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5화 〉 475. 오싹한 워터 파크
475. 오싹한 워터 파크
부천에 위치한 크레센트 워터 파크의 입구에는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절반은 수월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이고, 다른 절반은 한국 헌터 협회에서 파견된 헌터들이다.
나와 한하린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나와 한하린은 헌터계에서 유명했다. 예전에 ‘던전 서바이벌’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실력을 대중에 선보였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유망주들이다.
시선은 나보다 한하린에게 더욱 호의적이었다.
한하린은 수월 길드 소속의 S급 헌터 후보인 한아영의 여동생이니까. 거기에 예쁘기까지 하니 호감이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방인 취급이군. 특히 남자놈들의 시선이 따가워. 아주 기분 좋아.’
마음속으로 낄낄 웃었다. 남자의 질투는 날 기분 좋게 만든다. 뭐, 도가 넘어서면 정반대의 기분을 맛보겠지만.
나는 일부러 옆에 있는 한하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한하린이 힐끗 날 봤지만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남자들의 시선이 더욱 강렬해진다.
“하린아! 유진아! 이리로 와! 인사는 해야지!”
한아영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불렸다. 우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우리를 두고 길드원들에게 소개했다. 대부분이 C급과 B급 헌터들이다.
“이번 크레센트 워터 파크 던전에서 함께 할 헌터들이야. 등급은 C급이지만… 유명하니 너희들도 알지? 하린이는 내 여동생이고, 유진이는… 내 친구야. 두 명 모두 자연계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도움이 될 건 확실해.”
“잠깐만. 아영아.”
흘러가는 분위기를 끊은 것은 장고준이었다.
짧은 투블럭 머리를 한 남자. 그는 찌릿하고 잠깐 나를 노려봤다가 무표정함을 연기했다.
나는 예전에 그와 잠깐 대화를 나눈 적 있었다.
‘한아영의 동료. 한아영과 모텔에 가기 전에 잠깐 마주쳤지. 크크. 꼴을 보니 아직 한아영을 포기하지 못 했나 보군.’
그런데 어쩌나. 한아영은 이미 똥구멍 순결까지 내게 바쳤는데.
“고준아. 왜?”
“유진 씨와 하린 씨가 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크레센트 워터 파크는 우리 길드의 소유잖아. 막상 생각해보니 그들을 끌어들이면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문제는 없어. 길드 마스터의 허락은 떨어졌고, 협회도 인정했어. 그렇죠?”
한아영이 옆에 있는 협회쪽 책임자에게 물었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한하린 씨와 성유진 씨는 협회에서도 그 실력을 믿고 있는 젊은 헌터들입니다. 이분들이 조금이라도 더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는게 협회의 입장입니다.”
장고준은 내가 아니꼬운 것이다.
“…미안. 내가 좀 예민했어. 침식형 던전은 처음이라 긴장했나 봐.”
“괜찮아. 너처럼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야 문제 없이 돌아가는 법이니까.”
마침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향해 씨익 웃어 주자, 장고준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고준아. 브리핑 부탁해.”
“…그래.”
사람들은 브리핑을 위해 설치된 천막 쪽으로 향했다.
나는 잠깐 멈춰 서서 워터 파크를 쳐다봤다.
“하린 선배. 저거 느껴져요?”
“……그래. 저건 이미 던전이야.”
내 감각이 말하고 있다. 저기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한 워터 파크가 아니라고.
한하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워터 파크를 노려봤다.
“불쾌해.”
그녀도 침식형 던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와 같은 심정이다. 저 워터 파크를 보고 있노라면 내 영역을 침략 당한 듯한 느낌이 든다.
???
“미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어제 워터파크를 둘러보았고 구조와 나오는 몬스터, 던전의 특징을 조사했습니다. 허나 여러분들에겐 이 침식형 던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장고준이 화이트 보드 앞에서 차분하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침식형 던전을 경험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다. 던전의 구조, 몬스터, 특징. 그 모든 걸 알려주는 건 공략법을 주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다른 헌터들은 익숙한 표정이군. 하긴 폐쇄형 던전도 정보 없이 들어가야 하니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고준의 실력은 둘째치고 S급 후보인 한아영이 있으니까. 여차하면 그녀가 나서서 구해주겠지. 거기에 워터 파크면 한아영의 빙결 능력이 위력을 발휘하기 딱 좋은 장소니까.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침식형 던전에 대해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침식형 던전은 지금까지의 던전과 다릅니다. 지금까지의 던전은 우리 세계와는 다른 곳에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포탈을 통해 오갈 수 있었죠. 던전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젠간 포화 상태가 되고, 이때 던전 붕괴 현상이 시작됩니다. 던전 내의 몬스터가 밖으로 빠져나오는 현상이죠.”
