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화 〉 42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42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붉은 날치 해적단은 다시 우릭섬에 들렸다.
해적 연합의 간부 중 한명인 비콜은 여전히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늘 일이라곤 여기서 술을 마시는 일 밖에 없는 걸로 보였지만, 이놈은 휘하에 총 8개의 해적선을 다스리는 대해적이다.
“흐흐…. 생각보다 빨리 왔군. 소문은 들었다. 5척의 해적선을 불태웠다지? 이거, 이거 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 있을 줄 몰랐군.”
말은 태평하게 한다. 허나 나는 그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진 걸 눈치 챘다. 이전에는 은연중에 다이란을 무시하는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은 누가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다이란을 경계한다.
‘하긴. 해적선 5척을 한 번에 불태워 침몰시켰다는 정보를 접하면 무시하지 못하지.’
다이란은 비콜을 향해 금화 하나를 던졌다. 비콜이 기다렸다는 듯이 금화를 낚아챘다.
“보릭스와 연락하고 싶어.”
“흐흐흐…. 부족하지만… 보릭스도 너와 대화하고 싶어 하더군.”
비콜이 마법통신구를 던졌다. 다이란이 통신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기다렸다. 다이란.
“보릭스. 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했어.”
-나도 보고는 들었다. 설마하니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군.
보릭스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게 느껴졌다. 아마 본인이 말해놓고도 실패할거라 생각했겠지. 그의 입장에서 다이란이 죽어도 상관없었을 테니까.
“경험도 없던 놈들이야. 방심도 잔뜩 하고 있더라. 그리고 전부 죽인 건 아니야.
-상대가 방심하고 있다고 해서 해적선 5개가 침몰 시키는 건 엄청난 업적이다. 넌 간부가 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군. 데리고 있는 마법사를 이용했나?
“맞아. 이런 면에선 마법사가 대단하다는 건 너도 알잖아?”
-나도 마법사나 한 명 구해봐야겠군.
“추천은 해주는 거겠지?”
-내가 해적이긴 하다만, 입을 가볍게 놀리는 놈은 아니다. 나는 널 간부로 추천하겠다.
“고마워. 수고해.”
-다시 볼 때가 기대되는군.
통신이 끊어졌다. 다이란은 통신구를 비콜에게 돌려주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추천은 2개 더 얻어야 하지 않나?”
비콜이 물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
붉은 날치 해적선이 바람을 등에 업고 바다 위를 질주한다.
다이란은 선수에 앉아 있었다. 바다 바람에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나부끼었다.
최근 들어 그녀가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는 시간이 많았다. 여해적들의 말을 들어보면 다이란은 생각 할 때면 바다를 본다고 한다.
나는 다이란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다이란이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란다.
그 날, 내가 인공호흡을 통해 그녀의 목숨을 구한 날부터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변해 있었다. 본인이나 여해적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온신경을 집중해서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내게는 빤히 보였다.
“……할 말이라도 있어?”
“바다를 보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왔다.”
“…….”
다이란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인간은 가끔 센티해지는 날이 있는데, 다이란에겐 오늘인 모양이다.
‘선장실에서 매일 센티해지는 것 같더만….’
나는 선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뒀다. 내가 그녀를 구해준 이후로 매일 1~2번 씩 자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보나마나 나를 딸감으로 삼고 있겠지.
“계획이 끝난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어.”
“이후라. 전에 말했던 대로 용병이 되기로 한 건가? 아니면 시골 마을에 정착?”
“생각해봤는데 역시 난 바다를 떠나지 못할 것 같아.”
“왜? 해적질을 계속하면 배신자로 낙인 찍혀 얼마 못가 죽을 텐데?”
“내가 나고 자란 것은 바다니까. 그리고 내가 새로이 해적 연합을 만든다면… 그 가능성은 사라져. 아, 당신네 영역에서 해적질 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해적 연합을 만들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아무리 해적이라도 한 번 연합을 배신한 그녀를 지지할리 없으니까. 그리고 이 사실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지금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바다를 떠나기 싫다는 이유로.
‘보통 여자가 아니니 자신감은 있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
나는 그녀를 보다가 전율을 느꼈다. 지금이다! 지금이 바로 기회라고 본능이 외치고 있다.
“나고 자랐다는 건 무슨 뜻이지? 어촌 출신?”
