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화 〉 472. 아카데미의 구원자
472. 아카데미의 구원자
정령의 문 뒤쪽으로 날아간 내 몸이 바닥을 몇 번 굴렀다.
“유진아!”
성명생과 성한구가 내게 달려와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워줬다.
주위를 둘러보자 정령의 문이 사라지고 마나 밀도가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의 그림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스킬, 정령계약(C-)의 랭크가 (B)로 상승합니다.』
나와 모카의 연결이 더욱 견고해지고 효율이 좋아졌음이 느껴진다. 허나 느긋하게 정령계약(B)에 대해 신경쓰고 있을틈이 없었다.
“성유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아느냐?! 내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성명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쩌렁쩌렁한 호통소리에 내 귀가 다 얼얼할 정도다. 늙은이의 몸에서 저런 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미, 미안해요.”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리며 말했다.
성명생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인상을 풀고 어조도 부드럽게 만들며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유진아. 앞으로 이 할아비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 항상 귀담아 들어야 하느니라. 지금도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느냐? 자칫 잘못했다간 정령계에서 미아가 될 수 있고, 정신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 제가 그러니 말하지 않았습니까. 유진이는 너무 어리다고.”
“시끄럽다. 지금 내가 유진이에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 넌 조용히 있거라. …아니지. 마실거나 가져오거라. 유진이에게 어른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지 가르쳐야 하니.”
“적당히 하십시오. 적당히. 이러다 유진이가 다음부터 본가에 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유진이는 본가에서 지내는게 아니었느냐?”
“하리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 하십니까? 유진이는 저녁이 되면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리가 본가에 쳐들어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겁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하리가 약해진 상태라 하더라도 우린 하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상성이 최악입니다.”
성하리가 가진 정령 포식자(S) 특성은 정령사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에잉. 유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본가에 머물게 하는게 더 좋거늘….”
“이건 절대 양보할 수 없… 헉!”
성한구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왜 그러냐?”
“유진이가 다쳤습니다!”
아까 바닥을 구르면서 팔꿈치 뒷부분이 까졌다. 피도 나온다. 한방울 정도.
“뭘 이 정도로 놀라고 그러느냐. 원래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은 다치면서 크는 법이다. 너도 어렸을 때는 툭하면 땅에 넘어져 상처를 입었었다.”
“그게 아니라… 하리가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유진이를 때렸느냐? 고작 팔꿈치가 까진 것 뿐이지 않느냐.”
“……아버지는 지금의 하리에 대해 모릅니다. 하리의 유진이에게 가진 집착은 어마무시합니다. 포션을 가져와서 치료하겠습니다.”
“흥. 문제는 없을 거다.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야. 연고나 발라주거라. 팔꿈치가 까졌을 뿐인데 그 비싼 포션을 쓰는게 말이 되느냐?”
“아버지. 제발.”
“포션은 너무 과해. 우리 가문의 연고도 충분히 좋은 거다. 하루가 지나면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거다.”
“…….”
성한구가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성하리가 그냥 넘어가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게 틀림 없다. 내가 보더라도 이건 팔꿈치가 약간 까졌을 뿐인, 흔히 있는 상처니까.
하지만 성한구는 성하리가 얼마나 극성인지 모른다.
난 보다 리얼하게 어린아이인 척 하기 위해 가끔식 성하리가 보는 앞에서 넘어진다. 무릎이 까이거나 팔이 쓸리는 걸 각오하고 하는 자해공갈이다.
그때마다 성하리는 내게 가격만 들어도 억소리 나는 최상급 포션을 아낌없이 사용 한다.
그뿐이랴. 몸에 좋다는 과일과 약이 있다면 돈이 얼마나 들었던 구입해서 내게 먹인다. SS급 히어로이면서도 돈이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성하리는 날 너무 애지중지하게 키운다.
“유진아. 강한 정령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성명생이 내게 말했다. 드디어 수련다운 수련을 하는 모양이다.
“응!”
이제 본격적으로 정령술을 배우는군.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할지 기대했다.
“앞으로 매일 본가에 와서 정령들과 함께 신나게 놀거라.”
“…응?”
???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4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힘든 수련을 시키는 건 학대나 다름없다.
무협지를 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공 수련을 한다는 걸 흔히 볼 수 있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인권이란 것이 존재하는 시대다.
그리고 정령과 놀라는 이유도 버젓이 존재했다.
정령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마나 보다 정령이다.
