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2 장(5권) (13/26)

제 12 장

윤승효의 선심으로 인해 문평의 몫이 된 선실은, 선실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화려했다. 공간은 작은 편이었지만 엄연한 방이었고, 가구들도 고르고 골라낸 것이 틀림없는 고급품들이라 은은한 아취가 있었다. 두 사람이 누워도 좋을 넉넉한 침상은 비단 금침으로 치장되어 있고, 양 기둥에 달린 휘장까지 화려한 색상의 비단이라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풀나풀, 고운 빛깔이 오색 안개인 양 어른거린다.

그러나 평생에 없던 호사라고 해도 얼어붙은 마음까지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의 눈에는 객실의 사치스러운 장식도, 난생처음 보는 동정호의 아름다운 풍경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석상처럼 굳은 자세 그대로 탁자 앞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피로로 인해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는 그런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먹먹하게 내려앉은 기분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머리 한쪽이 쑤시는 것처럼 욱신거린다. 문평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뻑뻑하게 말라 버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한 사람의 잔영이 떠올랐다. 눈앞에 실제로 있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얼굴은,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다.

진짜 윤승효보다 더 진짜 같은, 온화하기 짝이 없는 그의 미소는 이런 상황에서도 문평의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떠올렸던 아름다운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저지른 일이 뒤이어 떠오르자, 뱃속이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자기의 상상에 자기가 화가 난 문평은 고개를 저으며 그 환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환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지워지기는커녕 자체적인 생명력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끈질기게 되살아나 문평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문평은 마음속에서 그의 모습을 밀어내는 것은 포기한 채, 자포자기의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어젯밤, 이 질문을 ‘진짜’에게도 던져봤지만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가 자기 자신이 진짜라는 사실은 당당하게 밝혔으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말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딴에 핑계는 좋았다. 그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자기가 아닌 것 같다고,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 그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는 짓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문평이 뭐라고 하겠는가?

말하는 태도로 보아하니 그의 분신인 척했던 사내와 문평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대강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직접적인 언급은 안 했지만 그가 암시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더 이상 묻지 말라고 일부러 던지는 단서였지만, 문평 역시 그 의도를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단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던 정사가 외부인에게 알려졌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심지어 비밀을 알고 있는 대상이 자신이 사랑했다고 착각하고 있던 그 사람 본인이라는 점은, 문평에게 이중의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자신과 함께하지도 않았던 상대가 그 일을 아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짜’가 ‘진짜’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 것이다. 한데 문평은 자기가 알고 있던 남자가 가짜라는 사실조차도 몰랐으니 이는 명백하게 농락당한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했던 행동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내게 했던 그 고백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홀로 남은 문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많은 질문 하나하나가 모두 화인火印이 되어 그의 가슴을 태웠다. 그러나 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본명조차 알려 주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인 양 흉내를 내던 상황에서도, 그 사람은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거절한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일을 키웠던 것이다.

덕분에 문평은 자신이 ‘윤승효’라고 믿고 있던 사람과 연인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와 잠자리까지 같이 했다. 그의 마음에 진심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차마 못 했을 행동이었다.

‘설마 끝까지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 주려고 했을까?’

애써 희망적인 쪽으로 생각을 돌려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 그저 신분을 위장하기만 했었다면 이해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바위하듯 중간중간 사람마저 바뀌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넓은 아량으로 감싸 보려고 해도 헤아려 주기 힘들었다.

벌컥!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이제는 두통이 머리 전체로 확산되었다. 누군가가 두개골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한바탕 휘저은 것만 같았다. 고통을 참기 위해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문평은 기척도 없이 왈칵 열리는 문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에서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줄곧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 불청객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불청객은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문평은 얼굴의 주인이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여기에도 없습니까?”

허락도 없이 함부로 남의 방문을 연 남자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주어도 없는 그의 질문을 문평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묘랑 말입니다. 자묘랑. 우리 고양이 아가씨요. 그 애가 이 방에도 없는 겁니까?”

이제 갓 묘시卯時1)가 된 무렵이다. 남녀 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방문하기에는 결례가 될 정도로 이른 시각인데, 어째서 이런 아침부터 그 아가씨가 자신과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여기에는 없습니다. 다른 곳을 찾아보시지요.”

문평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윤승효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선실 안을 확인한 후에야 그의 대답을 받아들였다. 딱히 문평의 말을 못 믿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반쯤 넋이 나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역시 이 방에도 없군요. 여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좁은 배 안에서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그 애라면 절대로 가지 않을 맨 아래 짐칸까지 모두 뒤져 봤습니다.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봤는데 어떤 곳에도 없어요.”

그는 준수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평은 그의 정신없는 중얼거림을 듣고, 남자의 마음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면 바깥에 있는 거겠지요. 하선을 했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사람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질 리 없는 이상 그는 당연한 귀결이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염두에 둔다면 더 그렇다. 하지만 윤승효는 그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 해 봤는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윤승효는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갑판으로 뛰쳐나갔다. 몹시 서두르는 태도를 보니 그가 얼마나 초조한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문평은 처음엔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남의 일에까지 신경을 쓰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미우나 고우나 자묘랑은 그와 일행이다. 같이 길을 가던 어린 아가씨가 돌연 행방이 묘연하다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나친 오지랖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자신의 성격에 짜증스럽게 한숨을 쉰 문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승효를 따라갔다.

갑판으로 나가니 윤승효가 지나가던 수부水夫를 붙들고 자묘랑의 행적을 탐문하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윤승효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던 수부가 동료를 불렀다. 어젯밤에 갑판에서 불침번을 섰다는 그 수부는 윤승효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용건을 알아맞혔다.

“아, 그 앙칼지고 무서운 아가씨 말이지요? 네. 제가 압니다. 어젯밤 자시 무렵이던가요? 웬 아가씨 하나가 갑판으로 나오더니만 잠을 자던 수부들을 두드려 깨우며 당장 소선을 내리라고 했었습죠. 그런 일은 저희들이 멋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 일단 선장님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사정에 사정을 하다시피 말씀을 드렸는데도 도무지 막무가내였습니다요.”

그녀에게 당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또 다른 수부가 이야기를 듣더니 덩달아 끼어들며 혀를 내둘렀다.

“그 아가씨 일이라면 저도 곁에서 봤습니다요. 절대로 안 된다는 수부들의 팔다리를 꺾으며 위협하시더니만, 끝내 소선 한 척을 강탈해 타고 가셨습죠. 겉으로 보기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따로 없더니만 하는 짓은 완전히 악귀나찰이던뎁쇼.”

거기까지만 들어도 그녀가 자묘랑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상에 그녀 외에 그런 여자가 또 있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윤승효 역시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인상착의 따윈 건너뛰고 행선지부터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가?”

“글쎄요. 그런 일을 저희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수부 한 사람이 끌려가 노를 젓긴 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요.”

끌려간 사람이 살아 있기나 할지 걱정된다는 투로 수부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뒤늦게나마 제정신이 든 윤승효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자를 꺼내 들었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처음에는 빼는 듯 몸을 물리던 수부는, 다친 사람들에게 약값으로 나눠주라며 50냥이나 되는 은자를 더 쥐여 주자 날아갈 듯 기뻐하며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대화에 끼어들었던 다른 수부들도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역시 하선을 한 모양이로군요.”

수부들을 보내고 난 후, 윤승효는 착잡한 표정으로 호수의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문평이 넌지시 건넨 말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안색이 그의 편치 않은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 아가씨가 찾던 사람은 당신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밤에 느꼈던 희미한 예감은 이제 확신으로 변했다. 묘랑이 줄곧 찾았던 ‘윤승효’는 이 사람이 분명했다.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그녀에게 무관심했던 ‘그’와는 반대로, 이 사람은 오로지 자묘랑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어젯밤 그 모진 소리는 대체 왜 했던 것일까?’

문평은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을 보면 마음이 변한 것 같지도 않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그녀를 박대했습니까? 당신의 분신은 물론이고 당신마저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노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그에게 하고 있는 모양새가, 변심한 연인을 추궁하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다 보니 그런 착각이 들 만도 했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그 아이를 박대한다고요?”

