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 375. 신의 아틀란티스
375. 신의 아틀란티스
“이 칼에는 악의가 너무 많이 쌓였소. 요도로 변하기 직전이라 할 수 있소.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것 같은데…. 인간을 짧은 시간 내에 학살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이 칼은 위험하오.”
“위험하다니 무슨…. 칼은 칼일 뿐이지 않습니까.”
“장인이 아니면 칼의 상태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오. 그대는 칼을 휘두를 때마다 머리가 아프거나, 괜히 살의가 솟구치지 않았소? 자해를 하고 싶은 욕구도 느꼈을 텐데.”
“아뇨. 아무것도 안 느껴졌습니다만….”
나는 데이먼스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내가 봤을 때 화련비도는 멀쩡했기 때문이다. 다시 봐도 마찬가지다. 요도라고 불릴만한 불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근데 정말 요도로 변할 정도 입니까? 몬스터를 많이 죽이면 무기가 요물이 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좀 더 자세히 말해주겠소. 내가 말한 악의가 쌓였다는 뜻은 사념(死念)을 말하오. 공포, 살의, 증오, 절망,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 말이오. 몬스터는 대부분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에 수 없이 많이 죽인다고 해도 사념이 쌓일 일은 없소.”
“……사람을 죽이면 사념이 쉽게 달라붙는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이 정도의 경우 수 백 명을 학살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데이먼스가 경계심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모른 척 했다.
“사념이 칼에 안 붙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꾸준히 잘 손질하면 되오. 그러나 보통 이 정도까지 오는 경우는 드물지. 칼이 버티지 못하고 박살나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칼을 수리할 때 떨어져나가니까. 이 칼이 대단한 명도였기에 요도로 변하는 것이오.”
가만히 생각해봤다.
내게 화련비도는 여전히 사용하기 좋은 칼일 뿐이었다. 그것도 애착이 많이 쌓인 칼. 요도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요도를 변하면 오히려 내게 이득인 게 아닐까?
“요도로 변하면 칼이 더 강해지는게 아닙니까? 소소한 부작용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소소한 부작용…? 그대는 요도를 너무 얕보고 있군. 요도가 괜히 요도라고 부르겠는가. 소유주를 미치게 만드는 건 귀여운 수준이고, 결국 모든 걸 파멸로 이끌어 버리는 게 요도 일세.”
“그래도 무기는 강해지지 않습니까. 전 부작용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걸 완전한 요도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데이먼스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요도로 변한다고 무기가 강해지진 않소. 변질되는 것뿐이지. 가령 이 칼이 가진 속성 강화 효과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소.”
속성 강화 효과. 데이먼스의 말을 들어보면 화련비도는 뇌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속성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처음 알았다.
“……변한다면 어떤 걸로…?”
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나도 모르오. 아마도 저주 계열로 바뀔 확률이 높겠지.”
“…….”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들겨봤다. 속성 강화보다 더 좋은 효과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요도의 부작용이 나한테만 통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 아직 요도로 변하기 전이니까 통하지 않는 것일 수도….’
무엇보다 나는 속성 강화 능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결정을 내린 나는 데이먼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 사념이라는 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데이먼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요도의 위험성을 깨달은 모양이군! 무기에 달라붙은 재련을 하는 게 가장 좋소. 하지만… 이 정도로 사념이 쌓여있다면 그냥 재련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사제의 축복… 아니면 많은 양의 성수가 필요하오.”
“…….”
사제와 성수.
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돈만 있으면 충분히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제를 구하려면 이 구역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한다. 이 구역과 그 주위는 공간 이동 주문서가 통하지 않으니 최소 5일 이상은 소모해야 한다.
사제의 경우 다시 엘레나의 허락을 받고 여기에 데려와야 한다. 돈이나 시간이나 예상보다 훨씬 지출되는 것이다.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무언가를 번뜩 떠올렸다.
“이건 어떻습니까? 성수는 성수이긴 한데 조금 다른 성수입니다만.”
“음? 어디 한 번 줘보시오.”
내가 그에게 건넨 것은 랜덤 뽑기에서 나온 성스러운 물이다. 이 세계의 것과 조금 다르지만 성수인 것은 똑같다.
[성스러운 물
성스러운 물을 마시거나 바르면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가격: 2 포인트
※주의
양에 따라 효과와 유지시간이 달라집니다.]
