이틀 뒤 황제는 배 속의 아이를 공표했다. 궁은 일시에 기쁨으로 들떴다. 무려 금상의 첫 아이니 당연히 그러할 터였다. 황도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토호들이 보내는 진상품 또한 대단했다. 은환은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상등급의 흑진주와 홍옥이 석류 알처럼 아름답게 박힌 비녀며 은으로 만든 양각이 화려한 소체. 진주를 갈고 빻아 만든 진주분과 옥잠분. 서양에서 들여온 눈썹 먹. 산호로 모란을 흉내 내고 그 위에 섬세하게 나비를 장식한 귀한 뒤꽂이까지. 패물함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패물만 진상되는 것이면 족하다 할 것이나 구하기 힘든 시서화와 돌 틈에서만 자란다는 관상용 관목. 머나먼 이국의 술탄이 아낀다는 붉고 푸른 화려한 깃털의 앵무새. 고귀한 빛의 푸른 눈을 가진 털이 풍성한 고양이. 빛깔이 독특하며 진귀한 빛이 난다는 월조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한 것들이 은환의 앞에 매일매일 진상되었다. 그러나 기껍지 않은 것들이다. 무얼 보아도 그랬다. 마음이 감사하긴 하지만 진상품들이 쌓여갈수록 자리가 불편했다.
‘황후가 회임한 것도 아닌데···.’
기껏해야 후궁이다. 총애를 받고 있긴 하지만 후궁의 총애는 화무십일홍이라 하지 않았나. 황제가 영원을 맹약해도 그를 모두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다. 지금 당장 기쁜 마음으로 덥석 받아둔 물건이 그녀의 목을 어떻게 조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은환은 지나치게 값이 나가는 진상품 중 몇은 돌려보냈다. 마음만 기껍게 받겠다고 서신을 썼다. 소 상궁은 아기씨를 축복하고자 올린 진상품을 돌려보낸다면 보낸 이가 섭섭할 것이라고 했다. 은환 또한 그 마음을 알았다.
은환이 아닌 배 속의 아이가 보위를 이을 가능성을 계산해서겠지. 무려 금상의 첫 아들 아닌가. 후궁이 육궁을 그득 채워 너나없이 황제의 아이들을 출산했더라면 이리 관심이 쏟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환은 현재 황제가 가장 아끼는 총희이며 황제의 씨를 잉태한 첫 여인이었다. 이익에 눈이 먼 자들이라면 멀리서도 황궁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마마. 폐하께서 납시나이다.”
오늘 받은 패물 중 몇 또한 돌려보낼 요량으로 붓을 들려 할 때였다. 소 상궁이 점잖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은환은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오는 황제를 향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진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나?”
공손한 자세를 취한 은환을 습관적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은 황제가 물었다. 그는 익숙하게 은환의 볼에 입술을 맞춘 뒤 콧잔등에 한 번. 또 입술에 한 번 부드럽게 입 맞췄다. 은환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받았다. 부드러운 살갗을 베어 물었던 사내가 숭배하듯 희고 가붓한 목에 입 맞춘 뒤 핥고 빨아들였다. 눈을 감은 은환이 달콤한 비음을 내며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아가가 놀라요.”
은환의 속삭임에 순흔을 남길 기세로 목을 핥고 빨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야트막하게 부르기 시작한 배를 더듬었다.
“어찌 아비를 겁낼까.”
“아직 자리를 제대로 잡지 않았으니까요.”
“배 속에서부터 아비를 만나면 기뻐하지 않겠나.”
“하오나 태의가···.”
“알아.”
볼을 붉히며 당황하는 은환을 향해 윤협이 웃었다. 그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본다는 듯 기쁨이 넘치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은환 또한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윤협이 손을 들어 검고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이 녀석이 좀 더 자라면 너를 안을 수 있겠지?”
아랫배를 쓰다듬던 황제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은환은 도저히 부른 배를 하고 허리를 돌릴 생각을 할 수 없어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나 황제는 꽤 진지한지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해산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가가 자리 잡으면 밤을 나눠도 괜찮다고 했어.”
“그렇지만···.”
“짐이 잘 하마.”
은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윤협이 눈웃음을 치며 귓불을 깨물었다. 더운 숨이 귓불을 데웠다. ‘내 조가비···.’ 어느새 애칭처럼 부르기 시작한 별명이 귓가를 울렸다. 은환은 그의 품에 안겨 침상으로 왔다. 귓불을 깨물던 황제의 시선이 쓰다 만 서신에 닿았다.
“진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나?”
귓불을 희롱하던 황제가 다시 물었다. 은환은 할 말이 찾아지지 않아 고민했다. 마음에 차지 않는 게 아니라 덥석 받아두는 게 불편하다고. 무엇보다 봄이 되면 유가란이 입궁하지 않나. 대혼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절대로 황후에게 기어오르는 기고만장한 계집으로 낙인찍혀선 안 된다.
“그런 것은 아니고···.”
“하면 어찌 받아두지 않아?”
그를 바라보던 은환이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강친왕 사건이 있고 나선 은환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더욱 흉흉해진 것을 안다. 게다가 그를 치죄할 때 황제가 보는 앞에서 직접 거행했으니. 문득 궁금했다.
“어찌하여 심문조차 하지 않으시고 치죄하셨어요?”
궁금했다. 그렇게 해서까지 그를 벌한 이유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벌이 지나치다는 말이 많았다. 은환도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폐하.”
“왜?”
건조한 물음이었다. 황제는 답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를 보던 은환이 송구하다 속삭였다. 그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더욱 가해졌다. 은환이 다시 그를 응시했다. 우두커니 그녀를 보던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은환은 아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사지를 찢으려 했으나···.”
“폐하.”
“그는 아직 이른 듯하여···.”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내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러이 입술을 맞춘 뒤 소중히 끌어안았다. 은환은 호흡을 멈춘 채 입술을 달싹였다.