“아니었습니까? 곁에 남아 있는 것조차 하지 못하도록 매섭게 그녀를 잘라낸 것은 당신입니다. 그렇듯 잔인하게 굴어 놓고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윤승효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의 과거에 얽힌 숱한 사연은 한두 마디의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그 사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더욱 없었다.

“……쫓아가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사정에 대한 설명 대신 엉뚱한 결심이 불쑥 튀어나오자 놀란 것은 문평이다. 상상치도 못했던 윤승효의 대답에 문평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되묻고 말았다.

“뭐라고요?”

“묘랑의 뒤를 쫓겠다고 했습니다. 환희루는 자신들의 루인을 보호하는 데 철저한 집단입니다. 그들이 작정하고 루인을 숨긴다면 하오문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아이가 이대로 오해를 간직한 채 문루를 넘는다면, 전 아마도 두 번 다시 묘랑을 볼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리 놔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은 일대로 쳐 놓은 주제에 이제 와 후회로 땅을 치는 남자가 초조한 어조로 말했다. 가짜 행세를 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본인이 돌아온 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이 남자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런 사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자묘랑에 대한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찬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인 양 번갈아 가며 비밀스럽게 행사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치정 다툼 때문에 모든 걸 내팽개치겠다니. 내가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는 들은 건가?’

윤승효의 말을 듣고 있던 문평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이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사람과 얼굴은 같은데 하는 행동이 전혀 달랐다. 이래서야 가짜 쪽이 진짜보다 더 그럴싸하다. 적어도 그 사람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정신이 팔려 대의를 잊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옥은 어떻게 합니까? 암중의 세력들이 그 아이를 노리고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한까지는 아직도 칠백 리나 더 남았습니다. 저 혼자의 힘으론 그 아이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문평은 윤승효에게 기대가 높았다. 자신이 기만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노를 품고 있어도 그가 협객俠客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그는, 윤승효가 모든 걸 뒤로 하고 자묘랑을 쫓아가겠다고 하자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묘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파인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기껏해야 떠돌이 낭인 정도로만 규정을 하고 있는 그조차도 자옥의 신세에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판국이다. 더군다나 자옥은 생강시라는 천인공노할 마물을 만드는 집단에 대해 증언할 유일한 증인이고, 그들로부터 목숨까지 위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 아이를 두고 홀로 떠나겠다니 이자가 제정신인 건가?

생각지도 못한 그의 모습이 깊은 실망감을 불러일으켰다. 문평은 노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윤승효를 노려보았다.

“주변에 제가 숨겨 놓은 호위가 있습니다. 저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당분간은 그 사람에게 안전을 부탁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윤승효가 분노한 문평의 기색을 읽어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승효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일각이 여삼추다. 일일이 비위 맞춰 가며 양해받을 만한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자묘랑은 멀어지고 있을 터다. 겹겹이 쌓인 오해와 서러움을 가슴에 품은 채로 말이다.

그 집안 핏줄이 독하긴 오죽이나 독한가. 제때 그 아이를 잡지 못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을 알고 있는 승효는 문평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노라 여겼다.

“윤 공자!”

“제게는 일생이 걸린 일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잃을 생각은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석 형.”

사과라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인 통고에 더 가까운 말을 던진 그는 짧은 전음을 보냈다. 어디로 보내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이는 것을 보아하니 전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화가 잔뜩 난 문평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초절정의 고수와 초절정에 가까운 고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호위라고 해도 윤승효 본인이 남아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텐데, 무책임하게도 임무를 떠넘기려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양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윤 공자. 세상에 이러는 법이……윤 공자!!”

문평의 분노는 윤승효를 잡지 못했다. 문평이 뭐라고 소리를 치든 신경 쓰지 않고 윤승효는 배의 난간을 뛰어넘었다. 동정호의 아침 풍광을 즐기러 갑판에 나왔던 유람객들이 마치 물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윤승효는 물에 빠지기 위해 난간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나무토막을 발밑으로 던지더니, 그 위에 몸을 싣고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물 위를 걷듯이 움직이는 등평도수登萍渡水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한 경지의 경공이다. 고작 나뭇조각 하나에 발을 의지해 강을 건너다니. 입신에 이르는 신법 공부 외에도 웅혼한 내력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방법인데, 윤승효는 마치 술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그 일을 자연스럽게 해냈다.

“우와.”

그런 신기한 광경을 처음 본 사람들이 감탄의 비명을 질렀다.

“저건 뭐야, 신선?”

“아냐. 강호의 고수겠지.”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왔었던 일을 눈앞에서 보게 된 사람들은 흥분에 들떠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그렇듯 들뜬 분위기 속에서 화가 난 사람은 문평 하나뿐이었다. 문평은 빠르게 멀어지는 윤승효의 뒷모습을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두 제멋대로다. 영문도 모르게 사라진 놈은 그렇다 치고, 고작해야 사랑 다툼 때문에 대의를 내팽개치는 놈은 또 뭐란 말인가? 이러니 정파 놈들이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는 거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강하게 발을 한 번 구른 문평은 이를 갈면서도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윤승효처럼 멋지게 물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공을 익힌 적도 없으니, 포기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받아 왔던 천마天魔 혁련상赫鍊常은 강호상에 전지전능에 가까운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가 중원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도 한 세대가 지났다. 현재는 멀고 먼 신강 땅 한구석에서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했다. 아니, 잊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휘황한 말과 상상을 보태 그를 거의 반인반신에 이르는 괴물로 재창조해 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천마는 멋모르는 민초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재미 삼아 사람들을 고문하지 않았고, 갓난아기의 고기를 별미로 즐기지도 않았다. 오로지 처녀만을 잡아다가 겁탈한 후 목을 베어 죽이는, 저 멀리 대식국大食國의 미친 왕 같은 괴벽도 없다. 그에게는 천리안도 없고 천리통도 없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구름을 타고 다니는 재주가 있다면, 그도 정말 배우고 싶다.

그런고로 천마는 달려야만 했다. 소문처럼 축지법 따위 알지를 못하니 그저 죽어라 달리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이긴 했으나 천마는 불만이 많았다.

이렇게 쓰일 줄 알았으면 좀 더 효율적인 신법을 연구해 보는 건데. 문평은커녕 만자외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면서도 천마는 투덜거렸다.

그가 향하고 있는 대별산大別山은 말이 산이지, 실지로는 거대한 산맥의 일부다. 안휘와 호북, 하남을 가르는 주요한 경계가 될 정도로 거대한 산맥이 바로 대별산맥大別山脈인데,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당채天堂寨와 그 주변을 아울러 대별산이라고 따로 부르는 것이다.

험한 산세는 아니었지만 품이 깊은 데다, 복잡하게 얽힌 지맥 때문에 골짜기가 많았다. 한 사람의 힘으로 그 넓은 산속에 숨어든 사람들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천마라고 할지라도 그랬다.

잠을 자기는커녕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그는 몸을 날렸다. 오로지 달리는 데에만 집중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은 온통 뒤숭숭했다. 자신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던 운정의 가련한 모습이 떠오르는가 하면, 단 한 번 보았던 우경의 새카만 눈동자가 독기 어린 제 어미의 눈빛과 함께 스치기도 했다. 회한 어린 회상은 세상의 이목에서 몸을 숨기듯 백회곡 한구석에 쓸쓸하게 자리 잡은 동생의 묘와 파랗게 머리를 깎은 묘원의 서글픈 뒤태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이어졌다.

한 번 마음 먹은 일이라면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그이건만, 혈육에 대한 일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여타의 순탄함에 대한 반작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혈육들은 그 때문에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부모는 자신 때문에 참살당했고, 하나 있던 동생은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 어미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거두지 않았던 자식은 눈앞에서 죽었고, 이제는 조카마저 그 때문에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자신의 존재 하나가 혈족 전체를 죽음으로 이끈 것이나 다름없다. 정을 느끼지도 못하는 조카의 안위에 이토록이나 집착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로 인한 부채감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 때문에 혈육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놈도 아니고 곽효의 손에서라면 더욱 그랬다.

수백 리 길을 달리는 일조차도 하루면 족했다. 채 이틀이 되지 않아 천마는 대별산에 도착했다.

