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234.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234.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쓰읍.”
숨을 깊게 들이키며 근육을 긴장시켰다. 몸의 자세를 바닥에 눕히듯이 낮추며 반원을 그리듯 칼을 휘둘렀다.
허공에 그려진 깔끔한 붉은 선이 놈들의 몸을 베어 가르며 지나갔다.
“뇌전.”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사방으로 뻗어나간 붉은 뇌전이 놈들의 상처부위로 파고들었다. 놈들은 말없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마수는 몬스터 이상으로 생명력이 끈질기다고 하니 확인사살을 해두는 게 좋겠지.’
쓰러진 놈들의 목에 칼을 한 번씩 푹푹 찌른 뒤에 도서관으로 뛰었다. 팔완원숭이가 몇 마리 튀어나오긴 했으나, 내 칼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
하비스가 손에 쥔 지팡이를 휘둘렀다. 굵은 얼음 창 4개가 정면에 쏘아져 4마리의 마수 머리를 꿰뚫었다.
“프리실라 교수…! 어떻게 방법이 없겠소?! 마수가 너무 많이 튀어나오고 있소! 이대로라면 아카데미가 위험하오!”
프리실라는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자신을 향해 적의가 쏟아짐에도 마석문을 향한 푸른 눈동자는 떨어질 줄 몰랐다.
“프리실라 교수!”
“……시끄럽다. 학장.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느냐?”
“뭐가 바쁘시오?! 가만히 있는 게 전부지 않소!”
“…….”
프리실라가 눈가를 좁히며 하비스를 쳐다봤다.
하비스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긴급 상황 때문에 잊고 있던 프리실라의 정체를 떠올린다. 마음만 먹으면 도시 하나 쯤은 간단히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에이션트 블루 드래곤. 그것이 프리실라다.
“학장. 이건 좀처럼 없는 기회다.”
“…기회?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혹시… 저 마력을 내뿜고 있는 돌과 관련된 것이오?”
“저건 마석문이다. 저게 어떤식으로 작용하는지 관찰해야겠다.”
“……설마, 그대께서 우리 아카데미로 온 것은 저것 때문이오?”
프리실라는 다시 마석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대체 저게 뭐기에?!”
“……몇 개월 전, 믈로보드 섬에 저것이 처음 나타났다. 빨간 놈이 발견했지. 다만 너무 늦었었다.”
“늦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섬은 마계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빨간 놈은 우리들을 불렀고, 우리는 마석문을 관찰하는 것보다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내버려두었다면 상급 악마가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니 신속히 파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계화…!!”
“문제는 파괴하고 난 뒤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믈로보드 섬의 절반이 모래가 되었지.”
“……나는 믈로보드 섬에 대해 모르오. 폭발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위력이오?”
“아카데미뿐만이 아니라 도시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이다.”
“이런 미친!”
하비스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공중에 떠서 마석문을 공격하는 한 교수가 있었다.
“이 돌만 파괴한다면 마수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외치며 마법을 시전 한다.
“네릭 교수! 당장 멈추시오!”
하비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 질렀으나, 네릭 교수의 마법은 이미 사용되었다.
네릭 교수의 등 뒤로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이 이빨을 한껏 벌리고 있다
플레임 스네이크. 공격력 하나만 보자면 최상급에 속하는 마법이다.
하비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었다. 불꽃의 뱀이 마석문을 향해 돌진했다.
콰앙!
플레임 스네이크가 폭발하며,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마석문은 멀쩡했다. 어디하나 부서진 곳이 없었다.
“머, 멀쩡하구려.”
“저걸 박살내려면 오러 블레이드나, 헬 파이어 급의 마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오러 블레이드와 아크메이지의 마법이 필요한 것이다.
“나와 프리실라 교수가 가만히 있는 다면 마석문이 폭발할 일은 없겠구려. ……근데 마수가 계속 나오고 있지 않소. 뭔가 방법이 없소?”
“…….”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마석문을 파괴하고 그 폭발을 마법으로 감당하거나, 폭발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장소에서 마석문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마법으로 봉인을 하거나.
그랜드 아크메이지인 프리실라에겐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프리실라 교수…. 말 좀 해보시오!”
