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화 〉 346.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346.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마차가 달린다.
나와 엘라인은 서로를 마주봤다.
엘라인의 눈동자는 예전과 달랐다. 내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뺨을 살짝 붉히더니 옆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엘라인은 뒤늦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였다.
우리는 남들이 주위에 있을 때는 연기를 해야 했다.
나와 그녀의 관계는 모자 지간이다. 비록 피가 한 방울도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관계가 외부에 알려지는 순간, 가문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진다. 또한 우리는 높은 확률로 처벌 받을 것이다. 엔티온은 우리를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겠지.
‘나한테 유리아가 없었다면 말이야.’
유리아가 가진 무력은 엔티온 보다 강했다.
여차할 때는 엔티온을 죽이고 강제로 백작위를 강탈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반발하는 가신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된다.
‘유리아와 현대 무기를 잘 이용한다면 반란을 일으켜 성공할 것 같기도 한데….’
그건 최악의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되도록 온전하게 얻고 백작가를 얻고 싶다.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때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하인들이었다.
나는 내 양옆에 앉아 있는 유리아와 멜리사에게 명령했다.
“가서 하인들을 도와주고 와.”
“알겠습니다.”
그녀들이 마차 밖으로 나갔다.
엘라인 또한 양옆에 앉은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기사와 병사들 중에 다친 이가 없는 지, 가지고 온 물건들은 상태는 괜찮은지 너희가 직접 확인해보고 돌아오너라. 이제 곧 왕도에 도착하니 철저히 검사해야 한다.”
“네. 마님.”
시녀들이 나갔다.
마차 안에는 나와 엘라인. 두 명 밖에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엘라인의 두 눈이 그윽하게 바뀌었다.
나는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것처럼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내 쪽으로 안겨왔다.
“유진… 으응….”
나와 엘라인은 입을 맞추었다. 내 손은 천천히 그녀의 드레스 속으로 들어갔다.
???
왕도에 도착했다.
프루커스 가문은 대귀족답게 왕도에 저택이 존재했다. 왕궁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왕도에서 활동하는 귀족이 아니면서도 왕도에 저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왕도의 저택에는 하인들이 꾸준히 관리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다. 본가보다는 못하지만 어지간한 귀족 저택 보다는 낫다.
“하하. 오셨습니까. 어머니. 오랜만인데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저택에는 젠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확실히 젠트는 연기 실력이 많이 늘었다. 예전의 젠트는 엘라인의 앞에서 항상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대화도 피하려고 했었다.
“젠트. 너도 여전하구나. 그이는 어디에 있느냐?”
엘라인이 무뚝뚝한 얼굴로 엔티온을 찾았다.
엔티온과 젠트는 모를 것이다. 저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할 것 같은 얼굴이 침대 위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아버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3일 후에 도착할 겁니다.”
“그런가…. 알았다. 젠트. 여기 까지 오느라 고생많았구나. 가서 쉬거라.”
“전 어제 도착했고 여독은 이미 풀었습니다. 지금부터 서부의 귀족들과 만찬회 약속이 있는지라, 오늘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군요.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알겠다.”
엘라인이 젠트를 지나쳤다. 그 목적지가 어딘지는 뻔하다. 집무실이겠지. 본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업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난다. 현재 이 왕도에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이고 있으니까.
이상한 청탁을 하는 귀족이나 상인들도 있을 것이다.
“결국 와버렸나….”
젠트가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적대적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하인들이 보고 있으니 존댓말을 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서부 귀족들의 만찬회의 가신다고요?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남부에 있는 귀족들이 형님의 행동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프루커스 가문은 남부 끝에 위치해 있다. 남부의 중심이라 하기엔 너무 변경에 있지만, 프루커스 가문이 적은 영향력이 가진 건 결코 아니다.
“우린 모두 같은 왕국의 귀족들인데 무슨 오해가 있겠느냐. 그리고 설령 오해가 생기더라도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힘들었을 텐데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나는 그가 서부 귀족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유를 알고 있다. 젠트의 약혼녀가 서부 귀족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헤올리스 후작의 딸이기 때문이다.
