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 268. 인형 놀이
268. 인형 놀이
백림(白林).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 정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범죄 조직이었다. 겉으로는 현재의 썩어빠진 일본을 바꾼다는 대의를 내걸며 움직이는 자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백림의 대의를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백림을 야쿠자보다 더 질 나쁜 테러조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백림이 하는 일은 정치가 암살, 일본 헌터 길드 습격 등등 이었으니까.
세이타로는 백림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S급 범죄자였다. 다시 말해 S급 헌터의 힘을 가진 범죄자라는 말이다.
가진 능력은 영체화이고, 30대로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실제 나이는 60대이며,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음양사이다.
‘시발. 뭐지.’
나는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놈의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지금 습격할 필요가 있나? 2명의 S급 헌터가 저기에 떡하니 있는데 지금 습격하는 건 오히려 자살 행위에 가깝지 않나?
‘공간 균열…. 그건 분명 던전과 비슷한 개념이겠지.’
TV 화면이 끊기기 전까지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유희 생활 어플을 실행했다.
‘안 될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섹스돌의 상황, 아마츠카 코요리의 상황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은 적중했다.
스마트폰 화면에 코요리의 모습이 나왔다. 그녀는 같이 휘말린 여닌자, 코우가 미오와 함께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칙칙한 색의 벽과 어두컴컴한 분위기 등을 봤을 때 실내에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균열도 마찬가지일테니… 진세영은 무사 할 거야!’
상황이 갑자기 변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복도 창문 박에 민트색의 반투명한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밖을 쳐다봤다. 민트색의 커다란 결계가 후카 신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보나마나지. 그 새끼가 결계 쳐놓고 갔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외부의 인력이 여기에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 할 테지.
나는 풍향제의 행사가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후카 신사의 결계는 흔적도 없이 부서져 있었고, 아무런 방해 없이 행사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으로 북적이던 관중석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고, 관중석 곳곳에 공간 균열이 있었다. 최소 500개는 넘어 보이는 크고 작은 공간 균열이다.
균열을 보며 꺼림칙함을 느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항하지 못한 것이다. S급 헌터들은 자신들이 있는 자리에 공간 균열이 일어난 탓에 피하지도 못하고 빨려 들어갔다.
‘이거 뭐 나도 빨려 들어가는 거 아니야?’
나는 잔뜩 경계하며 균열 근처로 걸어갔다. 내 걱정과 다르게 균열에서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건 처음 나타났을 때 한정인 모양이군.’
균열을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내가 향하는 곳은 진세영이 있던 곳이다. 여기에 온 자들은 모두 초대 받았고, 좌석을 배정받았기에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세영의 바로 앞에서 균열이 나타났군. ……들어갈까?’
진세영이 걱정 된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오히려 내가 진세영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걸지도 몰라.’
팔짱을 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균열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세이타로라는 놈은 열흘 동안 놀자고 했어. 그 말은 균열이 열흘 동안 유지된다는 건가?’
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코요리의 상황을 확인했다.
코요리는 마침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악어와 닮은 이족 보행의 몬스터였다. 크기는 2M이고 머리와 꼬리가 악어와 판박이다. 몸에는 두껍고 단단한 비늘이 있었다.
C등급 몬스터인 크로커다.
크로커는 코요리가 휘두르는 창날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찢겨 나갔다.
‘C등급 몬스터? 생각보다 안 위험할지도.’
진세영의 실력이라면 크로커 따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녀 혼자 들어간것도 아닐 것이다. 근처 좌석에는 신지오와 경비원들이 있었으니까.
신지오와 경비원들 모두 A급 헌터이니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
“…음.”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잘까. 싶었지만, 어느 한 균열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양아치와 그 여자친구가 있던 자리의 균열이었다.
‘근처에 작은 균열들이 밀집해있군.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따로따로 들어갔나?’
몸을 돌리려다가 번뜩이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기회일수도 있다!
갸루녀를 따먹을 기회!
나는 공간 균열을 피해 갸루녀의 좌석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졌다.
‘들어갔다가 죽으면 좆되는 거 아니야? 이건 함정이니 그냥 방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는 게 좋지 않을까?’
냉정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근처의 균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허억?!”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두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뛰어갔다.
“저기요! 균열 안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좀 말해주십시오!”
“어, 그, 그게….”
당황한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멀끔하게 생긴 그 남자는 일본인이었다.
“안은 던전과 비슷했습니다. 미궁형 던전입니다. 전 혼자서 이동했던 지라… 일단 움직였습니다. 오크가 나왔지만 절 막을 순 없었죠.”
남자는 말을 이어갈수록 점점 자신감을 갖추었다.
오크.
균열 속에 있는 몬스터는 크로커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다 삐에로를 만났습니다.”
“……삐에로요?”
“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니까. 그 삐에로는 스스로를 세계 헌터 협회 소속의 특수대라 했습니다.”
세계 헌터 협회.
각국의 헌터 협회의 상위기관이라 할 수 있다. 특수한 상황에 한정해서 국가를 넘어선 초월적인 권한을 가진다.
“그걸 믿었습니까?”
미궁에서 만난 삐에로가 자신은 미국 헌터 협회 소속의 특수대라고 말하면 당연히 구라라고 생각 할 것이다. 너무 수상하니까.
“안 믿기에도 뭣했거든요. 그 삐에로 영어도 잘했고, 신분증도 있었고.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아서 좀 수상하긴 했지만…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어서 그런데, 삐에로에게 왠지 신뢰가 가더군요.”
