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화 〉 471. 아카데미의 구원자.
471. 아카데미의 구원자.
“유진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엄마한테 전화해? 아까 준 휴대폰의 1번을 누르면 바로 엄마가 달려갈 테니까! 알았지!?”
“응.”
성하리의 호들갑에 성유진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모습을 5분이 넘도록 보고 있던 성한구가 참다 못하고 끼어들었다.
“유진이는 걱정 말거라. 유진이는 네 아들이지만, 내 손자이기도 하다. 유진이의 신변에 어떠한 문제도 없을 것을 내가 보증하마.”
“하. 잘도 말하네요. 미리 경고하는데 유진이에게 어떤 상처라도 생긴다면… 본가를 뒤집어 엎을 거에요.”
“농담치곤 너무 살벌하구나.”
“농담이 아니니까요.”
“…….”
성한구를 성유진을 데리고 본가로 들어갔다. 진령성가의 본가는 거의 작은 마을 크기였다. 건물은 한옥이었는데 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크기다.
성하리는 씁쓸한 얼굴로 본가를 쳐다봤다. 본가의 결계가 느껴진다. 피부가 짜릿짜릿 하다. 본가에 있는 정령들이 자신을 경계하며 배척하고 있다.
성하리가 본가에 들어가는 순간, 저 정령들은 실체화하여 성하리를 공격할 것이다. 본가에서는 조건만 만족하면 정령사가 없더라도 정령들이 실체화 할 수 있었다.
“…하아. 이건 유진이의 미래를 위해서야.”
전투라면 성하리 자신이 가르치면 된다. 하지만 성유진이 가지고 있는 정령사의 재능을 키워줄 방법이 성하리에겐 없었다.
???
성한구의 손을 잡고 진령성가 본가에 들어섰다.
느낌이 변했다.
마나 밀도가 올라간 게 확연히 느껴졌다.
‘결계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줄이야.’
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주위를 살폈다. 본가에는 정령들이 몰려 있었다. 땅원숭이, 불고양이, 바람벌레, 강철뭉치 등등의 정령들이 보인다. 대부분이 하급이지만 중급과 상급도 보였다.
이 공간에 억지로 붙들려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내 곁에 있는 영체 상태의 천둥부엉이 모카도 묘하게 기분 좋아 보였다. 아마도 이 공간 자체를 정령들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끼르르르르르.”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
“뭐야? 뭐야? 뭐야?”
정령들 중에는 내게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녀석들이 있었다. 나는 대답하려다가 관뒀다.
“유진이는 역시 정령들이 보이는 모양이구나?”
“아…. 응.”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단다. 유진이는 정령 친화력이 높으니 당연한 일이란다.”
생각해보니 나는 현재 정령안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기에 있는 영체 상태의 정령들이 잘 보였다.
그중에는 내 시선을 끄는 정령들이 몇몇 있었다.
매끈하게 잘 빠진 여자의 몸을 한 정령들. 그러나 막상 제대로 보면 실망스럽다.
‘젖가슴은 풍만하고 허리는 호리호리해서 몸매는 죽이는데 왜 보지나 젖꼭지가 없어?’
그 이유야 당연히 생물이 아니니까 없는 걸 테지. 원작 설정에 따르면 정령은 섹스로 태어나지 않고 자연계에서 자연의 기운이 뭉치고 형성되었을 때 태어난다고 하니까.
‘젖꼭지랑 보지가 없는 여자라니, 흥미가 팍 식는군.’
성한구의 인도에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가장 큰 건물에 도착했다.
“아버지. 접니다. 유진이와 함께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중심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키가 160cm 정도로 작아 보였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샜다. 또 턱에는 하얀 수염이 길게 자라 있다. 하늘색 계열의 한복을 입고 있어서 겉모습만 보자면 선풍도골의 신선이나 다름 없었다.
성명생.
진령성가의 가주.
그는 늙었음에도 그 어느 젊은이 보다 강렬한 힘을 가진 눈으로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봤다.
“네가 유진이…. 내 증손자구나. 그래. 그래. 듣던 대로 뛰어나구나. 하늘은 아직 진령성가를 버리지 않으심이 분명하다.”
성명생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령안(S) 특성을 가진 내가 높은 정령친화력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이다. 성명생이 나를 보고 만족스러워하는 건 다른 요소 때문이리라.
