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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 삭풍 (6/8)

 六. 삭풍

 모든 예식이 끝났을 때 은환은 화심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확히는 평소 그녀가 먹고 자던 침소가 아닌 동편에 있는 작은 침실이었다. 며칠 전부터 꾸며두라고 한 것인지 탁자며 화장대, 덮고 자는 금금까지 새것처럼 반듯했다.

 머리를 짓누르는 봉관을 벗고 여러 겹 겹쳐 입었던 예복 또한 벗었다. 하얗게 물든 은환을 보던 소 상궁이 재빨리 다가와 백분과 연지를 지워주었다. 은환은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소 상궁이 중반을 들고 눈을 붙이라 타일렀지만 듣지 않았다. 의식을 지우고 싶었다. 가능하면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소 상궁이 무어라 하던 은환은 눈을 붙였다. 의식은 까무룩 흩어지고 이내 윤협의 혼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이슥한 저녁이었다. 소 상궁은 저벅저벅 들려오는 육합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등롱의 불이 유난스럽게 밝았다. 그녀는 당황한 채 황제의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식한 듯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예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걸음 한 황제를 살그머니 응시했다. 화심전에는 두 여인이 있었다. 황후와 가비. 아니. 이틀 전 귀비로 진봉했으니 이제는 가 귀비라 불러야 하는 여인이었다.

 “은환이는?”

 “예식이 곤하였는지 오후부터 잠들어 계시옵니다.”

 “석반을 챙겼나?”

 중반도 들지 않았다. 하문한 바에 딱딱하게 굳은 소 상궁을 본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피로감이 누적된 얼굴은 날연했다. 머뭇거림 한번 없이 가 귀비가 있는 동편의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황제를 본 소 상궁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안도해야 할지 염려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을 등진 윤협은 은환이 잠들어있는 동편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며칠 전부터 단장하기 시작한 침실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하루였다. 날이 밝으면 다시 그들이 머물던 침소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신방이랍시고 꾸민 모든 것을 치울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지만 하루가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뒤 유가란의 손을 탔던 모든 것을 황후궁으로 옮기고 그 계집을 사지로 밀어 처넣을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어선 그들이 치렀던 우스운 연극 따윈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지. 폐후는커녕 혼례 자체를 무효화시킬 예정이었다.

 윤협은 바짝 마른 얼굴로 곤히 잠든 여자의 눈가를 더듬었다. 젖은 기색이 없는데도 젖은 살갗을 더듬는 것처럼 가슴 한편이 아렸다. 눈썹을 좁힌 그가 침상에 앉아 봉긋한 입술을 더듬었다. 예복만 간신히 벗은 채 잠든 건가. 급하게 지운 연지와 분 자국이 선연했다.

 속눈썹이며 입술 눈가 따위를 문지르던 윤협이 손길을 거두었다. 은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은환이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시장하지 않으냐.”

 은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기진맥진하여 그를 볼 뿐이었다. 석반을 들라 명하려 할 때였다. 은환이 고개를 흔들었다.

 “끼니를 거르는 게 습관이 되었군.”

 쌀쌀맞은 어투였다. 자상해지고 싶었는데. 오늘은 더욱 자상해야 했는데. 아니 그래도 심란할 여자였다. 그가 무어라 해도 눈앞에서 지아비가 다른 여인을 배필로 맞이하는 모습은 끔찍할 터. 그가 가란과 무엇도 하지 않는다 했어도 심란할 것을 안다. 특히 은환은 그가 언약한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지어미는 내게 너 하나뿐이라는 언약. 내 아이들은 네 태에서만 움틀 것이라는 언약. 그러나···.

 “내키지 않은걸요.”

 “네 배 속에 짐의 황손이 자라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지.”

 은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끙끙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윤협이 그녀를 도왔다. 은환이 반사적으로 그를 매섭게 쳐냈다. 그런 뒤 웅크리듯 몸을 말았다. 윤협은 뒤틀린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찌 이곳에 계세요.”

 “너에게 돌아올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신방은요?”

 “네가 짐의 신부이니 신방은 이곳이지.”

 은환이 웃음을 터트렸다. 노여움이 눌어붙은 웃음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돌아가세요.”

 냉랭한 읊조림이었다. 은환은 그를 보지 않았다. 내리깐 시선에 아픈 흔적이 역력했다. 정말로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언제는 납득할 수 있었나. 언제는 이해할 수 있는 사내였나. 무의미했다.

 사랑이 무의미했다. 그를 연모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루한 일이었다. 가장 가치 없고 허무하고···. 그녀를 좀먹는 일이다. 화 태비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어미처럼 미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전초전이 시작된 것 같았다.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 있을까. 이러다 유산하는 건 아닐까. 막막했다.

 시작부터가 이토록 뒤틀리는데 무얼 더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죽어버리고 싶었다.

 “손대지 마요!”

 어깨를 쓰다듬기 위해 다가온 손을 거칠게 쳐냈다. 이렇게 날카롭게 그를 대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은환 또한 소스라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굳혔다. 말라붙은 줄 알았던 곳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너를 안겠다고 했을 텐데?”

 “미치셨어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당장 끌려나가 매질 당하여도 모자란 불손한 언행이었다. 그러나 은환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눈앞의 사내를 마주 보고 있는 것보다 이대로 끌려나가 매질 당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쳤냐고?”

 치가 떨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은환은 덜덜 떨며 그를 흘겨보았다. 은환의 물음에 윤협이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웃으니 진짜로 미친 작자인 것 같았다. 은환은 작게 ‘미친 작자···.’라고 읊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황제가 번들거리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긴 그림자가 그녀를 머리끝부터 천천히 삼켰다. 은환이 좀 더 웅크리며 뒤로 물러나려 할 때였다. 손목이 잡혔다.

 “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조악하게 손목을 당겼다. 고꾸라지듯 그의 품에 안기던 은환은 안간힘을 쓰며 손목을 거두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싫, 싫어! 이거 놔요! 아흑!”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기어코 그녀를 제게로 당긴 황제가 가슴 여밈을 거칠게 풀었다. 호흡이 바짝 졸아붙었다. 은환은 씨근거리며 희고 봉긋한 가슴이 환히 드러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겁간이라도 당하는 양 모욕적이었다. 이런 일 따위야 수차례였으면서. 이 사내가 그녀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여러 수십 번이었으면서. 사내와 여인이었다. 황제와 후궁이었고. 한데도 낯이 붉다 못해 갈기갈기 찢기고 터질 것 같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의 씨가 자궁에 들어서느라 부푼 가슴이었다.

 여윈 윤곽에 둔부와 가슴만큼은 살집이 통통하게 붙었다. 은환도 별수 없는 산부인지라 젖이 도느라 가슴은 커졌고 둔부에도 살집이 붙었다. 처녀 시절과 달리 영 맵시가 나지 않는 몸매에 속이 상했으나 윤협은 흡족한 미소로 탱탱한 볼기를 쥔 채 양 가슴에 입술을 맞췄더랬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가슴을 희롱하는 사내의 손을 사납게 쳐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징그럽고 끔찍했다. 기려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마주하고 시선을 얽는 것이 소름 끼쳤다.

 황제에게 교접이란 은환을 길들이는 방식이었다. 그저 음부를 벌려 그를 받아내야 하는 계집. 그리하여 그에게 저항은 앙탈일 뿐이었을 테다. 은환은 익숙하게 그녀를 익숙하게 탐하기 위해 허벅지를 움켜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늘로 찌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피가 나올 만큼 찔러서 상처 입히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를 흠집 내고 싶다는 마음도 처음이었다.

 “씹어 죽이고 싶은 눈인데?”

 그가 나른하게 읊조렸다. 은환은 벌벌 떨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렁그렁 차올랐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별안간 그의 손이 그녀를 훽 잡아 침대에 쓰러트렸다. 은환이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면 밑구멍에 양물을 쑤셔 넣어 줄 테니 오물오물 잘 씹어보라고.”

 그가 웃었다. 은환의 턱이 부질없이 떨렸다. 침의 자락이 걷혔다.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들어온 무릎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기한 물건이 구멍을 헤집고 들어왔다.

 “흣···.”

 믿을 수 없게도 아래가 젖어있었다. 미끌미끌한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벌레가 기어들어 온 것처럼 호흡이 떨렸다. 무참하게 떨리는 몸이 예전과 달랐다. 언제고 달지 않았던 적이 없는 품이었다. 어떻게 희롱당해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품에서 울던 은환이었다. 한데···.

 “···싫어.”

 윤협이 일그러졌다. 반쯤 선단을 집어삼킨 구멍은 그의 물건 모양에 맞춰 길이 든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런 얼굴이라니···. 이런 꼬락서니로 그의 신경을 후벼놓다니. 웃음만 나왔다. 박아주면 언제나 예쁘게 앙앙대던 은환이었다. 이런 작은 몸부림 따윈···.

 “입만 살아 지아비의 신경을 박박 긁지.”

 “흑, 흐윽···.”

 “밑구멍은 이렇게 오물오물 잘 받아먹으면서.”

 “아, 하윽!”

 “바가지를 긁는 일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다만. 그것도 정도껏이야.”

 허리를 움직였다. 은환이 골반을 뒤틀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볼기가 움찔거리며 구멍에서 애액이 흘러나왔다. 그는 토실토실한 둔부를 움켜쥔 채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거뭇한 좆이 박힌 대음순이 환히 드러났다.

 숭숭 난 검은 음모와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소음순을 들여다보았다. 벌름거리는 구멍에 박힌 좆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고환까지 박을 기세였다. 옷깃을 움켜쥘 줄 알았던 은환이 쌕쌕대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때렸다.