두 번의 환골탈태가 효험이 있었는지 그러고도 단전엔 마르지 않은 내력이 맴돌았다. 한데도 매사에 경계심이 강한 천마는 가볍게 소주천을 해서 몸의 기력을 다시 북돋웠다.

어두운 산 그림자가 천마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이른 봄. 신강에선 아직도 눈발이 날릴 즈음이지만 중원에선 벌써 새싹이 움트고 있다. 어디선가 향긋한 봄꽃 내음이 풍겼다.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는 대별산은 그 속에서 생사를 가름하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나 천마는 냉정한 눈빛으로 대별산의 풍경을 살폈다. 어지럽기 그지없는 상념 속에서도 그의 예리한 두뇌는 빛을 발했다.

‘초절정 고수인 우경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적이라면 만만한 상대가 아닐 것이다. 부상당한 일행을 데리고서 그런 적을 뚫을 수는 없었을 테고, 불리한 세력으로 적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방패로 삼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니 그들은 지금 가능한 한 험준한 곳으로 향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다른 장소였다면 자승자박을 불러올 수도 있는 수였으나 무한과 지척 간에 있는 대별산에서는 경우가 달랐다. 정도맹의 본거지가 있는 호북은 정파의 안마당이다. 습격당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또 모르지만, 첫 습격에서 흔적을 남긴 이상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적들이다.

옥기린 일행에겐 원군이 오고 있지만, 별동대에 불과할 적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면 외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 옥기린 일행 중에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놈이 있다면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일단 거기까지 추론하고 나자, 그들이 있을 만한 방향을 산출해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별산이라면 그에게도 낯선 장소는 아니다. 그는 이곳의 세세한 지형과 지맥들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수십 년 전이긴 하지만 중원을 침공했을 때 머릿속에 넣어 두었던 전략상의 요충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곧 장소가 몇 군데로 추려졌다. 천마는 가장 가능성이 큰 곳부터 차근차근 확인해 갔다. 수고로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몸은 하나요 장소는 여럿인데.

처음 두 군데의 장소는 잘못 짚은 거였다. 첫 번째는 완전히 빗나갔고, 두 번째는 제대로 짚긴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두 번째 장소에 남은 흔적을 따라 뒤를 쫓은 천마는 다행히도 머지않아 희미하게 칼이 엮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챙, 챙, 챙!

무인이라면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밖에 없는 살기 어린 검음劍音. 천마는 자신이 늦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속도를 높였다.

“흐윽! 이런 비겁한…….”

천신만고 끝에 조카의 일행을 찾아낸 천마였지만, 그는 다짜고짜 현장으로 뛰어드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용의주도한 그는 가장 가까운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파악하려 했다. 그가 몸을 숨긴 나무는 위치가 좋았다. 덕분에 대치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원하던 장소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뒤를 잡힌 듯 옥기린과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평범한 산비탈 중 한 군데였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과 발걸음을 방해하는 바위들이 있어 정묘한 신법을 구사하기도 어렵고, 검법을 전개하기에도 용의하지 않은 최악의 지형.

그가 도착하기 전에 시작된 싸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사방에서 처참한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너희들이 원하는 바가 뭐냐?! 대체 뭘 원하기에 이리도 집요하게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냐!!”

피로 얼룩진 푸른색 옷을 입고, 허리에 붉은 띠를 두른 청년들 중 하나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쉽지 않은 격전을 헤쳐 온 듯 몇 군데나 상처를 입은 그는 거의 떨어져 나갈 지경의 왼팔을 지혈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그의 적은 냉담했다. 피가 끓듯이 절절한 의문에 답할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듯, 묵묵히 입을 다물고 그를 공격하는 데 열중할 뿐이다.

“이런, 송 형제. 위험하오!!”

완벽하게 무시당한 청년이 순전히 오기로 달려들었다. 천마는 그 모습을 보며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청혈단淸血團이라고 하면 십수 년간 왜구와 맞서며 백전노장으로 거듭난 유명한 정예 부대다. 그러나 청년은 그런 청혈단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대처가 미숙했다.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는 어린 얼굴로 보아하니 청혈단의 신분이긴 해도 오래된 단원은 아닌 듯하다.

‘새로 받아들인 신입 단원이라도 되는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가 보인 감정의 흔들림은 그대로 틈이 되었다. 동료로 보이는 자가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경호성을 날렸지만, 친구보다 적이 더 빨랐다.

적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러 청년의 목을 베어갔다. 악을 쓰고 있어도 내력이 바닥을 기는 상태인 데다, 체력까지 떨어진 청년은 몸을 피하지도 못했다. 깨끗하게 잘려 나간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는 죽어서도 억울한 듯 붉게 부릅뜬 눈을 감지 못했다.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 때문에 적에게 맞서던 일곱 명은 여섯 명이 되고 말았다. 그보다 더 곤란한 일은 그 때문에 간신히 돌아가고 있던 칠성검진七星劍陳의 한 축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형세가 좋지 않았던 청혈단은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개중 가장 고수로 보이는 북두좌北斗座가 빈자리를 메워 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너덜너덜하던 일행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진의 중앙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청혈단의 저항이 아니었다면 한 축이 무너진 진이 이토록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검진의 중앙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검을 들었다. 내력조차 모자란 듯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들린 검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그의 힘겨운 참견은 상황의 국면을 또 한 번 바꿔 놓았다.

절룩거리는 발로 무당파의 가장 간단한 보법인 유운보법流雲步法을 밟으며, 고작해야 삼재검법三才劍法을 시전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간섭은 너무나도 유효적절하게 그의 일행들을 도왔다. 악랄하게 목숨을 노리는 적의 검초조차도 힘없는 그의 검세에 흐트러지고, 청혈단원들은 그가 견제해 준 덕분에 반격을 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혈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한 그의 도움을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뒤로 물러서십시오.’ ‘위험합니다. 단주!’를 연발하며 그를 전장에서 떼어 놓기 위해 애썼다.

단주라고 불린 남자의 산발이 된 머리는 개방 후개가 형님으로 모실 모양새였다. 피 칠갑을 한 입성은 꿈에 나올까 봐 무섭고, 사지조차 멀쩡하지 않은 듯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있다. 하지만 그런 흉험한 몰골을 하고서도 남자는 아름다웠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옥으로 깎은 듯 수려하다. 흑단 같은 검미劍眉 아래에서 봉안鳳眼이라고 불러도 지장이 없을 눈동자가 강렬히 빛난다.

천마는 안력을 돋워 그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지나치게 익숙한 얼굴이다. 이런 장소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쯧. 하필이면.’

사내의 이목구비에서 낯익은 사람의 얼굴을 찾아낸 천마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가능하다면 운정 쪽을 닮기를 원했었는데, 그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조카는 죽은 동생을 거의 닮지 않았다. 하물며 놈은 제 어미조차도 닮지 않았다.

얄궂은 일이지만 저 녀석은 제 부모보다 어째 천마 자신을 더 닮은 듯했다. 닮아도 보통 닮은 게 아니라 아예 빼다 박았다.

덕분에 천마는 수십 년을 망설였던 해후를 맞이하면서도 슬픔이나 회한보다는 뜨악함을 먼저 느껴야만 했다. 어떠한 자연의 섭리로 저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반갑지 않았다.

자신을 닮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 어미를 닮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천마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까지 했다. 만약 그랬다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동생의 자식이라는 실감만큼은 확실히 났을 것이다. 제갈희련 그 계집이 동생의 여인이었다는 것은 그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온몸으로 자신의 혈육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남자였지만, 그 지나친 주장이 되레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부채감을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에서 자극하고 있는 조카의 외모가 천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기분이 어쨌든지 간에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조카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은가.

천마는 손을 들어 그가 몸을 숨긴 나무의 이파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른 봄에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 무성한 잎을 가진 것은 소나무뿐이다. 그의 손아귀에 세침처럼 가느다란 솔잎이 잡혔다.

천마는 우선 북두좌를 향해 달려드는 사내의 손목을 노렸다. 강기를 두른 솔잎이 암기가 되어 쏘아져 나갔다. 솔잎 암기는 정확히 열결혈烈缺穴에 맞았다.

