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화 〉 358. 파이론
358. 파이론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몬스터는 하루에 최소 3번 이상 마을을 습격했다. 문제는 하얀 괴물의 습격 이후 헌터의 숫자가 줄었고, 그로인해 발생한 틈에서 희생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얀 괴물의 습격으로부터 10일이 지난 지금 생존해 있는 마을 주민은 총 2,170명이며, 헌터는 11명에 불과했다.
첫날 5,000명이 넘었던 마을 주민과 30명에 달했던 헌터들을 생각하면 절반 이상의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아, 씨발!”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붉은 뇌전이 꿈틀거리는 칼을 휘둘렀다.
끼에에에에에엑!
다섯 개의 다리를 가진 짐승형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목을 찔러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낸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몬스터의 시체로 가득했다.
약 20분 전, 마을에 몬스터 무리가 습격했다. 다행히 대부분이 D등급 몬스터인지라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으나,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아까 스쳐봤을 때 200마리 정도 되는 것 같던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따로 유리아를 시켜 서쪽으로 보내어 어떻게든 몬스터의 습격을 막긴 했으나,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몬스터는 매일같이 습격해오는데 마을의 전력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고만 있다. 식량은 충분하지만 몬스터를 감당하지 못한다.
‘앞으로 일주일도 못 버티겠군. 마을 주민 중 미녀란 미녀는 다 따먹었으니 적당히 하다가 튀어야겠다.’
내가 칼을 다시 되잡고 아직 싸우고 있는 헌터들을 도우러 가려고 할 때였다.
슈우우우우우우우웅!
고막을 강타하는 굉음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전투기 3대가 빠른 속도로 비행하며 거대한 검은 나무를 향해 폭탄을 떨어뜨려 폭격했다.
콰아아앙! 쾅!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퍼져나간다.
검은 나무가 활활 타올랐다.
전투기는 검은 나무와 마을 주위를 빙빙 돌다가 란저우시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씨발! 폭격을 할 거면 빨리 하던가. 한참 늦었잖아!”
나는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시선은 활활 타오르는 검은 나무에 향한 채였다. 고작 폭탄으로 검은 나무를 태워버릴 수 있을까? 내 우려와는 다르게 거대한 나무는 계속해서 타올랐고 저녁이 되었을 무렵에 나무는 뼈대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전투기는 다른 건 노리지 않고 오직 검은 나무만을 노렸다.
‘사태가 사태니 전투기가 움직이는 건 이상하지 않아. 근데 검은 나무만을 노리려고 전투기를 보낸 건 좀 이상한데…. 중국은 저 검은 나무의 정체를 알고 있나… 그리고 전투기를 이용해 폭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험하다는 건가?’
나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뒀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고작해야 C등급 헌터에 불과하다. 그리고 뭔가 할 생각도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여자 뿐이다.
‘응?’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GPS가 잡힌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나 싶어 중국 헌터 협회에 통화를 시도해보자 연락되었다.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던 건 검은 나무 때문이었던 게 확실하다.
-네. 중화인민공화국 헌터 협회입니다.
척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지원 온 C급 헌터 성유진입니다.”
나는 현재 위치와 상황을 설명하며 중국 헌터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연히 3,0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알렸는데 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란저우 헌터 협회의 연락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상황 보고는 매일 란저우 헌터 협회에 해주십시오. 일주일내로 구조팀을 파견하겠습니다.
3,000 명의 사망자를 듣고 덤덤하게 넘긴다. 이 경우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나랑 통화한 이 남자가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거나, 이미 중국 곳곳에서 3,000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피해가 발생하고 있거나.
‘아. 젠장.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구조팀은 일주일 정도 후에 오겠지. 아니면 열흘 후에 오거나. 나는 구조팀이 빠르게 올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
다음날.
내 생각이 틀렸었다.
구조팀은 정오 무렵에 도착했다. 터무니없는 속도에 경악 했지만, 구조팀의 구성원을 보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구조팀에는 무려 S등급 헌터가 있었다. 다만 나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버지!”
“자영아! 미안하다! 당장이라도 널 구하러 오고 싶었으나, 일이 워낙 심각해서 지금껏 구하러오지 못했다!”