“관찰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수많은 목숨이 걸려 있소!?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테니 도와주실 수는 없소?”
“네놈의 늙은 무릎 따위엔 관심 없다.”
“마석문을 꼭 지금 관찰해야하는 것이오?! 결계를 이용해 잠깐 봉인해두는 것도 방법중 하나지 않소! 그리고 저 마석문을 여기에 두고 간 악마는 내버려 둘 것이오?! 마석문을 관찰하는 것보다 그 악마를 잡아 심문하는 것이 빠르지 않겠소?!”
“놓쳤다.”
“……뭐요?”
“방심 했었다. 마석문을 꺼내놓고 바로 도망가더군. 놈은 공간 능력을 가진 최소 상급 이상의 악마다.”
“상급이라니… 최악이 아니오?”
“계약자는 악마를 통해 힘을 발휘했다.”
“악마 계약자가 여기에 있었단 말이오?! 혹시 누군지 아시오?”
“여기에 없는 교수가 한 명 있을 텐데.”
하비스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하비스의 말대로 교수 1명이 보이지 않았다.
“베, 베젤 교수가 없소…. 그녀가 악마 계약자였다니….”
하비스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에게 베젤은 다소 특별한 여교수였다. 한달에 2~3번씩 은밀히 만나서 몸을 겹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유서깊은 학장실에서 옷을 벗고 열락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시끄럽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 거지.”
하비스가 흠칫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생각해보면 프리실라에게 꽤 무례하게 굴었다. 그녀가 드래곤 중에서 그나마 이성적이고 자비로운 블루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당장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미, 미안하오….”
“됐다. 더 이상 말 걸지 말….”
“…왜 그러시오?”
“…….”
프리실라는 도서관이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사라졌던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건방진 은발 메이드의 기운도 함께 말이다.
‘…과연. 마도서가 목적이었나.’
알게 된 이상 악마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프리실라는 마석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십방의 빙하감옥.”
마석문을 중심으로 10개의 푸른색 마법진이 동시에 그려졌다.
하비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아크메이지인 그도 일부를 알아 보는 게 고작일 정도로 수준 높은 봉인 마법이다. 저 마법을 이해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은 연구해야 하리라.
불길한 기운을 뿜어대며 마수들을 소환하던 마문석이 봉인되었다. 마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주변 환경은 오염되지 않았다.
“잠깐 갔다 오마. 마석문은 네가 잘 보고 있거라. 저걸 건들면 널 죽여 버리겠다.”
“아, 알겠소.”
???
도서관에 도착한 내 눈에 보인 것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유리아와 베젤 교수였다.
어찌나 격렬히 싸우는 지 도서관의 벽 한쪽이 무너지고, 찢어진 책의 종이가 허공에 흩날린다. 서로 싸우는 그들은 마치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인간들처럼 보였다.
‘베젤 교수…! 저 년은 그때 햄버거 가게에서 줄서면서 섹스 한 년이잖아!’
풀어헤친 연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날카로운 눈매 속의 검은색 눈동자는 살의로 반짝반짝 빛난다.
베젤은 거의 알몸에 가까웠다. 상의는 찢어져 C컵의 탱탱한 젖가슴이 훤히 드러났고, 하체도 연갈색 보지털이 보일 정도로 찢어져 있다.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많았지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치명상은 없었다.
베젤을 상대하는 유리아도 멀쩡하지 않았다. 메이드복 여기저기 찢어져 있다. 다만 베젤 보다 훨씬 나은 상태다.
‘베젤. 저 년의 발바닥에 있는 저 마법진은….’
베젤의 왼쪽 발바닥에 하얀 빛을 내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저것은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거다. 악마 계약자는 몸 어딘가의 계약의 증거, 마법진이 있으니까.
“하아~. 지치네~. 너 같은 여자가 왜 메이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자존심도 없어?”
“…….”
“응, 그래. 대답해줄 이유 따위는 없다는 거지?”
베젤이 손바닥을 까딱였다. 3개의 검은 마법진이 순식간에 완성되더니 유리아를 향해 보라색 광선을 쏘아냈다.
유리아의 몸이 지면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지면의 그림자가 고속으로 움직여 베젤을 향해 접근 한다.