***
하남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조금 흘렀다. 사가의 모친께 서신을 쓰던 은환을 본 황제가 불현듯 그녀의 사가에 가보자고 했다. 은환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당장 쓰던 서신을 구긴 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농인 줄 알았던 황제는 진심이었는지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은환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천자의 발이 닿을 만한 곳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황제는 마음을 굳힌 건지. 아니면 본래 그리할 모양으로 말을 꺼낸 건지 은환의 집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녀가 나고 자란 집과 형제. 부모와 식솔들···.
“감히 폐하의 안전에 두실만한 이들이 아닌걸요.”
“그러나 네 식솔들이 아니냐.”
은환이 낯을 굳혔다. 아버지며 어머니며, 적모인 심 부인과 서모인 왕 부인까지. 열이 넘는 형제자매들과 그녀를 늘 변변찮게 보아오던 하인들을 생각하니 속에 메슥거렸다. 언제고 사가를 생각하노라면 골이 아프지 않을 때가 없는 은환이었다.
귀인의 첩지를 받고 후궁으로 책봉되었을 때 황제는 한 차례 사가에 편지와 함께 황제가 내린 패물을 전한 적이 있었다. 또 최근에는 가비로 진봉되어 또 한 차례 노비와 서남의 노른자 땅 중 일부를 집안의 부지로 내렸다. 그 정도면 족했다. 분에 넘치는 대우였다.
아비에겐 정말로 족한 하사였다. 그의 후궁이 된 이후로 은환은 그가 친정에 하사품을 내리길 원한 적이 없었다. 원하지 않으니 입 밖으로 그런 요구를 내지 않았고 혹시라도 과한 상을 내릴까 염려하여 하사품을 내린다 할 때 두 번 세 번 거절하곤 했다.
물론 아버지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한낱 장사치의 아들로 태어나 장사치로 살아가는 치였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일개 장사치에 불과하다. 하니 황제가 내리는 하사품 따윈 성에 차지 않으리라.
명망 있는 귀족 집안에 첩으로 딸을 팔아 치워 적자인 아들들에게 관직이라도 하나 얻게 하려는 작자가 아버지다. 그러나 그 아들이 정말로 유능하고 쓸모 있는 인재들이라면 모를까. 적자고, 서자고 가릴 것 없이 무능하고 쓸모없는 이들 아닌가.
한 마디로 분수를 몰랐다. 정말이지 분수를 모르는 작자였다. 은환은 언제고 아비가 황제에게 실수를 범할까. 하여 황실에 누를 끼칠까 두려웠다. 그것이 그녀가 아비의 애타는 편지에도 답하지 않는 이유였고 한 번이라도 황도에 식구들을 초청하지 않는 이유였다. 다행히 지금까지 황제는 그녀의 식구들을 황궁에 초청하는 일은 없었다. 은환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빈첩의 아비는 일개 장사치에 불과한 자입니다. 빈첩의 사가 또한 한호(寒戶)에 불과합니다. 폐하를 뫼실만한 곳이 되지 못하니···.”
시선을 내리깐 채 우물우물 말을 늘어놓았다. 황제가 행차할만한 집이 아니었다. 승상씩이나 되는 아비를 둔 유가란의 대 저택처럼 넓고 호화로운 저택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비는 그저 평민 중 조금 잘사는 평민이었다.
서남에서야 이름이 난 포목상이지만 양천의 이름난 상단의 주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은환은 자신도 모르게 낯을 구겼다.
“그러니 결코 폐하께서 행차할 곳이 못 되세요.”
황제가 평민의 집을 본 적이나 있을까. 은환의 사가라고 한들 아버지의 저택에서 은환은 자라지 않았다. 은환의 위로 동복 오라비 둘은 아버지의 넓은 저택에서 나고 자랐으나 은환은 저택과 떨어진 초라한 오두막에서 자랐다.
해산 전 은환이 가고자 한 사가도 그곳이었다. 어머니를 뵌 지 너무 오래되었다. 족히 이 년은 넘었는데 해산까지는 하려면 시간이 걸렸고 해산한 후에도 몸을 풀어야 하니 언제 찾아뵐지 모르는 것이다. 하여 봄이 되기 전 찾아뵙고자 했다. 혼자서 짧게 다녀오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 물었던 것인데 괜히 말한 것 같다.
“안다.”
윤협이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손짓하여 은환을 불렀다. 모친에게 서신을 쓰고 있던 은환이 붓을 놓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윤협은 아내를 끌어안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보았다.
“짐은 그저 아끼는 총희의 소가(小家)를 보고 싶을 뿐이야.”
“폐하께선 발도 딛지 못할 한호예요.”
진심이었다. 은환이 나고 자란 곳은···. 그런 곳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은환을 보던 황제가 나직이 물었다.
“짐에게 가족들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가.”
“그런 게 아니라···.”
은환이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윤협은 그녀를 들여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보통의 후궁들은 첩지를 받고 나면 가족들을 궁으로 초대한다. 하사품을 더 달라 조르기도 하고. 형제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내어달라 조른다지.”
“빈첩의 형제들은 조정에 나아갈 인재가 되지 못하여···.”
“짐이 말하고자 하는 건 어째서 네가 네 가족을 짐에게 보여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은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윤협의 기다란 눈 끝에 맺힌 날카로움이 폐부를 찔렀다. 은환은 아무 말 하지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윤협의 우아한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더듬었다. 말간 얼굴이 하얀 목련 같았다. 대꾸하지 못한 채로 그를 응시하는 여자의 눈가에 입술을 맞췄다. 그깟 가족들이야 사실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은환의 내밀한 것까지 모두 알고 싶었다. 하여 그가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한다.