류자영인 아버지이자, 패왕도문의 문주이며 중국의 S급 헌터인 천중패왕(天中覇王)인 류기천이 직접 왔기 때문이다.
2.2M가 넘는 큰 키, 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육체. 눈썹은 진하고 눈은 부리부리하며 코와 입술은 컸다. 얼굴은 사각형이다. 그는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법한 화려한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주위에는 무복을 입은 헌터들이 서있었다. 류기천의 부하로 보였는데 최소 B급 이상의 강자들이다. 그들 모두 등에 참마도를 장비하고 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암! 무사해야지!”
류자영을 품에 안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팔불출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껄끄러웠다. 그가 류자영과 나의 관계를 눈치 채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영이. 네가 사람들을 잘 이끌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겠지. 검은 나무가 있었던 걸 보면 여기에도 파이론이 나타난 모양인데… 파이론은 어떻게 처리했느냐?”
“아버지. 파이론이 무엇입니까?”
“인간처럼 이족 보행을 하고, 말도 할 줄 아는 하얀 몬스터 말이다. 그놈들은 인간과 비슷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
“그 몬스터를 쓰러뜨린 건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마을을 이끌어 온 것도 제가 아닙니다.”
“네가 아니라고? 그럼 누가…….”
류자영이 나를 쳐다봤다. 류기천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나는 씨익 웃었다.
“설마. 여자들 사이에 있는 저 얼빠져 보이는 사내를 말하는 것이냐?”
내 양옆에는 유리아와 한하린이 있었다.
류자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 얼빠져 보이다니요. 그는 영천류의 제자이자, 저를 이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인입니다!”
“…….”
류기천은 굳은 표정으로 나와 류자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셋째 딸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인지 나와 류자영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자영아. 저 남자와는 어떤 사이느냐?”
“그와 저의 사이는…….”
류자영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나와 류기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저건 누가 보더라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표정이었다.
‘아니. 확실히 어제까지 틈만 나면 섹스를 해대긴 했지만…. 그건 서로 합의하에 한 거잖아! 친구! 섹스 프렌드!’
류자영은 예전에 내게 책임을 지라며 칼부림을 한 적 있었다. 다행히 칼부림에서는 어떻게든 내가 이겼지만, 관계는 깨지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다. 섹스 프렌드라는 이름하에 말이다.
참고로 류자영을 절정을 느낄 때마다 오줌을 지리는 여자였다. 한하린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여자는 희귀하기에 꽤 아끼는 여자다.
나는 사단이 벌어지기 전에 앞으로 나서며 류기천에게 인사했다.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왼손을 펼쳐 부딪혀 포권 인사를 했다. 중국의 무협 틀딱들이 환장하게 좋아한다는 그 포권지례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영천류의 제자이자, 한국에서 중국을 지원하기위해 달려온 C등급 헌터인 성유진입니다. 류 소저와는 이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 세…, 새 친구가 되었습니다.”
“영천류의 제자인가…. 듣긴했다. 영천류에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났다고! 그게 바로 너로구나!”
“하하. 과찬입니다.”
“그런데 자영이의 친구?”
“예. 류 소저와는 친구입니다.”
“옆에 계시는 처자들과는 무슨 관계냐?”
“아. 두 명 모두 중국어를 못합니다. 이쪽은 한하린. 저의 대학교 선배이자 친구입니다.”
“……옆에 있는 처자는?”
“유리아 그레이스. 제 메이드입니다.”
“메이드?”
“가정부입니다. 가정부. 청소 실력과 요리 실력이 뛰어납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네. 아주 맛있지요.”
그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커다란 체격 때문인지 몰라도 압박감이 절로 느껴졌다. 허나 나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여자들이 보고 있는데 쪽팔리게 물러날 수 없었다. 그리고 류기천이 여기서 날 죽일 리가 없었다.
“성유진이라 했나.”
“네.”
“내가 관상을 볼 줄 안다. 너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상이다. 한 여자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는 얼굴이지.”