 “아, 흑! 움, 움직이지 마!”

 새된 교성과 섞인 거부가 우스웠다. 윤협은 허리를 천천히 돌리며 은환이 느끼는 지점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은환이 허벅지를 바르르 떨었다. 젖꼭지가 콩알만 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빨며 난잡하게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철퍽철퍽, 맞부딪칠 때마다 나는 물소리가 천박했다. 그러나 윤협은 은환과 보내는 이 순간이 좋았다. 허리를 돌리며 천박하고 난잡하게. 매음굴에서 얽히는 계집과 사내처럼 그리 음란해지고 싶었다. 젖꼭지를 이로 긁고 씹으며 희롱하던 윤협이 상체를 폈다. 두 다리를 어깨에 멘 채 빠르게 추삽질했다.

 “아, 흑, 으윽! 아, 흣···.”

 튕기듯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비음이 침실에 울려 퍼졌다. 은환은 할딱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찌릿찌릿한 감각에 음순을 제 손으로 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겁간이다.

 머릿속을 채운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구멍이 물을 줄줄 싸며 그의 양물을 받아들여도 은환이 당하고 있는 것은 겁간이었다. 그녀는 낯을 일그러트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어찌 그런 얼굴이야? 밑구멍은 이렇게 좋아 죽는데. 웃으며 지아비에게 응석을 부려야지.”

 “아, 흐윽, 하으···.”

 “응?”

 개처럼 난잡하게 허리를 흔들던 윤협이 은환의 볼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야트막하던 배는 어느새 박처럼 부풀어있었다. 그가 배 속의 아이를 가늠하듯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은환은 그의 손을 할퀴었다.

 윤협이 굳었다. 은환은 입술을 씹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흠뻑 젖은 눈이 부들부들 떨렸다. 윤협이 물건을 빼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활짝 벌어진 구멍에서 허연 정액이 흘렀다. 기진맥진하여 곧장 기우뚱 쓰러지는 은환을 윤협이 받쳤다.

 은환은 그의 뺨을 세게 후렸다. 벌겋게 손자국이 날 만큼 매섭게. 돌아갔던 고개를 바로 한 윤협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여움으로 형형할 줄 알았던 눈이 평온했다. 아무것도 아니란 얼굴이었다.

 은환은 부들부들 떨었다. 윤협이 그녀를 제 허벅지에 올리려 했다. 은환이 다시 그의 뺨을 때리려 할 때였다. 손목이 덥석 잡혔다. 겁이 났다. 그러나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침의를 모두 벗기려는 그를 걷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싫어, 싫다고! 으흑, 만지지 마요! 내 몸 만지지 마!”

 은환이 울었다. 그러나 얇은 침의는 그의 손에 모두 찢긴 채 침대를 뒹굴었다. 부푼 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은환은 젖은 얼굴로 배를 가렸다.

 “그리 울면 아가가 슬퍼해.”

 기가 막혔다. 은환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달래려는 양 다가온 손이 가증스러웠다.

 “우리 아가를 슬프게 하는 건 폐하세요. 아가를 위협하는 것도 폐하이고요.”

 “어미가 그리 달아올라 아비에게 안기는 걸, 배 속의 어린 것이라고 모르겠느냐.”

 “폐하가 끔찍해요!”

 은환이 소리쳤다. 윤협은 더 듣기 싫은 사람처럼 그녀를 다시 눕히려 했다. 평소라면 그녀를 엎드리게 한 뒤 구멍에 물건을 밀어 넣었을 테지만 은환은 임부였다. 그러나 은환은 눕지 않으려 했다. 윤협이 반항하는 은환을 제 허벅지에 앉혔을 때였다.

 “겁간하지 마요!”

 “지아비가 지어미를 안는 게 겁간이냐?”

 윤협이 낮게 물었다. 은환은 씨근대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딱 붙은 상태에서 마주하자 동그란 배가 판판한 배에 닿았다.

 “대답해. 짐이 너를 안는 게 겁간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황제가 후궁을 안는 게. 사내가 여인을 안는 게···. 그런 일들은 당연한 일들이었다. 황제가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낮게 웃었다. 서느런 미소였다. 그 미소에 상처 입은 가슴이 베였다.

 “하면 짐이 짐의 아이를 잉태한 여인을 겁간하는 것이로군.”

 “···.”

 “들어본 말 중 가장 웃긴 말이다.”

 볼이 다시 붉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음핵을 문지르다가 정액이 새어 나오는 구멍을 후볐다. 은환이 엉덩이를 굼실굼실 떨었다. 허리가 뒤틀리며 볼기가 벌어졌다. 그는 회음부에 깔린 양물을 소음순에 비비다가 구멍 안으로 귀두를 집어넣었다.

 “한데 기분이 썩 좋진 않군.”

 은환 또한 마찬가지였다. 착실하게 반응하는 몸과 달리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모욕적이었고 서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윤협에게 제 감정이 뭉개지는 건 처음이었다.

 존중받지 않은 일도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쁘게 그에게 안기고 기쁘게 와 입술을 맞추고···. 낯선 사내에게 다리가 벌어지는 양 모욕적인데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렇게 느끼는 그녀가 불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은환은 그 모든 것이···. 그녀를 헤집는 손길이며 그녀를 파고드는 양물. 나아가 침상의 열기와 등롱의 밝은 불빛까지 폭력으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그와 한 모든 날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질구를 헤집으며 출납을 반복하던 사내가 파정을 맞이했다. 은환은 함께 할딱거리며 그에게 매달려있다가 풀썩 쓰러졌다. 윤협은 그녀를 받아내며 눈가에 입술을 맞췄다. 은환이 고슴도치처럼 웅크렸다. 윤협은 여자의 여윈 등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겁간’이라 울던 은환이 떠올랐다.

 “이게 어찌 겁간이냐.”

 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뜨는 일도 없었다.

 “짐이 너를 사랑하며 아끼는 일이 어떻게 겁간이야.”

 지아비가 지어미를 사랑하며 그 배 속의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이 어떻게 겁간일 수 있지? 웃음도 나지 않는 앙탈이다. 윤협은 죽은 듯이 잠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깨어나면 명확하게 주지시키리라. 지아비의 사랑은, 황제의 총애는 겁간 따위가 아니다. 그는 은환을 겁간한 일이 없었다. 그들이 매일 밤 나눈 것은 사랑이다. 그는 사랑으로 그녀를 회임시켰고 사랑으로 그녀를 보듬은 것이다.

 ***

 “마마.”

 붉은 개두를 쓴 채 술잔을 바라보고 있는 가란을 향해 지엄한 얼굴의 상궁이 다가왔다. 그녀를 앞으로 모시게 될 여자였다. 가란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술잔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나누어 마셔야 할 술이 식어가고 있었다. 가란은 등롱의 붉은 불빛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침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 뜨거운 소리에 상궁이 할 말을 잃었는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아, 아, 흐윽···.’

 계집이 앙탈을 부리며 내는 비음. 남녀의 성기가 결합하며 들리는 난잡한 소리. 때때로 섞이는 울음과 짧은 투덜거림. 한 식경이 흘러가고 있는데도 끝나지 않는 것을 보면 황제는 참으로 정력적인 사내란 생각이 들었다.

 “저···. 자, 자리를 옮겨 드릴까요.”

 “혼례식을 올린 신부가 초야의 밤에 어딜 가겠는가.”

 낮이 밝았을 때 신랑도 신부도 신방에 없었다는 말이 궁 안에 퍼지면 참으로 좋은 꼴이 될 것이다. 가란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말 많은 자들 사이에서 굴려지는 것은 가란이었다. 가 귀비 또한 황후의 초야에 그 신랑을 낚아챘으니 좋은 말을 듣진 않겠지만 가란만 할까. 가 귀비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여인이라 하나 황손을 회임한 여인이다.

 “하오나···.”

 “폐하께선 언제나 저리 정력적이신가?”

 “마, 마마···.”

 침실 너머 가 귀비가 죽을 듯 자지러지고 있었다. 황제의 거친 숨소리와 비음 또한 낯이 붉어질 정도로 선명히 들려 괴로웠다.

 “회임한 가 귀비가 염려되는군.”

 대답하지 못하는 상궁에게서 고개를 돌린 가란이 남녀의 교접 소리를 가만가만 들었다. 음부가 젖을 만큼 낯 뜨거운 소리였다. 상궁에게 그만 물러가라 말한 그녀는 스스로 개두를 벗었다. 황제가 이런 식으로 바람맞힐 줄은 몰랐다. 그녀를 안지 않아도 한 번은 들어올 줄 알았다.

 ‘다행인 건가.’

 그녀는 태후와 달랐다. 아비와도 조금 달랐다. 마음이 억세지 못했다.

 ‘너는 황후로 살 것이다.’

 오늘이 되기 전 아비는 거듭 말했다. 황후가 되기 위해 태어났고 황후로 살기 위해 산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지아비가, 그녀의 황제가 꼭 주윤협이란 법은 없다. 다행인 건가. 여러모로···.

 아비는 연모하는 마음을 끊어내라 했다. 주윤협의 황후로 산다 한들 보답받지 못할 마음이겠지만 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자는 네게 어울릴 배필도, 너와 함께할 배필도 아니라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러니 윤협이 오늘 밤 그녀를 안았다면 그편이 더욱 그녀를 심란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녀를 너덜거리고 부끄럽게 만든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지난 하남에서부터 끊어내기 위해 거듭 노력하고 있던 그녀였다. 한데 오늘 이렇게···. 웃음이 났다. 건너편 방에서 가 귀비가 울며 무어라 소리쳤다. 울음에 뭉그러져 형체가 불분명한 외침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가 귀비에게나 그녀에게나 모두 잔혹한 밤인 것 같았다.

