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305. 신의 아틀란티스
305. 신의 아틀란티스
「당신은 고문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고문 대상…? 그게 뭐지?’
그 의문은 곧바로 풀어졌다.
욕조 근처에 있는 고문 기구들이 저절로 움직여 나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고문 기구는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쇠사슬이었다. 낚시 바늘 같은 날카로운 갈고리가 나를 향해 쇄도한다.
영천류(影天流) 살음(殺音).
내가 휘두른 칼에 두 개의 갈고리가 소리 없이 베어졌다.
‘고문 도구들이 움직이는 건 에르제베트의 능력 때문이겠지. 에르제베트를 제압하면 고문 도구들도 안 움직일 거야.’
에르제베트를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 단지 전투가 힘들다고 그녀를 죽여 버리면 나는 땅을 치며 후회할게 틀림없다.
나는 바닥을 쓸면서 날아오는 거대한 낫을 점프해 피하고, 칼을 휘둘러 날아오는 망치, 집게, 인장, 송곳 등을 쳐내며 에르제베트에게 다가갔다.
기이이이잉.
잘 보이지 않는 가는 강철 와이어를 칼로 휘감아 옆으로 내던졌다. 이어서 날아온 고문 의자를 상체를 바닥까지 숙여 피해냈다.
“호오. 마치 서커스 하는 원숭이 같구나. 재밌어. 아주 재밌어.”
“앞으로 더 재밌어 질 거야.”
나는 그녀를 향해 칼을 뻗었다. 온전하게 제압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니 마음에 들진 않지만 최소한 팔 하나는 베어야겠다.
에르제베트가 내게 부채를 활짝 펼쳐 내던졌다. 부채 끝에 날카롭고 동그란 칼날이 튀어나왔다.
‘이것도 무기 였나!’
칼을 옆으로 세워 부채를 튕겨냈다. 그리고 동시에 에르제베트를 향해 왼손을 뻗는다.
‘그 목을 잡아서 기절 시키고… 윽!’
뿌득.
옆에서 날아온 망치가 팔목을 때렸다.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한순간 집중력을 잃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고통이 덮쳐 왔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의 고통일 리가 없어. 고통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에르제베트의 능력 인가…!’
나는 이어서 날아오는 고문 도구들을 칼로 쳐내며 에르제베트를 향해 다이브 했다.
“이렇게 열렬히 내게 구애하다니…. 대상이 원숭이만 아니었다면 한 번 어울려줬을지도 모르겠구나.”
에르제베트가 요염하게 웃었다. 악녀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한국 막장 드라마의 악역을 하면 잘 어울리겠군.’
내가 에르제베트의 몸을 끌어안으려는 순간이었다. 욕조에 담겨 있던 피가 솟구쳐 오르더니 에르제베트의 몸을 감싸며 검붉은 강철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옆으로 피하려고 했으나, 에르제베트가 내 팔목을 잡았다. 급한 대로 뇌전을 일으켰지만 에르제베트는 안색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나를 그렇게 안고 싶다면… 좋다. 네 품에 한 번 안겨주마. 대신 그 대가로 피를 내놓거라.”
에르제베트를 감싸고 있던 강철 덩어리가 활짝 벌어졌다. 그 안에 있는 건 길고 날카로운 가시들이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고문 기구, 아이언 메이든이다.
아이언 메이든 속의 에르제베트가 한 손으로는 내 팔목,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잡고 나를 강철 속으로 끌어당긴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강철관으로 들어가면 끝난다는 걸 말이다.
“미안하지만 그런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나는 전력을 다해 뇌전을 일으켰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수 십 개의 번개 줄기가 에르제베트에 흘려들어갔다.
“으으윽!”
에르제베트의 손아귀에 힘이 풀린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단 거리를 벌렸다.
‘아이언 메이든 때문에 접근 자체가 힘들어. 접근하려고 하면 아이언 메이든으로 날 죽이려고 하겠지.’
카앙! 캉!
원거리에선 고문 도두가 날아온다.
에르제베트를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롭다.
‘…기절 시키는 건 포기하자.’
방법은 있었다. 에르제베트에게 다가가지 않고 원거리로 공격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번개를 쏜다든가. 하지만 그래서는 힘 조절이 힘들다. 에르제베트를 죽여 버릴 가능성이 큰 것이다.
‘내 애를 낳아야 하는데 죽일 수는 없지. 그러니 죽이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지지자.’
정확한 힘 조절이 불가능하다면 약하게 공격하면 된다. 일단 번개처럼 살상력이 높은 기술은 봉인이다.
