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4화 〉 494. 신의 아틀란티스
494. 신의 아틀란티스
유리아는 그림자 마법을 사용해 은밀히 움직였다. 생명력에 민감한 언데드에게서 숨어다니기 위한 그림자 마법이다.
언데드는 바로 옆을 스쳐 지나는 유리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리아는 자신의 인기척을 완벽하게 없앴고, 언데드의 사각지대로만 움직였다.
그런 그녀가 가고일에게 모습을 들킨 것은 한 가지 이유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가고일의 감지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
까득. 까드득.
악마의 형상을 한 4개의 조각상의 두 눈 부위가 붉게 빛나며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도망쳐서 따돌린다는 선택지를 버렸다. 그랬다간 오히려 다른 언데드에게도 쫓길 가능성도 있다. 차라리 여기서 가고일을 빠르게 죽이고 벗어나는 편이 훨씬 낫다.
유리아는 그림자 속에서 위로 솟구친 단검을 손으로 낚아채고, 가장 가까운 가고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고일의 몸은 단단하다. 어지간한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바위라도 특별히 약한 부위는 존재한다. 점 혹은 결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그곳이 유리아의 눈에는 보였다.
그녀의 검은색 오러가 타오르는 단검이 가고일의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약간 아래로 떨어진 곳을 노렸다.
퍼석!
가고일의 머리가 박살 난다.
키이이이이이잉!
다른 3마리의 가고일의 눈에서 붉은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유리아는 냉정하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6개의 레이저는 그녀의 치맛자락 하나 건들지 못했다.
공격 기회를 얻은 유리아는 1분도 지나지 않아 가고일을 전부 처리하고 그곳을 떠났다.
‘여기가 주인님이 말했던 성의 뒷문.’
유리아는 지하 1층에 숨겨져 있는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공간과 공간을 이어붙인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제 6,334 구역, 잠자는 공주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이곳은 히든 구역입니다.」
「탑을 정복하면 지배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떴지만 계속 그랬듯이 무시했다.
넓은 공간에는 위로 향하는 계단과 뒤쪽에 있는 낡은 문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유리아는 조용히 공간을 걸었다.
그리고 어디에서 멈췄다. 발소리가 유일하게 다른 곳. 아래에 공기의 울림이 느껴진 곳.
쾅!
유리아는 구둣발로 있는 힘껏 바닥을 밟았다. 바닥이 무너지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그녀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어두웠지만, 막상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 천장에 박힌 돌에서 빛이 나오고, 주위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꽃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유리아는 꽃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중심에 있는 유리관으로 걸어갔다.
유리관 속에 아름다운 여자가 누워 있었다.
카리세 델 펠스먼.
성유진이 원하는 여자.
싱그러운 금발 머리에 순백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으며, 양손은 배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새하얀 피부와 여린 분홍색 입술. 아름다운 여자였다.
유리아는 유리 조각이 카리세의 피부를 상처입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유리관을 박살내고, 카리세를 꺼내 안아 들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공간 이동 주문서를 그림자 속에서 꺼내 찢었다.
???
“호오. 진짜 왔군.”
주문서를 찢어 어딘가로 이동한 유리아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파란색 단발머리의 여성을 발견했다. 유리아는 그녀를 성유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유리아는 품에 안고 있던 카리세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두고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발데르트 공작 각하. 유리아 그레이스입니다.”
“성유진이 자랑하던 메이드군. 나는 그가 과장해서 말한다고 생각했었다만….”
엘레나의 푸른 눈이 유리아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유리아에 대한 첫인상을 분석하고 평가가 끝났다.
“그게 아니었군. 오히려 직접 보니 축소되었던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그 여자가 성유진이 원한 잠자는 공주인가. 예쁘장하군. 한 번 깨워볼까.”
“주인님의 말로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깨울 수 없다고 합니다.”
“……쯧. 신의 저주인가. 시시하군.”
엘레나는 잠자는 공주, 카리세에게서 눈을 뗐다. 멸망한 왕국의 공주는 엘레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오히려 차분한 은발의 메이드가 더 시선을 끌었다.