아비가 무엇 하는 자인지. 어미는 무엇을 하는 여인이었는지. 태감이 전한 보고만으로는 성이 채워지지 않았다. 은환이 누굴 닮았는지 궁금했다. 이리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누굴 닮아 발칙하고 깜찍한지.
하여 그가 틀어잡을 것이 있다면 틀어잡으려 했다. 위로 오라비 둘이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벼슬을 내려 은환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식만으로 부족했다. 배 속의 아이만으로는 그녀를 완전히 가질 수 없었다.
어쩌면 아이는 무용한 것일지 몰랐다. 숨을 끊어내려고 했으니까. 기꺼운 것이 아닌 달갑지 않은 것이라면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그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것이다. 도홧빛의 뺨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어미를 모신다고 했었나. 태감이 그러하길 이 사랑스러운 계집은 태후에게 재물을 받아 출궁하려 했다고 했다. 아이를 낙태하는 대가로 태후가 지불하려 했던 것 또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어미를 모실 넉넉한 재물과 자유. 친밀하게 지내던 수방의 궁녀 또한 고했던 바가 떠올랐다.
‘성장하시는 내내 어미를 애달파 한 것 같습니다.’
하여 입궁하여 수방에서 일하는 동안 내내 받은 녹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고. 하남에서 젖은 눈으로 매달려 읊조리던 은환이 떠올랐다. 필시 불행해질 거라는 얼굴이었다. 그를 믿지 않았고 하여 그의 사랑 또한 믿지 않았다. 하여 영영 그녀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언제고 달아날 수 있는 여자. 그에게 마음 준 적 없이 그를 버릴 수 있는 여자. 능멸당한 것처럼 노여움을 표했으나 기실 두려움이다.
“네가 나고 자란 집이 궁금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은환은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지난한 겨울 끝에 이른 봄이었다. 하얀 매화가 눈처럼 소복이 쌓였다. 새벽이면 서리를 맞은 매화를 볼 수 있었다. 여문 꽃봉오리 끝에 닿은 얼음이 아름다웠다. 은환은 그쯤 황제와 함께 서남으로 갔다. 대혼례의 준비로 바빠야 할 황제는 그녀의 앞에서 조금도 분주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황후의 책봉식을 두고 본래 황제가 할 일이 없기 때문일까. 그 모든 것은 윗전인 태후의 일이기 때문에 그토록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황제는 지난 가을과 겨울처럼 언제나 은환을 탐했다. 은환이 좋아하는 것을 선물했고 은환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알고 싶어 했고 그녀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황제는 언제나 그녀의 남자인 것처럼 굴었다. 은환은 때때로 그의 품에서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살았다. 그러나 종내는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잊지 못한 채로 고향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홀로 입궁하기 위해 수레를 탔던 기억을 떠올렸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물을 맞으며 짐 보따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길과 이 길이 다르지 않은데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길을 따라 도착한 끝에 보이는 것이 아버지의 호화로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모든 것이 꿈 같았다. 저속하며 험피한 아비도 그녀를 돌덩이 보듯 무심한 심 부인도, 언제나 신경질적인 왕 부인과 그녀의 새침하며 시기심 많은, 딸들까지.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당도한 곳에는 황제의 행차를 위해 우르르 몰려나온 하인들과 식구들이 있었다.
“황제 폐하의 행차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버지가 황제의 앞에서 고두했다. 이전보다 푸짐해진 몸을 보며 저 무릎이 비대한 살들을 가누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쨌든 그는 삐거덕거리면서도 갖춰야 할 예의는 모두 갖췄다. 은환은 아버지의 뒤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고두하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가족이라 생각한 적 없는 이들이었다. 어머니를 포함해 넓게 잡으면 오라버니들까지만 가족이라 여겼다. 정작 오라버니들은 그런 은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은환은 덤덤한 눈으로 아버지와 심 부인. 그리고 왕 부인을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은 첩들과 형제자매들을 바라보았다. 이마를 흙바닥에 박은 이들 중 어린 여자들을 유심히 보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자매인지 아버지의 첩인지 구분가지 않았다. 눈에 익은 처녀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아버지의 첩들일 것이다. 개중에는 볼살이 통통한 앳된 얼굴의 여자들도 있었다. 은환보다도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일어나라.”
황제가 무심하게 읊조렸다.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밭은 숨을 뱉으며 미소 지었다. 황제는 짧게라도 그에게 미소를 돌려주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머쓱함도 없는지 그의 앞으로 다가와 넉살 좋게 말을 붙이려 했다.
황제가 아니라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은환은 아버지와 시선이 얽힐까 퍼뜩 고개를 숙였다. 그가 황제께 무슨 실례를 저지를까 두려웠다. 그를 말릴 수 없기에 더욱 두렵기도 했다.
“이리 행차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소인이 우리 은환이와···.”
“어허. 조 대인.”
황제의 지척에 붙어 떠드는 아버지를 향해 태감이 엄한 눈을 했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속이 메슥거렸다. 태감이며 궁녀며 궁의 사람들이라곤 만나본 적 없는 아버지였다. 감히 하인 주제에 자신을 꾸짖는다 채찍을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로 그랬다가는 이 자리에서 졸도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졸도해야 했다. 배운 것 없는 장사치가 딸을 뒷배 삼아 천자의 안전에서 무도하게 구는 꼴을 보느니 그냥 졸도한 뒤 눈을 뜨지 않는 게 좋았다.
“어찌 가비 마마의 존함을 함부로 이릅니까.”
“하하. 은환이는 소인의 딸년이 아닙니까. 이 몸이 아비이거늘···.”
“어허! 조 대인. 폐하의 앞입니다. 언행을 삼가십시오.”
이번에는 좀 더 목소리에 단호함이 실렸다. 내내 시선을 들지 못해 바닥만 보고 있던 은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볼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눈가가 파드득 떨렸다. 세차게 뛰던 맥 또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아무리 피로 이어진 따님이라고 하나 이제는 폐하의 후궁이시며 장차 태어날 황손의 어머니 되시는 분입니다.”