영문도 모르게 손목으로 가는 기를 차단당한 복면인이 흠칫 손을 멈췄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생사투에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목을 내놓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나, 어쩔 도리가 없다. 혈이 막혀 기가 통하지 않으니 아예 공격 자체가 무위가 된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북두좌의 사내가 검을 내질렀다. 강호상에 검을 쓰는 사람은 많아도 쌍검을 쓰는 사람은 드문 법인데, 저자는 양손에 각기 다른 두 개의 검을 들고 있었다. 그로 보아 북두좌는 양의검兩意劍 조세화曺勢禾인 듯했다. 그의 이름은 천마도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양의검은 청혈단과 관계를 맺기 전에도 이름이 높았던 고수다. 우경과는 동문 사형제 간으로, 속가임에도 연이 닿아 무당의 절기인 양의심법兩意心法을 사사했다. 그의 특기는 양의심법의 구절을 변형해 만든 양의검법인데, 과연 소문이 빈말은 아니었던지 각기 다른 두 사람이 사용하는 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검법이 특이하게 눈을 사로잡았다.

조세화 정도의 고수가 파탄을 드러낸 상대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손목에 단단하게 박힌 솔잎이 빠지지 않아서 손을 쓰지 못하게 된 복면인은 현란한 보법을 사용해 몸을 피하려 했지만 끝까지 도망치지는 못했다.

우연한 행운을 기회로 삼은 조세화는 한 번 파고든 틈새를 끝까지 파고들었고, 복면인은 그를 이기지 못하고 허리가 양단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죽을 때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비명은커녕 나지막한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혀가 잘린 듯했다.

같은 양상은 다른 사람에게도 반복되었다. 복면인 중 누군가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누군가는 허리가 무너졌다. 일대일로는 상대하기 힘든 고수도 점차 견고해지는 검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전세는 급격히 바뀌었다. 그러나 복면인들은 상황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독하리만큼 처절하게 달려들다가 비명도 없이 목숨을 바쳤다.

종교적 광신까지 느껴지는 그 행동에 질린 것은 청혈단원들이다. 그들은 마침내 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물리쳤음에도 환호성을 지르지 못했다. 있는 대로 질린 표정을 한 채 발밑에 늘어진 시체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지독한…….”

조세화가 내상으로 인해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정체도 모르는 적에게 습격을 당해 동행했던 자들 중 7할의 단원이 희생당했다. 청혈단원들은 어깨로 숨을 쉬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누가 남고 누가 죽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서글픈 분노가 가득했다.

몇 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전우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주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단원들을 둘러보며 부상의 정도를 관찰하던 조세화가 마지막으로 백우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검을 들 힘조차 없어 땅에 꽂은 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백우경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 몸에 무리를 준 듯,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저의 상태는 걱정할 바가 못 됩니다. 아무렴 목숨을 잃은 형제들에 비하겠습니까.”

“그 형제들이 목숨을 바친 이유를 생각해 주십시오, 단주. 그들은 단주의 안위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초개처럼 바쳤습니다.”

조세화는 나무라듯 엄히 말했다. 백우경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형언할 수 없는 괴로운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묵념이라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우경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을 정리한 듯 안색이 많이 차분해졌다.

그는 칼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했다. 몸이 편치 않을 텐데도 허리를 구부린 그 태도에선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 오신 고인이신 줄은 모르겠으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고인의 도움을 받은 후학은 무당파의 백우경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인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남은 내공을 모두 실은 듯,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청혈단원들은 느슨했던 몸을 다시금 긴장시켰다. 처음부터 긴장을 풀지 않고 있던 조세화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백우경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들이 목숨을 구한 이유가 단순한 행운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말이 좋아 고인이다. 적을 이겨 내는 데 도움을 줬으니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기엔 당금 강호의 정세가 지나치게 혼탁했다.

정체도 모르는 무리에게 의형제들을 도륙당한 그들은 경계심 강한 눈빛으로 백우경이 포권한 쪽을 노려보았다. 자신들보다 백우경의 감각이 월등히 나으니, 그를 맹목적으로 믿은 것이다.

하지만 천마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만큼 바보가 아니다. 연이은 공격으로 인해 은신 위치가 간파되었을 게 뻔하기에 복면인들을 처치한 후 재빨리 위치를 옮긴 상태였다.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그들의 행태에 낮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들이 어떻게 이겼는지조차 눈치도 못 챈 놈들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렇게 맹랑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걸까? 적들이 당했던 수법 그대로 자신들 역시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 건가?

“……….”

“고인께서는 이름을 밝히실 마음이 없으십니까?”

“……….”

“어느 분께 도움을 받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 자신뿐만 아니라 저의 형제들의 목숨까지 구해 주셨습니다. 이토록이나 깊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의 존함조차 알지 못한다면 제가 어떻게 낯을 들고 살아가겠습니까?”

자신을 낮추는 척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솜씨가 의외로 제법이다.

‘제 어미의 훈육이 도움이 되긴 한 게로군.’

천마는 영판 맹탕은 아닌 조카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백우경이 그 후로도 몇 번 더 정체를 드러내기를 재촉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고 예를 잃지 않는 태도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낼 마음이 없었던 천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솔잎 몇 개 던져 놓고 생색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목숨을 구해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인정한 것도 아니다. 동생의 핏줄이니 일단 살려는 놔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을 되물어도 그가 대답하지 않자 조세화가 백우경에게 눈짓을 건넸다. 아무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같으니 지나친 추궁은 피하라는 뜻이다. 정말 만에 하나 고인이 순수한 뜻으로 그들을 구해 주려고 했던 거라면, 모습을 숨긴 그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것 역시 큰 실례다.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은거기인들은 대부분 강호의 은원에 얽매이길 원하지 않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서지 않는 것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졸라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제 청이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고인의 청정을 해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한발 물러선 백우경이 힘겹게 말하며 땀을 훔쳤다.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한 탓에 그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근심스레 그를 지켜보던 조세화가 얼른 부축에 나섰다.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뒤로 물러난 백우경은 죽은 단원들과 복면인들을 분리해서 가매장하도록 한 후 이내 자리를 떠났다.

천마는 기척을 숨기고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백우경이 정도맹에서 보낸 원군과 만날 때까지는 뒤를 지켜줄 생각이다. 적이 한 무리뿐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데다, 지금의 일행은 산짐승에게도 대항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다 구해 놓고 뒤통수를 맞을 생각이 없었던 천마는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리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그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은 껐으니 한숨 놓았다. 당장 급한 용건이 사라지고 나니 한가해져 슬그머니 딴생각이 난다. 천마에게 딴생각은 곧 문평을 뜻한다. 현재 그에게 있어 유일한 사생활이기도 한 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뒷간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과연 그랬다. 시간이 없는 와중이라 일단 윤승효를 끌어다 놓고 오긴 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윤승효만 보면 눈에 별을 담는 놈이니, 그놈은 사람이 바뀐 것도 모르고 여전히 반짝반짝하고 있을 것이다. 그 눈빛을 진짜 윤승효가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분한 분신이 대상이어도 못내 짜증스러웠는데, 하물며 외간 사내임에야 내킬 턱이 없다.

‘……되도록 빨리 돌아가야지 안 되겠군.’

급한 김에 두고 온 녀석을 떠올리자 물가에 어린애를 내놓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딱히 윤승효가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을 같이 두기엔 그의 속이 너무 좁았다.

천마는 거북이가 걷는 것처럼 느긋하게 걷고 있는 청혈단 일행을 내려다보며 낮게 혀를 찼다. 성미에 맞지 않는 애 보기가 짜증을 유발했다.

***

바로 그 순간 문평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젓가락을 손에 쥔 채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윤승효가 일행을 떠난 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의 믿지 못할 만행에 분노한 문평은 사명감을 불태우며 자옥의 곁을 지켰지만, 그 후에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법 산다 하는 사람들이 승객으로 탑승한 호화 유람선이라 생활에 불편한 점도 없었고, 유유자적 떠도는 배 위에는 평온한 공기만 맴돌 뿐이었다.

