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275. 인형 놀이
275. 인형 놀이
나는 칼에 검기와 뇌전을 일으키며 거미를 향해 달려갔다.
거미는 내게 반응하지 않았다. 거미가 가진 8개의 붉은 눈은 분명 나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지간히도 얕보고 있군.’
지성이 없는 몬스터는 자연스레 본능에 따라 활동한다. 그렇기에 상대와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 비슷한지를 파악한다.
몬스터 대부분은 자신보다 강한 헌터와 마주해도 도망치지는 않지만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발광하며 달려든다.
반대로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되면 지금 흑소지주가 내게 그러는 것처럼 무시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소용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특히나 흑소지주는 다른 몬스터보다 조금 더 발달된 지성을 가지고 있다. 놈은 약자(弱者)를 먹을 뿐만이 아니라 잔혹하게 가지고 놀 줄도 안다. 흑소지주는 B급 몬스터 중에서도 질이 나쁜 놈이었다.
‘아마도 양아치 놈을 거미줄로 돌돌 감싸 포식할 준비를 끝낸 뒤에 느긋하게 나와 미사를 처리할 생각이겠지.’
거미의 무시는 짜증나지만, 동시에 반가웠다. 내가 놈을 죽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3M 거리에서 몸을 긴장시키며 스킬을 사용했다.
‘찰나.’
인식이 빨라진다. 거미가 앞발 하나를 들어올린다. 인식을 썼음에도 상당히 빠르다. B와 C급 사이에 있는 벽이 얼마나 높은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몸을 옆으로 움직여 거미의 공격을 피해냈다.
나를 다시 판단한 것일까. 거미가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휘유~ 휘유~
거미의 턱이 꼼실거리며 휘파람을 불어댄다.
거미가 4개의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머리와 가슴을 세웠다. 다른 4개의 날카로운 다리가 나를 노린다.
‘찰나!’
놈의 다리를 피하고 품안으로 파고들어 커다란 배에 칼을 쑤셔넣었다. 콰직! 단단한 거미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암녹색의 질척이고 악취 나는 피가 흘러 나왔다.
‘방전!’
파지지지지직!
전력을 다해 뇌전을 사용했다. 적뢰(赤雷)가 거미의 몸속을 휘저으며 내달렸다. 타는 냄새가 났다.
휘이이이이익!
휘파람 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나는 찰나를 사용해 칼을 뽑으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을 굴렀지만 상처를 입지 않았다.
휘이이이익!
내게 한 방을 허용한 놈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유진!”
미사가 내게 하얀 빛을 쏘았다. 나는 피하지 않고 빛을 맞았다. 빛은 내 몸과 칼에 스며들었다.
미사의 능력인 경질화 부여다. 3분 동안 신체 혹은 무기 등의 내구도를 올리는 능력이다. 추가로 생물의 신체 능력을 미약하게 상승시키거나, 칼의 날카로움을 더하는 효과도 있다.
‘체감이 확 되는 건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낫지.’
거미가 검은 거미줄을 쏘아냈다. 나는 옆으로 달리며 거미줄을 피했다. 거미줄을 보고 피하는 게 아니라 실젖이 내게 겨누어지자마자 바로 옆으로 내달린 것이다.
거미는 거의 3분 동안 실젖을 내게 겨누며 거미줄을 쏘아냈다. 의외로 고집이 있는 놈이었고, 오만한 놈이었다. 거미는 다시 양아치 놈을 거미줄로 감싸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비, 빌어먹을! 꺼져! 꺼지라고…!”
거미줄에 다리가 묶인 양아치가 꿈틀거리는 게 거슬린 모양이다.
‘방금 전의 내 공격이 통했어. 날 쫓아오지 않고 거미줄을 쏜 것도 그 때문이겠지.’
거미의 뒤쪽 다리가 경련하고 있다. 아무리 B급 몬스터라 하더라도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미사! 날 구해! 뭐라도 해서 이 거미 자식의 주의를 끄라고!”
“……!”
그러나 미사는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해만 된다… 라는 뜻은 아니다. 그녀의 도움이 있다면 당연히 편해진다.
‘미사가 다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양아치 새끼가 거미한테 뒤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거미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은밀히 다가가는 건 불가능했다.
“끄으으으윽! 미사…!”
양아치 놈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미사만 찾았다. 나를 찾지 못하는 것은 버리지 못한 자존심과 증오 때문이리라.
화르르륵!
