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화 〉 516. 새로운 스킬
516. 새로운 스킬
여우의 몸이 빛났다.
이윽고 여우는 사람이 되었다.
“……!!”
여자를 본 나는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렸다. 미녀일 것이라곤 생각했다. 보통 소설 속의 캐릭터는 죄다 미형이니까. 하지만 직접 보니 내 생각 이상의 미녀였다.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별처럼 반짝이는 듯한 눈동자와 오뚝한 코. 분홍색의 자신만만한 입술.
가슴은 G컵으로 추정된다. 군살 없는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도 순산형이다. 다리는 쭉 빠졌다. 어디 못난 곳이 없었다.
머리 위에는 하얀색의 여우 귀와 허리 뒤쪽에는 하얀 여우 꼬리 2개가 살랑인다. 입고 있는 옷은 새하얀 비단옷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나한테 반했지? 보통이라면 그냥 죽여버렸을 텐데. 나랑 협력하기로 했으니 봐주는 거야.”
그녀는 여우처럼 요망하게 눈웃음쳤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당장 미령을 덮쳐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인간 모습이 훨씬 보기 좋고 편해 보이네. 앞으로 계속 인간 모습으로 있지 그래?”
“흥.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내가 인간 모습이 되는 건 밥 먹을 때 한정이야.”
그녀가 식탁 앞에 앉았다. 그녀에게 밥공기를 건넸다. 나와 그녀의 조용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맛있어! 이런 요리는 처음이야! 이 요리의 이름은 뭐야?”
“김치찌개.”
“네가 한 요리야? 실력이 엄청난걸. 숙수로 계약해서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내 메이드가 만들었지.”
“메이드?”
“하녀. 지금은 여기에 없어.”
미령은 연신 맛있다는 소리를 내뱉으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의외로 대식가였다. 밥은 두 공기를 넘어 다섯 공기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준비해둔 밥이 떨어져서 즉석밥을 데워줬다.
“맛있어! 맛있어! 이것도 맛있어! 하아….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정말.”
미령은 입에 음식을 넣으면 기뻐했고, 삼킨 뒤에는 줄어든 음식들을 보고 슬퍼했다.
그녀는 무려 즉석밥 6개를 추가로 해치웠다.
‘여우가 아니라 돼지였나.’
후식으로 과일을 꺼냈다. 망고와 수박이었다. 그녀는 두 과일 모두 난생처음 봤는지 눈을 반짝였다.
“맛있어! 과즙이 시원하고 달아! 그리고 이 망고…?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먹을수록 빠져들 것 같아.”
미령이 행복한 얼굴로 과일을 먹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힐끗 훔쳐봤다.
‘먹을 거로 공략해야 되나? 음식으로는 한계가 있어. 다른 뭔가가….’
이후에 다시 여우로 변신한 그녀와 함께 TV 앞에 앉았다.
미령은 난생처음 보는 TV에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다가 점차 빠져들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드라마였다. 나는 유희 생활 어플 때문이라도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건 꾸준히 챙겨보는 편이었다.
멍한 미령과 TV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크크크크크.’
그녀를 공략할 방법을 떠올렸다.
“미령. 잠깐 나갔다 올게. 좀 늦을 거야. 자고 싶으면 알아서 자.”
“어? 응.”
여전히 TV에 빠져 있는 그녀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향하는 곳은 한하린의 집이었다. 내 사타구니 사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며 딱딱해졌다.
???
미령이 성유진에게 소환된 지 3일이 지났다.
첫날의 미령과 지금의 미령은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부터 여우의 모습 대신 인간의 모습으로 활동했다. 성유진의 말마따나 사람의 모습으로 행동하는 게 훨씬 편했다.
그녀는 적응력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원래 입고 있던 하늘하늘한 비단옷은 구석에 내버려 두고 활동하기 편한 핫팬츠와 티셔츠 한 장을 입고 소파 앞에 앉았다.
물론 속옷도 착용했다. 성유진의 집에는 여자의 속옷이 있었다. 브래지어 쪽은 답답해서 입지 않았다.
“나의 형수님은 구미호? 이런 재밌을 것 같은 드라마가 있을 줄이야! 이런 건 당연히 봐야지!”
능수능란하게 리모컨을 조작해 드라마를 실행시킨 그녀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콜라, 사이다를 비롯한 과자들이 널려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배를 긁고, 한 손으로는 과자를 계속 집어 먹으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저, 저, 저, 못된 년! 꼬리가 늘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거야? 어떻게 여우 꼬리를 없앨 사악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드라마에 나오는 악녀를 욕했다.
