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0화 〉 53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3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본가의 집사장 하센트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선대 가주 시절부터 몇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집사장을 맡아왔으며, 유리아에게 그림자 마법을 가르친 스승이라 할 수 있었다. 정작 하센트나, 유리아나 사제관계라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하센트. 나와 비비 헤올리스의 관계를 알고 경멸했나?”
하센트는 나보다 더 오래 일해왔고, 가주의 신뢰도 받고 있다. 결코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둘만 있을 때는 예외였다.
“아닙니다. 공자님. 전 공자님의 성생활에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오히려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공자님이 심어둔 첩자. 젠트 공자는 자신의 아내가 첩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요.”
하센트의 두 눈에는 나를 향한 신뢰가 가득했다. 하센트는 나를 선택받은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작의 정보를 이용한 결과였다.
“하센트. 너라면 나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 내 여자관계가 깨끗하지 못한다는 걸.”
“좋은 일입니다. 프루커스의 주인이 되실 분의 씨앗이 여기저기 퍼져나가지 않습니까. 그 씨앗 중에서 우수한 이가 프루커스의 차기 주인이 되겠지요.”
“…카일 형이 익스퍼트 최상급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도 내가 프루커스 가문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공자님. 무력은 중요하지만, 가문의 주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은 아닙니다. 공자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프루커스 가문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저는 그 말을 확인했습니다. 공자님이 코리아 상단을 창설하고부터 프루커스 가문을 무시하던 자들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돈의 힘은 대단하더군요.”
“돈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기에 누구에게나 대단한 거지. 카일 형은 몇 년 후에 오러 마스터가 될지도 모른다. 그때도 나를 따를 건가?”
“전 이미 공자님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오러 마스터. 대단합니다. 모든 기사의 동경을 받는 경지이며, 인간을 초월하여 만 명의 병사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경지지요. 그리고 공자님에겐 그 경지의 칼을 가지고 계십니다.”
칼.
하센트는 항상 유리아를 칼로 비유했다.
“유리아의 경지를 알았나. 유리아는 철저하게 자신의 경지를 숨겼을 텐데.”
“겨우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숨겼기에 반대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긴. 유리아에게 암살하는 법과 그림자 마법을 가르친 건 하센트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자신이 벼린 칼이 최고의 칼이 되었는데 기분은 어떻나?”
“제가 벼린 칼이 아닙니다. 제가 그녀에게 가르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벼려진 칼입니다. 너무 날카로워서 공자님에게 해가 되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하센트는 유리아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유리아를 믿었지만, 하센트는 지금도 유리아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다.
“괜찮다. 유리아가 내게 해를 입힐 일은 없어.”
유리아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맹세할 수 있다. 내가 죽으라고 한다면 토 달지 않고 죽을 여자가 유리아다.
“하센트. 너를 부른 건 이틀 뒤에 귀환할 아버지의 의중을 알기 위해서다.”
“…송구합니다. 현가주님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가주님은 저를 신뢰하고 있습니다만…. 절 암살자로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요근래에는 어떤 언질도 없었습니다.”
“추측해보자면?”
“모르겠습니다. 가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파격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파격적인 무언가를 할지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해서 물어봤던 것뿐이다.
프루커스 백작, 엔티온은 말수가 적고, 젊었을 때는 괴짜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가신들이 그의 의중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틀 뒤에 뭔가 일어나긴 일어나 거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잠들 시간이었다.
“연회 당일에 에이든 왕자와 아일린 공주가 올 거다. 초대에 응했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 파다하지.”
“네. 저도 들었습니다. 암살을 명하신다면 제 모든 것을 걸고 공주와 왕자를 죽이겠습니다.”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
“공자님. 전 공자님의 칼입니다. 비록 그녀처럼 날카롭지 못합니다만, 칼의 일은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일회용으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러니 부디 거리낌 없이 사용하십시오.”
“……언젠간 사용할 날이 올 거야.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지. 네가 해야 할 일은 에이든 왕자의 감시야. 에이든 왕자가 헛짓거리하면 일이 꼬여. 특히 젠트 형이나 카일 형과 개인적으로 접촉한다면 바로 내게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갈 때 유리아 좀 불러줘.”
오늘도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내야지.
“네. 공자님.”
???
연회 당일 이른 새벽에 엔티온 프루커스 백작이 귀환했다.
나와 가족들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족한 수면에 발걸음에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저택 1층으로 내려갔다.
하인들과 가신들까지 모두 부동자세로 가주의 귀환을 맞이했다.
짧은 검은 머리와 동굴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 거대한 체격의 몸은 근육으로 가득 찼고, 피부는 태양에 그을려 구릿빛이었다. 턱수염이 있으며 입가와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인 주름이 파여 있었다.
그저 이쪽으로 걸어올 뿐인데도 남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엘라인이 대표로 엔티온에게 인사했다.
“돌아오셨습니까. 시키신 일은 모두 처리해두었습니다.”
“음.”
부부가 아니라 군신 관계의 대화 같았다.
그는 한번 주의를 둘러봤다.
엔티온의 눈이 잠시 멈춘 것은 세 명에게서다.
젠트, 카일, 그리고 나.
“이렇게 보니 셋 모두 많이 자랐군.”
“아버지. 저희는 아이가 아닙니다. 막내의 성인식도 몇 년 전에 치르지 않았습니까.”
젠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평소에도 엔티온과 함께 우트렌 성에서 생활한다. 그러니 우리 형제 중에서 가장 엔티온과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것 치곤 후계자 자리도 못 꿰찬 놈이지만.’
엔티온의 눈주름이 깊어졌다.
“…그렇지.”
그는 나를 본 뒤에 카일을 빤히 쳐다봤다. 눈동자에 감탄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뿐이었다.
