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화 〉 343.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343.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오후가 되어서였다.
어제 나한테 맞은 고리대금업자가 귀족을 데리고 찾아왔다.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못생긴 귀족 놈은 고개를 치켜들고 으스대며 내게 물었다.
“티엘이라는 여자는 어디에 있느냐?”
나는 귀족의 등장을 알고 있었다.
이 가상 세계는 귀족에게 농민의 삶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단순히 밭을 갈면서 평화롭게 시간을 보낼 뿐이라면 일종의 휴식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귀족이 등장해 패악질을 부리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내가 돈을 빌리지도 않았는데 고리 대금업자가 찾아오기도 했고 말이다.
“…티엘은 제 아내입니다, 나리.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바닥에 부복하며 말했다. 귀족의 옆에 있는 고리대금업자가 날 보며 히죽 웃는다.
“오호.”
귀족이 날 내려다봤다. 짜증이 났지만 내 계획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참아야 한다.
그리고 귀족의 주위에는 10명의 병사들이 창과 검을 무장해 귀족을 호위하고 있다.
“티엘이라는 여자가 미색이 그렇게나 뛰어나다고 들었다.”
누구한테? 그거야 뻔하다. 옆에 있는 고리대금업자 놈들 일 것이다.
“제 아내인 티엘은 농민입니다. 농민이 어떻게 미색이 뛰어나겠습니까. 어디에서 들은 말씀이신지 모르겠으나…. 모두 과장이고 헛소문입니다!”
“헛소문인지 아닌지는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일이다. 만약. 정말 미색이 내 마음에 쏙 들 정도로 뛰어나다면 내 첩으로 삼을 것이다. 너는 지금 당장 티엘을 내 앞에 데려오너라. 명령이다.”
물론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귀족의 권위에 쫄아서 아내를 판다? 다른 농민이라면 몰라도 나는 내 여자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생각이 전혀 없다.
“나리!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발! 제 아내는 건들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뒤쪽의 내 집을 본다. 허름한 집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마도 엘라인이 숨어서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있을 것이다.
‘대귀족의 혈통인 내가 엘라인을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엘라인은 분노와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다. 그녀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내 계획의 성공률은 올라간다.
“농부 주제에 말이 많구나. 내 명령이 들리지 않느냐? 가서 네 아내를 내 앞으로 데려오너라.”
“나리! 제발! 자비를!”
“무식한 농부놈!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것이냐!”
퍼억!
귀족이 발길질을 날렸다.
솜방망이 수준이었지만,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뒤로 날아가 엎어졌다. 그리고 다시 귀족의 앞에 부복한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돈이 문제라면 어떻게 해서든 갚을 테니…!”
“이 천한 놈이 아직도!”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에 분노한 귀족이 나를 폭행했다. 나는 급소에 맞지 않도록 교묘하게 피했다.
“허억. 헉. 마, 마지막 기회다. 당장 티엘을 데려와라!”
“나리! 제발 자비를 내려주십시오!”
“…이 빌어먹을 농부 놈이. 봐주는 것도 끝이다! 네놈은 나의 영지에 살아가는 주제에 내 명령에 불복하며 나의 권위를 모욕하였다. 네놈은 그 죄값을 똑똑히 치러야 할 것이다.”
병사 2명이 내 양쪽 어깨와 팔을 붙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귀족은 내 얼굴을 씹어뱉듯이 노려보더니 고개를 획 돌리고는 구경하고 있던 농부 중 한 명, 판레스를 가리켰다.
“거기 너! 이리로 와 보거라!”
“네, 네!”
깜짝 놀란 판레스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바닥에 부복했다.
“보아하니 여기에 살고 있는 농부 같은데, 티엘이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당장 내 앞에 티엘을 데려오너라. 명령이다.”
판레스가 눈동자는 데굴데굴 굴렸다. 판레스에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함께 자란 친구다. 반면 귀족은 권력을 가졌지만 판레스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초면이다.
“설마 네놈도 내 명령을 불복하려는 것이냐.”
병사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판레스는 깜짝 놀라더니 외쳤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티엘을 데려오겠습니다!”
배신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난 판레스를 믿고 있지 않았으니 배신은 아닌가.
나는 지난 시간 동안 판레스가 내게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농사일을 잘했고, 티엘이라는 예쁜 아내도 가졌기 때문이다.
판레스는 내 집으로 향하려다가 멈칫했다. 티엘이라 불리는 엘라인이 당당하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고 있는 옷은 허름한 농민의 것이지만, 걸어오는 자세와 분위기는 대귀족의 것이었다.
“호타인 갈갈마르 님. 제가 티엘입니다.”
“오, 오오. 정말 농민이 맞느냐? 그 미색과 품위는 내 아내 못지않구나!”
엘라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귀족이 흥분했다.
“어머니…!”
엘라인은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똑바로 귀족을 쳐다봤다.
“호타인 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첩이 되길 원한다면 첩이 될 테니…. 제 남편인 톨드 만큼은 살려주십시오.”
“……원래는 이놈을 당장 처형하고 그 머리를 광장에 내걸고 싶었다만…. 네가 내 뜻을 군말 없이 따른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좀 더 앞으로 오너라.”
“네.”
엘라인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두 눈에 체념과 포기의 빛이 서렸다.
“오, 오오….”