한가로운 유람객들 중에서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은 문평이 유일했다. 문평은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혼자 경계를 북돋아 봤자 괜한 시선만 살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어깨에 힘을 빼고 말았다. 눈에 띄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좋은 풍광을 보고, 맛있는 음식과 음악을 즐긴다. 오로지 그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배 위에서는 그가 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개인 공간이 있긴 했지만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못 되고, 넓은 곳에선 칼을 꺼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노는 것도 해 본 사람이나 한다고 했던가. 한가하게 여가를 즐겨 본 적이 없던 그는 얼마 안 가 지루해지고 말았다.

말벗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련만, 그에게 남은 일행이라고는 반벙어리나 다름없는 조그만 꼬맹이 하나가 전부다.

낯을 가리는 그 아이는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와 하루 종일 마주 앉아 시간만 보내자니 답답해 좀이 쑤실 지경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때워 보고자 이리저리 말을 걸어 보기도 했지만, 경계심이 강한 자옥은 예전보다 더욱 말을 아꼈다. 느닷없이 일행이 절반으로 줄어들자 다시금 겁을 먹은 눈치다.

할 일도 없고 할 말도 없다. 자옥을 따라 꼼짝없이 틀어박히게 된 문평은 그저 머릿속만 분주해졌다.

온갖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는 자신들을 두고 떠난 ‘진짜’를 괘씸하게 여겼고, 영문도 모르게 사라진 ‘가짜’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생각만 하다 보니 그랬던 것인데, 그래도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사건을 정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던 까닭에 감정적인 앙금은 바닥으로 가라앉히고, ‘왜?’라는 질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문평은 이성적인 시선을 가지고서 ‘가짜 윤승효 사건’을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도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이번 일에는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의구심이 드는 것은 윤승효의 행세를 한 두 사람 중 ‘가짜’에 속하는 사람의 진면목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감쪽같이 남의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것일까? 눈앞에서 사람이 바뀌어도 아무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말이다.

문평은 여태까지 그런 엄청난 역용술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남의 얼굴을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홍채의 빛깔조차도 바꾸는 역용술이라니. 그런 무공은 허무맹랑한 일이 판치는 강호기담집에서조차 나온 적이 없다.

그 특징적인 눈의 빛깔 때문에 처음에는 ‘가짜’도 윤승효의 혈육이 아닐까 생각했다. 강호상에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 그가 쌍생아일 가능성도 있는 거고, 그게 아니라도 숨겨 둔 혈육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니 지고하기 짝이 없는 그의 신분 때문에 그 가설은 말이 되지 않았다. 윤승효가 색목色目을 가진 것은 군주郡主인 어머니 쪽의 혈통 때문이다. 그러니 같은 눈빛을 가지기 위해서는 가짜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서평왕부의 핏줄을 이어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황친이란 그렇듯 쉽게 신분을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백성들에게 인망이 높은 서평왕부의 핏줄이면 더욱 그렇다. 지금처럼 친왕親王에 대한 견제가 극심한 상황이라면, 자칫하다간 핏줄을 숨겼다는 이유만으로도 반역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서평왕부가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금의위도독錦衣衛都督 신분인 대장군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혈육 설을 제외하고 나니 관건은 다시금 신기에 가까운 역용술로 되돌아온다. 인정하기 힘들지만 직접 눈으로 보았기에 완전히 부인할 수도 없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문평은 대체 누가 그토록 뛰어난 역용술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의 효능을 가진 역용술은 짧은 시간에도 엄청난 내공을 소모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짜’는 그 모습으로 몇 달이라는 기간을 버텨냈다. 그렇다는 것은 ‘가짜’가 적은 진기를 가지고 엄청난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적 같은 역용술을 가지고 있거나,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단전을 가진 고수라는 뜻이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둘 다였지만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문평은 후자보다는 전자의 가능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후자의 경우라면 천마를 능가하는 고수가 있다는 소린데, 문평은 아직 그런 괴물이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다.

가짜의 정체에 이어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다. 그들은 두 사람이 마치 한사람인 양 은밀하게 행사를 하며 무언가를 했다. 가짜가 일방적으로 진짜의 흉내를 낸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역할을 바꾸어 자신의 행적을 정교하게 감추었다.

입을 열지 않으니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엄청나게 공을 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연히 동행하는 일행은 물론이거니와 진짜 윤승효의 정혼자마저도 속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그들의 은밀한 행사를 보면 남에게 말하지 못할 심각한 사정 때문인 듯 보이다가도, 아무런 미련 없이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떠나 버린 진짜를 생각하면 그저 유희 삼아 그런 짓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진심을 말하자면, 문평은 그들이 가진 이유가 가능한 한 거창한 것이길 바라고 있었다. 미련하고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어쩔 수 없는 솔직한 본심이기도 했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강호의 운명을 좌우하거나, 수백 수천의 목숨이 걸려 있는 중대한 일이길 원했다. 그런 명분이라도 있다면 그들의 행동을 조금 더 쉽게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

핑계가 필요한 것은 어쩌면 상대가 아니라 문평 자신일는지도 몰랐다. 기만당했다는 분노와 배신감에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속은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문평은 자신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가 꽃피운 감정이 진흙더미 속에 파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난생처음 알았다. 타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보일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행복인지를 그는 이제야 겨우 깨닫고 있었다. 이 모든 찬란함은 오로지 그 사람 덕분이었고,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런 감정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랬기에 문평은 그 사람을 믿고 싶었다.

문평은 상대에게도 자신만큼의 진실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씁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문평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상념이 너무 많다. 평생 동안 이렇게나 생각이 많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존재할 리도 없는 생각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마음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무심히 든 시선 끝에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자옥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는 자옥은 문평이 음식에 손을 대지 않자 자기도 손을 대지 못하고 빳빳하게 얼은 자세 그대로 젓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서야 문평은 정신이 돌아왔다. 보아하니 자신 때문에 죄 없는 자옥이까지 밥을 못 먹고 있는 듯했다. 여럿과 함께 있을 때도 주눅이 들어 있던 아이인데, 단둘만 남은 상황이니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 이런 점은 자신 쪽에서 미리 신경을 써줬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니?”

문평은 식은 닭고기를 집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조심스레 문평의 기색을 살폈다.

“그럼 뭐 해? 어서 먹지 않고.”

윽박지르는 기색 없이 슬쩍 권했더니 아이의 어깨에서 다소간의 긴장이 풀린다. 어린아이다운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른 얼굴이 말갛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옥은 잠시 주저하더니,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겨우 요리를 먹었다. 낯을 가리는 아이라고는 하나 자신이 곁을 주었다면 저렇게까지 서먹하게 굴지는 않을 터인데. 어차피 길게 갈 수 없는 인연이라 거리를 두었더니 아이도 같은 방법으로 그를 경계했다.

‘스스럼없이 구는 자묘랑과 있을 때는 그나마 좀 낫더니만.’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문평은 생각했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려야 하는 법인가 보다. 아이를 잘 다루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그렇게 중얼거렸다.

“응?”

아이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안 먹히는 식사를 억지로 하고 있던 문평은 바깥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가롭기 그지없던 선내의 공기가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찼다. 행여나 부유한 손님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발걸음마저 조심스럽던 수부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간간이 고함에 가까운 명령도 들렸다. 전장의 공기에 익숙한 문평은 지금의 소란스러움이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의 분위기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지?’

문평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선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승객들도 급박한 공기의 흐름을 깨달은 듯, 선실 밖의 동정을 살피는 얼굴의 숫자가 차츰 늘어났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란이냐?”

문평이 말을 붙이기도 전에 성미 급한 손님 하나가 먼저 수부를 붙들었다. 호사스러운 비단 화복에 큼지막한 호박 단추를 단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부유한 상인인 것 같았다. 그에게 잡힌 수부는 새까맣게 탄 얼굴로 복도 바깥을 내다보며 근심스럽게 미간을 접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대인. 바깥에 수적들이 나타나서 그에 대응하느라 분주해진 것뿐입니다.”

“뭣이? 수적이 나타났다고?”

부유한 상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와 동행한 어린 여인이 놀라 비명을 삼켰다. 다른 승객들도 수부의 말을 듣고 웅성거렸다. 수부는 자신의 말이 원치 않은 오해를 샀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정십팔채洞庭十八寨의 소속일 겁니다. 더군다나 이 배는 비싼 유람선이라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상례대로 약간의 통행세를 지불하면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을 터이니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산적이건 수적이건, 조직이 안정되고 규모가 커질수록 자금의 압박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큰 조직은 정기적인 수입원이 없으면 유지하기 어렵고, 꾸준한 자금 회전을 위해서는 한탕으로 끝나는 약탈보다는 때마다 걷는 통행세가 더 안정적이다.

