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3화 〉 503. 신의 아틀란티스
503. 신의 아틀란티스
헤르포는 헐레벌떡 뛰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식당에서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하르네아가 엔젤러스 레기온에게 신고를 했다면 앞으로 몇 시간 뒤에 엔젤러스 레기온의 부대가 찾아올 테니까.
‘하르네아! 이 미친년이 날 배신해?! 섭섭지 않게 대해줬거늘! 은혜도 모르는 년!’
생각만 해도 열불이 터졌다. 지금 당장 하르네아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복수는 나중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챙겨야 하는 물건을 먼저 챙겨야 한다.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하르네아!’
사무실로 돌아온 헤르포는 먼저 자신의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얇은 판을 올려 바닥으로 위장한 덮개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 위로 올린 뒤, 비밀 공간의 뚜껑을 열었다.
‘장부가… 없어?!’
헤르포의 얼굴이 핼쑥 해졌다. 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장부가 없었다.
장부가 있어야 엔젤러스 레기온에게 도망쳐서 모습을 바꾸고 다른 직업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했다.
“누, 누가…?!”
장부가 있어야 한다. 그 장부는 자신의 약점인 동시에 생명줄이었다. 그게 있어야 거래를 지속할 수 있고, 인맥을 알아볼 수 있다.
“버, 범인은 한 놈…, 아니 한 년뿐이지! 하르네아!! 그 망할 년이 날 배신한 이유가 뭐겠어! 내 장부를 훔쳤기 때문이지!”
쾅! 콰앙! 쾅!
헤르포는 분통을 터트리며 책상과 의자를 발로 찼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도리어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이번 일은 하르네아 혼자서 저지른 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하르네아는 지배자 갈 될 재목이 아니야. 기껏해야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게 고작이지. 누군가가… 누군가가 하르네아와 접촉했다! 어쩌면 장부를 가진 건….’
암살 사건이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나 혼자 해결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 개입했다면 하르네아를 죽이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장부는 여전히 못 찾을 것이고, 찾아온 엔젤러스 레기온이 본보기를 보인다며 자신을 처형할 것이다.
‘도망치자. 장부가 없어도 숨겨 놓은 돈은 있다! 장부가 없어서 오래 걸리겠지만, 내 고유 특성이 있다면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목숨만 부지한다면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헤르포는 빠르게 짐을 챙기고 비상용으로 준비해둔 공간 이동 주문서를 품 안에 넣고 창문 밖으로 몰래 도망가기 시작했다.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하기 위해선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결계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헤르포는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
식당에서 보기 추할 정도로 말싸움을 하던 헤르포가 씩씩거리며 식당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여러분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요. 엔젤러스 레기온에 연락할 테니 안심해주세요. 이 일은 반드시 해결할 테니.”
하르네아 수녀장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녀가 나서자 수녀들이나 아이들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헤르포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인지도 모르고.
‘냉정한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똥줄이 타고 있겠지.’
하르네아가 헤르포를 배신한 이유. 그건 내가 장부를 이용해 그녀를 협박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헤르포를 배신하는 대가로 살려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내 입장에선 언제든지 모른 척해도 상관없는 약속이지만.
‘헤르포 놈을 보러 가볼까.’
모두의 시선이 하르네아에게 향해 있는 틈을 타 몰래 문밖으로 나갔다.
헤르포가 향할 곳은 하나뿐이지. 장부가 있던 곳.
‘크크…. 예상대로 움직이는군.’
나는 기척을 숨기고 헤르포의 뒤를 따랐다. 적당한 곳에서 놈을 기절시키고 생포할 생각이다. 장부가 있다곤 하나, 놈이 살아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의 차이는 크다. 놈이 여기서 죽는다면 엔젤러스 레기온은 발뺌하며 꼬리 자르기 작업을 시작하겠지.
‘어디 한 번 나서볼까. 크크.’
그러나 나보다 빠르게 누군가가 헤르포의 앞에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진 하얀 날개와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천사. 아리엘.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헤르포를 감시하고 있었나?’
무지개의 천사, 아리엘은 정신적으로 어리다. 아니, 순수하다는 말이 옳다. 천사인 그녀가 엔젤러스 레기온의 중책을 맡지 못하고 여기에 이런 곳에 외진 곳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힘은 진짜지.’