‘정령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마나가 아무리 많아도 정령을 부릴 수 없으니까.’
정령과 함께 놀라는 건 정령 친화력을 쌓으며, 정령에게 익숙해지라는 의도다. 정령 친화력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정령과 함께 지내다 보면 생기니까.
“후우…. 내가 이 나이에 정령들이랑 놀아야 한다니…. 차라리 컴퓨터 게임을 하는게 더 나은데.”
나는 정원에 쪼그려 앉았다.
귀찮았다.
자동진행으로 이 시간을 넘기려면 우선 선행을 해놔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아바타가 내가 했던 대로 똑같이 정령들과 놀테니까.
“꾸욱.”
“저기. 저기. 이름이 뭐야?”
“차르륵 차차륵.”
“놀자! 놀자! 놀자!”
정령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아까 본가에 왔을 때도 내게 관심을 보였던 정령들이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심하다. 아무래도 아까 정령계에 반쯤 들어갔다가 나왔기 때문인 모양이다.
“아, 시끄럽게…. 그렇다고 안 놀 수도 없고….”
여기서 빼면 어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뭐, 좋아. 소꿉놀이나 할까.”
“소꿉놀이? 그게 뭐야?”
“푸르르르! 푸륵!”
사람말을 하는 정령도 있었고, 사람말을 못하는 정령도 있었다. 그러나 정령들 간의 소통은 문제없었다. 정령들은 소리가 아니라 정신으로 소통하는 쪽이니까.
“야, 너.”
사람 말을 하는 물거북이를 가리켰다.
“응? 나? 왜?”
“지금부터 소꿉놀이를 할 거야. 말하자면 역할 놀이지.”
“응. 응. 옛날이 인간 아이들이 한 걸 봤던 것 같아. 내가 아내 역할이구나?”
“아니. 넌 이등병이야. 난 병장이지.”
“이등병… 그게 뭐야?”
“하면서 배우도록해. 지금부터 시작이야.”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헌터인 나는 군대에 간적 없어서 모르지만, 보고 들은 것들이 있었다.
“야.”
“응?”
“…하. 미친. 야, 관등성명을 어디다 팔아 먹었냐? 어?”
내가 싹 정색했다. 분위기가 확 바뀌자 물거북이가 당황했다. 대충 중급 정령인 것 같았는데 인간의 말을 하는 만큼 눈치란 게 좀 있다.
“…어. 어어…?”
“어쭈. 대답도 안해? 하, 시발. 내가 병장 달고 이등병이랑 이 지랄을 해야 하다니….”
“미, 미안해.”
“미안해? 이런 씨발! 야, 여기가 니 친구야? 왜 반말이야!”
“미안해요.”
“…요? 돌겠네. 진짜. 야, 모카 상병.”
“꾸욱!”
모카가 곧장 대답했다. 한쪽 날개를 들어 경례까지 하면서.
모카는 나랑 1년 넘게 지냈으니 이런 일이 익숙했다. 나는 심심하면 모카를 갈궜으니까. 모카가 내 말을 잘듣는 이유가 갈굼을 당하기 싫어서다.
‘사람이든, 정령이든, 드워프든 일단 갈구면 어떻게든 돼.’
인생의 진리였다.
“잠깐 화장실 갔다 올테니, 이 신병놈좀 제대로 교육 시켜. 갔다왔는데도 개폐급이다? 넌 오늘 나랑 한 따까리 하는 거다. 알겠지?”
“꾸우욱!”
그렇게 나는 몇 시간 동안이나 정령들과 군대 소꿉놀이를 했다.
???
오후 4시 30분.
성한구는 방에서 나와 정원쪽으로 향했다. 성유진을 성하리에게 보내줄 시간이다. 마음같아선 저녁도 먹이고 보내고 싶지만, 성하리와의 약속은 오후 5시까지 성유진을 집으로 보내주는 것. 약속을 어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음…?”
뭔가 조용하다. 원래 집밖에는 정령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야 하는데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정령들 모두가 유진이랑 노는 것에 빠진 건가.’
유진이를 찾아 정원으로 가던 성한구는 깜짝 놀랐다.
그 많던 정령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서있었다. 정령들의 앞에는 사람 말을 할 수 있는 물거북이가 핏대를 세우며 외치고 있다.
“목소리 그거 밖에 안 나옵니까?!”
“까아아아아아!”
“크르르르르르!”
“아닙니다아아!”