태감이 지엄하게 그를 꾸짖었다.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마주하기 힘들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황제와 함께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끔찍했다.
그가 수없이 저지를 무례함과 본 것 없이 천할 언행과 행동들이 그랬다. 홀로 왔다면 달랐겠지. 아버지가 무어라 하던. 그녀를 무어라 이르던. 딸년이든 계집년이든. 돼지우리에 처넣어 가축의 씨물을 받게 할 년이든···. 무어라 지껄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험, 험, 예···.”
“주의하십시오.”
“···예.”
아버지가 구겨지는 낯을 억지로 피려 노력하며 대꾸했다. 태감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은환은 아버지를 우두커니 응시했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니 못마땅하다 못해 당장 태감을 채찍으로 휘갈기고 싶은 눈치였다. 아마 아랫것이거나 은환이었다면 당장 채찍을 휘갈겼을 것이다. 그녀의 살갗이 찢어지든 말든. 성이 풀릴 때까지 그리했을 것이다. 창백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 문득 느껴지는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시선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았다. 은환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다 퍼뜩 고개를 돌렸다. 태감에게 한바탕 혼이 난 아버지가 그들을 저택 안으로 안내하면서도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랜만에 만난 딸이 지나치게 반가워 정신이 없었다는 게 변명의 내용이었으나 태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은환은 아버지를 따라 저택의 안으로 들어서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릴 때는 정말로 고래 등 같아 보이는 대 저택이었다. 아버지가 향유하는 모든 것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제일 값어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세상에 모든 좋은 것들이 이 저택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리하여 이 저택의 담이 황궁보다 높고 황궁보다 넓은 줄 알았다. 아버지를 황제인 양 섬길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집으로 돌아와 기쁘냐.”
황제가 물었다. 은환은 그를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저 ‘예’ 하고 대답하면 될 것을 혀가 고부라지지 않았다. 은환이 돌아오고자 한 집이 이곳이 아니어서 그랬다.
그녀가 그립던 사람도 이 집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황제는 대꾸하지 않는 그녀의 허리를 안아 서슴없이 볼에 입 맞춘 뒤 아버지가 마련한 별채에 제가 주인인 양 걸어 들어갔다. 넋을 놓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왕 부인의 딸과 눈이 마주쳤다.
불현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황제가 너무도 쉽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볼에 입 맞추고, 눈을 휘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을···.
***
아버지의 저택은 떠날 때와 다름없이 호화로웠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넓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만 가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택의 담은 황궁의 담에 비할 바 없이 낮았고 지붕을 엮은 기와며 기둥 또한 변변찮기 이를 데 없었다. 비단 황궁과 비교해서가 아니었다.
하남의 성에 들렀을 때 성의 규모가 얼마나 크고 웅대한지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황족도 귀족도 아니었다. 그저 하남에서 이름을 날리는 포목상일 뿐이다. 날고 기어봤자 평민. 귀족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며 그들이 소유하는 것의 일부를 소유하긴 하지만 황제에게 진상되는 최고급 상등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질이 떨어지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이 저택의 폭군처럼 보였다. 하여 언제나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댕이칠 수 있고 삭정이보다 쓸모없는 계집이라며 돼지 마구간에 처넣은 뒤 종일을 굶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기실, 황제만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은환을 후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아버지에게 은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조가비가 어째서 또 이런 얼굴일까.”
둥근 창 너머 만발한 매화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은환은 제 얼굴이 어떤지 알지 못해 창 너머 향했던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저물기 시작한 해의 붉은 기운이 만발한 매화를 쓰다듬었다. 바람이 불자 하얀 꽃잎들이 은환의 치마폭 위로 흩어져 내렸다. 은환은 가만한 눈으로 매화 잎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친정이 편안하지 않은 얼굴이야.”
기다란 손가락이 턱을 들어 올렸다. 은환은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어째서 친정이 편안하지 않은 얼굴이냐고 했다. 차라리 은환에게는 수방이 편안했다. 언제고 아버지의 저택을 집이라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이보다 새카맣게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의 집은 언제나 불편하고 아버지의 안전은 언제나 가시방석이었다. 하면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어떨까. 어머니를 황제의 앞에 보이는 것은 괜찮을까.
“은환아.”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지아비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이끄는 부름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화차花茶를 마시지 않고 잔만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은환이 그의 편으로 건너가 품에 안겼다. 윤협은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잎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안았다.
틀어 올린 비녀를 하나씩 뽑은 뒤 흘러내리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단 같은 머리에 밴 난향이 코끝을 맴돌며 음욕을 자극했다. 그의 손이 가느다란 여체를 어루만지다 둥글게 부푼 젖가슴을 슬그머니 움켜잡았다.
은환의 표정은 무감했다. 함께 친정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을 때부터 이런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제 아비의 앞에선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을 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마주한 얼굴. 환멸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네 모친은 어디에 서 있었느냐.”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다정한 물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를 찾고 있었을까.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부딪혔다.
“너와 닮은 여인은 보이지 않던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혀가 그대로 굳었다. 어머니는 천첩이라 황제를 배알하는 자리에 나오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는 첩들은 모두 양첩들이었다. 천첩인 어미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어머니를 뵙고 갈 수 있을까.’
어머니는 그 초라한 집에 갇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은환이 따로 찾아보지 않는다면 결코 뵙지 못하고 돌아가겠지. 본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나오려 했던 것인데···.
“환아야.”
“어머니는 폐하를 배알할 수 없을 만큼 천한 첩이라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입술을 말아 물듯 닫았다. 황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지 않아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
부용은 붉은 모란을 연상케 하는 홍색 오에 화려한 백첩군 차림이었다. 진주 비녀와 호박을 장식한 뒤꽂이를 아름드리 꽂은 머리는 구름 같았고 그 아래 하얀 목과 반 치나 내놓은 가슴은 젖먹이 아이를 둔 여자처럼 크고 풍만했다.
