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263. 인형 놀이
263. 인형 놀이
저녁이 되었다.
나와 진세영은 무녀의 안내를 받아 신사의 뒤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분명 나무 가득한 산속이었는데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변했다.
결계가 쳐져 있는 그곳은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쪽입니다.”
놀라고 있는 우리를 향해 무녀가 말했다. 우리는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초대장에 적혀 있는 의자에 앉으시면 됩니다. 앞으로 15분 뒤에 행사가 진행되니 기다려 주십시오.”
1,000 명 정도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관중석이 나왔다. 관중석에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건 관중석의 중심에 있는 폭포였다. 보기에도 시원한 커다란 폭포가 아래로 떨어진다.
폭포가 떨어지는 곳 앞에는 커다란 개울이 있었다. 물이 흐르는 개울 위에 넓은 공간이 있었다. 반듯한 돌로 만들어진 그곳은 무대 혹은 대련장으로 보였다.
‘저기서 대련을 하는 건가.’
우리는 정해진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관중석이 점점 사람으로 채워진다.
“여기에 초대 받아 찾아온 사람들은 전통성과 역사, 세력을 갖춘 유파의 사람들이야.”
진세영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천류가 초대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인종, 국가, 소속 모두 달랐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내가 우습게 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들이라는 것이다.
‘저 사람은….’
천우도왕(千牛刀王) 곽절. 그 힘이 천 마리의 소와 버금간다는 중국의 S급 헌터다. 설마하니 그가 여기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시게오. 일본의 S등급 헌터이자 신속(神速)이란 별명을 가진 남자까지 들어왔다.
이곳에 있던 방송국 직원들은 S급 헌터를 카메라로 찍기 바빴다. 몇몇 개념 없는 기자들은 S급 헌터의 길까지 막아서며 질문을 내던졌다. 기자들을 막느라 무녀들이 고생하고 있었다.
S등급 헌터인 그들은 무녀들의 안내를 받아 일본 정치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앉았다. 우리가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경기장도 잘 보이는 VIP 자리다.
‘S급이 두 명이나 여길 왔다고?’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나라든 S급 헌터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웬만한 공식 행사에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다.
‘풍향제가 S급 헌터가 움직일 정도로 뛰어난 행사였나?’
일본의 S급 헌터인 시게오가 찾아온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긴 일본이니까. 하지만 곽절이 찾아온 건 좀 많이 의외였다.
“오. 영천류의 진세영 씨 아니십니까. 여기서 뵙게 되니 괜히 더 반갑군요.”
세 명의 남자가 우리들 앞쪽에 앉았다. 2명의 남자는 자세가 굉장히 빳빳했다. 그들은 심할 정도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경호원임을 알아차렸다.
진세영은 자신에게 말을 건넨 남자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후카 신사에 오실 줄은 몰랐어요.”
“하하. 초대 받았는데 안 올 수는 없죠. 그리고 일본의 S급 후보라는 여자가 궁금했습니다.”
그는 30살 전후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였다. 입고 있는 명품 정장이고, 머리는 가르마펌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진세영에게 향했다가 내 쪽으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성유진 씨. 언젠간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그의 손을 잡았다.
“네. 성유진입니다.”
“하하. 전 신지오입니다. 동청 신가(東靑 申家)의 소가주입니다.”
동청 신가.
대한민국에 있는 오대가문 중 하나.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여기서 뵙는군요.”
내가 말했다. 동천 신가에 대해선 대학교에서 배웠다. 조선시대부터 존재해온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그 소문을 너무 신뢰하지 말아 주십시오. 좀 과장된 게 많아서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아, 이건 제 명함입니다.”
“명함…. 전 명함이 없습니다만….”
“하하. 괜찮습니다. 제 명함만이라도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나중에 명함을 만드시면 제게 주십시오. 제가 무례할 수도 있겠지만, 전 영천류의 천재와 이런 식으로라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군요.”
신지오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화를 걸었다. 웃음이 많아 보이는 이 남자는 말도 많았다.
신지오는 진세영 보다 내게 관심이 많았다. 영천류의 천재. 한국의 유파들 사이에선 내가 제법 유명한 모양이다. 아마도 전에 참가했었던 던전 서바이벌 때문이겠지.
