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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5화 〉 515. 새로운 스킬

515. 새로운 스킬

“넌… 호인족(狐人族)이지?”

호인족.

인간이지만 영물의 피를 강하게 물려받은 자들. 보는 관점에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영물도 될 수도 있는 반인반수. 상대방은 여우. 그것도 정기를 빼앗는 힘이 있다면 호인족일 가능성이 컸다.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닌가 봐?”

여우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렇다는 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거지?”

“호인족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닌 모양이네. 인간으로 변신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여우로 변신해 있는 거야.”

나는 눈앞의 여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본체가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면 왜 굳이 여우로 변신해 있는가? 여우로 변신해 있는 쪽이 더 불편하지 않나?

“인간으로 돌아가.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누자.”

“왜? 지금 이 상태로도 대화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봐, 지금도 나랑 대화하고 있잖아.”

여우가 앞발을 앞으로 내밀고 쭈욱 몸을 늘려 기지개를 켰다. 세모난 귀가 쫑긋거리고 두 개의 꼬리가 빳빳하게 선다.

말뿐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인간의 모습을 취하기 싫다는 걸 표현하고 있다.

“난 동물과 대화해본 경험이 없어서 이 상황이 어색해. 네가 인간 모습이면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아.”

“변명하기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내 인간 모습이 보고 싶은 거겠지?”

“…….”

맞았다.

지금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되겠지. 왜냐하면 여우 상태인 지금도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이니까.

‘어느 정도의 미모인지 알아야 내 의욕이 정해지지.’

목소리만 들으면 미녀다. 하지만 목소리와 외형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는 흔히 있었다. 만약 여우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미녀라면 천천히, 그러면서도 전력을 다해 일을 진행할 것이고, 그럭저럭의 미모라면, 대충 힘으로 강간할 생각도 하고 있다.

“여긴 인간 세계야. 인간이 중심이지. 그러니 너도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게 좋지 않아? 내 집에 있는 것만해도 전부 인간에게 맞춰진 물건이야. 이 세계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게 더 편할걸?”

“난 이 모습이 더 편해.”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게 말한다.

“…후. 알았어. 근데 진짜 이유는 뭐야? 진짜 그 모습이 편한 거야?”

“이 모습이 편한 건 사실이야. 그리고 경험상 정기가 강한 남자들은 높은 확률로 귀찮게 굴거든.”

나는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했다. 억지를 부려봤자 반목만 하게 될 뿐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야? 경지는 어떻게 되고?”

“난 술법사야. 결계를 칠 수 있고, 재료만 있다면 법구도 만들 수 있어. 경지는 오기 9단.”

나는 [광명승천도]의 경지 내용을 떠올렸다.

입식(入式) ? 출지(出志) ? 오기(五氣) ? 삼정(三頂) ? 조화(造化) ? 만상(萬象) ? 등선(登仙)

인간계의 일곱 경지 중 세 번째에 속하는 오기다. 9단이라면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직전이라 할 수 있었다. 결코 낮은 경지가 아니다.

“법구는 정말 재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거야?”

내 흥미를 끄는 것은 법구 제작이었다. 광명승천도에서 법구를 만들기 위해선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현실에도 특별한 재료가 있다. 바로 몬스터의 사체. 던전에서만 자라는 특이한 꽃 같은 것도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 으음~. 생각해보니 안 되겠어. 지금 내 힘은 출지 5단도 되지 않는 수준이야. 그리고 법구를 만들 때는 장소도 중요하고, 도구도 있어야 해. 여긴 그 조건의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잖아.”

“술법은?”

“술법도 마찬가지야. 간단한 결계를 치거나, 시시한 저주를 거는 정도?”

“…….”

쓸모없어 보였다.

내 눈을 의식한 것일까. 여우가 고개를 치켜들고 으르렁거렸다.

“그 눈은 뭐야? 빨리 안 치워? 계속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잡아 먹어버린다?”

“인간도 먹어 봤어?”

“씹어 먹진 않았지만, 정기를 빨아 먹어 죽였지.”

“몇 명?”

“글쎄. 대충 3,000명 정도? 너무 많이 잡아먹으면 퇴마사란 것들이 찾아와서 조심해서 먹느라고 힘들었지.”