본래도 성숙한 아이이긴 했지만 이리 황제의 곁에 붙어 앉아 술을 따르려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부용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기에 더욱 그런 기분이었다. 서남에서만 제조되는 귀한 술을 진상하고자 여식을 시켜 술을 따르게 했다는 아비를 응시했다. 부용은 왕 부인의 첫째 딸로 은환과 나이가 같은 서녀였다.
정실인 심 부인의 딸인 소용과 소옥보다 미색이 빼어난 그녀는 한주에서도 이름났던 미인인 왕 부인을 닮아 어릴 때부터 자못 자태가 아름다우며 조숙했다. 같은 첩이라 해도 왕 부인은 귀족의 기첩이 낳은 딸이고 어미는 아버지의 몸종이었다. 처우가 같을 리 없었다. 게다가 왕 부인은 아버지의 혀가 아릴 만큼 단 말을 늘어놓으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휘어잡고 사는 여자였다.
그런 이유로 부용은 정실의 딸인 소용과 소옥보다 월등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정실의 딸들이 먹고 입는 것을 걸치며 호화로이 살았다. 은환도 그녀만큼이나 사랑받으며 살았다면 서녀로 태어난 팔자가 그악스럽다며 넌더리 내지 않았을 테다.
“폐하. 어주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 술 또한 서남의 명장이 빚는 술이랍니다. 왼편의 밀전병과 함께 드시면 더욱이 감미롭지요.”
부용이 황제의 곁에 붙어 앉아 속삭였다.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뛰어들 것처럼 옆구리를 차지하려 하는 모습에 부용의 뒤편에 앉아 있던 자매들의 눈살도 함께 일그러졌다. 은환은 그들을 흘깃 하고 훑어보았다.
평소보다 차려입은 모습이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들고 싶은 것 같았다. 패물함에 있는 패물을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을까. 가진 것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골라 머리에 꽂고 귀에 매달았을 것이다. 은환은 반투명한 삼을 겹겹이 겹쳐 하얀 살갗이 드러날 듯 말 듯 갖춰 입은 자매들을 보았다.
다들 황제의 첩이 되고 싶은 것 같았다. 그의 후궁이 된 은환을 보니 어쩌면 자신도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할지도 몰랐다. 자매들을 보던 은환이 눈동자를 굴려 부용을 흐뭇하게 보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부용을 황제의 첩으로 들이고 싶은 것일까. 하여 부용에게 술 시중을 들게 한 것일까. 부용은 은환보다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술을 따른다는 목적에서였다. 황제가 허리를 끌어안는다면 기꺼이 그의 가슴팍에 안길 수 있는 거리였다.
반면 은환은 그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아버지가 만든 배석의 위치였다.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는 부용을 응시했다. 부용을 저리 꾸며놓은 것도 아버지와 왕 부인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부용이 오늘 밤 황제의 시침을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이렇게 만들고 부용을 저렇게 단장하게 했을까. 문득 아침처럼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긋이 닿는 눈길이 오래된 것 같았다. 은환은 그 눈길을 마주 보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부용이 황제의 시침을 든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부용이 육궁 중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후궁이 된다면···.
모르겠다. 사실 은환은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부용이 저리 가까이 황제의 옆에 앉아 있는데도 화가 나거나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분명 하남에서 유가란이 그의 술 시중을 들 때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기분이었는데. 다른 여인이 아닌 자매가 저리 아양을 떨어서 그런 것일까. 그저 그런 기분이었다.
부용이 전병을 하나 집어 들어 황제의 입에 갖다 댔다. 마시라는 술은 마시지 않고 은환만을 보던 황제가 느리게 시선을 돌려 부용을 응시했다.
“너는 가비와 몇 살이 차이 나지?”
황제가 부용을 향해 물었다. 드디어 관심을 제게로 돌린 것이라 생각했는지 부용의 얼굴이 환해졌다. 덩달아 아버지의 얼굴 또한 환해졌다.
“소녀는 가비 마마와 같은 나이옵니다.”
“가비의 어린 시절을 잘 아나?”
“그, 그럼요. 폐하. 가비 마마와 소녀는 아주 친했어요. 우린 매일같이 바느질을 하며 어울려 놀았답니다.”
옥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은환은 표정 없이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부용과 자신이 친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부용과 자주 함께 있긴 했다. 아버지가 그녀를 부용의 몸종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부용이 시키는 심부름을 했고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랬나? 가비.”
황제가 다시 시선을 돌려 은환을 응시했다. 은환은 그를 오도카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협이 낯을 일그러트리듯 눈가를 휘었다. 기묘한 눈웃음이었다. 부용이 슬그머니 그의 팔을 안으려 몸을 붙여올 때였다. 그녀의 따귀가 거칠게 돌아갔다.
기름이 번들거리는 전병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은환이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벌건 뺨을 붙잡은 부용이 덜덜 떨며 일어나 그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심 부인이며 왕 부인, 첩들과 형제들이 놀라 몸을 일으켜 고두했다.
은환은 삽시간에 일어난 일에 얼어붙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연회가 벌어지는 별채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태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나지 않게 혀를 찼다. 부용의 뺨을 때린 황제가 입술 끝을 끌어당기며 납작 몸을 엎드린 아비를 향해 읊조렸다.
“여식을 유곽의 몸 파는 계집으로 키워놨군.”
“폐, 폐하···. 주, 죽여주시옵소서. 소인의 여식이···.”
“본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천한 장사치라 해도 내 가비의 얼굴을 보아 그대의 능멸을 넘기려 했다. 한데···.”