 ***

 아직은 이슥한 새벽이었다. 여윈 촛불 하나만 작게 타오르고 있었다. 은환은 가물거리는 눈을 슴벅였다. 고개를 돌려 사내를 보았다. 기다란 팔이 그녀의 가슴을 안고 있었다. 은환은 푸른 새벽빛이 미끄러진 황홀한 이목구비를 더듬더듬 보았다. 긴 속눈썹이 그녀보다 나붓했다. 오롯이 근육으로 부푼 몸을 내려다보다 침상 바로 옆 탁자 위에 희끗한 종이를 발견했다.

 은환은 일어나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가져와 폈다.

 <영화문으로부터 서편. 언약한 것을 지키겠다.>

 고개를 들었다. 궁녀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은환은 뒤를 돌아 황제를 응시했다. 누가 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탁자 옆에는 묵직한 자루가 있었다. 살펴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양감만으로 무엇인지. 그것을 누가 전하였는지···. 은환은 빛이 들지 않은 탁자 옆을 더듬더듬 살폈다. 예상대로 명주로 지은 배자와 군이 있었다. 색이 밝지 않고 탁하여 도드라질 일이 없어 보였다.

 은환은 얼른 옷을 갈아입은 뒤 멱리를 집어 들었다. 태후가 연락할 줄 몰랐다. 배 속의 아이를 죽이지 못하였으니 언약한 바도 없던 일로 생각할 줄 알았다. 하여 작금의 일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미적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결정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영영 없을 테다. 하남에서 모든 일이 발각당한 이후로 출궁에 대한 일은 마음을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를 뒤돌아보았다.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여 은환은 반듯하게 접힌 편지와 자루를 손에 쥐고도 쉬이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토록 곤히 자는 윤협은 처음이라서···. 그래서 그랬다.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새벽빛이 움푹 팬 굴곡마다 스며들었다. 곤히 자고 있는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윤곽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윤협은 어린아이와는 거리가 먼 다 큰 사내인데. 정말이지 짐승 같은 사내인데···. 방금도 그를 겪었는데. 그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사나운지···. 그러니 뒤를 돌아야 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걸음을 뗐다. 발바닥에 아교를 붙인 것처럼 떼는 발걸음이 어려웠다. 그러나 문을 열었다. 복도는 휑했다. 그녀는 궁인들만 들고 나가는 작은 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예상대로 궁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교대시각이라 해도 지나치게 휑했다. 그녀는 영화문으로부터 서편이란 말을 되새김질하며 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궁인으로 보냈던 시간이 길었던 턱에 편지에 적힌 문이 어딘지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태후는 그녀의 발길이 닿을 동선마다 궁인만 치워준 것 같았다. 마침내 궁 밖으로 나왔다. 한 다경이 조금 넘게 걸린 것 같았다. 윤협이 깨어났을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빈자리를 더듬던 손이 이내 금침을 움켜쥐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이 사나웠다. 둥근 여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식어가는 온기를 파헤치듯 더듬던 윤협은 일어나 은환의 말랑한 가슴을 움켜쥐듯 금금의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어슴푸레한 아침 빛 속에서 일어난 그의 기척에 태감이 그를 불렀다. 윤협은 나지막하게 제 종을 불러들였다. 이윽고 침실 안으로 들어선 태감이 눈을 슴벅였다. 몸을 둥글게 만 채 쌔근거리며 자고 있어야 할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칼자루처럼 서늘한 사내의 낯빛이 이해 갔다. 태감이 덜덜 떨며 고두했다. 바닥에 눌어붙은 벌레처럼 납작하게 몸을 붙인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아.”

 한 자락의 침의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가 단조롭게 명령했다. 돌아보기 싫은 무언가를 보듯 뒤를 본 뒤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은환···. 마땅히 괴여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들을 곱씹었다. 언제나 안고 있어야 할 가느다란 여체. 온기. 말랑한 가슴과 흐트러진 머리칼.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비어 식은 지 오래된 금침만이 전부였다. 그는 내리 던지듯 제 종을 향해 시선을 내다 꽂은 뒤 침소 밖으로 나왔다. 소란에 개두만 간신히 벗은 가란이 그를 보고 있었다. 청승맞게 혼례복을 갈아입지 않은 계집이 울퉁불퉁한 가슴팍을 드러낸 채 노기에 굳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화심전 근처에 기웃대고 있는 궁녀가 보였다. 그의 시선에 태감의 시선 또한 돌아갔다.

 “저, 저년을 잡아라!”

 태감의 목청 큰 소리에 궁인들이 일사불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집은 그물에 걸린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잡혔다. 그녀는 이내 황제의 앞에 끌려왔다. 이실직고하라는 태감의 노성에 궁녀가 벌벌 떨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이내 신형사로 끌려갔다. 황제는 그녀가 끌려가고 없는 자리를 응시했다. 은환을 어떤 방식으로 끄집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후가 은환을 궁 밖으로 내몰려 했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니. 언제고 그녀가 은환에게 접근하고자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를 이용하여 윤협의 황위를 흔들고자 한 것도. 하면 무엇을 위해 은환을 움직인 것일까. 태후의 의도가 무엇일까. 서남에서 그들이 치르고자 했던 거사는 황후 책봉식. 그의 혼례식이었다.

 한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을 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여 그가 은환으로 인해 군을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가 궁을 비우길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은환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승상에 대한 감시를 느슨히 하고···. 하여 그가 집중력을 잃을 때까지···. 웃음이 났다. 낮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본 태감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수색대를 꾸려라. 가 귀비를 찾아.”

 금의위를 불러 명했다. 사내들의 각이 잡힌 인사를 보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짐이 직접 지휘하리라.”

 윤협의 말에 태감의 낯이 엷게 굳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영감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궁이 어수선하옵니다. 폐하. 가 귀비께선 임부이니 얼마 가지 못했을 겁니다. 굳이 직접 지휘하지 않으셔도···.”

 “알아.”

 태감이 입을 다물었다. 윤협은 태후의 여식이 들어앉아 있는 침실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태후가 뭘 원하고 있는 것 같나? 단순히 여식의 정적이자 연적을 해치우고 싶었을까? 그들이 은환만을 죽이고 싶어 은환을 노렸을까.”

 윤협이 고개를 돌렸다. 태감은 파랗게 굳은 얼굴로 그를 더듬어 볼 뿐이었다.

 “죽이고 싶은 건 황제지. 황제의 계집과 그 계집이 밴 짐의 씨는 덤이야.”

 “하, 하오면···.”

 윤협의 기다란 시선이 아침 빛이 드리운 그늘을 바라보았다. 은환을 잃은 것. 태후가 은환을 이용한 것만으로 신경 줄이 갉아 먹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를 진정으로 노엽게 만드는 것은 태후의 손을 잡은 은환이었다. 제게 손을 뻗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덥석 나선 것은 아닐 터.

 그러나 은환은 떠났다. 달음박질하여 그를 떠났다. 노기가 일었던 자리가 뻥 뚫린 것 같았다. 그는 엷게 진 그늘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은환을 찾으러 가자.”

 위험할지도 모른다. 태후가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은환의 목숨 또한 위험하리라. 그는 걸음을 옮겼다.

 ***

 막다른 골목이었다. 은환은 숨이 차 헐떡거리며 벽을 짚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부푼 배를 잡고 숨을 몰아쉬던 은환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막다른 골목. 옮길 자리가 없었다. 두려운 눈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을 본 은환은 시선을 고꾸라트렸다. 윤협이 보낸 이 같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무얼 원하는 걸까. 목숨? 가진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분명 숨을 앗으려 들 것이다. 애초 태후가 보장한 것 또한 자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은환은 새벽부터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서남으로 돌아가려 했다.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데리고 본래 하려고 했던 일을 하려 했다. 한데 양천이 봉쇄되었다며 거리가 소란스러웠다. 당황한 은환이 짐 꾸러미를 안고 황궁을 돌아볼 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두 괴한이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소스라쳐 도망쳤으나 결국은···.

 “워, 원하는 게 뭔가요?”

 저항하듯 사내들을 향해 소리쳤다. 배를 최대한 가린 채 그들을 노려볼 때였다. 그들의 등 뒤에서 커다란 키의 사내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환은 입술을 악문 채 그를 향해 길을 터주는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어둑한 그늘 속에서 이윽고 드러난 사내는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등청한 관리들과 고위 백관들, 황제와 황후의 혼례식이 지난 아침이라 인사를 드리기 위해 입궁한 귀족들이 정전으로 소집되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이들이 한가득 한 가운데 승상의 편에서 그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컴컴한 얼굴로 승상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반은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황을 시해했단 증거로 황제를 폐위시킬 예정이니. 응당 저항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승상은 모진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제 계획을 수립해오며 이행하기 위해 주군을 시해했으며 그의 정궁과 간통한 사내였다.

 하물며 그의 정궁 또한 어떤 여인인가. 지아비인 황제의 신하와 사통하여 버젓이 여식까지 둔 이가 그녀였다. 하니 황제가 궁을 비우고 없는 지금. 이들이 있는 자리, 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 이들. 모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과연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가. 예부시랑은 두려움을 삼키며 컴컴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본래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승상에게 줄을 선 적은 없으나 황제를 성심껏 모신 적도 없었다. 그가 태후와 승상의 간통 사실까지 알게 된 것은 그저 살기 위해 황궁에 심어둔 귀가 유능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만큼 귀가 밝진 않았을 터. 그러니 영문 모르고 죽을 이가 몇이나 될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비어 있는 옥좌 옆 발이 처진 자리에 태후가 앉았다. 승상 또한 정전을 가로질러 들어와 중앙에 섰다.