통째로 털리는 것보다 통행세가 이로운 것은 지불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제 약탈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면 아무리 풍광이 수려한 장소라도 여행객이 줄어든다. 주 수입원인 유람객이 없으면 당장 곤란해지는 것은 동정호에 배를 띄우는 선주들이다.

이렇듯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니 타협안이 체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녹림과 표국 간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동정호에서도 일종의 묵계가 존재한다.

지금 그들이 긴장하는 것은 여느 때보다 일찍 나타난 수적들에 미처 대비가 되어 있지 못한 탓이지, 만일의 사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적들의 등장이 예상외로 빠른 것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는데, 관선의 순시를 피해 출몰지점이 변경되는 것은 예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다 보니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여긴 탓이다.

그러나 습관에 의한 방심은 뼈를 깎는 후회를 불러왔다. 수부의 착각과는 달리 그들에게 접근한 무리들은 통행세를 받기 위해 다가온 자들이 아니었다. 갑판 위에서 돌연 참혹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무슨 짓이냐!”

일을 당한 후에야 상황을 눈치챈 자들이 뒤늦게 고함쳤지만, 적들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 쓸어버려!”

냉혹한 명령이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더욱 커졌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자들의 고함과 흉험한 검명이 천장을 뒤흔든다. 깜짝 놀란 승객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위로 나가자니 험한 일을 당할까 두렵고, 그렇다고 방에 숨어 있자니 퇴로가 없어서 불안하다.

부유한 상인에게 팔이 잡혀 있던 수부는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 서둘러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갔다. 빠끔히 열려 있던 선실 문들이 분분히 닫힌다.

문평도 선실 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겁에 질려 눈이 휘둥그레진 자옥을 보며 짧게 명령했다.

“내게서 떨어지지 마라.”

문평은 주위를 둘러보고, 당장 필요한 짐만 몇 가지 챙겨 품속에 넣었다. 자옥의 방은 옆방이라 짐을 챙기러 갈 수도 없다.

가까이 다가온 아이를 한 팔로 안고, 한 손에는 도를 들었다. 따로 명령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그의 목을 부둥켜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실하게 달라붙어 오는 작은 몸에서 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파닥파닥 빠르게 뛰는 어린 심장이 새처럼 가냘팠다.

“괜찮아.”

달래듯 그 머리를 쓰다듬어 준 문평이 문을 노려보았다. 비명과 소란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좁은 선실 안을 진득한 피비린내가 가득 채우는 것 같다. 문평은 손끝으로 진기를 돌리며 온몸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파직!

마침내 그의 선실 문도 두 동강이 났다. 발로 문을 부수면서 들어오는 사내들은 하나같이 기형의 무기들을 들고 있다. 수적답게 아미자峨嵋刺를 들고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보기에도 흉흉한 작살이나 독이 묻은 가시가 푸르게 번들거리는 낭아봉狼牙棒을 쥔 놈도 있었다.

“찾았다!!”

문평과 그가 품에 안은 자옥을 발견한 사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환호를 지르는 동시에 달려드는 것을 보니 그들의 목적은 단지 찾아내는 것만이 아닌 것 같다.

문평은 박도를 들어 날카롭게 찔러오는 아미자를 쳐 냈다. 중지에 끼운 고리의 윗부분이 휘청 돌아가며, 박도의 날을 화려하게 피해낸다. 아미자는 단병短兵이긴 해도 기병奇兵이라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인 무기와는 궤를 달리하는 움직임을 가졌기에 그에 익숙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문평은 아미자의 움직임이 낯설지 않았다. 한방을 썼던 최위명이 아미자에 조예가 있어서, 종종 대련을 해 본 경험이 그를 살렸다.

손등 쪽을 향해 있던 아미자가 회전하며 달려들었다. 화살촉 모양으로 깎은 날카로운 병기의 끝이 눈을 곧바로 찔러 온다. 문평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아미자를 피한 후 박도를 사용해 사내의 무릎 아래를 잘라갔다. 사내가 급히 몸을 피하며 목덜미 쪽으로 아미자를 내질렀다. 그러나 아미자보다는 박도가 길었다. 문평의 칼은 사내의 무릎 아래를 베었지만, 아미자는 미처 문평의 목덜미에 닿지 못하고 멈췄다.

사내는 비명을 삼키며 신형을 무너트렸다. 문평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내를 걷어찼다. 내력이 실린 발길질에 아미자의 사내가 내동댕이쳐졌다. 미처 치우지 못한 낭아봉이 사내의 등에 꽂혔다.

“이런 씨팔!”

낭아봉의 사내가 낭패한 소리를 냈지만 극독에 당한 아미자의 사내는 욕설도 내뱉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문평은 얼떨결에 동료에게 해를 입힌 낭아봉에게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일도를 선물했다. 어린아이까지 안고 있는 이상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피 튀기는 난전亂戰이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옥까지 한꺼번에 보호해야 하는 문평은 필사적으로 사내들을 베고 또 베었다.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본능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는 무공은 높지 않았지만, 전투 경험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나 제멋대로 뒤엉켜서 싸우는 난전은 그의 전문이나 마찬가지.

문평은 좁은 선실 벽이나 복도, 열린 문과 닫힌 문, 거기에 서로 뒤엉켜서 싸우는 사람들까지 적절히 이용해가며 몸을 움직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수라장이던 사방이 그의 활약으로 인해 더욱 처절해졌다. 부유한 유람객들이 고용한 호위무사들 중 실력이 좋은 자들도 많았지만 문평처럼 난전에 익숙한 자는 드물었고, 그만큼 필사적일 이유도 없었다.

문평은 자신에게 덤비는 자들의 약점을 공격했고, 위험에 처하면 주위 사람들을 방패로 삼아서라도 피했다. 가벼운 몸을 최대한 이용해 복도를 헤치며 떨어뜨릴 적은 떨어뜨리고 죽일 적은 죽였다. 표홀하기 그지없는 신법이 신묘하게 움직였다.

사람과 사람의 틈새. 검과 검이 마주치는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헤치고 나가는 그의 모습을 감히 따라잡을 자는 없었다.

채 일각一刻이 지나기도 전에 그는 갑판으로 나가는 층계 아래에 서 있었다. 난전에 익숙한 문평은 도망갈 데 없는 선창 아래에 갇혀 있느니 바깥으로 나가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어 있는 층계를 통해 갑판으로 올라섰다.

“이 쥐새끼가!”

그의 모습이 갑판 위에 나타나자, 적반하장격의 소리를 지르며 적이 달려들었다. 그새 수부들을 몰살시킨 듯 갑판 위는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찌걱찌걱 달라붙는 인간의 피와 기름을 밟으며 문평은 날렵하게 적의 공격에 맞섰다. 하나일 때는 그나마 상대할 만했는데, 적이 고전하자 하나가 더 붙었다.

문평은 두 명의 적을 상대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아군이 될 만한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선장의 목까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자들은 이 배에 탄 사람들을 전원 몰살시킬 생각인 듯했다.

‘젠장. 호위라는 놈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손발이 다급해지니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떠오른다. 문평은 윤승효가 ‘있다’고만 했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고 떠나 버린 호위의 존재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아이를 보호하느라 손 하나는 물론이고 몸의 반쪽까지 쓰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적들의 흉흉한 공세에 몸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급급하고 만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그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설마 없는데 있는 척 속인 건 아니겠지?’

문평은 진작 그놈을 찾아볼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를 하며 남몰래 이를 갈았다.

위기 상황을 연달아 넘기자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선창 아래로 내려온 자들보다 외려 위에 남아 있는 자들의 실력이 더 강한 듯했다. 더군다나 이곳에는 이점을 노릴 만한 공간도 없었다.