양아치가 손에서 불길을 일으켰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걸 보니 무리해서 짜낸 불길이리라. 양아치는 거미의 머리를 향해 불길을 던졌다.
휘이이익!?
물론 겨우 저딴 공격으로 거미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순간이나마 거미의 시선을 가렸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찰나!’
휘이이익!
“끄아아아아악!”
거미가 신경질을 부렸다. 두 개의 앞다리로 양아치의 복부와 허벅지를 관통한 것이다.
‘앞다리를 그런 식으로 사양하다니! 아주 좋군…! 양아치 넌 이제야 겨우 도움이 됐구나!’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나의 가장 빠른 공격이 거미의 붉은 수정구슬 같은 눈알 4개를 베어냈다.
거미는 발작하며 8개의 다리를 휘저었다. 사각으로 이동한 나를 찾는 것이다.
‘이게 마지막 찰나다!’
찰나를 사용해 거미의 배를 짧은 순간 5번을 베었다. 그리고 결국 거미가 쓰러졌다. 하필이면 양아치가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아아아아악! 저리 치워! 빨리!”
나는 양아치와 거미의 키스를 보며 태연스레 칼을 털었다. 붉은 칼날에 묻은 암녹색 액체가 바닥에 떨어진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시끄러웠다. 거미를 발로차서 양아치의 몸위에서 치웠다. 양아치는 허벅지까지 검은 거미줄로 묶여 있었다.
‘……이거 좀 심한데?’
허벅지에 뚫린 구멍은 둘째 치고 복부에 뚫린 구멍은 상당히 심각해보였다. 당장 죽지 않고 비명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그가 신기할 지경이다.
‘잠깐. 흑소지주는 거미줄 정도는 아니지만 다리에도 독성을 가지고 있잖아. 시발. 왜 안 뒈지고 살아 있는 거냐.’
혹시 화염 능력뿐만이 아니라 끈질긴 생명력과 관련된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켄!”
미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녀는 빠르게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유진!”
미사가 급하게 나를 불렀다.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알았어. 알았어.”
주머니에서 포션병을 꺼내 미사에게 주었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독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15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해독제가 인벤토리에 있긴 한데…. 그냥 뒈져라.’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유진! 하얀 돌로 미궁을 나가야겠어요.”
“…그래. 먼저가. 나는 이놈을 챙겨야겠어.”
나는 옆에 있는 거미의 시체로 다가갔다. 흑소지주는 B급 몬스터 중에서도 비싼 놈이다. 특히 흑소지주의 실은 헌터들이 선호하는 방어구의 재료 중 하나다.
미사는 양아치를 붙잡고 하얀 돌 2개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하얀 돌에서 빛이 나더니 곧 그들을 집어 삼켰다. 그들이 사라졌다.
‘양아치는 높은 확률로 뒈지겠지.’
밖으로 나가면 후카 신사일 텐데, 신사의 상황도 개판이다. 결계가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설령 결계가 해제되었다고 하더라도 병원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다.
‘포션을 너무 썼어. 후카 신사가 가진 포션을 사용하더라도……. 저건 수술이 아니면 못 살아.’
포션도 혁명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지만, 완벽한 물건은 아니다. 포션에도 한계가 있다. 질이 낮은 포션 일수록 그 한계가 빨리 찾아온다.
‘이렇게 기도한다. 뒈져라, 양아치. 네 여자친구는 걱정 마. 내 좆집으로서 아껴줄 테니까.’
나는 흑소지주를 해체하고 생수로 몸을 씻었다. 박살난 분수대의 물로 몸을 씻기에는 찝찝했다.
‘미궁 밖의 상황도 썩 좋을 것 같진 않은데…. 여기서 좀 쉬다 가야겠다.’
나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의 인벤토리에서 인형을 꺼냈다. 나는 최근에 시간이 날 때 마다 코요리를 귀여워해주고 있었다.
지금 상태의 인형은 알몸이었고, 시체처럼 창백했다. 연결이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선 코요리와 똑같이 생긴 인형에 불과했다.
[연결을 시도합니다.]
[현재 대상과 연결된 상태입니다.]
[대상 동화율: 최상]
[인형 동화율: 최상]
[자세 동화율: 최상]
[음성: ON]
인형이 온기를 가지고, 나체에 옷이 생겨났다. 그리고 인형은 바닥에 엎어졌다,
“어…? 이, 이런 미친…!”