 예부시랑은 그들을 연신 흘긋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모두 뒤숭숭한 얼굴이었다. 어찌하여 승상이 겁 없이 옥좌의 앞에 선단 말인가.

 “경사스러운 일을 뒤로하고 아침 일찍 모두 정전에 소집하여 송구하게 되었소. 그러나. 황제께서 한낱 후궁의 뒤를 쫓으시는지라 이리 중하고 급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대 백관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야 했소.”

 다시 수군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승상은 엄중한 눈으로 그들을 보더니 누군가를 향해 눈짓했다. 승상의 눈짓을 받은 연친왕이 정전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보다시피 연친왕 전하께선 지난 정해년 사변 이후 누구보다 선황 폐하의 침통함과 비통함을 벗겨 드리려 애써온 분이오.”

 예부시랑은 승상의 옆에 선 연친왕을 보았다. 선황께서 붕어하신 이후 금상의 명을 받아 연친왕은 사변을 조사한 바 있었다. 비록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지만. 아니, 도리어 증거가 남아있을 장소를 훼손하기 급급했겠지. 그리고 어쩌면 황제는 그 모든 것을···.

 “한데 사흘 전 자정. 연친왕께서 이 사람을 찾아왔소.”

 “송구합니다만. 승상 대체 무슨 말씀을··· 어, 어찌하여 옥좌 앞에서 이렇게 경거망동하는 것입니까.”

 승상의 서느런 눈이 그이를 향했다. 사내가 입술을 닫았다. 좌중에 불편한 기색이 조금 더 짙어졌다. 승상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연친왕께서 정해년 사변의 주범을 찾았습니다.”

 수런거림이 커졌다. 예부시랑은 설마 그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인가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젊은 관리들이나 늙은 고관들이나 헛기침하며 승상이 하는 말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예부시랑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역적이 누구입니까?”

 젊은 관리 하나가 목청 높여 물었다. 승상은 그 질문을 기다렸단 듯 희열을 숨기지 못하고 흰 이를 드러냈다.

 “주윤협. 선황 폐하의 가장 아낌없는 총애를 받으신 장남. 당금의 황제 폐하이십니다.”

 ***

 “폐하.”

 젊은 금의위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양천으로 들어오는 모든 성문을 봉쇄한 지 반나절이었다. 그는 황궁의 외곽, 붕어하신 부황이 예 친왕이던 시절 모친과 함께 청춘을 보낸 왕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복층으로 이루어진 예친왕의 성은 성 마루가 높아 서편 창에 서면 황궁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윤협은 딱딱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온 금의위를 응시했다. 보고 받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바였다.

 “유 승상이 정전에서 폐하를 정해년 사변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하옵니다. 또한 태비 마마와 완친왕 전하를 자녕궁에 유폐했습니다.”

 금의위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제 입으로 내뱉는 말 한마디 말 한마디가 끔찍한 얼굴이었다. 윤협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둥근 창 너머 황궁이 아득했다. 유 승상이 사병을 움직였다. 사병을 해산시켰고 재산의 반을 납부했으니 자택에 주둔시킨 사병을 전부 할애했을 터. 타당한 사유를 들어 황위를 흔들려 할 터였다. 요긴하게 이용할 패로는 연친왕만큼 훌륭한 패가 있을까.

 “폐하.”

 느른한 얼굴로 창을 바라보는 자신을 본 금의위가 그를 불렀다. 무엇이든 명을 내려달라는 얼굴이었다. 윤협은 그를 보다가 입술을 떨어트렸다.

 “서 대인이 백아산에 항주 도독의 군을 이끌고 있다. 그에게 때가 되었노라 전하라.”

 금의위의 얼굴이 밝아졌다. 서 대인이라면 항주 도독의 차남으로 한때 상장군 직까지 겸했던 전쟁 영웅이었다. 젊은 무장으로 전장을 지휘하다 황제가 동궁이던 시절 그의 태사로 있으며 황제에게 직접 검술과 병술을 지도했던 사내였다. 그런 그가 조정에 출사표를 던진 뒤 얼마 후 낙향한다고 했기에 모두 의아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서치윤이 군을 이끌고 있다면···.

 “봉행하겠나이다.”

 금의위가 밝은 얼굴로 명을 받든 뒤 나갔다. 창을 보던 윤협은 고개를 돌렸다. 서랍에 넣어두었던 주머니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갓 태어났던 은환을 닦은 영견이었다. 이것을 달라 조를 때부터 서치윤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주인의 아들이라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은환···.’

 은환이 그를 떠났다. 그에게서 달아났다. 자신을 겁간했다고 소리치던 여자가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지아비가 지어미를 안는 것이 겁간인가. 지아비가 지어미의 음부를 파고들어 정으로 질구를 채우는 것이 겁간인가. 그는 그녀를 회임시킨 사내였다. 그녀의 자궁 속에 씨를 심어 배가 부풀도록 한 사내가 그였다.

 은환이 가진 아이의 아비가 그였다. 한데도 은환은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겁간이라 소리쳤다. 심장이 잘근잘근 씹히다 못해 뻥 뚫린 것 같았다. 한순간에 든 모멸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간 윤협이 그녀를 사랑한 일 또한 겁간이라 생각했을까. 윤협이 보여주었던 사랑.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행위가 그녀에게 겁간이었을까. 주머니를 쥔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두렵다. 은환이 그를 지아비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보는 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노여운데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고 와 묻고 싶었다. 그간 우리가 한 것이 무엇이냐고. 대체 어째서 그에게서 달아난 것이냐고. 은환을 되찾는 일은 쉬웠다. 끌고 와 다시 가두면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찌 될지 알고 있지 않나.

 ‘미친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아요.’

 젖은 얼굴로 속삭이던 여자가 떠올랐다. 윤협은 사랑으로 인해 미친 여자를 알고 있었다. 사랑으로 인해 미친 사내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이미 뼈가 저릴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열이 올랐던 눈가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저물고 있는 해를 응시했다. 백아산에 서남 도독의 군이 응집되어 있었다. 양천을 봉쇄했으니 양천 밖으로 물린 유 승상의 사병을 움직이긴 힘들 것이다. 또한 연친왕이 옥쇄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니 황도의 군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들은 윤협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자정이 넘기 전 서남 도독의 군이 예친왕부로 집결할 것이다. 황궁을 수복하고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저물어가는 해를 응시했다.

 ***

 양천에서 서치윤을 만나는 일은 처음이었다. 궁녀로 입궁하기 위해 양천에 도착했을 때조차 대인을 뵙지 못해 섭섭했다는 말을 서찰에 적었던 기억이 났다. 기억하는 한 사내는 언제나 어미의 옆에 있고자 했다.

 서남에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미의 옆에 있고자 하는 것이다. 서남이 좋아 서남을 택한 것이 아니라 어미가 그곳에 발이 묶여있기 때문에 별수 없이 사는 것으로 보였다. 어찌하여서 어미냐고 하면 그것은 은환도 알 수 없었다.

 이따금 양천과 항주를 오가기도 했으나 그녀가 열세 살. 조정을 등지고 서남으로 낙향한 사내는 양천으로 발걸음 하는 일이 무척 드물었다. 그런 사내가 은환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양자를 돌아보았다.

 서희섭이 복면을 벗은 뒤 제 양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은환은 다소 멍한 얼굴로 그의 단정한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양자를 보던 서치윤의 시선이 은환에게 닿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들이 그녀를 산장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부푼 배를 안고 시위를 따랐다. 서치윤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은환은 그를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유경효가 궁을 장악했다.”

 “예?”

 “폐하께선 예친왕부에 계시단다.”

 “그게 무슨···.”

 은환은 서치윤을 응시했다. 서치윤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젊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옅은 주름이 보였지만 흰머리는 없었다. 수염 또한 기르지 않아 황제처럼 깨끗한 턱이 날카로웠다. 은환은 말문을 더듬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왜 군병들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산장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군병의 수 또한 예측할 수 없었다. 손을 대면 그 자리에서 베일 만큼 각을 세운 사내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로 다가올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서치윤은···.

 “궁을 비우셨단다. 은환아.”

 “어, 어찌해서 궁을 비우셨단 말씀이신가요.”

 서치윤은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눈이었다. 다정한 아버지처럼. 감히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인데 언제나 저 눈길 때문에 은환은 그가 아버지 같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찌해서 폐하가···.”

 “너를 찾기 위해 예친왕부로 나오셨다. 네 안위를 위하여 궁이 아닌 궁 밖을 택하셨다.”

 은환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치윤은 표정이 없었다. 여전히 따뜻한 시선이긴 했으나 사태에 대한 두려움도 염려도 보이지 않았다. 되돌려 보노라면 이런 일 또한 처음이 아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면 폐하께선 무사하신 겁니까? 어, 어떻게···.”

 궁을 나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한데 천지가 뒤집어진 것 같았다. 그리도 미웠던 사내를 등졌는데 그가 궁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돼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예친왕부로 달려가고 싶었다. 달려가 그가 무사한지 손끝이 닳아 없어질 만큼 더듬고 싶었다.

 “무사하시단다.”

 깨질 만큼 창백해진 은환이 일어나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은 얼굴을 하자 서치윤이 따라 일어났다. 그는 은환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은 뒤 은환의 볼을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무사하실 거야.”