“흐윽. 흑. 전생의 연인이었구나. 너무 멋져. 그리고 불쌍해. 흑.”
드라마에 너무 몰입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벌써 점심때네? 아, 배고프다. 어제는 치킨을 시켰으니… 오늘은 이 찜닭이란 걸 시켜 먹을까? …음. 떡볶이도 어떤 맛인지 한번 먹어보고 싶어. ……둘 다 시키자!”
성유진이 준 스마트폰의 배달 어플 사용법을 터득한 그녀는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철컥.
문이 열리며 성유진이 들어왔다.
“왔어?”
미령은 성유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보통이라면 무시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양심이란 걸 약간이지만 가지고 있었다. 성유진의 집에 얹혀산다는 것에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설마 아침부터 계속 TV만 보고 있었던 거야?”
“응. 드라마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으니까. 평생 이것만 보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미령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는 지루했다. 낮잠을 자거나, 수련하는 것을 제외하면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음식도 이 세계의 자극적이고 화려한 음식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심심했다. 미령은 이 세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성유진이 미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령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가 풀어졌다. 성유진에게서 약간의 비릿한 냄새와 여자의 분 냄새가 났다. 그녀의 뛰어난 후각은 여자와 살을 섞으며 발생한 묘한 냄새까지 포착했다.
‘정기가 많은 남자는 성욕도 강하지. 이상한 일은 아니야. 내가 그의 성생활에 참견할 이유도 없고.’
미령은 무시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미령. 스마트폰의 활용법이랑 컴퓨터를 가르쳐줄게.”
“컴퓨터?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건 노트북이잖아.”
“노트북은 컴퓨터의 일종이지. 최근에 나온 프리미엄 노트북이야. 너한테 줄게.”
성유진이 미령의 몸매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씨익 웃었다. 미령은 기분이 좀 나빠졌지만, 참기로 했다.
안 그래도 관심있던 노트북이라는 선물을 가져왔으니까. 자신의 몸을 보는 것 정도는 허락해줄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지만.
“이게 인터넷이야. 여기 보면 실시간 검색 순위도 볼 수 있고, 뉴스도 볼 수 있지. 만화도 볼 수 있어. 아, 이건 동영상 사이트. 그리고 이 노트북으로 게임도 할 수 있어.”
“게임?”
“대표적으로 전설의 영웅이 있지. 줄여서 홀이라 불리는 게임인데… 아주, 아주 재밌을 거야. 크크.”
“으음. 게임이라? 난 그런데 별 관심 없어.”
“한 번 해봐. 드라마 볼 시간은 있잖아.”
“……한 번 정도면 괜찮겠지. 아, 저녁에 네 정기를 가져갈 테니까. 잊지 말고 준비 해.”
미령은 신세계를 마주했다.
“아아아아악! 정글 차이! 우리 정글은 뭐 하는 거야?!”
“혜지? 지금 나보고 혜지라고 한 거야? 이 엄마 없는 놈이!”
“대체 왜 점멸을 그따위로 쓰는 거야?!”
미령의 성격이 더러워지기까지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성유진. 나, 이 스킨 갖고 싶어. 사도 되지?”
“돼. 근데 너 내 돈을 너무 팍팍 쓴다?”
“……이 정도는 써도 되잖아. 나도 한국의 물가 정도는 대충 알아.”
“좋겠다. 넌 내 돈도 마음대로 쓰고, 정기도 마음대로 가져가고. 아주 살맛 나겠어.”
“……알았어. 오늘 정기는 안 받을게. 됐지? 남자가 쫌생이처럼 투덜거리긴….”
미령은 점점 게임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그녀는 인터넷의 위대함을 깨달았고, 그다음 날에는 소설의 즐거움을 알았다.
한 번은 밖으로 나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집 밖을 나가는 순간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을 견디다 못하고 다시 집안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에어컨이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깨달았다.
???
미령이 소환된 지 열흘이 지났다.
나는 TV 앞에 앉아 콘솔 게임을 하고 있는 미령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눈동자를 굴러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내 손에 들려 있는 빗을 확인하고는 두 개의 여우 꼬리를 흔들었다.
“꼬리 빗질해 줄게. 좋지?”
“으, 으응.”
