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화 〉 356.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356.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라펠리 왕도, 마켈로스 헬브리트 재상의 방에는 4명이 모여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2명은 공포에 질려 덜덜 떨었으며, 1명은 체념했으며, 1명은 냉정하게 서있었다.
마켈로스를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아내이자 사촌동생인 카트린느는 평소의 냉혹한 얼굴 대신 눈물을 흘리며 덜덜 떨며 자식인 할리오스를 붙잡고 있다. 할리오스의 상태는 어미와 같았다. 다만 그는 이미 오른팔을 잃었다.
마켈로스는 정면을 쳐다봤다.
떨어진 낙엽처럼 쌓인 호위기사 20명의 시체 앞에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같은 여인이 무표정하게 서있었다.
마켈로스는 호위기사 20명이 싸늘한 시체가 되기까지 30초도 걸리지 않은 걸 기억한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이미 상식 밖의 힘을 갖춘 괴물이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방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프루커스 남작의 명령인가?”
마켈로스는 자신의 앞에서 시건방진 태도를 견지하던 프루커스 남작을 떠올렸다. 그때 당시에는 자신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뒷배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연회가 끝나면 뒷배를 알아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뒷배 따윈 없었다. 프루커스 남작은 처음부터 자신과 가족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옛날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주인님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렇군. 프루커스 남작이 너를 구했었나. 어떤 거래일지 짐작이 가는군. 내 목을… 아니, 헬브리트 멸망을 원했겠지.”
“네. 제 손으로 직접 어머니의 복수를 하는 대신, 주인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복수는 성공했군. 축하한다. 그런데 왜 망설이고 있는 거지? 네 실력이라면 우리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거다. 내게 뭘 원하는 것이냐.”
유리아는 마켈로스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보자마자 죽여 버리고 싶었다. 솟구치는 살의를 참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지만 복수의 끝을 눈앞에 둔 지금은 평온했다.
“당신을 따르는 귀족들에 대한 정보를 원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그들의 약점을 원합니다.”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들이 지금 죽는 당신보다 잘났습니까?”
“……그건 아니지. 그래. 통제하겠군.”
“협조해주신다면 고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깔끔하게 목을 베어 죽여 드리겠습니다.”
마켈로스가 귀족들에 대한 정보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옆에 있던 아들이 소리쳤다.
“아버지! 이대로 포기하시는 겁니까?!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고요!”
“방법이 없다. 고문 당해 죽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할리오스는 이를 악물고 쳐다봤다. 두려움이 몸을 떨게 만들었으나, 이대로 모든 것을 잃고 죽을 수는 없다.
“당신이 저의 누이 동생인 건 알겠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의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저는 가족입니다! 당신의 출신지로, 당신의 고향인 헬브리트 가문으로 돌아오십시오! 제가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왕국을 지배하며 잘 지낼 수, 커억!”
할리오스의 가슴에 단검이 날아가 박혔다. 정확하게 심장에 꽂혔다. 할리오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꺄아아악! 할리오스!”
유리아는 비명을 지르는 카트린느의 목에도 단검이 꽂혔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마켈로스는 가족들의 시체에서 눈을 뗐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유리아는 그가 내뱉는 정보를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기억했다.
유리아가 마켈로스의 코앞까지 다가가며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그래. 후회한다. 넬 린스를 확실하게 찾아내 죽여 버렸어야 했거늘….”
그녀가 단검을 들었다. 짙은 그림자같은 검은 오러 블레이드가 장검마냥 늘어난다.
“…만족하느냐?”
“예. 만족합니다.”
소리 없이 미소지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휘둘러 마켈로스의 목을 베었다.
유리아는 바닥을 구르는 마켈로스의 머리를 힐끗 보며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어머니….”
???
“으아아아아아악!”
해가 밝아오는 새벽. 왕궁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왕성 꼭대기에 헬브리트 공작 일가의 머리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 다음 가는 권력자가 암살당한 것이다.
왕성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귀족들은 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여 왕도를 포위해 범인 색출 작업을 진행했다. 시간이 지나자 헬브리트의 본가에서 발생한 참극도 알려졌다.
여러 음모설이 나돌았다.
다른 왕국의 비밀 암살단이 쳐들어와 헬브리트를 지웠다, 헬브리트 공작과 척을 진 암살 길드가 일을 벌였다 등등의 근거 없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어쩌면 암살자는 한 명 뿐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를 그 소문은 빠르게 널리 알려졌다. 전설과 영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암살자를 일종의 영웅 취급까지 하며 별명을 붙여 주었다.
암제(暗帝).
존재가 불분명한 최악의 암살자의 별명이었다.
???
“자네가 이전에 했던 말을 이제야 알겠군. 설마 암살자를 이용해 재상을 치워버릴 줄이야.”
헤올리스 후작은 나를 보며 말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왜 제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연회 전에 확실히 재상만 없어진다면 문제가 사라진다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재상을 죽일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고용한 암살 길드는 누구지. 말해줄 수 없나? 진짜 암제(暗帝)라는 암살자 혼자서 헬브리트 공작가의 전원을 암살한 건가?”
“헤올리스 후작 각하께서 그런 헛소문을 믿으실지 몰랐군요. 헬브리트 공작은 왕성에 있었고, 본가에 일어난 참상은 서로 같은 시각에 일어난 걸로 보고 있습니다. 혼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법을 사용해 공간 이동을 이용한다면….”
“왕도에는 공간 이동 마법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정말 자네의 짓이 아닌 건가?”
“저를 범인으로 몰고 싶으시다면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아니면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게 있네. 범죄자 놈들 대부분이 증거를 운운한다는 거지.”