손에 쥔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 할 정도로 당황했다.
코요리와 연결된 인형은 그 상태가 처참했다.
양팔이 잘렸다. 날카로운 검에 팔뚝이 잘린 것이다. 절단면을 통해 인간의 근육, 뼈, 살같은게 보였다.
양다리도 멀쩡하지 않았다. 왼쪽 다리는 발목이 잘렸고, 오른쪽 다리는 무릎 박살나 종아리가 ㄴ자로 꺾여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등허리는 칼에 베인 상처가 있었다. 이게 가장 심각했다. 내장이 살짝 삐져나왔을 정도니까.
나는 인형의 맥을 짚었다.
코요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기뻐할 수 없다. 간신히 목숨만 살아 있으니까. 뜨고 있는 두 눈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젠장!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코요리의 화면을 띄웠다. 현재 코요리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코우가 미오는 2명이 되어 일본도를 손에 쥔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과연 코우가 일족 최고의 천재 쿠노이치 답군. 한 쪽 팔만으로는 상대하기 힘들군.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일본어다. 화면은 코요리를 중심으로 보여주기에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가 기모노를 입고 정상인 상태가 아닌 건 알겠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놈은 ‘백림(白林)’ 소속의 범죄자 일 확률이 높다.
‘젠장!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상자를 꺼냈다. 아주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상자다. 내가 상자 안에서 꺼낸 건 붉은 와인처럼 생긴 작은 병이다. 병의 크기는 요구르트의 절반 정도다.
[엘릭서
모든 상처를 회복하고, 모든 상태이상에서 회복됩니다. 선천적인 장애와 질병 역시 모두 회복됩니다.
가격: 15,000 포인트
※주의
병에 담긴 엘릭서가 정량입니다. 정량을 한 번에 복용해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합니다.]
‘아직 따먹지도 못했는데 죽게 내버려둘 순 없어!’
엘릭서는 과거 랜덤 뽑기를 했을 때 얻은 물건이다. 젊음의 샘물과 인연레벨상승권도 함께 얻었었다. 행운이 역대급으로 대박 터진 날이었다.
‘……큭.’
잠깐 망설여졌다. 하지만 잠시 일 뿐이었다.
‘아직 코요리의 처녀를 따지 못했어! 또 미오도 서서히 공략되고 있었는데… 미녀 두 명을 이렇게 어이없게 잃을 수는 없어! 거기다 내가 지옥같은 세계에서 온갖 고생을 해가며 얻은 섹스돌을 만족할 만큼 사용하지도 못했어!’
엘릭서의 병을 인형의 입에 가져다댔다.
[대상 동화율: 최상]
대상 동화율은 인형이 대상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내가 인형을 때리면, 그 고통을 코요리가 받는다. 또한 내가 인형의 입안에 사정하면, 코요리의 입안에는 정액이 생긴다.
‘즉, 인형이 임신하면 코요리가 임신한다! 다시 말해 인형이 엘릭서를 먹으면 코요리도 먹는 거라는 거지!’
이건 확신할 수 있다.
저번에 코요리에게 연속으로 펠라치오를 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 코요리는 내 정액을 5번이나 먹었고, 한 동안 배가 볼록 튀어나왔다. 정액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었다.
다만 불안 요소는 정액 말고는 코요리에게 먹인 게 없다는 점이다. 최악의 경우 엘릭서만 버리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정액이나 포션이나 엘릭서나 다 똑같아!’
그녀가 죽어가고 있었기에 쓸데없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인형의 입에 엘릭서를 흘려 넣었다.
???
“…….”
코요리는 우울했다. 겉모습은 평소와 같았으나 말수가 평소에 비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녀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희롱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다. 그 정체가 저주인지, 투명인간인지, 귀신인지 하루가 지난 지금도 전혀 판단되지 않았다.
“읏….”
잘 걸어가던 코요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창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붉은 치마를 눌렀다. 치마가 계속 뒤집어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코요리 님…! 설마 또 ‘무언가’ 인가요?!”
“…네.”
“……떨어져 있을게요.”
“의미 없는 거 아시잖습니까. ‘무언가’는 미오 님이 절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게 수치심을 주려는 목적이겠죠.”
몇 시간 전에 있었던 희롱이 또 다시 일어날 것이다.
“미오 님. 협력…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절 보지 않으면 ‘무언가’는 제 순결을 가져갈 것입니다.”
“……알겠어요.”
코요리는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표정을 되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