“젠트. 카일. 유진. 오늘 오후에 있을 연회에 반드시 참석하도록. 반론은 허락하지 않겠다. 이건 명령이다.”
“네.”
우리들의 대답을 들은 엔티온이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엘라인이 자리를 정리했다. 젠트와 카일이 먼저 사라지고, 가신들이 다음으로 돌아갔으며, 하인들이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물러났다. 나는 주위의 시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엘라인에 등 뒤에 섰다. 팔로 허리를 휘감고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어머니. 설마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시죠?”
“……가주님과 난 다른 방을 쓴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제가 어머니의 방으로 가도 되겠군요.”
내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유진아…. 방금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네. 그러니 더욱더 어머니의 방으로 가야겠습니다. 어머니에게 제 흔적을 남겨야 안심이 될 것 같으니까요.”
“아, 알겠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누가 우릴 볼까 두렵구나.”
“어머니. 얼굴이 붉히는 게 꼭 소녀 같아서 귀엽습니다.”
“읏…. 넌 어머니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나는 실실 웃으며 엘라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엔티온은 아내를 아들에게 빼앗겼고, 장남인 젠트의 아내는 막내 동생의 씨를 받아 임신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물론 카일의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지. 카일은 그 못생긴 년이랑 결혼할 테니 나한테 아내를 빼앗기지는 않겠군.’
원작에 나오는 히로인은 전부 내 것이 될 테지만.
나는 낮이 될 때까지 엘라인과 몸을 섞었다.
???
연회장이 북적였다. 수많은 귀족이 들어차 있었다. 이 정도의 일원이 왕궁도 아닌 백작가에 모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와 형제들은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에 연회 시작부터 들어와서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정작 엔티온은 연회의 주최자로서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들어오겠지만.
“에이든 왕자님과 아일린 공주님이 입장하십니다!!!”
집사의 큰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연회장 내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두 명의 남녀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다.
환하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남녀였다. 눈동자도 똑 닮은 사파이어색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망나니 왕자. 에이든은 시선에 압도되어 긴장 가득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온다. 옷은 왕자라는 걸 뽐내듯이 무척이나 화려했다. 그의 눈동자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흔들렸다.
반면에 재상 공주. 아일린은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수수하지도 않은 연 파란색 드레스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면을 똑바로 직시한다.
사람을 보는 눈이 없는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역량 차이가 보였다.
아일린 공주는 곧장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공작과 후작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고, 에이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기존의 패거리들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작위도 받지 못한, 대부분 평가가 좋지 않은 귀족들이다.
‘한심하군.’
나는 아일린 공주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카일과 인사를 나누는 걸 확인했다.
‘……유리아의 추측대로 카일에게 바람을 넣은 건 아일린 공주였나.’
겨우 인사를 나눈 걸 가지고 이런 판단을 내리기엔 좀 섣부른 것 같지만, 내 직감이 아일린 공주라고 말하고 있다.
“프루커스 백작 각하와 백작 부인께서 입장하십니다!!!”
엔티온과 엘라인이 들어와 당당하게 맨 앞으로 향했다.
엔티온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상 이상의 많은 인원이 모여주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초대한 것은 중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마나의 실린 목소리는 연회장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예정에는 없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허나 귀족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중대한 사실이라…. 그대의 말을 듣기 위해 이 정도의 인원이 모였다. 왕자님과 공주님까지 모였지. 실망스러운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루크만 페트라스 후작이 말했다.
북부의 거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오러마스터다. 흑갈색의 머리카락은 약간 길었다. 북부의 거인이란 별명과 다르게 키는 평범했다. 그의 별명의 유래는 무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보다 큰 창을 사용했다.
엔티온은 잠깐 루크만을 쳐다봤다.
“……페트라스 후작. 들어보시고 판단하시죠.”
루크만의 두 눈은 투지로 이글거린다. 엔티온과 루크만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귀족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엔티온은 잠깐 흐트러진 분위기를 가다듬듯이 침묵을 지킨 뒤에 말했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은 아마도 반년.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르게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전쟁을 예측하고 있었던 귀족들은 엔티온의 확신에 찬 말에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쟁을 전혀 모르고 있던 자들은 당황했다.
“…프루커스 백작. 그 말은 확신할 수 있나. 그리고 왜 국왕 전하께 보고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말하는 거지?”
이번에도 페트라스 후작의 질문이었다.
“늦어도 1년 안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엔티온의 말은 맞았다.
나의 개입 때문인지. 원작과 다르게 전쟁의 시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국왕 전하께는 이미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국왕 전하께서 제게 총사령관의 직위를 내리셨습니다. 라펠리 왕국의 모든 군대는 제가 통솔합니다.”
“……진실이냐.”
“제가 어찌 감히 국왕 전하의 어명을 농하겠습니까. 증인 또한 있습니다. 아일린 공주님.”
모두의 시선이 아일링 공주에게 향했다. 아일린 공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네. 국왕 전하께서 프루커스 백작을 총사령관으로서 명령하셨습니다.”
페트라스 후작은 작게 혀를 찼다.
“허, 이제 보니 오늘의 연회는 총사령관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나? 축하연에 왔으니 축하해줘야겠지. 축하한다. 프루커스 백작.”
“감사합니다만, 그 축하는 잠시 뒤에 받겠습니다.”
“아직 더 중요한 말이 남았나?”
“두 가지가 남았습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들이 아닌 제 아들들에게 하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장소에서 말하는 건, 여러분들이 증인이 되어주시길 원해서입니다.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제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섬뜩한 말이었지만 옳은 말이었다. 오러 마스터가 이 세상에 엔티온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니까. 엔티온이 전장에서 죽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저는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아들에게 백작위를 계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