귀족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엘라인을 향해 손을 내뻗는다.
내 인내심은 끝났다.
양팔을 구속하고 있는 병사들을 힘으로 밀쳐내 떨어뜨린다. 그에 몸의 균형을 잃은 병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내어 손에 쥐었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악!”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병사 두 명의 옆구리와 어깨를 베어내고 귀족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귀족은 뒷걸음질 치며 본능적으로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막아라!”
“호타인 님을 지켜라!”
병사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허나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마나를 사용하지 못할 뿐이지 신체 능력은 바깥 세계의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검술인 영천류와 지금껏 쌓아온 전투 경험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병사들의 공격은 가뿐하게 피해내 지나치며 그들의 목을 긋는다.
병사 몇몇은 내 실력에 놀라 저 멀리 달아났고, 내 목표인 호타인은 뒷걸음질 치다가 바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고?”
마음 같아서는 팔다리부터 시작해 천천히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놀란 엘라인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피투성이의 검을 치켜들었다.
“사, 살려다오! 내가 잘 못… 컥!”
귀족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귀족은 몸을 떨다가 축 늘어졌다. 확실하게 죽었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판레스와 두 눈이 마주쳤다.
“판레스. 네가 날 배신할 줄 몰랐다.”
“토, 톨드! 아니야! 내 말을 들어봐!”
나는 귀족의 심장에 박았던 검을 뽑아들었다.
“히이익!”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판레스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판레스에게 검을 던졌다. 검은 정확히 판레스의 뒷목을 꿰뚫었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내가 자신들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시체 사이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있는 엘라인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유진. 이게 무슨 짓이더냐. 귀족 살해가 얼마나 큰 죄인지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바깥 세계에서 평민이 귀족을 죽이게 되면 그 평민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곱게 죽지 못한다. 친인척까지 모두 몰살당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엔 마을 전체가 학살당한다.
“어머니가 그 놈의 첩이 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립니까!”
“내가 그자의 첩이 된다면 우리 모두 살 수 있었다.”
“어머니를 팔면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낫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돌아갈 세계가 있다고요! 설마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걸 포기하신 겁니까?!”
엘라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죽음을 겪거나, 앞으로 4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이 세계에서 나가진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엘라인은 이 세계에 대해 전혀 몰랐다.
“돌아갈 방법은 없다. 이 세계에 마나가 없어. 달리 말하면 마법도 없다는 말이다. 마법도 쓸 수 없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느냐.”
“찾아보면…! 찾아보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유진.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그건.”
“우리는 최악의 경우 이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귀족의 첩이 되는 편이 편하지 않겠느냐.”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나는 격정적으로 소리치며 엘라인의 몸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엘라인은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듯 하지만 날 밀쳐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었다.
엘라인의 체취와 감촉에 발기하려는 자지를 필사적으로 참았다.
“전 어머니를 희생 시켜서까지 편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따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나는 옷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고, 밭일에 관해서도 전혀 모른다. 농민들의 요리도 할 줄 모르고, 가축을 다루는 법도 모른다. 이래서는 그저 짐덩어리이지 않느냐. 어미가 되어서 아들을 밀어주지 못할망정 발목이나 잡는다니…. 나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어머니!”
나는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져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두 눈을 마주했다.
“전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제 곁에 있어주었기에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내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널 사랑한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피가 무슨 대수이겠느냐.”
“그게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엘라인의 적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다. 이 세계에 나와 너. 둘만이 서로 기댈 수 있는 사이지 않느냐. 그리고 지금 너는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구나. 일단 진정 하거라. 귀족을 죽였으니 이후의 일을 생각해야….”
“착각이 아닙니다! 저는 원래 세계에 있을 때부터! 몇 년 전부터 어머니를 연모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이란 건 압니다! 이 사실을 알면 모든 이들이 저를 비난 하리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려 천륜을 져버리는 일이니까요!”
“너도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우선 차분하게….”
“하지만 이 세계에선 우리를 지탄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우리는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아니, 엘라인!”
내 말에 위험함을 느낀 것일까. 엘라인은 당황하며 내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 안 된다! 너는 나의 아들… 흐읍!?”
나는 힘으로 엘라인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입술과 입술이 비벼진다. 엘라인은 주먹쥔 손으로 내 팔뚝과 등을 때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머리를 때릴 수 있음에도 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항하던 엘라인의 움직임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사라졌다. 실눈을 떠서 엘라인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녀는 곧 두 눈을 감아버렸다.
엘라인은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만약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엘라인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걸 거의 포기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 했을 일이다.
‘한 번 선을 넘어버리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간단히 선을 넘어버리게 되지.’
엘라인의 입술을 핥고 빨았다. 혀를 넣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면서 살짝 벌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넣었다. 그녀는 흠칫 놀란 듯 했지만 내 혀에 맞춰 반응했다.
‘유부녀이면서 키스를 별로 못하잖아. 엔티온이랑 해본 적이 별로 없는가 보군.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엔티온과 엘라인의 사이는 정략결혼이다. 거기에 엔티온이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첫째 부인이다. 일반적인 부부 관계는 아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입술과 입술 사이의 은빛 실이 늘어졌다가 사라졌다.
뺨이 붉게 물든 엘라인이 두 눈을 떴다.
“…….”
“…….”
조용히 서로의 눈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