심장이 엷게 얼어붙었다. 은환은 가물거리는 시야를 바로 잡으려 몇 번 호흡을 끊어 쉰 뒤 황제를 응시했다.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마른침만 삼키다가 가족들과 함께 같이 고두하려 몸을 일으켰다.
이런 사달이 꼭 날 것 같았다.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눈치 없이 그에게 달려들어 관용을 모르는 사내의 바닥을 드러내게 하고···. 차라리 그녀가 어느 귀족의 딸이었다면 이리 가족을 보이는 일이 어렵지 않을 텐데.
‘이래서 혼자 오려고 했었던 것인데···.’
머리가 아팠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으려 할 때였다. 윤협이 사나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노여움으로 말라붙은 낯을 본 은환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가족을 대신해 용서를 구하려는 건가. 가비.”
그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묻던 오후와 달리 서리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움찔 떨게 했다. 은환은 마치 낯선 사람처럼 상석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까지 화가 난 얼굴이었다. 부용의 무례와 아버지의 저속한 심보가 그녀에게까지 화가 나게 한 것일까.
저런 천한 장사치의 씨를 받아 태어난 그녀까지 천박해 보이는 것일까. 은환이 가라앉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입술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빈첩의 식솔들이 천자를 영접한 일이 없어 이런 무례를···.”
“하면 가비가 짐의 노여움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자매의 실수를 용서해주십시오···.”
“짐의 노여움을 풀 줄 몰라?”
고두하기 위해 상체를 숙이려 할 때였다. 황제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은환은 호흡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은환은 눈을 슴벅이며 그를 보았다. 술잔을 든 황제가 입술 끝을 미끄러트렸다. 그의 눈동자가 왼편으로 스륵 움직였다. 은환은 그 자리를 보았다. 부용이 애교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술을 따르던 자리였다. 은환은 조심스레 그의 옆자리를 채웠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익숙하게 끌어안았다.
“모두 일어나 예를 갖춰주십시오.”
태감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납작 엎드려 있던 가족들이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부용 또한 왕 부인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은환은 고개 숙인 채 씨근거리고 있는 자매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기다란 손가락들이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황제의 더운 숨결이 귓불에 닿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콧잔등까지 데웠다. 사내다운 눈에 미소가 어렸다. 은환은 저 눈을 알았다. 익숙하되 달갑지 않은 눈이었다.
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음부가 욱신거리며 찌릿했다. 은환은 밀전병을 하나 들어 그의 입가에 댔다. 부용이 하려던 일이었다. 가차 없이 자매의 뺨을 날리던 황제는 순한 양처럼 입을 벌린 채 밀전병을 받아먹었다.
그런 다음 다시 은환을 기다렸다. 은환은 잔이 빈 걸 확인한 뒤 술을 채웠다. 황제는 은환을 그윽한 눈으로 응시하며 술을 마셨다. 다른 팔로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였다.
“서남 제일의 명주를 서남 제일의 미녀가 따르니 맛이 어찌 나쁠까.”
황제가 슬그머니 그녀의 한쪽 가슴을 움켜잡으며 읊조렸다. 남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남들이 들릴만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그를 향해 은환은 살그머니 낯을 붉혔다.
“아니 그런가. 가비.”
올릴 말이 없었다. 은환은 그저 묵묵히 잔을 채울 뿐이었다. 황제의 왼 눈썹이 꿈틀했다. 좀 더 아양을 부리길 바라는 듯했다. 은환은 계피를 뿌린 연근 뿌리를 집어 그의 입가에 대주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은환이 당황해서 그의 옆구리에 가슴을 좀 더 밀착시켰다.
황제는 그녀를 조금 밀어내더니 슬쩍 그녀의 배를 바라보았다.
“가비는 친정의 석반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빈첩은···.”
“단 한 입도 대지 않은 걸 보면 말이야.”
은환은 저분을 내려놓은 뒤 그를 응시했다.
“짐의 아가가 외가에 와서 배를 곪게 생겼어.”
시선을 잠깐 내리깐 뒤 생각했다. 날카롭게 묻던 황제가 은환의 배를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은환은 고개를 들어 그가 바라는 것을 고민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빈첩에게도 밀전병을 먹여주세요.”
그 말에 윤협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기꺼이 밀전병을 들어 은환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런 뒤 오물오물 잘 받아먹는지 오래 바라보았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었다. 쏟아지는 이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은환은 부용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내일이면 예쁜 얼굴에 파랗게 멍이 자리할 것 같았다. 귀가 떨어질 정도로 세게 후리는 소리였으니 지금도 심하게 아릴 것이다. 그러나 부용에게는 아픔보다 수치가 먼저인 것 같았다. 벌겋게 상기한 얼굴에 여전히 떨리는 입술이 그러했다. 은환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더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
조운철이라고 했었나. 서남은 오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지방이었다. 그중 세가 제일 강하고 널리 이름을 떨친 상단의 행수가 조가 운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황성인 양천에서도 거래처를 만들고자 오래전부터 물꼬를 텄다고 했으니 양천의 상단들도 그의 이름이 꽤 익숙할 터였다.
그러나 황성에까지 이름을 날리는 상단의 행수치고는 머리가 나빴다. 윤협은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내를 응시했다. 거만하고 포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정도를 모른다. 듣던 대로 저택은 한낱 장사치가 사는 저택이라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호화로웠다.
비록 귀족의 성과 황궁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별 볼 일 없다고 해도 이 정도면 하급 귀족은 혀를 내두를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은환이 유복하게 자랐을 것 같진 않았다. 이렇게 부유한 아비의 여식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은환은 눈앞의 작자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윤협은 시선을 돌려 꾸역꾸역 돼지고기를 삼키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강제로 눈치를 주어 먹이지 않는다면 은환은 이 자리에서 한 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정이랍시고 도착한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는 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식사는 황궁에 있을 때 더 잘한 것 같았다. 음식을 가리지도 않았고 끼니를 거르려 하지도 않았다. 내키지 않아도 아이를 위해서 조금씩이라도 먹으려 했다. 은환은 이 집을 얼마나 싫어하는 걸까.