미령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날 꺼리는 것 같지만, 그녀는 들떠 있었다. 내가 해주는 빗질을 좋아한다. 싫어했더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테지.
스윽스윽.
꼬리를 빗질한 다음에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하얀 여우 귀가 쫑긋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여우 귀가 사라졌다. 그녀는 귀와 꼬리를 자유자재로 숨길 수 있었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라지는 것이다.
‘빗질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것까진 성공했고….’
다른 계획도 순조로웠다.
“미령. 내가 이번에 던전에 갈 건데 도와줄 수 있지?”
“던전? 너 혼자 가도 상관없지 않아? C등급 헌터라며.”
“C등급 던전에 갈 거야. 네 도움이 있으면 편하게 사냥할 수 있겠지.”
“가기 싫어. 몬스터 따위를 상대해봤자 내가 얻는 건 없어.”
“우린 협력 관계 아니었어? 그리고 지금껏 너 때문에 쓴 돈이 얼만 줄 알아? 그 돈을 메꾸기 위해서라도 던전에 가야 해.”
미령은 양심에 찔렸는지 잠깐 침묵했다.
그동안 미령은 내 돈을 자기 것처럼 펑펑 써댔다. 게임에 쓰는 건 물론이고, 인터넷 쇼핑에도 좋은 게 있으면 냅다 쓰고 봤다.
“……너 돈 많잖아.”
“너한테 쓴 게 3억이야.”
“웃기지 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안 썼어!”
“대부분 네 신분증을 구하는데 든 돈이야. 브로커에게 많이 뜯겼지.”
“……알았어. 도와줄게.”
미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정말 내키지 않는 듯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편한 나시티를 입고 있었던 그녀다. 덕분에 어깨의 보드라운 살결을 손으로 즐길 수 있었다. 웅장한 가슴 계곡이 보이는 것은 보너스다.
노브라라 그런지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내가 저번에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미령이 흉흉한 살기를 내비쳤다. 그녀의 몸에서 기운이 요동친다.
“오늘이 열흘째야. 알고 있지? 남은 소환 유지 시간은 23일뿐이지.”
“…….”
미령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기가 사라졌다. 한껏 복잡해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현대 문명에 푹 빠졌다. 술법을 이용해 잠까지 줄여가면서 게임과 드라마, 영화 등등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걸 전부 지원해주었다. 비싼 돈을 들여 신분증까지 만들어주며 그녀를 데리고 시내로 나가기도 했다.
[광명승천도] 세계에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기간 한정이란 말이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다시는 즐길 수 없어.’
문명으로 공략한다. 그게 내 공략 방식이었다.
“……알고 있는 걸 말하지 마. 설마 내가 돌아가는 걸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 난 내가 살던 세계를 좋아해. 거긴… 공기가… 좋으니까….”
말이 뒤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광명승천도] 세계는 현실보다 더 위험하고 재밌는 것도 없었다. 물을 구하기 위해선 우물가를 찾아야 했고, 시간을 보낼 게임이나 재밌는 소설은 당연히 없었으며, 음식도 배달되지 않았다.
탁!
기분 나쁘다는 듯 어깨에 올라간 내 손을 쳐낸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디가?”
“잠깐 낮잠 잘 거야. 일어나서 던전 공략을 도와줄 테니까. 깨우지 마.”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등을 보며 말했다.
“알고는 있겠지만, 네가 이 세계에 소환되기 위해선 내 힘이 필요해. 그리고 나라고 해서 공짜로 널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대가는 꽤 비싸지. 내가 다시 널 소환할 일은 없을지도 몰라. 사실대로 말해서 넌 지금 내게 도움이 되고 있지 않으니까.”
“……흥.”
쾅!
미령이 방문을 강하게 닫았다.
내 계획은 이렇다. 현실에 푹 빠진 미령이 다시 소환해달라며 내게 매달리게 만드는 것.
미령이 이 세계에 다시 오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는 순간, 내가 갑이 되고 그녀가 을이 된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방에 들어가기 전의 그녀의 얼굴을 보고 확신했다.
‘좀 더 미련을 갖게 만들어야지. 친구를 만들어 줘야 하나? 한하린과 한아영을 소개해 줄까?’
그날은 얼마 안 남았다.
‘내가 갑이 되면 우선 말투부터 고쳐줘야지. 크크.’
주인이 누구인지, 그 몸뚱어리에 확실히 각인시켜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