찰랑!
방울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대화를 걸던 신지오가 드디어 입을 멈추었다.
“이런… 행사가 시작할 모양이군요.”
방금의 방울 소리로 조용해진 관중들은 모두 폭포 쪽을 쳐다봤다. 물이 쏟아내리는 폭포 앞에 허공에 떠있는 커다란 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부유해있는 그 가마안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 붉은색의 치마와 하얀색의 상의를 입은 무녀다.
나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그 무녀를 자세히 봤다.
새하얀 피부와 가지런한 눈썹.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 미녀의 조건을 충족했다.
또한 그녀의 몸매는 품이 넓은 무녀복을 입었음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나 가슴과 엉덩이가 큰편이다. 딱 내 취향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를 쳐다봤다.
짤랑!
그녀가 다시 방울을 흔들자 가마 주위에 푸른 불꽃이 일어났다. 푸른 불꽃은 가마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짤랑!
이번엔 가마에서 빛무리가 일어났다. 보기에도 화려한 광경이라 방송인들이 그 광경을 정신없이 카메라로 찍었다.
‘아마츠카 코요리. 후카 신사의 무녀이자, 풍신 길드의 소속 A급 헌터. 일본의 S급 헌터 후보. 나이는 33세.’
이후에 어디선가 전통적인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코요리는 춤을 그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춤. 신에게 바치는 춤.
‘동시에 일본의 유명한 음양사라지?’
행사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코요리 혼자서 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춤을 추고 난 뒤 가마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후에 다른 무녀들이 나타나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보여주거나, 정치인들이 나타나 전세계예 일본은 어쩌고 저쩌고 지루한 말들을 내뱉었다. 교장의 훈화 만큼이나 재미 없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오후 8시.
드디어 대련이 시작되었다.
아마츠카 코요리와 한 남자가 폭포 아래의 대련장에 서서 마주봤다.
눈에 마나를 집중하자 먼 거리에 있음에도 아주 잘 보였다. 또 바깥은 어두컴컴한 밤이지만, 결계 내부인 이곳은 대낮처럼 밝았다.
“후카 신사의 무녀, 아마츠카 코요리입니다.”
코요리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하자, 상대 남자 또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언월도와 비슷하게 생긴 창, 나기나타가 들려 있었다.
“천원류(天元流)의 오오츠키 고타로요.”
고타로는 허리춤에 일본도를 착용한 비쩍 마른 남자였다. 옷은 사무라이 복장이고, 머리는 과거 사무라이들처럼 상투를 틀고 있었다.
빠르게 인터넷에 검색해보자 A급 헌터라고 한다. 뿐만이 아니라 고리타분한 우익으로 유명한 남자였다.
짤랑!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울렸다. 대련이 시작되었다.
카앙! 캉!
칼과 창이 부딪힌다. 그들의 부딪힘은 30초가 넘도록 이어졌다.
나는 고타로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걸 보았다. 코요리가 그의 공격은 손쉽게 막아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봐도 실력 차이가 느껴지는데 당사자는 더욱 심한 실력차이를 느꼈겠지. 아마 코요리가 마음만 먹으면 3분 안에 대련은 끝날 거야.’
그러나 코요리는 5분이 지났음에도 대련을 끝내지 않고 있다.
‘…보여주기 위해서군.’
이건 결국 쇼다. 일본 전역에 방송되며,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다. 너무 빠르게 끝나면 시시하다고 생각하겠지.
‘코요리는 압도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이걸 통해 일본을, 풍신 길드를 홍보 할 생각인가.’
VIP 자리를 쳐다본다. S급 헌터 두 명은 심드렁하게 보고 있는 반면, 정치인들은 흡족한 표정이다.
옷 여기저기 찢어진 고토라가 이를 악물며 발도 자세를 취했다. 나는 보다 진지하게 고타로를 쳐다봤다. 그의 몸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마나가 관중석까지 느껴진다.
‘이게 고타로의 마지막 발악이겠군.’
고타로가 발도했다. 내 눈으로는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3M가 넘는 하얀 빛의 검기가 코요리를 향해 날아간다. 코요리가 창을 땅에 박고는 양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음양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코요리의 앞의 공간이 왜곡된다. 똑바로 날아오던 검기가 비틀어져 천장으로 올라가 결계에 부딪혀 사라졌다.
