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화 〉 427.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427.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다이란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봤다. 설말하니 내가 자신을 대신해 화살을 맞을 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멈추지 마!”
어깨에 박힌 화살을 빼내며 외쳤다. 어깨에서 피가 터지며 고통이 느껴졌지만 엄살부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다이란이 이를 악물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각이 더 날카로워졌음이 눈에 보였다.
“죽여!”
“그물을 던져!!”
오러 익스퍼트라고 해서 죽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체력에는 한계가 있고 수 십 명이 동시에 공격해오면 막아낼 수 없다. 더군다나 현재 나와 다이란에겐 그럴싸한 갑옷도 없다.
운이 좋은 건 탁 트인 평원이 아니라 장애물이 많은 마을이라는 것. 적들을 따돌리고 숲 밖으로 성공적으로 도망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젠장! 어디로 숨은 거야?!”
“찾아! 모든 집을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
우리는 적들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허나 숲으로 도망가지 못했다. 그러기엔 따돌리는데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
우리는 어느 낡은 오두막집 바닥 아래에 숨어서 서로를 보며 침묵했다.
바깥에서 우리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해적들의 인기척이 느껴졌기에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다이란이 내 어깨를 빤히 쳐다봤다. 화살이 박혔던 상처는 아직도 찔끔찔끔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지혈을 하지 않았다.
“…….”
다이란은 조용히 자신의 하얀 셔츠를 찢었다. 그리고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의 상처를 지혈했다.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니, 그렇게 안 해도 된다만.”
“그 심각하지 않은 상처에 죽는 놈들을 몇 명이나 봐왔어. 지금은 임시방편이지만 돌아가면 제대로 치료해.”
근처에서 해적들의 인기척이 들리자 우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선장놈이 또 난리치겠군!”
“이 정도로 뒤졌는데 안 나오는 걸 보면 숲으로 이미 도망친 것 같은데…. 숲으로 가볼까?”
“숲에 함정 깔려 있다더라. 선장도 함부로 숲으로 가지 말고 마을 안이나 샅샅이 뒤지란다.”
삐걱삐걱.
해적들이 오두막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이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건 위기였다. 저들이 지하로 향하는 판자를 발견한다면 꼼짝 없이 들킬 수밖에 없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구석에 있는 낡은 상자를 쳐다보고 가리켰다. 내 뜻을 알아차린 다이란이 곧장 낡은 상자로 향했다.
고민하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다.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그녀가 먼저 상자 안으로 들어갔고, 내가 뒤를 따라 상자 안으로 몸을 넣었다. 상자가 큰건 사실이었지만 두 명이 들어가기엔 비좁았다. 나와 다이란의 몸이 서로 접촉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이란은 벽을 기대고 앉은 상태였고, 나는 그위를 덮친 듯한 자세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녀의 살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서 나를 자극했다.
“……거기 세우지마. 상황이 어떤지 몰라?”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다.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 세우고 있겠나.”
내 몸에 그녀의 가슴이 닿고 있었다. 코르셋에 의해 모아진 가슴은 무척이나 탄력적이었다. 그리고 다리를 통해 그녀의 허벅지가 느껴졌다.
발기한 자지는 그녀의 복부에 닿았다.
“이런 상황에선 좀 자중하지 그래?”
“내가 혈기왕성한 몸이라 그런지 그게 잘 안 되더군.”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서로 입을 다물었다. 해적들이 오두막 지하를 발견하고 살펴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여긴 없어!”
해적의 기척이 멀어졌다.
“후우…. 이제 좀 떨어지지?”
“알았어. 윽, 팔이….”
팔이 아픈 척 하며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가슴의 모양, 냄새, 감촉 그 모두가 뛰어났다.
“괜한 수작부리지 마.”
다이란이 경고하며 나를 밀쳤다.
우리는 다시 상자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상자 속에 있고 싶었지만 그럴 명분이 없었다. 억지를 부려봤자 그녀와의 관계만 틀어질 뿐이다.
인벤토리에서 먹을 걸 꺼냈다. 초코파이와 스포츠 음료다. 내가 건네는 간식거리를 조용히 받아 든 다이란은 나를 따라 먹기 시작했다.