젠트는 나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젠트 형님. 저도 서부 귀족들의 만찬회에 함께 가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네. 저도 그들이 궁금합니다.”
“…미안하지만 만찬회의 초대를 받은 건 나뿐이다. 너는 내 동생이지만 테브라의 남작이지 않느냐. 갑자기 너를 데려간다면 그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다.”
“그렇게 예의를 잘 챙기시는 분이, 저번에는 왜 아무 연락 없지 제 저택을 찾아오셨습니까?”
내가 비아냥거리자 젠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날 노려봤다.
“……그건 실수였다. 너무 급해서 연락할 시간이 나지 않더구나.”
그 말을 끝으로 젠트가 획 몸을 돌려 저택 밖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 탔다.
“유리아. 나갈 거야. 마차 준비 시켜.”
“네. 알겠습니다.”
유리아가 이 저택의 관리를 맡고 있는 늙은 집사에게 향했다.
내 옆에 있는 멜리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재밌는 일을 벌일 생각인 모양이군. 주인님.”
“멜리사. 너도 따라와도 돼.”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저택에 남아 주인님이 지낼 방이나 청소하겠다. 평민들을 만나는 거라면 몰라도 귀족들을 만나는 건 영 껴려지는군.”
멜리사는 본래 코발트 왕국의 유서깊은 아르헨 공작 가문의 장녀였다. 그녀는 현재 왕국에서 도망친 상태다. 그 때문에 사람들. 특히나 귀족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알았어. 내 침대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어.”
“……못 말리는 주인님이다. 평판을 신경 쓴다면 왕도에서는 좀 자제하는 게 어떤가?”
“괜찮아. 괜찮아. 안 걸리면 돼.”
“주인님은 메이드장에게 항상 감사해야 한다. 메이드장이 아니었다면 걸리고도 이미 몇 백 번이나 걸렸을 거다. 여기까지 오면서 주인님과 백작 부인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본인들만 모를 거다. …정말이지 메이드장이 지나칠 정도로 유능하지 않았다면….”
“알았어.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유리아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다고.”
“잔소리가 아니라 조심하라고 충고하는 거다.”
“알었어. 알았다니까.”
???
나는 마차를 타고 서부 귀족들의 거주지로 향했다.
젠트가 말하는 만찬회는 참가할 수 없다. 나는 만찬회의 초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대 받지 않은 만찬회에 억지로 찾아가봤자 귀족들의 눈총만 사고 평판만 떨어질 것이다.
내가 찾아간 곳은 왕도에 있는 헤올리스 후작의 저택이다. 정확하게는 별장 저택이라 할 수 있다. 연락은 하지 않았지만 무례는 아니다. 이미 오기 전에 내게 연락을 취했던 ‘코즈라인 상회’를 들먹이면 된다.
헤올리스 후작은 코즈라인 상회의 간부라 할 수 있는 만큼 날 냉대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코리아 상단을 통해 이득을 보고 싶을 테니까.
그의 저택 앞에서 하인에게 정체를 밝힌 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중년 집사가 나와 유리아를 맞이했다.
“프루커스 남작님. 헤올리스 후작 각하께서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접견실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내 수발을 드는 전속 메이드라네. 같이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나? 그녀는 코리아 상단과 제법 깊게 관련되어 있네.”
“……그러하다면 괜찮을 겁니다.”
집사는 유리아가 평범한 메이드가 아닌 걸 눈치 챈 모양이다. 하긴 외모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누가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주인님.
복도에 걸어가는 도중 귓가에 유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음(傳音)이다. 소리에 마나는 담는다고 하는데 나는 영 소질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기술이다. 유리아는 전음을 쓸만 한 잡기술로 취급하는 모양이다만.
-저택의 경계가 삼엄합니다. 기사들 뿐만이 아니라 암살자들까지 저택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 집사. 오러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헤올리스 후작의 위치를 생각하면 호위가 있는 건 당연했다. 다만 암살자들 까지 거느리고 있는 건 예상외다.