“칫. 그 마법 엄청 귀찮아!”
베젤이 그림자를 피해 허공으로 뛰었다. 그림자 속에서 유리아가 튀어나와 그녀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은 베젤의 허벅지를 스쳤다.
“꺄앗!”
장난기가 다분한 비명이었다.
“아프잖아~. 허벅지에 피가 나와. 이거 흉터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네. 제가 책임지고 땅에 묻어드리겠습니다.”
유리아가 단검을 휘두른다. 파지직. 뇌광(雷光)을 머금은 검기가 베젤에게 날아갔다. 베젤의 앞에 반투명한 배리어가 나타나 검기를 막아냈다.
“흐흥.”
베젤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콰앙! 유리아가 서있는 장소에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리아는 도리어 폭발을 추진력삼아 베젤을 향해 뛰었다.
콰앙! 쾅! 키이잉!
폭발, 광선, 검기, 번개 등 온갖 것들이 난무 하는 전투였다.
‘……이건 내가 끼어들 수준이 아니잖아.’
솔직히 말해서 찰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30초도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여기서 도망치는게 유리아를 돕는 일이 아닐까 싶다. 상황을 보자면 유리아 쪽이 우세한 것 같으니.
‘잠깐. 저긴….’
책장이 무너져 있는 곳에 지하가 뻥 뚫려 있었다. 바닥 아래에 있는 책장이 보인다.
‘이렇게 뚫려 있는 걸 보니 결계도 해제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몰래 들어가서 마도서를 가져갈까?’
베젤과 유리아는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으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나는 슬금슬금 걷기 시작했다.
“아이참. 메이드고, 주인이고 너무 거슬린다아~.”
베젤이 나를 향해 광선을 쏘아냈다. 나는 깜짝 놀라 찰나를 이용해 옆으로 피했다.
“알고 있었나…!”
“그럼. 난 너희들을 꽤 오래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구?”
유리아가 베젤의 등 뒤에 나타나 단검을 휘둘렀다. 베젤이 사라졌다가 내 뒤에 나타나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았다.
“잡았다! 이제 저 여자도 얌전… 꺄아아악?!”
파지지직!
내 몸에서 뿜어진 시퍼런 뇌전이 베젤을 공격했다. 베젤이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주인님! 일단 물러나 주십시오! 저 여자의 악마는 보통이 아닙니다!”
유리아의 말에 도망치려고 했으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베젤이 내 다리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다.
그리고 도서관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파란색 긴 머리카락의 장신의 미녀, 프리실라다.
“하, 설마 진짜 아카데미에 있었을 줄이야. 드래곤으로서 수치스럽구나. 이 수치는 널 죽여서 떨쳐내도록 하마.”
프리실라의 앞에 수 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하아…. 내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베젤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내 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프리실라를 향해 날아갔다. 프리실라는 마법진을 멈추지 않았다. 마법진에서 날카로운 얼음송곳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베젤을 공격할 생각이다.
‘이 미친년이!’
나는 작전을 바꿨다. 일단 급소를 최대한 피하고 죽은 척을 한 뒤, 기회를 보며 완전 회복을 이용해 정상이 된 몸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프리실라 사이에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작은 블랙홀 같은 그것은 나와 프리실라를 끌어당겼다. 내 의식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주인님!!”
야옹.
유리아의 다급한 목소리 뒤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주인님!!”
유리아는 유진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으나, 간발의 차이로 잡지 못했다. 대신의 그녀의 손에는 유진이 입고 있던 옷이 잡혔다.
프리실라도 마찬가지로 옷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가 전개했던 수 십 개의 마법진이 눈꽃마냥 부서져 사라진다.
야옹.
유리아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베젤을 노려봤다.
베젤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발에는 이마 중심에 있는 눈을 포함해 총 3개의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앉아 있었다.
유리아는 고양이에게서 짙은 악마의 마력을 느꼈다.
“주인님을 어디로 보낸 거지?”
베젤은 유리아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그렇게 살기를 내보이지 마. 진짜…, 숨도 쉬기도 버거울 정도니까.”
베젤은 떨리는 양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문질렀다. 소름이 돋은 피부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대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