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화 〉 483. 1,000 Km
483. 1,000 Km
[1,000 Km.
1,000 Km를 달리십시오. 아주 상쾌해질 겁니다!
퀘스트 보상: 근력+3 체력+3 민첩+3 정력+3]
내가 이번에 선택한 퀘스트였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퀘스트도 있었지만, 보상도 영 별로고 유희 세계도 별로 재미 없을 것 같아서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1,000 Km 달리기 퀘스트를 선택했다.
[성유진
레벨: 62
근력: 62 체력: 62 민첩: 61 지능: 50 정력: 65 마나: 63]
지금의 내 능력치였다.
‘달리기 보상으로 받으면 더 올라가겠지. 보상을 포인트로 합산하면… 600 포인트! 적은게 아니야.’
1,000 Km.
일반인에겐 어마무시한 거리일지도 모르겠지만, C급 헌터인 내게는 크게 먼 거리가 아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달리기 시작하면 1,000 Km 정도는 이틀 안에 끝낼 자신이 있었다.
‘근데 그냥 뛰기엔 뭐한데… 뭐, 마라톤 대회 같은 거 없나? 혼자 뛰는 것도 심심하니 박수호랑도 같이 뛰어야지. 박수호는 후배니까. 고생도 같이해야지.’
내 유일한 친구인 오준혁은 협회 직원이 되기로 마음먹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문자 메시지를 보면 여전히 시간이 나면 클럽에서 놀고 다니는 모양이지만.
나는 쓸만한 마라톤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일주일 후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있긴 한데… 이건 일반인 전용이잖아. 그리고 난 42Km가 아니라 1,000 Km를 뛰어야 한다고.’
헌터용 마라톤?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참가하는 마라톤에 헌터가 끼어들 수도 없다. 마라톤을 관리하는 쪽이라면 모를까.
‘영 없으면 동네 운동장이나 뺑뺑 돌아야겠군.’
나는 박수호에게 연락했다. 일단 그의 의사도 물어볼 겸, 하승희와 어떤 관계로 발전하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다.
-네. 유진 형. 무슨 일이세요?
“별건 아니고. 내가 대한민국 국도를 한 번 달려볼 생각이거든. 도보 여행이라고도 하지. …많이 바쁘냐?”
-저야 뭐, 항상 똑같죠. 도보 여행은… 좋네요. 저희 둘끼리 하는 건가요?
“네가 안 하면 나 혼자라도 할 생각이야.”
진세영이랑 한아영은 바쁘고, 한하린은 이런 일에 잘 어울리지 않을 것니 분명했다. 최근에 내 섹스 프렌드가 된 공지영도 수월 길드 소속이라 쉽게 3일 이상의 시간을 낼 수 없다.
-혼자서요?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하긴. 난 C등급 헌터야.”
사람이 적은 시골이나 음산한 길에서 몬스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이 있다. 대부분이 E급 이하의 몬스터이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유진 형의 실력이면 안전하겠죠. 도보 여행이라 하셨는데 서울에서 어디까지 갈 생각이세요? 부산?
“아니. 서울에서 서울까지. 대충 국토를 한 바퀴 돌 생각이야.”
그럼 대충 1,000 Km는 채우겠지.
박수호의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무언가 고민하는 게 틀림 없었다. 돈이 급한 박수호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헌터이니 며칠 정도는 쉬워도 될 것이다. 그리고 박수호는 나와의 친분도 신경 쓰일 것이다.
-…어. 저도 형이랑 함께 할게요.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혹시 돈 받고 같이 도보 여행할 사람을 인터넷에서 구하는 게 어때요? 헌터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몇 십 만원은 벌 수 있을 거예요.
박수호는 금세 돈 쪽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일반인들을 끌어들이는 건 안 돼. 걷는 게 아니라 계속 달릴 생각이니까. 일반인은 쫓아오지 못해. 아, 넌 신체 능력이 뛰어나니 괜찮지?”
-체력이라면 자신 있어서 괜찮아요. 그럼 중간, 중간에 던전 공략을 하는 건 어때요?
“던전 공략?”
-네. 서울에는 오픈형을 제외한 던전을 찾긴 어렵지만… 다른 지방은 조금 달라요. D급 이하의 던전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쉽게 찾을 수 있다? 헌터들이 내버려 둔다고?”
