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화 〉 490. 신의 아틀란티스
490. 신의 아틀란티스
강명진이 이번에 노리는 건 총 4개의 구역을 동시에 공략해 지배권을 얻는 것이다.
제 6,331 구역, 분노한 왕자의 땅.
제 6,332 구역, 서글픈 왕비의 정원
제 6,333 구역, 집념하는 왕의 성.
제 6,334 구역, 잠자는 공주의 탑.
공식적으로는 3개의 구역을 공략하지만, 마지막 히든 구역인 ‘제 6,334 구역’은 우연을 가장해 공략할 속셈이다. 그 이유는 의심을 피하기 위한 것. 히든 구역의 정보까지 너무 잘 알고 있다면 동료들이 자신을 의심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강명진이 이 구역을 지배하며 얻을 것들. 그것들은 모두 강명진에게 넘길 수 있다. 딱 하나, 잠자는 공주를 제외하고는.
‘여자, 그것도 미녀를 강명진에게 줄 수 없지.’
그러니 잠자는 공주를 빼돌려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극복해야 할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나 혼자 떨어져서 개인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 공략 과정에서 내가 떨어질 건더기가 없다. 내가 만약 억지로 개인 활동을 한다면 강명진이 날 깊이 의심할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
「제 6,331 구역, 분노한 왕자의 땅에 입장하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합니다.」
강명진이 주머니에서 크면서도 낡은 열쇠를 꺼냈다. 열쇠가 살짝 빛나는 듯하더니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사라졌다.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제 6,331 구역, 분노한 왕자의 땅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제 6,331 구역, 분노한 왕자의 땅을 지배하기 위해선 숨겨진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그 숨겨진 조건이란 제 6,332 구역과 제 6,333 구역까지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가기 전에 준비하도록.”
강명진이 평소보다 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라는 걸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에 불만은 없었다.
우리들은 강명진이 이전에 가르쳐준 공략법대로 두꺼운 천을 이용해 두 눈을 제외하고 피부가 드러나지 않게 온몸을 감쌌다.
“아으… 예상은 했지만, 많이 불편하네요.”
서큐버스가 되고부터 섹시한 의상을 선호하던 유서희가 작게 투덜거렸다. 두꺼운 천 옷은 남자를 현혹하는 몸매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차라리 이게 더 낫지.”
주서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최근 밤마다 노출도 높은 바니걸 의상을 입었다.
준비한 옷을 입고 다시 한번 짐을 확인한 우리들은 강명진의 짧은 한마디와 함께 드디어 6,331 구역에 들어섰다.
“가자.”
드넓은 황무지였다. 그러나 평범한 곳은 결코 아니었다. 평범한 황무지에는 한쪽에 시뻘건 용암으로 된 강이 흐르지는 않을 테니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주위의 기온은 순식간에 40도를 넘어간다.
마음 같아선 몸에 걸치고 있는 두꺼운 천을 내팽개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랬다간 더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두꺼운 천이 특수한 태양 빛을 막아주니까.
“…….”
강명진이 가만히 선 채로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길잡이의 나침반(S)」 길을 잃었을 때 목적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2달 전쯤에 강명진의 부탁을 받아 내가 구해온 물건이다.
나도 몇 번 사용해봤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썩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왼쪽 아래다. A 대형을 짜면서 움직이자.”
A 대형.
가장 기본적인 대형이다.
강명진, 지영빈, 그리고 내가 전열에 서고, 그 바로 뒤에 주서현, 이민정. 후위에는 릴스네, 유서희와 유인하가 자리 잡는다.
릴스네는 원래 정찰 담당이지만, 이다음 구역에서 활약할 것이다.
“…….”
우리는 조용했다.
잡담을 나눌 여유는 있었다. 몬스터는 보이지 않고 황무지를 걷는 것이 전부니까.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뜨거운 공기가 입안으로 가득 들어오고,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면 폐가 타오르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멈춰. 공간 변화다!”
공간이 일렁어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이 구역에선 일정 시간마다 공간이 변한다. 공간 이동의 정반대다. 우리는 가만히 있고 공간이 이동하는 개념이다.