줄 서 있는 정령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소리는 제각각 달랐지만 음율은 딱딱 맞아 떨어졌다.
“뜀띠기 10번 합니다. 몇 번?”
“까아악!”
“열버언!”
“후우웅!”
“15번! 마지막 구호 없이! 시작!”
성한구는 입을 벌렸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뜀뛰기 하는 정령들을 볼 수 있었다.
‘…이건… 군대?’
그는 이상 사태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성유진을 찾았다.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 대청마루에 드러누워서 정령들을 쳐다보며 음료수 빨대를 쪽쪽 빨고 있었으니까. 성유진의 옆에는 모카라는 이름의 천둥부엉이가 정령들을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군대의 장군과 그 부관같군.’
헛웃음을 터트린 성한구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아. 정령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지 이 할아비 한테 말해줄 수 있느냐?”
“아, 할아버지.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어.”
“소꿉… 놀이? 내가 알고 있는 소꿉놀이랑은 많이 다르구나.”
“TV에서 본 걸 가르쳐줬을 뿐이야. 내가 대장이야.”
“그, 그렇구나.”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령들은 자유로운 존재.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니까.
“유진아. 이제 돌아가야지.”
“응. 마마 보고 싶어.”
성유진은 대청마루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정령들이 있는 곳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지막 구호 안 붙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합니다! 30회! 몇 회?!”
“호아아악!”
“목소리 봐라! 그것 밖에 안 나옵니까?! 엎드려!!!”
애써 정령들을 무시한 성한구는 식은땀을 흘렸다.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
성유진을 데려다주고 돌아온 성한구는 아직 까지도 소꿉놀이… 아니, 군대놀이를 하고 있는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번 정령들을 말려봤지만, 정령들은 성한구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성한구는 성명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유진이 데려다 주고 왔습니다.”
“그래. 바깥의 정령들이 이상하던데.”
“예. 유진이가 TV에서 본 걸 그대로 정령들에게 가르친 것 같습니다. 정령들은 잠깐 새로운 놀이에 빠진 것 뿐입니다. 조만간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아마도.”
“음. 정령들은 변덕스럽지. 그보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다. 유진이는 역시 본가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아버지.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너무 간단히 생각하지 말거라. 유진이의 장래를 위한 거니.”
“그럼 아버지가 하리를 설득하십시오. 저는 도무지…. 하리를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마.”
성명생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성하리와 사이가 안 좋은건 성명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유진이는 어떻게 교육 시킬 생각이십니까?”
“……그 전에 유진이는 멀쩡하더냐? 절반, 그것도 3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라곤 하나 머리가 정령계에 들어갔다가 나왔었다. 정령에게 홀리지는 않았더냐?”
정령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들은 정령계를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정신에 충격을 받는다. 경지에 이른 정령사들도 정령계에 있는 정령에게 홀려 정신이 망가질 확률이 굉장히 높다.
“다행이구나. 유진이의 정신력이 상상 이상이야. 교육 일정을 조금 더 당겨도 되겠어.”
“아버지!”
“안다. 소리지르지 말거라. 일정을 앞당긴다 하더라도 무리를 시킬 생각은 없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은 정령들과 놀도록 내버려둘 생각이다. 그후에 천천히 정령술의 기초를 가르쳐야지.”
“아버지. 조심히 진행해야 합니다. 조심히. 만약 유진이가 정령술에 흥미를 잃는다면… 우리는 그 아이에게 억지로 시킬 수 없습니다. 정령술은 본인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리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안다. …너는 그 아이의 눈치를 너무 보는 구나. 아비의 위엄이 없어. 위엄이.”
“…하리의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버지로서 위엄을 차릴 수 있겠습니까.”
“쯧.”
성명생이 짧게 혀를 찼을 때였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본가의 결계가 흔들렸다.
깜짝 놀란 성명생과 성한구가 소리가 난 입구쪽으로 쏜살같이 날라갔다.
어디선가 날아온 뿌리뽑힌 나무에 대문이 박살 나 있었다.
“……습격이냐? 습격자는 누구냐! 감히 진령성가에…!!”
“아버지. 진정하십시오. 나무에 번개의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하리의 짓입니다.”
“그 아이가?! 왜, 갑자기?! 선전포고더냐?!”
“아닙니다. 아마… 유진이의 상처를 발견한것이겠지요.”
“……겨우 팔꿈치가 까진 것 때문에 나무를 냅다 던졌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하리가 유진이에게 가진 집착이 엄청나다고….”
“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