초코파이는 영 별로였지만 시원한 스포츠 음료는 사막에서 시원한 냉수를 마시듯 끝내줬다.
“……왜 그랬어?”
다이란이 물어왔다.
“뭘?”
“왜 날 구했냐고. 솔직히 이해가 안가. 당신의 입장에서 내가 죽어도 상관없지 않아? 굳이 팔을 희생까지 구할 필요가 있었어?”
“네가 없으면 계획이 무산 된다.”
“당신 목적은 명성을 쌓는 게 목적이지, 목숨을 걸 정도로 해적 연합을 증오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널 구하고 싶어서 구했다. 여기서 죽기엔 네가 너무 아깝지.”
“…….”
다이란은 스포츠 음료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다이란. 이번 일이 끝난 뒤에 뭘 할 생각이지?”
“…전에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해적 일을 집어 치우고 육지에서 살 거야. 해적 연합을 배신하고 해적 노릇을 하기엔 위험하니까.”
해적 연합의 간부들을 일망타진한다고 해서 해적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마 몇 년 혹은 빠르면 몇 개월 지나 다시 해적 연합이 나타날 것이다.
“용병일이라도 하려고? 해적이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것도 힘들 텐데.”
해적 출신의 용병. 고용주의 입장에서 이처럼 신뢰하기 어려운 용병이 있을까.
“상인일을 생각하고 있어. 그것도 힘들 것 같으면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잡화점이나 차리고 살 생각이야.”
바다에서 나름 명성을 끼치던 해적의 은퇴 생활이라.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네가 지금 28살이었나?”
“그래서?”
다이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이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거 노처녀의 특징인데.
“내 밑으로 들어와.”
“……나보고 너의 메이드가 되라고?”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가 귀족 출신이란 걸 어렴풋이 눈치 챘다. 잘 살펴보면 그녀에겐 품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도 좋지만 네 능력을 생각하면 메이드보다 해군이 되는 편이 더 낫지. 지금 내 도시에는 해군이 없다. 내가 직접 해적 토벌에 나선 이유도 그 때문이지.”
“해적을 해군으로 쓰겠다고? 정상적인 사고라면 그런 말을 내뱉지 못할 텐데. 아까 머리라도 다쳤어?”
해적을 해군으로 쓴다면 내 명성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평민들까지 내 뒷담을 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다이란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난 이 바다위에서 너만큼 유능한 해적은 본 적 없다. 널 데려가 해군으로 삼고 싶다는 건 진심이다.”
“……생각해볼게.”
내가 알고 있는 다이란 답지 않게 애매하게 여지를 남겼다. 내가 그녀를 대신해 팔에 화살을 맞아서는 아닐 것이다.
‘바다에 대한 미련이 있겠지. 실력을 보면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낸 것 같은데. 쉽게 떠날 수 있을 리가.’
시간이 흘렸다.
새벽이 되자 우리를 수색하는 해적들도 힘이 빠졌다. 몰래 확인한 결과 설렁설렁 탐색 하고 있다. 선장들은 해적들을 차출해 숲으로 쫓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다이란. 해적들의 숫자를 좀 줄여두는 게 좋겠는데?”
손에 쥔 검을 흔들며 말했다.
해적들은 우리를 탐색하느라 지쳐있고, 선장들은 숲에 들어갈 준비로 바쁘다. 최적의 암살 타이밍이었다.
“아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어. 이대로 숲으로 몰래 들어가서 배로 귀환하자. 배로 돌아가면 끝이야. 놈들은 우릴 쫓을 배가 없으니까.”
배가 없는 해적은 해적이라 할 수 없다. 아마도 놈들은 이 마을을 약탈하고 배를 구하려 할 것이다. 적어도 몇 개월은 도적으로 살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예 도적으로 전향하거나.
우리는 몰래 숲으로 들어가 성공적으로 배에 귀환했다. 오러 익스퍼트가 작정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니 느슨한 경계로는 우리를 잡지 못했다.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자!”
“네! 선장님!”
해적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나는 갑판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내 곁으로 멜리사가 다가왔다.
“주인님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걱정했다. 뭣하면 혼자서라도 처들어갈 생각이었다만, 다행히 이렇게 돌아왔군. ……팔을 보니 문제가 있었던 모양인데 포션은 왜 사용하지 않았나?”
