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5화 〉 53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3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예정보다 이틀이나 더 늦게 벨바트 미궁 도시에 도착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유리아와 계속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친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섹스를 해댔다. 도중에 들린 마을에서도 마찬가지로 섹스 삼매경이었다. 비록 좀 늦긴 했지만 후회스럽진 않았다.
벨바트 미궁 도시는 일반 영지와 달리 주인이 없다. 영지라면 마땅히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 있기 마련이지만, 미궁 도시의 경우 모험가 길드가 운영한다.
모험가 길드가 세금을 거둬들이고 정해진 운영 예산을 제외한 세금을 왕가에 전한다.
‘옛날에 귀족 중 누구도 미궁 도시를 원하지 않다 보니 결국 모험가 길드가 미궁 도시의 주인이 되었지.’
지금은 미궁 도시가 안정화 된 상태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미궁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일이 잦았고, 그 피해를 감내하기 싫었던 귀족들은 미궁 도시를 받으면 반납하거나, 다른 이에게 떠넘겼다.
“귀족이 없어서 그런지 묘한 활력이 있군.”
주위에 돌아다니는 모험가들이 보인다.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모습이 꼭 현실의 헌터를 떠올리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모험가와 헌터가 하는 일은 비슷했다.
“네. 하지만 노예는 있군요.”
유리아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길 한편에서 짐 마차를 이끄는 건장한 노예들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 발목에 찬 족쇄의 흔적으로 바로 노예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노예로 귀족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가 보군.”
노예는 어디에든 있기에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궁 도시에서 노예의 소모가 빠르다. 몬스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로.
“주인님. 바로 미궁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 일단 숙소부터 잡고 내일 미궁에 들어가자.”
우린 평범하게 미궁이나 공략하고자 온 게 아니었다.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미궁 도시에서 가장 고급의 호텔을 잡고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예쁜 미녀 직원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남자 직원들밖에 없었다. 대충 한가해 보이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와 유리아는 루비 등급 모험가 신분패를 그에게 슬쩍 보였다. 그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 갔다. 우리는 현재 화장 기술을 이용해 얼굴을 약간 변형시켰다.
나는 나이가 더 많아 보였고, 유리아의 경우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써서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북쪽에서 온 모험가인 제임스다. 내 옆에 있는 동료는 유라, 같은 등급이지.”
“환영합니다. 제임스 님. 유라 님. 당장 지부장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지부장에게 볼일은 없으니까.”
“그, 그럼 어떤 볼일이신지….”
그가 말을 더듬었다. 루비 등급부터는 못해도 오러 익스퍼트 하급 이상의 경지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긴장했군. 편하게 있어라. 모험가 길드에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성심성의를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린 벨바트 미궁을 경험해보기 위해 찾아왔다. 벨바트 미궁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바로 떠날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지. 우린 미궁의 길을 모르고, 벨바트 미궁의 자세한 정보를 모른다.”
“알겠습니다. 제임스 님은 길잡이를 원하시는군요.”
“말귀가 밝아서 다행이군.”
길잡이를 구하는 건 미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미궁에 대한 정보를 직접 파악하는 것보다 길잡이를 구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
“내일까지 길잡이 후보 명단을 선별해놓겠습니다. 원하시는 인재가 있습니까?”
“크게 바라는 건 없고 무능하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저… 고용비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는지…. 유능한 모험가들은 보수가 낮으면 활동하지 않습니다.”
능력 있는 자들의 가치가 높은 건 현실이나 이 세계나 똑같았다.
“길잡이를 고용하는데 보통 얼마 정도 하지?”
“평범한 길잡이는 하루에 50만 네르를 요구합니다.”
“비싸군.”
“길잡이 역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베테랑 모험가뿐입니다.”
“3,000만 네르로 일주일을 고용하겠다.”
“너, 너무 많습니다. 그 정도 돈이면 모험가 파티 하나를 통째로 고용하실 수 있습니다.”
“쓸만하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일 이 시간에 찾아오겠다.”
나는 유리아와 함께 미궁 도시를 한 차례 둘러보다가 숙소로 귀환했다.
