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4화 〉 514. 새로운 스킬
514. 새로운 스킬
스마트폰 화면 속에 [?] 모양이 그려진 정육각형 박스가 흔들리며 빛을 뿜었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 얼음팩 하나가 떨어졌다.
[얼음팩
시원한 얼음팩입니다.
가격: 1 포인트]
“…….”
나는 침묵했다.
피 같은 1 포인트가 5,000원도 되지 않는 작은 얼음팩으로 둔갑했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야속하게도 나는 지금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나는 1시간 동안 200 포인트를 사용해 랜덤 뽑기를 했다.
본전은 뽑았다.
10개가 넘는 정령옥을 챙겼고, 3,000 포인트가 넘는 만능해독제도 얻었다. 비록 내겐 완전회복이 있어 크게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처음에는 화가 났다.
포인트를 투자해도 잡동사니 물건들만 자꾸 나오는데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30 포인트 연속으로 아무 효과도 없는 조각품이나, 주방 도구 같은 게 나올 때는 욕을 했다.
땅을 욕하고, 하늘을 욕하고, 유희 생활 어플을 욕하고, 나라를 욕하고. 하여튼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욕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이 되었다. 이젠 욕도 나오지 않았다. 포인트를 다 쓰고도 변변찮은 스킬 하나 못 얻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치솟는다.
‘제발 아무 스킬이나 나와라!’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여기서 랜덤 뽑기를 멈춘다는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지금 멈추면 지금까지 사용된 포인트들은? 그것들은 진짜 의미 없이 버려진 것들이나 다름없게 된다.
‘본전은 이미 뽑았어. 여기서 멈춰도 손해는 없어. 머리는 그걸 알고 있지만….’
스킬을 뽑지 못하면 손해다. 자꾸 그런 생각만 들었다.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 초기화권
스킬의 쿨타임을 초기화합니다.
가격: 2,000 포인트
※주의
소모된 스택 같은 경우 1개만 충전됩니다.]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그뿐이었다.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 좋은 물건이긴 하다. 비록 나한테는 그렇게 쓸모 있는 물건이 아니긴 해도.
‘내가 가진 스킬 중에서 쿨타임이 가장 긴 건 완전회복이지.’
쿨타임 12시간.
하지만 이것도 그렇게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완전 회복을 날마다 써대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쓰고 연속으로 쓸 필요가 있는 상황이 자주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비장의 수단으로서 그럭저럭 쓸만하겠어.’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꾹꾹 누르며 랜덤 뽑기를 사용했다.
300 포인트를 사용했다.
스킬? 나오지 않았다. 그 외의 다른 특별한 물건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이제 겨우 300 포인트를 사용했을 뿐이야. 나한텐 600 포인트 이상이 남아 있다고.’
스마트폰 화면을 누르는 내 검지는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정확히 336번째 뽑기.
[스킬, 랜덤 소환을 획득합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스킬의 설명을 읽었다.
[랜덤 소환 Lv. 1
?랜덤 소환
500 포인트를 소모해 창작물 속의 캐릭터를 랜덤으로 소환합니다.
?확정 소환
1,000 포인트를 소모해 창작물 속의 캐릭터를 소환합니다.
단, 이미 한 번 소환된 캐릭터만 소환할 수 있습니다.
확정 소환 가능한 캐릭터: -
※소환된 캐릭터의 능력치는 소환자의 능력치와 동일합니다.
※캐릭터의 소환 유지 시간은 랜덤입니다.
※소환을 해제할 수 없습니다. 죽으면 역소환 됩니다.
※랜덤 소환과 확정 소환의 쿨타임은 공유됩니다.
쿨타임: 120일]
“……이건.”
좋은 스킬이다. 창작물 속의 캐릭터를 현실로 소환할 수 있다니. 듣기만 한다면 이 얼마나 사기적인 스킬인가.
어떻게 보면 인연 소환과 비슷하다. 다만 인연 소환처럼 스킬이 공유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단점은 포인트를 잡아먹는다는 것과 쿨타임이 어마어마하게 길다는 것.
‘스킬의 경우 현실과 유희 세계 속의 쿨타임은 따로지.’