팔다리에 조금씩 창상創傷이 생겨났다. 옅게 돋아나는 핏기를 느끼면서도 지혈할 틈이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정말 위험하다. 문평은 침을 삼키며 머릿속으로 녹수무영綠水無影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녹수무영은 그가 가진 유일한 절기로 구성九成에 가깝게 익힌 신법이지만, 그중에서도 끝까지 익히지 못한 한 수가 있었다.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전문인 이 신법에서 유일하게 공격용으로 쓰일 만한 초식이다.

그 초식은 많은 내력이 필요한 데다 상례를 벗어나는 움직임 때문에 내상을 입을 여지마저 있어, 완전히 익히기 전에는 오히려 구사하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이제껏 실전에서 사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나, 지금 사용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영영 사용해 보지 못하게 될 게 뻔했다.

문평은 마음을 굳히고 녹수무영의 구명절초인 반천회류反川回流의 수법을 펼쳤다. 한 줌의 진기가 단전에서 솟아나 두 다리로 뻗어 나갔다.

진기가 용천혈湧泉穴을 자극하자 구름이 일듯 자연스럽게 신법이 전개되었다. 앞으로 나가 적을 맞던 발이 일순 옆으로 미끄러졌다. 이형환위까지는 아니라도, 순간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놓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문평은 발끝을 이용해 반 바퀴 정도 몸을 회전시키고 원형으로 궤적을 그리며 순식간에 상대의 등 뒤로 돌아갔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각도로 들어오는 공격에 놀란 적은 몸을 돌리며 본능적으로 팔을 들었다. 방어하듯 몸통을 막아서는 팔뚝은 외공을 단련한 듯 제법 단단해 보였지만 도기까지 세운 칼날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문평의 도가 깨끗하게 상대의 팔뚝을 잘랐다. 뜨거운 피가 얼굴로 튀어 오른다. 그 기세를 그대로 몰아붙여 옆구리를 베었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내장이 비어져 나왔다. 손끝에서 뼈가 끊어지는 끔찍한 절삭음이 들려왔다.

상대의 무너지는 어깨 사이로 또 다른 적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문평의 발끝이 다시금 물 흐르듯 움직였다. 그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바람결 사이를 가볍게 비집고 들어갔다. 다리를 구부리지 않고 상체를 숙이는 기이한 수법으로 칼날을 피하고,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아래에서부터 위로 도를 올려붙인다.

적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문평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허공에서 몸을 돌린 문평이 방향을 바꿔 아래로 내려찍어 버렸던 것이다. 기의 수발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자재라 상대는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 미처 자세를 바로잡지도 못한 채 도초에 노출된 상대는 결국 얼굴이 반으로 갈라져 죽고 말았다.

문평의 도가 머리를 뚫고 지나가 갑판 바닥에 박혔다. 지나치게 무리한 운기로 인해 기혈이 들끓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핏덩이가 콧속을 비릿하게 적신다.

문평은 손등으로 코피를 훔치며 허리를 들었다. 입으로도 핏덩이가 나오려고 했지만 그건 그냥 삼켰다.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광고해 봐야 좋을 게 없다.

“그것참 폼 나는 재주로구먼. 끝내주는걸.”

짝짝짝. 그의 등 뒤에서 난데없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평은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살육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를 추슬러 안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주위에 시체들을 산처럼 쌓아 놓고 뱃머리에 앉아 시시덕거리던 사내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놓은 무기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귀두도鬼頭刀로, 기이할 정도로 깨끗하게 반들거리고 있어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어라? 이거 제법 반반한 계집이잖아. 구미가 당기는데?”

맨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귀두도를 집어 들었다. 그가 나서자 문평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자들이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계집이라니? 설마 이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여자 태가 나기는커녕 사람 꼴도 겨우 갖춘 어린아이를 두고 하는 음담패설에 욕지기가 치민 문평은 새파란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나는 저 조그만 계집아이가 마음에 들어. 죽을 때까지 범한 후 간을 내어 먹으면 그 맛이 제법 고소할 것 같단 말이야.”

“아! 좆도!! 빌어먹을 개새끼들. 내가 이놈의 변태 새끼들 때문에 면 팔려서 같이 못 다니겠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고 싶냐? 놀 시간도 얼마 없잖아.”

“시끄럽다. 미친놈아. 저는 썩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간 시체가 아니면 회가 안 동하는 주제에 누구더러 지랄이야?”

사내들 사이에서 듣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리는 대화가 이어졌다. 문평은 그들의 말을 듣고서야, 처음의 사내가 부른 ‘계집’이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간鷄姦을 즐기는 놈과 어린 여자아이를 간살姦殺 하겠다는 놈. 거기에다 시간屍姦을 즐기는 놈이라. 불길하게도,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조합에 대해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설마, 귀두삼귀鬼頭三鬼?”

문평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예감을 확인했다. 문평의 질문에, 그의 몸을 음탕하게 훑고 있던 사내가 짓궂게 웃었다. 문평이 자기에게 깜찍한 애교라도 떨었다는 투였다.

“맛 좋아 보이는 계집이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우리가 누군 줄 안다면 긴말할 것 없이 허리춤부터 풀고 봐야지. 혹시 알아? 이 서방님을 만족시키면 명줄만이라도 붙여줄지?”

귀두삼귀. 그들은 중원 전역을 횡행하며 약탈과 간음을 일삼는 사마외도의 무리였다. 모두 일류 고수로 음적陰賊치고는 무공이 높았고, 세 명이 합격하는 것을 즐기는 데다 강한 적이 나타나면 피하거나 숨어버려 뒤를 쫓는 사람들이 많아도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신출귀몰한 놈들이라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들은 몇 년 전, 하남의 명망 높은 학자 가문인 주가장에서 장주 일가를 간살한 혐의로 강호의 공분을 샀고, 그 때문에 무림공적이 되었다.

척살대가 조직되고 정도맹에서 직접 뒤를 쫓기까지 하는지라 놈들은 얼마 안 있어 자취를 감추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새외로 도망을 갔다고도 하고 정도맹에 사로잡혀 흑마옥黑魔獄에 갇혔다고도 했다.

그런 자들이 아직도 버젓이 중원에 남아 있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까닭일까? 문평은 낭패를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것도 모자라서, 사람으로서 겪기 힘든 치욕마저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를 보는 계살귀鷄殺鬼의 시선에서 번들거리는 음욕이 느껴졌다. 자옥을 바라보는 추살귀雛殺鬼의 시선 역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시체에만 관심이 있다는 시살귀屍殺鬼는 이럴 땐 자기에게도 어여쁜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어야 한다고 투덜거리더니 괜히 발밑의 시체들을 헤집어 댔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거기에 광기까지 번들거리고 있어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문평은 진심으로 자옥의 귀를 막아주고 싶었다. 혈도가 짚이기만 했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기에 번번이 이런 꼴을 당하는 걸까? 아직 이런 흉험한 세상 따윈 몰라도 좋을 나이인데 말이다.

“시살귀와 다투고 싶나?”

“뭐라고?”

“시체로만 가질 수 있을 것을 그리도 소망하니 말이야. 네놈 취향이 바뀐 줄 알았지.”

문평은 바닥에 꽂힌 도를 뽑아 상대에게 겨누며 신랄히 빈정거렸다. 그러면서도 곁눈으로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석을 찾아봤지만, 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물로 뛰어내릴 사람들을 경계하는 듯 뱃전은 철통같은 경계망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갑판에서 쉬고 있던 자들조차도 그들의 대치 상황을 보고 뱃전으로 물러났는지라, 그렇지 않아도 견고하던 포위망이 한층 더 촘촘해졌다.

계살귀는 빙글빙글 웃으며 귀두도를 손안에서 돌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의미심장하게 핥더니, 들으라는 듯 일부러 더 음탕하게 지껄여 댔다.

“본래 맹랑한 년을 깔아뭉개는 재미가 별미지. 시건방지게 지껄이던 입에 좆을 쑤셔 넣고 추삽질 하면 울먹울먹하면서 비명도 못 지르고 자지러지거든.”

“과연. 내 입에 그런 걸 처넣고 잘리지 않을 자신이 있단 말이지?”

“이라면 다 뽑아 놓을 거니까 미리부터 걱정할 것 없다. 우선 그 건방진 입부터 실컷 맛본 연후에 아랫도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박아주지.”

“너무 영광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그런데 혼자 힘으로 그게 가능하겠어?”