???
다음날.
모험가 길드는 어제와 다르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내가 길드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힌다.
“드디어 고용주께서 오셨구먼.”
“루비 등급의 모험가라지? 포스가 남다르군.”
“전 10년이 넘게 벨바트 미궁 도시에서 살아왔습니다! 길 안내는 제 전문입니다! 절 뽑아주십시오!”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길드 직원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제임스 님. 높은 보수가 걸린 일이라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많은 모험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됐다. 오히려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다. 여기 있는 자들 중에 쓸만한 자를 뽑으면 되니. 길드에 현재 사용하지 않는 방이 있나? 따로 모험가들을 면접하고 싶군.”
“예! 현재 안 쓰는 방이 있습니다. 조금 지저분하니 10분만! 10분만 기다려주십시오!”
모험가 길드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만약 내가 돈이 없고, 루비 등급이 아니었다면 이런 배려는 받지 못했겠지.
일단 실버 이하의 모험가는 면접을 보지도 않고 탈락시켰다. 모험가는 골드 등급부터가 진짜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여든 인원 중에 루비 등급은 없었고, 남은 것은 모두 골드 등급의 모험가들뿐이었다.
“저희 메드리의 여행자들 파티를 뽑아 주십시오. 저희는 벨바트 미궁의 최하층까지 가본 적 있습니다.”
벨바트 미궁의 최하층은 30층이다. 공략법도 알려져 있기에 준비만 철저하게 하면 골드 등급 파티원들 만으로도 내려갈 수 있다.
“파티 이름이 메드리의 여행자들…? 무슨 뜻입니까?”
“우리 다섯 명은 모두 메드리라는 산골 마을 출신입니다.”
난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모두 시커먼 남자들이었다. 내가 굳이 땀내 나는 남자 다섯 명이랑 같이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나?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네? 숫자가 너무 많다니요? 저희는 모두 3년 이상 벨바트 미궁을 공략해온 전문 모험가입니다! 저희만큼 안전하게 미궁을 공략할 수 있는 파티는 드뭅니다!”
“미궁을 안전하게 공략하기 위해 길잡이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는 되도록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길잡이를 원합니다. 3명 정도가 딱 적당하겠군요. 여러분 중에 2명은 뺄 수 있습니까?”
“그건….”
파티 리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인간관계는 민감했다. 사소한 것 하나만으로도 금이 갈 수 있는 게 인간관계다. 파티 리더의 입장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도 인간관계였다.
5명 중의 3명.
2명이 빠진다.
의뢰금을 빠진 2명을 포함해 나눠준다면 3명 쪽이 불만을 품을 것이다. 저것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의뢰금을 나눠 받는 거지? 라고.
반면에 빠진 2명에게 의뢰금을 나눠주지 않는다면, 파티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겠지.
내 눈에는 보였다. 파티원들이 벌써부터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결국 리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이번에 포기하겠습니다.”
“리더! 3,000만 네르라고!”
“몇 달 일하면 모을 수 있는 돈이야. 모험가는 돈만 봐선 안 돼.”
리더는 불만을 터트리는 파티원들을 다독이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 외에도 다른 모험가들을 면접했으나, 내 마음에 드는 모험가는 몇 없었다.
그녀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안녕하세요~”
“바인래드 자매입니다!”
일란성 쌍둥이 자매였다. 연갈색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 붉은 입술을 가진 20대 중반의 미녀들이다. 가벼운 래더 아머와 단검, 활을 착용한 것으로 보아 척후나 탐색을 전문으로 하는 레인저로 보였다.
각자의 이름은 헬리와 켈리. 그녀들은 자신들이 5년 전부터 이곳에서 생활했으며 벨바트 미궁의 모든 길을 꿰차고 있다고 어필했다.
헬리가 언니고 켈리가 동생 쪽이었다.
“던전의 모든 길을 알고 있다…? 과장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에게 있어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희에게도 중요한 일이에요. 3,000만 네르가 걸린 일인데 거짓말을 할리 없잖아요.”