나는 우선 거추장스러운 것들, 에르제베트의 부하 흡혈귀들부터 죽이기로 했다. 내 빈틈을 노리는 흡혈귀년들은 고문 도구처럼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기에 굉장히 거슬렀다.
파지지지직!
뇌전과 칼로 흡혈귀들을 하나, 하나 죽여 나갔다.
도중에 에르제베트가 방해 했으나, 아이언 메이든 때문인지 기동성이 무척이나 낮았다. 고작해야 고문 도구를 날리는 게 전부였기에 흡혈귀들을 차근차근 줄여 나갔다.
그렇게 3분이 지났을 때. 흡혈귀들은 나와 유서희, 주서현의 손에 전멸했다.
내가 유서희와 주서현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떨어져서 쉬고 있어. 저 여자는 내 상대니까.”
“유진 씨를 돕고 싶지만… 정기를 전부 써버리는 바람에 짐밖에 되지 않겠죠. 뒤에서 응원할게요.”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어차피 저 여자를 범하는게 목적이겠지.”
주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나 검을 거두는 것을 보면 끼어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참에 내 실력을 파악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흐음. 계집들 앞에서 허세라도 부리고 싶은 것이냐. 하여간 남자들이란….”
“허세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보다 부하가 전부 죽었는데도 여유로워 보이네.”
“이것들 말이더냐?”
에르제베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죽어 있는 여자 흡혈귀의 시체를 길거리에 있는 잡초처럼 쳐다본다.
“하인이나 다름없는 것들이다. 없으면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
파지지직.
나는 손에 뇌전을 일으켜 기습적으로 에르제베트를 향해 던졌다.
철컹!
아이언 메이든의 한쪽 문이 닫히더니 뇌전을 막았다. 뇌전은 아이언 메이든을 타고 흐르지 못했다. 평범한 강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피였던 아이언 메이든에는 막대한 마나가 깃들어 있다.
“아…. 갈증이 나는구나.”
에르제베트가 유서희와 주서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다리를 굽히며 옆으로 움직였다. 목적은 에르제베트가 아니라 고문 도구들이다.
‘아까 잘라낸 갈고리 사슬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어. 고문 도구들은 박살나면 움직이지 못하는 거야.’
나는 고문 의자에 칼을 박았다. 검기를 일으키며 집중해서 칼을 자르자 철로 된 고문의자가 잘렸다.
에르제베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하가 죽어나가는 걸 보면서도 반응하나 없었던 주제에…. 크큭. 이게 정답이었나.’
나는 이어서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가시 채찍을 칼로 베었다.
“내 아기들에게 무슨 짓이냐!”
에르제베트가 고함쳤다.
철컹!
아이언 메이든이 활짝 열리더니 나를 향해 수 십 개의 날카로운 강철 가시를 날렸다.
‘뇌전 그물!’
시퍼런 번개로 엮어 만든 그물을 앞에 만들어냈다. 강철 가시는 뇌전 그물을 찢지 못하고 하나로 뭉쳐졌다. 자기력을 이용한 것이다.
‘미세한 컨트롤이 필요한 거라 자유자재로 쓰는 건 힘들지만, 이 정도는 가능하지.’
툭.
강철 가시 뭉치가 아래로 떨어지더니 피로 변했다.
“이이익!”
에르제베트가 표독스런 표정으로 다시 내게 가시를 날려 보냈다. 나는 다시 한 번 뇌전 그물을 펼쳐 강철 가시를 무력화 시켰다.
‘피로 변했는데 사용하지 않는 다라…. 생각을 못하는 건 아니고 사정거리의 한계인가. 피를 조종할 수 있는 거리는 대충 6~7M 정도로 보면 되겠어.’
나는 에르제베트의 사정거리를 유념하면서 그녀의 고문 기구들을 파괴했다. 3분의 1을 파괴했을 때, 에르제베트의 힘의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내 짐작대로 그녀는 고문 기구가 사라질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이, 이놈이! 감히 내 아가들을!”
분개한 에르제베트가 고상함을 버리고 나를 향해 살의와 증오를 내비쳤다. 그녀는 스스로 입고 있던 아이언 메이든을 다시 피로 바꿨다. 피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에르제베트 주위에 머물렀다.
에르제베트가 나를 향해 뛰어온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도망치는 고문 기구들을 쫓아 일일이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둬라!”
에르제베트가 나를 뒤쫓지만 따라 잡지 못한다. 그녀의 신체 능력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쫘아아악!
피로 만든 채찍을 내게 휘두른다. 하지만 나는 손쉽게 피해냈다. 그녀의 공격은 너무 직선적이다. 대놓고 보고 있는데 피하지 못할 리가 없다.