인연 소환의 경우 쿨타임이 현실에서만 흐른다. 반면에 따로 스킬은 따로 흐른다. 이미 완전 회복으로 확인을 끝냈다. 현실에선 쿨타임이어도 유희 세계에선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두 세계 모두 쿨타임인 경우 사용하지 못한다.
‘자동 진행 중에 아바타가 스킬을 쓰고, 내가 유희 세계에 들어가면 쿨타임을 기다려야 하지.’
뭐, 단점이 있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장점이기도 했다.
‘그것보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소환된 캐릭터의 반응이다. 랜덤으로 소환되니까 어떤 캐릭터가 소환될지 알 수 없다. 좋은 놈일 수도 있고, 나쁜 놈일 수도 있다.
‘성격 더러운 캐릭터일 경우 도리어 날 죽이려 할 수도 있다는 거지.’
스킬 정보에는 소환을 해제할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소환을 해제하기 위해선 캐릭터를 죽여야 한다는 거다.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놈이 소환되기라도 하면?’
그럼 죽어야 하는 건가?
‘……나와 동일한 능력치를 가진다는 것을 보면 그런 짓거리는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겠지.’
나는 손가락 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일단 새로운 스킬을 가졌으니 한 번 시험 해보고 싶다. 한 번 사용해봐야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하게 유희 세계에서 시험한다? 아니야. 창작물 속의 캐릭터를 현실로 소환할 수 있는 기회야. 현실이어야 더 의미가 있지.’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창작물 속의 미녀가 현실로 나오는 것이다. 능력치가 동일하다면 강간의 성공확률은 낮겠지만. 꼬시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미약을 사용해 강제로 발정 시킨다거나.
‘유희 세계에서 범하는 것과 현실 세계에서 범하는 건 다르지. 크크크.’
무엇보다 내게는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30일 회귀 티켓.
유희 세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없으니 현실에서도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500 포인트는 얼마든지 벌 수 있다! 소환 시작!’
[500 포인트를 소모해 랜덤 소환을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한 형상을 취한다. 빛은 곧장 사라지고 한 생물이 보였다.
눈앞에 나타난 건, 내가 원하는 미녀가 아니었다.
네 개의 발로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짐승이었다.
여우.
꼬리가 두 개 달린 하얀 여우였다. 여우는 경계심 어린 검은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시발. 골때리네. 인간이 아닌 캐릭터가 나올 줄이야. 대체 어디 창작물 속의 캐릭터……. 응?’
난데없는 여우의 등장에 한 눈이 팔려 스마트폰 화면에 뜬 알림창을 확인하지 못했다.
[광명승천도 세계의 미령(美靈)이 소환되었습니다.]
[광명승천도 유희 세계가 비활성화됩니다.]
[소환 유지 시간은 33일입니다.]
‘미령이 누군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광명승천도는 원작 용량이 막대한지라 등장인물 하나, 하나 알아내려면 따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원작에서 나온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유희 세계의 광명승천도 출신이면 다른 작품 출신일 수도 있어. 광명승천도 세계는 다른 세계와 섞여 있으니까.’
여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현대적인 방이 신기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나를 쳐다본다. 여우와 나는 눈싸움을 벌였다.
‘여우라고 무시해선 안 돼. 나랑 동일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꼬리가 두 개.
평범한 여우는 결코 아니었다.
번뜩.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광명승천도 원작에 여우 에피소드가 있었다.
“……미령. 내가 네 주인이다. 왜냐고? 내가 널 소환했으니까.”
광명승천도 세계의 언어로 말했다.
“크르르르르.”
여우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꼬리를 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짐승의 이빨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하고 고른 이빨이다.
“짐승인 척 하지 마. 난 네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꼬리 두 개. 평범한 여우가 절대 아니지. 요괴냐? 아니면 영물이냐?”
“…….”
여우가 날 빤히 쳐다보며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요괴야. 왜, 내가 무서워?”
여우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남자의 방심을 뒤흔드는 자극적이고 섹시한 목소리였다.
‘암컷이군. 죽일 필요는 없겠어.’