던전 붕괴는 최악의 상황이다. 만약 인구가 몰린 도시에서 던전이 붕괴된다?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다. 던전이 동시에 불괴되면 중국 꼴이 날 수도 있다.
뭐, 안정화된 오픈형 던전은 좋은 자원 공급처가 되지만.
“침식형 던전은 붕괴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래 내버려 두면 그 주변 일대의 환경을 바꿔버리고, 서서히 영역이 확대됩니다. 서서히 우리 세계를 던전으로 덧씌워지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침식입니다. 또한 외부에서 공격할 수 없습니다. 침식형 던전을 감싸고 있는 막이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죠. 침식형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헌터들이 입장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서서히 영역을 넓힌다면 오픈형 던전처럼 자원 공급처로 만드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식민처를 만들려다가 오히려 이쪽의 세계가 식민지가 될 수 있다.
“던전은 침식이 진행될수록 점점 위험해집니다. 네. 던전이 성장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헌터들은 침식형 던전이 손댈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없애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라는 오글거리는 말은 둘째치고 던전이 성장한다는 건 의외였다.
‘A급 던전이 S급이 던전이되고, S급이 SS급이 된다는 건가. 협회는 골치 아프겠어.’
협회 헌터는 절대 되지 말아야지.
“…저기. 장고준 헌터님.”
“네. 말씀하십시오.”
“침식형 던전에서 건물이 박살나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가 물어내야 하는건 아니죠?”
“다행스럽게도 침식형 던전 내의 건물은 부서지더라도 서서히 복구됩니다. 던전이니까요. 그리고 부서진 채 공략되더라도 부서진 건물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게 됩니다. 건물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저기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헌터의 소득이 많더라도 건물이 박살나면 감당하기 어렵다. 만약 부서진 건물이 복구 되지 않는다면 헌터들 중 80% 이상은 침식형 던전을 공략하러 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 걸고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데 오히려 돈을 줘야한다고? 미친 소리지.’
나만 해도 그렇다.
“침식형 던전의 공략 방법은 던전 어딘가에 있는 던전 코어를 박살 내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고, 보스 몬스터와 융합된 상태 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희와 협회는 던전 코어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직접 던전 코어를 찾아 파괴하십시오.”
슬슬 지겨워진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한하린의 허벅지에 손을 뻗었다. 옷 위지만 탱탱한 허벅지는 쓰다듬기 딱 좋았다. 마음 같아선 커다란 H컵 가슴을 희롱하고 싶으나, 그건 너무 눈에 띈다.
“…성유진. 브리핑 진행중이잖아. 집중해.”
한하린이 내 손을 잡아 저지했다.
“어차피 결국 조심하라는 잔소리들 뿐이잖아요. 들을 건 다 들었어요.”
내 손은 멈추지 않는다. 한하린은 힐끗 내 얼굴을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날 막는 걸 포기했다.
이미 우리는 갈 데까지 간 사이다. 이제와서 이런 성희롱 정도로 한하린이 화낼 리 없다.
허벅지의 안쪽을 쓰다듬던 내 손이 그녀의 허리 벨트를 풀고 안쪽을 슬쩍 확인했다.
속옷 대신에 하얀색 비키니 수영복이 있었다.
“선배. 제 부탁대로 입고 와주셨네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들어줬을 뿐이야.”
수영복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지만, 타이밍 안 좋게도 브리핑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충고해드리자면, 던전 내의 모든 것을 믿지 마십시오.”
???
한아영과 장고준을 포함해 총 24명이 크레센트 워터 파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뒤따라온 협회 직원까지 합하면 30명이 넘는 대인원이다.
워터 파크에 들어가자마자 환경이 변했다.
하늘에서 장대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먹구름 하나 존재 하지 않는 새파란 하늘이다. 이건 명백한 이상 현상이다.
