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9화 〉 53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3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목적에 어긋납니다.」
「실패했습니다.」
「Chapter 1. 첫 만남을 다시 시작합니다.」
“…….”
다시 돌아왔다.
분명 웬 놈의 얼굴에 뇌전권을 갈겼는데 낡은 침대 위로 다시 돌아왔다.
‘하, 일이 꼬이네. 원작의 카일은 죽거나 실패한 적이 없어서…. 죽거나 실패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러면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잖아.’
목적에 어긋납니다.
이 말의 뜻은 간단했다. 목적에 맞게 행동해라.
‘아니. 아직 확신하기엔 좀 이르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단 이 답답한 곳에서 나가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낡은 일자 복도가 펼쳐졌다. 창문을 통해 해가 서서히 하늘 위로 떠 오르고 있다.
성큼성큼 걸어 복도 끝의 건물 밖으로 나갔다. 지금 내 외형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은 집사들이 입는 검은색 정장이다. 손에는 장갑을 끼고, 목에는 타이를 했다. 옷은 구김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21호. 왜 잠옷 차림이지?”
가장 맨 앞에 서 있는 한 아이가 내게 물었다.
“신경 꺼라.”
“…….”
집사복을 입은 아이들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목적에 어긋납니다.」
「실패했습니다.」
「Chapter 1. 첫 만남을 다시 시작합니다.」
다시 낡은 침대 위로 귀환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복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목적에 어긋납니다.」
「실패했습니다.」
「Chapter 1. 첫 만남을 다시 시작합니다.」
‘탈출이 안 된다면….’
마주치는 사람을 죽였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게임처럼 누군가를 죽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거나.
그러나 내 희망은 사라졌다.
「목적에 어긋납니다.」
「실패했습니다.」
「Chapter 1. 첫 만남을 다시 시작합니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것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계속 제자리만 빙빙 돌 뿐이라는 것을.
‘……현실로 나가서 자동 진행이나 할까? 아니지. 아바타도 내 행동에 따라 탈출하려고 여러 시도를 할 뿐이야. 아직 자살은 안 해봤지만 해보나 마나겠지.’
후우.
한숨을 나왔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목적. 그러니까 챕터 1은….’
지금의 나는 필타니아 공작 가문의 사용인이다. 고아 출신으로 아직은 세뇌와 훈련을 받는 중인 예비 집사.
“그러니 내가 해야 하는 건….”
「열람자의 불성실한 태도와 무수히 많은 실패를 확인했습니다.」
「열람자의 수준을 10살 이하의 생초보자 수준으로 설정합니다.」
「어드바이스 : 옷장에서 집사복을 꺼내 입고 건물 밖으로 나가세요.」
“……쯧.”
메시지를 본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들지만 어드바이스는 앞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옷장을 열자 3개의 똑같은 집삭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갔다. 줄 맞춰 서 있는 어린 집사들의 뒤쪽에 가서 남들을 따라 부동자세를 취했다.
조용했다.
어린 집사들은 작은 속삭임도 없이 그저 가만히 정면만 쳐다봤다.
‘15명이군. 내가 마지막인가?’
잠시 후 손에 몽둥이를 든 날카로운 인상의 집사가 나왔다.
“간밤에 잠은 잘 잤나?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낼 거다. 하지만 너희들은 어제보다 오늘 더 발전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발전하지 못하면 처분당할 뿐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말도록.”
나는 이를 악물었다.
놈의 거들먹거리는 태도와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해야 집사 나부랭이가….’
하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서 놈의 죽빵을 갈기면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다.
「어드바이스 : 코판의 지시에 따르십시오.」
나의 빌어먹을 집사 생활의 시작이었다.
???
“필타니아의 집사는 모든 걸 할 수 있어야 한다. 달인 수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경력자 수준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 그게 설령 요리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코판의 지시에 따라 요리를 했다. 아침부터 수프와 스테이크를 만들라고 지랄해댔다.