건들건들. 마치 장터에 나온 파락호처럼 건들거리는 계살귀에게 문평은 떠보듯 물었다. 문평의 무공수위는 저들도 방금 전의 일로 알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와 마찬가지로 일류라고 일컬어지는 계살귀가 겁도 없이 혼자서 걸어 나온다.

이런 종자들은 제 목숨을 끔찍이 여겨 위험에 노출될 만한 일에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 법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선뜻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서는 걸 보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문평의 속내를 빤히 읽은 계살귀가 히죽 웃었다. 그는 한쪽 어깨에 귀두도를 얹으며 으스대듯 말했다.

“죽어도 잊지 못할 맛을 보여 줄 테니 서방님을 좀 믿어봐. 그렇게 자꾸 따지고 들다간 소박맞는다고.”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문평이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상대에게 선공까지 양보하는 것보다는 먼저 선제공격을 해 기선을 제압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 무섭네.”

계살귀는 여유롭게 히죽이며 도를 받아 냈다. 챙, 하는 거친 쇳소리가 선상에 울려 퍼졌다. 예상보다 더 센 반탄력에 하마터면 도를 놓칠 뻔했던 문평은 손가락이 부서져라 도를 움켜쥐며 재빨리 몸을 물렸다. 억지로 가라앉혔던 기혈이 다시금 뒤집혔다. 균형이 무너져 발걸음까지 휘청거린다.

‘세상에, 이런 반탄력이라니?’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인해 상대가 상상 이상의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은 문평은 침중하게 안색을 가라앉혔다.

무기를 부딪쳐 본 이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계살귀가 자신만만하게 나선 이유를 말이다. 무슨 음모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것뿐이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계살귀는 절정의 고수였다. 그는 일류밖에 안 되는 문평이 약점까지 얹은 채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도저히 아니었다.

계살귀는 그가 몸을 추스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도끼라도 내려치듯 강력한 기세로 문평의 도를 공격했다. 몸을 공격하지 않고 도를 공격한 것은, 겉모습은 온전히 유지한 채 내상만을 심화시키기 위한 술책인 듯했다. 교활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반격할 여지도 없었다.

문평은 계살귀의 공세를 간신히 막아내며 한 발 두 발 뒤쪽으로 물러났다. 한 번씩 도가 맞부딪칠 때마다 기혈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요동쳤다.

간신히 참고 있던 입에서 울혈이 새어 나왔다. 울컥울컥 게워 내는 붉은 핏줄기가 보기 좋은 듯, 계살귀는 흐뭇하게 웃으며 문평을 희롱했다.

“왜 이리 미련하게 버티고 있누? 그러다가 내장 다 녹는다?”

“이런, 씨팔.”

“원한다면 씹이야 얼마든지 해주지. 그러니 이만 포기하고 칼을 놓지 그래? 그러다 진짜 명줄 끊긴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너 같은 개자식에게 간살 당하느니 이대로 죽고 말지!’

문평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품에 안은 어린 생명의 존재가 그의 나약해지는 마음을 붙잡았다. 여기서 그가 무너지면 그는 물론이고 이 어린것까지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된다. 세상 살면서 좋은 꼴이라고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가 죽음까지 비참해서야 안 되지 않은가.

문평은 뒤로 밀리는 신형을 간신히 바로잡아 균형을 유지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지만 뾰족한 수단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겐 남은 수가 별로 없었다.

‘반천회류로 등 뒤로 돌아간 후 적의 팔을 친다. 절정 고수가 하수들과 같지는 않을 테니 예전과는 달리 제대로 막힐 거야. 그럼 그 반탄력을 이용해 뱃전을 뛰어넘어야 해. 따라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일단 뱃전을 넘어서면 그때부턴 속도전이다.’

이미 한 번 드러난 수이긴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평은 따라오지 않으려고 하는 진기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마지막 승부수를 준비했다.

혼자 힘으로는 계살귀를 이길 수 없고, 설사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달려들 많은 적을 홀로 물리칠 수 없는 문평에게 삼십육계 줄행랑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을지는 운을 시험해 봐야 아는 법. 문평은 도를 단단히 잡고 자세를 낮추었다.

“부, 불이야!!”

그가 막 계살귀를 향해 뛰어오르려고 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처참한 고함이 들리더니 연이어 계단 창으로 선창 아래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선창 아래에 남은 승객들뿐만 아니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적도들까지 한꺼번에 뒤엉켜서 올라오는 바람에 갑판 위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느긋하게 할 일을 끝내고 취미 생활에 열중하려던 계살귀는 제 앞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도로 후려쳐 죽이며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다.

“이 새끼들, 뭐야?”

“큰일 났습니다. 계살귀님! 배에 불이 났습니다!!”

“뭐가 어째? 왜 갑자기 불이 나?”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바닥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순간적으로 확 붙어 올라서……. 어이쿠! 이런!!”

허겁지겁 달려와 계살귀에게 보고를 하던 수적이 등 뒤에서 터지는 폭음에 깜짝 놀라며 몸을 숙였다. 불이 났다길래 등잔이라도 엎은 줄 알았던 계살귀는, 심상치 않은 폭음 소리와 함께 배 아래쪽이 온통 화염에 휩싸이자 깜짝 놀라며 몸을 바로 했다.

“이런 제길. 화탄火彈이잖아!!”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선미 쪽이 터져 나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목숨을 살리고자 한꺼번에 달려드는 무리들에게는 경계를 서고 있던 자들도 당해 내지 못했다. 당해 내기는커녕 자기가 먼저 뛰어들려고 발버둥 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하늘이 주신 기회다. 문평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를 추슬러 올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계살귀가 다시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 한다.

상황을 재빨리 가늠한 문평은 달아나는 사람들의 뒤를 쫓아 뱃전으로 달려갔다. 폭음에 정신을 팔던 계살귀는 그가 도망가는 모습을 그제야 발견하고는 노성을 질렀다.

“이런 쌍! 저놈 잡아! 저 새끼 잡으라고!! 저놈만 죽여도 해결되는 거야. 저놈이랑 저 계집애를 죽여 버려!!”

워낙 길길이 날뛰어서인지 이렇게 혼란한 와중에도 그의 명령이 먹혀들었다. 아직 갑판 위에 남아 있던 자들 중 몇몇이 문평을 향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달려가는 속도를 줄이지 않으며 문평도 도를 세웠다. 팔 하나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문평은 남아 있는 진기를 모조리 도첨으로 모았다. 그러나 그가 마음먹은 두 번째 승부수는 상대를 향해 던져지지도 못했다. 문평이 막 도를 내리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전음을 보내 그의 의도를 수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속도를 줄이지 말고 그대로 뛰십시오.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귓속을 파고든 것은 철판을 쇠로 긁는 듯 듣기 싫은 음성이었다. 낮게 잠겨 있어 웅얼거리고, 가래가 끓는 것처럼 어조가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강한 설득력을 품고 있어, 문평은 그 전음을 고스란히 따랐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뛰었더니 눈앞에서 피가 튀었다.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앞을 스쳐 지나가 붉은 피바람을 일으킨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쓰러진 자들의 목에는 하나같이 깊게 베인 예리한 상처들이 남았다.

이기어검을 사용한 게 아니라면 암기를 사용한 듯한데, 대체 어떤 무기가 저런 상흔을 만드는 걸까?

처음 보는 신기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에게는 한가하게 상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등 뒤에선 계살귀가 쫓아오고, 발밑에선 화탄이 폭발했다.

문평은 목이 잘린 시체들을 지나 뱃전으로 올라섰다. 서슴없이 물을 향해 뛰어드는 그의 뒤에서 다시금 폭음이 터졌다.

쾅! 콰과광!

요란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곧이어 등가죽을 태울 듯 화끈한 열기가 그의 몸을 덮쳤다.

문평은 온몸으로 자옥을 끌어안으면서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둡고 깊은 호수의 안쪽은 바깥쪽과 마찬가지로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물속으로 들어왔어도 등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단지 화끈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등 근육 전체가 타들어 가는 듯이 아파지면서 물속으로 핏물이 번진다.

‘뭔가 잘못됐어.’

문평은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이미 늦은 것이었다. 의식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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