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7화 〉 507. 신의 아틀란티스
507. 신의 아틀란티스
“나도 그 빌어먹을 애꾸 새끼한테 빚이 있어서 말이야. 놈이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아냈는데… 이게 또 상황이 골때리게 돼서 너 같은 실력자가 필요해. 바르덴을 찾아 죽일 때까지 손을 잡자. 천마.”
“…….”
나는 침묵에 잠겨서 올리비아를 쳐다봤다.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혼자서 움직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갔다간 짜증 나서 죄다 박살 낼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목표인 바르덴이 도망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럼 내 임무는 실패하겠지.
‘문제는 나는 올리비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
올리비아 패밀리.
레기온이 아닌 패밀리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이 구역에서만 활동하는 단체라는 걸 알 수 있다.
정보가 전혀 없으니 믿을 수 있는 단체인지 확신할 수 없다. 동맹이라는 단어는 내세우며 나를 이용만 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너희들이 바르덴을 죽이려는 이유는 뭐지?”
“우리 내부 사정이긴 한데…, 지금은 우리가 원하는 쪽이니 말해주는 게 맞겠지. 우린 바르덴이랑 같이 한 사업을 했어. 땡전 한 푼 없는 놈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업이었지.”
“말만 들으면 건실한 사업 같군.”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무법지대에서 하는 사업이 건실할 리가 없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 정도는 알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건실한 사업이야. 근데 이 빌어먹을 애꾸눈 새끼가 지금껏 장부를 가라로 적어왔고, 진짜 장부를 들고 내뺐지 뭐야? 덕분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무엇보다. 그 새끼 때문에 우리가 얕보이고 있다고. 주점에서 내 이름 앞에 무슨 말이 붙는지 알아? 등쳐먹힌! 등쳐먹힌 올리비아라고 부른다고!”
쾅!
올리비아가 분통을 터트리며 발을 휘둘러 테이블을 내리찍었다. 검은색 가죽 부츠가 테이블을 박살 낸다.
“왜 갑자기 멀쩡한 테이블을 박살내?”
“아, 물어주면 되잖아. 물어주면.”
나는 씩씩거리는 올리비아를 쳐다봤다. 연기는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 바르덴을 찾아 죽이고 싶어 하는 게 느껴진다.
저게 연기라면 그녀는 뛰어난 연극배우 혹은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지금 이 상태에선 바르덴은커녕 그 그림자 근처에도 가지 못할 수 있다.
“바르덴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건 확실하지?”
“확실해. 그 새낀 여기 무법지대가 아니면 못 살아가는 놈이야.”
“난 그놈을 죽여야 해. 갑자기 살린다고 태도를 바꾸면 내가 무척이나 곤란해.”
“그딴 지랄은 안 해. 단, 그놈의 시체는 우리가 받겠어.”
“시체에 금이라도 들어 있나?”
“그 새끼 시체를 우리 아지트 앞에 걸어둘 거야. 그래야 병신들이 기어오를 생각을 못 하지.”
“바르덴을 쳐죽일 때까지 동맹하자. 올리비아.”
“시원시원하게 결정해서 마음에 드네. 어차피 바르덴만 쳐죽이고 끝날 관계이니 계약서 같은 거 안 쓴다?”
“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 계약서를 쓸 필요는 없지.”
그리고 여긴 무법지대다.
법이 없는 땅.
이곳에서 평범한 계약서는 쓸데없는 글자만 적혀 있는 종이에 불과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올리비아의 부하들의 분위기는 한층 풀어졌지만,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있다.
“바르덴은 어디에 있지?”
“예상했던 대로 그것부터 물어보나.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알고 나서 막무가내로 그 새끼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면 곤란해.”
“날 잘 모르는군. 난 누구보다 냉정하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냉정? 지랄.”
올리비아가 쿡쿡 웃었다. 이후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 행적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 무법지대는 거칠다. 나처럼 독고다이로 활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설령 있더라도 범죄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내가 평범한 사람인가? 주제도 모르고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은 죄다 죽였다.
성욕이 쌓이면 창부를 찾았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강간했다. 그 과정에서 패밀리 몇몇과 척을 지긴 했지만, 내가 봤을 땐 큰 문제는 없었다.
“바르덴은 제르딘 레기온에 들어갔어.”
제르딘 레기온.