‘이런 경우는 뻔하지. 자신을 눈앞에 두고 떨지 않았다. 아니면 수 많은 정령들에게 둘러 싸였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마음에 들었겠지.’
나는 어린아이인 척 연기했다.
“안녕하세요. 증조할아버지.”
“오냐. 이렇게 보니 반갑구나. 이리 와서 앉거라. 여봐라! 누구 게 없느냐? 다과 좀 내오거라!”
잠시 후 한복을 입은 아줌마가 다과를 내왔다. 가족은 아닌 것 같고 일하는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얼굴이나 몸매나 내 취향이 아니었던지라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나는 조막만한 손으로 한과를 집어 먹었다. 직접 만든 건지, 아니면 구입한 건지 몰라도 상당히 맛있었다. 맛이나 모양에서부터 고급이란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리고 귀를 쫑긋 열어 성명생과 성한구의 대화에 집중했다.
“우선 유진이의 자질부터 알아봐야겠다.”
“…아버지. 유진이는 이제 겨우 4살입니다. 정령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가는게 옳지 않습니까? 자질을 알려다가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떡합니까. 우리 가문의 희망은 유진이 뿐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자질을 알아야 기초를 알고 수련을 시킬 수 있는 법이다. 네 녀석의 눈에는 유진이가 평범한 애로 보이더냐?”
뜨끔했다. 설마 성명생은 내 연기를 꿰뚫어 본 것일까.
성명생의 말은 이어졌다.
“유진이는 천재다. 평범하게 생각해선 안 돼!”
“하지만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유진이는 4살입니다. 원래 자질 검사는 최소 6살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너희들과 유진이는 다르기 때문이지.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네가 4살 때 정령들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느냐?”
“……대체 언제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유진이처럼 정령과 계약하기는커녕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정령이 무섭다며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지. 하지만 유진이를 보거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정령을 완벽히 무시하고 있다. 거기에 계약한 천둥부엉이를 완벽하게 부린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
성한구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컵에 가득 차있는 오렌지 쥬스의 빨대를 쪼옥 빨았다.
“나는 알 수 있다. 유진이는 나와 너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 우리 가문 역대 최고의 천재야. 유진이의 재능을 확인하고, 키우고, 꽃피우는 게 우리의 사명이자 의무다.”
“……아버지. 우리 가문 역대 최고의 천재라면 하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 유진이가 잘못 된다면… 하리가 우리 가문을 없애려 들 것입니다.”
“쯧. 똑바로 말하거라. 하리. 그 아이의 재능은 정령사의 재능이 아니었다. 정령사의 재능은 역대 최악이었지.”
“…….”
“잔말말고 자질 검사를 준비하거라. 유진이가 잘 못 되는 일은 없다. 너와 내가 있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자질 검사.
원작에서도 진령성가나, 정령사의 비중이 별로 없어서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아. 그런거 자신 없는데.’
나는 재능이 없는 놈이었다. 지금의 내가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유희 생활 어플 덕분이다. 순수한 재능으로 따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하기 싫다고 안 할 수는 없었다.
성명생과 성한구에 손에 이끌러 건물 뒤쪽으로 나갔다. 정원과 다르게 탁 트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무언가 그려져 있었다. 검은 먹물로 몇 시간 전에 그려진 것 같았는데,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마법진이랑은 전혀 다른 이상한 그림들이다. 상형 문자와 어딘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유진아. 저기 동그라미가 보이느냐?”
성명생이 가리키는 곳은 그림의 중심이었다.
“응. …어, 아니. 네.”
“말을 편하게 해도 상관 없다. 저기 동그라미 위로 올라 가서 잠깐 서있거라. 잠깐이면 끝나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응.”
“힘들면 소리 지르거라. 이 할애비가 바로 달려가마.”
성한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혹시 자질 검사란게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건가.
‘자질이란 건 정령 친화력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
성한구의 반응에 괜히 나까지 긴장되기 시작했다.
내가 그림의 중심에 섰을 때였다. 주위 공기가 일렁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정령안을 발동했다. 내 눈이 황금빛으로 변한다.
마나가 보였다.
‘마나 밀도는… 대충 70%인가. 많은 편이군.’
