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화 〉 35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35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까득까득.
정원에 앉아 있는 비비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손톱을 깨물었다. 귀족 영애로서 좋은 버릇은 아니었다.
나는 멀리서 비비의 모습을 확인하고 느긋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형수님.”
“남작님…!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날, 비비가 귀걸이를 사기 위해 내게 돈을 대출한 날부터, 그녀의 허영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커졌다.
나는 그녀에게 귀금속뿐만이 아니라 드레스, 음식, 향수, 화장품 등등 온갖 고급스러운 것들을 팔았다. 형수님은 가족이 될테니 특별히 50% 할인해주겠다는 미끼를 던지며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먼저 내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다양했다.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가 있는데, 그 드레스를 입지 못한다면 무시당한다, 남쪽 끝에서 찾아온 상인이 고급 차를 판매하는데 티타임에 꼭 필요하다. 등등의 이유로 내게 돈을 요구한 것이다.
나는 호구처럼 웃으며 그녀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다. 계약서는 전부 작성했다.
“형수님. 진정하시고 차분히 이야기해보죠. 굉장히 초조해 보이시는데… 혹시 내일 왕궁에 있을 국왕 전하 탄신일 행사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사실 오늘 오후에 귀족자제 분들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기로 했어요.”
“즐겁겠군요. 혹시 피크닉에 입고 갈 드레스가 없으십니까?”
“입고 갈 드레스라면 이미 골라뒀어요. 문제는….”
비비는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나는 돈과 관련된 문제임을 직감했다.
“문제는?”
“……하아. 남작님,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남작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오후까지 시간은 많으니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비비의 말을 들었다.
비비는 어제 초대받은 만찬회에서 한 귀족을 만났다.
바시브 메이켈드. 젊고 잘생겼으며 남작의 작위를 가진 남자다. 비비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매너 있고 말재간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는 몰락한 귀족으로 가문을 세우는 것이 일생의 목표라고 한다.
최근 영애들 입에서 오르락내리락거리는 화제가 바로 바시브 메이켈드 남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를 알고 있다. 원작에서 나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뭐, 그래봤자 스쳐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놈이라 관심은 가지 않았다.
까놓고 말하자면 바시브 메이켈드는 사기꾼이다.
‘내가 바시브 메이켈드의 정체를 밝힐 이유는 없지. 오히려 이건 내게 잘 된 일이야.’
나는 비비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메이켈드 남작은 사업은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와 영애 몇몇이 그에게 투자하기로 했어요. 하지만… 제겐 돈이 없어요.”
“후작 각하께 부탁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허락할리 없어요. 지금껏 우리 가문으로 찾아온 많은 귀족들이 있었지만 투자금을 받아간 귀족은 한 명도 없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거에요.”
“투자금이라…. 영애는 제게 대출 받으려고 하시는군요. 지금 영애의 빚이 3억 2천만 네르인 건 잊지 않으셨지요?”
움찔.
구체적인 빚의 금액에 그녀가 잠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평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귀족. 그것도 헤올리스 가문의 귀족이다. 3억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후작은 순식간에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엄청나게 혼나겠지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계약서대로 이자는 없어요. 그렇죠?”
“네. 계약서까지 작성했죠. 이자를 물릴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길. 아니, 계약서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말이죠.”
내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그녀도 긴장을 풀고 내게 말했다.
“5억 네르가 피요해요.”
“……5억 네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군요.”
“하지만 남작님이라면 빌려줄 수 있잖아요. 남작님은 제 아버지랑 거래를 할 정도의 거물이니까요.”
“과찬입니다. 하지만 5억을 빌려주는 건 어렵진 않습니다. 대충 2주 정도의 시간이 있으면….”
“네? 2주라뇨!? 지금 당장은 빌려줄 수 없는 건가요?”
“저라고 해서 5억이라는 큰돈을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닙니다.”
비비의 눈꺼풀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2주라니…! 전 오늘 오후에 메이켈드 남작과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단 말이에요! 남작님에겐 코리아 상단이 있잖아요. 이번 투자만 성공한다면 반년 안에 성과가 나와서 그동안 남작님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저라고 해서 코리아 상단의 돈을 마구잡이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상단에서 돈을 빼내려면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 이렇게 말하는 저는 공식적으로 코리아 상단의 주인이 아닙니다만….”
“제발…. 부탁 할게요 남작님. 이미 메이켈드 남작과 다른 귀족들에게 말했단 말이에요…. 이러다간 제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아요. 제 명성이 떨어지고 사교계에서 앞으로 영원히 매장될지도 몰라요…. 제발….”
비비가 울먹거렸다. 겨우 이런 일로 사교계에 매장 당할 리가 없지만,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그녀는 진심으로 매장당할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어떻게든 5억 네르를 가져와보겠습니다.”
“고마워요! 프루커스 남작님!”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요?”
“메리켈드가 말한 투자 내용이 무엇입니까? 또렷한 정보도 없는데 5억이란 큰돈을 주는 건, 저라도 망설여지는군요.”
“그, 그건…. 메리켈드 남작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렇습니까. 그럼 돈은 없던 이야기로.”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 돈이 없는 비비 쪽이다.
“자, 잠깐만요! 남작! 말할게요! 말해드릴게요!”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말해주시죠 형수님.”
“약초 재배사업이에요! 그는 약초가 자라기 좋은 땅을 발견했다고 했어요. 메이켈드 남작이 가져온 약초를 직접 눈으로도 보고 먹어 봤는데 효과가 엄청났어요. 메이켈드 남작의 사업은 성공할게 틀림없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그 새낀 원작대로다. 나 때문에 전혀 변하지 않았어.’