“그럴 일이 있었어. 그리고 포션을 너무 쓰면 자연 회복력이 떨어져.”
“흥. 그런 속설을 누가 믿는다고.”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건넸다.
“…음. 주인님은 회복력이 좋군. 포션을 쓰지 않더라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흉터도 없이 회복되겠어.”
내 능력치 중에서 가장 높은 [정력] 덕분에 회복력이 뛰어났다.
멜리사는 내 상처 부위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상처 부위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잠깐 느껴지다가 간질거렸다. 3분도 지나지 않아 상처는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회복되었다.
“붉은 날치 해적단!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지마라! 이번에 받은 빚은 반드시 갚을 거다! 네년들을 붙잡아 팔다리를 자르고 성노예로 만들어주마!”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배는 마을을 지나치고 있었고, 해변에 몰린 해적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저주의 말을 내뱉는다.
선수에 당당히 서서 코트를 펄럭이는 다이란은 씨익 웃으며 그들의 저주를 비웃었다.
“패배자들이 짖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네. 굴라! 놈들에게 선물하나 날려줘!”
그 선물은 뜨거운 불공이었다.
파이어볼 하나에 해변에 모인 혼비백산했다.
나는 옆에 있는 멜리사에게 말했다.
“멜리사. 너도 선물 날리고 와.”
“좋다.”
멜리사가 웃으며 굴라의 옆으로 다가가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는 굴라와 달리 작은 파이어 볼을 연속으로 날렸다.
???
붉은 날치 해적선은 우릭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고요한 바다로 움직였다.
고요한 바다.
바람도 불지 않고, 호수처럼 파도도 치지 않는 바다 지역.
나는 지루함을 느꼈지만, 갑판 위에 있는 여해적들은 평소처럼 놀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다이란. 여긴 왜 온 거지?”
“얻을게 있어서. 알고 있어? 여긴 한 때 배의 무덤이라 불렸어. 30년 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 씨서드가 살고 있었거든.”
“씨서드?”
“거대 바다뱀. 그 몸체가 배를 휘감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하지.”
“그런 놈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바다를 쳐다봤다. 고요하면서도 내부가 어느 정도 비칠 정도로 깨끗한 바다였다.
주먹만 한 물고기와 시선이 마주쳤다. 물고기는 나를 무시하고 유유히 헤엄쳐 멀어졌다.
“지금은 없어. 아무리 오래 사는 몬스터라고 해도 결국은 수 명을 다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여긴 바다사람들의 금지나 다름없는 곳이야. 다른 곳보다 몬스터가 많고, 여기에 오면 저주에 걸린다는 소문을 믿거든.”
여해적들이 긴장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마법과 몬스터가 실존하는 이 판타지 세계에선 말도 안 되는 소문도 진짜 일 확률이 높다. 특히나 바다사람의 경우 더욱 미신을 신봉하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여기 온 이유가?”
“해저 탐험.”
“응?”
“배의 무덤이라고 말했잖아. 이 바다 아래에는 난파선과 보물들이 잠겨 있어. 우린 그 보물을 가져가야 해.”
“돈이라면 충분히 줬을 텐데?”
“연합 간부 중에 골동품에 환장하는 놈이 있어.”
과연. 추천을 받기 위한 작업인 모양이다.
“근데 장비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하려고?”
“…….”
다이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나를 가리켰다.
“…나?”
“어쩔 수 없어. 해저는 위험하니까. 오러 익스퍼트인 당신과 내가 직접 가야해. 저 여자도 데려가면 좋겠지만… 그녀는 만일을 대비해서 배위에 두는 게 좋겠지.”
납득했다.
바다에는 몬스터가 있고, 마나를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은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다. 오러 익스퍼트인 나와 그녀라면 마나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최소 20분은 바다 속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공기 주머니를 가져간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겠지.
“저번에도 그렇고 고용주를 잘 부려먹는군.”
“……정 싫다면 여기 있어. 나 혼자 갈 테니.”
“그냥 해본 말이다. 같이 가지.”
내게는 [물의 축복]이 있다. 바다 속에서 숨을 쉴 수 있고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일엔 내가 적격이다.
다이란과 나는 바다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