-C급 이상의 헌터들은 D급 이하의 던전은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거든요. 실제로 C급 오픈형 던전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큰 차이가 있고, 차라리 외국에 나가는 쪽이 돈을 더 버는 수가 있어서 국내의 지방에 있는 D급 이하의 던전은 방치되는 경우가 많아요.
“D등급 헌터들은 안 움직이고?”
-일부러 방치하는 거예요. 던전이 계속 방치되면 협회에서 던전에서 현상금을 걸거든요. 그 현상금을 노리고 암묵적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방치된 던전에 협회가 현상금을 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걸 노리고 방치하고 있는 상태일 줄 몰랐다.
“뭐, 진짜? 협회가 그걸 방치한다고?”
-협회도 뭐라 할 수 없는 거죠.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어요.
“난 몰랐는데.”
-……위로 올라갈 생각을 포기한 헌터들이나, 돈이 궁한 헌터들 정도밖에 몰라요.
“아. 과연.”
-도보 여행을 하면서 던전을 공략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진 형의 의견에 따를게요.
“괜찮을 것 같네. 그래도 던전이 보인다고 무작정 공략을 시도할 생각은 없어.”
-알았어요. 근데 언제부터 시작할 생각이세요?
“될 수 있으면 내일부터 하고 싶은데. 가능해?”
-가능해요. 내일 점심 무렵에 시작할까요?
“그래. 내일 보자.”
-음. 이런 건 처음인지라… 뭘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
“던전에 들어가야 할 테니 대충 장비만 챙겨.”
???
나는 박수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코스는 대충 경남에 갔다가 전남,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다.
나와 박수호는 든든한 국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형. 역시 음식은 국밥이 최고인 것 같아요. 맛도 좋고 배 속이 든든해지는 데다가 가격도 싸죠. 와, 가성비가 진짜.”
“난 소고기국밥이 맛있더라.”
점심을 먹고 박수호와 함께 부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5Km를 주파하며 한산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지만 나와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수호. 네가 벌써 D급 헌터를 노리고 있다니… 엄청 빠르네. 어쩌면 나보다 더 빠를지도 모르겠어.”
“아직 D급 헌터가 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전 유진 형처럼 1년 만에 C급 헌터가 될 자신이 없어요. 전 재능이 있다기보다는 좋은 능력 때문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박수호의 뒤통수를 까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강렬하게 느꼈다.
재능이 없고 능력 때문에 빠르게 성장한다? 그건 내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박수호는 재능을 갖춘 놈이었다. 외모도 평균 이상이고 공부도 잘한다. 전투 센스도 뛰어나고 성실하다. 엄친아가 있다면 이런 놈이겠지.
‘…생각할수록 좆같네. 넘어지는 척하면서 대가리 한 대 때릴까?’
나는 벌써부터 일이 귀찮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한하린과 섹스하고 있었을 텐데!’
반면에 박수호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렇게 달리는 건 오랜만이라 기분 좋네요. 날씨도 엄청 맑고요.”
“날씨가 좋긴 하지. 좀 많이 덥다는 게 문제지만.”
“유진 형. 형이 수월 길드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과 내에 돌던데. 사실이에요?”
“소문이 벌써 그렇게 낫나?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 너무 믿지 마라. 잠깐 수월 길드랑 같이 행동했을 뿐이야. 수월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형 정도면 수월 길드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아요? 저 같았으면 바로 수월 길드에 들어갔을 텐데.”
“수월 길드는 나랑 안 맞아.”
한 번 대학교에 들어가서 소문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하승희랑 어떻게 지내?”
하승희.
이번에 헌터과로 들어온 재벌 2세. 내 여자 후배지만 지금 나와 그녀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형의 말대로 승희랑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연락은… 이틀에 한 번은 하는 편인데 많이 부담스럽네요.”
“헌터계에선 인맥도 중요해. 잘 지내는 게 좋아.”
하승희는 박수호의 능력을 알고 접근하는 것이지만, 약간의 감정도 있는 거로 보인다.
우리는 2시간을 냅다 뛰었고 60Km를 달릴 수 있었다. 시속 30Km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린 것이다.
“허억. 유진 형. 잠깐 쉬다 가죠.”
박수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여유로웠다. 체력적으로 내가 더 위에 있다.