왜 사람의 정기를 뺏어 먹냐고 묻지는 않았다. 이유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경지를 올리기 위해서겠지.’

그녀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광명승천도] 세계에선 경지를 높이기 위해 수천 명의 동자와 동녀를 죽이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도 3,000명의 정기를 빨아 먹었는데도 경지를 쉽게 올리지 못한다는 건 효율이 썩 높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순수하게 수련을 하는 것보다는 효율이 높겠지만.

“그런데 너. 아까보다 편해 보이네? 꽤 한계까지 빨아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정기의 양이 어마어마하더니 회복력도 남다르구나?”

“…난 이미 협조의 대가는 치렀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 엎어져서 자고 싶은 기분이야.”

거짓말이다. 몸이 조금 무거울 뿐이지 졸음은 없었다.

“흐음. 협조하는 대신 3일마다 정기를 내게 주는 거야. 잊지 마.”

“3일마다?”

“왜, 싫어? 싫으면 협조고 뭐고 없어. 난 이대로 밖으로 나가서 돌아갈 때까지 이 세계를 둘러보면 그만이야.”

“이 세계를 너무 만만하게 보다간 큰코다칠 거야.”

“어쩌라고. 난 어차피 죽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뿐이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저 마인드는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3일마다 정기를 빼앗긴다…. 기분이 좀 불쾌해지는 것 말고는 문제없어.’

굳이 날 적대하거나,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소환될 때 어떤 느낌이었어?”

“평소처럼 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의지 같은 게 느껴지더라.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닌 것 같아서 그 의지에 동의했어. 그리고 눈을 떠보니 여기였지.”

“소환에 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자연스레 알게 된 것뿐이야. 내가 33일 이 세계에 머물 수 있고, 죽으면 역소환될 뿐이며, 네가 날 소환했다는 것만 알아. 아, 그리고 한국어라는 언어에 대한 정보도 자연스레 알았어. 네가 사용하는 언어지?”

“그럼 지금부터 한국어를 사용해줘. 난 이쪽이 더 편해.”

“좋아. 이 세계에 왔으니 이 세계의 언어를 사용해야지. 그리고 이 한국어란 것도 꽤 마음에 드니까.”

나는 여우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여우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술법이 많아. 그리고 일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야.’

웬만한 일은 협조한다. 대신 최소 3일에 한번은 쉬어야 한다. 미령이 원한 조건이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디 출신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미령. 너 더러워 보인다. 좀 씻자.”

“하? 내가 더러워? 이 하얀 털들을 보고 그런 말이 나와?”

“자세히 보면 먼지가 묻어 있잖아. 게다가 발에는 흙까지 묻어 있구만! 여긴 밖이 아니야. 따라와. 내 집에서 생활하려면 최소한의 청결은 유지해야지.”

“…큭. 알았어.”

집의 주인은 나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여우는 반박하지 못하고 나를 따라 욕실로 들어왔다.

“인간 모습으로 변하면 안 돼? 집에 털 날리는 건 질색인데.”

“몇 번을 말해도 난 이 모습을 바꿀 생각이 없어.”

한숨을 내쉬고 샤워기를 잡아 물을 틀었다. 날씨도 더우니 굉장히 차가운 냉수로.

“갑자기 물이 나오잖아?! 뭐야, 그거. 법구?!”

“법구는 무슨. 그냥 샤워기야.”

“샤워기? 그게 뭔데? 술법이 아니면 대체 무슨 원리로 물이 나오는 거야?”

하얀 여우의 검은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수도꼭지?”

[광명승천도] 세계의 문명 수준은 높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일일이 대답하면 끝이 없겠지.’

나는 여우의 몸에 물을 뿌렸다.

“꺄아앗!”

갑작스러운 물난리에 짧은 비명을 지른 여우가 나를 찌릿 노려봤다.

“씻는 것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어. 나가.”

“할 수 있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씻을 거야?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지식도 없잖아. 나도 계속 네 뒤치다꺼리 할 생각 없으니 내가 뭘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보고 배워.”

“…이번 한 번 만이야. 이상한 곳을 만지면 네 정기를 전부 빨아 먹을 거야.”

“사람을 뭐로 보고…. 난 짐승에 발정 안 해.”