“입에 맞지 않느냐.”
딱딱한 얼굴로 돼지고기를 삼킨 은환에게 윤협이 물었다. 은환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황궁의 음식에 길들어져 사가의 음식은 내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일부터는 데리고 온 어선소의 주방장에게 요리하라 명해야겠다.
“어선소의 사람을 데리고 왔다. 내일부터는 황궁에서 먹던 음식을 먹어.”
“빈첩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따금 아무것도 내키지 않을 때가 있던걸요.”
눈썹이 모여들었다. 윤협을 힐긋 본 은환이 고개를 숙였다. 윤협은 더 음식을 권하지 않았다. 자꾸만 제 아들에게 조정의 낮은 관직이라도 해주십사 제 아들을 들이밀려 하는 조운철을 바라보았다. 분수 모르는 천한 것이었다. 은환의 아비가 아니라면. 은환이 그를 죽여달라 청했더라면 짧은 망설임도 없이 그를 참형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환은···.
“그만 빈첩은 일어나보고 싶어요.”
누각을 밝힌 구등을 응시하던 은환이 속삭였다. 윤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감에게 명해 가비의 여관들을 불러들였다. 소 상궁이 그녀를 모시기 위해 누각으로 다가왔다. 은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 부인과 첩들의 눈이 그녀를 따라붙었다. 은환은 그들에게 시선 주지 않고 누각을 나섰다. 윤협은 아내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이 자리의 어떤 여자들보다 검박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열폭을 겹친 상앗빛 월화군에 송화색 오를 입은 은환은 달리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눈이 멀 만큼 아름다웠다.
술을 한 모금한 뒤 태감에게 일러 담뱃대를 가져오게 했다. 느른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 연기를 빨아들이자 자근자근 신경을 갉아 먹던 불쾌함이 조금 가셨다. 곁을 비우고 없는 여자를 생각했다. 회임하고 나서는 부쩍 자신을 낮추고 싶은지 황궁에서도 소박한 차림을 고집하는 여자였다.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염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은환은 태자의 어미가 될 여자였다. 기다란 눈이 피둥피둥 살이 찐 사내를 향했다. 그의 옆에는 그녀의 오라비랍시고 자리를 차지한 사내들도 있었다. 동복의 오라비라고 했다. 그러나 은환은 그들에게도 낯을 펴지 않았다. 시선이 닿음을 느꼈는지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윤협은 연기를 뿜은 뒤 나지막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미가 자리하지 않은 이 연회가 달갑고 기꺼운가? 하여 아비의 영명하지 않은 결정에 간언하지 않은 것인가.”
무심한 읊조림에 두 사내의 낯이 하얗게 변했다. 조운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씨 일가를 마구간 속 미물을 보는 눈으로 둘러보다가 긴 연기를 입술 밖으로 흘려보냈다.
***
별채로 돌아온 은환은 소 상궁을 내보낸 뒤 둥근 창을 내다보았다. 초승달이 높게 떠 있었다. 그는 황궁에서와 마찬가지로 침실 밖을 지키고 있을 태감과 여관들을 떠올리다가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사는 곳은 저택과 그다지 멀지 않았다.
심 부인은 어머니가 사는 곳을 빈촌이라 생각하며 더럽고 끔찍하다 여겼으나 어머니와 은환이 함께 지낸 집은 어린 은환이 매일같이 아버지의 저택으로 몸종 노릇을 하기 위해 걸어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그리 가깝다 하더라도 저택 밖을 나가면 궁핍하게 사는 자들이 지천으로 널렸다. 은환은 다시 고개를 돌려 문을 응시했다. 누각에서 열리는 연회가 끝나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사이 혼자만 다녀올 수 있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황제와 반드시 동행해야 하니. 혼자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어머니를 영영 뵙지 못할 텐데.
은환은 창밖의 흐드러진 매화를 떠올렸다. 봄 매화를 보니 더욱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의 마당에도 매화가 피어있었다. 지금쯤 어머니도 만발한 매화 가지를 보며 그녀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어찌 지내고 계실까. 은환의 향한 황제의 총애가 지극한 고로 아버지는 많은 하사품을 받았다. 은환이 후궁이 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는데 비해 아버지가 하사품을 받은 횟수는 두 번이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하사품을 내리며 그녀를 향한 총애를 조정에 보여주었으니 아버지의 곳간은 재물로 터져나가다 못해 썩어 흐를 것이다. 한데 어머니 또한 그럴까? 은환은 아버지의 노여움이 두려워 차마 어머니를 챙겨달란 말조차 서신에 적지 못했다.
괜스럽게 그녀가 어머니를 챙기며 황제의 하사품을 어머니에게도 나눠달라 이야기하면 노여움에 씩씩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끌고 와 채찍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칠 년 전부턴 서 대인이 양천에서 내려와 다시 어머니의 곁에 계신다고는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첩이었다. 결국에는 남의 집 일이란 뜻이다.
“마마. 어찌 낯이 이리 창백하십니까?”
나무 욕통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온 소 상궁이 은환을 향해 물었다. 은환은 물기가 맺힌 눈으로 소 상궁을 보다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소 상궁이 그녀를 씻기기 위해 그녀를 이끌었지만 은환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밖에 다녀오고 싶어.”
“하오나 시간이 늦었습니다. 산책이라면 아침에 하셔요.”
“아니야. 지금 해야 해···.”
“마마.”
“혼자 다녀올 수 있어.”
“그것은 안 됩니다.”
“하지만 여긴 내 집인걸. 친정이야. 소 상궁.”
“그래도···.”
“제발.”