‘밖에서 봤을 때도 비가 오는 것 같지 않던데…. 이게 침식형 던전의 특징인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비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비가 싫다고 우산을 쓸수는 없었다. 시야가 방해받고, 우산을 드는 한 손이 제한 된다. 전투에 치명적이다.
나는 한하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제 말대로 수영복 입고 오길 잘했죠? 저 사람들은 속옷까지 흠뻑 젖어서 불쾌할거에요. 아, 저도 수영복 입었어요.”
”…….“
한하린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 말을 무시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우리들은 입구 근처에 있는 넓은 광장에 모였다. 바깥보다 마나 농도가 조금 짙다. 물론 이것 때문에 문제 될 건 없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여기 있는 헌터들은 최소 C등급 이상으로 마나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B급 헌터 6명은 자연스레 분수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A급 헌터인 한아영과 장고준이 나서지 않는 이상 그들이 이 무리를 이끌 것이다. 등급이 높은 헌터가 리더가 되는 건 불문율같은 거니까.
나와 한하린은 지켜봤다. C등급이기도 했고, 우리는 수월 길드 소속이 아닌 이방인이니까.
잠시 후, B급 헌터들 중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 무리를 이끄는 임시 리더가 되기로 한 모양이다.
그녀는 연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굵게 땋은 헤어 스타일이다. 보기 좋은 구릿빛의 탄력적인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입술은 도톰하고 눈매가 날카롭다.
무기는 너클이다. 자존심이 강해보이는 여전사처럼 보인다. 단련된 몸과 무장을 보니 그녀의 전투 방식이 그려진다.
‘딱 봐도 격투기를 사용하는 초근접전이 전문이겠지. 희귀한 케이스군.’
가슴은 적당히 큰 C컵. 군살은 하나도 없다. 팔과 다리에는 근육이 느껴진다. 전투복에 감싸인 탱탱한 엉덩이도 매력적이다.
그녀는 나와 한하린을 힐끗 쳐다봤다. 특히 한하린 쪽에 시선이 몇 초간 머물렀다.
”B등급 헌터인 공지영입니다. 저희는 모두 함께 오른쪽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침식형 던전의 정보를 알아내기로 했습니다. 이번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침식형 던전의 정보라 생각합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주십시오.“
듣기 좋은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말투로 보아 여기에 있는 헌터들은 서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본다. 이견은 없었다. 장고준과 한아영은 사전에 말했던 대로 나서지 않고 지켜만 봤다.
”이견이 없으시다면 천천히 던전 공략을 시작… 윽?“
공지영의 뒤쪽, 분수대에서 물덩어리가 치솟으며 사람의 형태를 취한다.
C급 몬스터인 워터맨이다. 몸 어딘가에 있는 투명한 핵을 박살내면 죽일 수 있다.
몬스터의 기습에 헌터들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들의 무기를 손에 쥐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나다.
워터맨이 나타나자마자 능력을 사용했다.
‘벼락.’
쾅!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워터맨의 몸을 절반으로 갈랐다. 아쉽게도 핵을 박살내지 못했다. 워터맨의 몸이 빠르게 재생된다.
”하앗!“
공지영이 기합을 터트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방금 내가 사용했던 것보다 더 큰 굉음이 발생했다. 그녀의 주먹이 워터맨의 몸 전체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금이간 투명한 핵이 분수대로 떨어진다. 공지영은 떨어지는 핵을 붙잡아 박살 냈다. 그녀의 손에는 마석 하나만 남아 있었다.
”C급 몬스터인 워터맨이군요. 이 환경은 워터맨에게 지나치게 좋은 환경입니다. 몸을 갈라도 3초 안에 재생합니다. 그러니 저처럼 한 번에 몸을 날려버리거나… 최대한 핵을 노리십시오.“
공지영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쉬운일이 아니다. 워터맨은 핵이 투명해서 노리는 것도 쉽지 않고, 검이나 창같은 공격도 잘 통하지 않으니까.
그녀와 내 눈이 잠깐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서 나를 향한 고마움을 느낀 내가 씨익 웃었다. 미녀를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자. 다시 움직… 이런, 시작부터 험난하군요.“
공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주위에 대략 30마리의 워터맨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