그 짐승이 끝내주는 미녀가 된다면 또 모를까.

나는 샤워기를 들고 여우의 몸을 씻기기 시작했다. 손으로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생각 이상으로 훨씬 부드러운 털이었다.

‘샴푸를 써도 되나? 사람이 쓰면 사용하면 안 된다고 본 것 같은데….’

멈칫했지만, 곧 샴푸를 집었다. 내 앞에 꼬리 두 개 달린 여우는 평범한 동물이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킁킁. 냄새 좋은 액체야. 향수 같은 거야?”

“……비슷하지.”

샴푸를 여우의 몸에 바르고 만졌다. 금방 거품이 일어났다.

“눈이 따가워. 이거 향기는 좋은데… 이상한 거 아니지? 독이라거나….”

“아니니까 눈감고 가만히 있어.”

“……아. 기분 좋아. 너 보기와는 다르게 손길이 섬세하구나?”

미령이 내 샴푸 솜씨에 감탄했다.

옛날에 미용실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가위나 바리깡을 잡지는 못했지만, 샴푸 서비스는 내가 담당했다.

‘손님들의 머리를 한 번 감겨줄 때마다 500원의 용돈을 받았지.’

다른 건 몰라도 머리 감겨주는 건 자신 있었다. 거기에 성감 고조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내 손길이 기분 좋지 않게 느껴질 리가 없다.

“아. 아…. 뭔가 몸이 노곤해져…. 이 솜씨는 보통이 아니야. 이제 보니 넌 경력 있는 시종이었구나. 그렇지?”

“아닙니다요.”

대충 대답하며 마무리했다. 수건으로 여우의 몸을 닦고 헤어드라이어까지 이용해 몸까지 말려줬다. 원래 이렇게까지 해주지는 않지만…. 상대방의 호의를 사려면, 먼저 호의를 보여줘야 한다.

나는 빗을 들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는 그녀의 털까지 빚어줬다.

[평온의 빗

빗질을 당하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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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선 효과가 없습니다.]

랜덤 뽑기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이걸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아, 좋다아~”

“여기까지.”

“뭐? 조금 더 해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1분 정도 해줄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부탁으로 무려 15분이나 앉아서 빗질을 해줬다.

“난 네 시종이 아니야. 빗질을 하고 싶으면 네가 해.”

“이 손으로 어떻게 해? 빗질을 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날 소환했으면 네가 책임져야지!”

“허….”

기가 찬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인간 모습으로 빗질을 하든, 빗을 입에 물고 하든 알아서 해라. 난 저녁 준비해야 하니까.”

“저녁 식사는 내 몫도 준비하는 거 잊지 마. 맛없으면 바로 갈아엎을 거야.”

“여우 모습으로 먹을 테니 개밥그릇에 담아주면 되지?”

“너!!”

여우가 날 째려봤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여기서 쉽게 물러날 수는 없다. 첫인상은 중요하지만, 호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밥그릇에 담아 줄게. 알아서 먹어. 짐승처럼 먹든지, 아니면 사람처럼 식기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내가?떠먹여주랴?”

“…….”

미령은 입을 다물었다. 화난 기색은 아니다. 스스로도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그녀는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는 듯 했다.

“저녁 식사는 됐어. 배는 안 고프니까.”

개처럼 밥먹기는 싫고, 내게 인간 모습을 보이기 싫으니 굶기를 결정한 모양이다.

“그래.”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며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김치찌개를 비롯한 찌개류 음식 3개, 반찬 11개와 밥. 풍족하다 못해 넘치는 음식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유리아가 만들어준 것들이다. 맛은 보장한다. 이 음식들과 함께라면 밥 한솥을 통째로 먹을 수 있다.

꿀꺽.

여우에게서 난 소리였다. 여우는 군침을 흘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아가 만든 음식이다. 냄새만 맡아도 식욕이 돋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우는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우린 협력 관계지? 원활한 협력을 하려면 식사 정도는 같이 해야지. 그리고 넌 날 소환했으니 의식주는 보장해줘야 해.”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먹을 건데? 개처럼? 아니면 사람처럼?”

“……밥 먹을 때만 한정이야.”

여우의 몸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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