“말 그대로야. 난 바다위에서 태어났어. 정확하게는 바다를 항해하는 무역선 위에서 어머니가 날 출산했지.”
“허…. 그런 일도 다 있군.”
나는 맞장구를 치며 그녀의 정보를 들었다. 다이란은 바다를 보면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술술 말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쌓였다는 뜻이다. 어쩌면 자신의 부하들 보다 날 더 믿을 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 신뢰는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버지는 남작위를 가진 무역상이었어. 상선을 7개나 보유하고 있었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항해사에게 바다를 배웠어. 고용한 선원들을 시켜 근처 바다에 매일 나가서 항해 실력을 높였어.”
“호오. 역시 귀족이었군. 근데 왜 지금은 해적이 된 거지?”
“10년 전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번쩍이던 날의 3일 후, 팔을 잃은 아버지의 부하가 저택에 찾아와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내게 알렸어. 바다가 부모님을 데려갔어.”
“…….”
“그때는 정신이 없었어. 부모님이 한 순간에 돌아가신 것도 믿기 힘들었고, 무역 실패로 인해 수 십 억의 빚이 찾아왔어. 하루에도 이자가 늘어나니 갚기 글렀다고 생각한 난, 부상단주의 딸이었던 굴라와 함께 바다로 도망쳐 해적이 됐어.”
“……그런데도 바다를 좋아한다고?”
“나도 내가 이상한 거 알아. 하지만 바다는 내 세상이야.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도망가겠어.”
다이란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쓸데없이 길어졌네. 지금 대화는 잊어. 재미도 없는 이야기니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어깨를 잡아 저지했다.
“내 제안은 지금도 유효하다. 바다가 좋다면 테브라의 해군이 되어 누벼라. 내 이름 하에 바다를 누빌 수 있게 해주지.”
“…하. 당신의 뭘 믿고? 귀족에게 이용당하다 죽을 바엔 차라리 해적으로 자유롭게 살다 죽는 게 나아.”
“난 내 여자를 토사구팽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원하는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그 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날 쳐다봤다.
나는 어떤 해적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너, 내 여자가 돼라.”
“…하. 당신 목적이 내 몸이란 걸 내가 모를 줄… 으읍!?”
고개를 내밀어 입을 맞추었다. 나는 눈을 감는척하며 실눈을 떴다. 당황하던 그녀는 곧바로 날 밀쳐내지 않고 망설였다.
1초, 2초, 3초.
결국 다이란이 두 눈을 감았다. 입이 큰 그녀의 입술은 두툼하면서도 부드럽고 말랑했다.
급하지 않고 천천히 입술을 비비자 자연스레 입이 벌어졌다.
혀가 움직일 차례였다.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었다. 다이란이 잠깐 몸을 떨었으나 이내 혀로 호응해왔다.
“으응….”
타액이 섞이며 끈적이는 소리가 났다. 다이란은 키스를 못했다. 처녀의 티가 팍팍 났다.
나는 숨을 흘리면서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10분 정도가 흘렸을 때, 무심코 다이란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물컹.
행복한 촉감을 즐기려고 했으나 다이란이 내 손목을 잡고 떨어졌다. 그녀는 붉게 상기 된 얼굴로 날 노려봤다.
“난 당신 여자가 된 게 아니야.”
“키스까지 해놓고?”
“…….”
다이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알았어. 네 의지를 존중해. 키스만 할게.”
내 원래 말투로 돌아왔다. 이미 키스를 허락한 순간부터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성감 고조를 사용한 상태로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흐읍….”
과연 그녀는 앞으로 며칠 동안 순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
붉은 날치 해적선은 한 마을에 정박했다. 평범한 마을은 당연히 아니었다. 해적들과 손을 잡은 마을. 해적 연합의 거점 중 하나였다.
다이란은 당당하게 마을 내를 거닐며 가장 크고 화려한 오두막집에 들어갔다.
고급스러움과 화려함 그리고 기괴함이 넘치는 가구와 장식품들이 가득한 내부였다.
그 남자는 가죽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오! 다이란! 이야기는 들었는데 설마 날 찾아올 줄이야.”
르모르.