눈에 보이는 신체 능력과 느껴지는 마나는 실망스럽다. 저 정도는 추방자들 사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와 두 눈이 마주쳤을 때,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등에 힘을 주었다.
“유리아 그레이스라 했나? 앞으로 며칠 동안 날 좀 도와줘야겠다.”
“예. 주인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엘레나는 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유리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건가?”
“아까 인사할 때 고개 숙였습니다만.”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님을 알 텐데.”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저는 공작 각하께 충성심을 바치지 않습니다. 제가 공작 각하를 돕는 이유는 오직 하나, 주인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인님을 향한 제 충성심을 시험하는 짓거리는 그만둬 주십시오. 불쾌합니다.”
“미안하군. 내 잘못을 인정하마. 너무 불쾌하지 말도록.”
“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공작 각하.”
“그대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들었다. 암살, 영지 운영, 집안일. 그는 그대가 만약 상인이었다면 국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대상인이 될 것이고, 예술가가 된다면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예술가가 될 것이라 말했다.”
“주인님의 과찬이십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뭐, 요컨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다만 나는 그의 평가를 믿지 않는다. 원래 사람에 대한 평가는 아는 사람일수록 감정이 들어가기 마련이지.”
“…….”
“우선 간단한 것부터 시키겠다.”
엘레나는 손가락을 옆으로 돌려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책과 서류 수십 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대는 내일부터 감찰관이 될 것이다. 저 책은 법서로 도움이 될 거다. 서류들은 의심스러운 보고서와 자료들이다. 그대의 주인처럼 마구잡이로 감찰관의 지위를 이용하지 않을 거라 믿겠다.”
“……그런 중요한 지위를 제게 덜컥 내리시는 겁니까?”
“그 정도의 지위가 아니라면 갑자기 나타난 그대가 일을 원활히 처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내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다면 지위를 회수하면 그뿐. 못하겠다면 지금 말해라.”
“…….”
유리아는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책을 잡고 종이를 빠르게 넘기며 훑어본다. 신기하게도 책에 적혀 있는 글자는 유리아에게 익숙한 대륙 공용어로 보였다.
“……뭐 하는 거지? 설마 속독인가? 빠르게 읽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권력으로 법을 이용하는 거다.”
“이용하기 위해선 알아야 합니다.”
“……그걸 전부 외운다는 말은 아니지?”
유리아는 끝장을 덮었다.
“전부 외웠습니다.”
“흐음.”
엘레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유리아를 쳐다봤다. 저 법서는 왕국 공용, 일부 영지에만 통하는 법, 구역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법 등, 온갖 복잡한 법에 대한 것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책이다.
엘레나가 법서를 가져다 둔 것은 어디까지나 참고하라는 거지, 공부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번엔 또 뭐 하는 거지?”
“서류를 나누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 재조사가 필요한 것, 판단할 수 없는 것.”
엘레나는 유리아가 분류한 서류들을 확인했다.
전부 분류에 맞아 떨어졌다. 유리아가 판단할 수 없는 서류는 단순히 발데르트 공작령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들뿐이다.
“……10분 만에 정리했다고? 미쳤군.”
“영지와 관련된 서류 정리는 익숙합니다. 일은 이게 전부입니까?”
유리아는 제대로 된 인력도 없던 시절부터 영지에 대한 일과 상단에 대한 일 등 모든 서류 작업을 성유진 대신에 처리해왔다. 저택을 청소하고, 성유진의 식사를 준비하고, 수련과 섹스 시간까지 합하면 하루에 서류를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미만이었다.
“…서류를 더 가져오지. 좀 더 어렵고 복잡한 서류로.”
???
4개의 구역을 한 번에 지배했다.
에이플랜 레기온은 기뻐하면서도 그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꼭꼭 숨겼다. 에이플랜 레기온에겐 아직 다른 이들로부터 구역을 지킬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레기온 단원들은 돌아가면서 구역을 정리해야 했고, 강명진은 히든 구역을 지배하고 난 뒤부터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유리아가 빼돌린 잠자는 공주 때문이겠지.’
