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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 - 34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122/2,000)

〈 342화 〉 34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342.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옷을 가리켰다. 우리가 원래 입고 있던 화려하고 좋은 옷들이 아니었다. 농민들이 입을 법한 낡고 추레한 옷이었다.

“…어쩔 수 없지. 저거라도 입을 수밖에.”

“혼자서 입을 수 있겠어요? 도와드릴까요?”

“날 너무 무시하는구나. 옷 정도는 혼자서 입을 수 있다.”

엘라인에게 여자 옷으로 보이는 걸 건네주고, 나 또한 옷을 입었다. 입어야 하는 옷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니, 몸에 걸쳐야 하는 천이 많다고 해야 하나.

우선 속옷을 입고 얇은 옷을 입은 뒤 두꺼운 옷을 입는다. 가죽을 기어 만든 듯한 외투를 걸치고 습하고 축축해진 불쾌한 감촉의 신발을 신는다.

빠르게 옷을 전부 입은 나는 엘라인을 쳐다봤다. 그녀는 속옷 다음 단계에서 헤메고 있었다. 귀족의 딸로서 태어나, 항상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었던 그녀는 농민의 옷을 입을 줄 몰랐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머니.”

“……고맙구나.”

“자. 이제 끈을 조이기만 하면 됩니다.”

“너도 농민의 옷은 처음이 아니었느냐? 농민의 옷을 입는 방법을 잘 알고 있군.”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에 호기심이 많았지 않습니까. 예전에 농민에 옷에 대해서 알아봤죠.”

나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내가 농민들의 옷입는 방법을 아는 건 몇 번 직접 벗겨 봤기 때문이다. 농민들 중에 씻겨 놓으면 내 기준에 부합하는 미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벗기는 것의 반대로 하면 입히는 거니까 말이지.’

남자의 옷같은 경우는 다 거기서 거기다.

“어머니.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법사인 어머니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저희는 납치 된 걸까요? 아니면….”

“납치의 가능성은 별로 없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면 우리를 이렇게 자유롭게 뒀을 리가 없다. 유진.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느냐?”

나는 마나를 한 번 사용하려고 했다. 허나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뇨. 마나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나가 사라진 것 같은데….”

“나도 그렇다. 차분히 생각해보자구나. 우리는 마을을 산책하는 도중에 몬스터로 보이는 검은 기운을 내뿜는 거대 멧돼지에게 습격당했지.”

“네. 처음 보는 몬스터였습니다. 그리고 괴물 멧돼지의 몸에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기사 셋이 오러를 사용했지만 막지 못하고 오히려 날아갔습니다.”

“내 마법도 멧돼지를 막지 못했다. 마을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다. 그 괴물이 왜 상처 입었는지는 둘째 치고…. 괴물은 우리에게 달려드는 도중에 다리가 걸려 크게 고꾸라졌다.”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설마하니 그런 거대한 괴물이 하늘 높이 올라갈 줄이야.”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멧돼지는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죠. 그리고 멧돼지의 머리에는 나무 인형이 있었습니다. 자세히는 못 봤지만 농부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무 인형이 부서지면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 도중에 제가 어머니를 끌어안아 피하려고 했지요.”

“나무 인형은 아마 고대 유물이겠구나. 그게 마법이었다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으니….”

“그런데 멧돼지는 왜 고대 유물을 머리에 박고 있었을까요?”

“가설은 두 가지다. 하나는 멧돼지가 다른 몬스터와 싸우다가 우연히 고대 유물이 머리에 박히게 되었거나, 누군가가 고대 유물을 멧돼지의 머리에 박아 넣었거나.”

엘라인은 나무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창문 밖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리 앞에는 본적도 없는 농장이 있었고, 저 멀리 돌로 쌓은 작은 도시가 보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렌치르 마을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후자다. 누군가는 멧돼지에게 상처를 입히고 우리를 노리게 만들었다. 그 가능성이 가장 높아.”

“그럼 그 범인은…?”

“…모르겠구나. 우리 가문과 척을 진 귀족들은 제법 있다만, 그들 중에 이토록 대범하게 일을 벌일 자는 없다. 그리고 괴물 멧돼지를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차라리 직접 움직여 우리를 죽이는 편이 더 확실할 텐데….”