요리에 대한 재능도 없는 나는 몇 번이나 실패했고, 실패할 때마다 낡은 침대 위로 돌아가야 했다. 대충 10번 정도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니 귀찮고 짜증나 죽을 것 같았다.
어쩌면 평생 이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느꼈다.
‘시발. 영 답이 없으면 자동 진행을 할 수밖에…. 아무리 내가 재능이 없더라도 아바타가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면 통과하겠지.’
그러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할 필요는 없었다. 요령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맛은 아무래도 좋고. 겉보기에 그럴싸하게만 만들면 되는군.’
가령 스테이크. 적당히 굽고, 대충 만든 소스를 스테이크에 뿌렸다. 겉보기에는 진짜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가 완성되었다.
코판은 내 스테이크를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21번. 훌륭하다. 전문 셰프라 해도 믿을 정도군.”
“감사합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코판이 먹은 스테이크의 소스에는 소금을 왕창 뿌렸다. 한 통을 통째로 넣었다. 보통이면 혀에 닿자마자 내뱉어야 정상이다.
‘요컨대 가라로 하면 된다. 속빈 강정이라도 상관없다는 거지.’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내가 만든 소스를 콕 찍었다. 그리고 입에 가져다 댔다.
“우에에엑! 퉷! 퉤퉤퉷!”
짠맛이 확 느껴졌다. 나는 혀를 내밀고 황급히 물을 찾았다. 물을 이용해 혓바닥을 씻었다.
“21번! 갑자기 무슨 짓이냐! 이 망할 자식! 추하군! 필타니아 가문의 집사가 보여선 안 될 행동이다! 당장 엎드려라!”
“너나 엎드려 이 새끼야!”
뇌전권을 놈의 턱주가리에 꽂았다.
끝내주는 어퍼컷이었다.
「목적에 어긋납니다.」
「실패했습니다.」
「Chapter 1. 첫 만남을 다시 시작합니다.」
???
요리 다음은 청소였다.
이건 편했다. 요리처럼 복잡하지도 않았고, 원체 깨끗한 곳이었기에 대충 청소하는 척만 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수업을 받았다. 역사, 수학, 언어.
역사와 수학에서 질문을 몇 번 받았는데 틀리자마자 실패처리가 되어 낡은 침대 위로 돌아갔다. 언어 같은 경우는 내게 익숙한 공용어로 번역되어 보이고 들렸기에 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또 필타니아 가문이 얼마나 훌륭한지, 고아 새끼인 우리를 받아주는 건 필타니아 가문밖에 없다는 등 세뇌 교육을 받았다.
그 이후에는 육체를 단련하고 검술을 배웠다. 암살 검술이었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상태였기에 웬만한 검술은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수고했다. 오늘 일정은 끝났다. 가서 개인 시간을 가지고 잠들도록.”
씻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혀를 찼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도중에 실패했을 때 현실로 돌아가서 몇 번 자동 진행을 했다. 아바타는 내가 성공한 곳까지 무리 없이 날 따라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도 지루한 걸 억지로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원작에선 스킵이 가능했는데… 설마 여기선 안 되나?’
「기록의 일부를 스킵 할 수 있습니다. 스킵 하시겠습니까?」
“오. 드디어 떴군. 당연히 스킵이지.”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킵 했습니다.」
「Chapter 1. 첫 만남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필타니아의 예비 집사들이 처음으로 필타니아 가문의 혈통들을 만나는 날입니다. 하지만 필타니아 가문의 사용인들의 주인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
「어드바이스 : 코판의 지시에 따르십시오.」
“그놈의 코판. 코나 파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긴 싫었기에 어드바이스의 조언을 따랐다.
오전에는 몸을 단정했다. 머리를 깎고, 손톱 정리를 하고, 새로이 주어진 깨끗한 집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따로 받은 넥타이에는 2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필타니아 성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내가 있던 곳은 성에서 제법 떨어진 별장 같은 느낌의 저택이었다.
마차 안에서 코판은 우리를 향해 몇 번이나 당부했다.
“너희들이 지금껏 받아온 교육을 떠올려라. 해야 할 언동과 갖춰야 할 자세를 지켜라. 한 번의 실수는 곧 처분이란 것을 잊지 마라.”