“마스터!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이번에 엘프와 함께 새로 들어온 신입인 전사, 지영빈이 물었다. 강명진을 보는 두 눈은 신뢰와 존경이 엿보인다.
“나침반은… 뒤쪽을 가리키는군. 다시 대형을 정비하고 움직인다.”
제 6,331 구역은 시련형 구역이다. 만약 공략법을 미리 숙지하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몇 날 며칠을 헤매다가 비쩍 마른 미라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이대로 걷는 것으로 일을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곳에도 몬스터가 있었다.
검은색 돌덩어리가 황무지에서 불쑥 일어났다.
스톤 골렘.
몸 자체를 산산조각 내거나, 핵을 박살 내야 하는 비생물형 몬스터.
그러나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알고 있는 몬스터라도 구역마다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
“스톤 골렘은 총 6마리. 지영빈, 네가 왼쪽 3마리. 성유진, 오른쪽 3마리를 맡는다. 놈들이 하나로 뭉쳐져 더 성가시기 전에 끝내라.”
“맡겨주십시오!”
“예입.”
나와 지영빈은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냈다. 그는 대검, 나는 화련비도다. 그리고 수통의 마개를 열고 무기에 차가운 물을 붓고 검은 스톤 골렘을 향해 돌진했다.
‘걷기만 해서 심심했는데 잘 됐어. 죽어라!’
칼은 스톤 골렘의 몸을 부두처럼 부드럽게 베어냈다. 이 놈들의 약점이 칼날에 묻어 있는 차가운 물이기 때문이다.
스톤 골렘을 순식간에 해치운 나는 지영빈을 쳐다봤다. 처리하는 속도는 나보다 느렸다. 가볍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나와는 다르게 지영빈은 무겁고 단단하게 스톤 골렘들을 상대했다. 전투 스타일이 정반대였다.
“둘 다 수고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강명진의 치하에 기뻐하는 지영빈과 다르게 나는 그러려니 했다.
???
제 6,331 구역을 걷기 시작한 지 4시간 째.
우리는 휴식을 취했다. 적절한 휴식은 사람의 멘탈과 육체에 활력을 준다.
나는 이 틈을 타서 활을 손질하고 있는 라스넬에게 다가갔다.
평소의 리스넬은 방에 틀어박히거나, 밖으로 나가서 만날 일이 좀처럼 없었다. 설령 접근해도 금방 자리를 피하고 만다. 이곳은 그녀가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는 두꺼운 천 옷에 의해 가려진 릴스네의 자랑인 금발 머리와 슬림한 몸매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말했다.
“얼굴을 알고 지내는 지 꽤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말하게 됐군요. 릴스네 씨.”
“……전, 당신과 나눌 말이 없습니다.”
릴스네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차갑게 대했다. 그녀가 에이플랜 레기온에서 유일하게 대화하는 인물은 강명진이 거의 유일했다.
“에이. 같은 레기온 단원끼리가 아닙니까. 간단한 대화 정도는 괜찮잖아요.”
내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걸 눈치챈 것일까. 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 간단한 대화에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군요.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고… 궁금해서 그렇죠. 우리 세계는 엘프가 없었거든요.”
“하. 엘프라고 해서 다를 건 크게 없습니다. 인간이나 엘프나 지성을 가진 종족일 뿐입니다.”
까칠해도 너무 까칠한 태도에 잠깐 짜증이 치솟았다가 사라졌다. 두꺼운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머리를 굴려 대화를 이어나갈 방법을 떠올렸다.
“릴스네 씨는 명진이의 권유로 에이플랜 레기온에 들어오셨죠? 솔직히 말하면 전 릴스네 씨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이니 서로 무시하면 되겠군요.”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무관심했다.
“……믿을 수 없다면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는 같은 레기온 단원이고, 앞으로 서로 등을 맡기고 싸워야 할 일이 많을 텐데요.”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같은 레기온에 속해 있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강명진 마스터에게서 정당한 대가를 받고 레기온에 가입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릴스네 씨에겐 레기온은 일종의 비즈니스군요?”