그 마나들 대부분이 지면의 먹물 그림들과 공명한다. 내 근처에 있던 정령들이 화들짝 놀라서 그림 밖으로 물러났다.
콰아아앙!
내 앞에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친 것이다.
벼락이 떨어져 내린 직후 그것은 문이 되었다.
반투명한 문. 2M가 넘는 크기의 문이다. 나는 이게 무엇인지 알았다.
‘정령계와 연결된 문이군.’
그리고 뒤에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은 했습니다만, 유진이의 첫 번째 자질은 번개군요. 거기에 벼락이 칠 정도이니….”
“하리의 아들이 아니더냐. 번개의 자질은 당연히 있었겠지.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자질은….”
대충 알겠다. 그들이 말하는 자질이란 건 나와 잘 맞는 속성을 말하는 모양이다.
‘나는 유희 생활 어플로 뇌전 특성을 가지고있으니 번개는 이해할 수 있어. 다음은… 뭐지?’
직후, 내 주위에 문들이 나타났다. 번개처럼 화려하게 나타난 건 아니지만 11개의 문들이 추가로 나타났다.
“총 12개의 정령문입니다. 근데 이건….”
“번개를 제외하면 특별히 뛰어난 자질은 없구나. 하지만… 수가 많아. 다른 속성들도 균등하게 다룰 수 있다는 거지. 정령안의 힘인가….”
“…문이 열리지 않는군요. 유진이에게 관심있는 정령이 있다면 문이 열리고 나타나야 정상인데…. 정령안을 가진 유진이가 정령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니… 이상합니다. 하다 못해 번개의 문이라도 열려야 할텐데.”
“……쯧. 이유는 하나 뿐이지. 유진이는 우리의 손자지만 동시에 하리의 아들이지.”
“끄응. 정령왕입니까. 정령왕의 분노는 유진이에게까지 향하는 군요. 엇, 잠깐!”
“유진아!!”
성한구와 성명생이 기겁하며 외쳤다. 왜냐하면 내가 번개의 문을 향해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게 달려드는 것보다 먼저 내 손이 정령의 문을 열었다.
파지지직.
본능적으로 뇌전을 일으켰다.
‘이건 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결국은 번개야. 뇌전 레벨 특성이 올라서 그런지 바로 이해가 되는군. 이거… 열수도 있겠어.’
번개의 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거대한 기운이 뿜어지면서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성한구와 성명생은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이만 악 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기운은 내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어디. 정령계에는 뭐가 있나 한 번 볼까.’
문끝을 잡고 몸을 반쯤 걸치고 머리를 정령계 안으로 쑤욱 들이 밀었다.
하늘이었다.
위로는 하얀 구름들이 보였고,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땅과 하늘 위로 치솟는 물기둥, 계속해서 모양이 바뀌는 불꽃, 빛으로 이루어진 나무 등등 몽환적인 것들이 내 눈을 현혹한다.
‘……전부 정령들이군.’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하늘이 아닌 땅에서 난 소리. 아래를 쳐다보자 번개로 이루어진 호랑이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콱 씨!”
한 번 위협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호랑이는 계속해서 날 쳐다봤다.
시선을 먼저 돌린건 나다. 볼 것들이 많은데 호랑이 따위와 눈씨름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쿵. 쿠쿵.
정령게가 진동했다. 무언가가 움직인 것이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멀리 내다보려고 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생긴 거인이었다. 너무 커서 몸의 일부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처럼 생긴 얼굴은 확실하게 보였다. 거인의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눈이 내게 향한다.
-배신자의 피붙이여. 이 세계는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누가 그쪽으로 간대?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이상하군. 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 같지?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마주치는 것 같겠지. 멍청인가.”
-나를 직시 한다고? 설마 내가 제대로 보이는 것이냐? 아무리 정령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내 진체를 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는 인간…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무엇인가?
“아. 그렇군. 네가 정령왕이지? 내가 좋게 말할 때 마마를 향한 주박을 풀어라.”
-…그 요청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돌아가라.
정령왕의 두 눈이 빛난다. 너무 빛나서 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다.
-너는 아주 건방지지만, 내 진체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그 정신에 찬사를 표하마.
“이 새… 큭!”
문에 반쯤 걸쳐져 있던 내 몸이 뒤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