무법지대에서 며칠 생활한 나는 그 이름을 안다. 무법지대 최대의 범죄 조직이다. 즉, 무법지대를 지배하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무법지대 출신이면서 패밀리가 아닌 레기온이라 칭한다.
“아직 공식적인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도 곧 조만간이겠지.”
“나 같은 실력자가 필요하다는 말도 이해 가는군. 제르딘 레기온을 칠 생각이야?”
“맞아.”
“제르딘 레기온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닐 텐데.”
“제르딘은 충분히 오랫동안 해 먹었어. 법이 없는 여기의 법은 약육강식이지만, 세상에는 강자가 먹이가 되는 일도 있는 법이야.”
“너희 말고도 다른 세력이 참가했군. 어느 정도야?”
“몰라. 이 일을 진행하는 건 우리가 아니니까.”
나는 제르딘 레기온에 쳐들어가는 걸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나는 강하긴 하지만 무적이 아니었다. 서쪽에서 강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서쪽엔 강자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도시 수준의 구역을 몇 년 동안 지배해온 레기온을 나 혼자서 무너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뭐야?”
“했던 대로 생활하면 돼. 때가 오면 내가 널 부를 거야. 음, 아니지. 더 날뛰어서 지분을 챙겨.”
“지분?”
“무법지대의 영향력 말이야. 그걸 여기선 지분이라고도 불러. 지금 지분이 어느 정도야?”
「무법지대에 대한 영향력: 0.49%」
“0.49%.”
“역시 어지간한 패밀리 보스보다 더 높네. 그래도 부족해. 못해도 일주일 전까지 1%로 올려.”
정식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구역은 영향력에 따라 매달 AP를 받는다.
영향력은 이름 그대로 무법지대에 뻗치는 영향을 시스템이 수치로 환산해 알려주는 것이다.
“1%로 꼭 올려야 할 필요가 있나?”
“나랑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려면 최소 1% 이상의 영향력은 되어야지. 넌 무법지대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봐주는 거야.”
“내가 너한테 잘 보일 이유는 없어.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바르덴이지.”
“뭐야. 자신 없는 거야?”
“괜한 도발 하지 마. 난 의미 없는 짓거리를 할 생각 없으니까. 바르덴의 위치를 알았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살 거야.”
“…하. 재미없게. 쯧. 사실대로 말해줄게. 히든 구역에 대한 소문이 있어. 무법지대 지분이 1% 이상을 가진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히든 구역. 제르딘 레기온의 비밀기지 같은 곳으로 쓰고 있는 거겠지.”
“바르덴이 그곳에 숨어버릴 수도 있겠군. 알았어. 영향력을 1%로 올리지.”
“열심히 해. 만약 일주일 안에 성공적으로 지분 1%를 달성하면….”
“달성하면?”
“어, 글쎄. 그냥 내뱉은 말인데…. 뭐 해줄까? 뽀뽀라도 해줄까?”
“뽀뽀 좋지.”
“그래? 진하게 해줄게.”
나는 올리비아는 나처럼 기분파라는 것을 알았다.
“넌 영향력이 어느 정도지?”
“나? 2,10%!”
???
난 영향력을 올리기 위해서 전보다 훨씬 거친 생활을 했다. 피해 다니던 패밀리를 몇 개 박살 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영향력이 쭉쭉 올랐으나 0.7% 정도가 되자 잘 오르지 않았다.
“이봐, 천마.”
포장마차에서 양꼬치를 먹고 있을 때, 내 옆에 앉아 있던 한 대머리 중년이 날 불렀다. 내가 이 도시에서 처음 만났던 정보 상인이었다.
“뭐지.”
“좋은 일이 있다. 네가 잘하는 일이지. 패밀리 하나를 끝장내줬으면 한다. 관심 있나?”
“노예처럼 부려 먹히는 건 질색인데.”
나는 포장마차의 주인을 쳐다봤다. 그는 들어도 모르는 척 묵묵히 양꼬치를 구웠다. 뭐, 정보상인이 알아서 회유하겠지.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정보 상인 쪽이니까.
“4,000만 페니. 요즘 날뛴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향력을 올리기 위해서지?”
“쓸데없는 말은 됐어. 상대는 누구지?”
“울펭 패밀리.”
“일은 언제까지 하고?”
“지금 당장 나랑 가줘야겠다.”
“……네 이름은 뭐지?”
“맥이라 불러라.”
???
맥을 따라 한 저택 앞으로 걸어갔다.