나는 긴장을 약간 풀었다. 저쪽이 대답했다는 건 무작정을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 소환한 캐릭터인 만큼 대화로 일을 풀어가고 싶었다.
“그건 거짓말이군. 너한테서 사악한 요기는 느껴지지 않아. 넌 영물이지?”
“하. 인간과 요괴와 영물을 구분 짓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네. 요괴라고 나쁜 짓만 하는 건 아니고, 영물이라고 착한 짓만 하는 것도 아니야.”
“알고 있어.”
“…….”
내가 즉답하자 여우가 미심쩍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영물이 아니고, 요괴가 아니라면 인간일 가능성도 있다. 마법이나 술법을 이용해 몸을 여우로 변화시켰다던가.
“미령. 내가 네 소환자다.”
“흐응. 그건 나도 알아. 네 이름이 성유진이고, 내가 33일 동안만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지. 하지만 그래서?”
“내가 네 주인이라니까.”
“뻔뻔한 소리도 작작해. 넌 날 소환했을 뿐이지, 내 주인이 된 건 아니야. 그리고 난 널 주인으로 모실 생각이 전혀 없어. 솔직히 말해서 넌 너무 약해. 내가 본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넌 내 앞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을 거야.”
“…….”
일은 생각보다 더 잘 안 풀릴 것 같다.
난 대화 방향을 바로 수정했다.
“미안. 소환하는 건 처음이라 내가 착각했나 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눈앞의 여우가 본래 힘이 나보다 더 강하다는 건 허세가 아닐 것이다. 광명승천도 세계는 기본적으로 현실보다 훨씬 수준이 높으니까.
“흐응. 의외로 주제 파악을 잘하잖아? 하지만 진정성이 부족해. 무릎 꿇고 사과해. 그래야 진정성이 잘 느껴지지 않겠어?”
털썩.
나는 무릎 꿇었다.
이깟 짐승에게 무릎 꿇는 일이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여우는 아마도 여자가 진짜일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자로 변할 수 있다.
‘클리셰 대로라면 끝내주는 미인이 되겠지.’
내가 지금 무릎 꿇는 건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미안해.”
“용서해줄게.”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내가 네 주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내가 널 소환한 것도 사실이야. 그러니 협조 정도는 해줬으면 해.”
“…뭐, 소환되는 걸 나도 동의했으니 끝까지 각을 세울 생각은 없어. 다른 세계가 궁금하기도 하니까. 협조 못해 줄 건 없어. 단.”
“단?”
“너의 정기(精氣) 일부를 내게 줘. 넌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웬만한 영물들도 너 정도의 정기는 가지지 못했을 것이야.”
“협조의 대가로 정기를 지불하라는 거군. 좋아.”
“……그렇게 쉽게 대답한다고? 너, 정기가 뭔지는 알고 대답하는 거야? 생명의 근원이야. 정기가 없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그건 정기가 너무 뽑힌 경우겠지. 보통은 며칠이 지나면 회복되지 않아?”
“흥. 모르는 건 아닌 모양이네. 괜히 거부하지 마. 협조에 앞서 대가를 먼저 받을 테니까.”
여우가 입을 살짝 벌렸다. 내 몸에서 나온 새하얀 기운이 그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건 분명 마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몸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으나,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식은땀이 났다.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빼앗긴다. 그렇게 느껴졌다. 몸이 점점 떨리기도 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 그렇게 느끼며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여우가 입을 다물었다.
“하아아. 기분 좋아. 이 정도 정기는 젊은 남자 100명을 죽을 때까지 짜내는 것보다 낫잖아.”
여우는 바닥에 누웠다. 턱을 내리고 웃었다. 두 눈이 반달로 휘어진다.
“……이걸로 협조는 해주는 거겠지?”
“어떤 협조냐에 따라 다르지. 뭘 도와줄까?”
여우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넌… 호인족(狐人族)이지?”
호인족.
인간이지만 영물의 피를 강하게 물려받은 자들. 보는 관점에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영물도 될 수도 있는 반인반수. 상대방은 여우. 그것도 정기를 빼앗는 힘이 있다면 호인족일 가능성이 컸다.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닌가 봐?”
여우는 시원하게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