은환이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소 상궁이 그녀를 오도카니 보았다. 혼자서 산책이라니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이미 한 차례 사달이 터지지 않았나. 아무리 친정이라 한들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가비의 친정. 그녀의 친정아버지란 작자와 식구들은 천박하며 음험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집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가비를 혼자 두겠는가. 게다가 산책하는 일을 이리 간절히 부탁하다니···.
“혹시 후당의 어머님께 가보실 생각이십니까?”
소 상궁이 물었다. 은환은 대답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 상궁이 한숨을 쉬었다.
“어찌하여 조 대인께선 마마의 어머님을 그 자리에 모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천첩이라 한들 마마를 낳아주신 생모인데. 뻔히 그분을 뵈러 회임한 몸으로 친정을 납신 것을 아시면서···.”
은환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소 상궁의 얼굴에 야속함이 어렸다. 문득 눈물이 터지려 했다. 시큰거리는 콧잔등 때문에 입술을 말아 물 수밖에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탕의 물이 아까운지 길게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하오나 아무리 그래도 후당의 어머님을 뵈러 가시는 것은 낮에···. 마마? 지금 눈물을···.”
“어머니를 뵈러 가고 싶어. 어머니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은환이 울었다. 소 상궁이 놀라 얼른 영견을 꺼내 그녀의 눈 밑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러나 눈물이 멎지 않았다. 회임을 하고선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본래는 이리 하염없이 울며 청승을 떠는 성정이 아니었다.
한데 황제를 만난 이후로는 부쩍 눈물을 많이 흘렸다. 정말이지 우스웠다. 아버지의 밑에서 갖은 구박을 다 받으며 살 때는 절대 울지 않았다. 자존심에, 속상함에 더욱 굳세고 다부지게 자란 그녀였다.
“낮이 되면 폐하와 함께 후당에 가는 게 어떻습니까. 분명 폐하께서도 마마의 어머님을 뵙고 싶어 하실 거예요.”
은환은 빈촌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후당’이라 하며 높여 이르는 소 상궁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일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벅찰 만큼 힘들었다.
“여기서 멀지 않아. 그냥 빨리 잠시 얼굴만 뵙고 올게.”
“하오나 마마.”
“끼니를 거르신 게 아닌지 걱정돼서 그래. 본궁이 입궁하고 나서는 작은 오라버니가 줄곧 어머니의 생활을 살피는데 오늘은 누각에서 연회가 열리느라···.”
남들이 배부르게 먹고 즐기는 날이면 어머니는 굶었다. 입궁 전에는 은환이 식자재며 장작 따위를 넉넉히 받아두고 챙겨드렸으나 입궁하고 나서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작은 오라비가 따로 끼니를 챙기며 생활을 살피는 사정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연회로 바쁜 날이면 작은 오라비 또한 어머니를 챙길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당이 여기서 가깝습니까?”
“한 다경도 걸리지 않아.”
“하면 노비가 배행하겠나이다.”
은환이 젖은 눈으로 그녀를 향해 엷게 미소 지었다.
***
후당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이 길을 쏘다니며 부용의 몸종 노릇을 한 과거가 그리 멀지 않았다. 어디 부용뿐일까. 소용과 소옥. 아비의 다른 첩들이 낳은 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하루를 보내던 은환이었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등불을 든 소 상궁은 ‘이런 후미진 길을 어린 규수가 어찌 걸었을까.’ 하고 한탄했다.
은환은 그녀의 한탄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던 시절이었다. 양가의 규수답게, 종노릇을 그만두고 글월을 읽히며 규방의 규수로서 살았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도 서 대인이 나타나 아버지에게 간언하지 않았더라면.
서 대인이 아버지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그리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등불이 닿는 길을 걷던 은환에게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소 상궁이 일순 긴장한 채 고개를 들었다.
“게 누구인가.”
위엄 있는 음성이었다. 시위로 황제의 금의위 중 하나를 데려왔으나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다란 그림자를 자아내던 자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상궁이 은환을 가리며 ‘어허!’ 하고 소리쳤다. 사내인 듯 분명한 자가 헛기침을 했다. 순간 은환이 자신을 가린 소 상궁의 팔을 걷어내고 그에게 다가갔다.
“희섭 오라버니? 오라버니예요?”
“은환이니?”
찌르레기 소리만이 이따금 들리는 밤이었다. 은환은 반가운 마음에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소 상궁이 뒤에서 ‘마마!’ 하고 외쳤다. 그녀는 몇 해 만에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내의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은환아.”
“정말, 정말 오랜만이에요.”
“대체 이게 얼마 만이냐.”
희섭이 은환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은환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슴푸레한 윤곽을 거듭 확인했다. 등롱의 번진 불빛만으로 수 해 전의 사내와 지금의 사내를 비교하려니 무척이나 힘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난···.”
희섭이 말을 더듬었다. 열기가 어린 볼과 눈가가 엷게 떨렸다. 은환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살짝 벌렸다.
“설마. 어머니를 살펴주고 오는 길이신가요?”
희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환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결국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렸다. 어미를 살피는 일이 아니라면, 지체 높으신 서 대인의 아들이 예까지 올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은환은 훌쩍거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희섭의 손이 슬그머니 은환의 젖은 볼에 닿을 때였다. 그들의 뒤로 나직한 걸음걸이가 들렸다. 소 상궁과 금의위가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나지막한 걸음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스산한 기운에 은환이 뒤를 돌았다.
“예까지 마실을 나왔느냐.”
“···폐하?”
뭉툭했던 희섭과 달리 서느런 밤빛 속에서 날카로운 윤곽이 드러났다. 은환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묘한 열기가 맺힌 눈길이 은환을 붙잡은 손에 닿아있었다. 은환이 반쯤 넋이 나가 그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웃음 하나 섞이지 않은 읊조림이 귓가에 들렸다.
“이 앙큼한 고양이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