나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아, 아리엘 님…!”
도망치던 헤르포가 당황했다.
“어디 가는 거야?”
“자, 잠깐 답답해서 마을 밖으로 나갔다 올 생각입니다.”
“거짓말 하지 마. 도망갈 생각이잖아.”
헤르포의 후덕진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거짓말이라니요?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아리엘 님은 진실을 파악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리엘 님.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넌 진실을 말하고 있어. 그렇게 느껴져. 하지만 진실을 속이는 게 거짓말이잖아? 난 널 믿지 못해. 네가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지금 여기서 도망칠 필요가 없잖아.”
아리엘이 날개를 펼쳤다. 그녀의 날개가 무지갯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며, 그녀 주위에 바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허억! 아리엘님! 지, 진정하십시오!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서 자숙할 테니 진정해주십시오!”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헤르포의 몸을 베어냈다. 옷이 찢어지고, 살갗에서 피가 튀긴다. 바람의 칼은 그의 몸을 깊숙이 베지 않았다.
“네가 한 짓이지? 네가 인간들을 죽였고…. 아이들을 팔았어.”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리엘 님! 들어주십시오! 아아악! 팔이…!”
팔이 바람에 의해 믹서기로 갈리듯 베였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포션을 쓰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완치할 수준이다.
“헤르포. 넌 죗값을 치러야 해.”
“전 죄가 없습니다! 모두 하르네아, 그년의 거짓말… 아아아악!”
“네가 그렇게 떳떳하다면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너희 인간들은 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은 죄야.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너희들의 영혼은 어두워져. 너희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아리엘의 앞에 바람이 나타났다. 회오리치는 바람. 보이지 않아야 할 바람이 눈앞에 보였다. 사람 하나는 우습게 찢어발길 수 있는 바람이.
“제, 제길…! 망할 정박아 년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내가 말하잖아!”
초조해진 헤르포가 욕설을 내뱉으며 아리엘을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너의 본성이구나.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는 것. 언니는 그게 천사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했어. 헤르포. 내가 널 벌하겠어.”
나는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될 수 있다면 아리엘과 이런 식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아리엘은 헤르포를 향해 살의를 품었다. 내버려 둔다면 헤르포가 죽는다.
‘쓰읍! 천마신공!’
천마기를 끌어 올리고 앞으로 튀어 나가 바람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아리엘의 회오리바람을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인간?!”
“강명진 님?!”
아리엘과 헤르포가 나의 난입에 놀랐다. 나는 헤르포의 앞을 섰다.
“비켜, 인간. 헤르포는 죽어야 해!”
“비킬 수 없습니다.”
“오, 오오! 강명진 님! 이 도움,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갚을 테니 잠시만, 잠시 동안만 저 천사를 막아주십시오!”
헤르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말과는 다르게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도망갈 궁리만 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보고 확 짜증이 났다. 이딴 놈을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퍼억!
“컥!!”
주먹을 휘둘러 헤르포의 머리를 때려 기절시켰다.
“아리엘 님. 이놈이 저지른 죄는 인간의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마땅합니다. 사형은 확실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놈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너.”
아리엘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향해 적대감을 보였다. 헤르포를 향한 적대감보다 더 심하다.
“너한테서 악마의 냄새가 나. 악마랑 계약했구나!”
“아.”
그녀의 격렬한 반응이 무엇 때문인지 이해했다.
천마신공.
마의 힘을 느낀 것이다.
“…너도 날 속였구나.”
“속인 적은 없습니다.”
“그 악마의 힘을 숨기고 있었잖아!”
“악마의 힘이 아니라 천마신공이라는 무공입니다. 그리고 숨긴 게 아니라 사용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날 속이려 들지 마! 이젠 너희 인간들에게 쉽게 속지 않을 거야!”
아리엘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주위에 강력한 바람들이 모여든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와 싸우는 건 필수 불가결이다.
‘…젠장. 아리엘은 천천히 공략할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군.’
「떨어진 별이 10,000 AP를 후원합니다.