‘전투 경험이 없다는 게 너무 잘 보이네. 하긴,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권력을 쥔 귀족이었으니 스스로 싸울 일은 없었겠지.’
이곳에 있는 모든 고문 기구들을 파괴했다.
「고문 대상이 해제되었습니다.」
“…….”
에르제베트는 조용히. 분노에 찬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히죽 웃으며 허리를 한 번 튕겼다. 내 사타구니는 당연히 볼록 부풀어 있었다.
“이…! 같잖은!”
에르제베트가 나를 향해 피를 갈고리 사슬로 바꿔 날렸다. 총 8개의 갈고리 사슬의 방향은 제각각 달랐다. 에르제베트는 내가 피할 것을 예측하며 갈고리 사슬을 날린 것이다.
‘그럼 그 예측의 반대로 행동해줘야지.’
나는 그녀를 향해 뛰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갈고리 사슬을 칼로 비껴쳐냈다.
“……!”
깜짝 놀란 에르제베트가 주춤거리며 갈고리 사슬을 피로 바꾼다. 피를 다시 회수할 생각인 것이다.
‘힘이 약해져서 그런지 아까 같은 속도가 없군. 내가 더 빨라.’
영천류(影天流) 뇌음보(雷音步).
천둥소리와 함께 피웅덩이 위에 서있는 에르제베트의 앞에 도착했다.
“당장 피를…! 윽?!”
나는 그녀의 목을 손으로 붙잡아 뒤로 내던졌다. 그리고 화련비도를 피웅덩이에 박는다.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내 칼을 중심으로 붉은 번개가 사납게 일어났다. 수 백 개의 번개 줄기가 에르제베트에 닿지 않도록 제어하며 출력을 높인다.
‘고문 도구랑 피가 없다면 에르제베트는 아무것도 못하겠지.’
뇌전으로 혈액을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뇌전을 한계까지 사용했기에 머리가 좀 어지럽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다.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에르제베트를 향해 걸어가며 바지를 벗었다. 그녀 주위에 있는 피는 1L도 되지 않는 양이다.
“이… 야만인이! 오지마라!”
그녀는 1L도 되지 않는 피로 나이프를 만들어 손에 쥐었다. 칼날이 10cm도 되지 않는 조잡한 나이프다.
나는 거시기를 껄떡 거리며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찌이이이익!
화려한 검은 드레스를 찢어내자 백옥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에르제베트가 이를 악물며 내게 나이프를 휘둘렀다. 정확하게 목을 노리고 있다.
‘신체 능력은 이제 막 아틀란티스에 도착한 추방자 수준이네.’
손목을 잡아 나이프를 빼앗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에르제베트의 다리를 움켜쥐고 쩍 벌렸다.
“아아아악! 놔라! 이 야만인아! 그 더러운 손으로 내 몸을 만지지 마라!”
“뭐래. 미친년이.”
에르제베트의 발버둥은 꽤 심했다. 손톱을 길쭉하게 만들어 나를 향해 휘두르거나, 고개를 내밀어 내 목을 물려고 시도했다. 나는 딱딱 거리는 이빨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서희. 이 년 손 좀 잡아.”
“네에~.”
유서희가 사뿐 걸으며 다가와 에르제베트의 양팔을 잡아 당겼다. 에르제베트의 팔이 머리 위로 올라가며 새하얀 겨드랑이가 공개 되었다.
겨드랑이에서 풍만한 가슴으로 이어지는 매끈한 피부. 가슴이 작은 여자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아찔한 광경.
‘이년은 다른 건 몰라도 몸매 하나 만큼은 뛰어나는 군.’
나는 자꾸만 벗어나려는 발목을 꽉 쥐어 바닥에 고정 시켰다.
“주서현. 너도 이리 와서 도와줘.”
“닥쳐. 내가 널 도울 것 같아?!”
“이년, 에르제베트가 저지른 만행을 잊은 건 아니겠지? 이년은 죽어도 싼 년이라고.”
“…하필이면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냐. 차라리 저 여자를 빨리 죽이고 강명진을 도우러 가는 게 나아!”
강명진을 도우러간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강명진이라면 알아서 할 것이다.
“허 참…. 말 안 듣네. 지금 내 말을 안 들으면 나중에 24시간 내내 범할 거다. 그리고 너, 저번에 나한테 졌잖아. 내 명령을 듣는 게 규칙이 아니었나?”
“큭….”
주서현은 입술을 깨물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계약이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미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다면,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어느 정도 꺾을 수 있다.
주서현이 에르제베트의 다리를 잡았다.
“아아아아악! 이 야만인들이!!!”
「피의 백작 부인이 분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