“네. 정확합니다. 휴식을 취하고 싶으니 절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까? 생산성 없는 대화를 하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낭비입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확실히 입을 열고 말하면 뜨거운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와서 불쾌하다. 하지만 이렇게 릴스네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허무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제가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군요. 제가 이걸 드리죠.”
“……얼린 물통을 주머니에서 꺼내다니… 아공간 주머니입니까?”
릴스네는 경계하면서도 얼린 물통을 내 손에서 재빠르게 가져가 품속에 넣었다. 얼음은 빠르게 녹겠지만, 그동안 몸은 시원해질 것이다.
“아뇨. 제가 가진 능력이죠. 아, 고유 특성과는 다른 능력입니다.”
“물을 만드는 능력? 아니. 그랬다면 물통을 만들지 못했을 테지요. 어떤 능력입니까?”
“제 능력이 궁금한가 보군요.”
“……아닙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물통은 감사히 사용하겠습니다.”
릴스네가 몸을 일으켰다. 내가 계속 질문을 던질 것 같자, 자신이 직접 자리를 피할 모양이다.
“전 릴스네 씨와 좀 더 대화해보고 싶네요. 혹시 돈을 지불하면 가능합니까?”
짤랑짤랑.
릴스네의 앞에서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1만 페니가 들어 있는 돈이다. 잠깐 대화하는 것 치고는 그 금액이 무척이나 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돈주머니에 꽂혔다. 돈주머니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녀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대화하는 것 자체가 정보를 내뱉는 행위. 좋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주시니 당신의 대화에 잠깐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릴스네가 돈주머니를 꽉 잡고 돈의 양을 파악했다.
“1만 페니 정도군요. 딱 그 가치 동안만 대화하겠습니다.”
“하하…. 릴스네 씨는 돈을 많이 좋아하시는 모양이죠?”
“저는 돈을 신뢰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웬만한 건 돈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릴스네 씨의 목소리는 좀 어리게 들리고… 엘프는 겉모습만 봐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24살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다고 반말은 하지 마십시오. 한국인의 장유유서니, 뭐니 하는 문화는 제게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돈을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1만 페니 이상의 질문입니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되는대로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시는 음식은요?”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만…. 기왕이면 비싼 음식이 좋습니다. 그리고 대화는 여기까지입니다.”
“네? 아직 질문도 몇 개 하지 않았는데요?”
“이전에 했던 대화까지 합쳐서 1만 페니 이상입니다.”
릴스네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이탈했다.
‘……쫓아가서 돈을 더 내고 대화를 이어 할까?’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와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가려다가 오히려 반감만 살 수도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유서희와 주서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
「제 6,332 구역, 서글픈 왕비의 정원으로 이동합니다.」
우리는 6시간 만에 황무지를 벗어나 다음 구역에 들어왔다.
그곳은 아주 잘 가까우진 정원이었다. 화려한 꽃과 싱그러운 나무가 인공적으로 조형된 정원.
황무지와 다르게 기온은 정상적이었다. 우리는 오자마자 두꺼운 천 옷부터 집어 던졌다. 여기저기서 신선한 공기를 잔뜩 흡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진아.”
내가 강명진을 불렀다. 무뚝뚝하게 정원을 보고 있던 강명진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잠깐 화장실 좀. …뭐, 여기엔 화장실이 없으니 저기 뒤쪽에서 볼일을 볼 생각이지만. 대충 5분 정도만 기다려줘.”
“느긋하게 볼일을 봐도 상관없다. 20분 정도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공략을 준비할 생각이다.”
“5분이면 돼. 20분 내내 볼일을 볼 정도의 변비는 아니라서.”
나는 일행과 조금 떨어진 나무 뒤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여긴 구역의 초입 구간이라 그런지 근처에 있는 건 모두 평범한 식물들이었다.
‘잠자는 공주. 내가 구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 돼.’
내게는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존재가 있었다.
‘유리아.’
[캐릭터를 소환합니다. 대상: 유리아 그레이스]
[유리아 그레이스의 남은 소환 유지 시간: 30일]
내 눈앞에 살며시 미소 짓고 있는 메이드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