“후. 그나저나 여긴 어디일까요. 에렌치르 마을의 근처이면 좋겠지만….”

“우리를 삼킨 것이 고대 유물의 힘이라면…. 우리는 대륙 반대편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던전처럼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고생하는 건 확정적이겠군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쾅쾅 밖에서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이봐! 톨드! 해가 뜬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자고 있는 거야?! 오늘은 감자 수확을 도와주기로 했잖아!”

나와 엘라인이 서로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천을 씌웠다. 그녀의 미모 때문에 괜한 트러블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갈 테니 기다려!”

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일단은 상황부터 파악해야 했다.

‘뭐, 전부 다 내가 계획한 거지만.’

???

나무로 만든 농부 인형.

그건 엘라인의 말대로 고대 유물이 맞았다. 원작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효과는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다.

농부 인형은 1회용으로 가상의 세계로 사람을 초대한다. 이 가상 세계에서 죽거나, 상처를 입어도 원래 세계에 돌아가면 멀쩡해진다.

‘원작에서 나온 농부 인형의 설명을 보면…. 과거 어떤 귀족이 평민과 농민을 업신여기는 제 자식들을 혼내 주며 교휸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물건이지.’

간략히 말하자면 대충 열흘간의 농민 체험이다. 여기선 열흘이지만 바깥 세계는 3시간 정도 밖에 흐르지 않는다.

‘그냥 열흘만 버티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엘라인은 그걸 몰라.’

멧돼지의 경우 유리아의 힘이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마법을 이용해 멧돼지를 조종한 것이다. 그녀는 아크메이지이기도 했으니까.

이 세계에서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건 착실히 농민 생활을 하라는 고대 유물 제작자의 의도 때문이다.

참고로 나와 엘라인은 가난한 농민 부부라는 설정이었다. 이 세계의 내 이름은 톨드였고, 엘라인의 이름은 티엘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집으로 찾아온 옆집의 농부, 판레스에게 이끌려 밭일을 하러 나갔다. 나야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지만, 일단 상황에 따라가자는 엘라인의 의견에 따라 밭일을 하게 되었다.

“톨드. 네 아내는 왜 저렇게 일을 못하는 거야?!”

판레스는 짜증을 부리며 엘라인을 노려봤다.

우리들은 밭에 쪼그려 앉아서 밭을 파헤치며 감자를 수확하고 있었다. 나는 감자를 캐는 건 처음이었지만, 마나를 뺀 신체 능력은 현실의 것과 그대로였기에 전혀 힘들지 않았다.

반면 마법사였던 엘라인은 마나가 없으니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그녀는 밭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주 귀하게 자랐거든.”

“귀하게 자라? 어렸을 때부터 이 마을에서 같이 자랐는데 무슨 헛소리야.”

“농담이고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어젯밤에 내가 재우지 않았거든.”

그리 말하며 음흉하게 웃자 판레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판레스는 아직 총각이었다.

“하, 하긴 티엘 정도의 미녀가 아내라면 나라도….”

판레스의 눈에도 엘라인이 미녀로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봤는데 미녀라 생각하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원작의 주인공은 농부 일이 신기하다며 재밌어 했지만…. 이게 뭐가 재밌는 건지. 나 원….’

나는 밭일을 하면서 슬쩍슬쩍 엘라인을 살폈다. 그녀는 밭일에 지쳐 한숨을 내쉬었다.

???

오후.

우리는 밭에서 수확한 감자를 들고 작은 도시에 들어갔다. 사람은 감자만 먹고 살수만 없으니 감자를 팔아야했기 때문이다.

“감자 사세요! 감자! 방금 막 캐온 감자라 신선합니다!”

판레스는 시장에서 고함쳤다. 그는 감자를 비싼 값에 팔고 싶어 했다. 엘라인은 우리를 돕는 척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후에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판레스에게서 제몫을 받았다.

“톨드. 주점에 가서 한 잔 하자.”

“아, 미안. 다음에 하자. 아내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쩝…. 어쩔 수 없지. 내일도 날 도와주기로 한 거 잊지 마.”

나는 엘라인과 함께 허름한 농가로 돌아갔다.

도중에 엘라인이 몸을 비틀거렸다. 생전 처음 하는 힘든 노동 때문에 많이 지친 걸로 보였다. 나는 엘라인을 공주님 안듯 안아 들었다.