“우린 전투력은 떨어져요. 하지만 길을 찾고, 함정을 제거하는 일에는 다른 모험가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자신해요.”
일란성 쌍둥이는 보지의 맛도 똑같을까.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길잡이는 미궁 내의 길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길잡이였다. 인원도 2명이면 적당하고 쌍둥이 미녀라는 희귀성까지 갖췄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합격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 뒤에 합격이라 말했다.
“헬리 씨. 켈리 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루비 등급의 모험가시잖아요.”
“편하게 해주세요. 그편이 더 편해요.”
모험가 사이에서 등급은 곧 계급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내일 낮 10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7시까지. 미궁을 경험할 생각이다. 몬스터를 사냥하기보다는 미궁 자체를 탐색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일주일 내내 그렇게 움직일 건가요?”
언니 쪽인 헬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4일은 상층과 중층을 살펴보는 것에 주력하고, 남은 3일은 던전에서 생활하며 하층을 살필 생각이다.”
“위험할 것 같은 일정이네요. 그래도 두 분 모두 루비 등급이시라죠? 두 분을 믿고 움직일게요.”
동생인 켈리는 다부지게 말했다. 언니보다 동생 쪽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우리는 약간 대화를 나눈 뒤에 헤어졌다.
그리고 직후 길드 직원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제임스 님. 바인래드 자매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평판이 영 좋지 않습니다.”
“평판이 좋지 않다? 무슨 이유로?”
“이전에 파티를 배신한 적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 쪽과 어울린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실력도 거짓이었나?”
“아닙니다. 실력은 골드 등급이 확실합니다. 길잡이로서도 일류입니다.”
“그럼 상관없다. 난 그녀들의 길 찾는 실력만 보고 뽑았으니까. 가자, 유라.”
“네.”
???
벨바트 미궁 안으로 들어왔다.
사방이 암석으로 가득하고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태어나고, 동시에 죽는 곳이다.
“솔직히 제임스 님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뭐하러 비싼 돈을 들여서 미궁을 경험하시려는지…. 혹시 이 미궁에 뭔가 있나요?”
헬리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남몰래 훑어봤다. B컵 가슴. 모험가답게 몸매는 탄탄하고 뛰어났다. 가죽 바지에 감싸인 엉덩이는 적당히 크고 탱탱해 보였다.
“미궁의 경험은 성장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험가다. 대륙에 있는 모든 미궁을 경험해보는 게 우리의 목적이다.”
“아무나 못 가지는 목적이네요. 그런데 유라 씨는 말이 없으시던데…. 두 분은 무슨 관계이신가요? 혹시 연인관계?”
“비슷하지.”
미궁 대부분이 그렇듯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진다.
그 외의 1층의 경우 고블린 보다 약한 몬스터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1층에 나오는 몬스터는 부유 슬라임. 이름 그대로 부유하는 슬라임에요. 핵만 제대로 노리면 쉽게 죽일 수 있는 몬스터죠.”
“1층의 구석구석까지 돌아보고 싶군. 혹시 숨겨진 공간 같은 게 있나?”
“1층에서 5층까지는 숨겨진 공간도, 함정도 없어요.”
“그래?”
우리는 4시간 만에 6층까지 내려갔다. 몬스터를 사냥하며 미궁을 공략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보니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6층의 어느 공간에서 유리아가 내게만 들리는 전음을 보냈다.
-…주인님. 찾았습니다. 천장에 있습니다.
헬리와 켈리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4M 높이의 둥근 돔형의 천장이었다. 그 옆쪽 벽에 낙서 같은 문장이 있었다.
‘첫 번째 문장이군.’
이 미궁에서 찾아야 하는 총 7개의 문장 중 하나.
‘찾기만 해선 안 돼. 활성화해야지.’
문장을 활성화하는 방법은 쉽다. 문장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하는 것.
“헬리. 켈리. 잠깐 할 말이 있다.”
내가 그녀들의 주의를 끄는 사이, 유리아가 마법을 사용해 천장으로 뛰어 문장을 활성화했다.
순조로운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