뽑기에서 간간이 나왔기에 4병 정도 가지고 있었다. 쓸곳은 찾지 못해 쌓아두기만 하고 있었다.
데이먼스는 성스러운 물을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봤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좀 다르긴 한데 성수는 맞군. 이걸로 한 번 해보겠소. 효과는 있을 것이오.”
“재련을 해주시는 겁니까?”
“그대는 공작 각하의 기사가 아니오? 이 정도 쯤은 당연히 해드려아지.”
데이먼스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인지라 꽤 재밌을 것 같군.”
“이 나쁜 데이먼스! 또 너만 재밌는 일을 하는 거냐?!”
“나 혼자 할 생각은 없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으니 다같이 해야지. 안 그렇나?”
“그렇지! 다 같이 해야지! 하하하!”
드워프들의 뒤쪽을 쳐다봤다. 빈 맥주병 수 십 개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어느새 한 사람 당 두, 세 병을 까먹은 모양이다.
‘술 먹고 일하다가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불안했지만 드워프들에게 간섭할 권한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
철뿌리 드워프 부족의 손님 생활은 그럭저럭 편했다. 드워프들은 나를 귀한 손님 취급을 해주며 그들만의 요리와 그들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입장에서는 영 별로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성유진 님. 공작 각하는 건강하신가요?”
“각하는 건강합니다.”
드워프들은 엘레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종족은 서로 다르고, 엘레나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증오하기는커녕 존경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엘레나가 탐욕스러운 악마에게 약탈 당하던 그들을 구원해주었다고 한다.
‘……저게 드워프 여잔가. 남자랑 여자를 구분하기 힘들군.’
여자도 수염이 있고 몸이 짜리몽땅했다. 남자 드워프와 여자 드워프의 유일한 차이점은 젖가슴의 유무인데 옷을 갖춰 입고 있으면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 번은 여자 드워프들의 목욕을 훔쳐본 적 있었다. 그러나 내 취향은 결코 아니었다.
가슴은 튀어나왔지만 크다는 느낌은 없다. 허리는 굴곡 없이 일자형이고 골반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은밀한 곳은 턱수염처럼 털이 수북하다. 생식기는 인간의 것과 똑같았다.
‘아. 여자가 고프다. 여자!’
방금 현실로 돌아가서 한하린과 섹스를 하고 왔지만 또 여자를 안고 싶었다. 현실의 몸과 지금의 몸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여자 드워프를 덮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굶주린 건 아니었고, 여자 드워프의 얼굴만 봐도 내 자지가 고개를 푹 숙여 버릴 것이다.
“성유진. 문제가 생겼소.”
심각한 얼굴의 데이먼스가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을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화련비도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건 아니오. 그 칼의 재련을 잘 진행되고 있소. 성수의 효과가 예상보다 더 뛰어나더군.”
“그럼 무슨 문제입니까?”
“재료가 부족하오. 이번에 어린 드워프가 창고 정리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창고에 있는 재료에 착오가 있었소. 검을 만들 양은 충분하지만… 갑옷을 만들기엔 한참 부족하오.”
“…다른 구역에 가서 철광석이라도 사와야 합니까?”
“철광석? 우리는 철나무를 사용하오. 그리고 부족한 건 철이 아니오.”
“그럼 뭐가 부족한 겁니까?”
“백철나무의 수액이 필요하오. 백철나무의 수액이 없으면 철나무는 그냥 평범한 철이나 다름없소.”
“그럼 그냥 수액 없이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정말 그걸 원하오? 백철나무의 수액이 없으면 최소 A랭크인 갑옷이 C랭크 갑옷으로 만들어 질 것이오. 그래도 괜찮소?”
“…….”
등급이 무려 2단계나 떨어지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명품이 양산품이 되려고 하는데 심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결 방법은 없습니까?”
“원래 이 시기에는 철나무 숲에 들어가지 않소. 몬스터와 유령들이 기성을 부리는 시기인지라…. 하지만 그대가 도와주면 가능할 것 같소.”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여자도 없고 할 일도 없던 탓에 몸인 근질거리던 차였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
마을 뒤편에 있는 철나무 숲은 으스스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짙은 안개가 껴서 햇빛을 차단하고, 나뭇잎 하나 없는 철로 된 나무들이 띄엄띄엄 박혀 있다. 바닥은 검고 딱딱했다. 숲안으로 들어가자 온도가 확 내려갔다. 새벽의 선선한 날씨와 비슷했다.