“그래.”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서 쉬었다. 박수호는 준비해온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의 스마트폰이 우웅 진동한다.
“승희한테서 메시지가 왔네요.”
“무슨 내용인데?”
“별건 아니고 그냥 뭐하냐는 질문이에요. 오늘 갑작스럽게 시작한 도보 여행인지라…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박수호는 하승희에게 답장한 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대한민국에 나타난 던전 위치를 표시해주는 앱이었다.
“형.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방금전에 현상금 걸린 E급 던전이 있어요. 공략하고 가지 않을래요? 폐쇄형 던전이긴 한데… 형의 실력이면 간단히 할 수 있을 거예요.”
“폐쇄형 던전은 경험 해본 적 없는데… 뭐, E 등급이면 어렵지 않겠지.”
“…어, 진짜 폐쇄형 던전이 처음이에요?”
“처음이야. 굳이 할 필요는 없거든.”
나는 현실에서 위험한 건 피해 왔다. 던전에 들어가더라도 오픈형에만 주야장천 들어갔다. 폐쇄형은 한 번 들어가면 특수한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폐쇄형 던전에 들어가고 너무 나오지 않으면 협회가 도와준다고 하지만… 협회를 그렇게 까지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폐쇄형 던전은 돈은 되지만 최악의 경우 일주일 이상을 갇혀 있어야 될 수도 있었다.
“전 공개 파티를 짜고 몇 번 해봤는데 별거 없던데요?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는게 좀 힘들긴 했지만 유진 형이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럼 한 번 공략해볼까.”
“네. 여기서 멀지도 않고 방금 전에 현상금도 걸렸어요. 지금 바로 신청 누를게요. 성공했다!”
박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쉬지 그래?”
“아니요. 형. 빨리 가야 해요. 3시간 안에 인증 사진 찍어서 안 올리면 자동으로 신청이 취소돼서 다음 신청자에게 돌아가게 돼요.”
박수호의 재촉에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박수호가 날 이끈 곳은 어느 야산의 일부였다. 박수호는 던전으로 들어가는 포탈을 등지고 나와 함께 사진을 찍어 앱에 올렸다.
“이제 들어가면 되지?”
“아뇨. 협회의 승인이 필요해요. 저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C등급 헌터인 형이 있으니 금방 승인이 날 거예요.”
“와. 편하다. 나 때만 해도 그런 앱은 없었는데.”
“4개월 전쯤에 나온 앱이에요. 편하긴 해도 국내만 한정되고, C등급 이상 던전은 앱에 뜨지도 않아요. 아, 승인됐다. 이제 협회에서 사람을 보내 줄 건데, 저흰 그냥 공략을 시작하면 돼요.”
폐쇄형이라 던전 내의 환경이 어떤지,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약간 긴장하며 박수호와 함께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던전안은 열대우림이었다.
한국의 여름보다 훨씬 더 높은 온도와 습도가 느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열대우림 곳곳에 석탑이 있었다. 형태가 조금 이상하다. 3개의 석탑이 엉켜있는 듯한 모습이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건 결코 아닐 테고 누군가가 만든 게 틀림없다.
“…….”
박수호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멍하니 석탑들을 보고 있다. 이미 석탑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굉장히 놀라고 있다.
“말도 안 돼… 저게 왜….”
“야, 박수호. 정신 차려. 갑자기 왜 그래?”
“…유진이 형.”
“저 석탑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날 보는 박수호의 표정을 좋지 않았다. 굉장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같으면서도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형. 형은 제 능력을 아시죠?”
“문신 세계 능력이잖아. 문신을 통해 다른 세계와 연결된 능력. 문신 세계가 발전할수록 네 힘도 강해지는 능력. 아, 그때부터 몇 달 지났는데 좀 발전은 했어?”
“…네. 문신 세계…, 저와 연결된 베로프린 도시는 이전 보다 30% 이상 발전했어요. 제가 탐색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졌는데… 저 석탑이 있었어요.”
“……문신 세계에 저런 석탑이 있다고?”
박수호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이 던전 안이 네 문신 세계 속이라는 건 아니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몬스터가 뭔지 알아?”
“저 석탑은 호플족의 상징이에요. 문신 세계와 똑같다면 호플족이 있을 거예요. …여긴 던전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호플족? 좀 더 자세히 말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