‘눈앞에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집사는 기사단장급의 실력자라….’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입만 뻥긋 거렸다. 나는 전음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유리아는 독순술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유리아 네가 나선다면, 이 저택에 있는 전원을 죽일 수 있냐고 물었다.
-네. 당연합니다. 주인님.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10분 안에 이 저택에 있는 전원의 목숨을 거두어 주인님께 바치겠습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전력 차이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이들을 몰살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 프루커스 남작.”
“처음 뵙겠습니다. 헤올리스 후작 각하. 만나 뵙게 영광입니다. 왕도에 오자마자 찾아왔습니다만, 실례가 아니었는지요.”
“실례는 무슨. 이쪽은 자네를 환영하고 있네. 자네와는 꼭 한 번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 그리고 자네의 가문과 우리 가문은 미래의 사돈 사이가 아닌가.”
“환영해주시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일단 자리에 앉게.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 그런데 옆에 있는 메이드는?”
“제 전속 메이드입니다. 또 그녀는 제 손과 발입니다. 그녀 덕분에 코리아 상단은 보다 수월하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코리아 상단의 세세한 정보는 그녀가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무척이나 아름다우신 아가씨인데 머리까지 총명한가. 남작은 좋은 인재를 가지고 있군. 헌데….”
헤올리스 후작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아를 쳐다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닐세. 잠깐 어느 가문이 떠올라서 말이네. 아무리 그래도 그 가문과 관계있진 않겠지.”
그가 떠올린 가문은 십중팔구 헬브리트 공작 가문 일 것이다. 유리아의 청은발과 푸른눈은 헬브리트 공작가의 특징이니까. 허나 헬브리트 공작가는 병적으로 깨끗한 가문인지라 유리아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찾아온 건 코리아 상단의 상회 가입 때문이겠지. 코리아 상단은 상회에 가입할 생각인가?”
“예. 라펠리 왕국의 상단 중 코즈라인 상회에 가입하기 싫어하는 상단이 어디 있겠습니까. 코즈라인 상회에 가입하는 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당연히 코리아 상단을 환영하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모르겠군. 알다시피 우리 상회는 상단뿐만이 마탑 까지 얽혀있네. 코리아 상단을 불온하게 보는 시선이 제법 많아.”
“…코리아 상단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뭐, 그렇지. 코리아 상단이 내는 물건들은 워낙 파격적이지 않나. 코리아 상단의 판매 물건들 대부분 자네가 발명했다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코즈라인 상회는 코리아 상단의 뒤에 다른 국가와 마탑이 있다고 생각하네.”
“억울하긴 합니다만, 이해는 합니다.”
“으음?”
내가 태연하게 받아 넘기자 그는 놀란 모양이다.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은 의심을 받으면 당황하거나 화를 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나는 차분했다. 그가 하는 지적도 유리아가 예전에 가르쳐 주어 대비하고 있다.
‘유리아는 말했지. 코즈라인 상회는 코리아 상단의 흠을 찾아내 지적하며 가치를 깎아내려 받아들일 생각이라고. 그 이유는 코리아 상단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최종적인 저들의 목표는 코리아 상단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
그들의 뜻대로 끌려 다닐 필요는 없다.
“저라도 저같은 천재가 이 세계에 실존하는 걸 믿기 힘들 지경인데, 다른 사람들의 눈은 어떻겠습니까. 이해하고말고요.”
“……아, 그렇나.”
헤올리스 후작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후작 각하. 전 후작 각하께서 운영하시는 홀리스 상단과 함께 하고 싶은 사업이 있습니다.”
“호오. 천재가 제안하는 사업이라…. 그거 흥미롭군. 무슨 사업인가?”
“전쟁 물자 사업입니다. 큰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장담합니다. 원래는 저 혼자서 할 사업이었지만… 헤올리스 후작가와 프루커스 백작가는 이제 곧 한 가족이 될 사이가 아닙니까.”
“하하….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대부분의 상단의 주인들은 이미 각자 전쟁을 대비하고 있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고 말이야. 슬슬 전쟁이 일어날 시기라는 걸 누가 모르겠나.”
“그렇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각하. 흥미로운 정보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