“그래서 증거는 있습니까.”
“……없네.”
헤올리스 후작이 한숨과 함꼐 대답했다.
“그럼 이제 재상 각하도 존재하지 않으니 저와 함께 전쟁 물자를 모을 수 있겠군요.”
“…남작. 하나만 묻지. 수가 틀리면 나도 죽일 건가?”
“적이 아니라면 굳이 죽일 필요는 없죠.”
“……재상은 남작의 적이었나?”
나는 웃었다.
“예. 적이었습니다.
???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받치며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금발머리의 남자를 쳐다봤다.
재상이라는 지지자를 잃은 에이든 왕자였다.
재상이 죽은 지금.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왕좌를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 지금까지 누렸던 권력들을 모두 포기하고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재상이 사라진 이상 망나니인 그를 지지할 귀족은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지지자를 구하는 것. 재상 정도는 아니어도 왕국 내에서 손꼽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령 지지자를 구한다 하더라도 다른 귀족들의 지지도 필요하지.’
단시간에 지지자를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에이든은 아주 등신이 아니니 내가 재상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려고 재상이 죽기 전에 에이든을 만났으니까.’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그는 내가 두려울 것이다. 하루아침에 공작가를 지워버릴 정도의 힘이 내게 있다고 생각 할 테니까. 동시에 나야 말로 자신을 왕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전하.”
“알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하는게 아닌가. 도와다오. 나를 왕으로 만들어다오! 프루커스 남작!”
“조건은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날로부터 아직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물론이다. 잊지 않았다. 내가 왕이 되는 날, 아일린은 기꺼이 네게 바치겠다. 네가 아일린에게 무슨 짓을 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대가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왕자님.”
“…….”
에이든이 침묵했다.
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국 체념한 듯 머리를 숙였다. 그는 왕좌를, 권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네게… 복종하겠다.”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왕자님. 구두 계약은 믿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믿도록 하겠습니다. 뭐,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잘부탁 합니다. 왕자님.”
“…알겠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남작.”
???
왕도를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며칠 전, 유리아가 헬브리트 공작을 죽이고 복수를 달성했을 때, 예상했던 알림창이 스마트폰에 떴다.
[유리아 그레이스의 인연 레벨 10을 달성했습니다.]
[유리아 그레이스는 계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앞으로 유리아 그레이스의 존재는 유희 생활 어플에 귀속됩니다. 유리아 그레이스가 죽더라도 다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유리아 그레이스를 다른 세계에 소환할 수 있습니다. 유리아 그레이스가 소환되면 출신 세계인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는 비활성화 됩니다.]
[캐릭터 소환은 캐릭터의 세계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캐릭터 소환 레벨은 1입니다. 포인트를 이용해 캐릭터 소환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레벨을 올릴 때마다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캐릭터가 늘어납니다.]
[캐릭터 소환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2,000의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캐릭터의 스킬과 특성 중 하나를 랜덤으로 공유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스킬과 특성 중 하나를 캐릭터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소환된 캐릭터의 능력치는 어플 주인의 능력치와 동일합니다.]
[캐릭터는 한계 초월을 사용해 원래 세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한계 초월 이후 소환이 강제로 해제 됩니다.]
[유리아 그레이스
출신 세계: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인연: Lv. 10
소환 유지 시간: 30일.
소환 대기 시간: 현실 90일.
공유 스킬: 천재의 시간
한계 초월: 1분]
[천재의 시간 (캐릭터 공유 스킬: 유리아 그레이스)
10초 동안 유리아 그레이스의 재능을 가지게 됩니다.
10일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유리아 그레이스의 소환 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소환 대기 시간은 소환 해제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유리아 그레이스의 소환 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한계 초월의 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캐릭터의 외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주르륵 뜬 수많은 알림창들을 본 나는 현실로 돌아가기 전에 유리아에게 물었다.
“계약을 받아 들였다고 들었는데, 누구랑 계약을 한 거야?”
“잘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 아니, 그건 의지라 할 수 있는 것이 갑자기 제 머릿속에 느껴졌습니다. 저는 주인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고,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리아는 나에 대해 알았다.
내가 다른 세계의 인물이란 것과 유희 생활 어플을 통해 다른 세계를 유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원래부터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세계가 창작물 속 세계라는 건 놀랐습니다만, 제겐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다른 세계에서도 주인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지금 현실은….”
나는 유리아에게 현실의 상황에 대해서 말했다. 현실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유리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할 수 없는 괴물이군요.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주인님의 적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유희를 종료합니다.]
???
현실로 돌아온 나는 벽에 처박힌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눈앞에는 파란 피를 흘리고 있는 하얀 괴물이 있었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져 뇌가 보이고 있지만, 놈은 고통 따윈 전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그게 너의 능력이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군. 어떻게 죽었다 살아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이겠다.”
놈은 나를 죽이기 위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캐릭터를 소환합니다. 대상: 유리아 그레이스]
[유리아 그레이스의 남은 소환 유지 시간: 30일]
청은발의 메이드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가 손에 쥔 단검에는 검은 뇌전이 파직 거렸다.
하얀 괴물은 흠칫 놀라서 전투 자세를 취하며 달려들었다. 허나 그것보다 빠르게 유리아가 움직였다.
나는 유리아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하얀 괴물은 검은 뇌전에 감전 당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썰려 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단 5초.
하얀 괴물이 수 백 조각의 고깃덩어리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유리아는 파란 핏물 위에서 나를 보며 인사했다.
“이 세계에서도 변함없이 제가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유리아의 입에서 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