코판은 나를 비롯해 8명의 어린 집사에게 거듭 말했다. 그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우리가 실수 하면 그 불똥은 당연히 우리를 교육 한 코판에게 튈 수밖에 없다.
‘15명이 아니었나? 음. 7명은 처분당했군.’
처분은 곧 죽음이었다.
마차는 성에 도착했고, 예비 집사들은 코판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넓은 방 안에 들어갔다. 의자가 있었지만 앉지 못했다. 뒤에 벽을 등지고 가만히 서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제 곧 가주님과 가신님들이 오실 거다. 질문하지 마라, 자세를 유지해라, 질문을 받으면 말을 더듬지 마라, 눈을 아래로 내리깔아라.”
누가 코판 새끼의 입 좀 닥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덜컥.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이쪽으로 온다. 대충 3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10명은 기사와 사용인들이고 20명이 가주와 가신들이다. 가주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될 집사들의 얼굴이 보고 싶구나. 고개를 들어 보거라.”
기품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와 예비 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대충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얼굴도 몸매도 아름다웠다. 눈동자는 차가웠으나 지배자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필타니아 가문의 주인이자, 여공작.
등장만으로 코판 새끼의 입을 닥치게 만든 인물.
평소였다면 그녀를 보고 자빠뜨릴 생각에 흥분을 느꼈을 테지만, 내 시선은 필타니아 여공작의 뒤쪽에 향했다.
내 또래의 익숙한 얼굴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빛나는 듯한 청은발과 푸른색의 눈동자.
어려졌다고 해서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유리아 그레이스.
그녀는 여공작과 비슷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필타니아 공녀와 집사라는 이름을 듣고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집사라면 공녀는 유리아 밖에 없다는 것을.
‘뭐지.’
유리아라면 분명 내게 시선을 줄 거라 생각했다. 비록 분위기상 말을 걸지 못하더라도 시선만큼은 줄줄 알았다.
‘유리아의 신체 능력은 나 이상이고 전음을 보내면…. 잠깐, 원작의 카일도 이 에피소드를 시작했을 초반부에는 신체 능력이 본래 보다 떨어 졌었어. 본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내가 이상한 거라면?’
그리고 이 세계의 중심이 유리아가 아니라 나라면? 그 탓에 그녀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면?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더라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유리아!”
유리아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녀 주위에 있는 여공작과 가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가 설마 유리아의 이름을 부를지 몰랐다는 듯이 경악하고 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유리아였다.
“실망이군요. 여기 있는 예비 집사들은 가문의 자랑이 될 뛰어난 인재들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유리아!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나라고 네 주인! 유진이라고!”
“예의가 없는 것을 넘어 미친 것 같군요. 아직 정식 집사도 아닌 자가 저의 주인? 어머니는 정신병자를 인재라고 생각하나요?”
여공작은 굳어진 얼굴로 눈살을 찌푸린 채 날 노려봤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건 돌연변이고, 실패물이다. 21번이 가장 우수하다고 보고 받았다만, 그 보고가 가짜였군. 책임자와 함께 처분해라.”
여공작과 유리아가 몸을 돌리고 방을 떠났다.
가신들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이런 놈은 생전 처음 보는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아직 처분되지 않았단 건 인재라는 건 맞다는 뜻인데…. 갑자기 미쳐버린 건가? 아니면 원래 정신병이 있었나?”
가신들은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다가 떠났다.
높으신 분들이 모두 떠났지만, 기사들은 남았다.
즉결처형. 속전속결.
“21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아아아아아아! 너 때문에 내가! 내가 여기서!!!”
코판이 내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이 잡고 흔들며 절규했다. 책임자인 그는 나와 함께 처분될 것이다.
“…….”
우리의 앞으로 다가온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자비 없이 휘둘렀다.
나와 코판은 사이좋게 목이 달아났다.
「목적에 어긋납니다.」
「실패했습니다.」
「Chapter 1. 첫 만남을 다시 시작합니다.」