해적 연합 간부 중 한 명. 짧은 갈색 머리에 원숭이를 닮은 얼굴과 귀를 가졌다. 몸은 호리호리한데 번쩍이는 장신구들을 착용해 돈 많은 부호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바로는 이놈은 해적이지만 밀수업을 더 전문적으로 한단다.
“내 추천을 받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걸 줘야하는 걸 알지?”
르모르의 취미는 골동품을 모으는 것.
나와 다이란이 바다 아래의 난파선을 뒤진 것은 이놈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다.
“준비해왔어. 마음에 들 거야.”
“글쎄. 내 눈을 만족 시킬 수 있을까?”
다이란의 부하들이 그의 앞에 상자를 놓았다. 그는 생일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색으로 상자를 열었다.
“호오오오?”
르모르가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냈다.
기괴한 조각상이었다.
몸통은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 모양인데 앙상하게 마른 인간의 팔과 다리가 달려 있었다.
“크으! 대단해! 조각상 자체도 훌륭하지만 금으로 만든 팔찌와 발찌가 진짜 멋지구나!”
금이라고 해도 가치는 낮았다. 저것들이 전부 진짜 금이라고 하더라도 금화 5개 이상의 가치는 안 나올 것이다.
“거래는 성사된 거지?”
조각상을 들고 한참동안 호들갑을 떨던 르모르가 조각상을 테이블에 조심히 내려놨다.
“물론. 추천 해주지. 이번이 3번째 추천이지? 다른 한 개는 누구한테 얻을 생각이지?”
“우깅의 통신구 좀 빌려줘.”
“역시 그 놈인가.”
르모르가 낄낄 웃었다.
내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나는 다이란의 계획을 미리 들었기에 우깅이란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자. 참자. 잠깐만 참으면 돼.’
통신구를 받아든 다이란이 가동시켰다.
통신은 수 십초의 무반응 끝에 연락되었다.
-르모르. 주문했던 물건은 구한거야?
기름을 듬뿍 바른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깅. 나야.”
-이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다이란!
우깅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이란의 얼굴이 잠깐 찌푸려졌다.
“…….”
-이렇게 얘기 하는 건 3개월 만인 거 알고 있어? 그것도 다이란, 네가 먼저 내게 연락을 줬다고! 이렇게 기쁠 수가!
“우깅. 내 볼일은….”
-알고 있어. 내 추천을 바라는 거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추천을 함부로 남발하면 내 면이 서지 않아. 다만 네가 내 조건을 들어준다면 기꺼이 추천해줄 수 있어.
다이란이 힐끗 내 눈치를 살폈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던 난 놓치지 않았다.
“네가 날 추천해준다면…….”
내가 팔을 뻗어 다이란의 탄탄한 허리를 휘감았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다이란이 날 보며 두 눈을 크게 치떴고, 르모르는 재밌다는 듯이 입가를 찢었다. 난 르모르의 눈치를 살폈다. 저 놈이 방해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소리 없이 웃는 걸 보니 그럴 필요는 없어보였다.
-응? 뭐야, 다이란. 왜 갑자기 말을 하다 말아?
소리만 전송되는 통신구라 다행이었다. 모습까지 전송되는 고급 통신구였다면 이미 계획은 틀어졌겠지.
“…잠깐 고민했을 뿐이야.”
다이란은 날 밀쳐내지 않았다. 그 동안 해적선에서 기회가 되면 키스했기 덕분일 것이다. 나는 다이란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댔다. 다이란이 몸을 살짝 떨었다.
-하하! 쓸데없는 고민이야, 다이란.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 우린 천생 연분이야. 우리라면 이 바다에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얀 목덜미를 혀로 핥았다.
“하아….”
-오, 뭔가 야한 한숨 소린데? 다이란! 넌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말해봐!
“네가 날 추천해준다면… 허윽…. 너, 너와 결혼하겠어.”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니…. 이게 거짓부렁이고, 계획의 일환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술이 나서 도중에 가죽 코르셋을 풀고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다이란은 저항하지 않았다.
-다이란. 목소리가 떨리는데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하하! 걱정 하지 마. 앞으로 내가 잘 해줄게. 예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게 첫눈에 반했어. 우린 멋진 부부가 될 거야. 이참에 네가 간부가 되는 날, 해적섬에서 우리의 결혼식을 올리는 게 어때?
“푸큭, 크크큭큭!”
르모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