 “···.”

 “내가 반드시 무사하시도록 할 테니.”

 불안하게 굴려지던 눈동자가 서치윤에게 고정되었다. 은환은 조심스럽게 제 볼을 쓰다듬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서치윤이 이런 식으로 달랠 때면 언제나 눈물이 났다. 단단하고 따뜻한 목소리. 이제는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속삭임. 반드시 그리해주겠다고. 너를 더는 위험하지 않게 하겠다는 읊조림.

 서치윤이 그녀에게 하는 말들은 모두 언약이었다. 그리하여 다 괜찮아졌다. 그러니 오늘도 괜찮아질 수 있을까. 윤협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워서 어떻게든 상처 주고 싶었던 사람인데···.

 울음이 터졌다. 서치윤이 그녀를 익숙하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한 가지 듣고 싶은 것이 있다.”

 귓가에 낮고 어둑한 서치윤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훌쩍이던 은환은 고개를 들었다.

 ***

 가란은 황궁이 아버지의 사병으로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견할 수 없이 적은 수이긴 했지만 연친왕이 보유한 사병들도 동원되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흘러갈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태후가 아버지의 뒤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후가 연친왕의 손을 들었으니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 또한 몇 없었으리라.

 가란은 연친왕을 흘깃 보다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가란이 언제까지나 황후로 살 것이라 했다. 그게 누구의 황후든···. 시선을 떨군 채 황제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

 궁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얼어붙어 있던 궁인 중 몇이 궐의 담 밖을 내다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어수선한 기운 속에 가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의 태감 중 아버지에게 매수된 이들 중 몇이 뛰어가 사다리를 타고 담장 밖을 내다보려 하는 궁인들을 끌고 내려왔다.

 경을 치겠다는 호통 소리에 궁인들은 불쾌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감히 위계가 분명한 궁인들 간인데도 그가 황제를 배신한 이라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저런 태도인 것 같았다. 가란은 아버지와 연친왕의 무장한 사병들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병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백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황제와 전면적으로 맞부딪히려는 것이다. 그에게는 움직일 수 있는 황도 군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외곽의 금의위와 황도의 수비병들이 전부. 아버지와 연친왕의 사병 수보다 적다고 했으니 승률은 계산하지 않아도 훤했다.

 가란은 마른침을 삼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성 소리가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무작위로 날아오르는 화살들이 사병들을 꿰뚫었다. 성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병사들이 무작위로 사병들을 찌르고 베었다. 살아있는 자들을 훼손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래. 이골이 난 이들이었지. 그녀는 두려움을 삼키며 아버지를 찾기 위해 걸음을 움직였다. 복도를 지나 태후전에 있을 아버지를 찾았다. 막 휘락궁을 찾았을 때였다.

 “뭐!”

 아버지의 노성이 들렸다. 가란은 호흡을 멈춘 채 그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시위 하나가 딱딱하게 굳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항주 도독의 군이 양천 안에 들어와 있었다고?”

 무참하게 흔들리는 숨소리가 그의 급박한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가란은 움찔거리며 그가 하는 말들을 가만가만 들었다. 황제가 항주 도독의 군을 백아산에 집결시켰는지 아버지는 몰랐던 것 같았다. 그게 얼마나 되었으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었지만 백병전을 시작한 지금에도 많은 수의 군사가 황궁을 에워쌌고 그 선봉에는 상장군 직을 지냈던 서치윤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긴박하게 보고를 전달한 시위가 침실을 나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휘락궁의 복도가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태후의 태감이 다급한 얼굴로 뛰쳐 들어왔다.

 “태후 마마!”

 침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태후가 창백한 얼굴로 태감을 응시했다. 늙은이의 소맷자락과 얼굴에는 붉은 선혈이 튀어 있었다. 모든 게 끔찍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무슨 일이냐.”

 “피하셔야 하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태후가 소리쳤다. 가란은 앉지도 서 있지도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감이 울부짖으며 궁의 후미가 습격당했다고 했다. 자정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사병의 수가 적지 않았다. 경효가 일부러 사병을 해체하는 척 조금도 줄이지 않고 양천의 외곽에 집결시켜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리 빨리···.

 “이미 금의위가 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태후 마마와 승상을 생포하려 할 겁니다. 부디···!”

 태감이 위태로운 얼굴로 상황을 보고했다. 그의 밭은 숨소리가 침실 전체를 울렸다. 휘락궁 안에 있을 일이 아니라 여겼는지 승상이 일어나 휘락궁 밖을 나왔다. 태후 또한 그를 따라 움직였다. 궁 밖은 이미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가란은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휘락궁 너머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았다. 태후의 낯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상황을 파악한 승상은 가란과 태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제 곁을 지키는 시위들을 향해 가란과 태후를 궁 밖으로 모셔가라고 했다.

 가란은 얼이 빠져 시위의 손에 붙잡혔다. 그러나 태후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날 내보내겠다고?”

 태후가 바짝 얼어붙은 얼굴로 승상을 응시했다. 그는 태후의 신경질적인 외침 따위 들리지 않는지 궁 내부의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세가 밀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딸이었다. 아니. 아내와 딸이었다. 그리 여기며 평생을 그들을 위해 살아왔다. 그들이 떳떳한 세상에서 그들이 떳떳한 가족으로 살기 위하여.

 “오라버니를 두고 나 혼자 빠져나가라고?”

 “후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서로 공대하는 일도 잊은 듯했다. 태후와 승상이 아닌 이미 숙영과 경효였다. 가란은 멍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제 아가리 속으로 기어들어 온 먹이를 본 포식자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은 환궁이었다.

 ***

 자정이 지나 동이 틀쯤 황궁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시신들로 뒤덮인 황궁은 황궁이 아니라 전장 같았다. 실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시신 중에는 일부 궁인들도 섞여있었다. 애석하게도 변을 피하지 못해 화살을 맞고 죽은 이들이었다.

 산등성이 너머 해가 붉게 뜰 때쯤 화양은 서둘러 자녕궁으로 걸음 하였다. 태후와 승상이 모반을 일으켜 궐을 장악하자 태비 소생의 황자와 황녀들은 자택에 꼼짝없이 발목이 잡혀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부를 열지 못한 완친왕이야 태비의 곁에 붙어있어 함께 자녕궁에 유폐될 수 있었지만 화양은 남편과 함께 자택에 감금되어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다행히도 유 승상과 태후를 줄곧 경계했던 오라비가 하루 만에 궁을 되찾았으나 유폐된 하루 사이 태비가 열을 앓았다고 전한 통에 화양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머니!”

 시신은 자녕궁의 앞까지 수북했다. 여기저기 낙엽처럼 널린 시신들을 피해 걸음을 옮기던 화양은 자녕궁의 앞에서 숨을 헐떡였다.

 “마마.”

 태비를 모시는 상궁이었다.

 “어머니는?”

 “안에 들어계시옵니다.”

 “정신을 차리셨나? 영 놓은 건 아니지?”

 화양이 다급하게 물었다.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약을 드시는 횟수가 잦았다. 며느리 앞에서 정신을 놓고 달렸들었다기에 심장이 철렁했던 차였다. 한번 사달이 일어난 후로는 약을 재깍 먹었으나 부작용으로 시름시름 앓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어머니는 본래도 심통을 앓고 있었다.

 “의식은 있으시옵니다. 정신 또한 또렷한 편이시고요.”

 상궁은 한숨을 쉬었다. 유폐되어 열병을 앓는 내내 헛소리를 읊조렸던 태비였다. 아들을 찾는 듯싶더니 열이 깊어지자 남편을 찾았고 언제나와 같이 화 귀비 시절로 돌아가 지아비의 악행에 울음을 터트리거나 그의 죽음에 울부짖었다. 화양은 상궁의 하얀 얼굴을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소녀 이나입니다.”

 가장 지척에서 아끼던 딸의 목소리를 듣고도 알지 못할까 봐 화양은 미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 한가운데는 여윈 몸의 여인이 어진 앞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

 딸이 와도 돌아가신 아버지만을 바라보는 여인을 향해 이나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괜찮으셔요? 오라버니가 우리를 구하러 왔어요. 이젠 다 끝났어요. 어머니. 태후와 승상이 벌을 받을 차례입니다.”

 화양이 여윈 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태후와 승상은 옥에 갇혔다. 연친왕과 강친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감히 황제를 선황 시해범으로 몰고 가려던 이들이었다. 사건의 중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태비를 헛소리만 늘어놓는 미친 계집으로 몰고 간 뒤 그녀의 증언은 모두 무력화시킨 이들이었다.

 한데 이제는 그녀의 아들까지 사변에 엮어 끌어내리려 했다. 미친 작자들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한참이나 나온 이들이었다. 하긴 제정신이면 부황을 시해했을까. 화양은 눈을 번득이며 태후와 승상을 생각했다.

 정해년 사변의 주범은 태후와 승상. 그리고 연친왕과 강친왕 형제들이었다. 그들을 축으로 일어난 사변에 오라버니가 끼어들 틈이 어디 있는가. 오라버니는 그때 태자 된 몸으로 전장에 있었다. 태자로서 지는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가 어떻게 사람을 보내 부황을 시해할 수 있지?

 대체 오라버니가 아버지께 그리할 이유가 무어 있다고. 오라버니가 장남인 이유로, 동궁이라는 이유로 황제의 정적일 순 있으나 오라버니는 부황의 기대와 사랑을 받는 장남이었다. 총애하는 여인이 낳은 첫아들이었고 하여 자식 중 꽤 예쁨 받는 축에 속했다.