어지간한 귀족의 저택보다 더 큰 저택이었다. 정원 한가운데 분수가 있었다.
“울펭 패밀리. 이곳에 있는 놈들을 다 죽이면 된다. 정말 간단한 일이지 않나?”
“넌 왜 따라오는 거냐?”
“저택 내에 가져갈 게 있다. 그리고 내가 너의 뭘 믿고 그냥 보내겠나?”
나는 그를 비웃었다.
“돈이나 준비 해둬.”
정문 앞에 경비원 2명이 있었다. 검을 든 그들은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천마가 우리 패밀리에 무슨 볼일이지?”
“용건을 말해라.”
“용권!”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경비원과 함께 정문을 날려버렸다. 그 충격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저택내가 소란스러워지며 전투원들이 뛰쳐나온다.
“오오! 아주 화끈하게 날려버리시는구만.”
“네 몸은 알아서 챙겨라.”
“하하. 내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으니 걱정 마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날뛰어라. 천마.”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날뛰었다. 적이 보이면 우선 주먹부터 날렸다.
“여기가 어딘… 커어어억!”
“천마! 하늘 높은 줄 모르… 커어어억!”
“항복! 살려주… 커어어억!”
내 앞을 가로막는 놈들은 모조리 죽이고 앞으로 나갔다. 도망가는 잔챙이가 있다면 굳이 쫓아가지 않았다.
‘레기온과 패밀리의 차이점. 패밀리는 보스가 중심인 세력이다. 보스가 사라지면 자연히 뿔뿔이 흩어지지. 반면에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레기온은 마스터가 죽으면 서브 마스터가 이어받거나, 간부들 중에서 새로운 마스터가 되지.’
보스를 찾았다. 그는 저택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수영장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가슴에 무언가 터진듯한 흉터가 있는 남자였다. 턱에는 느끼한 T자 모양의 수염이 있었다. 그가 울펭 패밀리의 보스인 울펭이다.
하지만 내 시선이 향한 곳은 울펭이 아니라 그 주위였다.
수영복을 입은 쭉쭉빵빵한 미녀들이 울펭 주위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금발 미녀가 멜론 만큼 커다란 가슴을 과시하고, 붉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의자에 앉아 어딘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제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7명의 미녀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위로 천천히 떠 오르는 기분이었다.
“천마. 우린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원수사이다. 오늘 너는 여기서 죽을 거다.”
그가 선언하며 몸을 일으켰다. 수영장에서 놀고 있던 여자들이 익숙한 듯 뒤로 빠졌다. 그녀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울펭이 이길 것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이기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울펭은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주먹쥔 손목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내 뒤쪽이었다.
“……맥. 요즘 쥐새끼마냥 우리 패밀리를 염탐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네 짓이었나? 내 기억으로는 널 섭섭하게 대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만. 무슨 이유로 이 일을 벌인 건지 물어봐도 되나?”
“비즈니스다. 비즈니스. 원래 이 바닥이 그렇지 않나?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동료가 되는 곳이 여기다.”
“전부 옳은 말이군.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야. 네 뒤에 있는 놈은 누구지? 누가 너한테 일을 의뢰한 거냐?”
“어차피 죽으면 의미 없다. 그리고 짐작은 간다. 내 사업체를 노리는 서쪽 출신 암상인들 중 하나겠지.”
“크크크.”
맥은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괜찮은 척하더니 사실은 울펭을 두려워하고 있다.
울펭이 수영장 위로 발을 뻗었다. 그의 발은 물속에 빠지지 않고 그 위를 걸었다. 나 또한 수영장 위로 걸어 울펭에게 다가갔다.
“천마. 말이 없군?”
“너랑 할 말은 없다만.”
“아까부터 내 여자들을 쳐다보더군. 관심 있나?”
“아주 많지.”
“나는 지금까지 내 여자를 건든 남자는 살려두지 않았다. 물론 건드릴 남자도 마찬가지지.”
“저 여자들 중 누가 제일 보지를 잘 조이지?”
울펭의 몸에서 살의가 터져 나온다. 그의 손아귀에 검붉은 기운이 맺혔다. 나도 그에 맞춰 주먹 쥔 손에 천마기를 일으킨다.
내가 더 강하다. 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넌 지금 선을 넘었다. 편히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천마.”
“말하기 싫으면 됐다. 직접 확인해보면 되니까.”
주먹과 주먹이 허공에서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