정리가 끝나고 휴가를 받았다.
나는 곧바로 엘레나의 영지로 이동했다. 엘레나가 알려준 방식을 이용해 발데르트 공작가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본 엘레나의 얼굴은 밝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포도알 하나를 입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잠자는 공주를 받으러 왔나? 아니면 메이드를 데리러?”
“둘 다? 카리세랑 유리아는 어딨어?”
“공주는 별채에 뒀다. 결계를 쳐뒀지. 따로 음식을 먹이는 등의 손이 안 가서 다행이더군.”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지?”
“공주의 저주를 풀려고 시도해봤다만, 인간의 수준으로 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걸 깨닫고 바로 포기했다. 그 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엘레나의 얼굴을 보니 정말 카리세에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이 귀찮아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유리아는?”
“일 때문에 잠깐 나갔다. 충성스럽고 유능한 메이드더군. 아마 네가 오늘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겠지.”
“저녁 전까지는 오겠지?”
유리아를 품에 안고 싶어서 양손이 근질근질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앞으로 2~3시간 내로 돌아오겠지. 그녀에 대해서 말이다만… 좀 더 빌려줄 수 없나?”
“응?”
드물게도 엘레나가 내 눈치를 살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는데…. 유리아가 일을 잘하긴 하지?”
“일을 잘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녀는 지나치게 유능하다. 어떤 일을 시켜도 예상한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온다. 그녀가 오고 나서부터 내가 할 일의 절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수십 명의 가신들보다 그녀 한 명이 더 뛰어나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네게서 그녀를 빼앗고 싶다.”
“너라면 이미 유리아를 회유하러 시도했겠지?”
“…돈도, 권력도 모두 거절하더군. 그녀가 날 돕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란 것만 확인했다. 바로 너의 명령. 그녀는 네가 죽으라고 명령한다면 바로 죽을 테지. ……넌 어떻게 그녀를 얻은 거지?”
엘레나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렸을 때 잡아 와서 키웠지.”
“키워? 네가? 농담도 잘하는군.”
“……스스로 컸다는 말이 맞긴 하지. 아무튼 난 카리세를 만나야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마음은 카리세에게 가 있어서 엘레나와의 대화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대답은 해라. 그녀를 내게 좀 더 빌려줄 수 없나? 그녀의 도움이라면 내부 정리를 더욱 빠르게 끝낼 수 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된다.”
“그건 유리아가 오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알겠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긴 하지. 자, 별채의 열쇠다.”
“아. 고마워.”
나는 문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칫하고, 엘레나를 쳐다봤다.
“…내게 다른 볼일이라도 있나?”
“유리아에게 환술을 쓴 건 아니지?”
“…….”
침묵하던 엘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쓰지 않았다. 그녀 같은 부류는 환술이 잘 걸리지 않을뿐더러, 걸리더라도 얼마 안 가 눈치채버리지. 그리고 환술로 얻어내는 신뢰와 충성심만큼 부질없는 것은 없다.”
“어… 미안.”
“괜찮다.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의심하는 법이니. 선입견…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내 잘못이 없다곤 할 수는 없겠지.”
“맞아. 너도 날 처음 봤을 때 환술을 걸었잖아.”
“음. 할 말이 없군.”
???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카리세에게 다가갔다.
풍요로운 황금빛 머리카락. 만지면 자국이 남을 것 같은 새하얀 피부. 긴 속눈썹. 생기 넘치는 분홍색의 입술.
카리세는 원작의 묘사대로의 아름다움을 가졌으며,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있다.
시선을 얼굴에서 가슴으로 내렸다.
부풀어 오른 C컵의 가슴은 새하얀 드레스에 감싸여 있다. 브래지어 같은 건 없었다. 아래에는 잘록한 허리와 풍성한 드레스 치마가 하체를 가리고 있다.
나는 카리세의 치마를 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