고타로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도했다. 5개의 검기가 연이어 날아가지만, 결과는 아까와 같았다. 공간왜곡을 뚫지 못하고 바닥, 천장, 벽 등으로 날아가 결계에 부딪혔다.
“…내가 졌소. 더 이상 카타나를 휘두를 여력이 없소.”
고타로가 일본도를 거두고 손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검극이 무척이나 매서웠습니다.”
“…빈말이라도 고맙소. 그대가 있으니 일본의 미래는 안심할 수 있겠구려.”
대련이 끝났다. 관중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슬쩍 인터넷을 살펴보니 사람들의 반응도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나 일본인들의 반응이 엄청났다.
-바람의 무녀! 아마츠카 코요리! 장난 아니다!
-역시 아마츠카 코요리 씨입니다. 기대했던 대로의 실력을 보여주네요. 근데 일본 헌터 협회는 뭐하고 있습니까? 당장 아마츠카 씨를 S급 헌터로 올리세요.
-지금 전 세계의 커뮤니티가 난리났습니다. 일본의 음양술은 서양의 마법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주 난리났군.’
이후에도 행사 몇 개가 이어졌지만 대련만큼의 호응도 높은 반응은 없었다.
???
밤 12시.
나는 신사 근처에 있는 연못가로 다가갔다. 적당히 안기 좋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을 꺼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내일 코요리와 대련을 한다.
내 목적은 코요리에게 한 방 먹이고 머리카락 혹은 피 한 방울을 채취하는 것.
그러나 오늘 본 코요리의 실력을 생각하면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피를 얻는 건 불가능하고… 머리카락을 노려야 하나?’
머리카락도 자연스럽게 잘라야 한다. 너무 어색하게 머리카락만 노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다.
‘시작하자마자 찰나를 이용하면… 음. B급 헌터한테도 잘 안 통하는데 S급 후보한테 통할 리가 있나.’
마음속이 꽤 심란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코요리가 대련을 길게 끌고 갈거라는 것이다. 이건 결국 쇼니까.
‘심란하군.’
나는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렸다. 유희 생활 어플을 실행시키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고 보니 게이킹을 죽여라 세계는 어떻게 됐지? 세계가 끝났나?’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엔딩 목록에 있는 ‘게이킹을 죽여라’를 발견했다. 내가 ‘게이킹을 죽여라’를 클릭했다.
화면이 바뀌었다. 왕좌에 앉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의 아바타, 섹스킹이 보였다.
‘인터페이스가 자동진행이랑 같군. 빠르게 돌려볼까.’
섹스킹은 전능한 인피니티 파워를 이용해 세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미인을 선호하므로 성형을 금지한다!
그의 말을 거부하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30만이 넘는 못생긴 여자들이 들고 일어서서 반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결과는 임신 번개로 인해 임신을 당한 것이다. 그들이 출산한 아기들은 모두 여자였다.
못생긴 여자가 낳은 딸들은 대부분이 못생겼지만 간혹 예쁜 딸을 낳기도 했다. 섹스킹의 눈에 들 정도의 미녀를 낳으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못생긴 여자들에게 있어서 임신은 인생역전의 기회였다. 그러나 섹스킹에게 임신 번개를 받는 것도 영 쉽지 않았다.
사회의 상황을 알아차린 섹스킹은 임신 번개도 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생긴 여자들이 임신 번개를 맞기 위해선 ‘노동 포인트 1만’을 사용해야했다. 노동 포인트는 이름 그대로 노동을 하면 쌓이는 포인트다.
-섹스킹이시여! 제 딸을 보십시오! 아름답지 않습니까?!
-오. 아름답구나. 너는 이제부터 장모의 신분을 가졌다! 내가 인정하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모의 신분은 신분은 준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노동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리 오거라! 네게 은총을 내리마!
어떻게 보면 근친이라 할 수 있었으나, 섹스킹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섹스킹인 인간을 초월해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근친이라는 인간의 윤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처럼 말이다.
-벌려라!
섹스킹이 말하자 수 십 만의 여자들이 다리를 벌렸다.
“씨발. 존나 부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