“하하. 위트가 넘치시군요. 허나 어르신. 전 관상같은 걸 믿지 않습니다. 물론 사주도 믿지 않습니다.”
류기천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라. 자영이와는 무슨 관계냐.”
“친구입니다. 친구. 절친이라 할 수 있지요. 아, 절친이란 절친한 친구의 줄임말입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늙은이 취급하지마라!”
“아. 죄송합니다.”
어차피 류기천은 오래 볼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는 중국에 남을 것이다.
‘류자영은 뭐 한국에 놀러오라고 하면 되겠지.’
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아버지!”
류자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성숙한 목소리였다.
나와 류기천의 시선이 동시에 마을 입구 쪽으로 향한다. 경공술을 이용해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등에 참마도를 착용하고 회색 무복을 입은 여자였다. 그녀가 다가오자 류기천의 부하들이 길을 만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부하들의 인사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나와 류기천을 향해 다가왔다.
류자영과 굉장히 닮아 있었는데 몸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뚱뚱하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몸이 컸다.
거의 1.9M에 달하는 키. 옷으로 감싸고 있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볼륨감, 그리고 무술을 익힌 여인답게 탄탄해 보이는 몸매. 얼굴은 류자영과 비슷하니 당연히 미인이었다. 다만 여러모로 몸이 컸다.
나이는 대략 3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그는 은인이에요! 괜히 시비 걸지 마세요! 그분 덕분에 자영이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걸 모르시나요?!”
“아, 아니. 나는 이놈의 관상을 보고….”
류기천이 그녀에게 쩔쩔 맸다.
“관상. 관상, 관상! 지겹지도 않나요?! 그 잘난 관상으로 제 낭군님이나 찾아주시죠?!”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청설아. 들어 보거라. 이 남자는….”
“아버지 제발! 제발 그딴 관상 좀 그만 해요! 제가 그 헛소리 때문에…!”
나는 그녀의 몸을 보며 견적을 뽑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슴 부위의 부자연스러움을 보면 압박하고 류자영처럼 가슴을 붕대로 감아 압박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류자영 때문에 붕대 압박 가슴은 대충 견적을 낼 수 있어. 저 정도면… J컵! J컵이 확실해!’
야동에서 보기 힘든 J컵! 거기다 그녀는 동양인이다!
‘흐흐흐…. 자연산 J컵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자연산이 아니라면 저렇게 꽁꽁 가릴 이유가 없지. 흐흐….’
입술을 한 번 핥고 류기천과 류청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 결과, 류기천은 과거에 류청설에게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류청설은 노처녀가 확실했다.
그리고 노처녀는 작업 걸기가 쉽다.
어느 정도 견적을 뽑아낸 나는 그녀를 향해 포권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천류의 제자이자, 류 소저의 친구인 성유진입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반가워요. 패왕도문의 소문주이자, 자영이의 언니인 류청설이에요. 반가워요.”
류청설 또한 포권을 취했다.
“하하. 반갑습니다. 류 소저.”
“소저라고요…?”
“아. 실례였습니까? 류자영 소저와 별 나이차이도 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호호호. 요즘엔 소문주라고만 불려서 잠깐 놀랐을 뿐이에요. 좋을 대로 부르세요.”
“그럼. 류 소저라 부르겠습니다. 류자영 소저와 있을 때는 이름과 함께 부르면 되겠지요.”
“전 성 송협이라 부를게요.”
하하. 호호. 서로 웃고 있을 때, 류기천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청설아! 이놈은 바람둥이의 관상을 가지고 있으니 말을 함부로 믿지 말거라! 이놈은 믿을 놈이 못 된다!”
“아버지! 그는 은인이에요! 무례하게 굴지마세요! 자영아!”
“네. 언니.”
10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자매이기 때문일까. 류자영은 류청설을 공손하게 대했다.
“아버지와 함께 마을 주민들을 모아 란저우시로 떠날 준비를 하렴. 난 잠시 성 소협과 대화를 나눠야겠어.”
“알겠습니다. 언니.”
류자영이 류기천을 데리고 갔다. 팔불출인 류기천은 류자영의 손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부하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일을 시작했다. 그들에겐 익숙한 일상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