“무, 무슨 짓이냐?!”

“힘들어하시는 것 같으니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나는 걸을 수 있다. 어서 내려놓거라.”

“싫은데요.”

“뭣….”

엘라인이 내 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허나 내가 힘을 주어 놓지 않으려고 하자 곧 포기했다. 그녀의 힘으로는 날 뿌리칠 수 없었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예. 제 마음대로 할게요.

엘라인의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은 기분 탓이 아니리라.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감자를 삶아먹고 현재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여긴 우리가 있던 곳과 전혀 다른 세계다. 상인에게 날짜나, 국가에 대해 물어봤는데 생소한 날짜와 국가를 말하더구나.”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글쎄.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추측하기도 힘들구나. 최악의 경우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

분위기가 우울해졌다.

엘라인은 자신의 양손을 펼쳐 살펴봤다. 희고 가는 예쁜 손에는 오늘 낮에 했던 밭일 때문에 상처가 생겨 있었다.

“어머니. 피곤해보이십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잠들도록 하죠. 제가 밖에서 잘게요.”

“…밖에 잘 곳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같이 자자꾸나. 어차피 너와 난 모자사이가 아니느냐.”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나와 엘라인은 얇은 옷만 입은 채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창문 밖에서 들리는 벌레소리에도 불구하고 엘라인은 금세 잠에 들었다. 처음 하는 육체 노동에 엄청나게 피곤했던 모양이다.

나는 엘라인이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조심히 엘라인을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몇 시간 후.

엘라인은 내 품에 안긴 상태에서 눈을 떴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내 오른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고, 사타구니는 발기한 상태였기에 잔소리를 듣는 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

엘라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내 오른손을 치우고 나를 깨웠다.

“아침이다. 일어나거라.”

???

둘째 날은 첫째 날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번엔 일을 끝내고 엘라인과 함께 도시를 둘러보았다. 어떤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단서는 없었다.

셋째 날. 오전에는 밭일을 했지만 오후에는 광장에 갔다. 광장에서 농민 일가족이 처형되었다. 죄목은 귀족모욕죄. 근처에 있는 평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귀족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엘라인은 말은 안하지만 우울해보였다. 어쩌면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강철같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나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 그건 지독한 악몽이다.

넷째 날. 휴일이었다. 나와 엘라인은 집안에서 멀뚱히 쳐다봤다. 우리는 농민들이 어떻게 휴일을 보내는지 몰랐다. 그래서 서로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할 것이라고는 수다 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가 부쩍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서로 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다섯째 날. 오전에 고리대금업자가 찾아와 돈을 갚으라며 윽박질렀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는 게 도리 아니냐?! 어?! 340 넬피! 당장 갚아! 갚으라고!”

“한 달 전에 빌린 100 넬피가 340 넬피가 되었다고?! 지금 장난 하는 거냐?!”

“이 계약서를 잘 봐라! 톨드! 네가 손도장을 찍은 계약서다! 당장 돈 갚아! 돈이 없으면 네 아내라도 팔던가!”

“이 새끼가!”

나는 고리대금업자 일행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웠고, 침대에 앓아누웠다. 엘라인이 나를 걱정해주며 간호해주었다.

물론 앓아눕는 건 연기였다. 내가 그딴 놈들한테 당할 리가 없다.

“뒷일은 어쩌려고 그렇게 싸웠느냐.”

“어머니. 그놈들이 먼저 선을 넘었어요. 어머니를 팔라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참습니까.”

“고맙다. 네가 함께라서 다행이구나. 나 혼자였다면…….”

“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니와 같이 있어서 이렇게 버틸 수 있어요.”

엘라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듯 엘라인의 품안에 파고들었다. 엘라인은 날 밀쳐내지 않았다.

여섯째 날. 농민의 삶에 익숙해지지 않은 몸을 일으켜 밭일을 한다. 쇠스랑을 밭에 휘두르면서 농사고 나발이고 도적질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라인과 가까워졌지만 아직 나를 남자라기보다는 아들로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이 정도면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

오후가 되어서였다.

어제 나한테 맞은 고리대금업자가 귀족을 데리고 찾아왔다.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못생긴 귀족 놈은 고개를 치켜들고 으스대며 내게 물었다.

“티엘이라는 여자는 어디에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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