 성정이 모질고 사나운 탓에 드러내놓고 오라버니를 아끼진 않았으나 다섯이 넘는 아들 중 오라버니만큼 예쁨 받은 아들은 없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아버지를 시해해? 대체 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가만히 있어도 황위를 물려받을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할까.

 한데 그 말에 넘어간 이들이 있다고 했다. 역적들···. 천하의 죽일 놈들···. 화양이 이를 갈았다. 동궁 시절 그를 모신 이들 중 매수된 이들이 있었다. 오라버니가 세상에 사라진다면. 하여 태비의 소생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다면···. 화양은 끔찍함에 치를 떨었다.

 “이나야.”

 말간 얼굴로 어진을 보던 설란이 딸을 돌아보았다.

 “네?”

 작은 손이 젖은 얼굴의 쓰다듬었다. 부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얼굴이 낮달처럼 작고 희미했다. 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어머니의 이마를 만졌다. 미지근한 열이 없었다.

 “이젠 아프지 않으세요?”

 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영은?”

 태후를 일컬음이다. 이나는 조금 놀라 대답했다. 태후를 숙영이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몹쓸 년. 지옥에 처박힐 년. 그런 식으로 뇌까리는 건 자주 있었다. 언니가 죽은 후 언제나 그와 같이 태후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이나 또한 어미를 따라 험하게 그녀를 욕하곤 했으나 태후를 ‘숙영’이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간 얼굴로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어미를 멍하니 쳐다보던 이나가 덧붙여 말했다.

 “옥에 있어요. 오늘 신시에 추국이 열릴 거래요.”

 “그래.”

 “괜찮으세요? 어머니.”

 “괜찮고말고.”

 설란이 딸의 손을 감싸듯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둥근 미소를 지었다.

 신시. 어줍은 간계로 감히 천자를 능욕하고 조정을 뒤흔들려 했던 이들이 모두 추국 장에 모여 고신을 당하고 있었다. 감히 천자를 끌어내리려 한 이들이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이 없었다. 관련된 모든 이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비틀렸다. 더러 곱게 죽지 못할 것을 예감해 혀를 깨물고 죽으려 한 이들 또한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벼슬과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연루된 모든 이들이 한 공간에서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연친왕의 사병이 평소보다 많았는데 이는 어디서 누가 병사와 자금을 대어준 것인가. 나아가 선황의 시해를 조사하던 당시 연친왕은 무얼 했는지···.

 번번이 아귀가 맞지 않아 사변 당시의 상황을 재조립할 수 없던 것들이 다시 수면 위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신시가 그렇게 지나고 자정이 돌아왔을 무렵. 만신창이가 된 유경효는 무릎을 제대로 쓰지 못해 질질 끌려 다시 옥 안으로 집어 처넣어졌다.

 그는 피에 절은 몸으로 벌벌 떨었다. 휘락궁이 아닌 죄인처럼 감옥에 처넣어진 태후가 이를 보고 벼락같은 노성을 질렀으나 듣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친 채 끙끙 앓으며 뒹굴던 사내가 태후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이것들! 이 몹쓸 것들! 감히! 감히!”

 두려움에 눈물이 차오르면서도 욕을 뇌까리길 주저하지 않은 태후가 창살 너머 경효를 바라보았다. 생살이 쓸리고 으깨져 말 그대로 저며 벌이는 형벌이 끔찍했다. 반나절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수 시간도 안 되어 사람이 아닌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형벌을 태후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이후가 어떨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기에 더욱 두려웠다. 잘 알기에 울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오라버니!”

 젖은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이제 그를 승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앞으로 가망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아마도 오나라의 형벌 중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때까지 경효는 살아있겠지. 사람이 아닌 채로 살아있을 것이다. 궁에서 반평생을 산 태후다. 그들이 앞으로 받을 형벌에 비하면 사지가 일시에 찢기는 것은 참으로 깨끗한 형벌일 수도 있었다.

 “오라버니. 흐윽···.”

 “괜, 괜찮다. 나는···.”

 새는 발음에 쌕쌕대는 숨소리가 듣기 어려웠다. 숙영은 차마 그를 보지 못한 채 창살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차라리 자신도 저렇게 만신창이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어째서 그들이 옥에 갇혀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갇혔긴. 졌으니까 갇혔지. 그들이 졌으니까. 그들이 설란과 희강의 아들에게 패배했으니까. 그래. 더는 판을 바꿀 방법이 없지. 하늘이 개벽해도 바뀔 수 없다. 그러니 곱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

 “가란이는···.”

 “구, 궁 밖에···.”

 다행히도 가란은 궁 밖으로 도망쳤다. 윤협이 포식자처럼 느긋하게 다가올 무렵 발 빠른 시위가 혼란한 틈을 틈타 그녀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다행인 일이었다. 살아남았다면 양천을 빠져나가고 있으리라.

 “···다행이다.”

 경효가 읊조렸다. 숙영은 눈물을 흘리며 경효의 상한 얼굴을 쓰다듬듯 창살을 쓰다듬었다. 그를 안고 싶었다. 그를 반듯하게 눕힌 뒤 숨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다.

 “미안해. 숙영아···.”

 경효가 젖은 소리로 속삭였다. 숙영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눈물이 얼굴 전체를 적시고 온몸을 적시는 기분이었다. 아침이 밝을 일이 두려웠다. 그녀는 처음으로 완전히 겁에 질린 채 아이처럼 울었다.

 문득 나지막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신없이 울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소름이 비죽 돋았다. 추국이 끝났을 텐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덜덜 떨며 어둠 속을 보았다. 윤협이 다시 경효를 데려갈까 봐 두려웠다.

 “누구냐! 추국은 끝났지 않으냐!”

 그러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없었다. 숙영은 겁에 질려 소리쳤다.

 “바른대로 말할 테니. 다 말할 테니 제발. 제발···.”

 그녀가 두 손을 모아 형체 없는 어둠을 향해 빌었다.

 “다 알고 있으니 들을 필요 없어.”

 절그럭-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숙영은 고개를 젖힌 채 자신을 내다보는 여인을 응시했다. 아주 약한 등롱의 불빛이 윤곽을 비췄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속삭임. 언제나 그녀를 보면 부들거리던 여자.

 “설란···.”

 ***

 “어, 어찌할 셈이야···. 경효를 어찌할 셈이야!”

 숙영이 소리쳤다. 설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등롱을 들어 숙영의 헝클어진 모습을 슬쩍 보더니 그대로 경효를 향해 불빛을 비춰보았다. 속이 들들 끓기 시작했다. 망할 계집. 죽일 계집···. 이 계집이 죽도록 싫었다. 이따금 가엾다가도 주제 모르고 그녀를 흘겨볼 때면 그 잘난 낯짝을 짓이기고 싶었다.

 “너···.”

 설란이 다시 그녀의 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숙영은 독이 올라 그녀를 쏘아보았다. 제 잘난 아들이 이겼으니 입이 찢어지도록 웃어야 할 텐데 여자는 표정이 없었다.

 “너. 네가 이긴 것 같지? 응? 네가 우리를 이긴 것 같지? 네 아들이 나와 경효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아주 기분이 좋아 죽지? 네 더럽고 졸렬한 지아비의 복수를 하니 기분이 좋아 죽지 않으냐?”

 감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숙영이 소리쳤다. 그러나 설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숙영이 그녀였다 하더라면 아주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조롱했을 테다. 그러나 설란은···.

 “이긴 사람은 없어.”

 “···뭐?”

 “이긴 사람은 없다. 숙영.”

 숙영이 달싹거리던 입술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이 초췌했다. 설란이 자물쇠를 풀었다. 숙영은 놀라 그녀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설란은 나오란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숙영이 덜덜 떨며 밖으로 나왔다. 설란은 그녀를 경효가 있는 감옥에 밀어 넣었다.

 “경효 오라버니···.”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숙영이 손을 떨며 태아처럼 몸을 만 사내의 앞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처참했다. 어찌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을 수 있나. 어찌 한때 승상이었던 사내를 이렇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남자를 감싸 안았다.

 “내가 너라면···.”

 문득 설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숙영은 움찔 떨며 그녀를 응시했다.

 “내 지아비를 편하게 해주고 싶을 거 같아서···.”

 “어째서···.”

 눈물이 어룽어룽 앞을 흐렸다. 설란이 하나가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 설란은 그녀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네게 미안하니까.”

 “···뭐?”

 “내 지아비가···. 내 희강이 네게 몹쓸 짓을 하지 않았니.”

 숙영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설란은 헝클어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초췌하고 초라했다. 한때 황후로, 한때 태후로 세상을 굽어보던 여자였다. 그녀의 아이를 죽였고 그녀의 아이를 또 죽이려 했다. 윤협이 패배했다면 이런 관용을, 이 자리에서 시혜를 베풀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눈앞의 이들은 작은 관용조차 베풀지 않는 냉혈한들이니까. 그러나 설란은 그들과 달랐다.

 “희강이 너에게 미약을 먹여 제 시위를 통해 겁탈을 시켰지. 게다가 네 아이를 죽였어. 그래서 네가···.”

 설란은 입술을 다물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숙영은 우두커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핏줄이 벌겋게 돋은 눈이 형형했다. 설란은 눈물이 굳어 차갑게 식은 볼과 눈두덩을 바라보았다. 추국은 더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왜냐면 설란이 기억을 모두 되찾았고 그녀의 기억을 뒷받침해줄 증인을 찾았으니.

 “윤협이 증언해줄 이를 찾았다.”

 “···.”