“날개를 찢고 죽여버려!”」
떨어진 별의 메시지는 무시했다. 죽인다? 웃기는 소리. 내 자지가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세상을 망치는 악마는 없애야 해! 그 악마를 따르는 인간들도!”
“거참. 악마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헤르포의 몸을 발로 차 옆으로 날렸다. 싸움에 휘말려 죽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천마기를 전신에 일으켰다. 날카로운 바람이 내 몸을 감싸지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마나의 소모가 크지만, 전투를 오래 끌 생각은 없어.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전투를 끝내야 해.’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하늘을 날고 있는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서 천마기가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다. 허나 용권은 아리엘을 감싸고 있는 바람 장막을 뚫지 못했다.
‘용권으로 안 되면 가까이 가서 직접 주먹을 휘두르는 수밖에.’
허공으로 뛰었다. 그녀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기 전에 한 방 먹여야 한다.
“여긴 아이들을 위한 곳이야! 너희들은 대체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야?! 용서할 수 없어!”
바람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내 허리를 붙잡아 위로 쳐올렸다. 천마기로 전신을 두르고 있음에도 잠깐 정신이 날아갈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리엘보다 더 위로, 하늘 높이 떠오른 나는 주변에 모여드는 바람을 감지했다. 아리엘은 하늘에서 나를 바람으로 갈아버릴 생각이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회천마룡(回天魔龍).
나는 전신을 둘러싼 천마기를 회전시켰다. 마치 내가 검은 회오리가 된 것 같았다. 내 몸을 갈아버리려던 바람을 역으로 갈아버리고 공기를 발로 차 추진력을 얻어 아리엘을 향해 떨어졌다.
“……!!”
깜짝 놀란 아리엘이 황급히 날갯짓하며 피한다. 하지만 내 손은 그녀의 왼쪽 날개 끝을 붙잡았다. 내 몸의 회전하는 천마기가 아리엘에게 이동한다.
아리엘의 날개가 찢겨나갔다. 나는 다른 손으로 아리엘의 발목을 붙잡았다. 회전하는 천마기가 나와 그녀의 몸을 감쌌다.
“꺄아아아악!”
우리는 동시에 바닥을 추락했다.
콰아아아앙!
지면에 소용돌이 자국이 남았다. 회전하는 천마기가 지면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나는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그럭저럭 잘 착지할 수 있었지만, 아리엘은 아니었다.
‘천사이니 겨우 이 정도로 죽진 않았겠지?’
황급히 아리엘의 상태를 확인한다. 왼쪽 날개는 찢겨나가 너덜너덜해졌고, 옷과 피부가 베여나가 피투성이였다. 다리와 팔의 관절도 뒤틀려 있었다. 의식은 잃은 것 같지만 호흡은 이어지고 심장은 뛰고 있었다. 다행히도 살아 있었다.
‘…헤르포만 생포할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리엘까지 얻었군. 이게 바로 일석이조인가?’
나는 아리엘을 조심히 안아 들었다. 이미 소란은 피웠다. 곧 있으면 아이들이나, 수녀들이 나타나겠지. 그 전에 자리를 떠야 한다.
나는 바닥에 뻗어 있는 헤르포를 발로 차 드리블하며 자리를 떠났다.
“콜록!”
입에서 피가 튀었다.
‘내상을 약간 입었군. 회천마룡은 아직 내 실력으로는 무리였나.’
골목길을 들어섰을 때였다.
“천마님. 이쪽이에요.”
사샤가 자신이 머무는 집으로 날 안내했다. 성당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도 귀찮았기에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급할 것 없었다.
‘하르네아가 엔젤러스 레기온을 부른다는 건 거짓말이니까. 실제로 몇 시간이 지나도 엔젤러스 레기온이 올 리가 없어.’
그놈들이 와서 일을 정리하면 나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그놈들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샤의 집은 낡았지만, 꽤 컸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혼자서 생활하는 모양이다.
“……2달 뒤에 전 마을을 떠나니까요. 덕분에 여러 가지로 배려받고 있어요. ……같이 생활하던 아이들은 이미 마을을 떠났고요.”
집안을 획획 둘러보는 내게 사샤가 말했다.
“조용해서 좋네. 사샤. 루시를 불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