나는 데이먼스와 함께 철나무 숲을 걸었다.
“그대는 철나무 숲이 두렵지 않나?”
“? 여기가 왜 두렵습니까.”
“이 음울한 분위기가 두려운 망상을 불려오고, 저 차가운 철나무가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오는 곳이 철나무 숲이오. 특히나 이 짙은 안개. 안개가 심하게 끼는 이 시기에는 우리 드워프들도 철나무 숲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하오.”
“음. 으스스하긴 하군요. 그래도 여기서 나오는 것들은 결국 몬스터이지 않습니까? 몬스터를 죽이면 그만입니다.”
“과연 공작 각하의 기사답게 용감하오. 재밌는 얘기를 해주겠소. 저번에 어린 드워프가 철나무 숲에 들어와 어린 아이처럼 오줌을 지렸는데, 그 오줌을 밟고 바닥에 넘어져 정신을 잃었소. 그때 갑자기 밴시가 나타나 기절한 녀석의 몸에 빙의해 미친 듯이 날뛰었지.”
“재밌는 이야기입니까?”
“그 어린 드워프는 이제 평생 동안 놀림 받을 것이오. 재밌지 않소?”
“예. 뭐, 재밌군요.”
심드렁했다. 그 어린 드워프가 나랑 무슨 상관인가.
데이먼스는 내 반응에 머쓱했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철나무 숲에는 세 종류의 몬스터가 있소. …음. 내가 말했던가?
“자세히는 말하지 않고 유령들이 기승을 부린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하게는 밴시, 괴물쥐, 철나무, 이 셋이오.”
“철나무도 몬스터 입니까?”
내가 알기로 철나무는 그냥 철의 성질을 띤 나무였다. 특수한 방법으로 제련하면 철이 되는 신비한 나무.
“철나무귀. 밴시가 빙의한 것이오. 다른 철나무와는 달리 알아보기도 힘들어서 가장 위험한 나무니 그대도 조심하시오.”
엄밀히 말하자면 철나무 숲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두 종류인 듯 했다. 괴물쥐와 밴시.
“괴물쥐는 그렇다치고… 밴시나 철나무귀는 어떻게 쓰러뜨리십니까? 마을에서 본 바로는 전사들은 수가 적은 것 같았습니다만.”
“그건…. 오, 이런 밴시가 나왔군.”
우우우우우우우.
밴시가 허공에 나타났다. 희끄무레한 여자 귀신이었다. 얼굴은 비쩍 말랐고 눈알도 없었고, 몸은 종잇장처럼 흔들린다. 꼴리는 요소가 전혀 없었다.
파지직.
내가 뇌전을 일으키자 데이먼스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밴시를 어떻게 쓰러뜨리는지 물었소? 내가 직접 보여주겠소.”
데이먼스가 망치를 들고 밴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작은 몸이었지만 그 기세는 호랑이처럼 매서웠으며 민첩했다.
끼아아아아악!
밴시가 저주를 뿌렸다. 정신을 우울하게 만들고 몸을 둔화시키는 저주였다. 나는 마나를 일으켜 저주에 저항했으나, 데이먼스는 그냥 돌진했다. 밴시의 저주는 그의 다리를 막지 못했다.
“어딜! 더럽고 추잡하며 썩은내 풍기는 치마를 펄럭이느냐! 죽어라! 이 못생긴 년!”
데이먼스가 밴시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나는 그의 공격이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밴시같은 유령형 몬스터는 기본 적으로 물리 공격에 면역이기 때문이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물리적으로 피해를 줄 수 없다.
허나 이어지는 장면은 내 예상과 달랐다.
꺄아아아아악!
밴시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안식을 내려주마!”
데이먼스가 연신 망치를 두들겼다. 밴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몸이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푸른색 가루가 약간 남겨져 있었다.
“어이쿠. 바람에 날아가기 전에 가루를 챙겨야지.”
데이먼스는 쪼그려 앉아 가루를 쓸어 모았다.
“마나를 사용한 기척은 없었는데…, 어떻게 밴시를 쓰러뜨린 겁니까?”
“우리 드워프가 잘 하는 게 뭔지 잊었나?”
“……맥주 마시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혹시 밴시의 약점이 맥주였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