 “희강을 죽일 때 말이야. 그의 손에 복부가 베인 채 휘청이다 절벽에 떨어진 이가 있었지. 그이가 살아남았어.”

 “그자는 우리가 죽였어.”

 “죽지 않았어. 주검을 확인하지 않았잖아.”

 시해에 가담한 자객들은 모두 그들 손으로 죽였다. 희강을 시해한 사변에 가담한 이들 말이다. 말이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하여 모두 죽였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공범은 그녀와 경효 그리고 연친왕과 강친왕 형제뿐이다.

 자객 중 살아남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자 또한 추적하여 끝내 죽였다. 경효가 그리 말했다. 한데 설란은 살아있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경효는 능지를 피할 수 없었다. 연친왕과 강친왕 형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산 채로 회가 처질 테다. 그들에게 악밖에 남지 않은 이가 고스란히 그들의 죄를 읊을 테니.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산 채로 살점이 한 점 한 점, 포가 뜨이겠지.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날 때까지 경효를 살려둘 것이다. 경효는 그때까지도 죽지 못한 채 눈을 뻐끔뻐끔 감았다가 뜨며 제 흘러내리는 창자와 식어가는 뼈를 바라볼 것이다.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제가 산 채로 솥에 삶기는 것보다···. 경효의 죽음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다가올 미래였다.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하여 너는 나와 경효의 파멸을 조롱하러 온 것이냐? 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걸 보고 싶어서?”

 숙영이 덜덜 떨며 노려보았다. 억세게 깨문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뒤 무릎을 꿇었다. 설란의 앞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미안하다. 네 아이를 죽여서···. 네 지아비를 죽여서···. 나를 원망하겠지. 경효를 죽이고 싶겠지. 내가 그 마음을 안다. 그러나 제발, 제발···.”

 “···빌지 않아도 돼.”

 숙영이 고개를 들었다.

 “네게 미안하단 말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뭔가, 뭔가 속셈이 있어 그런 것이냐.”

 “없어.”

 설란이 엷게 웃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숙영의 시선이 손에 떨어졌다.

 “비상이란다.”

 숙영이 그것을 받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엷게 웃던 설란은 미소를 지운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숙영은 그녀의 손안에 든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경효에게로 돌아가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내가 희강의 아내로 살지 않고 너 또한 희강의 아내로 살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렇게 마주 보고 있지 않겠지. 희강이 너를 경효에게 보내주었더라면 말이야···.”

 설란이 속삭였다. 숙영은 버석거리는 울음을 참았다. 망가진 몸으로 열을 앓는 지아비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경효는 앓으면서도 숙영의 손을 움켜잡으려 허우적거렸다.

 “···미안해.”

 설란이 뒤돌아섰다. 숙영은 경효의 손을 꽉 움켜잡은 다음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문지르면 사라질 듯 여윈 여인을 향해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아이를 죽인 것···.”

 설란의 걸음이 멈추었다. 숙영은 주머니 속의 비상을 귀한 금인 양 품에 안았다.

 “미안해.”

 걸음을 멈추었던 설란이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뒤돌지 않고 그대로 옥을 빠져나갔다.

 ***

 “태후에게 무얼 건네주셨습니까?”

 “비상.”

 어진을 보고 있던 설란이 대답했다. 거짓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관용을 베푼 게 아니라 희강이 하지 못했던 사람의 도리를 했을 뿐이니. 문득 현기증이 돌았다. 약효가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아물거리며 흐려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설란은 희강의 윤곽을 놓치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아들의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끔찍했다. 이 순간까지 아들의 얼굴에서 지아비의 얼굴을 보는 것은. 어째서 희강은 이런 아이를 더러 자신이 아닌 그녀를 닮았다고 했을까. 설란은 단 한 번도 윤협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설사 어릴 때 자신을 닮았다고 해도 자라면서 제 아비의 윤곽만을 끔찍하게 닮아간 아이였다. 설란은 맥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죄인에게 비상을 주었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기 분분한 목소리였다. 설란은 해쓱한 얼굴로 엷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

 “희강을 싫어했잖아. 넌 네 아버지를 끔찍하게 생각했어.”

 “그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하는 게 복수가 아닐까?”

 “복수면 어떻습니까? 화예 누이를 그들의 손에 잃고 누구보다 그들을 증오하며 살았던 게 어머니 아니셨습니까?”

 “···맞아.”

 설란이 쉽게 인정했다. 윤협은 더욱 낯을 일그러트렸다. 모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것일까?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유경효의 살점이 발라지고 태후가 제 눈앞에서 여식을 잃는 꼴을 보기 전까지. 누이의 복수도, 아비의 복수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날을 위해 그는 무엇을 잃었나. 어떤 마음으로 은환을 괴롭혀 왔나.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은환과 이리 뒤틀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만하고 싶어서.”

 어진을 보던 설란이 약하게 읊조렸다. 맥없는 음성이었다. 윤협이 노기 끓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머니.”

 “희강이 사람을 시켜 숙영을 강간하게 했어. 숙영은 그때 회임했고 희강의 손에 아이를 잃었지. 그래서 숙영은 이연이를 죽인 거야. 희강과 나에게 아이를 잃은 슬픔을 느끼게 하려고.”

 우악스럽게 어깨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설란이 윤협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나는···.”

 깨질 듯 창백한 얼굴이 문지르면 사라질 것 같았다. 곧장 그렇게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하여 윤협은 어머니를 우악스럽게 잡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라도 사랑해.”

 설란이 울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는 제 꼴이 한심했다. 사실은 아주 예전부터 한심하다고 느꼈다.

 “어머니···.”

 “그렇게 사람 같지 않은 사내도 사랑해서···.”

 윤협은 헐떡이며 주저앉는 어머니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굽혔다. 설란은 숨을 씨근대며 몰아쉬었다. 어의를 부르려 하자 그녀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한동안 숨을 헐떡이던 설란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내가 끔찍했단다. 내 사랑이 너무 끔찍했어. 사람 같지도 않은 사내를 사랑하는 게···.”

 손끝이 저렸다. 죽음의 기운이 발끝부터 천천히 그녀를 덮치는 것 같았다. 설란은 아들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룽진 눈물 때문에 시야가 가물거렸다. 윤협이 어슷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 위로 끔찍하게 사랑했던 사내가 차올랐다가 옅어지길 반복했다.

 “그만. 태의를···.”

 “네 말대로 네 아비는 죽은 자식의 관 앞에서 그 자식의 어미를 겁간하던 사내였다. 그런 자가 지아비라는 게 끔찍해서 달아나려던 나를 끌고 와 발목을 부러트려 놓은 사내가 네 아비였어. 그런데도 나는···.”

 숨이 껄떡거리며 넘어갔다. 설란의 여윈 몸이 기우뚱하고 쓰러지려 했다. 윤협은 그녀를 받아냈다. 끝없는 열이 설란을 덮쳤다. 그녀는 헐떡이며 아들의 몸으로 쓰러졌다.

 “무얼 드신 겁니까?”

 “···희강이 보고 싶어.”

 설란이 속삭였다. 윤협은 표정을 굳힌 채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무얼 드셨냐고 물었습니다.”

 “희강이 그립다고 했잖아···.”

 설란이 미소 지었다. 젖은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윤협은 억세게 입술을 물었다. 그녀의 소매 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약을 확인했다.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던 설란이 윤협의 손을 움켜잡았다.

 “미안해. 윤협아.”

 윤협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설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여덟 살 난 아들을 두고 도망치던 밤을 떠올렸다. 윤협은 그날 아침 설란의 입에 단 과자를 넣어주었다. 그러며 제 손으로 엮었다며 풀꽃으로 만든 화관도 선물했다. 설란은 익숙하게 아이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윤협은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의 옆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태자 시강원에서 공부를 잘하면 아버지가 어머니의 옆에서 살게 해줄까요? 하고 물었다. 희강은 언제나 윤협을 설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었으므로 그들은 서로를 만나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도 윤협은 사랑했다.

 아이는 자주 보고 자주 안기는 사람을 따른다는데 며칠 품어본 일이 없는 아들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아주 그리워한다고 했다. 설란은 매일 울었다. 매일 울며 희강을 저주했다. 그 끔찍한 사내를 떠나고 싶어서 달음박질한 밤이 그날이었다.

 윤협은 아들이니 두고 떠나려 했다. 단순히 아들이 아니라 태자라서. 태자를 훔쳐 달아나면 조정이 시끄러워질 테니. 윤협을 포기하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설란은 그럼에도 그에게서 뒤돌았다. 그리고···.

 “너를 버리고 가서 미안해···.”

 윤협은 그 밤 이후로 그녀를 찾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립고, 그리워서 매일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지 않았다. 숙영을 모후라고 불렀고 그녀를 화비 마마라고 불렀다. 설란은 죽고 싶었다. 아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많이 아팠지? 어미가 너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용서하지 않았던 것 알아.”

 설란이 울었다. 열감으로 흐려진 시야는 모든 게 뭉툭하며 흐릿했다. 문득 아들의 손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닦아주는 손이 조막만 하던 시절과 달리 크고 두툼했다. 설란은 제 눈물을 닦아주던 아들의 작은 손을 떠올렸다.

 ‘어머니. 소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화예 누이랑 화각 누이랑 어머니가 함께 살 수 있도록 할게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어미의 눈물을 닦던 손이었다. 그 밤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닦아준 적 없는 아들이었다. 설란은 젖은 눈가를 휘어 보였다.

 “윤협아.”

 “아들에게 용서를 빌지 마십시오.”