이후에도 삐에로에 대해 말했다. 삐에로는 백림을 조사하다가 이 미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바깥에 일어난 일을 말하자 삐에로의 얼굴이 굳어졌다고 한다.
“삐에로 분장은 능력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근데 어떻게 여기로 돌아오신 겁니까?”
“삐에로가 나가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회색 돌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 하얀 돌에 마나를 사용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회색 돌이지만, 사용하기 전까지는 하얀 돌이었습니다. 삐에로의 말대로라면 30시간이 지나면 다시 하얀 돌로 돌아와서 다시 미궁 탈출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반신반의했지만… 결과적으로 진짜였습니다. 이렇게 나왔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하얀 돌도 없이 어떻게 나온 겁니까?”
“전 균열 속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네?”
“어제 대련의 후유증으로 신사의 방에서 쉬고 있었거든요.”
“아.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어제 대련을 치르신 분이군요. 이거 죄송합니다. 사실 어제 얼굴을 자세히 못 봤거든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그 하얀 돌… 제게 주실 수 있습니까?”
“이건 일본 헌터 협회에 넘길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최대한 간절하면서도 긴박한 표정을 지었다.
“급하신 모양이군요.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걸 제게 주셔도 괜찮습니까?”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을 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전 성유진입니다!”
내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는 거창한 인사는 됐다며 내게 손을 건네 악수를 청했다.
“카가야 미즈치입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카가야 그룹의 후계자!”
“하하. 네. 바로 접니다.”
일본 최고의 그룹 중 하나인 카가야 그룹.
그러나 내가 그를 알고 있는 건 카가야 그룹의 후계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카가야 미즈치. 그는 전투력은 형편없지만 가진 능력 때문에 C급 헌터가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즈치가 가진 능력은 ‘양자택일’. 두 가지의 선택지 중 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지를 알려주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눈앞에 맛있는 과일이 있을 때 먹을까, 먹지 말까의 선택지가 있다. 양자택일의 능력은 먹지 말 것을 요구했다. 알고 보니 이 과일에 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미래 예지에 가까운 능력이다. 그 때문에 미즈치는 일본 헌터 협회에서 특혜를 받고 있다.
나는 미즈치의 능력을 3년 전쯤에 들었는데 처음에는 이상한 능력이라며 코웃음 쳤다. 미래 예지 종류의 능력?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근데 내가 가진 능력, 유희 생활 어플에 비하면 특이한 것도 아니지. 난 창작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미즈츠의 능력은 대단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한계가 존재하는 능력이다.
나는 균열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미즈치에게 물었다.
“……혹시 제게 그 하얀 돌을 주신 것도 그 능력 때문입니까?”
“하하. 역시 제 능력도 알고 계셨군요. 예. 맞습니다. 성유진 씨에게 ‘준다’, ‘안 준다’의 선택지 중에서 제 능력은 ‘준다’를 골랐습니다. 이 능력은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제게 도움이 되는 능력이니 따를 수밖에 없지요.”
“…음. 왠지….”
“왠지 꺼려지신다고요? 하하. 이해합니다. 저도 가끔 그러니까요.”
미즈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에 균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양아치와 갸루녀 좌석 근처에 있는 균열이다.
???
미궁 속에 들어온 나는 숨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습도와 온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 이상한 냄새가 맡아졌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화련비도를 꺼내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천장은 5M로 넓었고 벽과 벽 사이의 거리도 8M 정도는 되어 보였다. 미궁이긴 한데 제법 컸다. 또한 천장에서 은은한 빛이 흘려 나와서 횃불이나 조명이 없어도 내부가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있는 전투 흔적과 혈흔을 보았다. 피는 아직 응고하지 않았다. 나는 피를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크르르르르르르.
“저리 꺼져!”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금발 태닝 갸루, 요시카와 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척을 죽이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5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가시 호랑이와 싸우고 있는 양아치와 미사가 보였다.
양아치는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 기절한 상태고, 미사가 그 앞에 서서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가시 호랑이는 이름 그대로 머리와 몸, 꼬리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 있는 호랑이다. C등급 몬스터다.
‘갸루녀는 나보다 더 강하니 문제 없…. 아니, 잠깐만. 무기가 없잖아.’
상처를 입고 기절해 있는 양아치.
무기 없이 맨손으로 양아치를 지키려는 미사.
C등급 몬스터인 가시 호랑이.
“크크큭.”
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각이 나왔다.
나는 가시 호랑이를 향해 뛰어갔다.
“이 고슴도치 고양아! 네 상대는 나다!”
“크르릉?!”
가시 호랑이가 나를 돌아보며 시퍼런 눈을 번뜩였다.
내가 살의를 내뿜으며 내달리자, 가시 호랑이 또한 나를 향해 살의를 품으며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나보다 훨씬 빨랐다.
파지지지직!
칼날에 붉은 뇌전이 꿈틀거렸다.
놈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놈이 지면을 박차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을 때 찰나를 사용했다. 놈의 속도가 부쩍 느려졌다.
나는 놈의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찰나.’
연속으로 찰나를 사용하며 칼을 위로 들어 올려 가시가 없는 복부를 베어 갈랐다.
“크어어어엉!”
피와 내장이 쏟아지며 가시 호랑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는 놈에게 달려가 칼로 목을 쳤다.
‘내게 화련비도와 찰나가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잡지 못했겠지.’
어쨌든 내가 이겼다.
가시 호랑이의 마석을 회수하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미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얼굴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음흉한 미소가 나올 것만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