원작,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에도 이놈은 약초 재배를 들먹이며 사기를 친다. 그때는 대담하게도 프루커스 백작이 된 카일에게 말이다. 카일은 사기꾼의 사기를 밝혀내고, 사기꾼의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근데 직접 먹어보셨다고요?”
“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엄청 쓴맛이었지만, 먹자마자 몸에 기운이 나던걸요.”
“오오. 대단하군요.”
대단하긴 개뿔.
놈은 마약을 약간 섞은 거다. 그것도 라펠리 왕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마약을 이용한 것이겠지.
‘겨우 이딴 걸로 속나 싶겠지만….’
현실에서도 어처구니없는 말에 속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매일 100명 이상이 보이스피싱에 당한다는 인터넷 뉴스를 스치듯이 본 듯 한 기억이 있다.
나는 비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를 턱하고 잡았다. 비비는 움찔거렸으나 내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내 비위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1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돈의 액수가 크다보니 시간이 필요합니다.”
“네. 남작님. 부탁드릴게요.”
“계약서를 작성하시죠. 그런데 정말 후작 각하께 말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후작 각하를 껄끄러워 하신다면 제가 대신….”
“아, 안 돼요! 아버지가 알아선 안 돼요! 악마처럼 화를 내실게 틀림 없다고요! 남작님, 절대로 아버지에게 말하면 안 돼요!”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저 남작님 손이….”
“아! 저도 모르게 형수님의 겨드랑이를 만지고 말았꾼요.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요.”
비비로부터 떨어진 나는 마차가 주차되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내 뒤를 몰래 따르고 있던 유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관리하고 있는 마부에게 돈을 주어 과일을 종류별로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손으로 마차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유리아는 내 뜻을 바로 눈치 채고는 나무로 양손을 기대며 엉덩이를 뒤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스커트를 들어 올려 허리에 올렸다. 커다란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음탕한 하얀 속옷이 보였다. 팬티의 중심이 갈라져 있어서 항문과 보지가 보였다.
나는 보지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유리아에게 물었다.
“유리아. 5억 네르는 가지고 있지?”
“으읏…. 네.?그림자 속에 있습니다. 최대 31억 네르까지 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앗….”
“좋아. 그럼 1시간 동안 시간이나 보내볼까.”
1시간 뒤.
나는 비비에게 5억 네르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반년 안에 빚은 모두 갚을 거에요!”
“8억 2천만 네르입니다. 적은 돈이 아니란 걸 잊지 말아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세요! 메이켈드 남작의 사업은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요!”
비비가 피크닉을 떠나기 전에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기꾼을 믿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아무튼 이걸로 계획은 다 짜졌어.’
???
제 8대 국왕, 코로칼리스 라펠리의 탄신일은 왕도의 축제였다. 왕실은 평민들에게 술과 고기를 베풀었고, 평민들은 국왕의 생신을 축하했다.
나는 아버지인 엔티온과 어머니 엘라인, 형 젠트와 함께 왕궁으로 향했다. 사용인은 데려갈 수 있었지만 그 숫자는 한정되어 기사 2명과 엘라인의 시녀 1명, 내 전속 메이드인 유리아만 데려갈 수 있었다.
이번 연회는 3일 동안 밤낮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
“…….”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젠트와 두 눈이 마주쳤다. 젠트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고, 나는 여유롭게 입가를 비틀어 올랐다.
‘내가 매일 헤올리스 가문에 드나들었다는 걸 저놈도 알고 있겠지.’
나는 연회장을 쳐다봤다. 수 백 명의 귀족들로 북적이고 있다. 왕궁 소속 집사와 하녀들이 절도 있게 움직이고 있으며, 귀족들은 저마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들 중 신경써야 하는 귀족은 30%도 되지 않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유독 젊은 귀족들이 모인 곳을 쳐다봤다. 젊은 귀족 자제들이 누군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턱에 짧은 수염을 기른 젊은 남자였다. 키가 크고 얼굴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선량하고 친절하다. 라는 분위기를 온몸에 내뿜고 있었다.
‘원작의 묘사는 그를 보고 있으면 이야기 속의 영웅이 떠오른다고 했던가…. 진짜로 보니까 별로군.’
바시브 메이켈드.
겉으로는 몰락한 귀족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귀족의 신분을 훔쳐 쓰고 있는 사기꾼, 로하드.
‘사기꾼의 낯짝을 제대로 봐둘까….’
메이켈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유진 프루커스 남작. 대화를 나누고 싶군. 시간 있나?”
청은발의 푸른 눈을 가진 중년인이 내게 다가왔다. 하얀 복장을 입고 있는 그는 차가운 인상의 미중년이었다.
마켈로스 헬브리트.
라펠리 왕국의 재상이자 공작.
유리아의 친아버지이자 복수대상. 정면에서 마주한 그는 날카로운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살짝 몸을 긴장시켰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그 목적이 유리아임을 모를 리가 없다. 유리아는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원수가 눈앞에 있음에도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근처에 있던 엔티온이 끼어들었다.
“헬브리트 재상. 내 아들에게 무슨 볼일이시오?”
“…프루커스 백작. 개인적인 일이오. 그대가 끼어들 일이 아니오.”
“…….”
“…….”
그들의 가벼운 기싸움이 시작됐다. 긴장된 공기가 순식간에 주변으로 전염된다.
나는 서둘러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잠시 재상 각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알았다.”
엔티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마켈로스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의외였다. 설마 엔티온이 저렇게 마켈로스를 경계할 줄이야.
“프루커스 남작. 여긴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엔 너무 소란스럽군. 접견실로 안내하지. 따라오게.”
“네. 재상 각하.”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내 뒤를 따르는 유리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평소와 같은 표정과 분위기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신경이 곤두서있음을 눈치 챘다. 평소에 나를 쫓던 유리아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마켈로스의 뒷목에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