 들썩임을 억지로 삼킨 윤협이 나지막하게 입술을 떨어트렸다. 설란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윤협은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이 무서웠다. 그러나 차마 눈을 감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기 때문에···. 그 사랑이 끔찍하면서도 그 사랑을 베어내라 하지 못했다. 결국은 제 꼴도 같아서. 제가 아버지를 그토록 닮았기 때문에.

 “···아비를 닮지 말렴. 그 애를 네 아버지처럼 사랑하지 마.”

 설란이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고르지 못한 호흡이 한 뼘씩 흘러나왔다. 윤협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자신이 그녀를 그렇게 엉망으로 망가트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어미처럼. 은환을 외롭고 아프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눈물을 닦으며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자란 것이 매양 그같이 참혹한 것들이라 그런 사내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윤협은 죽을 듯 낯을 일그러트렸다. 가쁘게 호흡하던 설란이 마지막으로 눈을 잠시 떴다. 흐리던 눈앞이 반듯해지며 그녀를 삼키던 열이 일순 흩어졌다. 희끗거리던 상이 반듯하게 잡혔다.

 “희강···.”

 아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정신이 맑은데 어찌 아들과 남편을 분별하지 못할 수 있을까. 다정하던, 한없이 다정하고 사랑스럽던 시절의 연인. 잠기듯 그에게 빠져들었던 언젠가의 희강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설란아.’

 끌어당겼던 입술이 덧없이 무너졌다. 설란은 일어나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희강의 팔이 그녀를 안았다.

 ***

 자시에서 인시로 넘어갈 무렵. 의숙 황태비 화씨가 훙서했다. 황제는 생모의 훙서에 마른 눈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내리 터진 변들에 황궁이 뒤숭숭했다. 태비가 훙서했다는 말에 왕부와 공주부에서 각각 달려온 그녀의 아들과 딸들이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황제는 열이 넘는 형제자매들의 울음을 가라앉힌 뒤 태비의 장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황의 총비로 열이 넘는 소생들을 가진 여자였다. 당금의 황제를 출산한 생모이기도 했다. 훙서를 대하는 태도며 장례를 준비하는 예까지 달라야 할 터였다.

 조정의 백관들은 연달아 터진 변에도 불구하고 제 할 일을 다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황제는 생모의 장례를 태후의 예로 치른다고 선언했다. 변이 수습되고 나면 태후로 추존되리라. 본래도 황제의 생모로서, 성모 황태후로서의 위를 누릴 수 있는 여자였다. 당금의 황제가 생모를 지극히 여기며 효를 다하는 아들이니 응당 살아서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도 태비는 살아생전 태후의 위에 오르길 원하지 않았다.

 무슨 마음에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태후의 폐위가 확실시된 시점이다. 선황을 죽인 주범이자 승상과의 간통으로 그 여식의 존재까지 드러난 상황이었다. 정해년 변에 가담한 자의 증언과 태후가 황후이던 시절 친정의 별장으로 요양 갔을 때 그녀의 몸종으로 따라갔던 궁녀의 증언으로 전황이 드러났다. 적어도 유경효는 능지처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죽어있었다. 태후 여씨와 함께.

 “저런 쳐 죽일···!”

 여씨와 유경효가 나란히 옥에 누워 죽어있었단 말에 누군가 가래 끓는 목으로 욕을 뇌까렸다. 그들의 전황이 드러난 시점에서 그들은 오나라 역사에 전무후무할 대역 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차분했다.

 평시와 다름없이 냉랭했고 감정이 격앙되어 호통치는 법도 없었다. 나름 애틋했던 생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황제는 전장에서 부황의 붕어를 듣고 달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형을 앞두고 자진한 이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기 전이었다. 간밤 누군가 비상을 건네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황제는 죽은 태비의 장례가 한창인 만큼 사건을 그리 꼼꼼히 조사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태후 여씨가 가졌던 직첩을 모조리 거둬들인 뒤 폐위서인 했고 장례와 무덤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치죄했다.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을 부린 승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체분시를 해도 모자랄 마당에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유경효의 목만 십 일간 효수하는 것으로 치죄한다 하였다. 승하하신 선황이었다면 죄인들이 자진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며 자진한 죄인의 목을 10일간 효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을 텐데.

 아니. 당금의 황제 또한 충분히 잔혹하며 냉혈한 이였다. 그간의 정적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그의 비위에 거슬린 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두 알았다. 그는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눙쳐 뭉그러트릴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형과 치죄가 약하다는 중신들의 간언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상의 양자를 살렸으며 구족을 묶어 벌하지 않았다.

 정해년 사변과 당금의 변에 양자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자 그는 유정헌을 유배 보냈을 뿐이었다. 그의 딸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가란은 항주 도독의 노비가 되었다. 대혼례가 지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례 자체가 무효화되었다.

 태후가 사통으로 낳은 여식이었기에 단 하루 황후가 된 일조차 인정되지 않았다. 그 아비와 함께 즉시 참해져도 모자란 데 황제는 후하게도 그녀를 살려두었다. 그녀는 노비가 되어 항주로 보내졌다. 재산이 몰수되고 연좌의 죄로 친족들이 몰락하긴 했으나 피바람이 덮치리라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연친왕과 강친왕 또한 사지가 찢겼던 어미와 달리 모든 직첩을 뺏기고 사약을 받았다. 이들도 본래라면 능지형에 처해졌어야 할 이들이었다. 자식들은 참형에 처해지고 여식들과 처첩은 노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황제는 죽이지 않고 살렸다. 참형에 처해야 할 이들을 곱게 세상에서 도려냈다. 마치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그리하여 화양은 오라비에게 물었다.

 “어머니에게 무슨 말씀을 들으신 거예요?”

 오라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

 “은환은 어디 있습니까?”

 자리에 앉으란 말도 없었다. 서치윤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은환이 사라진 지 나흘째였다. 태비의 장례 중이었고 여식은 응당 며느리로서 시모의 장례에 참석해야 했다. 안 그래도 황궁으로 가려는 아이를 간신히 떼어놓고 왔다.

 그 사달이 터졌는데 지아비가 그립지 않다면 이상한 것이리라. 더군다나 그의 아이는 눈앞의 이 청년을 연모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동시에 증오하기도 하지. 그리워한다 하여 그 마음이 모두 사랑인 것은 아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모두 사랑이라 하면 화설란의 마음은 형용할 수 없으니. 화설란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굳이 여식의 지아비에게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기실 그는 화설란의 친부였던 하남 도독 하성춘과 친척으로 어린 시절 하남에서 유학을 하며 그의 장남인 하용문과 함께 하성춘의 슬하에서 함께 수학하며 수년을 보냈다.

 화설란은 친부인 하성춘이 기첩을 통해 낳은 여식으로 그 생모의 행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조악하여 친부의 눈 밖에 난 가여운 이였다. 그리하여 서치윤은 그녀가 가엾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도 그토록 불행하고 가엾더니 시집이랍시고 간 곳에서는 지아비 때문에 더욱 고생하며 살았다.

 한데 이젠 제 여식까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사람 같지 않던 사내의 아들을 지아비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니. 끔찍했다. 선황은 여러모로 ‘사람 같지 않던’ 사내였다. 감정이 없는 무기물 같았고 사고의 궤가 다른 짐승 같았다. 모든 면에서 월등했고 정도를 이탈하는 일 없이 반듯하여 문무 모두 고루 특출했으나 그는 여느 사람과 달랐다. 하여 설란이 그토록 가여운 인생을 살았다. 한데 이젠 은환이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서치윤은 설란의 어린 아들을 가여워했지만 사희의 하나뿐인 딸인 은환을 앗아가려 하는 주희강의 아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스승님.”

 황제가 그를 나직이 불렀다. 여덟 살 동궁이던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아기를 닦은 영견을 내어달라 졸랐던 때가 떠오른다. 서치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환아는 짐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가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폐하께선 젊으시지 않습니까. 제 여식이 아닌 여인에게서 후사를 넉넉히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태사.”

 황제의 낯이 굳었다. 그대로 얽혀 굳은 것처럼 풀리지 않는 낯이 사나웠다.

 “진심입니다.”

 “은환을 귀히 여길 것입니다.”

 “귀히 여기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폐하.”

 은환은 자유를 원했다. 가능하면 자유롭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 애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하나밖에 없는 여식이었다. 그의 생에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 애였다.

 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여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애가 태어나기 전까진 제게 부성애가 이리 극심한지 몰랐다. 넘치도록 그 애를 사랑했고 귀여워하고 싶었다. 사희를 사랑해서 그랬다. 사희가 낳은 아이라서. 그런데 눈앞에서 그 애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울지 않는 날이 없다고 했다. 서남에서도 그리 창백한 얼굴이었다. 귀히 여겼더라면.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었다면 회임까지 한 그 애가 그런 얼굴로 앉아 있었을까.

 “은환이에겐 짐이 필요합니다.”

 서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구멍에 가시가 돋은 듯 목이 콱 막혔다. 입 안이 말랐다. 그는 흉흉할 정도로 날카로운 사내를 바라보았다.

 “소신이 소신의 여식과 함께할 것입니다.”

 “짐이 짐의 권위를 이용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지어미의 생부에게까지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하는 것이 바닥을 보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기에 그리하지 않고 싶습니다. 하나···.”

 뇌까리듯 빠르게 읊조리던 황제가 입술을 다물었다. 서치윤은 노여움을 삼키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시겠지만 사람 같지 않던 사내의 씨를 받아 짐은 본디 얄팍하고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파렴치한입니다.”

 음절 하나하나 씹어 내뱉는 말이 험악했다. 서치윤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짐의 아내는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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